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의 공통점 130503
성전의 공통점 130503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5-08 10:48
20130503a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강의:이근호 목사)
성막을 덮는 것에 대해서 26장에 나와 있고, 성막 뼈대를 제조하는 이야기가 27장에 나옵니다. 성막을 다시 그려보면, 동쪽에 문이 나 있고 이게 100규빗이라 해서 규빗은 44.5센티미터라 하는데 쉽게 45센티미터, 더 알기 쉽게 하면 50센티미터라 하면 되겠지요. 50규빗은 25미터 잡고, 100규빗은 50미터 잡고, 동쪽에 출입구가 있고 제단이 있겠죠. 동쪽, 서쪽, 동서니까 이쪽이 북쪽, 남쪽, 이런 크기로 돼있습니다.
26장에서는 이걸 만드는데 지붕 역할하기 위해서 네 장의 가죽을 덮어요. 덮는 걸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 이야기는 26장이고, 덮을 때 그냥 덮으면 내려앉으니까 뼈대를 갖추어야 되겠죠. 뼈대는 널빤지 48장이 동원이 되고. 이쪽에 20장, 이쪽에 20장, 뒤에 8장해서 48장. 그리고 48장 밑에는 은 받침을 하게 되고, 휘어지면 안 되니까 중간에 가로질러 연결시켜서 힘이 받도록 걸치는 것도 있어요.
그 다음에 제단도 만들어야 되고 물두멍, 손 씻는 것도 만들고, 북쪽 벽으로 진설병을 쌓아놓는 진열대가 있고, 남쪽에는 가지가 여섯 개 나와 있는 등대, 촛대지요. 그런 것도 나와 있고. 이 앞에는 분향단이라 해서 향을 피우는 게 있어요. 커튼 열고 들어가면 지성소라 해서 거룩한 장소인데 법궤가 있고.
제단을 만들고 짐승을 태우잖아요. 물두멍 손 씻는 데 만들고. 재를 수거하는 부삽, 고기를 찝는 갈고리, 불씨를 담는 통도 만드는데 이게 일종의 집이거든요. 이게 살림집입니까? 사람이 집 지을 때는 목적이 있어야 되잖아요. 성막 지어서 뭐 하는데? 그것 왜 만든데? 개집입니까? 안 그러면 외양간입니까? 소 키우려고 만드는 겁니까?
보통 살림집이라 할 때 기본적으로 싱크대 있어야 되고 화장실. 가전제품으로는 김치냉장고부터 해서 티비, 세탁기, 전자레인지. 장롱도 있어야 되고 이불장, 신발장도 있어야 되고. 그런 게 비치돼있으면 이 집에 누가 사는구나. 하고 알잖아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면 이건 창고용이죠. 냉장고 코일 돌아가면 냉동창고 되고.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 때 뭐 하려고 만드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구름을 뚫고 복 주면 되지 이걸 왜 만드느냐? 참 이게 쉽지 않은 문제가 돼요.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고 위에 가죽을 네 겹으로, 처음에는 수놓아서 만들죠.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조각목이라는 널빤지를 가로질러 놓고, 빈 공간이에요. 그 다음에 여기에 은 받침을 했어요. 여기다가 천을 덮는데 네 겹으로 하고 제일 위에 덮는 건 제일 크게 만들고 안쪽에 있는 건 제일 작게 만들죠. 이걸 만들 때 보통 자주색, 빨간색, 보라색으로 만듭니다. 여기 천장에다가 천사 무리 모양으로 제일 안쪽에 나오고 그 다음에 덮고, 덮고. 그러면 성막에 들어갔을 때 뭐가 보이겠습니까? 위에 천사가 보이겠지요. 그리고 입구에 천사 모양으로 새겨놓고 이 안에 천사를 조각해서 마주보면서 언약궤를 제조해놨거든요.
어떤 사람들이 왔을 때 도대체 이 집은 무슨 살림을 사는 집인데 온통 천사들로 장식돼 있느냐 이 말이에요. 우리가 이순신 장군의 기를 받고 또는 을지문덕 기를 받고, 박수무당 점집에 갔을 때 장식 돼있는 그림을 보면 뭘 느낍니까? 입구에는 대나무 심어놓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사라고 젊은 놈 앉아서 반말 찍찍하면서, “뭐 때문에 왔는지 안다. 이게 왔느냐?” 했을 때 뒤에 있는 배경과 앞에 있는 배경 모습을 보게 되면 이 집이 도대체 무슨 집인지 알아요. 그건 뭐냐 하면, 을지문덕, 이순신이나 단군의 기를 받든지 신을 모시는 집이죠. 신을 모신다면 그 공간이 신을 모시는 공간이라면 그 공간에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그 신의 속성에 부합되도록 장식 되고 만들어질 게 분명하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에 있는 제단, 앞에 물두멍이고, 들어가자마자 분향단이고, 이게 상이고. 상은 이 규빗, 일 규빗인데 떡이 여섯 개 씩 있고, 중간에 포도주 담는 주전자 있고, 컵 있고, 물 담는 쟁반이 있어요. 쏟아지지 않도록 턱을 해놓고. 항상 분향단이나 상이라든지 등대나 언약궤에는 채를 만들어놨어요. 그런 것들을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지시했다는 말은, 특히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양쪽에 들고 가는 채가 있다는 말은 여기 계시는 하나님의 특징이 뭐냐 하면, 무빙, 고정적이지 않다. 정착용이 아니고 자꾸 채촉하는 것 같아요. 가자, 가자. 가면서 어린양의 피를 질질 흘리면서 가자고 채촉하는 투로 하는 겁니다.
