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3b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20130503b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503b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의롭다는 것은 주님 때문에 의로운 거죠. 언약 속에 휩쓸리니까 의로운 거지 언약 빼버리면 우린 의롭지 않습니다. 그걸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 안을 빼버리면 우린 의인 아니에요. 그래서 언약이 우리를 의인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언약을 위하여 의인 되어야 돼요. 죄인이. “나는 이제 언약으로 의인 돼야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우리가 뭔데 우리를 위해서 언약이 있어요? 말이 안 되거든요. 주님의 언약을 언약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간주해주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 완성을 위해서 언약 완성의 효과가 우리한테 그냥 덮친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 언약을 드러내가 위해서 고생 많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되는 겁니다. 자살하면 안 돼요. 쓸데없이 시험들고 성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이런 짓해서는 안 되거든요. 미쳤어. 그게 언약이 아니거든요. 언약은 이미 끝났어요. 피입니다. 피로 언약이 끝났다는 말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그 짓으로 의인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것이 의인인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의인 아니라는 것을 그걸 완료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그것이 언약이 우리한테 들이닥친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 짓을 해야 된다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날 위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내가 주가 되고, 주님은 똘마니처럼 되는 거예요. 토기장기가 토기한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토기와 미안하다. 너를 요강으로 만들어서 미안하다.” 이래야 됩니까?
여기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들은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성막 만들 때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 많이 했겠습니까. 브살렐과 오홀리압 있다 하지만 고생 많이 했거든요. 애굽에서 가져온 패물 이것 만들려고 가져왔거든요. 그것 만들면서 여자들이 앙장 만들 때 얼마나 고생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어요. 어린양이 죽고 피가 묻어야 되는데.
다시 해봅시다. 이 장치에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동원되었으니까 이것은 우리가 했고 거기다 내용을 채워주소서.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가 했다는 자체를 통째로 그러니까 “너는 죄를 지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분향단을 만들고 심지어 언약궤를 만들어도 주님의 내용 앞에서는 죄가 되는 이유는, 오직 주님이 담기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세팅되어서 만나야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죽음이라고 하니까 자꾸 자기가 아는 죽음을 생각해서 영혼이 피폐하다고 하는데 이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언약적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언약적 죽음 안에만 영생이 들어있거든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뭐라 했느냐 하면, 울지 말라 했잖아요. 죽었는데 그게 살아있는 거라는 거예요. 왜 죽였느냐? 죽어도 안 죽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뜻은, 취지가. “마리아야. 내가 네 오빠 일부러 죽기를 기다려서 낫게 안 해줬는데 그것은 죽어도 살은 거야.” 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우리 어머니 정신이 좀 맑아질까 싶어서 제 아내가, “어머니. 성경을 좀 써보실랍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그것도 못 쓸까봐.” 보란 듯이 제 아내 앞에서 책상에다 ‘성경’이라고 썼어요. “그게 아니고요. 창세기부터 노트에다.” 우리 딴에 계획을 짰어. 창세기부터 쓰게 되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서 다섯 개 모으면 놀러가기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했단 말이죠.
그 전에 예비단계로 성경이야기 동화로 된 게 있어요. 그걸 어머니한테 읽으라고 드렸어요. 이것 다 읽어보시면 놀러가게 해준다고 하면서. 5분도 안 되서 “이게 얘들 보는 거더라.” 나는 어른인데 얘들 보는 걸 내가 왜 보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포기했습니다. 모든 것을 철회했어요. 없었던 걸로. 그 성경 쓰라는 게 아닌데.
주님께서 언약적 죽음으로 오는 것은 그게 우리한테 생명 주시는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그 방식 외에는 없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할 때 이걸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왜냐하면 피는 모든 사람을 모은다죠. 모을 때 예외 없이 죄인이 돼야 돼요. 그래야 피로 구원받죠. 만약에 여기서 의인 생겨버리면 그 사람은 피가 소용없는 게 돼요.
