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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0130 증도 엘도라도 특강 - 차이와 타자성경[신학]

20120130 증도 엘도라도 특강 - 차이와 타자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관리자(IP:203.♡.42.222)

13-05-12 08:25

20120130 증도 엘도라도 특강 - 차이와 타자a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7페이지 제목에 보면, [표상적 사유와 비표상적 사유]라고 해서 벌써 제목부터 기 팍 죽이죠. ‘표상’이라는 것은 표현이란 뜻입니다. 쉬운 말 놔두고 표상이라고 하는데 표현하는 사유와 표현될 수 없는 사유. ‘사유’란 말은 어렵죠. 표현할 수 있는 생각과 표현될 수 없는 생각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그걸 서문에 처음부터 시작하느냐?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무슨 활동을 하는데 그 활동이 8페이지에 나와 있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하이데거는 표상 활동을 근대성의 본질, 보다 정확히는 근대적 주체성의 본질로 내세우고 있다”

이건 뭐냐 하면, 사람이 표현을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주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는 거죠. 가만있으면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 가방을 가져가면, “어, 내 가방” 하잖아요. 평소에 말이 없던 사람도 가만있습니까? 식당에서 남이 자기 신발을 신고가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입이 무겁고 점잖은 사람이라도 “오, 내 신발” 이러잖아요. 그때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세요. 표상적 주체! 표상적 주체 확실하게 알았죠?

하이데거는 표상이라는 것은, 자기 앞에 세우는 활동, 내 앞에 누굴 세워놓고 나는 저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할 때 비로소 주체가 발생된다고 보는 겁니다. 가만있으면 사람은 있는지, 없는지 몰라요. 뭔가 표현할 때 등장하는 겁니다. 그 세우는 걸 ‘대상’이라 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세우는 활동의 주관자가 되는 겁니다.

주체가 뭔가 행동을 했다는 정도로 끝일 것 같으면 어려운 게 아닌데 이제부터 내가 그 대상에 대해서 주관자가 되겠다, 지배자가 되겠다는 식으로 주체가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근대주체사상이란 말입니다. 그냥 사람이 몇 사람 있네. 이게 아니라 각자각자 자기표현에 대해서 남한테 지배받지 않겠다는 의식을 드러내는 그것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중간에 보면, 이렇게 하나의 대상으로 표상, 표현을 해버리면 그때 어떤 말로 정리될 수 있느냐 하면, 세계라는 것은 인간 앞에 세워진 그림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말은 사람마다 각자 세상을 보는 눈은, 각자 자기가 그리는 세상만 자기가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근대주체사상에 들어가면 하나의 세상이라도 열 사람이 있으면 세상은 열 개나 되는 셈이 되죠. 그리고 이 세상이란 그걸 오직 세상이라고 보는 인간에게 “정복된 그림으로서 외에는 그 어디에도 존립할 수 없다.” ‘정복’이란 말을 쓰죠. 지배하는 걸 말합니다.

그 뒤에 8페이지 끝에 보면 과학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과학이란 뭐냐 하면, 그냥 있는 세상이 과학이 아니고 내 주체를 확인하기 위해서 내 앞에 등장해서 나의 심판을 받는 대상으로 세상을 그릴 때 그 세상이 과학적 세상이에요. 그래서 9페이지에 보면, 그걸 “지구적 제국주의”라는 말을 했죠. 제국주의란 모든 여타의 것들을 자기 수하에 둬야 마음이 흡족한 그러한 주의, 사상을 말하죠.

과학이란 다른 게 아니라 제국주의다. 안드로메다 있다. 그건 과학이 아니죠. 안드로메다에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게 할까? 이거는 제국주의죠. 세포가 있다. 이거는 과학이 아니죠. 세포를 어떻게 이용해서 나한테 이득이 되는, 난치병을 고치는 세포로 바꿀까? 이거는 뭐가 됩니까? 과학이 되는 겁니다.

과학이란 로봇을 만든다든지, 의술을 발달시킨다든지, 암세포를 퇴치하는 것은 전부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세상으로 보지 않고 주체란 자기한테 소용되고, 이용되고. 활용되는 식으로 전환시키는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거기에 개입될 때 그것이 바로 과학이라는 겁니다. 과학주의란 다른 말로 제국주의란 뜻이죠.

진화론이란 뭡니까? 세상이 달라졌다, 변화했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이 세상은 인간을 위해서 있어야 된다고 확인하기 위해서 수립된 이론이 되는 겁니다. ‘진화’란 말은 발전이란 뜻이 아니고 변화한다는 뜻이에요. 원래 뜻이. 진화론의 진화란 헬라어에서 나왔는데 진화라는 용어의 원 뜻은 세상이란 신의 목적대로 움직여 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다윈이 사용했죠.

나중에 그 용어가 바뀝니다. 어떤 목적이 없이 스스로 알아서 변화한다는 뜻에서 진화라 한 겁니다. 다른 사람은 거기다 발전 개념을 집어넣어버렸어요. 항상 어떤 변화라도 나중 변화가 전의 변화보다 발전했다. 발전했다는 말은 제국주의적 아이디어죠. 자연은 발전하는 게 아니잖아요. 나귀가 말이 되는 게 발전한 거예요? 나귀한테 물어보세요. 아니죠.

인간이 발전했다고 보는 이유는 누구한테 도움 되라고 그런 용어를 쓰는 겁니까? 인간 자기 주체에 도움이 되라고. 그러니까 이게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할 때 과학은 그쪽으로 나갈 때 철학은 뭘 묻느냐 하면, 네가 과연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질 만한 위인이 되는가? 주체 자체를 묻는 것이 철학입니다. 과학과 철학의 차이점이 거기에 있어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성적이 좋으면 우수한 학교로 소문나서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되겠죠. 그렇게 할 때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학생들을 공부를 잘 시켜야 된다. 그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고. 철학자는 뭐라 합니까? 네가 뭔데 발전해야 되는데? 이걸 묻는 게 철학이란 말이죠. 네가 뭔데 너는 왜 퇴보해선 안 되고 발전해야 되는 이유를 내놔봐라. 이게 바로 철학이에요.

“이번에 우리학교가 과학경시대회에서 일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학교가 소문났습니다. 이제 서울대학에 많이 보냈으니까 광주에서 아주 유명한 학교가 될 것입니다.” 철학자는, “네가 뭔데? 그래서?”라고 묻는 거예요.

네가 제국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자기 원대로 세상이 잘 돌아갈 때 성공했다고 하잖아요. 성공했다는 순간에 그 사람은 뭘 잊어버립니까? 내가 성공해야 될 이유가 뭔지를 묻습니까? 안 묻지요. 그걸 묻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과학이란 폭력적이고 제국주의적이란 말이죠. 일방적이고 지밖에 모르고.

