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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성경[수련회]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관리자(IP:203.♡.42.222)

13-05-12 08:12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살아계심으로 저희들이 살아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살아계신 주님의 손 안에 있사오니 저희들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와 목적이 오직 예수님과 비교해서 주님 하신 일 안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깨닫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강의는 이것(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 가지고 하겠습니다. 1페이지에 창세기에 보면, 위에서 세 번째 줄에, [하나님과 피조물의 ‘만남의 자리’도 말씀일 수밖에 없다.] 만남의 자리가 말씀일 수밖에 없는 것은, 만남의 자리를 우리가 만들어낸다든지 우리가 장만할 수 없고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따로 멋있는 자리를 다듬을 수도 없고 그냥 주신 말씀 자리만 들어서 하나님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날 때는 반드시 자신이 남긴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만나기 때문에 말씀을 만들 수 없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으로 이 대목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 말씀의 자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의 자리다. 그럼 그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만남의 자리에서 그 안에 모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게 다 지나게 된 거죠.

그림으로 그려보면, 어떤 자리를 마련하는데 이 자리에 무엇이 집약되느냐 하면, 여기에 조명발이 비추는 것처럼 집약되느냐 하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다 이 자리를 지나게 되는 겁니다. 지나게 되면 처음에 창세기부터 나오는 게 뭐냐 하면, 이 자리가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영어로 good. 이 자리 밖에 있으면, no good이죠. 나쁜 것이죠. 여기는 나쁜 것, 여기는 좋은 것. 그래서 말씀의 자리가 온 이것이 천국이고, 말씀 자리에 못 드는 이것은 지옥이고. 이렇게 구분되는 겁니다. 지옥과 천국은 이렇게 말씀이 있는 곳과 없는 곳으로 구분돼있습니다.

옆에 제가 그렸는데 사실은 나쁘다는 것이 제대로 그리면 좋음의 그림자로서 여기에 나쁜 것이 있어요. 그냥 나쁜 것이 아니고 이 자리가, ‘오메, 좋은 것’이라고 유사한 경상도 식 전라도인데 ‘야. 이 자리가 억수로 좋데이.’ 이렇게 추켜올리는 자리로서 지옥이란 말이죠.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세트로 돼있지요. 그들은 천국 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되게 좋겠네.’라고 부러워하는 가운데서 자리가 배당이 돼있습니다. 지옥 가도 그냥 놀러가는 것이 아니고 ‘참 좋겠네. 천국 가는 사람은.’ 그러한 일의 배당 때문에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정리하면, 좋은 것과 나쁜 것, 천국과 지옥은 하나로 연결돼있어서 지옥 없는 천국 없고, 천국 없는 지옥 없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머리 좋은 사람은 아시겠지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찾아온 것은 우리 인간을 위함이 아니고 이 말씀의 자리가 원래부터 창세기부터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의 자기 창조, 자기 작품을 위해서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 창조의 솜씨와 월등함을 뽐내는 자리고, 이쪽 자리는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그들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어떤 인간이 있다면, 이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하면,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좋다고 인정받는 사람만이 이곳에 합류가 되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들어온 사람만 여기에 합류가 되기 때문에 제가 처음에 전제가 말씀이 없으면 말씀 속에 못 들어온다 했지요. 그런데 여기 온 사람들은 모든 공로를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공로로만 돌리는 사람만 여기 이 자리를 점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계획이 언제부터 있었는가? 1페이지 중간에, 책이 두껍기 때문에 진도가 팍팍 나갑니다. 안 읽고 오신 분은 제 책임 아닙니다.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말씀에 대한 거절은 반창조로 내려가는데, 반창조란 소멸이나 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의 무질서와 혼돈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혼돈과 무질서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되면 창조에 대한 화답이 나와 있어요. 창조가 어떤 질문을 던졌으면 요한계시록에서 답변이 오는데, 처음에 혼돈과 무질서의 성격, 왜 이렇게 혼돈과 무질서가 왔느냐 하는 이유가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지옥을 묘사하면서 그게 등장합니다. 세 가지의 개구리영이 나오죠.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용, 음녀도 포함되는데 이렇게 해서 혼돈과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처음에 혼돈과 무질서에서 말씀을 주심으로서 어떤 질서가 잡히는데 그 질서는, 제가 여러 번 반복합니다. 한꺼번에 알 수 없는 거니까. 말씀대로 되매 그것이 좋은 것이다. 예수님 살아계실 때 추임새처럼 들어가는 구절들이 있어요.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추임새처럼 중간중간에 주께서 나귀 타고 가신 것도 말씀대로 응하게 하심이라. 주께서 말씀대로 응하니까 마리아가 잉태를 했다. 그것도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구약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로보암이 유다나라를 배반한 것도 아히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또는 여로보암 제단이 깨어지고 재가 쏟아지는 것도 아히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또는 나단 선지자의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제가 초반에 이렇게 설명해보면 궁금한 게 뭐냐? 사람의 자리, 인간의 자리, 그럼 나의 자리는 도대체 어디서 찾느냐 말이에요.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말씀을 지키고, 찬양을 하고, 뭔가 부지런떨 수 있고, 영광 돌릴 수 있는 만반의 마음 준비가 돼있는데 이러한 액션들, 행동들의 가치와 행함의 의미는 어디서 찾느냐 이 말이에요. 저는 그걸 왜 찾느냐 하는 거죠.

말씀대로 응한다 하면, 그 말씀에 관심 두면 되는데 말씀대로 응하는 것이 good이고 좋은 것인데 이미 좋은 것이 확보돼있는데 왜 거기서 눈 돌리면서 내가 열심히 행동하고 성의껏 헌금하고 예배하고 찬송하는 이 가치는 어느 구석에 찾습니까? 여기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 얻을 수 있습니까? 이런 시선 돌림이 저는 무척 수상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왜 따로 당신의 가치를 챙기려고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문방구의 점원 하나 들여놓았더니만 주인이, ‘요번 장사 안 되서 기쁘지?’ ‘기쁩니다.’ ‘그런데 인상 보니까 안 기쁜 것 같은데 왜 안 기뻐?’ 내 수입은 얼마냐고 묻는 거예요. 문방구에 취직해서 주인 생각 따로고, 직원 생각 따로인 거예요. 그러면 주인이 나가라 하겠지요. 네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종이 화내고 나가겠지요. 나가면 주인이 섭섭하게 한 마디 합니다.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그렇게 삐지고 나가는 것도 말씀대로 응하게 함이라. 뒤에 추임새 던지듯이 툭 던지고 나면 끝나버려요. 문제가.

