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4. 19) 1강
광주 강의(2013. 4. 19)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4. 19) 41-1
에스겔 37장 24절을 보겠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여기에 다윗이 나오고, 또 그들의 왕이란 말이 있는데 이 둘을 설명하면서 오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윗과 왕을 설명하면 여기서 숨겨져 있던 언약이 나옵니다. 언약이 하는 일은 인간이 만든 신의 형상을 부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신의 형상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사람들이 현실에서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언약이 부정합니다. 언약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말, 또는 설교, 언어가 눈에 보이는 신상을 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겁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죠. 그러나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눈이 있는 내가 살아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겁니다. 늙어서 백내장이 생기면 주님이 안 보여서 지옥 갑니까? 아니지요. 언약을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러기에 언약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는 언약을 말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은 언약이 아닌 현실 속에서 고상하고 신기한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자기 신체가 살아있고 눈이 잘 보일 때에만 유용한 것이지요.
두 번째 언약의 기능이 뭔가 하면, 성도와 비성도를 구분합니다. 비성도가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근거는 윤리, 도덕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를 언약이 부정합니다. 제가 지금 언약을 설명하면서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고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약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디에 마음이 빼앗기는가 하면, 신기한 기적을 받아야 그것이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 같고, 또 선하고 착한 모습이 있어야 천국 가는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이 순간은 언약을 놓친 순간입니다.
복음 전하는 자를 주위 사람들이 공격할 때 언약을 모르니까 기껏 공격한다는 것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의 행동이 저런 것이야!”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언약이 아니지요. 신명기 9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목이 곧은 백성을 왜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까?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별 볼일 없는 사람, 똑똑하지 않은 사람, 가진 것이 없는 사람, 별 재주 없는 사람, 이런 자들을 택하셔서 능력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천국은 재능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니고, 전혀 능력도 재능도 없는 사람들이 언약 때문에 천국 갑니다. 이것을 저는 ‘언약의 효과’라고 말하고 싶어요. 효과니까 언약을 소유하지는 못합니다. 소유하지는 못하지만 그 효과는 받을 수가 있습니다. 본인은 십자가 진 적이 없어요. 그런데 십자가 피의 효과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새언약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사람들은 언약을 모르니까 언약을 대신할 다른 것들을 제시합니다. 불신자들이 언약 아닌 다른 것들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 우리가 짜증을 부리는데 그들의 하는 짓이 나쁜 현상만은 아니에요. 우리도 언약을 몰랐을 때는 비언약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가져야 구원 받지.’ 또는 ‘내가 뭘 느껴야 구원 된 것이지.’ 이런 식으로 뭔가를 소유하려 합니다. 이것은 효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십자가 진 적이 없다. 그런데 구원 받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보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은 십자가 진 적이 없는데 구원 받았어요. 왜 그렇습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라는 그 말씀에 포획되면 우리는 그 효과를 보는 겁니다.
첫 번째는 신의 형상,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고상하고 멋있어 보이는 것이 있을 때 그것으로 구원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을 언약이 부정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윤리, 도덕적인 삶이 있어야 성도답다는 생각을 언약은 부정합니다.
세 번째가 뭔가 하면, 우리는 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합니다. 내가 어느 정도 향상했는가? 또는 얼마나 퇴보했는가? “집사님, 얼굴 참 좋아졌네요.” 이건 무슨 말입니까? 과거에 비해서 지금이 좋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언약은 과거와의 비교를 부정합니다. 언약은 과거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비교합니다.
언약은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밝혀줍니다. “하나님, 제가 술을 끊었습니다. 잘 했지요?” 이러지 마세요. 이것은 술 먹는 과거 나와 술 끊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모습입니다. 프로 야구선수, 또는 연예인들, 목사도 마찬가지고. 항상 이들이 과거 잘 나갈 때를 기준으로 지금의 자신을 견주어 봅니다.
타율 4할을 치던 선수가 2할로 떨어지면 관중들이 욕을 합니다. 옛날에 비해 지금이 형편 없다는 것이지요. 이런 비교를 다른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그렇게 합니다. “옛날에는 인기 좋았는데 지금은 사인 해달라는 사람도 없네.” 하면서 푸념을 합니다. 항상 과거와 비교하지요.
이런 비교가 불신자들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설교 들으면서 눈물이 나고 했는데 요즘은 통 은혜를 못 받네.” 예수님과 비교해야 되는데,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니까 또 시험에 듭니다. 성령께서 또 언약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비교할 것과 비교해라. 옛날에 믿음 좋았다고? 아니야. 너의 착각이었어.”