언제 토끼로 실험할 때 토끼한테 물어본 적 있습니까? 쥐로 실험할 때 쥐한테 물어본 적 있습니까? 없지요. 제약회사에서 신약 개발할 때 주사 놓을 때 흰쥐한테 물어본 적 있습니까? 기껏해야 나중에 죽여 놓고 쓰레기에 넣고 위령제 지내는 그 정도.

인간은 왜 그따위 식으로 살아가느냐? 그걸 조사한 것이 바로 현상학에서 나오는데 그게 9페이지에 나옵니다. “오로지 ‘의식’으로서의 인간이어야만 한다.” 9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에. 인간의 의식은 오직 인간 만이어야 한다는 아주 일방적인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인간 만이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 외에 모든 세상은 인간의 표상이론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용해도 저쪽은 할 말이 없는, 인간 외에 어떤 자연도 할 말이 없고 인간이 다루는 대로 다루어지고 나머지는 쓰레기로 처분되는 겁니다.

활성산소 이것이 세포를 노화시키고 인간의 암세포를 유발시킨다는데 활성산소를 제거돼야 되고 다른 산소는 유용하다는데 활성산소한테 물어보세요. 네가 뭔데 필요하다, 필요 없다고 네가 주관하느냐? 연탄가스의 주범인 일산화탄소를 내보냈다 할 때 일산화탄소한테 허락 맡고 내보냈습니까? 아니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오직 인간 만이어야 하는 그런 의식에 의해서 인간은 세계를 바라본다. 정말 인간이 생각하는 그 세계가 맞느냐고 따지는 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과학은 그게 아니죠. 인간에게 이용되면 그것이 곧 있어야 될 자연으로 전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인간 말고 많은 변화가 있고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9페이지 위에서 여덟 번째 줄에, “인간은 수많은 다양한 존재자를 자기라는 하나의 지평 위에 그러모을 수 있는 자다.” 그러모으는 자란 쉬운 말로 긁어모으는 자로 긁어모아서 자기한테 이용되는 건 다 긁어모아서 하나의 동일자로 만들었다. 똑같은 것으로 만들고 조직한 거예요. 그 조직과 구성된 것은 누구에게 봉사하기 위함입니까? 인간. 그것도 인간 중에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모든 것은 수집해서 평가를 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 자체는 유아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보편적이다. 유아적이란 자기밖에 모르는 것을 유아론적이라 하죠. 유아론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선 보편적이다. 유아론적인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고 보편적이다 이 말입니다. 전부다 지밖에 모른다는 뜻이에요.

여기에서 인간의 의식이 어느 정도로 보편적이냐 하면, 인간의 개체를 뛰어넘어 전적으로 모든 보편적인 것을 하나로 동질화시킬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있는 게 의식인데 “의식만이 신의 나이만큼이나 늙은 우주 전체를 일순간에 가로지르며 무수한 타자를 하나의 지평 위에, 즉 의식 자신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거예요.

아까 안드로메다가 멀리 있다 할지라도 “안드로메다가 저기 있네.” 그러면 안드로메다가 “까꿍” 이럽니까? 안드로메다가 저기 있다는 순간 안드로메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안드로메다는 은하계 제일 끝에 있는 성운을 말합니다. 안드로메다 성운은 결국 누구의 표적이 됩니까? 나의 표적이 되는 거죠. 안드로메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니트에 안드로메다 도안을 해서 팔아먹고. 안드로메다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어.

인간의 의식은 신의 나이만큼 늙은 우주니까. 우주는 신과 더불어 늙어가고 있는데 늙어가는 중에 기껏 점 같은 존재가 인간이지만 그 점에서 나온 인간의 의식은 신의 나이만큼 늙은 모든 우주를 포괄할 수 있고 그것은 자기 위주로 동일하게 편평하게 끌어당길 수 있는 능력이 의식한데 있다 이 말입니다. 이 의식이 좋다는 말입니까, 나쁘다는 말입니까? 미쳤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햄릿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호두 껍질 속에 갇혀있어도 나 자신은 무한한 우주의 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햄릿],Ⅱ, 2) 호두 껍질 속의 우주라는 이야기가 유명한 천문학에 관한 책에 나와요.

“이처럼 세계를 자기가 고안한 계산을 통해 앞에 그림으로 세우는 주체의 표상 활동 뒤엔, 다자를 하나의 지평 위에 그러모을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하죠.

그 다음에 10페이지를 봅시다. 거기에 대해서 들뢰즈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들뢰즈 이전에 칸트 그리고 현상학의 훗설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한 건데 칸트 이야기는 뒤에 나옵니다. 표상이란 단어에서 접두어 ‘RE-’는 되풀이란 뜻이죠.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시란 뭐냐 하면, 세상에 있는 것을 그냥 있다고 방치하지 않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세상에 집어넣으면 순간에 그 세상은 내가 여기 있음에 봉사해야 되고, 나의 있음을 확인해야 될 하나의 종노릇이 돼버리죠.

예를 들어서 미장원에 아주머니들 여섯 명이 머리 깎고 있었다. 그때 백화점에서 물건 훔친 여자가 미장원에 들어와서 자기가 경찰에 쫓기니까 엉뚱한 미장원에 몸 숨기고 있다가 경찰한데 걸렸다. 그러면 경찰에선 여섯 명 다 불러요. 그중에 공범이 있는지. 졸지에 가만있다가 경찰서에 가서 조서 쓰게 돼있어요. “나는 저 여자와 관계없습니다. 공범자가 아닙니다.”

이처럼 자기를 가만있는데 인간이 쑥 들어가면, 원숭이와 개미는 인간에게 무슨 의미냐? “인간이여, 개미한테 배워라.” 해서 개미의 사회성과 갑자기 연관시켜버리고. 모든 것을 인간의 의식 속에 연관이 돼요. 그것이 인간이 자기를 주체라고 확인하고 있는 그런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작업들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개별자가 다 그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인간이 모이는 사회란 것은 그런 것들이 모인 사회니까 동일성 아니면, 같은 의견 아니면 다른 것은 적으로 취급하겠죠. 그렇게 되면 자기와 같지 않은 것에 대한 핍박과 멸시와 천대가 자연히 유발되겠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와 같이 한다는 말은 나에게 필요 없는 것들에 대한 멸시를 이야기합니다.

어제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고, 어제의 원수가 오늘은 동지가 되는 것이 정치판이 아닙니까. 그들이 왜 적과 동지, 동지와 적을 왔다갔다하는 겁니까? 상대를 볼 때 뭐로 봅니까? 그 사람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내가 구성한 나의 동질성 속에 집어넣을까, 말까를 누가 결정합니까? 내가 결정한다고요. 같은 동질성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나한테 이득이 될 경우에만 집어넣고, 나를 해코지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추방시키죠. 그건 너무나 자기 일방적이죠. 일방적인데도 사람들은 그걸 참 합리적이고 일을 과학적으로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말로 참 이성적으로 했다.

