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503a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20130503a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503a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강의:이근호 목사)
성막을 덮는 것에 대해서 26장에 나와 있고, 성막 뼈대를 제조하는 이야기가 27장에 나옵니다. 성막을 다시 그려보면, 동쪽에 문이 나 있고 이게 100규빗이라 해서 규빗은 44.5센티미터라 하는데 쉽게 45센티미터, 더 알기 쉽게 하면 50센티미터라 하면 되겠지요. 50규빗은 25미터 잡고, 100규빗은 50미터 잡고, 동쪽에 출입구가 있고 제단이 있겠죠. 동쪽, 서쪽, 동서니까 이쪽이 북쪽, 남쪽, 이런 크기로 돼있습니다.
26장에서는 이걸 만드는데 지붕 역할하기 위해서 네 장의 가죽을 덮어요. 덮는 걸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 이야기는 26장이고, 덮을 때 그냥 덮으면 내려앉으니까 뼈대를 갖추어야 되겠죠. 뼈대는 널빤지 48장이 동원이 되고. 이쪽에 20장, 이쪽에 20장, 뒤에 8장해서 48장. 그리고 48장 밑에는 은 받침을 하게 되고, 휘어지면 안 되니까 중간에 가로질러 연결시켜서 힘이 받도록 걸치는 것도 있어요.
그 다음에 제단도 만들어야 되고 물두멍, 손 씻는 것도 만들고, 북쪽 벽으로 진설병을 쌓아놓는 진열대가 있고, 남쪽에는 가지가 여섯 개 나와 있는 등대, 촛대지요. 그런 것도 나와 있고. 이 앞에는 분향단이라 해서 향을 피우는 게 있어요. 커튼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라 해서 거룩한 장소인데 법궤가 있고.
제단을 만들고 짐승을 태우잖아요. 물두멍 손 씻는 데 만들고. 재를 수거하는 부삽, 고기를 찝는 갈고리, 불씨를 담는 통도 만드는데 이게 일종의 집이거든요. 이게 살림집입니까? 사람이 집 지을 때는 목적이 있어야 되잖아요. 성막 지어서 뭐 하는데? 그것 왜 만든데? 개집입니까? 안 그러면 외양간입니까? 소 키우려고 만드는 겁니까?
보통 살림집이라 할 때 기본적으로 싱크대 있어야 되고 화장실. 가전제품으로는 김치냉장고부터 해서 티비, 세탁기, 전자레인지. 장롱도 있어야 되고 이불장, 신발장도 있어야 되고. 그런 게 비치돼있으면 이 집에 누가 사는구나. 하고 알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면 이건 창고용이죠. 냉장고 코일 돌아가면 냉동창고 되고.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 때 뭐 하려고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구름을 뚫고 복 주면 되지 이걸 왜 만드느냐? 참 이게 쉽지 않은 문제가 돼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고 위에 가죽을 네 겹으로, 처음에는 수놓아서 만들죠.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조각목이라는 널빤지를 가로질러 놓고, 빈 공간이에요. 그 다음에 여기에 은 받침을 했어요. 여기다가 천을 덮는데 네 겹으로 하고 제일 위에 덮는 건 제일 크게 만들고 안쪽에 있는 건 제일 작게 만들죠. 이걸 만들 때 보통 자주색, 빨간색, 보라색으로 만듭니다. 여기 천장에다가 천사 무리 모양으로 제일 안쪽에 나오고 그 다음에 덮고, 덮고. 그러면 성막에 들어갔을 때 뭐가 보이겠습니까? 위에 천사가 보이겠지요. 그리고 입구에 천사 모양으로 새겨놓고 이 안에 천사를 조각해서 마주보면서 언약궤를 제조해놨거든요.