제가 ‘효과’라는 말을 섰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효과’로 산다는 말은 매일 ‘거저 주시는 은혜’로 산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언약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언약이 아닌 것이 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뭔가 거룩하고 고생해 보이는 것이 언약은 아닙니다. 헨델의 ‘메시야’같은 음악. 여러분들이 이런 곡을 연주하는 곳에 가면 눈물을 흘리면서 듣는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선교단체 학생들 수 천 명이 모여 마지막으로 ‘주기도문’ 노래를 합창할 때 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언약이 아닙니다. 뭔가 고상하고 거룩해 보이는데, 언약은 아닙니다. 언약은 이런 것을 부정합니다.
두 번째는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점은 윤리, 도덕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이다. 세 번째는 과거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데 언약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춰보도록 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지요. 베드로가 언제 자신의 진명목이 드러났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다는 이야기를 할 때 드러났어요. “주님, 죽으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나왔잖아요. 그 때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고.
이런 책망을 들었으면 베드로가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이 언제 완전히 바뀌는가 하면 새언약의 효과가 오게 되면 은혜에 휩싸여서 성도로 살아갑니다.
네 번째 언약의 특징이 뭔가 하면, ‘들어가는 것을 막고 넣어주신다.’ 이게 언약의 기능입니다.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필히 막습니다.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한국교회는 언약을 이야기 안 해요. 그냥 힘쓰면 구원 받는다는 거예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가르쳐요. 그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제대로 된 해석인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입니다.
이런 자들을 주님은 막으십니다. 그런데 들어갈 생각도 없는 자들을 그냥 넣어주십니다. 왕의 아들 혼인잔치에 참석한 자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며칠 전부터 왕의 잔치에 참석하려고 철저히 준비한 사람들입니까? 아니지요. 길거리에 놀고 있던 사람들이 불려 왔어요. 오라고 해서 간 거예요. 넣어준 거예요.
이처럼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주여, 왜 저를 이 자리에 오게 하셨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개혁주의 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 난자를 향해 정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수정 직전의 모습 같아요.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수정이 안 돼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너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라는 말이 있어요. ‘허락’이 뭡니까? 하늘에서 결재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생명책 명단을 보고 명단에 이름이 있는 사람만 들어오도록 허락하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은 자기가 힘써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불려온 것뿐입니다.
성화론자들이 언제 바뀌겠습니까? 때려죽여도 안 바뀝니다. 절대로 안 바뀝니다. 바뀔 수가 없어요. 복음과 성화론은 완전히 극과 극이에요. 언약과 비언약입니다.
제가 가락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옥이 무서운 것은 고통스러운 곳이라서가 아니라 고통이 끝나는 시점이 없다는 것이 더 무섭다.” 한 20년 고생하고 끝난다면 희망이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끝이 없습니다. 치통에 시달려도 그 고통의 끝이 있기에 참을 수 있고, 수술이 아파도 상처가 아무는 때가 있기에 참을 수 있는데, 지옥은 끝이 없습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이 없어요. 예수님이 영생하시는 분이고, 그 예수님의 영생을 증거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의 임무(주를 찬양하는 일)도 끝나지 않습니다. 주와 함께 영생합니다.
지옥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해서라도 천국에 가야겠는데 주님이 막고 계시니까 갈 방법이 없지요. 온갖 좋다는 것(언약, 십자가, 은사 등등)은 다 먹었는데 먹어봐도 수정은 되지 않고 근처만 빙빙 돌고 있을 뿐입니다. 허락을 받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사님, 복음을 믿고 싶은데 허락이 없어도 못 믿습니다.” 이 말은, 복음은 들어서 지식으로는 알겠는데 마음으로는 와 닿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복음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 자체가 복음에 대해서 아직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이 사람 주장은 ‘복음에 대해서는 아는데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겁니다. 복음을 제대로 안다면 가슴에 안 와 닿아도 구원 받은 것을 믿게 돼요. ‘집에 계시는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 것이 납득은 되는데 가슴에 와 닿지는 않습니다.’ 이런 말과 같은 거예요.
아버지가 매일 내 가슴에 와 닿아야 아버지입니까? 아니지요. 이미 구원 받은 사람은 가슴에 늘 와 닿는 게 아니고, 이미 그런 관계에 놓여 있다는 이것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된 것으로 생각되는 겁니다. 복음 아는 사람들은.
