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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 5월5일 봄 특강 - 언약성경[신학]

2012 5월5일 봄 특강 - 언약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관리자(IP:203.♡.42.222)

13-05-12 08:32

20120505 특강 - 언약a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주제가 [언약]입니다. 성경에 언약이라는 말이 별로 많이 안 나오죠. 신약에 보면 예수님이라 돼있고, 구약에는 여호와라 돼있죠. 언약이란 인간하고는 상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언약, 하나님과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물탱크에서 물방울이 노아한테 떨어지면 노아언약, 아브라함에게 떨어지면 아브라함언약, 모세한테 떨어지면 모세언약, 다윗에게 떨어지면 다윗언약. 예수님께서 고무줄로 연결시키면서 지상에 내려오게 되면, 언약의 고무줄이 그대로 이어져오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가능한 거예요.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동류의 사람인줄 알고 상당히 무시했죠. 눈 감기고 뺨때리고, “우리가 가운데 누가 때렸는지 알아맞히어 봐.” 하는 식으로 예수님을 하잖게 다루었죠. 그런데 예수님 등 뒤에는 하나님과 언약으로 연결돼있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예수님의 언약적으로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것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내 피와 내 살로 새 언약을 이루었다고 돼버리면 전에 물방울처럼 떨어졌던 모든 것이 새 언약 속에 다 포함이 돼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예고편이죠.

예고편만 봐서는 흐름이 잘 안 되잖아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본 사람이 티비에서 예고편을 보게 되면 저 장면에서 이 장면으로 옮겨가고, 이렇게 연결되고, 저렇게 끝나고. 그리고 예고편은 결말을 이야기 안 해줘요. 그러나 본 사람은 다 아는 거예요. 저 문 뒤에 귀신 나타난다고 미리 알려줘서 보는 사람 재미하나도 없도록 만들고. 예수님께서는 미리 아시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낯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해왔던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를 해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게 아주 우스워요. 마치 이해가 되는 양 그렇게 꾹 참고 “믿습니다.”를 남발하기 시작한 거예요. 정작 예수님 이야기는 이해가 안 되는데. 심지어 열두 제자들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 삼년 동안 교육 받으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이해한다고 했는데 예수님도 칭찬해줬기 때문에 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잡힐 때는 나는 저 사람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저주했잖아요. 그러니까 몰랐던 거예요.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르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뭐냐 하면, 예수님 가신 곳에 제 목숨 버리고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아서라 말아라. 너는 지금 너무 일방적으로 나를 생각한다.” 순교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아무리 교회 봉사해도 순교할 지경까지는 아니죠. 그런데 순교해도 안 된다면 처음부터 안 되는 이야기였단 말이죠. 상황이. 인간 쪽에서 뭘 해도 안 돼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있어서 예수님만 알고, 성령께서는 다루시니까 물론 아시겠죠. 다른 인간들은 배제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언약이다.

그래서 언약이란 인간에게 철저하게 숨겨진 것이다. 언약이란 인간이 아무리 지상에서 교회에서 노력하고, 전도하고, 봉사해도 그것은 언약을 모르게 돼있다는 사실을 언약을 알게 돼있는 사람만 고대하게 돼있어요.

언약을 주님께서는 아시고 우리는 모른다는 말은, 엊그제 가락교회에서 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구원에 대해서 네가 관여하지 마라.” 이게 복음입니다. 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관여하지 마라. 걱정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걱정 안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걱정한다는 자체가 안 되는 일에 대해서 주제넘게 개입한 셈이 되죠.

예를 들면 터널작업을 하는데 또는 쇼핑센터 공사할 때 그 공사현장에 직원들도 있지만 낮에 가보면 할 일 없는 노인들 구경하고 있습니다. 어디 불나면 구경꾼들 모이듯이. 교통사고 나면 처리반 나오면 나이 칠십 넘은 사람들 하도 할 일 없으니까 구경하잖아요. 그래서 교통순경이 뭐하면 잔소리한다고. 그러면 “할아버지는 관여하지 마세요.” 하잖아요.

천국, 구원, 성령, 하나님의 모든 일은 주님이 혼자서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구원에 대해서 관여하면 안 돼요. 이게 왜 자꾸 관여하느냐 하면, 구원이 내 일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내가 설치지 않으면 내 구원은 누가 보장해줄 것인가?”라고 지가 일방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구원에 대해서 내가 관여하고 신경 쓴다고 해서 구원이 더 빨리 되고 잘 되고, 구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손대고, 안 대고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가만있어도 구원되고, 혼자 있어도 구원 안 되고. 그것은 이미 우리 권한을 벗어난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그 말 믿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구원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 그렇게 묻잖아요. 처음부터 안 될 사람이에요. 처음부터 안 될 놈은 안 돼. 괜히 안 될 이야기를 신경 쓰고 된다고 착각하고 쓸데없는 걱정에 교회에 돈만 날린 거예요. 구원되는 줄 알고. 십일조 내고 백날 해도 안 되는 일을. 그게 바로 언약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언약을 아는 사람은 내가 관여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을 담당하는 전담, 담당 전문가가 이 땅에 내려왔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염려와 불안감 속에 말려들면서 살아왔구나.” 오늘 죽어도 천국 가는데 천국 못 갈까 싶어서 얼마나 안달내고 얼마나 조마조마했어요. 마귀한데 완전히 놀림감 된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우리에게 흉내 내라고 한 일이 아니고 흉내 내지도 말라고 하신 일이 예수님 일입니다. 십자가 졌다고 십자가 지고. 그런 식으로 흉내 내지 말란 말이에요. 교회 일이란 모방과 흉내 내기로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언약을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이 하는 일에 내가 어떻게 말려드는가? 그것을 우리는 그냥 증거할 뿐입니다.

대구에 수성 못이 있는데 옛날부터 유원지였습니다. 여기에 보트가 유명하거든요. 보트를 타는데 가운데 만약에 돌이 빠진다든지, 여기 뭔가 풍덩 빠져버리면 그 중심에서 일어난 여파로 인하여 변두리에서 보트 타던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자꾸만 흔들거리고 진동이 일어나죠. 이 진동을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열매라 하는 겁니다.