그것이 바로 10페이지부터 11페이지에 나오는 칸트 이야기가 나옵니다. 칸트는 모든 것을 종합을 해요. 세상을 하나의 표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 뭉치는데 표상 속에 하나의 결합을 집어넣는 방식을 10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칸트에게서 상상력이 수행하는 ‘세 개의 종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세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는 겁니다. 이걸 감성과 지성과 이성이란 말을 했죠.

결국 이 모든 것을 동원한 것이 뭐냐 하면, 이 세상이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 자신의 의식이 어떻게 꾸미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진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네 세상, 내 세상 다르고 진짜 세상은 뭐냐? 물자체라 해서 물질 할 때 물(物), 물자체(物自體)라 해서 the thing-in-itself 이것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어떤 숭고를 느낀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알 수 없는 물자체, 신의 영역 그것을 있다는 증거는 바로 우리 속에 법을 지켜야 된다는 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명령, 도덕법이라 했어요. 그 도덕법을 실천하는 그것. 그래서 칸트는 말하기를 법이 있어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법이 있기 때문에 지키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은 우리가 위반함으로써 법을 법 되게 한다. 우리가 법을 위반할 때 우리가 죄인 될 수밖에 없는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물자체, 선한 그 자체가 어디엔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위반을 통해서 확인해 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광주강의에서 알 수 없는 그것을 헤겔은 절대이성으로 바꾸었죠. 절대이성을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이 육신이 된 이걸로 끝났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헤겔이 중요한 걸 하나 까먹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됐다 하는데 성경에는, 하나님이 죄인 되었어요. 모든 사람은 죄인 되고 싶어요, 의인 되고 싶어요? 다른 말로 지옥 가고 싶어요, 천국 가고 싶어요? 천국 가려면 의인 돼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모든 뭐냐? 인간은 자기가 의인되고 싶어 한다 말이죠. 헤겔이 그걸 다루질 못해요.

하나님이 사람 됐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죄인 되었죠. 이 말은 어느 인간도 자기 자신이 죄 짓고 있는 순간에도,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자기 우수함과 그래도 자기한테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라고 우길만한 것을 끄집어내면서 그것을 표상, 내가 대상을 아름답게 보고, 의롭게 보게 되면 반사적으로 주체가 형성되잖아요. 이런 착한 것이 있다고 착한 것을 대상으로 세우는 순간 그 대상과 연결돼있는 나는 어떻게 됩니까? 사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시대를 잘못 만나서 그런 거지 사실 나도 좋은 부모 만났으면 의인 될 뻔한 요소가 이미 나한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전적으로 죄인은 아니라고 양무리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근호 목사는 전적으로 죄인이라 하는데 전적인 죄인은 아니다. 왜? 죄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는 의로움은 있으니까. 그게 바로 칸트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또 헤겔도 이야기하는 거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의 철학이라고 보면 돼요. 철학은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그 자체가 죄인 줄 몰라요. 왜? 철학은 인간의 한계니까.

하나님이 죄인이 되었을 때 진짜 성도가 드는 기쁨은 이겁니다. 우리는 죄인 되고 싶지 않고 의인 되고 싶잖아요. 의인 되고 싶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체를 형성할 때 나를 죄인으로 만든 주체를 형성하는 게 아니고 나를 의인화시키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다시 꾸미게 되죠. 그렇다면 내가 되고 싶어 의인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죄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앞에서 우리는 문제될 것도 아닌 쓸데없는 것에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이 어떻게 죄인 되어서 구원받는지 여기에 관심 있는데 우리는 의인 못 되어서 안달이니까 우린 엉뚱한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엉뚱한 생각을 하다보니까 엉뚱한 생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거기서 고민과 불평이 생기고 반항이 생기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갑자기 내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어쩌면 좋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뭐랍니까? “나, 하나님이지만 죄인 되었거든.” 뭔가 소통이 안 되죠. 다시 말해서 네 아들 죽은 것이 그게 무슨 큰 문제냐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주체가 아니고 진정한 주체는 누구밖에 없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에. 세상의 모든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하여 주님께서 친히 만드신 세상이잖아요. 그럼 세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볼 때만 제대로 세상이 보이지 그 대상 중에 하나인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반칙을 하고 있는 겁니다. 큰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자식이 열 명 있었는데 하룻밤에 열 명이 다 죽었습니다. 보통 문제 아니죠. 있는 재산 다 날리고. 그럴 때 욥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가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냐, 세상은 나에게 어떤 이득을 줄 것이냐는 쪽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체입니다.”라는 쪽으로 이야기하죠.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욥을 가지고 어디까지 접근하느냐 하면, 이제는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 악마가 쓸 수 있는 최후의 무기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믿음 있는 욥을 이용해서 그 최후의 무기를 발각시킵니다. 그건 고난이죠. 십자가 고난이 욥기에서 튀어나옵니다. 마귀는 장담합니다. 어떤 인간도 고난에서 하나님께 다 대들 것이다. 인간마다 주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건드리면 결국 마지막 주체 근원을 건드리게 되겠죠. 주체 근원이 되는 그 자리는 이미 자기가 꽉 쥐고 있다고 자신만만합니다.

그래서 악마는 그걸로 하나님과 내기를 하죠. 욥이라 할지라도 넘어갑니다. 인간의 주체는 이미 내 손 안에 있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악마의 대결은 무엇의 대결입니까? 과연 하나님이 직접 쥐고 있는 인간이 있느냐, 없느냐 그 내기겠죠. 악마는 뭐냐? 욥이라 할지라도 내가 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마가 쥐고 있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게 하나님 뜻이거든요.

하나님께서 그 내기에서 욥에게 찾아옴으로서 욥이 어떻게 합니까?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죠. 그 순간 욥의 주체는 어디서 찾습니까? 자기가 회개해야 될 그분이 주체고 욥은 주님이 하시는 일에 하나의 대상의 자리에 머물게 되는 겁니다. 그 자리에서만 욥은 친구를 위해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신 것은 욥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욥이 앉고 있는 방석, 그 자리에게 무엇이 유발되게 한다?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자리에서 올라오시는 분에 의해서 죄인도, 욥의 친구도 용서가 될 수 있다는 그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바로 악마까지 동원시키는 이게 바로 지혜입니다. 세상을 만든 지혜.

이건 너무 철학만하면 은혜 없다 싶어서 중간에 이야기한 것이고. 그런 이야기는 이 책에 안 나오고.