여기 뼈대를 널빤지 48장으로 했다는 것은 조립품이죠. 쓰레트 지붕도 아니고 둘둘 말아서 메고 다음에 또 이동할 장소로 갈 수 있다는 말은, 이러한 장치들은 결국 인간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계실 곳이 없다는 말이에요. 적당한 장소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 곁에 찾아오신 하나님,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간은 정착하고 싶어요. 우리가 보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입니다. 이 세상 바깥의 세계를 생각지 못합니다. 우리의 행복, 우리의 기쁨, 반대로 우리의 슬픔, 우리의 비극, 이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관련지어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그게 울 일도 아니고 웃을 일도 아니라 이 말입니다. 웃는 자에 화가 있을지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리고 마태복음에 5장에 보면, 우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기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은 어떤 뜻에서 오셨느냐 하면, 결코 이 땅이 천국이 아니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던 분이 이 땅에 와서 잠시 살았다 싶었는데 붕 떴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 세상이라면 주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가면 여기에 접점이 a, b 두 개 나옵니다. x, y 좌표에서 y=ax²+b거든요. 그래프가. 해답이 두 개 나와요. 우리는 십자가, 부활, 승천에만 관심이 있는데 이것만 기적이 아니고 죄 없으신 분이 죄 속에 들어왔다는 접점 지점, 이것도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접점을 물세례라 하고 올라가는 건 십자가, 성령세례. 물과 성령으로 세례 받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 갈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그림 그리면 하나님이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주시면 되는데. 하잖아요.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왜 나쁜가를 혹독하게 경험하는 접점 지점 안에서만 비로소 하늘나라가 그 순간에 주어져요. 이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물과 영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늘나라를 여기 살다가 죽어서 저기 가면 천국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에 여러 번 그런 이야기했는데 이 세상은 너무 고생스럽다. 종교고 기독교고 성경이고 다 집어치우고 다만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이 세상에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안 믿고 그런 것도 따지지 마시고 진짜 하나님께서는, “너, 고생 많이 했지? 이제 죽으면 좋은데 가게 해줄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달랑 그거에요. 이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하잖아요. 고민도 많이 하고. 울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제는 고생 끝, 죽고 난 뒤에서 행복 시작. 단지 그걸 원하는데 그래서는 천국이라는 것은 어림도 없습니다.
천국은 혹독한 속에서 일어나거든요. 우리는 이걸 빨리 치워버리고 기다리면 오는 이걸 원하는데 “하나님 끝났습니다. 나도 늙을 만큼 늙었습니다. 늙어 죽습니다. 이제 주세요.” 주님께서는 죽고 난 뒤에 주는 게 아니고 지금 네가 이 경험, a라는 b라는 접점 경험을 우리를 집어넣어요. 집어넣게 되면, 평소에 고생 많은 세상 끝나고, 이제는 한 많은 세상 끝나고, 천국이란 편안한 세상,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없는 세상이 온다. 그게 이 세상의 죄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원했던 것은 죄의 연장에 불과한 거예요. 내가 원했던 것은 이 땅에서 죄 짓는 것뿐만 아니고 내가 거기서 죄 짓는 게 힘들다고 원했던 그것마저 죄가 엿가락처럼 늘어난 것이지 결코 그게 그 나라와 그 의가 아니란 말이죠. 그 나라와 그 의는 죄 속에 숨어 있어요.
죄인이 되어서 의를 받으면 그런 법칙은 하나님께서 주신 적이 없습니다. 죄는 의와 만나지 못해요. 죄는 의를 간수를 못한다니까요. 손이 더러운데 깨끗한 음식 줘봐야 간수를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 죄는 어디 가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를 감당할 수 있는 자리로 이동해야 되는데 그 이동의 자리가 이 두 접점 지점이거든요. 물세례, 성령세례거든요. 세례의 특징이 뭐냐? 이게 죽음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람들 불러 모아서 광야에서 덥다고 그런 것 신경 못써요. “맨날 석청과 메뚜기 먹으니까 다른 메뉴 없나? 질린다, 질려.” 지금 자기 입장 생각 못합니다. 사람들 끌어 모아서 물속에 집어넣는 그게 급한 거예요. 그걸 표현할 때 도끼 들고 설친다는 겁니다. 도끼 들고 발모가지를 다 쳐버리는 거예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어떻게 됩니까? 나 따라 와. 가니까 잘난 놈, 못난 놈 모가지 쥐고 물속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고 다시 끄집어내지요.
어느 인간이 자진해서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없지요. 이 죽음은 자살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언약에 의한 죽음. 죽음도 질이 달라요. 질이 있어요. 자기가 죽는 죽음은 그것도 죄입니다. 죄인이 고통이 너무 심해서 일찍 고통을 면하려고 자기에게 주어진 죽음을 앞당기는 그것도 죄의 연장이기 때문에 의의 나라와 관계없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의 신앙의 대단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가 순교하기까지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그것도 언약적 죽음 아니에요.
악마가 베드로와 다 연결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망이 왕 노릇하고 죄가 왕 노릇하기 때문에. 왕 노릇한다는 것은 전부다 연결돼있다는. 베드로고 야고보고 요한이고 전부 죄와 연결돼있어요. 알래스카에서 개들이 달리잖아요. 개들 몸통과 줄로써 연결돼 있잖아요. 그처럼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말은 마귀가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돼요. 에스키모가 채찍으로 때리는 거예요. [벤허]라는 영화에서 전사가 말부리는 것. 우리 등에 올라타서 달리게 하는 이미 마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보면 우리가 그때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어디서 함부로 반항해요.
