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실체 130510
악마의 실체 130510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김창길(IP:210.♡.60.74)
13-06-16 19:35
서울 의존교회130510a (악마의 실체)―이 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 주께서 강림하신다고 했는데 주께서 강림하실 때 그냥 하늘에서 오시면 그만이고 우리는 기다리면 그만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이 세상이라는 것이 착한 천사들이 모이는 곳이 세상이 아니죠. 강림하시는 이 땅에 나타나시는 주님이 이 세상을 다니면서 상처를 입었잖아요. 상처를 입었으니까 그 상처에 근거해서 우리 주님께서 그냥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고 분노 중에 화를 내시면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린다는 말은 뭐로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주님을 기다려야 된다. 심판으로 오시기 때문에 심판을 웃으면서 심판할 일이 없잖아요. 분노 가운데서 심판하시잖아요. 분노 가운데 심판하시는데 구원받는 백성이 ‘참나 이상해 왜 세상을 보고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이렇게 된다면 그 사람이 지금 주님을 맞이해야 될 신부인지 아니면 다른 엉뚱한 신랑을 기다리는 건지 혼돈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분노를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분노를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그때 주님의 분노를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냥 분노하게 되면 우리의 심정은 상당히 정상적인데 주님 혼자 버럭 화를 내시면 주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바로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을 우리가 이해될 수가 있습니다. 형제지간에도 또 부모 자식 간에도 평소 좋게 지내다가 우리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야, 우리 아버지는 성을 낼 줄 몰라 이렇게 생각했는데 하루는 자식이 아버지에 대해서 실망해서 화를 심하게 낼 때 아버지께서는 어디 자식이 부모한테 데드나? 해서 아버지가 야구 방망이 들고 나올 때 그때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아버지의 다른 면을 보지요. 아, 아버지께서도 이렇게 화를 낼 수도 있는 분이구나! 하고 이해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분노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어떤 지경에 있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 죽일 것처럼 화가 날 경우에 주님의 분노와 만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잡아 죽일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죽여 버리고 싶어 할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요? 매일의 삶이죠. 하루하루의 삶이 그거죠. 다른 것 있습니까? 자식 말 안들을 때 남편 내 마음대로 안 될 때 아내 바가지 긁을 때 그리고 내 직장, 내 가사 일에 대해서 내 원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우리의 분노 궁극적 마지막 대상은 누구입니까?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든 당사자 나와봐! 하면 누가 나오겠습니까? 예수님 밖에 더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 앞에 분노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살려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재롱부리고 착하게 살아서 그 덤으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지어도 은혜 주시고 죄를 안 지어도 은혜를 주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한테 해 준 것보다도 주님이 우리 쪽에 은혜를 준 은혜가 더 커요. 우리는 이 점을 매일같이 그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잊고 있어요. 우리는 항상 분노 중에 살아가고 있고 항상 화를 내고 있고 항상 불만을 품고 살아가고 있어요. 어디 걸리기만 해 봐라! 하는 식으로 사회에 대해서 그리고 가정에 대해서 그리고 주변의 사람에 대해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공격적으로 나섭니다. 그 공격이 결국은 누구에 대한 공격이냐 하면 매일같이 우리를 은혜로 살려주시고 늘 용서해 주시는 주님에 대한 공격으로 도달이 돼요.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철이 없어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참 철딱서니가 없어요. 그런 인간을 구원하겠다는 거예요.
그런 인간을 구원하기 때문에 주님의 분노라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분노할 때 주님은 우리 이상으로 분노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그것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내가 뭣도 모르고 깝죽댔구나! 당장이라는 주님은 우리를 안 살릴 수도 있는데 은혜를 안 주셔도 되는데 다른 근거에 의해서 주님의 자신의 약속과 용서와 사랑에 근거해서 십자가 복음에 근거해서 우리를 이렇게 살려주고 있는데 자식이라고 하면서 그 마음도 모르고 우리는 불만과 불평으로 기어이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형편 피면 사랑하겠다! 하지만 형편 피는 게 인간에게 있을 수 없잖아요. 형편이 얼마나 펴야 피는 거예요? 40, 50, 50, 70, 80, 90 돼도 60넘어 버리면 몸이 성한 곳이 없는데 여기 늘 나오시는 박집사님 몸 성한 곳이 없어요. 날부터 그랬지만 속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늘 주님에게서 분노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분노한다는 것에 주님께서 용서를 하실 때 분노해라 죄 져라 용서해 줄게 이게 아니고 어떻게 살피느냐 하면 그 분노와 그 화냄이 무엇과 연관해서 그런 분노로 유발 되었는지를 내가 살피겠다. 살펴서 우리로 하여금 분노케하는 이 세상의 환경에 대해서 주께서 강림하셔서 심판과 저주를 퍼부으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노케하는 그 이유도 하나의 전략이고 작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우리를 닦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이 세상의 원리 원칙에 대해서 우리의 불만을 통해서 우리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세력을 들추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만들어서 힘이 안 드는 경우가 없지요. 아무리 잘 되도 힘들다 힘들다 불평불만 하게 되니까요. 우리의 불평불만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살기를 은근히 노렸던 그 배후 세력에 대해서 주님께서 가차없는 저주와 심판을 내릴준비로서 지금이 강림이 대기되어있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오늘 본문 3절에
살후 2: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
여기에 방금 누구의 아들이라고 했습니까? ‘멸망의 아들’이라 되어 있죠. ~의 아들이라 할 때 여기 괄호에 누구의 아들이라 할 때 이것이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것도 사람이어야 하겠죠. 누구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냥 멸망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멸망의 아들이니까 아버지가 멸망이라는 그런 뜻은 아니겠고 이 자체가 멸망당할 속성을 품고 있다. 방금 제가 속성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속성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떤 것을 산물로 개체를 주장할 때 개체라 할 수도 있고 개별자라 할 수 있고 보통 그것을 철학에서 실체라고 합니다.