12페이지 끝에 보면, “차이란 그 자체로는 존립할 수 없고 늘 동일성의 그릇 안에 담겨서만 사유될 수 있다.” 지금 13페이지에 나오는 것은, 인간의 주체적인 의식의 입장에서 차이라는 것은 동일성 밖으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규칙의 지배를 받는 차이가 되는 거예요. 어떤 차이가 와서 동일성 안으로 다시 원상복귀 되는 거리에서만 허용이 되는 차이. 동질한 질 가운데서 차이가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미리 해봅시다. 19페이지 중간에 보면, 플라톤 나오죠. 열째 줄에, “플라톤은 개별자들에 대해 오로지 유사한 것만이 서로 다르다.” 어렵죠? 그래서 풀이를 해놨어요. “즉 기준이 되는 유사성이나 동질성을 전제하고서만 차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키 재기할 때 높이를 측정하는 요소라는 유사성에서만, “너는 더 크고, 너는 깔창 깔았네.” 이게 성립이 되죠. 오직 유사한 것만 그렇다는 말은, 같다, 다르다 할 때는 똑같은 성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에만, “네가 좀 낫네. 네가 못하네.” 된다 말이죠. 그래서 어떤 경상도 사람이 하잖아요. “똑같네.” 그러면 이쪽에서는 “전혀 다르거든. 봐봐. 이 티셔츠는 강남에서 입을 때는 휘우욱하고 들어가지.” 딸기와 티셔츠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 자체를 말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프루스트는 말하기를 19페이지 중간에, “오로지 차이들만이 서로 유사하다.”고 이야기한다. “즉 유사성은 차이의 전제가 아니라 차이의 산물이다.” 유사성이란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딸기와 귤이 차이가 난다는 말은 차이가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둘 다 과일이기 때문에. 동질성을 의식하게 되면, 귤도 과일이고 딸기도 과일인데 모양이나 색깔이 다르다 할 때는 동질성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들뢰즈나 프루스트나 현대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그런 게 아니고 포크와 딸기, 과일이 아니고. 과일이란 과일은 없어요. 이것 하나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가요. 과일이란 과일은 없습니다. 딸기 같은 것을 결과로 지칭할 때 과일이라 하는 거지, 사람은 없어요. 아무개는 있지, 이름은 있지만 사람은 없듯이 같은 유사성으로 하나로 뭉쳐서 추상적인 새로운 개념을 띠울 때 과일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포크와 귤과의 차이점은, 동질성이 있는 데서는 묻지를 않지요. 포크와 과일과의 차이는 묻지요. 과일은 먹는 것이고 포크는 찍는 것이다. 하나는 기계과 하나는 자연물이고 해서 차이나지만 포크와 귤과의 차이점은? 이렇게 물을 수 없지요. 왜? 같은 유사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진정한 차이다. 차이란 그런 차이를 두고 해야 진정한 차이가 아니냐가 들뢰즈의 사상이란 말이죠.

그 차이들을 하나로 새롭게 해보자. 왜? 지금까지 기호나 언어라 하는 것은 같은 것끼리 모여서, 아까 인간 주체의 제국주의화, 일방적인 독재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그걸 증명해주는 도구로써, 매개체로서 기호라는 게 있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기호는 그렇게 해서는 인간의 기호분석에서 스스로 옳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다시 13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 “다시 현재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표상활동인데 현재화한다는 것은 후설의 현상학인데, “그 의미는 시간 의식에 대한 후설의 분석 속에서 찾아진다. 후설의 시간성 분석은 지향적 대상과 관계하는 의식의 지향적 활동의 시간성에 관한 분석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가령 내가 어떤 멜로디를 듣고 있을 때 그 멜로디를 시간성 속에서 지향하는 의식의 활동은 어떻게 가능한가?”

멜로디가 ‘도미솔~’ 할 때 ‘미’할 때 ‘도’는 끝났지요. ‘솔’할 때 ‘도미’는 없어졌지요. 하지만 ‘도미솔’할 때 그걸 듣고 있는 인간은 ‘도미솔’ 음 자체를 보는 게 아니고 ‘도미솔’을 통해서 시간화를 시켜버리면 인간의 시간 속에 ‘도미솔’이 같이 엮여있으면서 그게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거예요. ‘솔’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솔’은 전에 있던 ‘도미’가 있었기 때문에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등장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구축할 때 인간의 의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의 시간성을 가지고 의식을 풀이해야 되지 시간성을 빼놓고 인간이 어떻게 하나하나의 모든 사건과 변화되는 것을 시간이 어떻게 포착하는가? 이걸 놓쳐버리면 이 세상에 대해서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 훗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도미솔~’ 하고 이야기 끝나버렸는데 사람들은 말하기를 방금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어요. 소리는 없어졌는데. 뭐 속에 있다? 인간의 기억 속에. 그 기억도 인간의 시간성 속에 이미 ‘도미솔’이 기억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세상을 볼 때 하나의 독재적인, 제국주의적인 방식, 어떤 새가 노래한다. 물어보세요. 새가 노래하는지. 새가, “나는 가수다” 이럽니까? 지가 노래한 걸 들었어요. 전에 노래는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게 먼저 있었기 때문에 새가 노래하니까 일방적으로 허도 없이⋯⋯

그래서 14페이지 중간에 보면, “이 살아있는 현전, 절대적 의식은 자기 스스로를 시간화하는 의식”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시간화시키죠. 그러면 이것은 자신을 현재 주인공으로 만들죠. 그걸 두 자로 ‘역사’라 하죠. 그래서 역사는 조작된 거죠. 누구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자존심을 위해서. 과장되고. 그런데 개혁주의는 역사를 주장하죠. 왜? 개혁주의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위해서. 그래서 제가 위선이라 했죠.

15페이지에 “자기와 다른 전적인 외재적 대상으로부터의 촉발, 곧 이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촉발이 아니라 스스로부터의 촉발, 즉 촉발이다.” 현재의 자기의식, 그걸 ‘근원 인상’이라 했는데 어려운 용어는 외울 필요 없어요. 후설은 말하기를 세상의 모든 것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나로부터 촉발된, 야기된 그런 식으로 의식이 시간성을 구성해버리면 그 시간구성에 의해서 세상은 자기 앞에서 재구성이 되겠죠. 그걸 표현 또 표상이라 한단 말이죠. 그걸 기호라 하고.

누가 욕을 해도 기분 나쁘다는 말은 뭡니까? 상대방이 욕을 해서 기분 나쁜 게 아니고 그걸 욕으로 알아듣는 본인이 촉발돼서 “욕 맞지? 욕 맞는 것 같아.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워. 너 욕했지?” 이렇게 나온다 말이죠. 이게 바로 동일성의 시간성 또는 동일성의 획득이라는 겁니다. “대상의 객관화”라고 15페이지 여섯 번째 줄에 돼있죠. “시간의 의식 속에서 비로소 대상의 동일화가 획득”된다. 지난 시간을 보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자기됨을 나란 주체로서 활동해도 되는 독재적인 권한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표상을 한다.

그게 바로 들뢰즈가 공격하는 차이를 놓치고 있는 기존의 철학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철학을 엎어야 된다. 그 동질성 철학 때문에 이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그리고 중요한 유사성과 동질성에 편입하지 못한 것들을 이유 없이 미워하고 멸시하는 비윤리적 세상이 된다 이 말입니다.

