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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잘못했습니다"성경[수련회]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잘못했습니다"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주제: “잘못 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아 강의 (2013년 1월 십자가 마을 겨울 수련회 교재)

Ⅰ. 서론

신비는 없다. 무슨 신비를 품고 있는 듯 요란한 역사의 현장도 세월마저 떠나고 나면 빈 바람만 뒹군다. 하나님의 구원 작업은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잠시 써먹고는 은퇴시켜 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역사는 이와 다르다. 영웅과 그 업적으로 후손들이 배불리려 한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유대인 단체장인 다비드 벤구리온은 라디오를 통해서 국가설립선언서를 낭독했다. 1967년 이스라엘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대해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쥔다. 이는 미국의 복음주의 분파들에게는 묵시를 맞이하는 환희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들의 신약 성경 이해에 따르면 심판의 날이 오기 위한 9가지 선결 조건 중에 두 가지가 충족되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수복되어야 하고,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것이 되어야 하고, 제 3의 성전건축이 이루어져야 하고, 7년간의 시련, 그리고 그 후 성 미카엘이 올리브 산 위에 나타나야 하고, 성전 산에서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나야 하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유대인들의 개종 또는 파괴와 그 다음의 예수님 제 2강림과 그리고 천년왕국으로 종말 시나리오는 마감된다고 복음주의자들은 계산해 온 것이다. 앞에 나열된 조건 중에 두 개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이로서 심판 날의 시나리오를 비추어 볼 때 유대인들의 역할이 비극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속으로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역사 이해에는 누군가 내부적으로 선동하는 요소에 동조하는 분위기로 인하여 조성된 이미지이다. 현실을 실제로 경험한다는 것은 실은 자신도 모르게 선동에 이끌리고 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럴 때는 역사의 이면(裏面)을 까뒤집어야 한다. 신약의 십자가 복음과 연결되지 않는 다른 쪽으로 이끄는 그 원동력을 찾아내야 한다. 동일한 물질적 기반이라고 해서 같은 현실로 반영되지 않는 이유는 ‘진리’를 놓고 벌리는 투쟁성이 외곽까지 흘러넘치기 때문이다. 이 내부적 갈등의 증거물이 역사다. 따라서 성경을 역사로 읽되 그 역사성은 십자가로 고발되어야 한다.

예수님 앞에서 이 역사성은 치열하게 끝점으로 치닫게 된다. 마태복음 8:26에서 제자들은 갑작스런 풍랑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신다. 과연 바다와 물이 꾸짖음의 대상이 될까? 인간의 현실적 체험에서 보자. 바다는 물이 주성분이다. 물은 물 분자로 되어 있고 물 분자는 두 개의 수소원자와 한 개의 산소 원자로서 +와 -라는 전기 극성을 띠면서 공유결합 되어있는 물질이다. 그리고 물 분자와 물 분자 사이에는 수소결합으로 결속되어 있으며 이 에너지들이 모아져서 바다를 움직인다. 이 물질에다 대고 나무랄 것이 뭐가 있고 꾸짖을 일이 뭐가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이들 물질에게 먹힐까?

‘물질에 인격이 가미될 수 있다’는 발상은 억지 같다. 하지만 바람과 바다가 즉시 잔잔해졌다.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이 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즉 인간들이 상대할 수 있는 범위와 예수님이 상대하는 범위가 달랐던 것이고 이 범위 안에 인간의 역사를 이끌고 오면서 내부적인 투쟁성을 품고 있는 세력도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세력의 정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적이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욕구들이 요동하는 질서판을 만든다. 그 와중에 어느새 복음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멀어지고 잠복해 들어간다. 이 방해 공작과 그것을 노출하는 투쟁의 현장이 ‘말씀의 세계’다.

Ⅱ. 본론

1. 스룹바벨 시대 (B. C.536)

(1)스룹바벨(유다 초대 총독. 스 5:2/학 1:1)과 성전(聖殿)

‘바벨론의 씨앗’이란 의미의 스룹바벨은 다윗의 자손 브다야의 아들로서 유다 왕조의 18대 왕인 여호야김의 손자이며 예수님의 조상 중의 한 명이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는 모두 스룹바벨을 다윗 왕권의 이상형으로 보았다. 선지자 학개는 스룹바벨의 조부가 다윗의 인장 반지를 잃어버렸던 것을 들어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의 종 스룹바벨아, 너를 인장 반지처럼 만들리니”라고 했다(학 2:23/ 렘 22:24). 스가랴는 그를 ‘순’으로 예언하였다(슥 6:12). 그는 바사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포로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의 1차 귀환을 주도했고(4만 2,360명) -세스바살과 더불어(스 1:8)- 다리오 1세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자였다(학 1:1).

스룹바벨 성전은 BC 539년 바벨론을 굴복시킨 고레스 대왕(BC 559-530)의 조서로부터 시작된다. 스룹바벨 이전에 세스바살에게 왕은 성전건축을 부탁했다(스 5:16과 5:2과 연관 지을 볼 때). BC 536년 유대인들의 본토 귀환과 성전 건축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내려지자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도 하에(스 3:1-2) 예루살렘으로 귀국한 1차 귀환자들에 의해 세워진다.

성전 건축의 사역은 포로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몇 개월 뒤에 번제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을 처음으로 복원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복원된 제단에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와 상번제를 드렸으며 초막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를 지켰고 이러는 동안에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재료들을 예루살렘으로 이송하여 성전 건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를 끝낸 그들은 드디어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의 장엄한 찬송 속에 성전의 기초석을 놓았고 이로써 성전 건축의 힘들고도 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렇듯 기쁨과 즐거움 속에 시작된 성전 건축은 얼마 못가서 대적들의 방해로 말미암아 중단 되어야 했는데 그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성전 공사 동참 제의를 스룹바벨이 거절하자 페르시아 여러 관원들에게 뇌물을 줌으로 성전 건축을 중단시켰던 것이다. 14년 동안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이때 하나님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가 나타나 성전 건축의 재개를 호소하였는데 그들은 이방인의 방해에 의한 중단보다도 그러한 방해를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열심이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함으로 그들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BC 520년).