다시 한 번 봅시다. 이 자리에서 이 자리의 영광을 빛내기 위해서 새싹 돋아나듯이 사람들이 돋아나요. 이렇게 말씀이 구분되기 위해서 지옥에서 돋아난 사람과 천국에서 돋아난 사람으로 이렇게 인간이 이렇게 돋아날 때 역사가 이렇게 돋아난다는 사실을 말씀 이외에는 돋아난 본인들도 몰라요. 아무도 모릅니다. 말씀이 임하게 되면 사람의 행동과 상관없이 창세전에 이미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결정돼있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이름이라는 게 거기 없어요. 누구누구는 천국 가거라는 게 없고, 어떻게 돼 있느냐 하면, 명시적으로 돼있는데,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 구원받는다고만 돼있지 구체적으로 대구에 사는 지묘동에 누구누구는 거기에 포함돼있다는 내용은 거기에 포함돼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보고 구원받았느냐고 자꾸 따지지 마세요. 왜냐하면 저도 같은 입장이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사만사천에 포함됩니까? 할 때 글쎄요. 자꾸 그런데 관심두면 십사만사천에 포함돼는 게 아니고 십사만사천일에 포함되어서 탈락이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죠. 관심이 엉뚱한데 가 있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모든 말씀은 인간에게 가려져있고 말씀이 와서 이 윤곽이 뚫립니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 모든 말씀이 가려져 있느냐 하면, 인간이라는 것이 조상이 뭔가 일을 잘못 저질렀다든지 어떻게 했는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우리 내부에서 사망이라는 것이 여기서 가동이 돼요.

오늘 아침에 한 걸 예로 들면, 애가 유리창을 깨니까 고층아파트에 찬 바람이 들어와서 감기 들었습니다. 애가 유리창 깨기 전까지는 찬 바람이 들어온 게 원인이 되어서 나한테 감기 걸린다는 그러한 인생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그런 것 몰라요. 그냥 장난치다 유리창 깨니까 찬 바람 들어와서 감기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선악과 따먹을 때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어린애가 유리창 깨면 찬 바람이 들어오는지 모르듯이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찬 바람이 원인이었고 너는 결과물에 불과하다고 통보해주죠. 그러면 ‘내가 감기 걸렸구나. 감기라는 것은 찬 바람이 들어오면 걸리는구나.’ 비로소 찬 바람과 자기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되듯이 인간은 감기 정도가 아니라 사망이 온다.

죽음이 오고 이마에 땀 흘려야 밥 먹고 살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있고 그리고 인간은 불안하고 수치를 느끼고 뭔가 가려야 살 수 있고, 부부가 같이 있으면서도 필요할 땐 남남으로 치고, 서로 변명하고 지적하고, 서로 타인으로 여기는 모든 어색하고 이상스러운 모든 것은 바깥에 있는 현상은 내 안에 있는 죽음이 자가 발전한 결과에요. 내 안에 죽음이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제부터 서서히 맛보라고 죽음이 개시되는데 이게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거예요. 우리 인생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는 거고.

창세기 4장에 가인이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죄가 덮치니까 자신도 모르게 ‘동생아 미안하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하지?’ 하면서 한단 말이죠. 이것은 본인은 동생을 죽이고 싶지 않더라도 죽음이 나를 덮치면 동생을 죽여야 되는데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선악과의 죽음의 세력이 새로운 양상으로 변양되어서 새로운 봇물 터지듯이 강물이 내려오다가 갈라지듯이, 이제 죽음이라는 것이 어디까지 갈라질지 몰라요. 계속 갈라지면서 새로운 양상, 새로운 결과들을 양산해낸다 이 말이죠.

그래서 가인은 동생을 죽였지요. 거기서 파생된 죄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동생을 죽였느냐?’ 하니까 제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아닌 척하면서 거짓말하지요. 그러니까 죽인 것 살인죄에다 거짓말했으니까 거짓말 죄 그리고 나한테 죄가 심하다고 반항하는 죄까지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인간 속에 죄가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에 따라서 죄가 드디어 담쟁이넝쿨이 퍼지듯이 온 세계에 퍼져가는 거예요. 인간은 세균을 옮기는 전염인자가 되어서 확 퍼져나가는 겁니다. 이거는 아벨도 마찬가지고 가인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같은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예외가 없어요. 구원받은 사람이고 안 받은 사람이고 죄가 확대돼 나갑니다. 어떻습니까? 즐겁지 않습니까? 상당히 즐겁지요.

이게 왜 즐거우냐 하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그 고집이 그게 자기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이 접수를 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심적인 스트레스와 부담을 덜어주는 겁니다. 지금 나 혼자 더는 것 같아.

성경 자체를 보세요. 창조 이전에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우리는 나도 거기에 끌려가고 있고 모든 사람이 가재도구가 탁류에 쓸리듯이 걷잡을 수 없이 하나님 말씀대로 되고 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큰 안심과 즐거움과 기쁨을 제공하는 겁니다.

왜? 그 말씀 가운데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뗏목이다.’ 뭐 이런 식으로. 내가 건질 자만 건져내는, 내가 대신해서 죄 사해준 사람만 떠내려가는 탁류에서 너는 올라타라고 낚시하듯이 그 주님의 역할도 그 말씀 안에 포함됐다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입니다.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낙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 손쓸 필요나 손쓸 여지는 전혀 없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몸짓과 우리 행동과 우리 양심과 우리의 태도 모든 것은 바로 아주 솜씨 있고 매끄럽고 또는 아주 교묘하면서도 그냥 쑥덕거리면서 죄에 대해서 마음껏 펼치면 되는 거예요. 펼치면 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한테 지저분해보이는 사람은 교도소 가고, 점잔해 보이면 성화되었다고 칭찬도 받고. 그거는 속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주님 보시기에는 똑같은 형편이에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왔다 했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의인이라고 우기거든 그것도 죄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위선인 줄 알라는 그 말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만 오야, 예수님만 패를 쥐고 있고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그 패에 놀아나야 될 피조물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아무리 자기가 훌륭하다고 자기를 설득해봐야 주님의 판정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고. ‘의인 손 들어보세요. 나가주세요.’ 이런 식으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라고 해놓고, ‘자기가 의인이란 사람은 나가주세요. 안녕히 가세요. 지옥으로.’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나는 죄인을 부르러왔다. 그러면 죄인이라 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죄인 여기 있습니다. 손 내려. 내가 죄인이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 너는 네가 죄인이라고 우기는 의인이야. 의인 노릇하는 거야. 죄인인 척 많이 하고 있는. 2011년도 최우수연기상. 전부다 똑같아. 손 내려. 전부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말씀이 자리만이 좋은 것이고 말씀의 자리가 아닌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좋다, 나쁘다는 것을 우리가 판정할 자격이 안 됩니다. 우리는 말씀밖에 있는 말씀을 모르는 존재인데 말씀이 오게 되면, ‘너는 창세전부터 원래 말씀 안에 있었어.’ 우리에게 소급, 집약돼있는 말씀 전체에서 에베소서 1장 4절을 끄집어내면서 너는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서 택정 받았다고 소식이 말씀의 자리에 오게 될 때 그게 성령을 통해서 반드시 중요합니다.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인간의 양심과 마음은 안 되고 성령을 통해서 믿게 된 사람은 에베소서 1장 4절, 창세전에서 예수 안에서 예정되었다는 그것만 믿어지는 게 아니고 창세기부터 전부다 믿어지는 거예요. 그게 믿어진다는 말은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은 헛방이라는 것을 기준자체를 바꿔치기한 거예요. 말씀이 옳고 나는 옳지 않다고 바꿔치기한 겁니다. 그걸 바꿔치기할 때 에베소서 1장 4절을 바꿔치기한 게 아니고 전부 다 바꿔치기하는 능력이 말씀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겁니다. 왜? 이게 좋기 때문에.