어떤 사람들이 왔을 때 도대체 이 집은 무슨 살림을 사는 집인데 온통 천사들로 장식돼 있느냐 이 말이에요.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기를 받고 또는 을지문덕 기를 받고, 박수무당 점집에 갔을 때 장식 돼있는 그림을 보면 뭘 느낍니까? 입구에는 대나무 심어놓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사라고 젊은 놈 앉아서 반말 찍찍하면서, “뭐 때문에 왔는지 안다. 이게 왔느냐?” 했을 때 뒤에 있는 배경과 앞에 있는 배경 모습을 보게 되면 이 집이 도대체 무슨 집인지 알아요. 그건 뭐냐 하면, 을지문덕, 이순신이나 단군의 기를 받든지 신을 모시는 집이죠. 신을 모신다면 그 공간이 신을 모시는 공간이라면 그 공간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그 신의 속성에 부합되도록 장식 되고 만들어질 게 분명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제단, 앞에 물두멍이고, 들어가자마자 분향단이고, 이게 상이고. 상은 이 규빗, 일 규빗인데 떡이 여섯 개 씩 있고, 중간에 포도주 담는 주전자 있고, 컵 있고, 물 담는 쟁반이 있어요. 쏟아지지 않도록 턱을 해놓고. 항상 분향단이나 상이라든지 등대나 언약궤에는 채를 만들어놨어요. 그런 것들을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했다는 말은, 특히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양쪽에 들고 가는 채가 있다는 말은 여기 계시는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빙, 고정적이지 않다. 정착용이 아니고 자꾸 채촉하는 것 같아요. 가자, 가자. 가면서 어린양의 피를 질질 흘리면서 가자고 채촉하는 투로 하는 겁니다.
여기 뼈대를 널빤지 48장으로 했다는 것은 조립품이죠. 쓰레트 지붕도 아니고 둘둘 말아서 메고 다음에 또 이동할 장소로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러한 장치들은 결국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계실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 곁에 찾아오신 하나님,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착하고 싶어요.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 바깥의 세계를 생각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 우리의 기쁨, 반대로 우리의 슬픔, 우리의 비극,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관련지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울 일도 아니고 웃을 일도 아니라 이 말입니다. 웃는 자에 화가 있을지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리고 마태복음에 5장에 보면, 우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은 어떤 뜻에서 오셨느냐 하면, 결코 이 땅이 천국이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던 분이 이 땅에 와서 잠시 살았다 싶었는데 붕 떴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 세상이라면 주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가면 여기에 접점이 a, b 두 개 나옵니다. x, y 좌표에서 y=ax²+b거든요. 그래프가. 해답이 두 개 나와요. 우리는 십자가, 부활, 승천에만 관심이 있는데 이것만 기적이 아니고 죄 없으신 분이 죄 속에 들어왔다는 접점 지점, 이것도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접점을 물세례라 하고 올라가는 건 십자가, 성령세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 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그림 그리면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면 되는데. 하잖아요.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왜 나쁜가를 혹독하게 경험하는 접점 지점 안에서만 비로소 하늘나라가 그 순간에 주어져요. 이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물과 영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늘나라를 여기 살다가 죽어서 저기 가면 천국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여러 번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 세상은 너무 고생스럽다. 종교고 기독교고 성경이고 다 집어치우고 다만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이 세상에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안 믿고 그런 것도 따지지 마시고 진짜 하나님께서는, “너, 고생 많이 했지? 이제 죽으면 좋은데 가게 해줄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달랑 그거에요. 이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하잖아요. 고민도 많이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는 고생 끝, 죽고 난 뒤에서 행복 시작. 단지 그걸 원하는데 그래서는 천국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천국은 혹독한 속에서 일어나거든요. 우리는 이걸 빨리 치워버리고 기다리면 오는 이걸 원하는데 “하나님 끝났습니다. 나도 늙을 만큼 늙었습니다. 늙어 죽습니다. 이제 주세요.” 주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주는 게 아니고 지금 네가 이 경험, a라는 b라는 접점 경험을 우리를 집어넣어요. 집어넣게 되면, 평소에 고생 많은 세상 끝나고, 이제는 한 많은 세상 끝나고, 천국이란 편안한 세상,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없는 세상이 온다. 그게 이 세상의 죄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죄의 연장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원했던 것은 이 땅에서 죄 짓는 것뿐만 아니고 내가 거기서 죄 짓는 게 힘들다고 원했던 그것마저 죄가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지 결코 그게 그 나라와 그 의가 아니란 말이죠. 그 나라와 그 의는 죄 속에 숨어 있어요.