복음은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성취를 위해서 내가 이용당한다는 사실, 복음을 위해서 나는 그냥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미 난자 속에 들어가 합궁된 자입니다.
들어가는 자는 막고, 그냥 넣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냥 넣어주셨습니다.”라는 고백 외에는 없습니다. ‘제가 눈물 흘리면서 통곡했더니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봅시다. 내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악마가 시킨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근거가 언약입니다. 내가 지금 신앙생활 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단의 장난인지 성령이 이끄신 것인지 스스로 판정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왜냐? 우리는 어리석게도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언약이 없어요. 이것은 짐승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새언약은 피입니다. 피를 넣지 않고 신앙생활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바로 마귀가 나를 시험한 것임을 알게 되지요. “요즘 내가 자주 짜증이 나서 화를 잘 낸다. 이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아닌 것 같아.”고 할 때 여기에 무엇이 빠졌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빠진 거예요.
그러면 항상 웃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신앙생활 잘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 역시 예수님의 피가 빠진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이근호 신학의 문제점]이라고 하면서, 그 중 “기쁨과 감사가 없다.” 이런 주장을 해요. 이런 기준은 짐승이 시켜서 꾸며낸 신앙생활입니다. 뭐가 빠졌습니다. 새언약의 완성 십자가 피가 빠져 있어요.
엘리야가 고생할 때 하나님께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 순간 뭐가 빠졌습니까? 언약이 빠진 거예요. 나중에는 자기편이 아무도 없고 혼자 남았어요. 850대 1로 싸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언약으로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들 850명은 언약이 없으니까 싸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게임을 어떻게 하는가 하면, 권투나 탁구, 야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몰래 언약을 넣어놓고 언약 없는 자들과 싸움을 붙입니다. “자 이제부터 내가 시험문제를 내는데 답을 아는 사람은 천국, 모르는 사람은 지옥이다.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손들어!” 저쪽은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서로 얼굴만 쳐다봅니다. 이쪽에서는 언약을 내놓으면서 “이것 말이지요.”하면 “바로 그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게임은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해요. 문제의 답을 어떤 사람에게는 알려주고 누구에게는 안 가르쳐주고 이런 식입니다. 여러분들이 불신자를 대할 때 주눅 들지 마세요. 그들에게 없는 것이 여러분에게 있어요. 그게 뭔가? 주가 주신 피가 있습니다. 이게 언약입니다.
여섯 번째는 뭔가 하면, 사람이 성경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잊어버리지요. 그러면 예수도 잊고 복음도 잊고 다 잊어버릴 텐데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내가 알았던 모든 것이 다 무로 돌아가도 남는 게 있어요. 그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내가 어떤 것을 알았다는 그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안다면 지금 알 뿐입니다. 나중에는 장담 못해요. 언제 치매에 걸릴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 피에 있지 우리가 십자가 피를 알았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이든 항상 예수님의 피, 언약을 증거하면 그것이 구원의 효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모든 사건과 사물은 예수님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께 모든 권세를 주신 것은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영생이 돌아가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권세에서 사건이 나오고, 그 권세로 말미암아 사물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인물에 의해서 사건과 사물이 움직여집니다. 그 인물이 누구지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모든 사건과 사물을 남겼고 우리를 남겼다면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모든 영광을 주에게 돌려야겠지요. 이 모습은 나중에 천국 가서 어린양의 보좌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작업의 연습으로 계속 이 땅에서 성도로 하여금 살게 하십니다.
제가 일곱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여러분이 몇 가지나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그 기억과 상관없이 지금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한 증인입니다.
이러한 것이 언약이라고 했지요. 그러면 이제 응용해 봅시다. 본문 에스겔 37장 24절로 돌아가서, 다윗과 왕이라고 했는데, 이 관계에 무엇이 들어가겠습니까? 언약이 들어가지요. 그러면 다윗은 다윗 개인이 무엇을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언약이 다윗을 태어나게 했고, 언약이 그의 한 평생을 관장했고, 심지어 다윗은 죽고 다윗이라는 이름을 언약이 도용해서 장차 왕이 오시는데 누가 온다? 다윗이 왕으로 오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유대인들은 다윗 왕이 오는 줄 알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혼란스러워요. 엘리야가 온다고 했기에 엘리야도 기다려야 하고, 다윗도 기다려야 되고.