여기 비타 500이 있는데 그냥 비타500이 아니고 착한 비타500이에요. 착한 비타500이니까 착한이 나와야겠죠. 여기 착함이 나옵니까? 멸망의 자식입니다. 여기 착한 비타500 같으면 여기서 착함이 나와야 하는데 병을 열고 보면 음료수 나와요. 그렇다면 착한 비타500의 속성은 뭡니까? 그냥 비타민 C가 들어 있는 음료수이겠죠.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멸망의 자식이 누구입니까? 하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저 사람이 멸망의 자식입니까? 김일성입니까? 신천지의 이만희입니까? 천주교회의 교황이에요? 이렇게 지적해서는 안 된다는 이 말입니다. 착한 비타500이 착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 착하지 않은 이 병만 부수면 되는 거예요? 아니죠. 이 회사에서 만든 똑같은 병들 많잖아요. 속성이 전부 다 비타민 들어 있는 것이 병으로 담긴 것이 한 두병이 아니잖아요. 제품 달랑 하나 만들었습니까? 수십만 개 만들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누구를 딱 집어서 멸망의 아들이라 할 수 없고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속성을 탐색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그렇게 신약에서도 그렇지만 예수그리스도가 강림할 때 분노와 화를 내면서 강림하시잖아요.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에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주님의 분노와 화를 이해 못하면 우리는 신랑과 신부가 마음을 합해야지 신랑은 화를 내고 있는데 신부는 말리면서 아이고 주님 화내지 마세요. 세상 좋은 세상인데 뭐 때문에 화를 냅니까? 이렇게 한다면 지금 신랑이 하는 일을 전혀 취지를 모르는 거지요. 신부가 됐으면 자기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화를 내니까 ‘여보, 당신은 화낼 일도 아닌데 왜 화를 낼?’이렇게 된다면 도대체 그게 누구의 신부입니까? 신랑이 화를 내면서 이 세상을 멸망하기 위해서 왔다면 신부가 되었으면 우리도 신랑의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돼지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되는데 여기서 우리가 주위 할 것은 나 빼놓고 다 나쁘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는 신부니까 주님께서 나는 심판하지 않을 것이고 나 빼놓고 마음껏 심판 하세요. 라고 한다면 우리한테 이런 불법의 사람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평소에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 우리가 훌륭해서 따로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도 세상 사람들이, 멸망 받을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우리도 얼씨구나 하면서 우리도 같이 동조, 동의하면서 그게 좋다고 여기면서 거기서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면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고 있었어요. 주님께서 화를 낼 때 도리어 우리는 주님께서 화내는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화를 내지요. 목사님 우리는 주님한테 화를 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들 하고 싶어 하는데 여러분들이 인생을 보세요. 인생이 여러분 뜻대로 마음대로 안 되지요? 그러면 뜻대로 마음대로 안 되면 인간이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에이 하고 뒤에 씨, 이런 식으로 뭔가 분풀이 합니다. 그렇게 분풀이를 할 때 그 분풀이가 결국은 누구 원망으로 돌아갑니까? 바로 우리가 사랑한다고 자처하는 우리 주님한테 신랑한테 원망이 다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에이 씨’하는 정도로 그런 상황을 우리를 몰아넣어요. 그렇게 몰아넣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할 때 그 심판의 심정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릴 때 그때 마주치는 그 주님의 인상, 그게 바로 심판의 취지에요. 그러면 우리가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함을 세상과 더불어 같이 느낄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주님이 이것 때문에 화를 내셨구나!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세상 편을 들까요? 안 들까요?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 이런 내가 원망하니까 주님께서 거기서 화를 내시는구나! 아 그렇다면 내가 지금 내 위주로 살았네! 하고 깜짝 놀라면서 자기의 정체를 파악했다면 그 다음부터는 누구의 편을 안 들겠습니까? 세상 편을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안 들지요.
주님이여! 절 치듯이 저도 쳐 버리세요. 그럴 때 나로 하여금 세상 좋다고 가르쳤던 그 멸망의 아들, 그 실체가 드디어 속성을 뿜어내면서 밝혀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원망케 해서 그동안 우리와 친하게 지냈던 멸망당할 속성과 관계들을 그런 관계들을 우리 주변에 드러나도록 조치를 취하시는 겁니다. 제가 하는 말이 구라, 거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냥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구약의 이스라엘의 위치를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누구한테 원망했죠? 여호와를 원망할 때 이스라엘이 합세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오히려 이방 나라는 원망을 하지도 않았어요. 누가 구약에서 주로 원망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했는데 원망함으로서 나중에 무엇을 알게 되느냐 하면 자기와 자기 주변에 있는 나라 모압, 암몬, 블레셋 그 나라의 차이성에 대해서 눈이 떠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원망했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선지자를 주시고 사사를 주시고 그리고 여호와께 원망도 하지 않던 자기 주변의 나라 블레셋, 암몬 이런 나라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멸망케 해 버리죠. 특히 여호수아 전쟁에서 다섯 나라 연합군과 싸운 대목이 나오거든요. 그때 이스라엘에게는 별 무기도 없었어요. 여호수아하고 몇 명 나왔는데 저쪽에서는 다섯 나라가 연합해서 쳐들어옵니다.
기브온하고 기브온을 너희 나라가 치게 되면 내가 도와줄게 하고 이스라엘이 약속을 해서 기브온을 쳤다고 그것을 빌미로 이스라엘이 도와주려고 가는데 저쪽에서는 막강한 군대가 와요. 그때 하나님의 무기가 뭐였습니까? 총칼이었습니까? 그냥 우박이었어요. 우박으로 죽은 사람이 칼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았어요. 그런데 우박을 내렸는데 또 해가 지네요. 잔병을 쫓아가 추적을 해야 되는데 해가 져 버리면 마지막 잔병 소탕을 못하잖아요. 그럴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갑자기 지던 해가 지지를 않아요. 해를 눌러도 지지를 않아요. 해가 서산에 져야 되는데 해가 서산에 지지도 않고 마치 조명탄을 쏘아 올린 거예요. 그러면 해가 서산에 안 졌다는 말은 그 즉각 스냅사진이라 하는데 그 순간 사진 찍어 놓으면 그 시간이 흘러요? 시간이 안 흘러요? 시간이 멈췄지요? 시간마저 멈추면서 기어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기어이 보여주기 위한 것은 그것은 언약이 있는 백성과 언약이 없는 백성의 완벽한 차이이죠. 그 사실을 그 혜택을 입고 그런 정도로 도움을 받았으면 어지간히 양심이 있으면 온전히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을 해야 그게 인간된 도리이죠. 사사기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틈만 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그러니까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께 순종한 세월이 많아요? 불순종한 세월이 많습니까? 순종 갈 필요도 없어요. 대부분 불순종이에요.