북한에서 김정은을 반항하고 김일성을 욕한다? 있을 수 없습니다. 전에 유니버시아드 대회한다고 북한에서 예쁜 여자응원단이 온 적이 있어요. 길거리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둘이 있는 사진을 보고 난리 나버렸어요. 어디서 김대중이가 함부로 김정일 지도자와 웃으면서 같이 찍어요. 데모를 하고 난리 났습니다. 철수한다고. 그래서 아가씨들 한 명이 그걸 떼서 김대중 나온 사진 부분을 접고 김정일만 나오는 부분만 들고 시가행진했어요. 마귀가 왕 노릇했어요. 우리의 왕은 바로 이분이라는 것을 마귀에서 종속된 모든 인간은 매일같이 그걸 보이는 생활을 하게 돼있어요. 우리의 평소의 모든 생활은 바로 이 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그분을 증거하는 모양새를 보여주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어요.
그게 광야에서 예수님이 당했던 건데 세 가지입니다. 돈과 인기와 권력. 우리는 악마란 말은 듣기 싫어요. 하지만 악마란 말을 대체해서 다른 말로 하게 되면 권력, 좋아합니다. 인기, 너무 좋지요. 싸이 보세요. 류현진이 얼마나 좋습니까. 추신수, 난리 나지요. 그 다음에 더 좋은 것, 돈. 그 세 가지로 성령께서는 인간을 붙잡는 인간을 지배하는 무기라고 성령께서 예수님과 악마의 미팅을 주선한 거예요. “어때? 돈?” “아니거든. 사람은 떡으로 못 살거든.” “좋아. 당신은 메시아로 모든 사람이 추앙한다. 이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면 당신은 완전히 스타 되는 거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에이. 마지막 카드, 세상 모든 권력.” 이것은 바로 마차 위에 올라타서 그동안 숨어있는 모양새로 모든 인간을 그런 식으로 다뤄온 거예요. 누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에베소서 6장에서 주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는 말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 했거든요.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가 옛날에는 세상 신에게 당했는데 이제는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그때부터 성령께서 싸움을 붙이는데 옛날 우리가 왕으로 모셨던 그것과 싸움을 붙이기 위해서 마지막 때 우리를 성령께서 들어 사용하신다고 돼있어요.
그러니 이 접점 지점 a, b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도 못할뿐더러 우리가 의의 증인으로써 죄 속에서 움직이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됩니다. “하나님, 의만 주세요.” “주면 뭐 할 건데?” “후딱 천당 가게.” 어떤 70 넘은 노인이 죽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군 입대 영장 나온 꿈을 꿨어요. 얼마나 군대가 힘들었으면 돌아가신 노인네 꿈에 영장 나온 꿈을 꿨겠느냐 말이요.
우리는 후딱 떠나고 싶은 거예요. 우리는 제대한 사람으로 다시 군대 생활하는 것, 돈 많이 주면 이것이 군대다해서 하나의 예능프로그램으로 할 수 있습니다만 하지만 실제로 군대 가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그걸 하게 하셔요. 분명히 이미 구원받은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들과 오늘도 지옥 같은 생활을 같이 하게 만드시죠. 그 주님의 놀라운 능력. 우리는 주의 그런 능력은 생각 안 하고 후딱 떠나는 능력만 생각하는 거예요.
요한복음 7장에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그러면 주님 가실 때 같이 가면 될 텐데 하지만 나는 너희를 데려가지 않겠노라. 죽은 거예요. 그냥 고생 많이 하게 된 거예요. 그것은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여기서 증거와 증명을 구분해야 됩니다. 증명은 남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온갖 자료를 다 모으는 반면에 증거는 약 올리는 거예요. “너, 백날 팔짝 뛰어도 내 세계에 못 들어와.” 이게 증거에요. 증명하면 욕 안 먹습니다. 증거하면 항상 밉상 받고 왕따 당하고 그렇게 살아가요.
요한계시록 12장에 두 증명이 아니고 두 증인이죠. 두 증이니 죽게 되는데 그 죽는 장소가 어디죠? 십자가죠. 그 말은 뭐냐 하면, 두 증인을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전부를 십자가의 사건이 벌어진 사건으로 요한계시록은 그렇게 모든 것을 십자가 사건이 유발되지 않는 곳이 없게 만들어버려요. 이 세상 전체를. 그러니까 이 세상은 면적이 넓든 좁든 간에 묵시세계에서는 시간이고 공간이고 고정돼버려요.
제가 오후설교에 그런 설교했는데 대전에 계신 분이 영천 가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러면 대전에서는 죄 지었는데 영천 가면 죄 안 짓습니까? 마찬가지로 미국 가면 죄 안 지어요? 성경에 의하면 울산 살다가 대구 가든, 인천 가든, 어디 가든 관계없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으로부터 온다는 걸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께서 배당 받은 자리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막 구조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이 조각목으로 돼있어요. 통나무가 없어요. 전부다 조립형이에요. 조립하는 이유는, 이곳은 우리가 살 곳이 못되니까 자꾸 떠나자는 느낌도 되고, 그 다음에 성막을 만드는 그게 조립적이지만 그걸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성막 자체에 어떤 목적이 있어요. 그 의미가 따로 떨어져있는 모든 조각들을 하나로 집대성하고 일치되게 하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일치시키는 것을 피죠.
그러니까 이 성막은 살림집이 아니고 죽음을 생산하는 공장이라고 보면 돼요. 그런데 그 죽음은 우리가 자살하는 죽음이 아니고 언약적인 죽음을 유발하는 그러한 장치들. 이건 여러분 아시니까 약간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깊이 들어간다고 겁내지 마세요.
출애굽기 다음에 레위기 나오잖아요. 레위기에 장치들이 나오죠. 방법들. 소제는 이렇게 하고, 화목제는 이렇게 드리고. 기름은 먹지 말고, 속죄제 고기는 제사장이 먹을 것이요 다른 사람은 먹으면 안 되고 이런 것들이 나와요. 그러면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장치 그 다음에 담기는 게 내용이란 말이죠. 장치에 뭐가 담기느냐 하면, 내용이 담기죠. 내용이 담긴다는데 이 장치를 누가 만들어요? 실제로 누가 만들어요? 솜씨 내고 깎고 사람이 만들죠. 사람이 장치를 만들었을 때에 여기서 하나님이 노리는 건 그거였어요. 성막을 직조하고 성막 테두리를 밖에서 못 보게 만들 때 사람들의 노동력과 재료가 다 포함되거든요.