-기호라는 것은, 내가 호감을 갖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 맞죠?

아닙니다. 그 기호 말하는 게 아니고 문자로서 기호입니다.

17페이지에 보면,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이걸 가지고, “자기 자신과 벌이는 고독한 축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감동시키는 일, 곧 수음행위에 불과하다.” 자위행위다 이 말이죠.

그런데 비표상적 사유란 무슨 뜻이냐 하면, 여기 잘 설명했어요. 17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주관에 능력을 통해서 결코 표상될 수 없는 것과의 만남에 의해서 사유는 시작된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것이 기호다. 이것이 들뢰즈의 사상입니다.

내가 아는 것들만, 나한테 이익이 되는 것들만 내가 대상을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뽑아 챙기는 식, 꽃다발에 꽃 모으듯이 나한테 유리한 것만 모아서 그것으로 표상한 것이 아니고 그러한 촉발이 오게 된 것은, 내가 어떻게 감당 못할 그리고 예측하지 못하고, 낯설기 짝이 없고, 기대치 않은 어떤 사건이 외부에서 촉발이 되어서 내가 거기서 방어하고, 내 자산을 수호하고자 하는 그런 새로운 사건이 덩달아 동반해서 일어나서 우리는 동질성을 주장하는 게 아닌지 생각해보란 말이죠.

가만있는 나를 누가 건드릴 때 “충성” 이건 방금 제대한 사람이거든요. 가만있으면 그런 짓 안 하는데. 제대한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술 먹고 폭행죄로 파출소에서 끌려와서 순경들 지나가니까 “충성” 그게 cctv에 찍혀서 다 나왔어요.

17페이지 밑에서부터 18페이지 넘어가는데 “‘나’란 한낱 임의적으로 설정된 전제이며, 사유란 어떤 주체적 지반도 가지지 않는 익명적인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것은 출발점으로 삼지 말고 결과물로 보자 이 말입니다. “그리하여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그 코키토)란 근원적인 지반이 아니라 한낱 익명적 사유의 활동을 통해” 그러니까 어떤 것을 설명하자 하니까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차후적으로 하나 전제로 깔아놓는 게 나라는 거죠. 이걸 “수동적 발생”이다.

나보다 나의 외부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표상될 수 없는 이것은, 내가 애초부터 표상할 자격도 없고, 파생될 수 없는 낯선 그것을 들뢰즈는 ‘기호’라고 이야기해요. 매개체 표상 그러니까 외부가 나한테 다가올 때 기호라는 매개, 문자라는 매개로 다가와서 세상을 차이라는 것이, 네가 생각한 동질성 작업보다 더 넓은 범위가 바로 네 외부에 있는 차이성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매개체가 기호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쉽게 말해서 성경문자 하나하나라는 거죠. 성경문자뿐만 아니고 소설 등 모든 게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소설을 쓰면 그 소설은 작가의 것입니까? 작가의 것도 아니고 독자의 것도 아니고 소설 그 자체의 것이죠. 소설이라는 엉뚱한 것이 하나 등장한 것이죠. 작가가 자기소설을 자기가 설명하면 소설이 가만두지 않습니다. 내가 촉발해서 만들어놓은 소설을 네가 쓴 것처럼 착각하느냐? 너는 수동적 발생에 불과한데. 이런 것이 상당히 전위적이죠. 뭔가 전복되는 겁니다. 조개 말고 완전히 뒤엎는 전복.

보통 부모가 자식을 낳았다 하잖아요. 자식 입장에서는, “내가 있기 위해서 두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저녁 없지, 뭐. “가서 공부해.”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두 분이 아니시면 어떻게 내 몸이 있을까요? 그게 진짜 부모를 높이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면 기분 더럽죠. 진짜 자식 같으면, “어머니 날 낳으시고” 소리 하지 말고 가만있어야 돼요.

이미 나라는 주체를 상정할 때 이미 부모는 나를 위한 종속된 개념들의 기호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있기 위해서 여러분이 있었다는 것밖에 안 된다고. 아무리 뒤늦게 눈치 채고 효도해도 소용없어요. 그래서 어떤 동물처럼 자식 나면 피해야 돼요. 자식이 부모를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에.

18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세계란 동일한 표상 활동을 통해 동일적인 것의 형식 속에서 체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표상 활동이 어떻게도 동일성 속에 종속시킬 수 없는 파편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동일성 속에 종속될 수 없는 차이 나는 것들의 조각들이 동질성이라고 말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들뢰즈가 말한 것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란 상위의 동질성을 전제하는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어떤 상위의 개념도 전제하지 않는 ‘차이자체’가 아닌가?” ‘차이 자체’ 이게 이 강의에 제일 어려운 말이에요.

차이가 아니고 차이자체 이 말이 뭐냐 하면, 여기 귤 있고, 포도 있고, 딸기 있단 말이죠. 이걸 과일들이라 하지 말고 그냥 포도와 딸기와 귤과 차이 난다고 하지도 말고, 차이가 포도와 귤과 딸기를 만들어냈다고 봐라. 차이자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포도는 포도란 동일성, 귤은 귤이란 동일성, 딸기는 딸기란 동일성이 이 땅에 등장했다. 동일성이 등장한 것으로 봐서 차이가 가장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철학입니다.

이 말은 결국 어떤 윤리를 말하는데 있어서 아까 집사님이 말하는 그대로 애가 립스틱 바르고 학교에 오나, 파마를 하고 오나 그런 것으로 기성세대가 동일한 교복에 동일한 머리카락과 동일한 단발머리 그런 인식으로 그것을 억압하지 말자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남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차이 그 자체가 차이지기 위해서 우리는 서로 달라야 된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집사님 말이 이쪽에서는 맞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기성세대가 케이팝 따라 부르란 말이 아니고 그러면 기성세대를 또 누가 동질성에 복종시킵니까? 자기 세대가. 그러지 말고 차이진다는 자체를 존중하자 이 말이죠.

어떤 사람은 동성연애하고, 어떤 사람은 이성연애를 하는데 그러니까 남자, 여자가 서로 다른 성이 사람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느냐?”라고 그걸 미워하지 말자는 거예요. 왜? 그들을 미워하지 말고 인정해줘야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이것도 그들로부터 인정받을 수가 있다 이 말이죠. 오히려 차이의 다양함과 풍성함을 통해서 세상이 이 정도로 살만한 세상인 것을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주장입니다.

10분 쉽시다.