그런데 불순종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을 해 댔지만 결국 마지막에 여호와한테 심판받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함부로 저것들 힘도 없어 먹으면 먹히는 거야 하고 함부로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없는 둥 여기면서 침범했던 그들은 여호와한테 크게 당하죠.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다. 왜 없는 존재냐 하면 이방 민족들이 물론 이스라엘이 계시고 그 주변 나라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없어요. 왜? 자기 신 섬기기 바쁜데 남의 나라 신까지 섬기겠습니까? 그들이 여호와가 없는 존재로 여기는 이유는 ‘있다’의 범주, 영역을 어디로 정했습니까? 자기가 쳐야 될 대상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있고 내가 있고 그대로 있고 여기 있고만 테두리 쳐버렸지요. 뭐가 빠져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빠져 있지요.
여호와 하나님이 빠져 있는데 그 전에 이방 나라가 블레셋 이스라엘을 치기 전에 이스라엘 자체 존재 내에서는 여호와는 있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입니까? 없는 존재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라고 하지만 여호와를 믿지를 않았습니다. 무엇을 부러워했습니까? 아이고 부러워라 하고 주변 나라를 부러워했죠. 그래서 주변 나라를 흉내내고 주변나라 신, 바알을 섬기고 주변나라와 무역하고 주변나라와 혼인을 하고 그 약속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약속 자체를 없애는 쪽으로 그들은 그쪽을 부러워한 거예요.
제가 방금한 말이 구약성경에 나오죠? 그렇다면 오늘날 신월동 이 자리에 봅시다. 여러분 예수 있습니까? 뭐가 부러워서 평소에 예수님한테 주둥이 한 다발 나왔습니까? 예수님 피가 모자란다고 그게 부러워서 그래서 그랬습니까? 빨리 천국에 안 넣어 준다고 그게 짜증나던가요? 뭐가 불평이고 불만이라서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하고 속으로 씩씩거리면서 그렇게 인생을 하루하루 사는 겁니까? 세상에서 뭐가 그렇게 부럽던가요? 말을 안 해도 알지요. 돈, 돈, 돈이죠.
돈만 있으면 예배당 새로 싹 다시 지을 수 있고 돈만 있으면 노인네들 봉투에 5만원씩 넣어서 주면 여기 이 자리가 완전히 꽉 차게 부흥되고 돈만 있으면 이 4층 건물 아래층에는 어린이 집해 놓고 무료로 다 공부시키고 고맙다고 참석해 주고 재미나고 아주 재밌죠. 사람이 많은데 재미 안 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속으로 주둥이가 한 가지 나와 있어요. 그리고 ‘주여! 돈?’돈만 있으면 해결돼요. 돈이 없어 이러고 있어요.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예수, 십자가 언약, 하나님의 성령, 백날 고상한 소리를 설교 시간에 성경귀절 다 집어넣고 성화로 이어져서 설교 시간 그 이유가 뭐를 뽑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까? 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천국과 재림과 강림을 거기다 쏟아 넣어요.
그런데 교인들이 돈을 한 푼도 안 낸다면 계속 설교를 할까요? 말까요? 미쳤나 해요 공짜로 얻었는데 미쳤냐? 합니다. 이 없는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으로 세상에 있는 잘 살고 크고 우아하고 철기 문화를 가지고 있는 무기도 강력한 이 세상 주변의 나라를 왜 그렇게 부러워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없는 하나님의 속성, 실체는 뭐냐? 그것은 바로 죽음이 임재해 버렸어요. 레위기의 제사에 있어서 애굽 나라에서 나올 때부터 이방 나라에서 신을 섬기는 방식과 이스라엘의 방식과 달라요.
이방 나라는 있는 제물을 있는 하나님께 그냥 받치면 그 신은 기쁘게 받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모세 언약에 의하면 있는 제물을 그냥 드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받아요. 뭐로 바꿔야 됩니까? 제물에서 무엇을 짜내야돼요. 뭐를 짜냅니까? 피를 짜내야 돼요. 그 피가 언약의 피, 약속의 피입니다. 그 피를 보고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피라고 할 때는 그냥 피를 낸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고 그 피를 낼 때는 반드시 이유가 거기에 같이 담겨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우리의 죄 때문에 이 양은 대신 죽어야 됩니다. 제사 드리는 자세가 하나님이 양 가지고 오면 양 받으시고 돈 가져오면 돈 받으시고 떡 가져오면 떡 받으시고 이렇게 안 되고 뭐가 됩니까?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입니다. 하고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그 죄인입니다. 하는 그 죄를 어디서 우리가 죄인이냐 아니냐를 판정을 받고 죄인입니다. 하고 고백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받으실 때는 제물의 죽음을 받는다. 그런데 제물이 죽을 때는 이유가 뭐냐? 우리의 죄가 거기에 가담해서 우리가 죄인의 입장에서 제물과 하나님의 약속과 만나서 우리는 용서받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죄냐 아니냐를 그 측정을 어디서 심사 받습니까? 그것은 여러분 아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심사 받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죄인인 것이 드러나느냐 하는 이 말입니다. 안 드러나요. 우리는 말씀을 보면 말씀을 많이 지킨 사람으로 자부하고 뿌듯하게 되지 말씀을 보면서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지를 않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면서 그래 이것도 지켰고 다른 사람은 안 지켜도 의존 교회는 다 지켰어 고린도전서, 그래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거야! 마태복음, 그래 우리는 이거 다 알고 다 지켰어! 이것은 의존교회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자기 교인들은 말씀을 충실하게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자존심 하나 믿고 교회에 와요.
따라서 성경을 100독을 보면 100독 본 만큼 자기가 더욱더 의로워지고 착해져 버리지 죄인이라고 느껴지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성경보고 죄는 어떻게 느낄까요? 성경 백날 봐도 내가 돈이 안 벌려질 때, 내가 진짜 성경을 왕창 봤는데도 인기가 오르지 않을 때, 내가 이렇게 왕창 구원돼도 돈은 안 벌릴 때, 내가 이렇게 성경을 연구했는데도 내가 원하는 교회가 부흥되지 않을 때 우리는 벌써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모르는 다른 사람이 잘 먹고 잘 살고 인기 얻고 세상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그 점에 대해서 질시하면서 ‘흥 그 까짓것 세상 것’라고 말을 하면서 ‘아이고 부러워라!’하는 식으로 평소에 살아온 겁니다.