죄인이 되어서 의를 받으면 그런 법칙은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죄는 의와 만나지 못해요. 죄는 의를 간수를 못한다니까요. 손이 더러운데 깨끗한 음식 줘봐야 간수를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 죄는 어디 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감당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해야 되는데 그 이동의 자리가 이 두 접점 지점이거든요. 물세례, 성령세례거든요. 세례의 특징이 뭐냐? 이게 죽음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 불러 모아서 광야에서 덥다고 그런 것 신경 못써요. “맨날 석청과 메뚜기 먹으니까 다른 메뉴 없나? 질린다, 질려.” 지금 자기 입장 생각 못합니다. 사람들 끌어 모아서 물속에 집어넣는 그게 급한 거예요. 그걸 표현할 때 도끼 들고 설친다는 겁니다. 도끼 들고 발모가지를 다 쳐버리는 거예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어떻게 됩니까? 나 따라 와. 가니까 잘난 놈, 못난 놈 모가지 쥐고 물속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고 다시 끄집어내지요.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이 죽음은 자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언약에 의한 죽음. 죽음도 질이 달라요. 질이 있어요. 자기가 죽는 죽음은 그것도 죄입니다. 죄인이 고통이 너무 심해서 일찍 고통을 면하려고 자기에게 주어진 죽음을 앞당기는 그것도 죄의 연장이기 때문에 의의 나라와 관계없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신앙의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가 순교하기까지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그것도 언약적 죽음 아니에요.
악마가 베드로와 다 연결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이 왕 노릇하고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왕 노릇한다는 것은 전부다 연결돼있다는. 베드로고 야고보고 요한이고 전부 죄와 연결돼있어요. 알래스카에서 개들이 달리잖아요. 개들 몸통과 줄로써 연결돼 있잖아요. 그처럼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말은 마귀가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돼요. 에스키모가 채찍으로 때리는 거예요. [벤허]라는 영화에서 전사가 말부리는 것. 우리 등에 올라타서 달리게 하는 이미 마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우리가 그때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어디서 함부로 반항해요.
북한에서 김정은을 반항하고 김일성을 욕한다?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유니버시아드 대회한다고 북한에서 예쁜 여자응원단이 온 적이 있어요. 길거리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둘이 있는 사진을 보고 난리 나버렸어요. 어디서 김대중이가 함부로 김정일 지도자와 웃으면서 같이 찍어요. 데모를 하고 난리 났습니다. 철수한다고. 그래서 아가씨들 한 명이 그걸 떼서 김대중 나온 사진 부분을 접고 김정일만 나오는 부분만 들고 시가행진했어요. 마귀가 왕 노릇했어요. 우리의 왕은 바로 이분이라는 것을 마귀에서 종속된 모든 인간은 매일같이 그걸 보이는 생활을 하게 돼있어요. 우리의 평소의 모든 생활은 바로 이 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그분을 증거하는 모양새를 보여주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어요.
그게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건데 세 가지입니다. 돈과 인기와 권력. 우리는 악마란 말은 듣기 싫어요. 하지만 악마란 말을 대체해서 다른 말로 하게 되면 권력, 좋아합니다. 인기, 너무 좋지요. 싸이 보세요. 류현진이 얼마나 좋습니까. 추신수, 난리 나지요. 그 다음에 더 좋은 것, 돈. 그 세 가지로 성령께서는 인간을 붙잡는 인간을 지배하는 무기라고 성령께서 예수님과 악마의 미팅을 주선한 거예요. “어때? 돈?” “아니거든. 사람은 떡으로 못 살거든.” “좋아. 당신은 메시아로 모든 사람이 추앙한다. 이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면 당신은 완전히 스타 되는 거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에이. 마지막 카드, 세상 모든 권력.” 이것은 바로 마차 위에 올라타서 그동안 숨어있는 모양새로 모든 인간을 그런 식으로 다뤄온 거예요. 누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에베소서 6장에서 주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는 말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 했거든요.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가 옛날에는 세상 신에게 당했는데 이제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령께서 싸움을 붙이는데 옛날 우리가 왕으로 모셨던 그것과 싸움을 붙이기 위해서 마지막 때 우리를 성령께서 들어 사용하신다고 돼있어요.
그러니 이 접점 지점 a, b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의의 증인으로써 죄 속에서 움직이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 의만 주세요.” “주면 뭐 할 건데?” “후딱 천당 가게.” 어떤 70 넘은 노인이 죽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군 입대 영장 나온 꿈을 꿨어요. 얼마나 군대가 힘들었으면 돌아가신 노인네 꿈에 영장 나온 꿈을 꿨겠느냐 말이요.