하나님 뜻은 이거에요. 모든 장치를 만들 때 여기에 인간의 노동력이 개입되지요. 개입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는 우리가 만들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내용을 채우시면, 여기서 영생이 나오고 구원이 나오고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나오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해가 이미 인간 속에 잠재돼있었던 겁니다. 이런 것을 지시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헛말이지만 이런 말을 해요. “우리는 주의 은혜로 구원받아요. 나는 아무 행한 것도 없이 공짜로 선물로 구원받아요.”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제가 교회 꽃꽂이하고 봉사하는 것, 주의 복음 알아 은혜 받아서 하는 거예요.”라고 했는데 저 뒤에 얘가 꽃을 뭉개놓으면 다른 사람들은 웃고 넘기지만 누가 상처가 됩니까? 막상 꽃꽂이를 직접 담당했던 그 집사는 그 얘와 엄마, 보호자를 가만두지 않지요. 우리는 분명히 말로는 주의 선물이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몫의 인생을 살게 만들어요. 인생의 굽이굽이 롤러코스트 같은 굽이굽이에 우리로 하여금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투정을 마구 쏟아지게 만들어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매일같이 사건화 시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아는 세상이 그냥 죄 많은 세상이 아니고 진짜 너도 거기에 합류되어서 이미 죄를 퍼뜨린 책임이 있는 그런 죄. 너 따로, 죄 따로, 세상 따로가 아니라 네가 거기서 발 뺄 수 없는. 충청남도 보령에 가면 머드 축제하잖아요. 보령 가서 머드 붙여놓고 서울이고 울산일고 대전이고 대구고 온 동네에 진흙을 다 묻혀놓는 거예요.
우리는 죄의 산물입니다. 죄가 없었으면 우리가 있지도 않아요. 죄로 만들어놓고 우리는 입에서 주의 은혜로, 보혈이라 하거든요. 그것도 죄라. 막상 주께서 어떤 일을 시키고 사태에 몰아넣으면 십자가의 은혜고 뭐고 하다가 “왜 하필이면 저에게, 어떻게 저에게 이런 시련을, 왜 저에게 이런 비극과 불행을 주십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뭔데?”
주님께서 찾아오실 때 우리는 손들고 제가 주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나왔지만 “눈깔아. 손 내려.” 네가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죄 많은 우리를 성전 삼아서 우리한테 침투가 돼요. 그러면 우리에게 a라는 기적이 발생됩니다. 주님께서 옛날 바리새인이 살던 그때만 찾아오신 게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의 언약의 지속적인 활동력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때부터는 나 홀로 죽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죽는 죽음을 유발시키는데 그게 바로 주와 함께 장사지낸바 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뭘 놓치느냐 하면 십자가, 부활 여기에 성급한 거예요. 왜냐하면 고생한 것 빨리 잊어버리고 천당 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어서 환장해서 교인들이 그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우리로 하여금 무슨 능력이 필요하냐 하면, 이 세상에서 죄인과 함께 살면서 의인으로 사는 그 능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 능력은 우리가 가질 수 없고 주님이 우리 속에 우리로 관리해야 돼요. 주님이 우리 속에 함께 있어야 옛날에 죄 속에 들어왔던 주님의 능력이 발휘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 일을 하셨어요.
성령을 통해서 하니까 여기서 성막과 관련된다면, 성막은 피를 하면서, 제가 공식을 만들어봤어요. 피는 모든 것을 모은다. 화살표. 그 다음에 선별한다. 이 장치가 성막의 장치입니다. 모으고 선별하는 거예요.
지금 침례교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는 모든 인간을 위하여 죽었다. 따라서 일단 모든 인간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다 받았다. 다만 그들이 지옥 가는 것은 복음을 본인이 거부했기 때문이고 이걸 영접한 사람만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선별작업을 본인이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하기 때문에 문제가 뭐냐 하면, 치매 걸린다든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는 과거에 결심한 것이 무효가 돼요. 골치 아픈 거예요. 대책이 없어요.
대책이 없을 때는 과거에 했던 신앙을 장기적으로 보관해주는 기능을 교회에서 해주면 되겠지요. “할머니, 치매 걸려도 괜찮아요. 25년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해서 세례 받았으니까 그걸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게 천주교에서 하는 짓이에요. “할머니, 영세 받았으면 이미 이름이 기록됐기 때문에 치매 걸려도 괜찮습니다. 항상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땅 있지요? 그것 교회에 해야 자손들 대신 성인들이 기도해주면 패자부활전 해서 연옥에서 빼낼 수 있습니다.” 전부다 돈놀이 하는 짓이죠.