미국에 갔던 청와대 대변인 윤창중 그 사람이 성추행해서 단번에 잘려 올 때 좋아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안 되는 것을 왜 그리 좋아할까요? 그리고 연예인들이 이혼할 때 좋아서 기뻐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에요. 왜? 자기 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결혼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모든 화는 어디서 오느냐 하면 바로 나한테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율법이에요? 누가 갑이에요? 자기가 갑이에요. 세상은 나한테 물어보고 움직여야지 나한테 물어보지 않고 지 마음대로 했으니까 내 마음에 안 맞는 것은 다리가 부러지던지 교통사고 나던지 이혼하던지 잘리던지 그래야 돼요.
우리가 여기서 북한의 김정은이 몸 아프다고 하면 애곡하고 슬퍼합니까? 김정은이 수영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애곡하고 국기 계양하고 그렇습니까? 좋아서 난리 나죠. 이제 북한 정신 차린다 이제 통일되겠다 하겠지요. 평소에 무슨 마음이 있다는 겁니까? 북한의 지도자들이 나한테 물어봐야 되는데 안 물어봤다는 말이죠.
세상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될 때는 우리는 불평이 안 나오게 되어 있지 만약에 내 뜻대로 안되면 항상 불평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요. 감사? 감사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무슨 감사가 나와요? 감사 될 일이 있습니까?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 내가 응원하는 축구팀, 내가 만약에 두산 야구팀을 응원한다! 2대 9점되었다 얼마나 신나겠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SK한테 12대 13으로 졌다, 화가 난다. 화가 나는 거죠. 그것 때문에 하루일과가 안돼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기도도 안 됩니다. 야구팀 때문에요.
우리가 하는 그 신앙은 종교인데 무슨 종교냐 하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할 테니까 오늘 일어날 재수 없는 일들이 악한 일들을 아침에 큐티하고 아침에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그 재수가 좀 누그러뜨리기 위한 사전에 아부하는 쪽으로의 사고방식이에요.
그게 그런 방식으로 신을 섬기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많은 나라들이 그런 식으로 자기의 신을 섬겼던 겁니다. 우리는 그 방식이 좋아요. 자연스럽고 그 방식이 그리워지고 껍데기는 여호와인데 속은 바알 닮고 그렇게 선지자들이 지적을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어린 양을 잡아서 이스라엘의 언약을 하나님은 없는 하나님인데 있는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 나타나요. 그것은 네가 살고 죽는 것은 이 땅에서는 네가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이 제사하고 하나님이 너희들을 공짜로 무상으로 살려주는 거예요. 천국과 마찬가지에요. 천국을 앞당겨서 체험하는 그런 체험의 공간으로 보면 돼요.
우리가 잘하나 착하나 관계없이 다른 것을 봐요. 너 착했나? 너 나쁜데? 이런 것을 보는 게 아니고 착하냐! 나쁘냐를 우리한테 안보고 다른 근거에 의해서 우리에게 복을 줍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그런데 세상 신은 자기가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 이게 세상 종교입니다. 참 말이 세상 종교지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죠. 교회가 이 짓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말씀대로 안 지키면 벌 받고 지키면 복 받습니다. 이게 무슨 복음입니까? 그러면 예수는 왜 죽었는데? 언약은 왜 있는데? 그런 식으로 하려면 바리새인들하고 똑같이 하면 돼요. 부자 된 사람들은 말씀 지킨 숫자가 양이 많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말씀 가운데서 순정한 구절이 몇 개 안되니까 저주 받아서 가난하게 되고 부자된 사람은 성경 구절을 두배, 세배 많이 지켰기 때문에 복을 받고 그런 겁니까? 그런 겁니까가 아니고 우리는 그러고 싶지요. 그게 자연스럽지요.
바로 그것이 배도의 하는 일이고 불법의 사람들이 그동안 우리를 홀리고 미혹이라는 말은 홀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깜박 속아 넘어가게 그런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간 겁니다. 멸망의 자식이라고 하면 목사라고 보면 돼요. 속성이 주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작용해요.
빌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러분에게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원수냐 아니냐의 기준은 뭡니까? 방금 나왔지 않습니까? 뭐로 결정합니까? 십자가 아닙니까?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십자가의 원수가 곧 하나님의 원수이고 주님의 원수이고 지옥갈 멸망의 자식인거예요. 빌립보서 쓴 분이 데살로니가 후서를 썼어요. 같은 사도 바울의 생각입니다. 멸망의 자식, 다른 것 없어요. 십자가의 원수가 멸망의 자식이에요. 그런 속성들을 숨기고 않고 했고 우리는 그것을 좋다고 한 거예요.
십자가 말고 착한 일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으니까 나쁜 짓하더라도 착한 일 곱빼기로 해 버리면 그 벌이 다 용서되고 더욱더 복을 받는다! 오히려 그런 규칙에 익숙해 졌어요. 교회 늦게 오면 헌금 천원 더 내면 되고 그러면 무마가 되고 하는 우리는 그런 행동 방식이 습성화되어 있어요.
십자가, 십자가 한다고 했지만 우리의 행동은 자꾸 십자가 식이 아니고 십자가의 원수적인 행동을 평소의 마구 마구 주체 못하게 터져 나와요. 바빠서 몇 주 교회 빠지면 아이고 차 빵구 난 것 보니 교회 안갔다고 왔구나! 우리는 대번에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뭐가 모순이냐 하면 차 빵구 났으니까 죄 졌다고 생각하는 그 죄의 기준이 차 빵구난 것으로 결정하는 그게 멸망의 자식이에요. 평소에 내가 잘 하나 못하나 상관없이 이것은 덤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잘했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못했다고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잘하고 못하고 관계없이 십자가 증인하라고 내가 이 땅에 계속해서 심한 세상을 살아가는 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하는 것이 그게 십자가의 원수라니까요.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여기 있다 하는 순간 하나님은 없어 날아가 버렸어요. 내가 여기 있다. 그냥 있는 게 아니에요. 따라서 내가 여기 있으니까 세상은 내 뜻대로 돌아가야 돼! 이게 내 원칙이고 법칙이다. 율법? 내가 만들게! 법? 내가 만들게! 복과 저주의 기준? 그것도 내가 만들게! 주님은 어디에 있으니까? 날아가 버렸어요. 주님은 저 하늘에 있겠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있음은 이 땅에서는 우리 때문에 죽으신 그 죽음의 사건으로만 우리에게 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성경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성경 말씀에는 못 믿거든 믿지마라 하는 그 원리가 여기에 들어 가 있어요. 안 믿어지는데 뭘 믿어!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그냥 나는 이스라엘만을 챙기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억지로 이방 나라를 꼬여서 이스라엘 만들 생각 하지 말고 무슨 이스라엘이 부흥됩니까?