(2)에스라
‘여호와가 도우신다’는 뜻의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으로서 시드기야 왕 때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간 스라야의 아들이었다(스 7:1-5). 그는 바벨론에서 출생한 자였으나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서기관이었고(스 7:6), BC 458년 아닥사스다 7년에 약 1,750명가량의 남자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제 2차 포로귀환을 주도하였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중심 내용은 이방인과의 혼인에 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가 이방 여자와의 혼인이 성행하고 있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회개하자 모든 백성들도 회개하였으며 이미 치러진 결혼도 취소되었다. 그 후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의 명단이 작성되었고 만인 앞에 공개됨으로 그 문제를 종결지었다.

후에 느헤미야가 유대인 포로를 이끌고 3차 귀환을 실시하자(BC 445년) 느헤미야와 함께 또 한 번의 종교개혁을 단행하는데 이때는 초막절 절기에 율법을 낭독하였고(느 7:73-8:1 2) 전체가 함께 죄를 자백하는 총회의 날이 준수되었으며(느 8:13-9:37), 지도자들이 율법이 낭송되자 그 율법에 인을 쳤고(느 9:38-10:39), 이방 혼인을 반대하였으며, 안식년과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세를 내며, 성전에 나무와 합법적인 희생 제물 및 예물을 공급하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다.

(3)예수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예수아는 BC 586년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잡혀간 유대인들 중의 한 사람인 요사닥(여호사닥)의 아들로서(대상 6:15) 대제사장의 직책에 있던 자였다. 학개서와 스가랴서에서 ‘여호수아’로 불리는 예수아는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으로의 제 1차 귀환을 주도한 스룹바벨과 한 쌍의 이름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예루살렘 공동체에서의 그들의 종교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학개와 스가랴의 책망에 크게 자극받아 스룹바벨과 함께 한 때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
공사를 재개하여(BC 520년) 성전을 완성시키는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BC 516년).

2. 느헤미야 시대(BC 445년)

느헤미야는 바사의 수산성에 있는 아닥사스다 1세 궁전의 최고 요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파괴된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 수 있도록 왕으로부터 허락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이 일은 다른 무엇보다도 긴급을 요하는 일이었다. 특히 그 무렵 성 주민들은 이웃에 있는 사악한 무리들에게 큰 괴로움과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느 1:1-2:8).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즉시(BC 445년) 밤중 몰래 파괴된 성벽들을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 다음 그는 백성들에게 만일 성벽이 재건된다면 위험한 사태를 사전에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느 2:9-18). 이러한 계획은 즉시 이웃에 있는 악한 무리들, 특히 사마리아의 총독인 산발랏과 요단강 건너편 지역의 총독인 도비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느 2:10,19). 그들은 이 일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에 구애됨이 없이 공사를 시작하여 거의 두 달 만에 완공을 보았다(느 3장-4장). 이 때 백성들은 무력으로 공사를 중단시키겠다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온갖 방해 공작과 위협을 받아가면서 성벽 재건공사를 밀고 나가야만 했다(느 4:1). 언제나 그들의 한 손에는 흙손이, 다른 한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었다(느4:7-23). 산발랏과 도비야는 재건 공사가 완성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자 느헤미야를 오노 평지의 한 촌락으로 유인해 내어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 음모에 말려들지 않았다(느 6:1-9).

느헤미야는 공동체에 속한 일부 성원들이 경제적 문제로 크게 고통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이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들이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성벽 쌓는 일에만 전력을 다하였기 때문에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되었는가 하면, 몇 몇 유력한 자들은 가난한 형제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엄청난 이자를 갈취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채권자들에게 그 같은 일을 즉각 중단할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모든 상황을 완전히 개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느 5:1-13). 한편 공동체 안에 있는 일부 ‘귀인들’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기는커녕 스스로 외래적인 요소들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있었다(느 6:17-19).

성벽들이 수리되고 난 뒤, 느헤미야는 내부적인 문제로 눈을 돌렸다. 먼저 각 지역에서 백성의 10분의 1을 선별하여 예루살렘에 정착하게 하였다(느 7:1, 11:1). 7장에 있는 명단들은 이 선발자들 중에 여러 종족들이 뒤섞여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그 안에는 바사인, 엘람인, 모압인, 유다인 그리고 이전의 북왕국에 속했던 성읍들, 즉 여리고, 벧엘, 아이에서 온 사람들도 속해 있었다.

느헤미야는 12년 동안의 총독 일을 마치고 난 뒤 수산성으로 다시 돌아갔지만(BC 433년) 얼마 후 또 다시 예루살렘에 모습을 나타내었다. 아마도 그는 그곳에서 여전히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느 13장). 당시 유대인 남자들은 모압, 암몬, 아스돗 출신의 여자들과 결혼을 하였다.

한편 요단강 건너편 지역을 관할하였던 도비야(제사장 엘리아십의 친척)는 성전에 있는 방 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상업적인 목적? 느 13:4-9), 레위 자손과 성전에서 노래하는 자들은 충분한 급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농사일을 해야만 하였다.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도록 만들었다(느 13:10-14). 더욱이 안식일도 합당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느 13:15-22).

곧 느헤미야는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첫째, 앞으로는 더 이상 잡혼을 하지 말 것(느 10:30). 둘째, 안식일을 합당하게 지킬 것(느 10:31). 셋째, 성전 세금을 지불하고 희생 제물들을 준비할 것(느 10:32-34). 그리고 생산의 첫 열매를 십일조로 바쳐야 된다는 것이다(느 10:35-38).

BC 415년 느헤미야는 자취를 감춘다. 그는 총독으로 있는 12년 재임 기간 중에 당연히 받아야 할 ‘총독의 녹’을 받지 아니했으며(느 5:14), 도리어 그는 성곽 건축에 온 힘을 기울이면서도 그의 상에서 먹는 일군들의 모든 비용도 다 본인이 부담했다(느 5:18).