성령의 열매가 내가 중심해서 나한테 작용해서 종교적인 행동을 가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중심지는 따로 있어요. 예수님에게 벌어진 일의 여파가 내 쪽에서 요동과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저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데 내 쪽에서는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게 성도기 때문에, 언약적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이런 변동이 일어나는 거고, 저쪽은 언약과 관계없기 때문에 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파장이 일어날 때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새 언약이 수립되잖아요. 그러면 이 자체가 파장이라면, 위에서 내려온 파장이 수평에서 수평으로 그대로 연결되면서 우리는 예수님 일의 효과와 영향력 입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영향력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나 잘났다는 소리 안 하고 도대체 나는 아무것도 안 것이 없는데 이 여파가 어디서 오는지 그 중심을 찾아가게 돼있어요.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네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여파가 나한테 도달했다는 그 중심을 우리가 증거하라고 주님과 우리 사이에 고무줄 같은 것이 연결되어서 주께서 일을 일으키면 나도 같이 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러면 그 흔들리는 현상이 지 성질 따라 나타나는 현상인지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거죠.

하이데거라는 철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은 간단하게 말해서 기분 따라 산다고 했어요. [시간과 존재]라는 책이 번역한 것이 600페이지가 넘습니다. 그 두꺼운 책에서 핵심이 뭐냐 하면, 사람은 기분 따라 산다는 겁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이 중에서 기분 따라 안 사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란 그런 이야기에요. 진리가 어떠니, 신이 어떠니, 예수가 어떠니, 나는 희생하며 산다, 봉사하는 재미로 산다고 해도 모든 걸 다 정리하게 되면 사람은 그때그때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이 기분을 도대체 누가 조성하느냐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어요. 그 사람은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람은 분명히 자기 머리, 행동 따라 사는 게 아니고 기분 따라 사는데 이 기분이 내가 주관하는 기분이 아니고 분위기에 따라서 왜 기분이 달라지고, 이 기분을 누가 조성하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은 모르겠다고 하면서 기분을 좌지우지하는 그쪽을 어려운 말로 ‘존재’라고 한 겁니다. 기분 따라 사는 우리가 존재를 보여준다 해서 ‘존재자’라고 표현한 겁니다.

그런데 기분 따라 사는데 어떤 지점의 기분이 전부가 아니고 이게 시간 따라 가니까 책 이름이 [존재와 시간]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책 한 권 떼신 겁니다. 어려운 책. 그 기분은 내가 좋은 기분을 띠고 싶어도 존재자, 당신 마음대로 안 되는 이유가, 당신 밑바탕에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 존재가 존재자를 흔들어대기 때문에 기분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존재라는 괴물의 정체가 뭐냐? 하이데거란 사람은 ‘죽음’이라고 한 거예요. 프로이드는 이 사람한테 힌트를 얻어서 하는 말이, “사람은 안 죽기 때문에 살아간다. 죽기 전까지만 살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죽어가고 있다. 존재의 본질이 죽음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즐겨라. 그 즐기는 것도 기분 따라서 네 마음대로 못 즐기고 기분이 업 되면 즐기고, 다운되면 같이 다운되고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세상이라고 한 겁니다. 내 말이 틀렸다면 틀렸다고 이야기하라.

뭐 지식을 배우고, 학문을 하고,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권력을 쥐고. 그것 다 죽음 안에서 노는 그때그때 기분 따라 하는 거죠. 그래서 자기가 아무리 국회의원하고 싶어도 기분 좋을 때 하는 것이지 기분 나쁘면 국회의원도 때려치우는 거예요. 왜 때려치웁니까? 기분 더러워서 하면 끝난 거예요.

해답은 뭐냐 하면, 사람은 기분 따라 사는 거니까 거기다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란 말이죠. 신을 위해서, 예수를 위해서 희생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본인은 기분 좋을 때는 구제하고, 이웃 사랑하다가 기분 나쁘면 이웃 사랑이고 기도고 다 때려치우고 주 앞에 원망하고 사는데. 그걸 종합해보면 진리라는 것은 여유 있고 배부를 때나 교회 다니지 배고프면 교회 다닐 시간도 없는데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말고 안 되는 소리죠.

오늘 첫째 시간에 조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분명히 하나 정리하고 갑시다. 사람은 그냥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예수님은 익히 알아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나에게 봉사한다, 충성한다 하지 말고 너는 네 기분 따라 살면 돼. 아프리카에 가서 울지 마 톰슨인지, 뭐 봉사한다 그러지 말고, 그것은 기분 업 되어서 하는 짓이란 말이죠. 저 남자와 결혼해야 됩니까, 말아야 합니까? 기도할 것도 아니고 기분 당기면 하고 아니면 말고 하면 되지. 그것을 무슨 “주여, 이게 옳습니까, 선합니까?” 선하다는 말 자체가 어디서 도발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옹호하기 위해서 일부러 끄집어낸, 조작된 그림에 불과한 거예요. 자기한테만 선이지.

가락교회에서 그런 예를 들었지요. 어린이날 앞두고 아이들이 갑자기 착해지잖아요. 이번엔 비싼 장난감 얻어내려고, “아빠, 나 착하지.” 한다 말이죠. 그런데 아빠가, “이빨 고치러 가보자.” 어린애는 자기가 대단히 착한 어린애에요. 말 잘 듣지, 학교에서는 질문 잘 하고 칭찬 받지, 부모한테 사랑받지, 특히 이모한테 용돈 많이 받지. 그래서 굉장히 좋다 생각했는데 치과에 가서 치과의사가, “이빨 어떻게 닦았어? 이렇게 네 마음대로 이빨 닦아도 돼.” 일곱 살 때까지 누구한데 꾸중들어본 적 없는 애가 치과에서 이빨 잘 못 닦았다고 꾸중들을 때 애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치과에 와서 존재의 실존을 아는구나.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사람이란 우쭐댈 수 있는 환경에서나 우쭐대지만 만약에 예상 못한 다른 환경에 들어가면 우리는 꾸중 들을 수 있는 항상 그런 요인들이 있어요. 자기 동네에서는 오야봉인데 다른 동네에서는 아무 소리 못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니 이게 바로 죽음 안에 갇혀있는 실존의 한계다. 그냥 기분 따라 살면서 그걸 자꾸 종교적인 이름으로, 예수 믿는다고 자기를 거룩한 것으로 포장 짓을 하는 그것이 현대의 실존의 모습이라고 하이데거는 묘사한 겁니다.

왜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갑자기 했느냐 하면, 하이데거가 신을 만들었어요. 신이란 것을 만들 때 인간을 모아놓고 그 속에 있는 공통점을 다 끄집어내요. 분명히 인간을 신이 만들었다면, 인간의 각각 개성은 추려내고 공통점을 따라 추적해가면 반드시 신을 만날 수 있는 흔적이 인간 속에 내장돼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속에 내장된 것을 추적해서 그것으로 연결시키면 하나님과 연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는가? 하이데거가 시도한 겁니다. 그전에 이미 천주교에서 시도했지만 요샌 개신교도 이걸 시도해요.