성경에서 부흥이라는 것은 말씀 자체의 부흥이죠. 하박국의 수년 뒤에 부흥케 하옵소서! 말씀 자체가 실현되게 해 달라! 성취되게 해 달라! 완성해 달라! 그게 부흥이지 규모가 양적으로 커지는 것을 부흥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원하니까 목사들이 사기 치는 겁니다. 목사가 사기칠 때 그냥 치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한 겁니다.
주일 낮에 그런 설교를 했잖아요. 70넘은 부부가 하루는 그 할머니가 남편보고 이혼하자 하는 거예요. 왜? 어디서 주는 약을 먹었는데 불끈 불끈 정력이 솟는데 영 남편이 그 정력에 만족스럽지 못하게 만든 거예요. 그것은 평소의 우리가 은근히 원했던 거예요. 왕성한 부부 생활, 평소에 원했던 거예요.
놀랍고 재밌는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십자가의 원수는 다 해 줄 용의가 되어 있어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다 해 줄 용의가 되어 있고 우리는 얼마든지 소비자가만 안 본다면 모든 역량것 다 제공할 용의가 되어 있는 것이 멸망의 자식입니다. 왜? 그래야 멸망의 자식이고 그게 배도의 죽여가 살기 때문에 도를 배반하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도를 배반하는 그런 취지의 그런 세력이 지금 현재 우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디에? 이 세상에요
그래서 성경 말씀은 사도 바울이나 누가 성경 말씀을 전하면 이 말씀은 우리보고 두발을 이 세상에서 떼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이 세상에 푹 죽치고 앉은 사람 같으면 이 말이 전혀 믿어지지 않아요. 목사님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살까요? 걱정만 할 뿐이지 진짜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이제 떠나야지 괜찮아! 주여 지금 떠나도 괜찮습니다. 이 땅에서 떼어내서 하늘나라 보내도 저는 고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가벼운 마음이 이 말씀보고 들어야 돼요. 그래 진작 떠나야 돼! 아이고 뭐 자식을 내가 키워야 돼, 결혼도 안 했는데 하는 그런 생각하지 말고 주께서 그만 살게 할 때 그동안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떠나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우리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는 겁니다. 강림이라 하는 것은 저쪽 분이 이쪽으로 오는 거잖아요. 저쪽 분이 왔다는 말은 이쪽보다 저쪽이 더 낫다는 뜻을 강림의 뜻에 담겨서 우리에게 온 거예요. 그런데 강림을 맞이한다고 해 놓고 이쪽도 좋은데 이렇게 나오면 그게 강림을 기다리는 신부의 자세이겠어요? 그런 자세는 옳지 않은 자세에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하고 이방 민족, 그들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 이웃나라를 좋아하다 보니까 함께 있는 하나님이 매일같이 있으나 마나 없는 없어도 되는 그런 느낌으로 그들은 살아갔었어요. 오늘날 루이보스하고 왜 그리 똑같습니까? 예수 믿는 다고 하면서 주일만 교회 와서 예수 믿는 척하지 평일에는 예수님 생각 안 나잖아요. 동사무소 가서 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호적등본 뗀다고 하면 됩니까? 직원이 여기 있습니다. 저 마귀거든요. 이렇게 됩니까? 평소에는 뭐가 빠집니까? 평소에 동사무소에 가서 아저씨, 호적 등본 떼어 주세요. 이렇게 되죠 뭐가 다 빠져법니까? 하나님도 빠져 버리고 뭐도 빠져요? 악마, 불법, 멸망의 자식도 빠진 상태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은 성경에 나오는 현실과 달라서 중요한 그 배후세력을 가위로 잘라낸뒤에 그것은 다 빼고 해요. 다 빼고 세상살이를 하지요. 그런데 성경을 그것을 인정을 안 해줘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 빼고 신 빼고 인간들 끼리 해 보겠다고 그런 식으로 나온거예요. 솔로몬이 자기와 결혼한 왕비들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이 믿던 종교들을 위해서 이방 신전을 차려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자가 조용해야 가정이 화목하니까 그랬겠지요. 그러니까 솔로몬이 뭘 생각 안한 거예요? 하나님의 원수를 생각 못하고 하나님은 그냥 계신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알아서 우리 편한 대로 처리하고 조치하면 된다고 한 겁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이 우선인데 그 행복이 교회에 올 때는 행복이 앞에 글자 하나가 떨어져요. 뭐가 떨어지느냐 하면 ‘행’자가 떨어져요. 그러면 뭐가 남죠? ‘복’이에요. 복 받으러 오는 거예요. 그 내용을 들어보면 성경에 나오는 복이 아니라 자기 행복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는 행복 하고 싶은데 신은 뭐하고 있었냐 이 말이에요. 헌금해서 행복 주면 그러면 내가 헌금하지 뭐 이런 식이에요.
이제부터 중요한 것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주의해야 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게 레위기 18장 2절에 나오는데
레 18: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레 18: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여러분 풍습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 한 수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풍습은 대대로 몸에 습관화되어 몸에 자연스럽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애굽의 풍습을 안 따르면 뭐가 불편하냐면 내 자신의 몸이 불편하고 내 몸이 불편한 것을 가지고 불행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던 그것과 모든 풍습과 제도를 없앤다는 것은 뭐를 자초하느냐 하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했느냐 하면 사람이 행복할 때는 마귀고 뭐고 그냥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에요. 그런데 자기에게 불행이 찾아왔을 때는 원망하는 대상을 신으로 잡고 공격성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욥도 마찬가지였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애굽의 풍습을 버려라 그들은 애굽의 풍습에 푹 젖어 있는 사람인데 젖어있는 그들에게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하니까 그들은 따르는데 이게 억지에요. 억지는 억지일뿐이거든요. 자연스럽지 못하지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어떻게 나옵니까? 불만이 나오지요. 왜냐 하면 애굽의 풍습과 이스라엘의 풍습은 하나님은 비슷할 정도가 아닙니다. 완전히 반대입니다.