3.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 이후

BC 323년 알렉산더는 바벨론에서 요절한다. 그 즉시로 그의 주요 장군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으며, 그 후 20년 동안 알렉산더가 정복했던 땅은 여섯 후계자들의 전투로 유린되었다. 헬라 제국의 평화는 사라지고 파괴적인 전쟁만 남았다. 마침내 그 세기가 끝날 무렵 후계자들 가운데 둘이 나머지를 없애고, 알렉산더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알렉산더 장군들 가운데 가장 주도면밀했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BC 367-283년)는 이집트, 아프리카 해안, 팔레스타인, 시리아 남부를 차지했다. 알렉산더가 바벨론 총독으로 임명했던 셀레우코스Seleucos(BC 358?-281년)는 이란을 포함한 옛 페르시아 제국의 큰 부분을 지배했다. 그는 유지가 불가능했던 인도 영토를 포기하고 동쪽의 경계를 확정했다.

유대인들은 알렉산더보다는 이런 후계자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 이후로 예루살렘은 늘 벽지였다. 예루살렘은 모든 주요 교역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페트라나 가자에서 발을 멈춘 대상들은 원료가 없어 자체의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예루살렘에 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래 위에 위치한 후계자들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유다는 계속 이 군대 저 군대의 침입을 받았다. 이 침략군들은 소아시아(오늘날의 터키), 시리아, 이집트에서 짐, 장비, 가족, 노예를 이끌고 왔다.

예루살렘은 BC 320~301년 사이에 무려 여섯 번이나 지배자가 바뀌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은 그리스인을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존재로 경험했다. BC 301년 이집트의 왕인 프톨레마이오스 소테르(1세)가 유다, 사마리아, 페니키아를 비롯해서 해안 지역 전체를 장악했고, 그 이후 백 년 동안 예루살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 지역은 새로운 헬라식 문명을 품은 도시가 여럿 생겨났다. 고대 도시들도 헬레니즘 모델에 따른 도시로 변모되었다. 그리스 군인, 상인, 기업가는 이런 그리스 문화권에 정착하여 새로운 기회를 활용했다. 그리스어를 말하고 쓰는 법을 배운 지역민 또한 ‘헬레네스’(헬라사람)가 되어 군대와 행정부의 하위직에 진입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문명의 충돌이 생겨났다. 지역민 가운데 일부는 그리스 문화에 매력을 느꼈다. 보수적이었던 예루살렘에서는 두 분파가 생겨났다. 한 분파는 느헤미야를 몹시 괴롭혔던 토비아의 후손인 토비아드 씨족이었다. 그들은 그리스 세계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사상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이질적인 영향력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보고 방어적으로 옛 전통을 고수했다. 단호하게 오랜 율법과 관습을 유지하려 했던 사제 집안인 오니아드 씨족 주위에 몰려들었다.

BC 201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몰아내자 자신들의 메시아를 고대하며 독립할 희망을 품게 된다. BC 167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BC 175~163 재위)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 종교인 제우스 숭배를 강요하자 나이든 유대 성직자 마타시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마타시아스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마카베오가 반란군을 이끌었는데, 마카베오는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해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다. BC 163년 안티오코스 4세가 죽자 셀레우코스 왕국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했으나 마카베오는 종교의 자유 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를 위해 계속 싸우다 2년 뒤에 살해당했다.

4. 역사마저 돌려세우는 율법의 기능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자 하는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산다. 그런데 진리란 마냥 드러나기만을 기다린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에 의해서 드러난다. 창조의 일부로서 인간은 활동하면서도 인간 나름대로 성찰해서 그 성찰의 결과물로 진리를 뽑아내는 실천도 아울러 병행하고 있다. 자신의 성찰과 탐색하는 노고를 거치지 않는 것을 사람들은 진리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제대로 된 불신자(不信者)들이다.

하지만 진리는 이런 인간들의 역사 꾸려나가기를 비켜가면서 다른 역사관을 소개한다. 그 이유는, 결코 인간은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최종 종결 상태를 천국과 지옥으로 상정하지 않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는 창조 작업을 끝까지 꾸준히 밀어붙이시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서 거룩과 관련된 사건들이 돌발적으로 침입하듯이 일어난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에 관심 있는 자들이 난데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거룩이 성전을 건축하고 백성들을 율법에 종속시키는 것은 과거 심판성을 현재 심판성으로 적용하기 위함이다. “우리 왕들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조상들이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께서 그들에게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그 나라와 주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는데 곧 주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사 그것의 열매를 먹고 그것의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나이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왕들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그들이 우리의 몸과 가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느 9:34-38).”

즉 “성전을 건축하라”는 하나님의 진정한 취지는, “존재보다 율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옛 영광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도저히 납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조치다. 왜냐하면 현 자신의 존재가 부정적으로만 조상과 연계되어 있다는 역사관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만을 그리워하는 자들에게 있어 이 세상관은 어떻게 비취게 되는가? 그것은 ‘저주받아 깨어진 성전 마당’으로 보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의 총체라고 할 수 있는 성전의 범위를 전 인류사로 확대하시려고 하신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 성전 자체에 적용되는 거룩과 더러움을 가름하는 기준점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그 기준점을 언약 펼침을 통해서 역사로 말해진다. 곧 말씀화 된 역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영생의 창조 작업에 휘말린 자들은 ‘거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따라서 거룩을 확대하려는 하나님의 뜻과 생존 위주로 삶의 목적을 삼는 인간들의 의 충돌은 ‘공동체 구성’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여지는데 그것이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에 담긴 계시적 의미다. 곧 심판의 연속작업으로서 공동체이기에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룩에 준한 심판행위가 벌어진다.