성막에서 피를 만드는 장치를 만든 것은,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거죠. 그 다음에 선별작업에 나서는데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걸 누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야 죄인 맞잖아요. 선별할 때 예수님께서 어떤 멘트를 날릴 때 그 멘트는 알아들으라는 멘트가 아니고, “안 되지?”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반드시 내게 오도록 내가 조치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스스럼없이 즐겁게 나오는 거예요. 네가 뭔데? “나는 뭘 해도 죄인이면 내가 의인 된 것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의로운 게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은 오직 피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그 언약의 죽음이 곧 생명이라 했지요. 아까 나사로 이야기했잖아요. 네 오빠는 내가 죽인다. 그런데 그 죽인 것이 뭐가 된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이것 이야기하려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아먹을 인간은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으니까 주께서 피 흘리신 거예요. 없는데 주께서는 그걸 믿도록 선물을 주신 겁니다. 선별작업으로.
그래서 나사로에게 나오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나왔단 말이죠. 나사로가 걸어서 나왔을 때 일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 없지요. 왜냐하면 어느 집 남자가 옆집 마르다 오빠가 죽었는데 나흘 만에 살아났데. 그게 무슨 영생이에요. 하나의 일반적인 사건에 불과하잖아요. 좀 특이하긴 하지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하잖아요. 그게 예수님과 연관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제자들이 그것 듣고 구원받았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지 그 사건 백날 봐도 그들은 그걸로 구원 못 받아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성막과 관련돼있는데, 뭔가 경로 또는 통과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아까 접점, y=ax²+b 이차방정식에서 두 접점이 생기는데 죄 많은 세계에 주께서 오셔서 a라는 접점을 남기고 십자가, 부활, 승천했다는 b라는 접점을 남겼을 때 성령이 오시면 여기에 포함되니까 이 경로가 바로 언약이 진행해야 될 경로입니다.
그럴 때 나오는 게 주가 나와요. 이 주는 선택권이 있어.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권한이 오직 주님께만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임해야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이해가 돼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소리를 못하죠. 주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내가 믿게 되었다는 고백은 하지만 내가 주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까지라도 주님께서 혼자 주관하시는 경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정.
목이 이상이 있고 암 걸린 사람들 소화가 안 되고 할 때 목에 구멍을 뚫어서 호스를 통해서 음식을 집어넣잖아요. 호스 속에는 의사가 집어넣은 음식물이 통과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피자 썰고 쑤셔 넣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 경로는 오직 의사가 준 것만 허락되잖아요. 그 호스에 해당되는 게 우리의 몸이라 이 말입니다. 그게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우리가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호스로 사용해서 주님의 언약의 완성만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뭐가 재생됩니까? 주께서 죄인으로 왔다가 부활한 그 경로가 우리 속에 반복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역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우리가 바로 사두개인이고, 우리가 세리고 창기고. 등장인물 다 되는 거예요. 성경은 남 줄 게 하나도 없다니까요. 세례요한 목 딴 자가 바로 우리고. 가룟 유다가 바로 우리 자신이고. 그런 역할로 초청받아서 구원받는 거예요. 가룟 유다 역할, 바리새인 역할, 그 연극 역할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난타라는 공연을 하는데 여기다 물을 담아서 막대기로 치면 물방울이 튀어 올라오겠지요. 주께서 북을 치니까 그 파장에서 울산에서 뛰고, 서울서 뛰고, 대구서 뛰는 거예요. 북을 막대기로 쳤으니까 뛰어 오르는 거예요. 물방울 하나하나가 언약적인 증인으로써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물방울과 저쪽 물방울이 같은 일을 할 이유는 없고 같은 일을 필요도 없어요. 괜히 믿음 좋은 사람을 모델로 삼지 마세요. 나도 주기철 목사처럼, 손양원 목사처럼. 너도 죽어볼래? 어떻게 나도 착한 믿음생활 해보겠다. 왜 옆의 물방울을 부러워합니까? 모방하지 마세요. 흉내 낼 필요도 없고.