어제까지 습관대로 살다가 오늘은 반대로 한다. 이것은 힘들지요. 야간 근무 안하다가 야간 근무 해 보세요. 사람이 죽잖아요. 쭉 주간을 하던지 쭉 야간을 하던지 간호사들이 힘든 게 뭡니까? 야간 때문에 힘들잖아요. 밤 근무 때문에 힘듭니다. 몸에 익숙하지 않아서 억지로 하니까 몸이 불행을 느껴요. 행복을 느끼지를 못해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불편해 죽겠어요. 결국은 하나님에게 원망할 수밖에 없지요. 바로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게 뭐냐? 그게 형식적으로 애굽의 풍습을 벗어났다고 하지만 어린 양이 죽을 수밖에 없는 문설주에 피를 바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대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드디어 생산해 내는 겁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죽은 거야! 바로 너 같은 요소 때문에 죽은 거야! 철저하게 주께서 우리를 가지고 뽑아낼대로 다 뽑아 내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따져 볼 것은 그렇다면 애굽의 풍습을 통해서 악마, 마귀라는 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오는가를 악마의 정체가 뭐냐를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해 봅시다.
김창길(IP:210.♡.60.74)
13-06-16 19:36
서울 의존교회130510b (악마의 실체)―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작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도대체 악마가 뭐냐? 간단한 주제, 악마가 뭐냐? 그런데 질문을 할 때 악마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하면 안 된다고 했지요. 악마가 무엇이냐 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가 지금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느냐? 이렇게 질문을 해야 해요. 왜냐 하면 악마가 무엇이냐가 되면 질문자인 나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자부할 때만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무엇이냐 하는 것은 누구의 몫이냐 하면 그것은 예수님만 무엇이냐고 할 수 있어요. 왜? 예수님만 자기 자신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5년 뒤에 10년 뒤에 어떻게 달라질지를 몰라요.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알면 어쩔 건데? 알면, 내가 알았다고 내가 내 지식에 집어넣으려는 의도가 강하거든요. 그래 내가 악마를 알았어! 이제는 내가 악마를 다룰 수 있어! 여러분, 악마는 상대할 수 없는 상대입니다. 왜냐? 악마는 이름이 없습니다. 상대할 수 없는 상대자인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악마를 상대하는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에요. 따로 있어요. 귀신 말고 악마, 악마라고 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옛뱀, 악마, 사탄 전부 다 동일 존재에요.
유다서 1장 8절에 보면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실체에 대해서 마귀와 다투다가 강하게 훼방하는 판결에 서지를 못했어요. 왜냐 하면 미가엘은 빠져야 되니까 누구한테 밀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처리하도록 해줘야 됩니다. 왜냐 하면 시편 110편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원수를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라고 주님이 주님되게 하신 요건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원수를 영원히 지배하는 그럴 때 주의 자리가 오른쪽의 자리에서 주님으로서 행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활동하는 것은 맞지만 마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은 마귀한테는 이름도 없을 뿐더러 이름 이전의 존재가 마귀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이름부터 시작되는데 이름 이전으로부터 인간이 시작되거든요. 어려운데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 졌습니까? 물으면 흙에서 만들었습니다. 흙에서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만들었습니까? 생명을 부어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 버리면 그게 창세기 2장에 나오거든요. 그렇게 해 버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할 경우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인간의 창조에 어떤 관계가 엮입니까에 대한 답변이 사라져요. 답변을 못해요.
신약에 악마가 인간에게 달려들잖아요. 우는 사자같이 살피고 베드로를 청부하려는 게 나오지요? 이미 신약성경에서 악마가 베드로를 청부하려고 시도 했던 이 말은 신약에 와서 사실이지만 그 근거는 이미 구약의 창조에 그런 근거가 인간창조때부터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창조에서 악마가 어떤식으로 관여한 것을 우리가 알아차려야 돼요. 알아차리려면 인간은 어디서 나왔는가를 알아야 되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이름을 아담이라고 지었잖아요.
그렇다면 악마는 어디 있는가? 악마는 이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이전에 악마와 그리고 악마라고 규정한 다른 어떤 세력 관계 속에서 인간의 창조를 다시 한번 엮어서 생각해야 됩니다. 이사야 14장12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계명성이란 말은 루시퍼란 뜻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마의 이름이 루시퍼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옛날부터 교회사에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악마의 이름을 알고 싶은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악마가 궁금한 게 아니고 악마의 이름을 부름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 인간의 지식 범주 안에 집어넣으려는 그런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마마저 인간의 지식에 포함이 되어 버리면 인간은 무엇을 놓치게 되느냐 하면 나는 어떻게 만들어 졌느냐, 아담은 왜 만들어 졌는가! 그 점을 놓치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 인간의 근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뒷부분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놓치게 부분의 근원을 찾아내는 방법은 뭐냐? 인간으로서의 상대할 수 없이 인간에게 덮쳐진 상황이 있습니다. 그러게 신약성경에서 어둠, 밤이라는 게 있습니다. 창세기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며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일단은 쉬운 예로서 밤, 어둠을 생각해 봅시다. 어둡다고 할 때 여러분은 뭐합니까? 아무 것도 할 게 없지요. 지금은 형광등 키고 하지만 옛날 전기도 없이 어두울 때 그냥 잠만 자지요. 그러면 어두울 때도 활동하고 싶은데 왜 세상은 캄캄한 것일까요? 이것은 인간의 활동 이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에게 물어보지 않고 어두움이 인간의 의견에 개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두움이 인간에게 찾아 들어온 거예요. 어둡다는 것은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그 범위 밖에서 이루어진거에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 자신을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빛이라 하지요. 그럼 빛의 반대말은 뭡니까? 어둠이죠. 그리고 인간한테 너희가 어두움에 속했기 때문에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를 못하죠. 이게 바로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는 겁니다. 생각해 봅시다. 캄캄한 밤에 빛이 등장하면 어두움이 알아봅니까? 안 알아봅니까? 대번에 알아보죠. 눈에 확 들어오죠. 어두움이 어둡기 때문에 빛이 빛으로 확 들어오는데 요한복음은 뭐라 이야기합니까? 네가 어둡기 때문에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한다. 무슨 빛이 그런 빛이 있습니까? 어두움으로 하여금 빛을 못보 게 하는 그런 빛이 다 있어요? 이것은 이 세상의 주도권에서 인간은 예수님과 상대할 대상이 아니란 것입니다. 예수님과 상대할 대상은 인간이 아니고 인간 배후에 자리잡은 요한 복음 8장에 나온 것처럼 너의 애비는 마귀입니다.