그 다음에 1페이지 끝에 보면, [인류가 활동하고 쉬는 터전인 땅은 그 모든 변화가 약속을 위한 역사적 배경과 공간으로서만 의미가 주어진다.] 그전에 창세기 3장 15절 있지만 넘어가고요. 이 말 중에서 제일 중요한 말은 ‘변화’입니다. 변화란 비고정적이다. 고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뭔가 종잡아 이게 나야. 이것이 아니야 이것이 나야. 이런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하나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그러한 재주가 우리한테 허락되지 않습니다. 왜? 모든 것이 변화하니까.

모든 변화를 하나로 묶어내는 걸 ‘시간’이라 합니다. 시간을 변화 중에서 어떤 한 시점에 이게 나라고 의식이 있을 때 나 의식에서 전체 변화된 시간을 보는 걸 ‘역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 이름은 의미 없습니다만 들어놓으세요. 하이데거란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책에 [존재와 시간]이란 게 있는데 거기에 보면, 역사란 변화하는 건데 역사는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이 역사가 아니고 그걸 역사라고 규정짓고 있는 나라는 현 존재 속에 시간성이 역사를 창출한다고 했습니다.

내 속에 흐르는 시간성이 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시간성이 역사를 만들어내니까 이 역사가 누구 중심이겠습니까? 역시 모든 역사가 나라는 인간을 증명해주는 그런 역사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역사를 믿지 말라는 겁니다. 뭔가 이거는 가문의 역사라고 할 때 믿지 말란 말이죠. 뼈대가 있는지 힘줄이 있는지 뭐가 있는지 그런 건 다 헛소리에 불과하다. 역사란 없는 거예요.

역사가 왜 없느냐 하면, A라는 사람이 역사를 만들면, B라는 사람이 역사를 만들고, C라는 사람도 역사를 만든다고. 그러니까 역사라는 게 다 달라요.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D라는 사람도 있단 말이죠. 전부다 X표에요. 네가 뭔데 이 사건은 빼고, 이 사건은 집어넣고, 이 사건은 과장되고, 이 사건은 소홀히 여기고 왜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함부로 사건을 이렇게 조립하고. 너, 뭐야? 네가 뭔데 이렇게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에 대해서 비난하고 부정해버리면 그 비난이 역사의 비난이 아닙니다. 어디까지 파급되겠습니까?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 도전장을 내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뭔데 나한테 공격하느냐 하면, 이쪽에선 너는 변화하잖아요. 작년의 너야, 내년의 너야. 다 달라. 아침마다 다르고, 저녁마다 다른 네가 기분 좋다면 기분 좋은 대로 업 되어서 기마이 쓰고, 기분 나쁘면 애들을 나무라고. 도대체 어느 모습이 네 모습이야? 지킬과 하이드처럼 너, 어느 쪽인데?

모든 사람의 변화는 사실은 A도 아니고 B도 아니고 C도 아니에요. 뭐냐 하면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서 이런 시간이 있는 거예요. 약속이란 새 언약인데 새 언약은 십자가인 줄 여러분 아시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시간이 있다는 말을 바꾸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십자가가 역사를 만들어낸다고 봐야 돼요. 주님의 고정된, 완전한 말씀을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긴 그림자가 세상의 모든 역사가 되는 겁니다.

대구의 팔공산에 가면 케이블카가 있거든요.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워서 여자의 후손이 이긴다는 것에서 출발하면, 여기서 케이블카를 깔아보자 이 말이죠. 그럼 여기에 십자가가 있다. 그러면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십자가까지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이것, 이게 약속 주머니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 안에 있느냐? 여기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케이블카가 안 보이게 됩니다. 오늘 강의중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뭐가 보이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과 십자가가 보입니다. 그럼 이 케이블카를 보려면 케이블카에서 뛰어내려야 돼요. 여기 케이블카 있고 창세기 있네. 그럼 이 사람은 이것이 변화되고 보고 있는 나는 변화가 안 되죠.

그럼 이 전체를 뭐라고 하면, 불교신자가 기독교 교회라고 판정을 내려요. 세상에 수천 종교가 있는데 그 중에 한 종교로 기독교가 있는데 그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경전을 섬기는데 그 내용에 이런 게 있다고 이 사람은 판정을 내리죠. 그렇다면 판정내릴 때 이 사람은 신자입니까? 전혀 신자 아니죠. 그냥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죠. 기독교가 뭔지 호기심을 가지고 교회 다닌 사람이죠.

그런데 이 옆에 교회 다닌 사람이 있더라도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불교 중이나 천주교 신부나 상관없이 이런 관점에서 자기가 고정됐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부다 하나의 말씀 밖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면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걸 종교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케이블카 안에 있는 사람은 종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종교라는 오락은 있는 줄 알죠. 그게 무슨 의미가 없죠. 다만 종교라는 것을 마귀가 만들어낸다는 것은 알지요. 그리고 이들이 보는 어떤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주장한다는 것도 알지요. 여기서 발달한 것이 성경고고학. 개혁주의신학 이런 것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애들 조립하는 장난감, 레고 랜드처럼 학자들이 신학으로 조립하는 거예요. 구원론을 여기다 집어넣을까? 창조론을 여기다 집어넣으면? 교회론은 여기다, 종말론은 여기다. 어떻게 강의나 해볼까 집어넣는 거예요. 신학교수들이 그런 짓을 많이 하죠. 자기 나름대로 평생 갖고 놀던 만지작거리는 장난감 같은 겁니다.