20120130 증도 엘도라도 특강 - 차이와 타자b
(강의:이근호 목사)

-제국주의가 아니면 생산력이 떨어지잖아요. 독일의 히틀러나 이런 사람이 나와서 모든 걸 지배하면서 아니면 기계라는 것, 우수한 한 사람에 대해서 복종시키는 것, 이런 것을 통해서 생산성은 좋은데 한 사람은 대장이고 나머지는 다 눌리니까 이건 문제가 있으니까

들뢰즈는 바로 거기에서 생산하고자 하는 목적이 뭐냐 하는 거예요. 누구를 위한 목적이냐? 예를 들어서 박정희 같은 경우에 “잘 살아보자” 할 때 잘 살아서 뭐 할 건데? 누구를 위한 잘 사는 거냐? 잘 살아보자에 방해하는 것은 전부다 반 윤리가 되고 비윤리가 돼요. 적이 된다니까. 그러면 박정희는 뭐라 합니까? “그러면 한국이 싫으냐? 잘 살기 싫으냐?”고 반문할 거란 말이죠. “그럼 너는 구식 화장실 사용하고, 초가집 같은데 바퀴벌레 있는데 살래? 너 혼자 그렇게 살아. 다른 사람은 고속도로 닦고 살 테니까.” 그러면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그거는 박정희, 당신이나 좋은 거고. 당신 좋다고 남도 좋다고 하지 말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박정희는 뭐라 합니까? “얼마나 좋은지 투표하자.” 하면, 그럼 또 다수결 자체가 폭력이라는 거예요.

-차이를 인정해주자 이 말이에요. 어디까지나.

-생각의 순환인데 너무 제국주의적이고, 권력에 종속되는 그런 구조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니까 약한 사람들의 권리도 인정하고, 노동자도 인정하고, 사용자도 인정하자는 서로 그렇게 해야 된다는 아이디어인데 그걸 정립시키기 위해서 네가 생각하는 그것도 윤리라고 이야기하고 공격하는데 그건 내가 보기엔 핵심은 아닌 것 같고 너무 강자에 의해서 억눌려온 이 구조에 대해서 못 마땅하니까 이런 아이디어를 만들면서 그 아이디어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이야기를 잡다하게 하는 것 같아요.

20페이지 봅시다. 20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보면, “후설 철학을 반성하면서 레비나스가 얻게 된 새로운 착상은 근원인상”, 근원인상이란 현상학에서 현재 자기의식을 근원인상이라고 표현해요. 근원인상을 자기촉발에 구조 안에서가 아니라 이것은 후설이 그렇게 주장했죠. 내가 촉발이 되어서 모든 걸 생각한다. 레비나스는, 아니야. 네가 주장한 것이 아니고 이질적인 것부터의 촉발의 구조 안에서 생각해봐야 된다는 겁니다.

“근원인상은 나와 절대적으로 이질적인 자, 늘 현재라는 현존으로 소환할 수 없는 자로부터만 올 수 있다.” 소환이란 뭡니까? “어이, 이리 와.” 불러서 내 앞에 세우는 걸 소환이라 하잖아요. “너는 오지 마.” 이렇게 할 자격이 있다 하는데 그게 아니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다가설 때 진정한 내가 모르는 이질적인 차이를 느끼면서 거기서 새로운 현재를 발생시킨다 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래놓고 핑계대기를, “난 옛날부터 알았어. 엘도라도 옛날부터 알았어.” 이런 소리한다 이 말이죠. 엘도라도 옛날부터 그림보고 사진보고 했잖아요. 막상 와보니까 사진으로 그림으로 영화로 또는 글로써 표현 못할 다른 게 촉발되지요. 창문 여니까 바람 불고, 이런 건 표현 안 됐잖아요. 밀물, 썰물도 표현 안 되고.

그리고 사진으로선 전경이 나오지만 현장에 와보면 바로 내가 이동해서 보는 바다 모습과 옆동에서 볼 때 어떻게 보이느냐는 현장에 와봐야 새롭게 촉발되는 새로운 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내가 선택된 장소가 아니라 이질적인 장소에 우리가 그냥 오히려 소환된 셈이 됩니다. 부름을 받은 것이 되죠.

그래서 그걸 ‘흔적’이라 하죠.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하나의 흔적이다. 무슨 흔적이냐? 나 외에 차이가 있고 나 외에 이질적인 것이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현재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나의 현전으로 현재화되지는 않는다. 내 시간으로 소유될 수는 없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지나간 과거다. 이렇게 봅니다.

20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타자의 얼굴은 완전한 과거의 흔적, 완전히 지나간 부재 속에 있다.” 이 말은 내가 생각하는 과거 속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그 인물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 속에 나타나지 않은 그런 요소라는 말입니다. 내가 생각한 엘도라도 리조트는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상상하고, 상상을 더해도 실제로 왔을 때 봤던 것은 그 이상이다. 우리는 그 이상이라 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동일성이기 때문에. 그것보다 많다는 뜻으로 하면 안 돼요. 전혀 다르다고 해야 돼요.

그렇다면 엘도라도라는 그 리조트 기호는 나에게는 이질적인 기호가 되겠지요. 엘도라도에 갔다 와서는 내가 이전에 알았던 엘도라도와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에 내일 집에 갈 수 있다면 집에 가서 기억한 엘도라도의 기억은 내가 경험한 기억이죠. 그리고 다음 해에 다시 와보세요. 그때 몰랐던 것이 또다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에 대한 자신은 어떤 의미에서 외부가 만들어낸 파생된 파생상품, 어쨌든 외부에서 만들어낸 결과물로서 그냥 존재한다고 보는 거죠. 그러면 우리의 주체는 내가 주체가 아니고 바로 외부의 낯선 것에 의해서 주체화될 뿐이지 주체화시키는 주인공은 주체화 되는 내가 아니고 나의 외부에 있는 겁니다. 나의 바깥 것에 의해서 나는 나라고 지칭될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외부에 의해서 놀아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체화되고 난 뒤에는 우리에게 찾아온 이질적인 것이 드디어 주체화돼버리면, 그 주체화란 더 이상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는 동질화되죠. 동질성을 갖추죠. “나, 엘도라도 갔다왔다.” 이러고 돌아다니죠. 그때부터 동질화시키죠.

다음에 같이 가면 그 요소에 들어있지 않은 또 다른 외부 요소가 들어와 버리면, 내가 본 엘도라도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풍경만이 아니고 모든 대상이 다 그런 거죠. 특히 부부도 마찬가지고. 십 년째 안 아내와 십일 년째 안 아내가 또 다릅니다. 십사 년째 남편과 십오 년째 남편이 또 다르고. 그래서 당신이란 여자는 평생 가도 모르겠다. 거기에 대한 적합한 말이 이겁니다. “네가 뭔데 날 알아야 돼. 네가 누구 허락받고 감히 날 알아.” 이게 정답이죠. “너는 너고, 나는 난데. 너는 차이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거야.”