악마, 마귀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주도권을 좌지우지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이것은 인간 창조 비밀에 있어서도 인간이 만들어 진 인간이 창조의 비밀에 관여할 수 없는 입장에서 인간의 비밀, 출생의 비밀은 거기에 놓여 있다 보면 되는 겁니다. 출생의 비밀하니까 막장 드라마 같은데 막장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은 결국은 무엇을 찾아갑니까?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내지요. 출생의 비밀을 찾아보니까 자기 아버지하고 재혼한 부인이 자기 누나였다! 막장 드라마 이야기에요. 누나를 누나로 부르지 못하고 엄마를 엄마라 부르지 못하고 그런데 그 누나에게서 난 자식이 자기를 사장 자리에서 쫓아내기 위해서 모함해서 쫓아내고 자기는 그 상점 안에 있으니까 복수할 꺼야 하면서 직원하나 붙여서 다른 사람한테 복수하고 그런 것 많이 보잖아요.
출생의 비밀에서 인간은 분명히 낮과 밤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인간이 손댈 수 없는 부분은 놔둬 버리고 인간이 손댈 수 있는 부분부터 시작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름 짓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이름이 아담이라 했잖아요. 아담을 만들어 놓고 아담이 무슨 작업을 합니까? 이름 짓기를 합니다. 아담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 모든 것은 어디에서 소속되느냐 하면 아담에게 소속됩니다. 이렇게 소속되면 아담은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주체성이 생깁니다.
이 주체성은 무엇을 주체성이냐 바로 사람의 이름, 아담 이름에 합당한 주체성입니다. 이 주체성이라는 것은 세상에 모든 돌아가는 것은 내가 납득이 되도록 돌아가야 된다는 것, 모든 것이 나를 위해서 나를 집중해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 중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만 지금 아담은 이름 짓기 전의 있었던 상황은 완전히 까마득하게 모르죠. 뭘 몰라요? 악마라는 것도 모르고 뱀이라는 것도 모르고 사탄이라는 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몰라요. 다만 내가 이름 지어진 그것들은 바로 내가 이름지어 졌기 때문에 그 의미가 이름 지어진 자에게 의미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김춘수의 시에 있지요. 내가 이 꽃을 꽃이라고 하는 순간에 내가 꽃이라 이름 불러 주면 그것은 나에게 관련되어 있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낳게 되면 뭐부터 합니까? 이름부터 짓잖아요. 이름을 누가 졌습니까? 이름을 내가졌기 때문에 남의 자식이 아니라 내 자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낳아 준 엄마, 길러 준 엄마 싸울 것이 아니라 이름 지어 준 엄마가 엄마 인거예요. 왜? 이름만 짓고 손 떼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 이름을 불러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중간에 엄마가 잃어버리면 새 엄마는 이름을 신뢰 새로 지어 줍니다. 왜? 새로 나에게 소속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 이릴 때 어른들이 장난삼아 엄마 나 어디서 나왔어? 하면 너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하면 그때부터 큰 고민이 되는 거예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말은 그럼 이 엄마는 주어 온 엄마이고 낳아준 엄마는 따로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애들이 평생 헷갈렸는데 나중에 농담인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름이 있음으로서 모든 세상은 아담의 이름으로 도배가 됩니다. 이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냐 인간의 이름이 번영하는 그런 세계가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이 있어야 되고 하와가 있어야 될 에덴동산에 난데없이 선악과라는 나무가 있으면서 뱀이 선악과나무를 보면서 아담에게 따 먹으라고 유혹하지요. 저걸 따먹는 날에는 네가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는게 나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 하느냐 하면 금지죠. 따먹지 마라! 하지요. 뱀은 말하기를 따 먹으라고 하면서 누구보고 지시합니까? 하나님보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하잖아요. 따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왜? 본인이 주체,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주인공은 뭐냐, 하나님의 인간들이라는 것은 인간을 두고 주변에 뭐를 배치하느냐 하면 금지를 배치해요. 따먹지 마라! 이 선을 넘어가지 마라는 거예요.
따먹지 마라! 따먹는 순간에 너는 죽는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거예요. 죽음이라 하는 것은 삶의 끝이에요. 죽는 순간은 삶이라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의 삶, 주체로서의 삶, 인간 이름으로 갖고 있는 삶, 죽으면 이 모든 것이 와해되어 없어져 버려요.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주체가 아니고 우리의 죽음은 다른 주체에 시신이 되어 넘겨집니다. 사실은 그것이 인간의 창조 이전에 있었던 까먹지 말라는 것이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창조 이전에 있었던 태어나서부터 이름 알아서 설치는 것 말고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그 내막에 인간은 넘겨지는 거예요. 그 내막에서 인간은 아무 힘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맡겨진 거예요. 운명대로 맡겨질 뿐이에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냥 구원하지 않지요. 십자가에 함께 죽이고 구원하지요. 왜 죽이고 구원하십니까? 십자가에 죽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능력이 개입됩니까? 안 됩니까? 우리의 견해가 개입이 됩니까? 개입이 안 되지요. 개입이 안 되려면 구원되고 안 되고는 누구 손으로 넘어갑니까?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지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강도가 두 명 있었잖아요. 우리들이 보기에는 인간들이 보기에는 죽음이 끝이에요. 죽음이 끝이기 때문에 지금 죽음쪽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몇 명입니까? 세명이죠. 강도 둘에 중간에 예수님 하나, 세명 다 인간 세계를 떠나 버립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강도보고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을 때 그때 구원받지 못한 강도는 그 내막에 끼어 들 수 있어요? 없어요? 끼어 들 수가 없는 거예요. 왜 끼어 들 수가 없는가 하면 안 죽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라는 초대에 받았어요? 못 받았어요? 초대를 못 받았어요.
그런데 살아 있을 때는 초대를 안 받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난 뒤에 초대를 받아요. 인간이 죽는다고 다 초대 받는 것은 아니고 결국은 여기서 공식이 하나 나와요. 어떤 공식이냐 하면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에 합류했을 경우에만 구원이 돼요. 예수님의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을 다른 말로 피라 하는데 예수님의 피에 합류할 때만 이게 구원이 돼요.
그러면 진정한 아담은 누구입니까? 인간이 만들어 진 창조 이전까지 해결할 수 있는, 이전까지 권리를 행세할 수 있는 진정한 아담은 누구에요? 예수님 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사랑하는 내 아들, 내 기뻐하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인간은 누구입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두 번째 아담이요 마지막 아담, 그리고 원초적 아담, 다른 말로 하면 원초적인 하나님의 형상, 인간들은 모든 피조물들의 이름을 자기가 지으니까 모든 피조물이 자기를 위해서 자기로 말미암아 만들어 진줄 알았죠. 골로새서 1장 17절에 보니까 뭐라 되어 있지요. 세상 모든 만물은 누구를 위해서 만들었다? 예수를 위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위하여 그들은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만들었습니다.