어떤 아저씨는 결혼해도 마징가Z 비슷한 그것 만든다고 수천만 원 날렸다는 사람도 있어요. 그건 자기 취미거든요. 그러니까 성경 보고 신학 만드는 취미를 우리는 말릴 수 없습니다. 심방하고 목회하는 게 취미인 목사들을 말릴 수가 없어요. 그것도 취미니까. 그런데 신자는 아니죠.

그게 신자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이 자체가 주의 말씀과 상관없다고 찔러버리면 뭔가 화를 낸다는 것은 본인이 뭔가 고정된 자아가 있다는 증거거든요. 고정된 자아가 없으면 찔러도 묵에 찔린 것처럼 아무 의미 없는데 ‘뭐 있네?’ 찔렀는데 왜 찌르느냐고 나온다면 그거는 케이블카 탄 게 아니고 케이블카 바깥에 나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인하라.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 했죠. 그러면 십자가란 요새 말로 하면 죽을 때 관이라고 보면 되는데, 말이 어려워요. 옛날 서부영화에 장고가 관을 끌고 갔잖아요. 그것은 자기 죽을 관이 아니고 저쪽 죽일 관을 끌고 왔는데, 이 관을 짊어지는 것은 아직 덜 죽은 거죠. 그런데 지가 관 속에 죽을 채로 들어가면 관은 누가 끕니까? 애매합니다. 진짜 애매해요. 애매한 걸 오늘 정해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약속이에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란 말은 너는 이미 죽은 인간이라고 바깥에서 관에 못을 박아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내가 뭘 하라가 아니라 덮친다는 의미에요. 주의 말씀은 십자가로 관으로서 내게 덮쳐지는 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케이블카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나를 주인공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말씀에 의하면 주인공은 십자가로 케이블카로 앞서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창세기 1장에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분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 속에 집어넣기 위해서 이제는 우리는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 고정돼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통보하고 확인해주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네가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예수 안에서 택함 받음에는 변화가 없다. 교도소 들락날락하고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살인강도가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그 사람은 두 가지의 선택을 해야 돼요. 내가 나쁜 짓을 해서 사람을 죽여서 형장에 끌려가는 이 결과가 나로부터 나온 결과냐 아니면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은 결과냐를 선택해야 된다니까요. 변화무쌍한 우리 자신은 어떤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언제 책임질까요? 27살 때? 서른 살 때 일어난 살인사건에 대해서 29살 때 일로 책임질까요, 32살 때 일로 책임질까요? 어떻게 책임질 건데?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 가인에게 벌을 내리죠. 세상의 벌은 책임지라고 준 벌이에요. 사실은 그건 잘못된 겁니다. 형법에서. 사람은 벌 내린다고 원상복귀 안 돼요. 사회적 복수심의 발로입니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나쁜 놈아. 같은 동료를 목줄 해서 비스킷 먹이고. 너도 한 번 그래봐. 그러면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속이 후련하죠. 누가 속 탑니까? 가해자 부모만 속 타지요. 자기 부모한테는 그런 애가 아니기 때문에. 못난 건 내 새끼기 때문에. 사회적 복수심이 정의라고 할 수 없거든요. 괜히 화나서 화풀이하고 뒷북 치고 있는 거예요. 복수한다고 죽은 애가 돌아오고 자살한 애가 다시 돌아옵니까?

사람의 복수란 자기가 고정돼있다고 여길 때만 복수가 생기는 거예요. 너 반드시 죽일 거야. 왜? 17살 때 나한테 돈 빼앗아 갔잖아. 그런데 옆에 다른 애가, 너는 내가 복수할 거야. 13살 때 내 이불에다 오줌 쌌잖아. 서로 얽히고설키고 한쪽은 복수하고 한쪽은 복수 당하고 바빠. 도대체 세상이 누구 복수하라고 있는 세상입니까?

교회 다니는 것도 하나님 이름 빌려서 자기 사적인 복수하려고 하나님 부추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거예요. ‘내가 돈 없어서 서러움 당하는 것 하나님 돈 팍 줘서 저 콧대 낮추게 하옵소서.’ 사적인 복수심에 하나님이 왜 끼어듭니까? 자기는 고정돼있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는 영원불멸하다는 거예요. 그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렇기 때문에. 나만 특별하게 못된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복수심을 갖고 있어요. 이게 홉스라는 학자의 주장입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경제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사적인 복수심의 발로가 경제라는 겁니다. 이를 악물고 출세하고 성공해야 될 이유가 자기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잊혀지지 않는 뭔가 있어요. 알 수 없는 복수심이 나를 추동시킨다. 나를 격려하고 독려해서 나는 남한테 복수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남한테 떠벌이기 위해서 나는 죽으면 안 돼. 지금 죽으면 복수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심정으로 교회 찾아와서 철야기도하고 성경 쓰고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 쓰기는 왜 쓰는데 성경 보면 될 텐데.

모든 것은 뭔가 내가 내 속에 알 수 없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어떻게 해소해보려는 심보로서 작용하는 거예요. 주님이 모든 복수심은 나한테 가져오라. 그래 내가 얻어맞을게. 분풀이 다 나한테 해. 다 나한테 가져와.

케이블카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달려있으면 이 안에서 우리는 뭘 갖고 있느냐 하면, 역사성을 갖고 있다 했죠. 복습해봅시다. 어떤 경우에 역사성이 있다 했습니까? 나 위주로 나의 역사가 나와요. 이씨 가문이면 이씨 가문의 역사가 나오고, 대성초등학교 나왔으면 대성초등학교 동창생의 역사가 드러나야 되고, 내가 삼성그룹에 있으면 삼성그룹의 동기생들이 나열되고, 202동 아파트 주민들은 주민들 모임 있어요. 장구 치면 장구 동호회도 있고. 역사성이란 전부다 자기로부터 나온 겁니다.

이것을 묵시로 예수님 중심의 시간이 들어와 버리면 이 묵시, 시간이 흐르지 않은데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그저 변화무쌍한 거죠. 결국 여기서 녹아져야 됩니다. 어떻게 녹아지는가? 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소유로 전환, 주님의 것으로 날마다 드려줘야 돼요. 내일되면 내일의 것으로 또 하나님께서 만들어내게 되면 그것도 주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넘겨지죠.