중요한 것은 주께서 오늘도 내 자리를 쳤다는 사실. 주께서 막대기로 안 치면 우리는 물방울이 튀지 않고 그냥 제자리에 있겠지요. 이 자리는 나를 위한 나의 자리가 돼요. 나의 영광과 자랑질, 자기 믿음의 연조 자랑, 나는 장로니 목사니 하는 것, 그런데 주께서 막대기로 치면 내 자리를 떠나버리죠. 떠나면서 언약 역할하면서 내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 자리가 주께서 언약으로 치게 되면 말씀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공간에 주저앉으면 무슨 공간이 되느냐 하면, 나에 의한 나의 명예와 나의 권력과 돈을 내 소유화시키는 나의 자리, 역사 아닙니까. 개혁주의신학 아닙니까. 내 역사의 자리가 돼버려요. 이 역사를 막대기로 치면 묵시의 역할로 바뀌죠.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공간이 되고 주님과 함께 있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뛰어오르면 내가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고 나는 말씀의 일부로 변하는데 바리새인으로 변하고 세리로 변하고 변해요. 어떤 때는 아브라함 됐다가, 어떤 때는 아브라함을 미워하는 이스마엘 됐다가 돼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을 때 헤롯이 반대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 볼 때 동방박사 짝짝짝, 헤롯 나쁜 사람 되거든요. 자기 권력 쥐기 위해서 동방박사를 죽이려하는 나쁜 사람이 된다 말이에요. 그런데 인생 살면서 주께서 북을 두드리면 헤롯이 이해가 돼요. 밑에 부하직원으로 있을 때는 동방박사가 이해가 되고 나쁜 사장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만약 본인이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 헤롯이 이해가 된다니까요. 어린이집 교사로 있을 때는 어린이집 원장과는 다르잖아요. 직원이 월급 줄 때 생돈 나가는 것 같이 기가 막히단 말이죠. 월급 받을 때는 월급 올려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다가.
그러니까 말씀의 자리에 가게 되면 우리가 어떤 말씀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모든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음껏 우리에게 할애합니다. 완전히 서울랜드. 이것도 타보고. 그러니까 자유이용권이 끊어져 있어요. 바이킹도 타보고 롤러코스트도 다 보다가 온갖 것 다 타보면서 내 인생은 내가 장식하고 내가 꾸며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제나 저제나 주의 사람이라는 것을 만끽하게 만드는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성막이라는 걸 통해서 이 세상에 말씀의 자리, 주의 자리가 이미 장착 되면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말씀의 자리, 성막은 채가 있기 때문에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 공통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공통점을 몇 개 나열해 볼게요.
기름과 피, 이걸 뿌림으로써 거룩이 된다는 사실, 이게 공통점입니다. 이 공통점은 사물이나 물건뿐만 아니고 플러스, 그 다음 28장에 보면 나와요. 사물이나 물건뿐만 아니고 인간 자체도 기름과 피에 의해서만 거룩이 돼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여기 기름과 피는 어디서 나오지요? 그 당시 제사법에서 양이나 염소나 소에서 나오지요. 그러면 양과 소와 염소가 지금은 짐승이지만 짐승에 머물지 않고 무빙, 장차 신약에 새 언약 시대에서는 실체화될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움직임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적인 움직임뿐만 아니고 지리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죄를 더욱더 드러내면서 더불어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질적으로 이 땅을 떠나서 다른 세계 안에 진입하는 이동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러분 스필버그 감독의 [ET] 영화 포스터 알지요. 분명히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데 자전거 타는 게 나와요. 목적지가 포스터에 달로 돼있어요. 달그림자를 향하여 자전거 타고 있지요. 실제로는 달이 그냥 배경일 뿐인데 그처럼 구약이란 연극무대가 있다면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수풀이라 했어요. 풀로 붙여서. 집도 살지도 못하는 집을 짓고. 앞에서 보면 마치 산처럼 보이고, 나무로 보이고, 집으로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풀로 붙인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실제로 바뀐다면 이것은 신기한 일이지요. 어떻게 실제로 바뀔까요? 여기에 피가 오고 기름이 오면 거룩으로 바뀌어요. 거룩으로 바뀌게 되면 여기에 공통점입니다. 이름도 금향단이라. 금으로 돼있거든요. 요새 말로 패널이죠. 성막의 널빤지를 연결시키는 모든 고리가 금고리로 돼있고, 채를 들 때 채에 있는 것이 모두 금고리입니다. 언약궤를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지만 금박으로 입혀놨어요. 그러니까 온통 금천지에요. 거룩은 곧 금이고 금은 곧 거룩으로도 표현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석들이 나오잖아요. 출애굽기에도 보석이 나온다고요. 어깨에 보석을 열두지파대로 나이순으로 해요. 여기는 나이순이 아니에요. 이것은 미술시간에 가짜로 풀로 붙이는 식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게 분명히 세트인데 세트가 실체화되는 과정이 무엇이냐? 궁금해요? 그게 되게 궁금한 거예요. 