모든 것을 모은다는 말은, 이제 그냥 선별하면 안 되거든요. 아까 것 다시 그려볼게요. 예수님께서 죄 속에 들어올 때 예수님이 놓친 죄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죄가 이 세상에, “나는 유대나라 왔기 때문에 필리핀은 놓쳤어. 그때 유대나라 하고 빨리 필리핀으로 가는 건데.” 이게 성립이 되려면, “지리적으로 여기는 유대나라니까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아직 안 갔으니까 그때 다시 갈게.” 이렇게 해서는 안 돼요. 이것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 계신 그쪽만 보더라도 나머지 모든 것이 악마의 세계, 죄의 세계가 되도록 의미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의미의 전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언약을 들고 온 거예요. 언약이란 묵시거든요. 묵시는 공간적, 시간적 흐름에 변화가 일어나도 그 변화를 질적으로 따지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 것이 일상의 용어가 있어요. “우리 엄마는 화도 잘 내. 그런데 우리 엄마는 잘 웃기도 해. 그리고 우리 엄마는 요리는 못 하지만 달리기는 잘 해.” 도대체 엄마가 몇 명이에요? 분명히 엄마가 한 명인 네 가지의 다른 일들을 하죠. 네 가지의 다른 일을 하나의 단수로 묶는 근거가 뭐죠? 그걸 본질이라 하지요. 삼위일체에 나오는 거예요. 회사 가면 사장님이고, 집에 가면 아버지고, 교회 가면 장로다. 보통 어떤 남자다. 보통 삼위일체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거든요. 본질은 형태는 바뀌어도 회사에선 사장인 체해도 아버지로 내복 입고 돌아다녀도 전화 오면, “그래. 나 사장이요.” 이건 뭐냐? 본질은 동일한테 양태는 다르니까 삼위일체라 하는 거예요. 쉽게 따지면 그렇다 이 말이죠.
이 삼위일체 방법이 인간에게도 적용이 되거든요. 인간이 아무리 다양하게 변하고 또 민족마다 다 흩어져 산다 할지라도 이걸 하나로 모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게 붕 떴는데 찬찬히 해볼게요.
창세기 11장에 보면 무슨 탑을 쌓지요. 바벨탑 쌓지요. 그럼 모든 인류는 하나에서 나온 것이 퍼진 거죠. 이걸 저는 주저앉았다 해요. 아이스크림 밀어버리면 아이스크림이 흩어진 게 아니고 주저앉은 거죠. 그걸 다시 모으면 아무리 흩어져서 단일 속성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언어를 혼잡케 했지요. 언어를 혼잡케 했다는 그 평가는 하나에요, 둘이에요? 오직 하나에서 나온 우리 하나님의 평가만이 언어가 혼합하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겁니다.
신명기에 보면 민족들이 천사의 숫자만큼 퍼졌는데 그것을 대신해서 언약의 나라,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속에 우리가 하고 있는 성막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성막의 기능은 이스라엘의 구원용으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니고 성막에서 일어나는 모든 피 사건은 결국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서 다루는 거예요. 나중에 이스라엘에게 책망했던 그 명령과 지시와 율법이 이젠 이스라엘이 파괴되고 흩어짐으로써 모든 민족, 오는 모든 세대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심판받게 됩니다. 그게 로마서 1장과 2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전에는 유대인에게만 심판이 있는데 유대인을 넘어서서 모든 민족에게 핑계치 못할 날이 올 겁니다.
유대인 멸망했다고 좋아하면 안 돼요. 그 쓰나미가, 지진 진앙지로부터 파도가 넘치면 율법의 파도, 저주의 파도에 휩쓸려버립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끝난 이야기에요.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님의 평가나, 예수님의 속성 정도가 아니고 아예 피잖아요. 피라는 것은 이미 이쪽은 어떤 인간이든 죄인이란 말이죠.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피 없이는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신다. 다른 말로 하면, 피 언약만 내세우는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그 외에 모든 하나님은 각자 자기 민족의 자긍심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각자 민족에 맞도록 조작된 그들만의 신이 우상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성막이나 성전을 통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언급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 기능을 피라고 구체화시킵시다. 피 없이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거예요. 피 앞에 모든 걸 모으죠. 그러면 모았으니까 모든 인간은 피 앞에서 죄인 됩니다.
그 다음에 선별이죠. 피 앞에 모든 인간이 죄인이잖아요. 그러면 그 죄인이 구원해달라고 손들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이나 선별이라는 것은, “선택되어서 구원받아야지”라는 기회조차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선별은 일방적입니다. 이 말을 신명기 9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너희의 의로움이 아니고 너희의 선함도 아니고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고 악한 자죠.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려함이죠.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누가 구원되고, 안 되고의 모든 권한은 이미 어느 쪽에 넘어가 있습니까? 피 흘린 그분의 소관으로 이미 넘어갔기 때문에 구원해주세요라는 그런 권한과 권리는 우리한테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막을 이동하는 거예요. 이동하면서 계속 불만 가진 사람들 떨어져나가는 겁니다. 애굽에서 먹던 음식도 안 만들어주고 물도 없고. 하나님 따라다니다가 힘들어 죽겠다. 음식도 질린다, 질려. 만나 말고 다른 메뉴 없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자격이 없거든요. 그들 가운데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전 세계를 피 앞에 모으고 그 다음에 피 흘린 분에 의해서 구원받을 자를 선별할 과정 속에 있는데 그들은 애굽에서 한 행세, 맛있는 것 없나? 생수 없나? 지금 그런 것을 이야기할 게 못 되지요.
제가 유튜브에 교회가 인간을 버려놓는다, 교회의 과오, 그런 비슷한 제목으로 글을 올려놨더니만 어떤 사람이 카리스란 이상한 이름으로 해서 반발했어요. “목사님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심하지 않느냐?” 하면서 에베소서에 나오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고 하면서 성경구절을 그대로 적어놨어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이렇게 했어요. 진짜 참 교회는 참 교회라고 우긴다고 참 교회가 아니고 진짜 교회는 누구든지 참 교회라고 우기는 그 교회한테 핍박받는 뒤에 숨어있는 식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교회치고 참 교회 아닌 교회가 어디 있어요. 참기름치고 가짜라고 하는 것 봤습니까. 다 참, 참, 참기름이죠. 전부다.
교회라 할 때 우리 생각에는 저쪽은 거짓 교회고, 이쪽 참 교회라고 나누고 싶지만 주님께서는 그걸 허용하지 않아요. 왜? 교회고, 교회 아니고 선별의 권한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십자가지지 않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내가 소속돼있으면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참 교회이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고집 같은 게 있어요.