넘겨지게 되면 이 변화는 변화를 바라보는 변화가 아니고 나는 변하는데 무엇이 고정이냐? 무엇이 고정적인가가 보이죠. 고정적인 것이 있다면 변화 때문에 무서워하진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행동을 하게 되면 자기 행동은 반추라 하죠. 되새기게 되면 내 행동에 따라서 거기서 역사가 생깁니다. 이 역사는 나의 자존심이에요. 누가 역사를 짓밟으면 내가 화를 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곧 내가 고정돼있다는 거예요.

그걸 주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케이블카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내가 또 내 위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러한 어떤 사태가 주어진 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내가 주님의 것으로만 고정돼있다는 것, 주님 바라보라고 나한테 이런 일들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그동안 주님 안 바라보고 나만 바라봤던 나의 시선을 다시 예수님 바라보라고 이런 변화가 일어났었구나.

내가 강도가 되었다. 사형장에 끌려간다. Green Green Grass Of Home 노래 부르면서 내가 곧 죽는데 죽게 되면 목사님께서 나를 푸른 초장이 있는 고향에 묻어주겠지. 마지막 멘트 남기면서 사형장 끌려가면서 부른 톰 존스가 부른 노래가 있잖아요. 그 가사처럼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왜 다른 사람은 오래 사는데 나는 젊은 나이에 강도질하다가 일찍 죽느냐? 그것이 누구한테 원인이 있다? 고정된 주님이 너는 그런 변화를 겪으면서 고정된 분을 믿으라고 나에게 그런 변화를 준 거예요.

여러분 허파를 보면 허파꽈리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그 복잡한 허파꽈리 하나하나가 내가 허파라고 우기게 되면 허파에 구멍 납니다. 그럴 때 뭐라 합니까? 인간의 몸이 허파꽈리야 내 속에 허파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강도든, 살인자든, 창기든 관계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전부다 고정되어서 그런 변화, 혼돈과 무질서를 통해서 주님이 만든 그 자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유일하게 보기에 심히 좋은 자리가 되는 거예요.

이걸 바꿔서 생각하면 내가 사람 죽이고 도둑질 한 것인 주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되는 거예요. 이 기막힌 반전, 이 어처구니없는 반전을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믿지 않는 것이 저주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에요. 우리는 나를 고정시켜서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이 도적질해. 주께서 뭐라고 합니까? 니가 뭔데? 니가 거기 왜 등장하는데? 도적질 안 하면 구원 받는 그런 건 없어요.

예수님이 믿게 해서 우리가 믿는 것이지 내가 평소에 믿는 것은 허파꽈리가 잘난 척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믿음 아닌 것으로 주님께서 일들을 통해서 계속 다 부셔버립니다. ‘빨리 고백해. 너는 예수 믿는 적 없고 예수 믿는 너 자신을 믿었다고. 빨리 빨리 고백해. 괜히 연기하지 마. 나중에 천당 가면 다 들통 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번 이번 시간 정리한다면, 모든 것은 말씀 안에 있고, 말씀 안에 있을 때만 보기에 심히 좋은 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믿는 게 아니고 말씀을 주신 말씀 자체를 믿게 돼요. 그러면 말씀 자체가 고정이 되고 동시에 우리는 그 고정 앞에서 날마다 변화무쌍한 종잡을 수 없는 존재가 돼요.

여러분 일곱 살, 다섯 살 애들 뛰놀면 엄마가 종잡을 수 없지요. 엄마가 집을 비웠다하면 친구들 데려와서 엉망진창 하잖아요. 그런데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애야. 집안을 너무 어질러놨는데 거기에 대해서 할 말 없나?’ ‘엄마. 내가 무슨 문제 있는지 모르겠는데요. 나는 재미있을 뿐인데.’ ‘봐라. 집을 어질러놨잖아.’ ‘그거야 치우면 되지요.’ 그러니까 자기는 어떤 경우라도 마지막 최종점은, 내가 한 행동은 어쨌든 저쨌든 나는 정당하다는 자기 고정성을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내가 하나님처럼 살아야 내 몸이 편해요. 하나님 믿지 마세요. 지가 하나님이면서 뭘 믿어요.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 다니는 것은 우리 몸에 참 편하고, 나는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은 교회 가는 것도 괴롭고 조금 다니는 척하다 결국은 뛰쳐나오게 돼있어요. 제발 나 보고, ‘너는 하나님이야. 너는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사람 없느냐? 여러분!’ 제발 너는 사랑받을 만 하고 너는 하나님이며 너는 어떤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그런 소리를 하는 그런 친목단체, 그게 오늘날 교회라고 만들어진 거예요.

10분 쉽시다.

2012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2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을 요약하면, 인간 자체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음이 작동하는데 이 죽음이 어느 정도 세력을 펼치는지 몰라요.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류를 거치면서 죽음은 조절 대상이 안 됩니다. 죄는 우리의 관리대상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죄가 우리를 통해서 발산하기 때문에 그렇게 발산해줘야 그 자체가 말씀대로 되가는 거예요. 말씀대로 되가는 것을 우리가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말씀 안 되게 하는 것은 반역자가 되는 거잖아요. 성경에 하나님이 응하게 하심이라는 멘트가 계속 나온다는 것은, 우리가 말씀의 세력, 죄의 세력에서 우리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그래도 천국 가는 사람은 있기는 있잖아요. 왜 자꾸 천국 가는 사람을 놓칩니까? 이렇게 불만을 터트리는데 그것이 창세기 2페이지에 보면 나와요. 대신이에요. 대신 죽으심이에요.

인간 안에 죽음이 있다 했지요. 인간 안에 죽음이 있는 것에 대해서 메시아께서 자기도 죽음으로 우리한테 나타나는 거예요. 자기가 살아있으면서 오병이어 행하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그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는 이유가 이미 주님의 죽으심으로 볼 때 사실은 인간은 이미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래요. 죽은 자들은 죽음 안에서 둘이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이에요. 구원받을 자와 메시아는 죽음 안에서만 이야기돼요. 저는 살아서 찬양했습니다. 살아서 헌금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죽은 놈이 찬양했겠지. 죽은 놈이 헌금했겠지.