제가 왜 이런 하이데거의 이론을 끄집어내느냐 하면, 언약을 설명할 때 천국이라는 것이 인간의 공통점,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경건한 자질들을 끄집어내서 가는 것이 천국이 아니고,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 간다고 돼있어요. 예수님을 모르게 되면 천국도 모른다는 이야기고, 예수님을 알게 되면 너의 천국을 포기하고 예수님이 새삼스럽게 이야기한 천국으로 교체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천국은, 내가 만든 천국이고 거기에다 예수님 믿어서 플러스, 첨부해서 내가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천국을 알고 있다면 예수님이 알려준 천국과 비교해서 내 천국을 포기해줘야 되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 돼버려요.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와 라이벌 관계로서 등장했기 때문에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것도 내가 익히 알고 있던 내 영역 속에 집어넣게 되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내 능력에 포섭된 그 예수를 내가 일방적으로 소유한 게 되죠. 예수 믿는다는 게 사기다 이 말이에요. 내가 조작한 거란 말이죠.

안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놀리죠. 예수 믿는 사람들 다 나와. 공통점을 뽑아내면 열 명이면 예수가 열 가지란 말이죠. 그러니까 열 가지란 말은, 예수님은 실제로는 한 분인데 열 명이 다 다르니까 너희들은 사기다. 그러니까 난 예수 안 믿는단 말이죠. 내가 너희들 따라 그렇지 않아도 많은 예수를 내가 믿어서 내 나름대로의 예수 만들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실 때 제가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언약에 대해선 인간을 일체 모르게 돼있다. 그래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마태복음 17장. 그런데 예수의 말을 듣게 되면, 이왕 하이데거 나왔으니까 좀더 해보겠습니다.

인간의 모든 공통점은 결국 죽는다는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그 사람의 학력이나 지식이나 재산 정도나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죽음 앞두고 있는 인간들은 항상 동일한 것을 끄집어내더라. 인간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파노라마처럼 펼치더라. 이것은 영사기고 여기는 극장 스크린이고.

그러면 하이데거는 생각했어요. 이 과거, 현재, 미래는 어디서 나왔는가? 인간 속의 공통점에 담겨있는 시간성에서 나온 거예요. 시간에서 나왔기 때문에 인간이 과거에 경험한 것인데 사실은 편집한 거죠. 경험한 게 다 과거가 아닙니다. 현재 자기한테 유용한 것, 유리한 이득이 드는 것만 따로 편집해서 과거가 되니까 전체 과거 가운데 여기서부터 조작이 일어나요. 왕년에 17:1로 싸웠다. 안 믿지요.

본인도 자기 과거에 대해서 몰라요. 왜냐하면 잊어버렸거든. 어제 일도 모르는데. 차타고 아카시아나무 꽃잎 수가 몇 개인지 아십니까? 분명히 과거잖아요. 분명히 제가 용성 넘어 왔잖아요. 나는 용성 넘어온 과거 속에 일부로서 스쳐 왔잖아요. 왔는데 용성읍내 내려오면서 나무 하나 있는데 그 나무 가지에 잎사귀 수를 내가 모른다 이 말이죠. “목사님, 나무 가지 몇 개였습니까?” “77개인가.” “79개다. 어디서 거짓말하노.”

수많은 과거가 있지만 나와 관련된 것만 추려서 나의 과거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그 과거가 어디서 나왔는가? 내 속에 이미 나를 옹호하기 위한 시간성들이 창작돼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주인공 되는 역사밖에 없어요. 그래서 과거에서 자기에 유리한 것만 현재라고 잡다보니까 자기의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면서 미흡하고 모자란 것은 미래의 꿈으로써 실현하겠다고 하니까 이것은 야심이죠. 야망, 목적, 인생 의미 이런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란 과거-현재-미래가 있음으로써 항상 과거는 현재의 생존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과거 중에서 필요한 것을 찾고, 모자란 것은 미래에서 보태겠다는 그런 심보로 혼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 일방적인 역사 속에 예수님이 들어와도 예수의 모든 말을 일방적으로 수용해서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버리죠.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해도 상관없어요. 자기가 듣는 것만 듣고 뽑을 것만 뽑는 거예요.

하이데거가 이걸 밝혀냈거든요. 하이데거가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해서 과거 인간의 주장을 다 이야기했다 말이죠. 인간은 죽음 안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그렇게 보지 않고 사람은 정해져있으니 이 땅에서 자기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자. 그것이 그나마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봅니다.

편하게 산다는 말은 표면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고, 내부에는 기분 따라 사는 것이고. 이 기분이란 환경을 이야기한 것이고, 이 환경을 실존이라고 했고 실존 밑에는 존재가 있고, 존재가 이런 것을 보여주는 매개체가 존재자, 인간이라 하는 겁니다. 왜 인간이란 말은 쓸 것을 하이데거는 존재자란 말을 쓰느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만들어냈기 때문에 인간이란 자체가 틀린 개념이기 때문에 이 개념을 쓰면 안 된다는 거죠. “나, 인간이다.”란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너, 인간 아니야. 나는 더 인간에 가까워.”

플라톤이란 철학자는 사람이 선에 가까울수록 인간이 점점 더 인간다운 거예요. 그리고 선에 가깝지 못한 인간인지 짐승인지 분간이 안 되는 사람, 김태촌, 깡패, 짐승 같은 존재 그래서 그걸 순서를 매기자는 거예요. 순서를 사회적으로 환산시키면 그것이 바로 카스트 제도, 계급이 되는 거예요. 양반과 쌍놈이 되는 겁니다. 사회는 그렇게 해야 질서가 잡히니까.

이게 뭐냐 하면, 똑똑하고 선하고 착하고 덕 있고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서 못 배운 사람들이 교육 받아야 그 사회는 질서에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사회의 모든 조직은 교육하는 자와 교육받는 자만 달랑 남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배운 사람은 더 높은 자리에 앉고 못 배운 사람은 허접한 일만 하는 거예요.

그래야 이 사회가 되는데 그 사회에서 범죄란 다른 게 아니고 못 배운 인간이 배운 인간을 지배할 때 사회질서를 전복시키는 반란적 의식이기 때문에 이것은 배운 사람이 그런 인간을 가만두면 안 되고 교도소에 집어넣어야 돼요. 경찰 동원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이런 사회에요. 분석해보면 간단합니다.