성전마저 깨어지는 사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시는 하나님의 구성 원리이기도 하다. “그들이 그들의 원수와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경에 빠질 때에 내가 그들이 그들의 아들의 살, 딸의 살을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살을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렘 19:9/겔 5:10/왕하 6:28-29)” 생존 위주로 사는 것을 곧 우상숭배 차원에서 판결하신다. 아무리 하나의 공동체로 단결되어도 심판을 막아내는데는 소용없다.

Ⅲ 결 론

“초석은 나중에 놓인다.”

초석이 놓이기도 전에 거주하는 위층들을 먼저 건설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루시는 방식이다. 반면에 인간들은 투쟁과 경쟁을 통해 적절하다고 여겨진 것만 살아남아 다시 초석이 되고자 하고, 어쩔 수 없이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은 그 인물을 역사의 핵으로 옹립한다. 이로서 공동체는 영원히 우상이 된다.

에스라, 느헤미야를 기억하는 유대인들이 수상하다. 이들의 관심사는 유대교라는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의 중보자는 예수님이 아니시다. 신을 도용하여 모든 벽에다 신의 이름을 새기면서 도배질하는 본인들이다. 자진해서 지상의 역사와 하늘의 신을 중재하는 중보자적 기능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교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의 역사는 영원히 마감되지 않는다. 게임은 한없이 연장되기 때문인데 이 와중에 승자도 패배자로 사라진다. 누가 최후의 승자인지는 항상 보류되는 상황, 그래서 기어이 해답을 손에 쥘 수 없기에 더 서러운 곳이 이 세상이다.

이 모든 것이 떠난 그 뒷자리에는 십자가의 핏자국만 선명하다.

관리자(IP:203.♡.42.222)

13-05-12 09:18

2013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낯선 장소지만 다시 말씀으로 모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오늘밤이라도 본향인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에스라라는 이 책이 어느 수풀 속에 잡혀있는가? 역대상, 역대하 그 뒤에 있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아 끝나고 바로 시작되는 게 뭔가? 에스더 그 다음에 되고 욥기가 나오거든요.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전부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고 그 다음에 나오는 욥기는 어떤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 그렇게 배치가 돼있습니다.

역사라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해서 엑기스만 알고 역사 자체를 알맹이만 빼먹고 버리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생각할 겁니다. 역사란 지나간 과거 이야기기 때문에. 과거를 현재 사는 사람이 다시 경험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에스라가 됐든 어떤 역사가 됐든 성경은 역사라 하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계시라고 이야기합니다. 역사라고 할 때는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될 때는 되풀이가 돼요. 하나님의 원리가 되풀이가 됩니다. 지나간 역사는 없다는 거예요. 천 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 년처럼. 네 선에선 지나간 걸로 보이지만 나는 지나난 걸로 보지 않고 너희들에게 된 통으로 뒤집어씌우겠다고 나오시는 거죠.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 이런 것은 분명히 지나간 건데 우리가 어떻게 그 역사 속에 뛰어들 건가? 라고 생각할 겁니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원칙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면 우리가 구태여 과거 그때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겁니다. 실제로 에스라, 느헤미야로 우리가 돌아갈 방법도 없어요. 시간인데 어디로 갑니까? 장소 같으면 이스라엘 있지만 시간은 이미 흘러가버리면 추억이지 그때 그 상황이 만들어지지는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라면 제가 되풀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면 되풀이 될 때는 어떤 원칙으로 되풀이 되는가? 그것을 아시면 되는 겁니다. 에스라의 계시인데 역사란 형식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이 안에 있습니다. 역사란 이름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한다면 거기에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하는 이야기에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집니다.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나라 같지도 않는 나라] 나라긴 나라인데 나라 같지도 않는 나라. 이걸 같잖지도 않다고 이야기하죠. 참 웃기네. 이게 무슨 나라야 할 정도죠. 나라라고 이야기하면서 나라 같지 않는 나라 그러면서도 세상 모든 나라를 해석하는 그런 기능을 한다.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인데 이 나라가 기존의 모든 나라를 평가하고 심판의 권한을 가진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가 세웠던 나라입니다.

나라 같지도 않아요. 어떤 나라라고 이름 지을 수도 없는데 기존의 모든 나라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니들은 심판을 받아 봤어? 그래서 나라가 몽땅 망해본 적이 있어? 안 망했으면 말을 하지 마!” 그러면 기존의 나라가, “우리도 망했어. 이웃 나라한테 망했어.” 이쪽에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웃 나라한테 망한 것 말고 하나님한테 망한 폭삭 망해봤어? 안 망해봤으면 말하지 마.”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완전히 망했습니다. 망했다는 표현을 흩어졌다, 흩어진다는 식으로 표현한 거예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하는데 흩어져서 다 죽었어요. 나라 자체가 완전히 폭발해서 파편들이 다 튀었습니다. 튀어진 현장에서 이걸 다시 주워 모을 때 심판으로 튕겨나간 그 파편들을 무슨 수로 다시 모읍니까? 하나님의 심판으로 조각조각 나버렸는데 그걸 다시 모으려면 심판보다 더 센 위력으로 모아져야 심판을 극복하고 모아진 나라가 될 거란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된 통으로 얻어맞은 나라는 이스라엘 나라 외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깨어져도 자신의 힘으로 다시 모았어요. 사람의 힘으로 깨어졌기에 얼마든지 사람의 힘으로 다시 모아질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마을이 폭파가 됐을 때 다시 모은다면 그 폭파했던 그 힘을 능가하는 힘이 있어야 처음부터 하나님이 손대서 폭파시켰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슬슬 말이 또 어려워진다.

하나님이 모았을 때는 너희들을 깨뜨렸던 당사자가 다시 모으기 때문에 깨어질 때의 하나님이나 모으는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에 의해서 조성된 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나라 중에서 “내가 알아서 왔습니다. 내가 알아서 기어들어왔습니다.” 이런 소리 하게 되면 이것은 다른 나라를 심판하는 권한이 없어요. 그런데 그 정도는 다른 나라도 충분히 해내요. 이것은 다른 나라를 평가하고 다른 나라를 심판하려면 다른 나라 구성에 대해서 흉내도 못내는 요소가 그들에게 있어야 돼요.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9장에 보면, 너희는 거룩한 백성이라 하는데 하늘나라가 너희 것이다. 거기에 보면 뉘앙스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거든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내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다는 여기서 완전히 삭제가 돼야 됩니다.