‘대신’ 뒤에 뭐가 나왔지요? 이야기해보세요. ‘대신 죽으심’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대속, 대신 할 때는 반드시 ‘죽으심’을 포함시켜서 이 안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리면 우리는 주님의 대신 죽으심에 참여되는 거예요. 죽으심에 참여되면 죽기 전에는 우리의 개성, 우리의 고집, 우리의 사상, 우리의 신학,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 다 갖고 있어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죽으심 속에 들어가면 그런 것은 나를 죽게 만든 요인이 돼요. 너 대신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늘 달고 들어가는 게 돼요. 신학 한다는 것, 내가 믿었다는 것, 내가 소망했다는 것, 내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그 모든 것까지 대신 죽으심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것이 주님께서 대신 죽어야만 해야 될 이유들로, 요건들로 재료로써 들어간다 이 말입니다.

라면 끓일 때 계란을 저었는데 그런데 딸이 하는 말이, ‘엄마, 계란은?’ 엄마가, ‘다 부셨잖아.’ 계란 없는 거예요. 계란이 라면 안에서 헤어졌다. 부셔졌다. 다 없는 거예요. 그런데 왜 찾습니까? 자기 기도, 헌금, 예배참석, 전도한 것 왜 찾아요? 대신 죽으심이 뭐가 돼버려요? 대신 죽으심 바깥에서 놀았지.

십자가 근처에 풀장이 있는데 풀장에서 십자가 구경하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들어오고. 애들아 저게 십자가란다. 이것 보고 안압지 보러 가자. 그 다음에 경주박물관 보러 가자. 우선 십자가 봐라. 그 다음에 부활 볼까? 이건 부활이고. 각자 너 자신의 모습으로 고정된 너의 자리로 돌아가. 이게 뭐예요? 취미지. 취미잖아요. 그건 종교 활동이죠.

보트 뒤에 있는 스크루에 휘말려 들어가면 갈기갈기 찢어져서 나라는 것을 남기지 않지요. 휘저어버리니까. 그래서 모든 성경의 한 복판에 대신 죽으심, 스크루가 돼요. 전부다 완전히 믹서기처럼 갈아버려요. 넣고 돌리고, 넣고 돌리고.

대신 죽으심이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뒤에 나온 사람들은 전부다 앞의 아벨에 복속 또는 예속이라고 해요. 아무리 뒤에 씨앗이 많이 나와도 그 사람은 죽은 아벨 대신 나온 셋이고 그래요. 그것이 창세기 4장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게 만들어서 죽은 아벨 대신 다른 신이라는 이런 새로운 양상의 의미를 창조하신 거예요.

누가? 케이블카 끝에 있는 십자가 진 예수님께서 자기 먼저 아벨을 보내서 아벨을 죽게 만들어서 아벨의 죽음을 대신 죽음의 차원으로 그걸 당기면서 케이블카에 전류를 보내는 겁니다. 그 케이블카에 탄 모든 사람은 전부다 대신 죽으심을 맛보면서 주님한테 끌려오도록 강력하게 전류를 보낸 거예요.

강의 끝나버렸네. 말씀의 자리가 보기에 심히 좋았다. 그리고 보기에 심히 좋았다의 그림자가 지옥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지옥에 속할지, 천국에 속할지 알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응해서 아벨을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일부를 담당할 자에게만 너는 구원받았다고 예수님이라는 모자이크에 편입되도록 그렇게 조치한 거예요.

사실은 모자이크라면 약간 어폐가 있어요. 모자이크라 하면 전체 그림에 일부인데 사실 그건 잘못된 거고요. 아벨 속에 예수님의 전부다 들어있기 때문에 모자이크라 할 수 없고. 그냥 예수님의 하나의 부분이라 하면 그게 적당한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있다면, 이 그리스도의 상은 4세기에 나온 그림이에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릅니다. 하여튼 이렇게 보게 되면 이 모든 예수님의 그림의 일부를 아벨이 담당하게 되는데 그럼 다른 부분은 없느냐? 그게 아니고 아벨 속에 전체 내용이 다 포함돼있다 이 말이죠. 노아 같으면 방주 안에 그리스도가 다 포함돼있고.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에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다 들어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어렵게 이야기하지 말고 쉽게 ‘우리가 바로 예수다.’ 하면 될 건데 왜 빙빙 돌리느냐 이러거든요. 우리가 예수가 아니고, 대신 죽으심을 보여주기 위한 죄인이죠. 하나님의 언약 안에 우리가 언약 맨으로서 언약 안에 들어가요.

그러면 두 명 들어갑니까, 세 명 들어갑니까, 열 명 들어갑니까? 한 명 밖에 없어요. 그걸 그리스도 몸이라 하는 겁니다. 신약에서 수천 명 되더라도 한 몸이라고 보는 이유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단체 개념으로 봐요. 내 아들이라고. 이스라엘이 수십만 되어도 그건 하나에요. 아간 잘못했을 때 전체가 기합 받아요. 항상 하나가 된다고. 다수를 하나로 취급하는 이유가 언약이란 한 전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말은 사람을 행동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전류가 통했느냐? 네가 전류가 통과하고 있느냐고 본다 이 말이죠. 찌릿찌릿.

나는 여자로서 통했습니다. 여자는 빼란 말이죠. 나는 재벌로 통했습니다. 재벌은 빼고. 나는 거지 나사로로 통했습니다. 거지 빼고 네 속에 아브라함 언약이 들었느냐? 들었으면 나사로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는 겁니다. 개인적인 행동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인 행동은 할 필요 없어요. 어떤 행동을 해도 대신 죽으심에만 혜택이 된다면 구원받습니다. 기쁜 소식하는데 한 시간만 하면 금방 나오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언약이 인생을 조지게 만들었어요. 어떤 사람은 잘됐다 하는데 잘된 게 아니죠. 인생 공짜 아닙니다. 그만큼 고생을 해야 돼요. 연세 많으신 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희망도 없는 인생 그것 끌고 온다고 얼마나 그동안 아부와 거짓말과 죄악으로 떡칠을 하면서 그동안 버텨왔습니까. 젊은 사람들은 몰라. 마법의 성만 생각하고 공주님이 와서 왕자님이 날아다니고 찾을 줄 알지. 그 공주와 왕자가 얼마나 사기꾼인지.

아벨이 대신 죽음이란 아까 케이블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뭘 증거할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실존을 통해서만 계시한다. 바람으로도, 태풍으로도 하나님 뜻은 다 아니에요. 하늘에 움직이는 달과 별로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실존,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어야만 되는 그 피를 통해서 죄 없고 흠 없다고 여겨지는 그 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을 우리에게 전한 거예요.