대학수학교수가 교회 왔다. 목사가 하는 말이, “당신은 수학박사지만 교회에서는 내가 오야봉이니까 당신보다 내가 더 높다.” 교회란 질서는 오야봉이 있게 마련이고 질서가 되려면 특수한 권위가 그 사람 몫으로 따로 주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이 인간 사회인데 여기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오야봉으로 해서 일곱 단계의 계급이 형성된 그 사회에 예수님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세리와 창기가 오야봉보다 먼저 천국 간다.”

그럴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우리가 이렇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는 남보다 율법, 하나님의 법을 더 잘 지키기 때문에 그렇다. 요새 말로 하면, 우리가 저 사람보다 더 성화되었기 때문에 성화된 사람들의 말 듣는다는 것은 신에 가까이 간 사람, 기도도 오래하고, 은혜도 많이 받고, 간증도 오래하고, 경건해서 신에게 근접해서 은혜 많이 받아서 신과 많이 닮아있다는 말은 곧 저 짐승 같은 인간에게 교육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받았다고 생각을 먹으라 이 말입니다.

이게 모래시계인데 이 모래시계를 역으로 엎어버리면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위에 있는 나의 선이 아래로 흘러들어가서 개 같은 너희들도 내 선함 때문에 복을 받는다고 하거든요.

차마고도란 다큐멘터리를 봤죠. 티베트는 보통 어지간하면 오천 미터고 좀 높으면 칠천 미터거든요. 그 높은 곳에서 오체투지 쉬운 말로 삼보일배,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는 것 있잖아요. 몸의 다섯 가지 체형을 땅에 던지는 거예요. 몸에 가죽을 대고 수백 킬로미터를 가는 거예요. 왜 하느냐? 오체투지 하기 전에 나무판을 댄 손을 세 번 칩니다. “내 뜻과 내 정성과 내 마음은 모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서 대신해서 내가 이런 고난을 받으니 부처님이여 내 고난 속에 지금 이 고난을 모르는 중생들에게 저주 내리지 마시고 내 희생 하나 받아서 복을 받게 하옵소서.” 대리해서 고난 받는 희열, 거기서 자기가 오체투지하는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이걸 교회에서 네 자로 이야기하죠. 중보기도.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것이 독특한 건 없어요. 그냥 말만 바꾸었을 뿐이지 행동하는 것은 그냥 똑같은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지요, 십일조 했지요, 그 다음에 구제했지요. 이 말은 모래시계 위에 있는 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너희들은 구제 안 했지만 내가 대신 구제해서 짐승 같은 너희들도 복을 받아라. 하는 식으로 복이 내려가는 대신 다만 내 희생으로 된다는 종교적인 카리스마, 영적인 카리스마를 너희들이 보장해줘야 이 유대나라가 종교적, 영적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걸 뒤집어버리니까 창기와 돈만 밝히는 세리가 위쪽에 있으니까 뭐가 떨어집니까? 죄가 떨어지겠죠. 이 죄가 많이 떨어진 사람이 구원받는 거예요. 선을 많이 발휘한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죄가 많이 떨어진 사람, 여기 많습니다. 죄가 비듬 떨어지듯이 머리, 어깨, 무릎, 발 한 번 소릴 지를 때마다, 행동할 때마다 죄가 우수수 막 떨어지는 사람,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

기차나 버스 탈 때 제가 혹시 휴대폰 크게 한 사람 없는지 찾지요. 그냥 가면 심심해서. 서울까지 가려면 얼마나 심심한데요. 요새는 상식이 있어서 큰 소리로 안 하고 칠십 넘으면 큰 소리로 하는데 보통은 소곤소곤해요. 그런 사람도 잡아냅니다. 그것도 나중에 재미가 없어서 잘 안 해요. 요즘은 문방구에서 천오백 원 주고 산 귀마개한 뒤론 조용해졌어요. 이젠 간섭할 것도 없지.

그게 아까 어린애 치과 이야기했듯이 그동안 자기가 살아온 과거에 집착된 경험에 의하면 이 정도는 용납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는 인간은 용납 된다는 발상 자체가 용납이 안 돼요. “적어도 이 정도는 돼줘야 내가 선을 행합니다.”라는 그런 발상 자체를 할 필요도 없는 것이 태어난 네 인생이라고 한 거예요. 이것이 선일까, 이건 악일까? 따지면 니만 피곤한 거예요. 그렇게 따지지 말고, 그냥 뭐대로 살아라? 오늘 배운 게 뭡니까? 막 살란 소리 안 했어요^^ 또 오해한다. 기분대로. 그냥 기분대로 안 살아도 되고, 살아도 됩니다. 문제는 그 기분을 조작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그런데 제 말에 대해서 이의가 있다고 토다는 사람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기분이 나빠. 나는 착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더 기분 좋아. 나는 나쁜 짓해서 행복한 적이 없어. 불행해져. 그러나 착한 일하면 왜 그런지 행복해져. 그러면 그것도 선이 될 수 있잖아.”라고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게 바로 기분대로 해놓고 그걸 선이라고 나중에 사후적으로 조작을 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문제냐 하면, 예수님이 그것마저 악하다고 했을 때에 강력하게 반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 돼버립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그래서 첫째 시간에 한 것은, 예수님과 아버지만 알고 있는 것이 언약이다. 그리고 언약에 대해서 콩고물 떨어지듯이 떨어진 사람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였다. 마지막에 세례요한에 떨어졌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갈 때 엘리야, 모세 등장했지요. 벌써 언약을 알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도 모르고, 세례요한도 모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야기할 때 아무도 못 알아봤다 이 말입니다.

못 알아 본 것을 우리는 축복이라 보자. 왜 축복이냐? 못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어떤 대기상태에 있는 거예요. 여기서 못 알아본 사람이 어떤 선을 행한다고 예수님을 대적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관여한 바가 되기 때문에 이 자체를 무로 돌릴 수 있는 그러한 대상이 우리가 되는 거예요. 이게 우리를 마음 편하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자 노력한다는 그 애씀과 힘씀 자체도 사실은 구원과 전혀 연결점 없고 상관없는 거예요. 그걸 성령이 오게 되면 차후에 부질없는 헛생각 속에 지나갔구나 하는 것을 무릎을 치면서 수용하게 되는 거예요. 그동안 교회에 돈만 갖다 바쳤지 헛수고한 거예요. 그걸 알 때 비로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하는 앞에 현장에서 간통하다 잡힌 여인과 예수님 사이, 자꾸 간통한 여인, 예수님 따지지 말고, 그 관계 속에 초빙되면 들어오게 되면 이게 자유다. 예수님이 너희를 강제로 힘 있게 하게 하심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 간통한 이 분이 같은 천국에 동반자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간음한 여인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용서받은 자가 되죠.