제가 우리교회 있다가 여기 새순교회 오면 새순교회는 참 교회고 우리교회는 교회도 아닌 거예요? 내가 가는 곳이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데 분명히 우리 심정은 무조건 내가 가는 곳은 천국이어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지금 하나님한테 삿대질하고 있는 거예요. 다른 가정은 저주받아도 내 가정은 복 받아야 돼요. 바로 그러한 숨길 수 없는 더러운 성질 때문에 피 흘리신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알려줄 때 그 사람이 참 교회고 참 성도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3-05-08 10:49
20130503b 울산강의-출애굽기 27장 : 성전 안의 공통점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의롭다는 것은 주님 때문에 의로운 거죠. 언약 속에 휩쓸리니까 의로운 거지 언약 빼버리면 우린 의롭지 않습니다. 그걸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 하는 거예요. 예수 안을 빼버리면 우린 의인 아니에요. 그래서 언약이 우리를 의인 만들어주는 게 아니고 언약을 위하여 의인 되어야 돼요. 죄인이. “나는 이제 언약으로 의인 돼야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우리가 뭔데 우리를 위해서 언약이 있어요? 말이 안 되거든요. 주님의 언약을 언약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간주해주실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 좋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 완성을 위해서 언약 완성의 효과가 우리한테 그냥 덮친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 언약을 드러내가 위해서 고생 많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되는 겁니다. 자살하면 안 돼요. 쓸데없이 시험들고 성전에 올라가서 뛰어내리고 이런 짓해서는 안 되거든요. 미쳤어. 그게 언약이 아니거든요. 언약은 이미 끝났어요. 피입니다. 피로 언약이 끝났다는 말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그 짓으로 의인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것이 의인인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의인 아니라는 것을 그걸 완료된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그것이 언약이 우리한테 들이닥친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 짓을 해야 된다고 할 때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날 위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내가 주가 되고, 주님은 똘마니처럼 되는 거예요. 토기장기가 토기한테 어떻게 해야 됩니까? “토기와 미안하다. 너를 요강으로 만들어서 미안하다.” 이래야 됩니까?
여기 성막에 있는 모든 기구들은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성막 만들 때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 많이 했겠습니까. 브살렐과 오홀리압 있다 하지만 고생 많이 했거든요. 애굽에서 가져온 패물 이것 만들려고 가져왔거든요. 그것 만들면서 여자들이 앙장 만들 때 얼마나 고생 많이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 있어요. 어린양이 죽고 피가 묻어야 되는데.
다시 해봅시다. 이 장치에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동원되었으니까 이것은 우리가 했고 거기다 내용을 채워주소서. 이렇게 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가 했다는 자체를 통째로 그러니까 “너는 죄를 지었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분향단을 만들고 심지어 언약궤를 만들어도 주님의 내용 앞에서는 죄가 되는 이유는, 오직 주님이 담기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 세팅되어서 만나야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 죽음이라고 하니까 자꾸 자기가 아는 죽음을 생각해서 영혼이 피폐하다고 하는데 이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음, 언약적 죽음을 의미하는 거예요. 언약적 죽음 안에만 영생이 들어있거든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뭐라 했느냐 하면, 울지 말라 했잖아요. 죽었는데 그게 살아있는 거라는 거예요. 왜 죽였느냐? 죽어도 안 죽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죽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뜻은, 취지가. “마리아야. 내가 네 오빠 일부러 죽기를 기다려서 낫게 안 해줬는데 그것은 죽어도 살은 거야.” 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우리 어머니 정신이 좀 맑아질까 싶어서 제 아내가, “어머니. 성경을 좀 써보실랍니까?”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러니까 엄마가, “그것도 못 쓸까봐.” 보란 듯이 제 아내 앞에서 책상에다 ‘성경’이라고 썼어요. “그게 아니고요. 창세기부터 노트에다.” 우리 딴에 계획을 짰어. 창세기부터 쓰게 되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서 다섯 개 모으면 놀러가기로 당근과 채찍을 준비했단 말이죠.
그 전에 예비단계로 성경이야기 동화로 된 게 있어요. 그걸 어머니한테 읽으라고 드렸어요. 이것 다 읽어보시면 놀러가게 해준다고 하면서. 5분도 안 되서 “이게 얘들 보는 거더라.” 나는 어른인데 얘들 보는 걸 내가 왜 보느냐고 나오는 거예요. 포기했습니다. 모든 것을 철회했어요. 없었던 걸로. 그 성경 쓰라는 게 아닌데.
주님께서 언약적 죽음으로 오는 것은 그게 우리한테 생명 주시는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그 방식 외에는 없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 할 때 이걸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왜냐하면 피는 모든 사람을 모은다죠. 모을 때 예외 없이 죄인이 돼야 돼요. 그래야 피로 구원받죠. 만약에 여기서 의인 생겨버리면 그 사람은 피가 소용없는 게 돼요.
성막에서 피를 만드는 장치를 만든 것은, 모든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거죠. 그 다음에 선별작업에 나서는데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라는 걸 누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야 죄인 맞잖아요. 선별할 때 예수님께서 어떤 멘트를 날릴 때 그 멘트는 알아들으라는 멘트가 아니고, “안 되지?” “안 됩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반드시 내게 오도록 내가 조치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스스럼없이 즐겁게 나오는 거예요. 네가 뭔데? “나는 뭘 해도 죄인이면 내가 의인 된 것에 대해서 어떤 행동을 해도 의로운 게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은 오직 피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그 언약의 죽음이 곧 생명이라 했지요. 아까 나사로 이야기했잖아요. 네 오빠는 내가 죽인다. 그런데 그 죽인 것이 뭐가 된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죽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죽은 게 아니고 살아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 이것 이야기하려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런데 그걸 알아먹을 인간은 아무도 없지요. 아무도 없으니까 주께서 피 흘리신 거예요. 없는데 주께서는 그걸 믿도록 선물을 주신 겁니다. 선별작업으로.