예를 들어서 혼인잔치에 갔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모여 있더란 말이죠. 주최 측에서 “여러분들 여기 왜 오셨지요?” “임금님 아들 잔치하는데 와 봐야지요.” 이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그저 길거리에서 놀고 있는데 그냥 오라고 했잖아요.” 그냥 막 부른 거예요. 그냥 막 불러서 왔기에 내가 여기 왜 있느냐는 것은, 내가 이유를 댈 수가 없고 부르신 분이 이유를 나한테 뒤집어씌워야 됩니다. 그런 고백만 할 뿐이에요. 그게 아들이 혼인잔치에요. 그게 하늘나라의 구성요건입니다.

방금 이야기한 것은 바로 신약시대 이야기에요. 지금 우리는 신약시대에 막 진입하려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이스라엘 요소와 신약에 방금 이야기한 혼인잔치, 막 불렀다는 요소, 중간에 과도기적으로 이스라엘 요소와 이쪽 요소가 같이 융합, 포함돼있겠지요. 이 점에서 에스라, 느헤미야를 파악할 수 있는 준비단계가 서서히 갖춰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이 망해야 중간과정이 되고 신약으로 가는데 이스라엘이 안 망하고 하늘나라 만들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고요.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땅은 솔로몬과 다윗의 영토가 아니지요. 심지어 예루살렘이란 지역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그 다음에 이슬람 세 파트 또 한 파트는 그리스 정교회에서 차지해요. 예루살렘이란 옛날 다윗의 수도가 넷으로 구역이 나누어졌습니다. 1920년대 상하이가 프랑스령, 영국령, 일본령 등으로 나누었듯이 각각 자기 자치구역이 따로 있었잖아요.

그처럼 예루살렘도 현재 그렇게 돼있어요. 소유권 등기가 복잡하게 돼있습니다. 워낙 많은 나라가 예루살렘을 탐을 내서 자기 종교적인 본토로 삼는다고 전쟁을 하다보니까 역사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긴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십자군운동 때는 모조리 15만 명 죽여 버리고 유럽의 귀족들이 차지했다가 나중에 이슬람이 덮쳐서 그들이 차지했다가 이래 당하고 저래 당하고 복잡해요.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다는 것은 현재 이스라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계열이 두 개 나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으니까 우리도 주변 나라들처럼 나라 만들자고 해서 하나님이 심판했지만 인간적으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자는 쪽의 노선이 하나 있습니다. 이걸 A라는 노선이라면, 다시 옛날 이스라엘을 회복하자. 예레미야가 70년 만에 돌아와서 나라 세운다고 하니까 우리는 믿고 옛날 영화를 회복하자.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다윗이 감람산에 재림해서 다윗 왕 같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가 와서 나라 세운다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고 보수적인 미국에 있는 부흥 운동하는 세대주의나 오순절 계통은 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거기서 노벨평화상도 나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이스라엘에서 나오는 것은 기존의 나라와 같이 이스라엘을 만들자는 쪽이 있고 에스라, 느헤미야는 나라 같지 않은 나라죠. 이것은 기존의 나라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나라인지 아주 애매모호해요. 그런 노선으로 가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걸 B노선이라면 A라는 노선 사이에 분명히 서로 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 있는데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가 아니라고 죽였던 사람은 기존에 자기들이 생각한 그 나라에 비해서 절대로 예수님은 메시아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주장하는 나라는 우리가 기대했던 그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B노선, 예수님 노선이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B라는 노선에 속하려면 천국을 기다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망했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릴 그런 자격도 없다는 걸 분명히 확실하게 알아야 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때 멸망시킨 그 취지가 뭐냐? 자기 나라인데 자기가 쳐버려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 원리는 이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계속 이어져나갈 건데요.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자기가 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마 그 당시 사람들이 뭔가 하나님을 잘못 믿었겠지. 지금도 교회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들이 뭔가 잘못이 있어서 쳤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닙니다. 신명기 끝에 보면 원래 망하는 나라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어요. 망하라고 만들어놓은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교회 왜 만들었는지 압니까? 망하라고 교회 만들었어요. 제대로 망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뚜렷하게 확실하게 보고 있고, 아직도 교회가 안 망한 쪽은 아직도 교회에 미련 갖고 있고. 그저 새해에 저주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은 창세기 2장의 선악과 따먹은 인간으로서는 그동안 버티고 온 것도 다행이다. “진작 망해야지.”라는 식으로 이스라엘 망할 때 바탕을 창세기까지 다 바닥을 연결시켜서 이스라엘 망한 걸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망한 이유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 망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다시 규합되기 때문에 안 거예요. 다시 아까 이야기할게요. 하나님께서 망하게 한 이유를 안 사람만이 되돌아온 사람이에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비유를 탕자란 비유로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본인이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아버지 집과 본인과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 돈이 있으니까. 내가 받을 유산을 미리 당겼으니까. 이제는 아버지는 별 볼일 없어요. 아버지란 존재는 나한테 돈을 남기는 한에서 아버지인데 돈이 나한테 있으니까 아버지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돈을 다 썼다. 그건 아버지를 다 쓴 거예요. 돈을 다 썼다는 것은 아버지 주신 유산을 다 쓴 거고 동시에 아버지마저 다 써버렸어요. 이제는 아버지도 없고 달랑 자기만 남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탕자가 집에 갈 때는 아들의 자격으로 가지 않습니다. 혹시 아르바이트 자리나 있을까 싶어서 갔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내 쪽에서는 아버지가 없는 존재인데 아버지는 아들이 어디 멀리 가더라도 계속해서 있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원받고 싶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창세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돼있기 때문에 구원에 필요한 요건들을 자꾸만 충족시켜주고 리필해주는 겁니다. 리필이란 말이 적당하네. 죄 용서받았는데 또 죄 지면 거기다 죄 용서를 또 리필해주고. 그걸 사자성어로 무한리필이라 해요. 그것은 우리가 착하니까 용서받는 게 아니고 우리라는 이 자리가 이미 주님에 의해서 할당된 자리고 그 자리에 총책임자가 우리가 아닙니다. 나의 구원의 책임자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구원을 위해서 내가 뭔가 애쓴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을 못 한 거예요.