아까 하이데거는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서 기분대로 살면서 죽음에 휩쓸려간다. 이것을 존재자라 했잖아요. 이것을 그대로 집어넣으면 예수님에 의해서 용서받은 자, 예수님에 의해서 피 뿌림을 입은 자, 이러한 입장이 되면 이것이 바로 지상에서 시작된 제대로 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이게 지상천국이에요.

이것이 만약에 여러분에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 저한테 따지지 말고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하이데거한테 가서 따져요. “나는 그것 안 믿습니다.” 하면 하이데거 불러요. 안 믿는 것과 나와 상관없는데 나와 따져보자. 나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범주에서 네가 벗어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는지 끄집어내보라. 못 끄집어냅니다. 다 기분 따라 사는데 빠져나올 길이 없어요. 지금은 하이데거지만 예수님 당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에요.

다시 정리할게요. 모래시계, 여기 선이 있고, 선을 나눠줌으로써 오체투지죠. 내가 갖고 있는 선을 나만 구원받으면 너무 미안하잖아요. 너무 염치없고, 이기주의는 안 되고, 이타주의가 돼야 된다는 양심은 있어서 일단 내가 구원받을만한 것은 챙겨놓고 그 다음에 여분의 노력을 많이 하는 거예요. 십일조 해도 되는데 십일조는 내 구원용이고, 십의 이조하게 되면 아직까지 교회 안 다니고 있는 내 며느리 위해서. 그렇게 여분의 선이 있으면 그 여분의 선을 나눠줌으로써 이 사회가 선한 사회로 멋진 사회로 이루겠다는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강도, 창녀, 세리를 위에 내세워서 이런 자들이 구원받는다 하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고 거꾸로 세우게 되면 죄가 떨어지는 겁니다.

첫째 시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합시다. 방금 죄가 떨어진다고 했는데 떨어지는 죄가 뭐냐? 여기에 세리와 창기, 강도를 모래시계에 얹어놓았습니다. 이게 떨어지는 죄가 세리니까 돈만 아는, 돈만 챙기는, 돈독이 든 사람, 창기는 윤리도덕이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한 사람, 강도는 사람 죽이는 것을 개 잡듯이 해서 자기 유익만 챙기는 동물적인 본성을 갖고 있는 사람, 이 사람에게 떨어지는 죄가 만약에 이런 죄라면 우리는 이런 사람에 참여될 수 없습니다. 왜? 우리는 강도, 창기, 세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가정교육 잘 받아서 이런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못 받았어요. 가정교육이 너무 완벽해서. 우리는 교육집안이 되어서 너무 자녀교육을 잘 시켜서 우리는 이런 걸 하고 싶어도 되질 않아요.

그렇다면 여기서 떨어지는 죄에 참여 못하면 결국 우리는 위쪽에 나란히 죄인 중에 괴수에 서지 못하는 셈이 돼버립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할까요? 여기서 암벽타고 올라갈까요? 그럴 필요 없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느냐? 그 비법이 뭐냐? 내가 지은 죄는 죄 축에도 안 들어간다는 거예요. 내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링거로 죄를 집어넣는다는 겁니다. 큰소리치는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이번 시간 마지막 큰소리인데.

죄를 집어넣어줘요. 그러면 내 시간성 속에 과거에서 경험하지 않은 죄인데 아담이 따먹었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 죄가 나도 모르게 허락도 없이 링거 속에 들어가면 수시로 백화점 쇼윈도우 지나가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봄 신상품 나왔는데……

어떤 여자 분은 남편이 억대 연봉을 받는데 자기가 직장 생활하는 이유가 명품 사려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세리도 아니고, 창녀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만약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겠죠. 왜?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걸 보게 되면 그동안 내 안에 잠재돼있던 죄가 그때그때마다 우발적으로 내부에서 표면층으로 튀어나올 때 “아 내가 죄인 중에 괴수가 맞구나.”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으로 그걸 집어넣을 때, 죄를 끄집어낼 때 율법 다시 말해서 법을 우리 안에 집어넣으면 그 반응으로 우리 죄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비로소 탐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죄라 할 때 비로소 우리는 경우에 따라서 형제를 질투하고 시기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여기서 첫째 시간을 정리하게 되면, 아까 하이데거처럼 인간이란 없어요. 존재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언약의 매개물이 되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를 대신 흘려서 용서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란 우리를 계속해서 거기에 합당한 죄를 발생시키기 위해서 이미 말씀이라는 것은 자꾸 고무호스로 집어넣어서 내장돼있는 죄가 반발하도록 조치를 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이것은 지키겠는데 이것은 못 지키겠습니다.”라고 하면 주님께서, “모든 걸 지켜서 이것 하나 어기면 몽땅 다 못 지킨 것이다.”라고 해서 자꾸 우리로 하여금 너를 위해서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는 식으로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20505 특강 - 언약b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인간이란 말을 철학가도 사용하지 않지만 인간이란 말은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용서 입은 자, 용서받은 자, 자비를 받은 자로 표현해주는 것이 예수님에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그냥 ‘나는 인간이다’라고 해버리면 자꾸 뭘 고집하느냐 하면, “나는 인간이야. 예수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할 거야.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간섭하지 마.” 나라는 것을 강조하게 돼요. 누가 개라고 했습니까? 나는 인간이라는 자체가 성경에서 의미가 없다 이 말이죠.

‘성경에서 의미가 없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줄 아셔야 돼요. 저 자동차는 굉장히 맛있다. 앞뒤가 안 맞지요. 자동차가 빠르다는 말 되는데 자동차가 맛있다는 건 의미가 없다니까요. 나는 인간이다. 의미가 없다니까요. 용서받았어, 안 받았어? 용서받았어. 그때만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항상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모습들은 나 말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변화를 유발했을 때 그 변화가 내 몸을 매개로 하여 발산될 때 우리는 언약적으로 의미가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이, 인간이라는 걸 이제 생각하지 말고 용서받은 자로서 밥 먹고, 직장 나가시고, 용서받은 자로서 그림 그리시고, 노래 부르시고, 잠자고, 티비보고. 드라마를 볼 때 용서받은 자로 보란 말이죠. 그림자를 보든지. 그냥 보지 말고 용서받은 자로서 화폭에 그림을 그리란 말입니다. 그게 뭐 어려워요. 성도한테는 어렵지 않아요. 환자 보실 때 용서받은 자로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받은 자로서 본다는 말은 너나 나나 죄인이다 이 말입니다. “너 용서 안 받았지? 그냥 지옥 가는 거야.” 그런 식으로 상대방을 대하란 말이죠. 대통령을 만나든, 국회의원을 만나든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용서받은 자가 됐다는 것은 나라는 것에서 접근할 길이 없어요. 우회해야 돼요. 돌아가야 돼요. 길이 나 여기 있고, “나 용서받은 자 될래.” 이런 직통 길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게 언약에 가서 새 언약을 이루신, 완성하신 분에 의해서 예수님이 계셔서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용서해주는 자로 할 때 우리는 1, 2, 3, 4 거쳐서 우리는 용서받은 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이 구조로 돼있어요.