바로 여기서 옛날 윤리는 삼부종사라 해서 여자는 무조건 남편한테 복종해야 된다는 것이 깨지죠. 그것은 가정이란 동질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런데 “네가 뭔데 날 알아야 돼.” 이러면 삼부종사란 옛날의 윤리는, 독재적인 것은 깨지죠. 다만 남은 것은 이렇게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서 부부가 차이 그 자체에 대해서 날마다 새로움을 습득하는 과정으로서 부부 생활하는 겁니다. 이것 주례로 쓰면 적당한데 좀 어렵다. 하객들 가운데 아무도 못 알아들어.

21페이지 봅시다. 처음에, “‘절대적으로 지나간’ ‘기억되지 않는’ 등의 어구는 ‘다시 현재화하는 활동’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다.” 배치됐다 이 말이죠. “기억되지 않는 과거로서의 흔적이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것은 중간에 보면, “오로지 사라진 자, 지나간 과거로서만 현존하게 해준다. ‘흔적을 남기는’ 한해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방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의 방면이냐?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방면이죠. 다시 말해서 내게 일어난 그 흔적은 결국 내가 소유할 수 있다, 없다? 나의 역사로 일방적으로 편입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느 날 동대구역에 가는데 태진아를 만난 적이 있어요. 지는 날 모르죠. 나는 티비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태진아 재산이 내 재산입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태진아를 봤다고 해서 그 사람 재산이 다 내 재산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외부에서 주어진 차이에서 주는 모든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 경험을 내 주체를 만드는 소유용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흔적이란 나로부터 방면된 거예요. 내가 붙잡을 수 없고 이미 나로부터 떠나버린 거예요. 다만 한때 흔적으로만 있는 거예요.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이 거기에 있어요. 그게 떠났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예요. 지금은 그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름다운 거예요. 첫사랑과 이십 년째 살아보세요. 첫사랑이 되는가. 아니죠. 잠시 흔적 남기고 바람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겁니다. 부재하기 때문에, 현재 없기 때문에 그리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찌 합니까’ 노래 부르고 난리나지. 옆에 있어도 가수가 자기 마누라한테 노래 안 불러줍니다. 꼭 자기한테 상처남기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을 때 노래 부르고 가사가 되지.

“흔적은 범인을 나의 의식의 거머쥐는 능력으로부터 빼앗아 가려버리지만 다른 한편 역설적이게도 오로지 흔적만이 범인의 현존을 확인해줄 수 있다.” 이건 기호를 설명하면서 계속 이야기해요. 다시 말해서 언어라는 것, 문자라는 것은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것을 우리한테 스스로 잡혀주는 겁니다. 따라서 기호를 해석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나한테 잡힌 나의 이득을 위해서, 나의 정당화를 위해서 기호를 설명할 수밖에 그렇게 유도해놓고 뒤통수치면서 “그건 아니거든” 이러고 가버리죠.

성경해석과 똑같은 것 아닙니까? 이것이 주의 뜻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그게 아니거든” 하고 가버리죠.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십계명 줬잖아요. 그들은 십계명 지킨다고 열심을 냈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오히려 너의 죄를 지적하기 위해서 저주 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로마서 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죠. 그걸 유대인들이 모르는 거예요.

하나의 바람 같은 흔적인데 흔적을 쥐고자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누구의 본성이에요? 주체의식을 갖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란 말이죠. 그래서 들뢰즈는 그 주체라는 것이 사실은 주체 될만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주체란 것도 바로 차이에서 나오는 하나의 일시적인 흔적이고, 익명적인 전제에 불과한 것이다. 나라는 게. 그걸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모르고 나는 나라고 나와 버리면 또다시 제국주의적 형태를 보여주게 된다. 이후에 데리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22페이지 데리다 이야기는, “현전의 상실은 경험, 즉 현전의 조건이다.” 현재 여기 있음을 상실한다는 경험은 현재 여기 있다는 조건이다. 여기에 뭐가 있다는 말은, 내가 있다고 여기는 이것 그대로의 그대로가 아니다.

여기 데리다 이야기가 나와요. “음성언어는, 문자언어에 의해 ‘대리 보충’됨을 통해서 가능하다.” 음성언어란게 대단히 어려운데요. 이게 왜 설명하기 어려우냐 하면, 데리다가 음성언어가 문자보다 더 우선된다는 것을 공격하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이걸 설명하려면 데리다가 왜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우선하는 것이 나쁘냐를 설명해야 돼요. 그래서 복잡해요. 넘어갑시다.

어쨌든 간에 세상 사람들은 음성이 먼저 있었는가, 문자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음성이 먼저 있었고 음성을 붙잡기 위해서 문자가 있다고 하는데 데리다는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 아이디어가 바로 동질성을 추구하는데서 나온 곡해요 오해다 이 말입니다.

음성이란 문자보고 읽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문자라 하는 것을 음성으로 읽을 때 이것은 나의 주체화작업을 위해서 음성을 읽지만 문자의 본래 뜻은 음성과 다르다는 겁니다. 왜? 음성은 하나의 흔적이니까. 그걸 ‘차연’이라. 차이나면서도 지연되는 것. 이것이다 싶으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버리듯이. 빠져나가서 다른 모습 띠고 있으면, “저거구나” 하면 또 그게 아니고.

결국은 어떤 것을 확정짓기 위해서 따라다니면 남는 것은 뭡니까? 만약에 귤이 멈춰있는데 귤이 뛰면 우리가 귤 따라 돌아다니면 바닥에 남는 건 나의 발자국이죠. 결국 귤이란 나의 주체는 일관성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약을 올린 셈이 되죠. 그게 세상이란 거예요. 혼나봐라. 너희들, 인간이란 결국 돈 따라, 사랑 따라, 정 따라, 뭐 따라 돌아다니는 이 작업들, 고정되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작업들이 너희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문자가 하나의 미끼가 되어서 “날 잡아보세요” 해서 “안 서나” 하면서 바닷가에서 “잡기만 해봐라” 할 때 그것이 우리 자신은, 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라는 그 인간으로 하여금 사건 따라서 맨날 헤까닥하고 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새로운 호기심에 따라서 분주하게 자신의 색깔을 다른 색깔로 곧잘 변장하는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이란 서로 상관돼있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23페이지에 보면, 레비나스가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데카르트적인 무시간적 순간들의 천편일률적인 나열을 깨뜨리고 비로소 미래를 도래하게 해주는 자는 흔적으로서의 타자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타자란 말은 남이란 뜻인데 남이 올 때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시간성을 갖고 오죠. 그러면 나라는 근원 인상, 현재 나는 이렇다, 나는 저게 교회라고 생각할 때 남은 내 시간성에 동의합니까? 동의 안 하죠. 왜? 남은 내가 아니니까.

세상을 볼 때 아까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표상이란 남이 어떻든 간에 일방적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대상을 정착시킬 때 그게 바로 내가 보는 세상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그 대상이란 나에 의해서 그 사람을 내 편리위주로, 내 이익위주로 일방적으로 고정된 내용으로 본단 말이죠. 그런데 상대방은 거기에 동의 안 하죠. 지는 지 나름대로 그 짓하고 있는데.