박근혜 인수위원회가 만약에 위원 중에 하나가 법무부에 상주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지금은 이명박 정부이지만 좀 있으면 박근혜 정부로 바뀌기 때문에 인수하기 위해서 미리 가 있잖아요. 우리 안이 성전이 된 이유는 우리 안에 인수위원회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인수위원회는 성령이에요. 박근혜 영이에요. 성령이 보증으로서 인을 친다고 고린도후서 2장에 나오지요. 보증으로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내 인생을 내 소유로 등기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절차를 거쳐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건질 때 족집게로 건지는 것이 아니고 무슨 정보를 깔아두고 그 정보에 준해서 우리를 구원하는데 그 정보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마저 심판받았다면 너도 그 심판 경험에 동참하지 아니하면 아들의 나라에 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안 들어오는 이유는 자꾸 내 쪽에서 죽고 난 뒤에 더 좋은 나라에 가려는 그런 시도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아침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천국은 위락시설이 있는 곳이 아니에요. 노인 복지시설 갖춘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시설 갖춰놓은 곳이 아니에요. 화장실이 필요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천국에 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선악과나무가 없어요. 악한 것이 없어요. 해와 달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우리 때문에 필요 없는 줄 알아요? 예수님 때문에 그게 철거된 거예요.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오해하기를 그저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자기 때문에 그게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뭔데 우리를 위해서 그런 시설을 마련합니까? 정말 천국이 우리를 위한 곳이라고 거기에 반드시 당구장 있어야 돼요. 안양에 계시는 윤덕규 집사님은 나이 67세인데 지난 목요일에도 아침 10시에 가서 오후 4시까지 치고 왔답니다. 당구 없었으면 어떻게 했는지 몰라. 복지시설에서 치신답니다. 한 당구 하시는 모양이에요.

당구를 만약에 신봉한다면 천국에 가도 지옥 가고 싶어 환장합니다. 도저히 살고 싶어도 못 살아요. 심심해서. 스마트폰이 있습니까, 개콘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즐길 게 없는데. 심심해서 한 번은 생명나무에 헤엄치다가 선탠하다가 과실 따먹어봐야 맨 그 맛이고 식상해서 맛도 없고. 주님께 면류관 던지는 것은 순번제로 해서 조짜서 하는 게 천국입니까? 차라리 지옥 가서 하나님 원망하는 재미로 하나님 헐뜯는 재미로 사는 게 훨씬 편해요. 요새 복지시설 다 돼있습니다. 저래서 천국 어떻게 가려는지 몰라. 그렇게 재미있어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멸망한 것은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한 겁니다. 탕자가 될 때 믿음 생기는 게 아니에요. 탕자는 탕자일 뿐이지 탕자라고 믿음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믿음이 없었던 거예요. 제가 인간이 믿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누구를 믿는다고 보통 이야기하죠. 나는 너를 믿는다 할 때 반드시 전제되는 조건이 하나 있어요.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가 반드시 전제돼있어야 돼요. 이걸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이라 하거든요. 너는 나이든지, 너 아니든지 나는 나 아니든지 너 이든지 둘 중에 하나다. 이걸 배중률이라 해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동일률이 있는데 나는 항상 나다. 일반 사람이 들어보면 이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은 말이에요. 그래? 그렇지. 그래서? 어쩌라고? 결국 남는 건 그거거든요.

나는 나다. 반대해? 반대 안 해. 그럼 오케이. 나는 나이든지 나는 내가 아닌 것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다. 나는 내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이건 아무것도 아닌 상식의 문제기 때문에 이걸 철학이라고 따지는 철학자가 웃긴다고 생각하겠지요.

문제는 여기서 간단하게 풀리는 게 아니에요. 나는 너를 믿는다 할 때 반드시 조건이 동일률, 배중률, 모순율에 의해서 나는 너와 같지 않을 경우에만 믿는다가 성립해요. 그렇다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나고, 예수는 예수고, 나는 예수가 아니고 예수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믿는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다, 무엇을 믿는다는 리스트 가운데 나를 집어넣어보자. 나는 나를 믿는다. 이게 반칙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믿는다 할 때는 반드시 내가 아닐 경우에만 믿는다는 말을 쓰는데 나는 나잖아요. 그럼 나는 난데 내가 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결국 나는 나를 믿는다는 말이 쓸데없는 소리 한 거예요.

왜 그 소리를 나 보고 이야기하고 남 보고 이야기하는가? 뭐가 그렇게 결핍을 느껴서 무엇이 미흡해서 뭐가 불안해서 무엇이 걱정이 되어서 나는 나를 믿는다. You raise me up해서 나는 믿는다. 나는 할 수 있다. 너, 왜 그래? 왜 쓸데없는 소리하는 거야. 왜 다짐에 다짐을 하느냐 말이죠. 왜 그런 소리 하는데?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학교를 믿는다. 교회를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 이 믿음이란 내용이 나를 믿을 때 믿음 내용이 아니에요. 같은 믿음이란 용어를 쓰지만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럼 같은 게 아니라면 나는 나를 믿는다는 이 말을 기준으로 봅시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것이 원래 본심이에요. 중요한 대목이니까 잘 들어보세요. 나는 나를 믿는다. 이것은 변치 않는 말하나 안 하나 당연한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 빼놓다 나머지는 다 거짓말이 되는 거예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거짓말인 이유가, 실은 예수를 믿고 있는 나를 믿는다는 뜻이에요. 어디서 거짓말이에요. 믿음도 없으면서. 교인들이 전부다 그래요. 피에로는 웃고 있지만 전부다 가면무도회에요.