모양새는 그만 보여주고 십자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게 나타나려면 뭐가 무르익어야 되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실체에 참여한 그 인간들이 본인들이 하나님 일에 참여했다는 걸로 거룩이라고 착각하는 그들의 손에 진짜 거룩한 분이 모가지 묶여서 죽을 때 그게 실체입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좋겠는데 이건 가짜 교회고, 참 교회 등장하면 되는데 참 교회는 참 교회라고 우기는 그 인간들에 의해서 핍박을 당하는 식으로 참 교회가 등장해요. 다른 방식은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할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 안에 어떻게 느껴집니까? 내가 핍박할 때 느껴져요. 예수 잘 믿는 복음 잘 아는 내가 주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을 낼 때 주님께서는 “닥쳐라 이놈아. 너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나오면서 그때 나타나요. 죄가 더한 곳에 마치 준비된 양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설교하면서 예를 들었지요. 음식 할 때 너무 싱거운 것 같아 간장 좀 넣고, 간장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아 다시 물을 넣고. 간장의 맛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물이 추가되는 것처럼 은혜를 더욱 추가하기 위해서 물이라는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 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 몸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냥 막 살면 다 됩니다. 그냥 우리 성질대로 하면 그게 다 죄기 때문에 구태여 죄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섬기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섬기고 우상화하기 때문에 전혀 죄 짓는 게 어렵지 않는데 죄 지을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게 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속에 또 다른 분이 말씀에 입각한 자기의 피조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막의 사물체가 집대성 된 것이 성전이고 그 성전이 인격화된 성전이 되려면 성전이 불타야 되겠지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한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있다고 허락하신 거잖아요.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릴 때 하나님이 영광 받았지요. 하나님이 성전 짓고 난 뒤에 누구든지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게 되면 응답하겠다. 가뭄 들어도 비가 오게 하겠고, 병들어도 낫게 할 것이고, 전쟁에 패배하더라도 승리케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소리를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듣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성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한 이 나라, 이스라엘은 안 망하지요. 북쪽 이스라엘 망할 때 그들은 여전히 희망을 가졌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망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북쪽에는 성전이 없기 때문에. 허겁지겁 여로보암이 남쪽 성전을 대체해서 큰 걸 만들었지요.
동화사와 갓바위 차이가 거기 있습니다. 갓바위가 돈을 잘 벌거든요.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명해서. 노태우 때 압력을 넣어서 동화사에서 갓바위보다 더 비까번쩍한 불상을 만들어놓고 필히 세트로 헌금하는 것을 만들어 놨거든요. 영 인기가 없어. 그리고 갓바위로 가지 말고 동화사 오라고 했는데 그게 노태우 정권 물러가고 난 뒤에 철거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성전을 하라는 것은 모든 세트가 성전이잖아요. 비록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전만큼은 안 깨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선지자 하는 말이 성전이 깨진다고 했거든요. 성전이 깨지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가 깨지는 겁니다. 그 예를 이렇게 들었어요.
남편이 퇴근하면서 오늘 직장동료들 가니까 해물탕 끓여 놓으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뭔 뜻입니까? 저녁 안 먹고 갈 테니까 해물탕 먹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오더니만 저녁은 먹고 왔다면 그 다음부터 남편 말 듣겠어요? 안 듣지요. 거기다 해물탕을 발로 차버렸어요. 그러니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지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절대로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준 거예요. 아무도 믿지 못하도록 준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욕하지 마세요. 우리라도 안 믿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만든 성전을 스스로 불태웁니까? 지가 무슨 숭례문입니까? 라이터로 그러게. 새로 세운 숭례문, 예전 숭례문보다 영 못해요.
도무지 성경 어느 말씀도 우리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항상 우리와 반대로 나가요. 여기는 하나님 계시겠지, 이러면 하나님 찾아오시겠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성전이 없다면 끝난 거예요. 성전이 있어서 메시아가 연결되는데 성전 없다면 메시아와 현재 백성과의 연결점은 뭐냐? 그게 바로 선지자의 연속성이에요. 그 선지자 이름이 뭔지 알아요? 선지자를 뭐라고 호명합니까? “인자야.”라고 하지요.