내가 직접 성경을 보고 실천에 옮겨버리면, 나는 인간인데 성경을 실천에 옮겨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되고자 한다. 계속 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나한테 돌아오니까 이런 언약적인 노선이 빠져 있으니까 이것은 자기가 교주가 되죠. 이것은 마아슬루라는 심리학자의 욕구설에 보면, 다섯 가지 중 제일 마지막에 인간은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제일 밑바닥에 생존의 욕구가 있어요. 인간은 다급한 것이 밥 먹고 사는 것, 잠자고, 아픈 것 낫게 하는 게 제일 기본적인 욕구 이것은 동물적인 겁니다. 인간의 두뇌의 시상하부에서나 일어나는 파충류적인 욕구, 그런 욕망인데 그게 단계가 높아 가면 대뇌피질로. 인간 두뇌의 진화에 의해서 커지면서 많이 채워지는 것이 자아실현, 나는 과연 나구나. 자기로 인하여 도취되고, 자기로 인하여 즐겁고, 내가 여기 존재함으로 행복한 것 심지어 내가 지옥 가더라도 고개 숙인 어깨를 다독거리면서 “걱정 마. 내가 너 따라 가잖아요. 지옥에서도 보살필게.” 하고 위로할 사람은 여러분? 아니죠. 나죠. 내가 나를 마지막 위로 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의 자아실현의 욕구. 불교가 마지막 도착점이에요. 성화론의 마지막 자기로 인하여 자아도취로 즐거움입니다. 이것은 바로 언약계통에 들지 않기 때문에.

내가 되고자 하는, 아까 한 것 다시 해볼게요. 인간 내부에는 시간성이 들어있다. 이걸 파노라마처럼 펼치면 과거-현재-미래가 나온다. 미래는 나의 꿈이고 나의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어떤 소망과 목적이 있음으로써 지금 내가 힘들어도 일할 수 있는 용기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미래 때문인데 그 미래의 요소는 어디서 채워진다? 과거의 경험은 과거의 경험 가운데서 현재가 편집해서 만들어진다. 편집해서 만들어진 것 가운데서 내 욕망에 미흡한 것, 내 욕구에 만족스럽지 않는 것을 미래로 미루고 그 미래에서 내가 미처 못 한 것을 미래에 달성하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그 용기로서 미래로 달려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모순점은 뭐냐 하면, 꿈은 절대로 이뤄지면 안 돼요. 꿈이 이뤄지면 그 다음에 자살입니다. 꿈은 새로운 꿈을 양생해내어 이쯤 되면 새로운 꿈을 제작해내야 돼요. 꿈은 절대로 꿈으로 남아야지 꿈이 이뤄지면 그 다음부터 더 살 이유가 없어요. 꿈 때문에 살았는데 꿈이 실현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메시아가 왔다는 것을 그렇게 큰 절망 느껴요. 세리와 창기한테는 메시아 온 것은 기쁨인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한테 메시아 오면 안 돼요. 왜? 희망과 꿈으로서 백성들을 지배해왔는데 완료가 돼버리면 구라가 돼. 계속 미끼를 던져서 꼬셔야 되는데 만약에 지금 예수를 믿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교회 목사들이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소리를 못하게 만들어요. 다 이뤄버리면 다 구원받았는데 미쳤다고 헌금하느냐고. 그래서 돈 안 내고, 봉사 안 하고, 전도 할 테니까 교회가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구원은 받았지만 봉사 안 하면 하늘나라 갈 때 팬티 바람으로 갑니다. 상급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영혼을 장악하죠.

그러면 구원을 받아놨지만 교인들에게 자아실현의 욕구는 남아있으니까 이걸 남보다 뛰어나게 봉사함으로써 남보다 뛰어나다는 비교의식, 남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교회를 더욱더 교회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목표로 작업을 걸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은 당신에게 꿈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여,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청춘의 꿈은 하나님에 의해서 달성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죠. 용기와 꿈과 긍정적인 의미를 계속 부여하는 겁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난다고 하죠. 잠언서에 나오죠. 그 말씀을 하신 것은 여덟 번 일어서라 또 넘어지게 돼있어.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백구십 번 용서하면 구원받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겠어요? 안 되지요.

이렇게 해서 언약적으로 용서 입은 자로 볼 때 이것은 내가 처음 출발할 때 나는 용서받아야 되겠다는 인간을 여기서 삭제됩니다. “너는 용서 입은 자라는 결과물이 되어야 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나는 용서하고 싶어요.” 주께서 그 입 다물라. 나는 천국 가야 되겠습니다. 그 입 다물라하고 천국 넣어주죠. 너에게서 출발한 그런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은 너의 꿈에 불과하고, 너를 천국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꿈이거든요.

이게 대조가 되거든요. 나에게서 나오는 나의 미래, 이것은 철거대상이고 주께서 허락한 것은 나의 미래가 아니고 예수님의 미래입니다. 예수님의 미래에 우리가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특수한 용어가 동원됩니다. 그걸 예수님에게 하는 범위가 확장되어서 들어나 봤습니까? ‘예수 안’이란 용어가 등장해요. 예수 안에서 의입니다. 너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 예수 안에서 너는 교회가 되었다. 예수 안에서 너희는 형제니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되 예수 안에서 사랑하라. 아내는 예수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예수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라.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된다. 이 모든 것이 예수 안이라는 것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을 집어넣는다는 말은 여기 누구 몸이 우선입니까? 예수 몸이 먼저 있죠. 예수 몸에서 확장된 영역과 너의 몸에서 확장된 꿈 영역과 교체해야 된다는 겁니다. 교체할 방법은 우리한테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내 몸에서 나오는 영역 안에 예수고, 하나님이고 좋은 건 다 집어넣는 장바구니에 담듯이 좋은 것은 다 집어넣어요. 성경에 나오는 좋은 용어들 다 집어넣는다고.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 할 것이 없느니라. 하여튼 좋은 것은 다 집어넣어요. 집어넣다보니까 엉뚱한 마귀가 한 말도 집어넣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게 마귀의 말인지 주님의 말인지 분간도 못하고 다 집어넣어요. 그것도 집어넣지, 먹는 날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여튼 사람들은 자기 몸에서 나오는 권력의 장을 확장시켜놓고 집어넣는데 여기다 예수마저 집어넣을 때 그것은 너의 안이지 예수 안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슨 수로 바꿉니까. 바꿀 재주가 없는데.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려면 그동안 내가 펼쳐놓은 나까지 따라 나와요. 내가 만약에 담요 위에 넘어서면 담요 놔두고 나 혼자 일어서면 좋겠는데 그 담요가 나의 배설물로 만들어놓은 과거의 흔적이기 때문에 내가 일어서면 담요도 따라서 일어서기 때문에 담요가 질질 끌려온다니까요.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 내 과거의 미흡한 것을 전제로 해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을 파악하기 때문에 제대로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의 응답을 파악할 수 없어요. 일이 안 됐는데 기도하니까 응답이 됐구먼. 그럼 일이 안 된다는 기준은 누가 만들었어요? 내가 짜놓은 판에다 거기다 빡세게 기도하니까 응답되었다 하니까 그것도 사기라. 그것도 조작된 거고.