우리는 후딱 떠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제대한 사람으로 다시 군대 생활하는 것, 돈 많이 주면 이것이 군대다해서 하나의 예능프로그램으로 할 수 있습니다만 하지만 실제로 군대 가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그걸 하게 하셔요. 분명히 이미 구원받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오늘도 지옥 같은 생활을 같이 하게 만드시죠. 그 주님의 놀라운 능력. 우리는 주의 그런 능력은 생각 안 하고 후딱 떠나는 능력만 생각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7장에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그러면 주님 가실 때 같이 가면 될 텐데 하지만 나는 너희를 데려가지 않겠노라. 죽은 거예요. 그냥 고생 많이 하게 된 거예요. 그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기서 증거와 증명을 구분해야 됩니다. 증명은 남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온갖 자료를 다 모으는 반면에 증거는 약 올리는 거예요. “너, 백날 팔짝 뛰어도 내 세계에 못 들어와.” 이게 증거에요. 증명하면 욕 안 먹습니다. 증거하면 항상 밉상 받고 왕따 당하고 그렇게 살아가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두 증명이 아니고 두 증인이죠. 두 증이니 죽게 되는데 그 죽는 장소가 어디죠? 십자가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두 증인을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전부를 십자가의 사건이 벌어진 사건으로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모든 것을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지 않는 곳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이 세상 전체를. 그러니까 이 세상은 면적이 넓든 좁든 간에 묵시세계에서는 시간이고 공간이고 고정돼버려요.
제가 오후설교에 그런 설교했는데 대전에 계신 분이 영천 가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대전에서는 죄 지었는데 영천 가면 죄 안 짓습니까? 마찬가지로 미국 가면 죄 안 지어요? 성경에 의하면 울산 살다가 대구 가든, 인천 가든, 어디 가든 관계없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께서 배당 받은 자리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막 구조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이 조각목으로 돼있어요. 통나무가 없어요. 전부다 조립형이에요. 조립하는 이유는, 이곳은 우리가 살 곳이 못되니까 자꾸 떠나자는 느낌도 되고, 그 다음에 성막을 만드는 그게 조립적이지만 그걸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성막 자체에 어떤 목적이 있어요. 그 의미가 따로 떨어져있는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집대성하고 일치되게 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일치시키는 것을 피죠.
그러니까 이 성막은 살림집이 아니고 죽음을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그 죽음은 우리가 자살하는 죽음이 아니고 언약적인 죽음을 유발하는 그러한 장치들. 이건 여러분 아시니까 약간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깊이 들어간다고 겁내지 마세요.
출애굽기 다음에 레위기 나오잖아요. 레위기에 장치들이 나오죠. 방법들. 소제는 이렇게 하고, 화목제는 이렇게 드리고. 기름은 먹지 말고, 속죄제 고기는 제사장이 먹을 것이요 다른 사람은 먹으면 안 되고 이런 것들이 나와요. 그러면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장치 그 다음에 담기는 게 내용이란 말이죠. 장치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내용이 담기죠. 내용이 담긴다는데 이 장치를 누가 만들어요? 실제로 누가 만들어요? 솜씨 내고 깎고 사람이 만들죠. 사람이 장치를 만들었을 때에 여기서 하나님이 노리는 건 그거였어요. 성막을 직조하고 성막 테두리를 밖에서 못 보게 만들 때 사람들의 노동력과 재료가 다 포함되거든요.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모든 장치를 만들 때 여기에 인간의 노동력이 개입되지요. 개입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는 우리가 만들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용을 채우시면, 여기서 영생이 나오고 구원이 나오고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해가 이미 인간 속에 잠재돼있었던 겁니다. 이런 것을 지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헛말이지만 이런 말을 해요.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받아요. 나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공짜로 선물로 구원받아요.”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제가 교회 꽃꽂이하고 봉사하는 것, 주의 복음 알아 은혜 받아서 하는 거예요.”라고 했는데 저 뒤에 얘가 꽃을 뭉개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웃고 넘기지만 누가 상처가 됩니까? 막상 꽃꽂이를 직접 담당했던 그 집사는 그 얘와 엄마, 보호자를 가만두지 않지요. 우리는 분명히 말로는 주의 선물이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몫의 인생을 살게 만들어요. 인생의 굽이굽이 롤러코스트 같은 굽이굽이에 우리로 하여금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투정을 마구 쏟아지게 만들어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매일같이 사건화 시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세상이 그냥 죄 많은 세상이 아니고 진짜 너도 거기에 합류되어서 이미 죄를 퍼뜨린 책임이 있는 그런 죄. 너 따로, 죄 따로, 세상 따로가 아니라 네가 거기서 발 뺄 수 없는. 충청남도 보령에 가면 머드 축제하잖아요. 보령 가서 머드 붙여놓고 서울이고 울산일고 대전이고 대구고 온 동네에 진흙을 다 묻혀놓는 거예요.