선지자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선지자가 남긴 말을 전부 다 거두어서 그 선지자는 실체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연속성을 준 게 아니고 무대장치 세트와 실제 나무 사이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단절, 끊어버려요. 누구든지 이것 보고, 이것 지키고, 이것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과 영생으로 가는 일은 없게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예수 믿고, 성경공부해서 천국 가는 일은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막아버립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지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않습니다. 교회 등록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의도적으로 끊는 이유는, 끊어야 우리 자리가 붕괴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로 있다는 자체가 소용없는,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의 모든 것,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이미 우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에요. 주께서 막대기로 두드려줄 때 우리는 울산이든 대구든 거기서 그냥 사는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라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걸 깨달을 때 우리는 언약에 대해서 죄인으로 참여 되고 저분은 죄인마저 용서하시고 영생주시는 하나님으로 메시아로 구원자로 우리와 매치가 되면 거기서 언약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성막과 나중에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히브리서에 나와요. 제사하는 제사장과 예수님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제사장은 제사하면서 제사하는 본인이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따로 드려야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드려도 소용없다는 것. 그 제사장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그 죽는 것과 자기가 드린 제사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는 것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양 잡아서 속죄제 드렸는데 그 속죄제가 단절돼있어요. 우리의 구원과. 그러면 뭡니까? 양 잡았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양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이 죽어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양 잡지 말고 제사 드리지 말라고 하지 왜 양 잡고 제사 드리게 하느냐?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속에 죄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바깥으로 토해내는 그런 기회를 우리한테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울산바닥에 왜 삽니까? 깊은 산 속에서 도 닦지. 도 닦아도 마찬가지지만 왜 살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어디 가도 변하지 않는 것,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 땅에서 가요를 좋아한다든지, 여배우 브로마이드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천국 갈 때 가요 테이프와 그것 챙겨갈 거예요. 그게 우리 마음이에요.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살거든요. 그것 없으면 천국 가도 심심해서 못 살고 천국인지 지옥인지 구분도 안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진짜 천국이 아니고 내 자신의 연속성을 보장해달라는 그런 자리로만 그걸 우린 천국이라고 오작동을 하는 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하면 진짜 교회가 사람들 다 버려놨어. 한국교회가.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천국 같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단절돼있다는 이 한 마디로 제가 모든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천국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아니고 뭐 소가 늑대와 논다고요? 천국에 소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습니다. 모형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래요. 천국에 소가 있다면 그 소는 수정 맺어야 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신체에 생식기관이 있잖아요. 그것은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천국은 천사와 같이 된다 하잖아요. 그러면 아예 지금부터 천사로 바뀌어야 되는데 안 바뀌고 있다니까요. 이것은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장치가 우리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 안 하면서 죄 짓고, 결혼해서 죄 짓고, 결혼해서 이혼하면서 죄 짓고, 이혼하고 재혼하면서 죄 짓고. 그러니까 이 몸의 장치가 결혼을 하던 이혼을 하던 남자를 다섯 명 사귀든 여섯 명 사귀든 관계없이 이 장치는 죄를 보여주는 장치기 때문에 마음껏 보여드리면 돼요. 눈 뜬 사람은 마음껏 보여드리고 소경은 눈 어두워서 눈으로 죄는 못 짓지만 그 대신 귀는 밝잖아요. 귀 밝아서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장애인 대우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뭘 대우해요? “네가 장애인 돼봐라. 그런 소리 나오는가.” 하는데 이것은 돼보고, 안 돼보나 피 앞에서는 똑같아요. 단절이라는 걸 분명히 생각해야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성막은 살림집이냐? 살림집이 아니에요. 성막은 뭐냐 하면, 격리돼있죠.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이 격리돼있어요. 여기에 들어가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돼요. 기름과 피를 바르지 아니하면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기름과 피는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깥에서 가져와요? 