그러나 실재로 그 모든 인물들의 이름을 도용해서 한 인물로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말라기에 오신다는 엘리야가 누구냐? 바로 예수님입니다. 말라기 마지막에 나오는 엘리야는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이 기능을 할 때 그것이 엘리아의 기능입니다. 그 기능을 누구 담당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예수님을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라고 한 거예요.
이런 말을 했지만 그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의 뜻도 잘 몰라요.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말한 것뿐입니다. 어떻게 결합되는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칼빈은 언약을 통과하지 않고 그냥 성경에 나오는 좋은 용어를 예수님께 갖다 붙이면 되는 줄 알았어요.
다윗이 왕이 될 때는 반드시 언약을 경유해야 됩니다. 그냥 다윗이 왕이 되면 개별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될 때는 개별자가 아니고 주체로 옵니다. 개별자와 주체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한 여인과 여성이 다릅니다. 남자는 여성하고 결혼한다고 해서 결혼합니다. 김 집사님도 아내를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결혼했을 거예요. 결혼을 하니까 여성이 아니에요. 그냥 한 여인이에요.
여성을 알려면 한 여인으로는 안 돼요. 100명의 여인과 결혼해도 여성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남성은 여성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여성은 남성을 알기 위해서 여러 남성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어요. 한 남자와만 살아도 남성을 알아요. 이게 뭐냐 하면, 여성은 주체가 있고, 여인은 개별자입니다. 이제 이해 됐지요?
사람이 주체를 찾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자기 주체를 정립하려고 하는 거예요. “난 이정도로는 만족 못해!” “저만큼은 너무 버거워. 안 돼!” 이것은 내 수준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자기 주체성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을 거치게 되면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무엘하 7장 13에 나옵니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제가 질문합니다. 아들이 지상에서 아들이 됩니까, 천상에서 아들이 됩니까? 철학적으로 보면, 천상의 아들이 그냥 지상에 내려와서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요. 언약적으로 보면 아들은 역사 속에서 만들어 집니다.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이 아들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만유의 주가 되기 위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아들 만들기에 예수님을 새삼스럽게 언약을 통해서 투입하십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내가 아들이다.” 외친다고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원수를 이겨야 됩니다.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원수를 이겨야 됩니다. 원수를 이길 때 아들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일생은 자기 원수가 아니고 하나님의 원수가 누군지를 보여주는 삶입니다. 다윗이라는 개별자를 통해서 주께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차 오실 아들의 주체성이 다윗을 통해서 발현된다, 보여준다, 표출된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제가 말을 어렵게 했는데 쉽게 말하면, 오늘날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되면 ‘아바 아버지’를 부르면서 아들이 됩니다. 개별자가 아들이 아니고 우리 속에 아들의 영이 계심으로 우리는 아들이라는 주체에 종속되는 겁니다. 종속된다는 말은 존재론적으로 종속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 아들의 원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다니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칠 때 그것을 싫어하는 자들이 숨어있던 영원한 하나님이 원수다.”라고 하십니다.
‘짐승’이란 말이 성경에 있지만 이 세상에는 없어요. ‘네 생물’도 없어요. ‘머리 일곱, 열 뿔’달린 짐승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다는 말은 표현할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없는데 ‘짐승은 이것이다.’라고 하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00이다.”라고 하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이 세상에 없는 것을 가져와서 표현하면 그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있는 우리가 설명하는 것은 하늘나라 주의 말씀에 붙일 수가 없어요. 하늘나라 모든 말씀은 언약에 의해서만 발생되는데 우리는 언약이 아니잖아요.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인은 죄를 개선할 수 없다.” 죄인인 우리가 착한일 한다고 해서 언약을 이룰 수 있습니까? 안 되지요. 우리가 십일조를 해도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십일조가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켜도 그것이 안식일이 아니라니까요.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이 역사적으로 눈에 안보이지만 그것이 눈에 보일 때가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왕으로 나옵니다. 왕이라는 개별자가 왕이라는 주체의 자리를 갖고 나올 때는 그 왕이 이 세상에 등장한 짐승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왕이 될 때 다윗은 개별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품고 있는 왕이라는 직분은 언약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할 주체의 자리입니다.
그 주체의 자리에 누가 담깁니까? 하나님의 원수를 이긴 분이지요. 예수님이 그냥 오신 것이 아니고 원수를 이김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십니다. 로마서 1:3-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라고 했지요.
존재론적으로 아들이 옛날부터 있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땅을 거쳐서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10분 쉽시다.
(2013. 5. 9. 08:02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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