우리는 죄의 산물입니다. 죄가 없었으면 우리가 있지도 않아요. 죄로 만들어놓고 우리는 입에서 주의 은혜로, 보혈이라 하거든요. 그것도 죄라. 막상 주께서 어떤 일을 시키고 사태에 몰아넣으면 십자가의 은혜고 뭐고 하다가 “왜 하필이면 저에게, 어떻게 저에게 이런 시련을, 왜 저에게 이런 비극과 불행을 주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뭔데?”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우리는 손들고 제가 주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나왔지만 “눈깔아. 손 내려.” 네가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죄 많은 우리를 성전 삼아서 우리한테 침투가 돼요. 그러면 우리에게 a라는 기적이 발생됩니다. 주님께서 옛날 바리새인이 살던 그때만 찾아오신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지속적인 활동력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때부터는 나 홀로 죽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죽는 죽음을 유발시키는데 그게 바로 주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뭘 놓치느냐 하면 십자가, 부활 여기에 성급한 거예요. 왜냐하면 고생한 것 빨리 잊어버리고 천당 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해서 교인들이 그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무슨 능력이 필요하냐 하면, 이 세상에서 죄인과 함께 살면서 의인으로 사는 그 능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 능력은 우리가 가질 수 없고 주님이 우리 속에 우리로 관리해야 돼요. 주님이 우리 속에 함께 있어야 옛날에 죄 속에 들어왔던 주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셨어요.
성령을 통해서 하니까 여기서 성막과 관련된다면, 성막은 피를 하면서, 제가 공식을 만들어봤어요. 피는 모든 것을 모은다. 화살표. 그 다음에 선별한다. 이 장치가 성막의 장치입니다. 모으고 선별하는 거예요.
지금 침례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었다. 따라서 일단 모든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다 받았다. 다만 그들이 지옥 가는 것은 복음을 본인이 거부했기 때문이고 이걸 영접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선별작업을 본인이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하기 때문에 문제가 뭐냐 하면, 치매 걸린다든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과거에 결심한 것이 무효가 돼요. 골치 아픈 거예요.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을 때는 과거에 했던 신앙을 장기적으로 보관해주는 기능을 교회에서 해주면 되겠지요. “할머니, 치매 걸려도 괜찮아요. 25년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해서 세례 받았으니까 그걸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천주교에서 하는 짓이에요. “할머니, 영세 받았으면 이미 이름이 기록됐기 때문에 치매 걸려도 괜찮습니다. 항상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땅 있지요? 그것 교회에 해야 자손들 대신 성인들이 기도해주면 패자부활전 해서 연옥에서 빼낼 수 있습니다.” 전부다 돈놀이 하는 짓이죠.
모든 것을 모은다는 말은, 이제 그냥 선별하면 안 되거든요. 아까 것 다시 그려볼게요. 예수님께서 죄 속에 들어올 때 예수님이 놓친 죄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죄가 이 세상에, “나는 유대나라 왔기 때문에 필리핀은 놓쳤어. 그때 유대나라 하고 빨리 필리핀으로 가는 건데.” 이게 성립이 되려면, “지리적으로 여기는 유대나라니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아직 안 갔으니까 그때 다시 갈게.” 이렇게 해서는 안 돼요. 이것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 계신 그쪽만 보더라도 나머지 모든 것이 악마의 세계, 죄의 세계가 되도록 의미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미의 전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언약을 들고 온 거예요. 언약이란 묵시거든요. 묵시는 공간적, 시간적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도 그 변화를 질적으로 따지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일상의 용어가 있어요. “우리 엄마는 화도 잘 내. 그런데 우리 엄마는 잘 웃기도 해. 그리고 우리 엄마는 요리는 못 하지만 달리기는 잘 해.” 도대체 엄마가 몇 명이에요? 분명히 엄마가 한 명인 네 가지의 다른 일들을 하죠. 네 가지의 다른 일을 하나의 단수로 묶는 근거가 뭐죠? 그걸 본질이라 하지요. 삼위일체에 나오는 거예요. 회사 가면 사장님이고, 집에 가면 아버지고, 교회 가면 장로다. 보통 어떤 남자다. 보통 삼위일체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본질은 형태는 바뀌어도 회사에선 사장인 체해도 아버지로 내복 입고 돌아다녀도 전화 오면, “그래. 나 사장이요.” 이건 뭐냐? 본질은 동일한테 양태는 다르니까 삼위일체라 하는 거예요. 쉽게 따지면 그렇다 이 말이죠.