그래서 내 몸을 예수의 몸으로 바꿀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면 안 바뀌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성경에서는 어떻게 돼있습니까? 마리아라는 처녀가 있어요. 저는 마리아라는 처녀를 생각할 때마다 구미공단에 열여섯 살 먹은 똑순이를 생각해요. 누나가 되어서 동생들 공부시킨다고 옛날에 “꽃순이를 아시나요~” 이래서 가난한 집안에서 공장에 보내서 자기는 공부 못하고 동생들 학비대려고 한 그 똑순이 있잖아요. 그냥 사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기분 따라 사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마리아 몸에 임하니까 그때부터 마리아 몸이 어떻게 됐어요? 자기 과거의 미흡함에서 나오는 미래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이 출생한다는 예수님이 계획 잡은 예수님의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 범위가 미리 앞당겨서 확장된 그물망에 말려든 거예요. 말려들다보니까 마리아 몸은 하나의 예수님의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배가 불러오네요. 요새 같으면 초음파검사해서 아들인지, 딸인지 할 텐데 이것은 부끄러워서 그야말로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는 것처럼 분명히 마리아는 할 말 해도 될 입장이지만 차마 말을 못하는 거예요. 진짜 처녀기 때문에. 처녀 아닌 것은 할 말이 많은데 진짜 처녀라 이걸 말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오해를 해서 사랑하는 재벌 3세 남자친구는 떠나버리고. 논리적으로 그냥 불렀다는 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마리아의 임신이 납득이 안 된다는 말은 아담으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납득이 안 되게 돼있어요. 인간의 정자 2억 8천 개가 속도 경쟁하다가 나중에 도착할 때는 일등 하나만 남고 나머진 알아서 죽어버리고.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자식의 생산인데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까 만약에 이걸 우리가 이해 못하게 되면 오늘날 성령 받아야 구원된다는 것도 구라가 돼요. “오늘 성령 받았습니까?” 이 말을 다른 말로하면, “애 뱄습니까?” 이런 뜻이에요. “무슨 애? 나는 기분 따라 가는데 뭘 애를 배.” “애 안 뱄어요? 그러면 마리아 계통이 아니네. 그러면 지옥 가야 되겠네.” 그렇게 된다니까.

도저히 어떻게 논리의 다리가 중간에 끊어졌어요. 지혜롭고 똑똑한 인간에게는 감추시고 주님의 모든 구원은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거예요. 말을 달리 하면, 구원의 능력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리석어도 좋다는 거예요. 단지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족하다는 뜻이거든요.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고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그래 나 어리석어. 내 미친 놈 될게. 하지만 난 용서받았어.”

주님에 의해서 쓰여진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다른 기존에 세상적으로 내가 나 됨을 내세우고 싶었던 모든 재료들이 본의 아니게 그걸 놔야 될 것을 감 잡았습니다. 자기 자랑거리를 바구니에 집어넣었는데 용서받은 순간, 배가 불러오는 순간, 안에서 예수님을 잉태하는 순간 그때부터 정작 내가 전하고자 하는 그것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하게 되는 겁니다.

교회가 크다, 우리 교회가 뭘 했다, 신앙생활 사십 년을 했느니, 그런 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못 되죠. 성경을 백독을 했느니, 신학박사가 몇 개니 그런 것도 전혀 자랑거리가 못 돼요. 다만 이것만 아시면 돼요. 개 같은 나에게 용서해주신다.

그 점을 먼저 설명 드리고 아까 바꿔치기가 안 되는 걸 어떻게 가능한지 하겠습니다. 가락교회에서 한 건데 어려워서 그걸 되풀이합니다. 이게 피라미드입니다. 꼭지점이 있고 바닥이죠. 예수님께서 원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 됨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자기 영광을 버리고 오셨다. 그러면 여기서 피가 흘러내려갑니다. 여기에 세상적인 타일이 깔리죠. 타일보다도 화투가 있는데 피가 내려오면서 화투장을 다 까는 거예요. 다 까버리면 숨어있던 아담의 죄들이 번지면서 하나하나 까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닥까지 내려오죠. 그러면 전부다 피로 모든 것이 적셔지는 겁니다. 그걸 깔 때 노아 때는 물의 홍수로 하죠. 그리고 제사에서는 내 대신 누가 피 흘림으로서 그걸 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세상은 처음부터 죄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걸 인격화시키는 거예요. 이걸 개인화시키는 거예요. 세상의 축소판이 나고, 내가 세상의 부분이 되고. 세상 전체가 내 안에 전체로 포함되면서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는 식으로 내 안에서 세상 것들이 늘 순간순간 마주치면서 죄가 드러나고 피가 드러나는 거죠. 죄와 피가 드러나는 이것이 두 번째 하려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제가 던진 질문이 뭐냐 하면, 내 몸에서 나왔던 그 세계관 그리고 예수의 몸에서 나온 세계관이 무슨 수로 교체가 되느냐? 그것은 우리 몸에서 하게 되면, 내가 담요를 끌고 가는 셈이 되기 때문에 내가 담요를 가위로 뗄 수 없게 돼있어요. 그러면서도 바뀌지 않으면 천국 못 갑니다. 지옥 갑니다. 그럼 어떤 식으로 이게 바꿔지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먼저 제시하고, 해답으로 예수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느냐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신약에는 예수 안이고, 구약에는 이스라엘 안입니다. 그리고 신약보다 구약이 먼저 있습니다. 도저히 안 되는 사람들을 주께서 질질 끌고 가실 때 끌고 가는 원동력이 뭐였는가? 어떤 힘에 의해서 이방나라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아담의 자손으로 똑같은 성질, 기분 따라 살고, 지 마음대로 살고, 지 몸의 욕구대로 욕망대로 사는 것이 양쪽 다 똑같은데 어째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계시고, 왜 다른 나라는 공격을 당하고, 멸망당하고, 땅에서 쫓겨나고 이스라엘은 특혜를 받는 입장이 되느냐? 이 이스라엘을 조사함으로써 오늘날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죠.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속 시원하겠죠. 예수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껴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나를 껴안게 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나는, 사실은 나만 죽는 게 아니죠. 예수님은 죽고 나도 죽는데 예수님이 나를 제치고 먼저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거기서 이미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깔려서 현재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 관계라 하죠. 내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내가 살았다고 자꾸 우기는데 사실은 내 안에 누구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이 결론이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되는데 그전에 먼저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보여주는 말이 있어요. 같은 장소에 동시에 두 물체가 놓일 수 있느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은 모순율에 의해서 이것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A는 A인데 A가 A 아닐 수가 없다. A가 A 아닌 경우는 잘못 됐다 이 말이죠. 진리가 아니란 말이죠.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모든 납득이 되는 것부터 출발하잖아요. 납득이 되는 것을 다 모으는 거예요. 한 각이 직각인 삼각형은 직각삼각형이고,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⁰며 세 변으로 돼있다고 납득이 되는 그걸 공리라 하는데 이런 진리를 기준으로 해서 진리지? 그러니까 진리에서는 하자가 없이 모순점이 없이 진리는 진리대로 뭉치면 그게 결국 진리의 탑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걸 거꾸로 이야기했는데? “네가 인간이냐?”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인간입니다. 개와 달라요.” “너, 인간 아닌데. 초장부터 달라.” “그럼 뭡니까?” “너는 죄인이야. 죄가 너를 만들었는데 왜 그걸 빼먹고 있느냐?”