누가 진정한 갑이에요? 예수님이 갑이에요. 예수님이 진정한 이 우주의 주가 되고 중심이 되는 겁니다. 모든 만물은 그에게 경배하지요. 하나님의 뜻이에요.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악마는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상대라고 했지요.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이유가 악마한테는 이름이 없어요. 마치 예수님의 이름이 없는 것처럼……. 예수님과 악마가 이름이 없다는 것은 이름이 있는 자들이 자기 이름의 의미를, 아담이 꽃이라 부를 때는 아담에게 의미가 되는 거예요. 아담이 이름을 짓게 되면 이름짓는 자에 의해서 소속이 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을 예수라 해야지 하면 예수님이 이름 지은 자에게 소속이 됩니까? 안 되지요. 악마가 루시퍼라 한다고 악마가 겁을 내서 감히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지? 꼼짝도 못하겠네! 루시퍼야? 예 이렇게 합니까? 누가 호명을 했을 때는 그것을 딱 지적해서 호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호명한 자는 그쪽에서 호명한 관계를 거부할 수가 없어요. 악마라면 ‘루시퍼!’ 하면 ‘예’ 이렇게 해야 돼요. 그런데 악마는 미가엘도 관여 못해요. 이름이 없어요. 어디 감히 이름 없는 자를 관할하려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이름 없는 악마는 누가 다룹니까? 이름이 없는 분이 두루어 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이 왜 이름이 없어? 주의 이름이 있잖아! 주의 이름이라는 게 주님이 이름이 없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에요. 제 이야기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이 역설하게 되면 그것은 다 인간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다 죽을 이름입니다. 하나님 앞에 죽어야 되는 겁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죽었어요. 그 죽음이 확정되는 겁니다. 확정하게 되면 죽어야 될 이유를 뽑아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 뽑아내는 방법을 통해서 인간 창조 이전에 숨어있던 배후의 세력을 끄집어내는데 그게 뭐냐 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끄집어 내요. 끄집어내지만 끄집어 낸 바탕이 뭐냐? 모두가 인간의 이름으로 뒤덥혀 있는 인간 새 역사입니다.
어디 가도 인간의 이름이 있어요. 창세기 4장 보면 가인은 가인대로 나를 주장하고 라멕은 라멕대로 나를 다치게 하는 것은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칠배이지만 나를 위하여는 칠십칠배라고 하잖아요. 전부 다 자기 이름 중심으로 하는 거예요. 자기가 의미를 붙이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체성이라 했지요. 세상은 아담이 되고 난 뒤에 아담이 이름을 지을 때는 그냥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고 내 중심으로 세상을 재 편성하고 전부 다 정립이 되어 있어요. 이것은 누구나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전부 다 누구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이름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하는 겁니다. 야, 너 공부 잘해야 돼! 엄마, 왜? 너는 아버지 이름을 더럽히면 안 되니까 엄마 이름을 더럽히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 미성년자들은 누구의 이름이 중요합니까? 내가 행동을 잘못하면 나 때문에 아버지가 욕을 얻어먹어요. 나중에 독립을 한다. 난 아버지 이름으로 살기 싫어! 독립하면 그 이름이 없어집니까?
이름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나 여기 있다는 말입니다. 나 여기 있다는 말은 내가 없을 때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라는 거예요. 모든 것은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서 마귀라는 것은 거기에 마귀가 들어오면 마귀마저 내 영원함에 훼손하지 말고 마귀도 거기에 같이 협조 할 판이고 하나님도 협조할 판이에요. 자기 판을 꾸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어두움을 아느냐? 이 어두움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우리와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배후에 어두움에 권세 잡은 자를 상대를 해서 우리를 거기서 어두움에 푹 젖어 있는 우리를 거기서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은 우리를 비켜 갑니다. 우리의 이름을 무시해 버리고 주의 이름으로 다가오게 되면 그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불러도 우리 식대로 우리가 부른다고 우리에게 의미가 되는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을 우리가 부른다는 것은 어떤 자격으로 부르느냐 나의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불러봐야 그 주의 이름은 내가 펴놓은 평상에 들어온 것 밖에 안돼요. 그렇게 되면 주님이 나의 똘마니가 돼요.
내가 주의 이름을 불렀잖아, 다시 말해서 자기 노예 부르듯이 ‘만득아, 만득이 내가 시키는 대로 왜 안했어?’ 호명을 한다니까요 호명을 하게 되면 주님은 내 뜻대로만 움직여질 때만 내 주가 되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갑이고 주님이 을이 되는 겁니다. 주님은 이것을 뒤집어 버리죠. 어떻게요? 죽음으로…….
죽음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있기 전에 있던 겁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죽을 때 이름이 날아가 버려요. 없어져 버려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없어져요. 없어지기 때문에 그때 뭐가 생기게 되느냐 하면 우리는 어디에 흡수 되느냐 하면 우리는 말씀의 세계, 언약의 세계에 흡수가 되어 버립니다. 언약적 세계에 흡수가 되어 버리면 내 의미는 사라져 버리고 하나의 언약적 개념으로 달라집니다. 그게 성경에 나오는 아들 개념입니다.
아들들이 아니고 그냥 이스라엘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들이에요. 이스라엘의 개념입니다. 이스라엘을 마치 한 사람 다루듯이 이스라엘이라 부르지요. 이사야에 보면 나오잖아요. 내 사랑하는 택한 야곱아! 내가 평소에 내 위주로 살던 용어는 사라지고 주님이 주의 이름으로 쓰인 그 개념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부로서 포함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의미라 할 때 모든 의미가 나한테 온다면 단독자, 내가 단독자가 되지만 예수님 쪽에서 개념으로 날려버리면 말씀으로 날려버리면 우리의 다수는 날아가버리고 어디에 흡수통합되느냐 하면 주님 쪽의 개념에 흡수 통합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를 들어서 교회, 교회가 뭡니까? 머리가 그리스도인 것만이 교회이기때문에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신자가 10사람이 있는데 성령이 거한 것이 성전이죠. 우리 몸이 성전이잖아요. 그럼 10명 있으면 성전 몇 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