그래서 마귀는 필요합니다. 마귀는 성도를 죽여줘야 돼요. 스데반 집사한테 돌 날아올 때 빼지 않았습니다. 날아온 돌 다 맞아야 돼요. 다 맞으면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의 영을 받으면서 스데반 집사가 예수 안에서 돌 맞은 것이 표가 나게 돼있습니다.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에 성령에 충만했다고 했거든요. 성령에 충만한 것은 스데반 집사가 어떤 행동을 했다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 행동을 유발시켰다. ‘빨리 와. 이번 촬영을 돌 던지는 신이야. #46들어갑니다. 돌 던지고, 스데반 얻어맞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때릴 돌 던질 사람을 돈 주고는 수집하지 마세요. 그거는 순교를 위장한 순교에요. 가짜입니다. 어떤 사람의 순교는 목욕탕에서 ‘어 시원하다’ 이러다 죽는 사람도 있어요. 목욕탕에서 문신 한 사람과 싸우다 자기 발에 미끄러져서 죽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도 순교라니까. 성도 안에서는 누구나 순교에요. 순교 안 하고 성도는 되는 법 없고 성도는 다 순교하는데 순교로 죽는 폼이 상당히 오지랖 넓은 모습일 수 있고, 민망스러울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하이킥하다 죽는 사람도 있고. 그거는 몰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에 맞아 죽었다 하는데 이순신 장군은 왜놈이 쏜 총에 안 맞아 죽어도 거북선이 코너 돌다가 못에 박혀서 죽을 수도 있어요. 꼭 유탄을 자꾸 부각하지 마세요. 죽을 때가 되매 죽은 겁니다. 전도서에 나온 이야기에요. 사람은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어요. 말씀을 좀 믿읍시다. 미치겠다, 정말. 연초에 토정비결 믿지 말고 말씀을 믿으세요.

특별히 제가 토정비결 대신 권해드리는 말씀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도 병들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시고. 올해부터 추이를 봅시다. 일월 달에 죽이는지 살리는지 안 그러면 이월 달에 아픈지 어떤지 보자 이 말이죠. 주께서 어떤 조치를 하시는지. 확실한 토정비결이 나와 있는데 다방에 앉아서 동전 백 원 넣고 땅콩 까먹으면서 끄집어내고, 여성지 뒤에 나와 있는 것 보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일으키고 대신 죽으심이 고정이고, 대신 죽으심의 의가 얼마나 파생된 각가지의 변화 속에서 변화 중에도 고정을 끄집어내니까 이 변화가 얼마나 변화무쌍하겠어요. 남의 신앙을 제발 흉내 좀 내지 마세요. 꼭 남 따라 하지 말고 본인의 개성이 있잖아요. 본인의 개성 따라, 환경 따라 주님이 주신 신앙이 다 다릅니다. 그걸 일률적으로 강요하면 안 돼요. 특히 부모들이 자식들 신앙 강요하는데 자칫하면 강요가 아니고 반복학습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반복학습은 다단계에서나 쓰지 복음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대신 죽으심을 보이는 쪽으로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어떤 변화든 다 겪으면서 내가 이렇게 겪는 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아벨과 연결돼있는 십자가의 용서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린 이 땅에서 이런 식으로 나름대로의 죄를 우리가 발산할 수 있는 겁니다. 남 죄 짓는다고 따라하지 말고 본인 나름대로의 죄가 또 따로 있어요. 각자각자 다 달라요. 지문 다르듯이. 그것은 DNA 검사한다고 같은 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2페이지 중간에 보면, 대신 죽으심의 역할 속에 희생으로 나타난다. 그 희생이 뭘 지켜주는가? 땅을 지켜줍니다. 언제까지 땅을 지켜주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땅을 지켜줘요. 십자가 이후에는 땅이란 개념은 하늘로 올라가고 지상에는 혼돈과 무질서가 되는 겁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약속의 주인공은 이분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약속의 땅으로서 기능을 다하고 드디어 예수님이 떠나버리면 거기에 따라서 약속이라는 것도 예수님 몸에 붙어서 땅에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버립니다. 그러면 약속의 땅은 하늘에 있어요. 골로새서 3장 1절에 나오죠. 우리는 이미 땅에서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늘에 감추어져 있다. 보관돼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죠.

구약에서 시작했던 이륙, 비행기가 구약이란 활주로를 타고 가다가 십자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할 때 구약의 모든 개념도 완성이란 의미에서 같이 따라서 승천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닭 쫓는 개가 되지 않겠는가? 물론 닭 쫓는 개인데 닭과 개 사이에 성령이 와버립니다. 일종의 계영이죠. 올라가신 예수님의 영, 올라가신 그분의영이 우리에게 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땅에 있으면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돼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겁니다.

구약으로부터 활주로로 비행기를 날려야 되는데 구약을 치워버리니까 신약만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 흉내 내기, 모방하기, 곧잘 연기하기, 믿는 척하기. 믿는 척하기는 목사가 시키는 대로 반복 학습하는 것밖에 없어요. 1단계 이것 하시면 2단계 할 수 있습니다. 맨날 교회에서 하는 게 그거에요. 3단계 합니다. 보통 3단계 하고 교인들이 포기해주면 되는데 꼭 눈치 없이 악착같이 4단계 다 밟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목사로서 입장 난처하거든요.

그때는 없는 단계를 만들어요. 7단계로. 그러면 악착같이 7단계까지 올라가는 사람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목사가 제일 무서워합니다. 제발 좀 목사 신앙 따라 붙지 마라. 그러면 목사 권위는 뭐가 되느냐 말이야. 적어도 우리 교회에서 내가 믿음 제일 좋아야지 네가 앞장 서버리면 나는 네 앞에서 설교 못한다. 적당하게들 하세요. 목사보다 추월하지 마시고. 추월하면 너무 뛰어나면 곤란해요.

그만큼 성령이 오게 되면 요한일서의 말씀처럼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①있다. ②없다. ‘없다’입니다. 성령이 너희를 친히 가르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네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네가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니라. 우리끼리만 이야기하지 개혁주의에서 하면 계룡산에서 왔다 하며 미친놈이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말해도 미친놈이라 하니 곤란합니다.

왜 그것을 사람들이 겁을 내냐 하면, 구약부터 이동을 하지 않고 바로 성급하게 신약에 가서 모방을 했기 때문에, 믿는 사람 흉내를 냈기 때문에 착해지고 술 끊고 담배 끊으면 성령 받은 줄 알고. 구약에서는 우리보다 착함의 선배, 선함의 도사들이 수두룩합니다. 특히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보통 사람 아니에요. 지금도 바리새인 같은 종파가 있어요.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지요. 그 사람들은 남녀사세부동석이에요. 버스도 여자가 뒤에 타면 아예 안 탔어요. 아주 지독해요. 천국사람 돼보겠다고. 땅의 사투리 쓰면 아예 상종을 안 해. 오직 자기들만이 천국사람 돼보겠다고.