두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반갑습니다. 우리는 의견이 일치됐습니다. 니 마음대로 의견이 일치돼. A라는 인간이 B한테 이야기한 것은 전부 자기한테 이야기한 거예요. B도 자기에게 이야기했죠. 둘이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니까 “이번에 의견이 잘 됐죠. 우린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저희끼리 계약하고 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약속을 주신 것은 어느 인간도 약속을 믿지를 못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치면서 이게 믿음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심판하면서 “믿음 보고 싶지? 이게 믿음이야.”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을 죽여 버려요.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이 너희 자신을 죽일 수 있니?” 다른 말로 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느냐? 택도 없는 소리에요.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나는 나를 잊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나를 잊었을까, 안 잊었을까 판단하려면 내가 설정돼야 되고 설정되어서 “맞아. 나는 잊은 상태야. 아니야. 덜 잊었어.” 그걸 판정해야 될 나를 또 하나 새로 만들게 돼요.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애초부터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어요. 볼을 잡아당긴다고 떨어지지는 않잖아요. 잡아당기고 놓으면 다시 원래 자리에 붙어있지요. 목사님이 와서 “믿으세요.” 하고 볼을 당기지만 놓으면 도로 붙어버려요.

그러니 이 사실을 부모들이 아셔야 될 것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너는 예수를 믿어야 돼.” “걱정하지 마. 믿고 있어. 엄마, 아빠 걱정하지 마. 나는 엄마, 아빠 모습대로 예수 잘 믿고 있는 거야.” 성경에 나오는 말씀대로 “주여, 저들이 하는 말을 저희들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나이다.” 우리 여기서 정리합시다. 믿음은 없는 겁니다. 애매한 것 정리했습니다. 전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믿을 뿐이지 어떤 인간도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믿음은 없는 거예요. 믿는다는 말은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하나의 가면이에요. 어디 가려면 마스크 쓰잖아요. 어떤 사람은 두 개 쓴 사람, 세 개 쓴 사람 있는데 그것은 누구나 세상 살다보면 서너 개 달라붙어요. 어린애는 얇지만 어른 되면 두꺼워서 어느 가면을 써야 될지 이 자리에서 어떤 가면을 바꿔 써야 될지 나중에 그것도 헷갈리게 돼요.

에스라, 느헤미야는 나라는 나라인데 나라 같지 않아요. 왜냐하면 여기에 왕이 없어요. 왕이 없어도 제사장은 있을 게 아닌가? 있지요.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아, 그 제사장.”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이미 이스라엘 망할 때 왕도 망했고, 제사장도 망했고, 선지자도 다 망했어요.

그러면 여기에 말하는 나오는 주제가 뭐냐? 총독입니다. 교재 봅시다.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 사람들 등장하죠. 총독이이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총독이 맞습니다. 총독의 기능은, 총독은 파견이 되거든요. 파견자가 갑이고 총독은 을이란 말이죠. 분명히 파견한 사람이 있는데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오는 스룹바벨이란 총독으로서의 일은 지시자가 숨겨져 있어요. 어디에, 어느 장소에, 어느 동네에? 미래에 숨겨져 있어요.

그렇다면 바사 왕, 페르시아죠.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BC539에 고레스가 파견했으니까 스룹바벨보다 더 높은 사람이 맞잖아. 그리고 총독이니까 결국 아무리 에스라, 느헤미야가 나라를 만들어도 바사나라, 세상적으로 페르시아 나라의 일개 조공을 바쳐야 될 속령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데 뜸 들이지 않고 미리 말씀드리면, 이것은 율법이 파견한 총독이라고 보시면 돼요. 율법을 지켜야 될 이스라엘은 망해도 율법은 살아있네.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한테는 안식일과 십일조는 어떻게 되는가? 여전히 안식일, 십일조는 살아있어요. 어느 누구도 아무리 복음 안에 있어도 안식일, 십일조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를 무슨 수로 지킵니까? 안식일을 무슨 수로 지킵니까? 십일조, 안식일 이런 것은 우리로 죄를 더욱 죄 되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십일조, 안식일이 언제 유효하냐 하면, 언제 필요하냐 하면, 십일조,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는 가짜를 색출해서 지옥으로 보내기 위해서 그럴 경우에만 율법으로서 기능이 필요한 거예요. 아예 못 지킨다고 하면 될 건데 지킬 수 있다고 나온다면 가짜 뽑아내는 거예요.

율법의 나라입니다. 율법의 나라가 에스라, 느헤미야가 생각했던 숨겨진 나라입니다. 그 지도자 스룹바벨 총독이라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페르시아, 바사나라의 고레스에게 속해져있어요. 제가 진도 빨리 나갈 수 있지만 이런 대목에서는 여러분들이 취약성이 있어서 천천히 하겠습니다.

현재 이탈리아가 여기 있고 시실리 섬, 크레타 섬 있고, 그리스, 마케도니아, 아가야. 이쪽으로 터기, 지중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이 갈라져 나오고 강 사이를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페르시아 만, 현재 이란이 되겠죠. 카스피 해, 흑해 있고. 그 다음에 이쪽에 홍해와 페르시아 만 사이가 아라비아 반도거든요. 앗수르란 나라에 수사가 수도인데 니느웨란 상업적 도시가 있어요. 미국으로 하면 뉴욕이고, 수사는 정치적 수도 워싱턴이고. 이쪽에 있는 앗수르가 이란부터 터키까지 접수를 했습니다. 앗수르가 BC609에 망하는데 이 시대를 철기시대라 합니다. 그전은 청동기시대고.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데 페니키아라 하는 베니게 나라가 있는데 해적들이에요. 그 다음에 청동기시대는 망하고 철기시대로 들어가는데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구분이 무슨 의미냐 하면, 보통나라는 자기가 과수원하면 과실 먹으면 돼요. 그런데 싸움이 일어났다. 사과 던지고 싸웁니까? 그러면 보리 많이 키우면 보리집단 던지며 싸우겠네요. 청동기고 철기고 하는 그 기준은 역시 남의 것을 약탈하는데 있어서 사용되는 무기의 재질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겁니다. 어설프게 구리와 주석 섞어서 나의 칼을 받으라고 하는데 여기에 강철 검을 만들어서 싸우면 게임이 안 되잖아요.