이 삼위일체 방법이 인간에게도 적용이 되거든요. 인간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하고 또 민족마다 다 흩어져 산다 할지라도 이걸 하나로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게 붕 떴는데 찬찬히 해볼게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무슨 탑을 쌓지요. 바벨탑 쌓지요. 그럼 모든 인류는 하나에서 나온 것이 퍼진 거죠. 이걸 저는 주저앉았다 해요. 아이스크림 밀어버리면 아이스크림이 흩어진 게 아니고 주저앉은 거죠. 그걸 다시 모으면 아무리 흩어져서 단일 속성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언어를 혼잡케 했지요. 언어를 혼잡케 했다는 그 평가는 하나에요, 둘이에요? 오직 하나에서 나온 우리 하나님의 평가만이 언어가 혼합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신명기에 보면 민족들이 천사의 숫자만큼 퍼졌는데 그것을 대신해서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우리가 하고 있는 성막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막의 기능은 이스라엘의 구원용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고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피 사건은 결국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다루는 거예요.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책망했던 그 명령과 지시와 율법이 이젠 이스라엘이 파괴되고 흩어짐으로써 모든 민족, 오는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게 됩니다. 그게 로마서 1장과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전에는 유대인에게만 심판이 있는데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민족에게 핑계치 못할 날이 올 겁니다.
유대인 멸망했다고 좋아하면 안 돼요. 그 쓰나미가, 지진 진앙지로부터 파도가 넘치면 율법의 파도, 저주의 파도에 휩쓸려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끝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나, 예수님의 속성 정도가 아니고 아예 피잖아요. 피라는 것은 이미 이쪽은 어떤 인간이든 죄인이란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피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면, 피 언약만 내세우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외에 모든 하나님은 각자 자기 민족의 자긍심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각자 민족에 맞도록 조작된 그들만의 신이 우상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성막이나 성전을 통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언급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 기능을 피라고 구체화시킵시다. 피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예요. 피 앞에 모든 걸 모으죠. 그러면 모았으니까 모든 인간은 피 앞에서 죄인 됩니다.
그 다음에 선별이죠. 피 앞에 모든 인간이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그 죄인이 구원해달라고 손들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이나 선별이라는 것은, “선택되어서 구원받아야지”라는 기회조차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별은 일방적입니다. 이 말을 신명기 9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너희의 의로움이 아니고 너희의 선함도 아니고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고 악한 자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려함이죠.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구원되고, 안 되고의 모든 권한은 이미 어느 쪽에 넘어가 있습니까? 피 흘린 그분의 소관으로 이미 넘어갔기 때문에 구원해주세요라는 그런 권한과 권리는 우리한테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이동하는 거예요. 이동하면서 계속 불만 가진 사람들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애굽에서 먹던 음식도 안 만들어주고 물도 없고. 하나님 따라다니다가 힘들어 죽겠다. 음식도 질린다, 질려. 만나 말고 다른 메뉴 없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자격이 없거든요. 그들 가운데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전 세계를 피 앞에 모으고 그 다음에 피 흘린 분에 의해서 구원받을 자를 선별할 과정 속에 있는데 그들은 애굽에서 한 행세, 맛있는 것 없나? 생수 없나? 지금 그런 것을 이야기할 게 못 되지요.
제가 유튜브에 교회가 인간을 버려놓는다, 교회의 과오, 그런 비슷한 제목으로 글을 올려놨더니만 어떤 사람이 카리스란 이상한 이름으로 해서 반발했어요. “목사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심하지 않느냐?” 하면서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고 하면서 성경구절을 그대로 적어놨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진짜 참 교회는 참 교회라고 우긴다고 참 교회가 아니고 진짜 교회는 누구든지 참 교회라고 우기는 그 교회한테 핍박받는 뒤에 숨어있는 식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교회치고 참 교회 아닌 교회가 어디 있어요. 참기름치고 가짜라고 하는 것 봤습니까. 다 참, 참, 참기름이죠. 전부다.
교회라 할 때 우리 생각에는 저쪽은 거짓 교회고, 이쪽 참 교회라고 나누고 싶지만 주님께서는 그걸 허용하지 않아요. 왜? 교회고, 교회 아니고 선별의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십자가지지 않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내가 소속돼있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참 교회이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제가 우리교회 있다가 여기 새순교회 오면 새순교회는 참 교회고 우리교회는 교회도 아닌 거예요? 내가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우리 심정은 무조건 내가 가는 곳은 천국이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지금 하나님한테 삿대질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가정은 저주받아도 내 가정은 복 받아야 돼요. 바로 그러한 숨길 수 없는 더러운 성질 때문에 피 흘리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알려줄 때 그 사람이 참 교회고 참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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