그러니까 로마서 10장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데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몰랐으면 그렇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느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니까 말씀으로 뭘 생산해야 합니까? 이거는 철야근무야. 밤낮이 없어. 새벽을 깨우리라 해서 새벽마다 깨우고 밤늦게까지 기도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의를 생산해요. 그래프 해놓고 오늘은 성경 넉 장, 성경 다섯 장 그런 목표를 해요. 기도 30분 더 늘이기. 그런 목표를 잘 채우면서 헌금은 목표에 안 드는지 몰라. 그것은 돈이 아깝기 때문에 돈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돈 내는 대신 다른 걸로 돈 내는 걸 상쇄시키려고 통박 굴려요. 교회에서 온갖 것 다 봅니다.

대신 죽으심이 날아가 없고, 자기 반복학습만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공들인 게 아까우니까 건드리면 그야말로 발작을 일으키죠. 바리새인처럼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일단 천국에 가려거든 누구한테 심사를 받아라? 바리새인한테 먼저 심사를 받으세요. 여기서 슈퍼K 나와서 예선 통과해야 돼. 지방예선 통과해서 본선해서 금요일마다 계속 노래 불러서 우승해야 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수준을 낮출까요, 높일까요? 높이죠. 어디 감히 따라 와. 금식의 날수도 더 늘일 것이고 십일조도 상세하게. 십일조의 특징이 뭐냐? 절대로 십의 이조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완전히 미쳤어. 절대로 십의 이조를 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십일조만 해야 돼. 아마 여기서 경제관념이 발전

그래서 따라잡을 수 없는 바리새인, 하늘같은 바리새인을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다. 악마의 전형적인 모습을 너희들이 보여주고 있고 모든 사람은 그걸 부러워하면서, ‘나도 언제 바리새인처럼 저렇게 착해보느냐?’ 바리새인은 모이면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더 어렵게 힘들게 말씀을 완벽하게 지키느냐 연구하는 거예요.

에베레스트 올라갈 때 그냥 올라가면 재미없어. 남이 안 가는 코스로 그것도 여름철 말고 겨울철, 혹한기에 더 난코스 개발해서 자기 이름 걸어서 이거는 ‘박영석 코스’라 만들어보려고. 이건 취미고 이런 도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발 선배들의 이런 것을 본받지 마시고 그저 본받으려면 세리, 창기, 강도, 쉽잖아요. 얼마나 쉽습니까. 물론 그 사람과 똑같으면 안 되고 나는 나 나름대로의 개성이 있기 때문에.

다만 우리 속에 대신 죽으심이 그 다음에 뭘 낳는다 했습니까? 희생. 이 개념 어렵습니다. 세상적인 희생 개념은 희생의 덕을 보는 타인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희생 개념은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 희생입니다. 내 희생 덕분에 남이 사는 그런 희생이라는 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없어요. 왜 없느냐? 희생되신 분이 오직 한 분에 종속된 희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희생 때문에 누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한 주님의 희생 때문에 남이 구원받거든요.

그렇다면 나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만약에 A라는 사람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그리고 B라는 사람의 희생 때문에 구원받는다면 서로 멘토 싸움이 벌어져요. ‘나는 박완규가 노래 제일 잘 하는 것 같아.’ ‘아니고 그것도 가수고 그것도 노래드나.’ 저희끼리 싸운다고. 그러니까 모든 구원은 오직 누가 전도했던 관계없이 어느 권사님이 전도했던 간에 누가 전도했다고 해야 돼요? 바로 주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됐다고 해줘야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사도행전에 나온 사도들의 역할입니다. 절대로 사도, 나한테 거쳐서 주님한테 가지 말라. 왜? 내가 너한테 준 게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너를 위해서 희생한 게 없어. 주님의 희생이 나를 통해서 흘러갔을 뿐이죠. ‘뭔가 빠져나간 느낌이 드는데, 아 주님의 희생이 왔다갔구나.’ 이렇게 겸손하면 그것도 흉내 내는 사람이 있을까 겁난다. 방금 뭐가 왔다갔네. 저 사람 구원받았네. ‘주님이 나를 가지고 저 사람을 구원했구나.’ 이렇게 돼야 되는 겁니다. 전도상은 누가 받아야 돼요? 주님이 홀로 받아야 돼요. 지가 냉장고 타고 목걸이 차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통과시키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요. ‘새로 온 저 사람은 제가 전도했습니다.’라는 죄를 짓게 만들어요. 그러니까 우리 집에선 그런 분 없습니다. 나중에 권사나 장로 투표할 때 표가 나요. 니가 누구 덕분에 교회 왔는데. 말은 안 해요. 말은 안 해도 기억에 남지요. 그걸 순수 기억이라 합니다. 이게 베르그송의 책에 보면, 습관적 기억과 이미지 기억이 있는데 순수 기억 속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자기는 생각 안 나는데 어떤 계기가 되면 툭 튀어나오는 것.

여러분 그런 경험 있지요. 평소에는 생각 안 나는데 어떤 뷔페에서 과자를 하나 먹었는데 이 맛은 내가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이모님이 만드신 과자하고 기억이 나는 겁니다. 물론 좋은 것만 기억나면 좋겠는데, 그때 그 애 너무 왕따시켜서 자살 직전까지 갔는데 그때 사고 났으면 퇴학당할 뻔 했는데 지금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되겠다. 삼십 년 후에 가서 사과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 사과 안 해도 됩니다. 그렇게 당했던 그 애가 벌써 일 쳐놨어. 사람은 엮이게 돼있지 순수하게 당하기만 하는 인간은 없어요. 반드시 사기를 치는 인간들은 꼭 사기를 당했기 때문에 그 수법을 배워서 남한테 사기를 치는 겁니다.

군에 가봐야 알지. 뭐 하나 잃어버렸잖아요. 삽 잃어버리면 반드시 남의 것 훔쳐서라도 빈자리 채워야 돼요. 꼭 이빨 빠진 것 같아. 나중에 점호하다보면. 지금 군에 갔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다 아멘할 거예요. 세상은 다 도둑놈이에요, 도둑놈.

희생? 뭘 희생했는데? 한 게 뭐가 있다고. 뭔가 노렸지.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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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4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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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