금속과 기술의 발달은 광산을 누가 확보하느냐에 있고, 광산을 확보해도 광물을 캐내는 노예를 확보해야 되고 그 다음에 그 광물을 본국으로 이동할 때 상인들을 보호해야 될 호위병들을 누가 장려하느냐에 따라서 국가가 커지는 겁니다. 몸집이 커진다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불로소득이라고 보면 돼요. 노동은 네가 해라. 차지하기는 우리가 하겠다.

이런 나라에서 이스라엘 나라가 있습니다.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고, 남쪽은 앗수르가 609년에 망하고 난 뒤에 최종적으로 586년에 유다가 망해요. 망한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청동기도 상관없고, 철기도 상관없고 이방나라 동네에서 하는 노는 이야기지 이스라엘은 꾸준하게 여호와만 섬기면 여호와가 책임지는 이유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적과 맞닥뜨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속에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 나라와 싸우게 돼있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 군대가 히브리인들을 상대해서 총 쏘고, 활 쏘고 했습니까? 출애굽기에 보세요. 그들이 홍해에 빠져 죽은 것은 그들 눈에는 히브리인들을 좇아간다고 했지만 사실은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이름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굽은 여호와 이름을 적으로 상대했던 애굽의 병사에요.

그래서 우리 생각은 이렇습니다. 자기 백성을 그냥 홍해에서 건져왔잖아요. 그러면 손 털면 그만이어요. “내 백성 건졌지. 너희는 못 따라오지. 약 오르지. 집에 돌아가.” 이러면 될 문제인데 그것은 히브리인들 입장이에요. “큰일 날 뻔했다. 바닷물이. 안 그랬으면 다 죽을 뻔했어.” 하고 그냥 가면 될 텐데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있음을 드러내는데 우리를 데리고 활용할 뿐이었어요.

따라온 그들을 홍해에 몰살하게 된 것은 히브리인들을 건드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히브리인들과 함께 있는 누구와 함께 있는 게 중요하다. 함께 있는 여호와 이름을 건드리면 너희는 죽는다는 뜻이에요. 성경에 모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 위해서 주님 있는 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실 경우도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는 경우도 우리 자존심을 위해서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건 마귀들이 제공한 거고. 진짜 일은 내가 나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케 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차별화시킬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은혜를 주기 위해서 항상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절대로 예측 못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내가 하나님을 스스로 가로막는 일이 없도록 사전 작업에 들어갔어요. 그걸 기도라 하고 그 기도의 핵심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뭐죠? “그 이름이 영화롭게 하옵소서.”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방인 기도는 항상 자기 쪽으로 회수하는 쪽으로 저것 주옵소서. 이것 주옵소서. 반복해서. 그럴 때 주님께서 너한테 뭐가 있어야 되는지 미리 안다.

그러니까 그따위 기도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 기도하라는 게 주의 뜻인데 그 기도를 하라니까 우리교회고 십자가마을이고 아무도 기도를 안 해. 참 재미나는 현상이에요. “목사님, 기도할 게 없습니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왔다, 나는 나를 믿는다는 식인가요?

이스라엘 나라가 586년에 멸망당한 것은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어요. 이 나라한테 멸망당한 것이 아니고 애굽 나라가 누굴 공격하다가 홍해 빠져 죽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공격하다 빠져 죽었어요. 이스라엘이 애굽 나라 짝이 난 거예요. 자기가 모신 하나님을 자기가 믿지 못해서 공격한 겁니다. 왜 믿지 못했느냐 하면, 주변 나라는 너무너무 잘 살아요. 심지어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해요. 그 선악과 따먹은 자질이 어디 갑니까? 실력이. 하도 없이 사니까 꾹 참고 살 뿐이지요.

전에도 강의했잖아요. 촌에서 살 때 텃밭에 시금치나 먹고 살지. 하던 사람이 유산을 많이 받아서 촌에 안 살고, 광주에 안 살고, 부산 안 살고. 사모님도 만약에 강남에 산다면 완전히 하루아침에 강남스타일로 바뀝니다. 놀 때는 머리 풀고 노는 여자 다 돼버려요. 갈 때까지 가볼까요? 강남스타일은 정해 논 게 아니에요. 누구나 강남에 살면 마음속으로라도 강남스타일 되게 돼있어요. 가락교회에 나오시는 윤덕규 집사님은 송파구에 살다가 지금은 완전히 안양스타일이 돼버렸어. 사람은 그 사람이 사는 동네에 따라서 스타일이 거기에 융화되기 마련입니다.

나라는 것은, 내가 소속돼있는 환경이 무엇을 말해주느냐는 거예요. 이게 앗수르 나라입니다. 너무너무 잘 살아요. 얼마나 잘 살았으면 아하스 왕은 종교까지 앗수르 종교로 바꾸었습니다. 왕이 종교를 바꾼다는 말은, 왕의 임무는 백성들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임무잖아요. 왕이 종교를 바꿨다는 말은 사실은 백성들이 은근히 왕에게 그걸 요청하고 있었고 이미 분위기 상 안 바꾸면 자기가 정권 테러당할 입장에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멸망당할 때는 왕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온 백성이 함께 당하는 것은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형성된 겁니다. 그 속에서 선지자들이 얼마나 노고가 많았겠습니까. 전혀 사람들이 선지자의 말을 이해를 못하죠. 선지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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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4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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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