그래서 나의 동일성 속에 들어오지 않은 남이 온다는 것은 내가 생각한 미래가 어긋난다 이 말이죠. 부모가 자식 키울 때 자식들이 자기 원대로 되던가요? 안 되지요. 오히려 같이 맞춰준 것이 아주 큰 양보처럼 느껴지잖아요. 나중에 뒤돌아보면. “네가 나를 위해서 많이 양보했었구나. 부모 뜻 따른다고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이렇게 되죠.

그걸 메시아의 도래, 메시아의 구조로 본 거예요. 레비나스가. 메시아의 특징은 우리가 메시아를 생각하는 그 메시아마저도 기피하면서 다른 메시아 모습으로 온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떠한 메시아를 상정하고, 어떠한 메시아를 철저하게 구상을 해도 메시아는 그것과 다른 모습으로 오는 이유가, 그럴 때 우리가 나한테 갇혀있는 내가 만들고 내가 만들었기에 내가 만든 미래 속에 갇혀있는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내가 만든 미래에서 나를 빼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옴으로써 왔다는 것이 촉발이 되어서 나는 나의 미래상마저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자인해야 되죠. 이건 뭐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부인하는 거죠. 23페이지 이것 때문에 이 책을 보라고 한 거예요. 목사님들 보고. 철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할 때 어떤 사유적, 사상적 구조까지 동원시키고 있는지 보란 말이죠.

그리고 기존의 신학이 얼마나 동질성 속에 자기 교회, 자기 교단, 자기 개혁주의신학 그 자체만을 위해서 온갖 것들을 일방적으로 끌어당겨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보란 말이죠. 그리고 그들이 기도할 때 기도의 모든 내용들이 얼마나 자기 주체의 이익을 위해서 기도하고 신을 자기 세계에 끌어당겨서 노력하고 있는 걸 우리가 똑똑히 보자 이 말입니다.

23페이지 밑에서 일곱 번째 줄에, “이미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절대적 과거로서의 흔적에 대한 숙고는 신학적 문제 또한 외면할 수 없게끔 만든다.” 드디어 서동욱 씨가 어디까지 건드립니까? 신학까지 건드리죠. 신학이 옛날 철학, 칸트 철학과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신학,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알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주관적 힘으로, 즉 표상 활동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한자’는 오로지 이런 흔적과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사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는 것은 기존 신학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는 겁니다. 내가 알고 있는 신학에 주님이 동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님이 올 수 있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서동욱 씨가.

여기 나오죠. “신은 나의 규정을 초과하는 자, 손바닥으로 눈을 가린 사이 ‘이미 지나가버린 자’” 이게 출애굽기 33장 21~23절. 철학자가 성경구절을 막 대는 거예요. 왜 이렇게 성경구절을 알 수 있어요? 지가 성경 봐서 그런 게 아니고 자기가 유럽에서 공부했던 철학자들이 그 나라에서는 기독교 나라기 때문에 항상 성경이 최종 권위에요. 그 성경구절 인용한 것을 알고 이 구절이 적당하다 싶어서 집어넣은 거예요. 이 사람은 이 구절밖에 모를 거예요.

이 구절 아시죠. 그런데 이 구절 근처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33:19) 그 구절이 또 나와요.

“그러므로 절대적 과거가 아닌가?” 하고 묻지요. 절대적 과거란 내가 생각했던 내 기억 속에 있는 과거에 포함되지 않는 과거. 일방적으로 내 주체화 때문에 이것은 나의 과거라고 우겼던 그것으로 인하여 배척받고 버림받고 거기서 시선이 가지 않은 남아있는 절대적 과거. 그래서 메시아는 절대적 과거요, 절대적 현재요, 절대적 미래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죠. 이것은 묵시성을 말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나의 역사를 누가 깬다? 다가오시는 분의 자기 시간성으로 나를 깨는 거예요.

“이것만이 무한자가 우리 관심의 투영인 ‘우상’됨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찾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닌가?” 아닌가 하지 말고 솔직하게 서동욱 씨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신에서 벗어나서 참된 신에게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걸 ‘아닌가?’ 하는 거예요. 같은 말이에요. 이게 다 서동욱 씨가 레비나스한테 배운 거예요. 레비나스가 유대인이죠.

여기서 레비나스는 방금 그런 흔적을 “아이콘”이라 해요. 바탕화면에 나오는 아이콘. 24페이지에 보면, “아이콘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 자체가 되게끔 한다.” 보고 있으면서도 못 보게 만드는 게 아이콘이다 이 말이죠. 보고 있으면서도 안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것은 마치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이죠. 내가 보는 자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은 장난꾸러기 같아. 보고 있다는 사람을 못 보게 만들고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사람을 보게 만들고. 이것은 의인을 죄인 만들고 죄인을 의인 만들어서 내가 의인이라고 우기는 자를 죄인 만들고 내가 죄인이라고 우기는 자를 의인 만들고 그렇게 의인된 자를 죄인 만들고.

우리는 그렇게 의인-죄인, 죄인-의인 된 중심된 사건을 봐야 되죠.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이미 죄인, 의인 변화되잖아요. 어떤 변화된 표상, 기호 다른 말로 문자, 언어가 동원되더라도 그것을 유발시키는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바로 우리 몸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 십자가에서만 그게 나옵니다.

이게 사도 바울의 복음입니다. 그전까지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고 이러죠. 무슨 이야기합니까? 나는 율법에 흠이 없다고 자기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율법에 흠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볼 때 육체로 알았다고 보죠.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어떻게 됩니까? 완전히 주체가 자기가 아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나는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란 뜻이에요. 나는 홀로 있는 게 아니란 뜻이에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인 된다는 거예요.

의인 되고, 죄인 되고 그것이 어디서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되는데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우리 몸이 여기 있는 것처럼 존재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몸이 계시다는 것은 사건을 통해서만 그걸 우리가 접선이 돼요. 그게 바로 예수님 부활의 우발적인 사건이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광주에서 이야기했죠. 두 제자가 한 서너 시간 있었습니까? 서너 시간 있다가 식사할 때 예수님 알았잖아요. 그 뒤로 어떻게 됐습니까? “어, 주님” 하니까 없어졌지요. 우리 몸 같으면 나는 주님과 아니 계신 게 되는데 사도 바울의 신학, 복음 전함은 뭐냐 하면, 안 보이더라도 떠나도 함께 있는 게 된다. 왜? 주님이 사용하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사건들은 바로 우리 시간대에 우리 주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우주를 창조하신 묵시적인 주체에서 사건들이 계속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건 안에서 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손수건으로 병을 낫게 했죠. 사도 바울이 손수건으로 병을 낫게 했습니까? 아니죠. 사도 바울이 가졌던 손수건이 죽은 자를 살게 했죠. 그러면 그게 누구 소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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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