그래서 나사로에게 나오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나왔단 말이죠. 나사로가 걸어서 나왔을 때 일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 없지요. 왜냐하면 어느 집 남자가 옆집 마르다 오빠가 죽었는데 나흘 만에 살아났데. 그게 무슨 영생이에요. 하나의 일반적인 사건에 불과하잖아요. 좀 특이하긴 하지만. 자주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하잖아요. 그게 예수님과 연관이 되겠어요? 안 되지요. 제자들이 그것 듣고 구원받았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피 때문에 구원받았지 그 사건 백날 봐도 그들은 그걸로 구원 못 받아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성막과 관련돼있는데, 뭔가 경로 또는 통과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아까 접점, y=ax²+b 이차방정식에서 두 접점이 생기는데 죄 많은 세계에 주께서 오셔서 a라는 접점을 남기고 십자가, 부활, 승천했다는 b라는 접점을 남겼을 때 성령이 오시면 여기에 포함되니까 이 경로가 바로 언약이 진행해야 될 경로입니다.
그럴 때 나오는 게 주가 나와요. 이 주는 선택권이 있어. 누구는 사랑하고, 누구는 미워하는 권한이 오직 주님께만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이 임해야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이해가 돼요.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소리를 못하죠. 주께서 하신 일로 인하여 내가 믿게 되었다는 고백은 하지만 내가 주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할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까지라도 주님께서 혼자 주관하시는 경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정.
목이 이상이 있고 암 걸린 사람들 소화가 안 되고 할 때 목에 구멍을 뚫어서 호스를 통해서 음식을 집어넣잖아요. 호스 속에는 의사가 집어넣은 음식물이 통과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피자 썰고 쑤셔 넣습니까? 그럴 수 없지요. 그 경로는 오직 의사가 준 것만 허락되잖아요. 그 호스에 해당되는 게 우리의 몸이라 이 말입니다. 그게 성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우리가 사는 게 아니에요. 우리를 호스로 사용해서 주님의 언약의 완성만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뭐가 재생됩니까? 주께서 죄인으로 왔다가 부활한 그 경로가 우리 속에 반복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무슨 역할 하는 거예요?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우리가 바로 사두개인이고, 우리가 세리고 창기고. 등장인물 다 되는 거예요. 성경은 남 줄 게 하나도 없다니까요. 세례요한 목 딴 자가 바로 우리고. 가룟 유다가 바로 우리 자신이고. 그런 역할로 초청받아서 구원받는 거예요. 가룟 유다 역할, 바리새인 역할, 그 연극 역할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난타라는 공연을 하는데 여기다 물을 담아서 막대기로 치면 물방울이 튀어 올라오겠지요. 주께서 북을 치니까 그 파장에서 울산에서 뛰고, 서울서 뛰고, 대구서 뛰는 거예요. 북을 막대기로 쳤으니까 뛰어 오르는 거예요. 물방울 하나하나가 언약적인 증인으로써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 물방울과 저쪽 물방울이 같은 일을 할 이유는 없고 같은 일을 필요도 없어요. 괜히 믿음 좋은 사람을 모델로 삼지 마세요. 나도 주기철 목사처럼, 손양원 목사처럼. 너도 죽어볼래? 어떻게 나도 착한 믿음생활 해보겠다. 왜 옆의 물방울을 부러워합니까? 모방하지 마세요. 흉내 낼 필요도 없고.
중요한 것은 주께서 오늘도 내 자리를 쳤다는 사실. 주께서 막대기로 안 치면 우리는 물방울이 튀지 않고 그냥 제자리에 있겠지요. 이 자리는 나를 위한 나의 자리가 돼요. 나의 영광과 자랑질, 자기 믿음의 연조 자랑, 나는 장로니 목사니 하는 것, 그런데 주께서 막대기로 치면 내 자리를 떠나버리죠. 떠나면서 언약 역할하면서 내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 자리가 주께서 언약으로 치게 되면 말씀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말씀의 공간에 주저앉으면 무슨 공간이 되느냐 하면, 나에 의한 나의 명예와 나의 권력과 돈을 내 소유화시키는 나의 자리, 역사 아닙니까. 개혁주의신학 아닙니까. 내 역사의 자리가 돼버려요. 이 역사를 막대기로 치면 묵시의 역할로 바뀌죠. 그러면 이것은 주님의 공간이 되고 주님과 함께 있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뛰어오르면 내가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고 나는 말씀의 일부로 변하는데 바리새인으로 변하고 세리로 변하고 변해요. 어떤 때는 아브라함 됐다가, 어떤 때는 아브라함을 미워하는 이스마엘 됐다가 돼요.
동방박사가 별 따라 왔을 때 헤롯이 반대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성경 볼 때 동방박사 짝짝짝, 헤롯 나쁜 사람 되거든요. 자기 권력 쥐기 위해서 동방박사를 죽이려하는 나쁜 사람이 된다 말이에요. 그런데 인생 살면서 주께서 북을 두드리면 헤롯이 이해가 돼요. 밑에 부하직원으로 있을 때는 동방박사가 이해가 되고 나쁜 사장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만약 본인이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 헤롯이 이해가 된다니까요. 어린이집 교사로 있을 때는 어린이집 원장과는 다르잖아요. 직원이 월급 줄 때 생돈 나가는 것 같이 기가 막히단 말이죠. 월급 받을 때는 월급 올려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다가.