안 돼요. 그러면 이 앞에서 잡을까요? 안 돼요. 이 안에서 들어가서 잡아야 돼요. 이 안은 언약의 자리에요. 기름과 피는 그냥 언약의 기름과 피가 아니고 언약적인 지시와 명령에서 나온 그 피와 그 기름을 발라야 활동합니다. 그러면 그 피 바르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여기 있는 제사장은 피 생산을 위해서 참여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거룩은 단절을 의미한다. 끊어졌다.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 가는 길은 인간 쪽에서 볼 때 이미 끊어졌어요. 그 끊어짐을 주님께서 이어주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끊어놨는데 미안하다. 다시 이어줄게.” 이런 것 없습니다. 끝까지 가요. 꼭 개성공단 같아. 못 갑니다. 주께서는 끝까지 단절합니다. 단절했기 때문에 죽으면 구원받겠지. 없습니다. 죽어도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목숨 바친다고 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 다음에 선택 소관은 전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선별작업에 나가죠. 기름과 피, 거룩, 그 다음에 금으로 입힘. 금으로 입힌다는 것은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영광스럽고 빛난다는 것,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
기름, 피 한 가지 그 다음에 금으로 돼있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채, 이동하는 것. 어디로 가느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어디로 갑니까?’란 말은 여기에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이 곳 말고 우리가 살지 않는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그 다른 곳은 이곳을 전제로 할 때 다른 곳이 된단 말이죠. 그러면 다른 곳이라는 것은 이곳을 인정하고 난 뒤에 다른 곳이거든요. 이런 다른 곳을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내가 가는 곳은 다른 곳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간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 위로 간다고 했어요.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한테는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용어를 다 바꿔요. 하늘나라, 천국, 용어 다 바꿉니다. 유대인들의 하늘나라는 구원하는 나라에요. 그걸 세례요한이 구원하는 나라가 아니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그 자체를 심판해야만 하는 나라.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아버지는 결국 없음이죠. 이 없음이 성령을 받고 나면 있음이 되는데 없는 나라가 되는 이유는, 자기들이 있고 자기들이 사는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게 없음이 되거든요. 나중에 이것이 있음이 돼버리면 이쪽은 자동적으로 없는 나라가 돼요. 없는 나라가 된다는 말은, 아버지가 바로 하늘나라는 여기에 있어요.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고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용어 참 어렵습니다.
성경이 어렵다 하지만 그 중에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네가 목마를 때 마실 걸 주었고, 배고플 때 먹을 걸 주었다. 누가요? 제가 주님한테 언제 그렇게 했느냐고 묻는 자가 누굽니까? 마태복음 25장에서 소자지요. 이름도 없는 집단개념 소자. 그러니까 소자가 하늘나라 가기 위해서 기도원에 갔습니까? 평소에 울산바닥에서 여러분들이 설거지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님한테 했다고 하는데 당사자들은 본인이 모르겠다는 거죠.
이 말은 이런 뜻이에요. 나는 내 백성이 나의 택한 자가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주님이 직접 개입하는 거예요. 뭘 개입한다? A와 B, 언약이 하는 경로가 우리를 덮치게 되면 우리는 일상생활을 해요. 똑같은 생활을 해요. 그냥 밥 먹는 것도 내 배 채우려고 하고 마시는 것도 전부 나 좋으라고 했는데 그걸 뭐로 바꿉니까? 오른편에 있는 구원받은 양들이 평소에 예수님한테 먹을 것, 마실 것 준 행동으로 전환시키는 주도권을 주께서 하십니다. 왜? 우리를 위해서? 아니에요. 누굴 위해서? 주님 자신의 주되심을 위해서.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는 언약의 주인공, 당사자, 내가 나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다뤄온 겁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성도로 만들어진다는 걸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지키도록 조치를 해주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손이 발더러 쓸데없다 할 때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왜 발더러 쓸데없는 소리하느냐. 그러면 그 이야기 들으면 우리는 갑자기 손 되기를 포기하고 발한테 가지요. 이게 우리의 돌아가는 통박 아닙니까. 손은 손대로 주께서 다루시고 발은 발대로 다루니까 네가 직접 나설 입장은 못 된다는 겁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그래서 성막은 전부 조각목으로 돼있지만 그걸 통일하는 것은 피, 기름과 금과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어차피 떠나야 돼요. 그런 입장에 있습니다. 특히 금이라 했지만 놋으로 만든 것도 있어요. 제단 같은 경우에는 아카시나무에다 놋으로 한 것도 있고 놋 그 자체로 한 것도 있고 부삽이나 대야 그런 것은 놋으로 다 만들고 그것은 심판을 이기기 위해서 진노를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어쨌든 이 시간에 알 것은 성막이란 뭘 생산하는 겁니까? 피를 생산함으로 말미암아 장차 피 흘릴 인격자와 단절된 입장이지만 언약 안에서 연속적으로 그것을 내다보면서 이동하는 장치가 바로 언약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주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사랑이기에 감히 우리가 보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말씀대로 성경말씀에 나오는 대로 진척되고 있다는 그것만 우리가 현실로 수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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