그래서 동시에 같은 장소에 놓여져 있느냐 말이죠. 됩니까? 아니죠. 이 장소에 이게 못 놓이잖아요. 책 위에 놓여있지 이 장소는 아니잖아요. 이 장소에 놓이려면 책 비켜라! 그것도 동시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있다고 했잖아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있는 게 아니에요. 어떤 분과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자기는 지상에 있고 그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것은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쉐마, 들으라는 그 말씀이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시킨다고 생각한 겁니다.

문제는 율법이 있고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있다 할 때 이 하나님은 네가 갈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나를 확장시켜놓은 나의 다른 모습이에요. 내가 훅 바람 불어서 내가 안 되는 그것을 마저 채워서 나의 이상형으로서 신을 여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진짜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없지요. 예수님이 오시 전까지는 하나님은 없어요. 예수님에게만 아버지가 있고 나머지 떠오르는 하나님은 인간이 조작한 하나님이에요. 처음부터 인간에게 하나님은 없었던 거예요. 대신에 악마가 하나님 행세했던 거죠. 인간이 사탄의 행세를 해서 신을 믿었던 것을 예수님이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악마의 모습으로 온 거예요. 예수님이 악마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은 누가 고백하느냐 하면, 바로 그 당시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야기한 겁니다. “저 예수란 인간, 귀신대장이야.” 바알세불, 귀신대장이라 하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똑똑한데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등장하면 귀신대장으로 오는 거예요. 이단이 고수 같이 교회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니 맞아 죽어도 싸지 뭐. 어떻게 인간의 개인적인 행동으로 행복을 빼앗아 갑니까?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데 어떻게 나의 것을 강탈해 갑니까? 욥도 처음에는 오해를 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죄 없는 나를 이런 식으로 죄인 중에 괴수로 처참하게 망가뜨리고 나의 모든 것을 강탈해 가느냐 이 말이죠.

주님 하시는 말이, “내 것 내가 강탈하는데 네가 왜 말이 많아.” 그때부터 욥은 나라는 자체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어떻게 하겠다, 내가 믿겠다, 내가 예수 사랑한다는 나 자체에서 고장 난 나에서 엉터리 하나님이 나왔고, 배후에서 악마가 그렇게 조작했다는 사실을 안 겁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겁니다. 그 바꾸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에요. 이스라엘 나라 자체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애굽이란 나라가 있으면 애굽이 부풀어 올라와서 이스라엘 됐어요. 처음에는 애굽 나라에요.

여호와증인의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이죠. 안식일 교인들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이죠. 감리교 교인들 나라가 무슨 나라입니까? 북한에서 남조선이잖아요. 천주교 신자의 국적이 뭡니까? 대한민국입니다. 여호와증인이 태어날 때 당신 나라가 뭐냐? 내 나라는 김밥천국이라 합니까? 코리아라 하죠. 히브리인들 나라가 무슨 나라에요? 나라 자체가 없지요. 있을 이유가 없다니까요. 현재 애굽이란 나라가 있는데 나라를 만들 필요가 뭐가 있어요.

나라를 만드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소원이 아니고 누구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소원이죠. 하나님이 나라를 만들 때 나라에 필요한 백성과 구성요소를 나라를 만드는 그분이 모든 걸 제공하게 돼있어요. 오늘 집들이 하면서 “물은 사먹으세요. 한 컵에 오백 원입니다.” 하면 곤란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 때 이스라엘을 만드는 취지를 백성들은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그냥 끌려온 거예요. 가만있어 내가 만들게. 그 나라 만드는 방식은 히브리인들이 생각했던 방식과 달랐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소원은 뭐냐? 애굽에서 나가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고 정권교체해서 이제는 새누리당에서 통합민주당으로 바뀌는 그 정도. 정권 바꿔서 우리가 같은 나라에 살면서 편하게 억압받지 않고 사는 그걸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생뚱맞게 이 나라에서 나가자 하니까 그동안 정들었던 이웃들 그리고 돈 빌려준 것, 그때는 카이로 없었지만 카이로 근방에 개발한다고 해서 땅 사놓은 것 어떻게 할 건데? 어음 받은 것. 누가 항의했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그것도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이여, 살아계신 하나님이여, 저 인간 죽여주세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힘들게 했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 속에 시간성이 있고 시간성이란 과거-현재-미래로 돼있으며 우리의 미래란 내 몸에서 나온 나의 미래기 때문에 과거와 끊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힘들었으면 미래는 힘 안 드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소망과 꿈의 한계점이에요. 그 한계점을 주께서는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생뚱맞게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게 합니다. 그것도 띠 띠고 질질 끌고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길로 가는 겁니다. 이쪽은 차도 별로 다니지 않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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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06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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