그러니까 말씀의 자리에 가게 되면 우리가 어떤 말씀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모든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음껏 우리에게 할애합니다. 완전히 서울랜드. 이것도 타보고. 그러니까 자유이용권이 끊어져 있어요. 바이킹도 타보고 롤러코스트도 다 보다가 온갖 것 다 타보면서 내 인생은 내가 장식하고 내가 꾸며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제나 저제나 주의 사람이라는 것을 만끽하게 만드는 그런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성막이라는 걸 통해서 이 세상에 말씀의 자리, 주의 자리가 이미 장착 되면서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말씀의 자리, 성막은 채가 있기 때문에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막 안에 공통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공통점을 몇 개 나열해 볼게요.
기름과 피, 이걸 뿌림으로써 거룩이 된다는 사실, 이게 공통점입니다. 이 공통점은 사물이나 물건뿐만 아니고 플러스, 그 다음 28장에 보면 나와요. 사물이나 물건뿐만 아니고 인간 자체도 기름과 피에 의해서만 거룩이 돼요. 그 말은 뭔 뜻입니까? 여기 기름과 피는 어디서 나오지요? 그 당시 제사법에서 양이나 염소나 소에서 나오지요. 그러면 양과 소와 염소가 지금은 짐승이지만 짐승에 머물지 않고 무빙, 장차 신약에 새 언약 시대에서는 실체화될 가능성이 있잖아요. 그렇다면 움직임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리적인, 공간적인 움직임뿐만 아니고 지리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죄를 더욱더 드러내면서 더불어 어디로 올라가느냐 하면, 질적으로 이 땅을 떠나서 다른 세계 안에 진입하는 이동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러분 스필버그 감독의 [ET] 영화 포스터 알지요. 분명히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데 자전거 타는 게 나와요. 목적지가 포스터에 달로 돼있어요. 달그림자를 향하여 자전거 타고 있지요. 실제로는 달이 그냥 배경일 뿐인데 그처럼 구약이란 연극무대가 있다면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수풀이라 했어요. 풀로 붙여서. 집도 살지도 못하는 집을 짓고. 앞에서 보면 마치 산처럼 보이고, 나무로 보이고, 집으로 보이지만 뒤에서 보면 풀로 붙인 거잖아요.
그런데 이게 실제로 바뀐다면 이것은 신기한 일이지요. 어떻게 실제로 바뀔까요? 여기에 피가 오고 기름이 오면 거룩으로 바뀌어요. 거룩으로 바뀌게 되면 여기에 공통점입니다. 이름도 금향단이라. 금으로 돼있거든요. 요새 말로 패널이죠. 성막의 널빤지를 연결시키는 모든 고리가 금고리로 돼있고, 채를 들 때 채에 있는 것이 모두 금고리입니다. 언약궤를 아카시아나무로 만들지만 금박으로 입혀놨어요. 그러니까 온통 금천지에요. 거룩은 곧 금이고 금은 곧 거룩으로도 표현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보석들이 나오잖아요. 출애굽기에도 보석이 나온다고요. 어깨에 보석을 열두지파대로 나이순으로 해요. 여기는 나이순이 아니에요. 이것은 미술시간에 가짜로 풀로 붙이는 식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게 분명히 세트인데 세트가 실체화되는 과정이 무엇이냐? 궁금해요? 그게 되게 궁금한 거예요. 모양새는 그만 보여주고 십자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게 나타나려면 뭐가 무르익어야 되느냐 하면, 잘 들어보세요. 실체에 참여한 그 인간들이 본인들이 하나님 일에 참여했다는 걸로 거룩이라고 착각하는 그들의 손에 진짜 거룩한 분이 모가지 묶여서 죽을 때 그게 실체입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좋겠는데 이건 가짜 교회고, 참 교회 등장하면 되는데 참 교회는 참 교회라고 우기는 그 인간들에 의해서 핍박을 당하는 식으로 참 교회가 등장해요. 다른 방식은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할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러면 우리 안에 어떻게 느껴집니까? 내가 핍박할 때 느껴져요. 예수 잘 믿는 복음 잘 아는 내가 주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짜증을 낼 때 주님께서는 “닥쳐라 이놈아. 너 때문에 죽었다.” 이렇게 나오면서 그때 나타나요. 죄가 더한 곳에 마치 준비된 양 은혜가 넘치는 겁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설교하면서 예를 들었지요. 음식 할 때 너무 싱거운 것 같아 간장 좀 넣고, 간장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아 다시 물을 넣고. 간장의 맛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물이 추가되는 것처럼 은혜를 더욱 추가하기 위해서 물이라는 죄를 짓게 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 죄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게 우리 몸의 본성이기 때문에 그냥 막 살면 다 됩니다. 그냥 우리 성질대로 하면 그게 다 죄기 때문에 구태여 죄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섬기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섬기고 우상화하기 때문에 전혀 죄 짓는 게 어렵지 않는데 죄 지을 때마다 우리로 하여금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게 해서 우리 자신이 우리 속에 또 다른 분이 말씀에 입각한 자기의 피조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성막의 사물체가 집대성 된 것이 성전이고 그 성전이 인격화된 성전이 되려면 성전이 불타야 되겠지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한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있다고 허락하신 거잖아요. 솔로몬이 일천 번제 드릴 때 하나님이 영광 받았지요. 하나님이 성전 짓고 난 뒤에 누구든지 이 성전에 와서 기도하게 되면 응답하겠다. 가뭄 들어도 비가 오게 하겠고, 병들어도 낫게 할 것이고, 전쟁에 패배하더라도 승리케 해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그 소리를 이스라엘 백성이 다 듣지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성전과 함께 있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한 이 나라, 이스라엘은 안 망하지요. 북쪽 이스라엘 망할 때 그들은 여전히 희망을 가졌습니다. 북쪽 이스라엘 망할 때 많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왔어요. 북쪽에는 성전이 없기 때문에. 허겁지겁 여로보암이 남쪽 성전을 대체해서 큰 걸 만들었지요.
동화사와 갓바위 차이가 거기 있습니다. 갓바위가 돈을 잘 벌거든요.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명해서. 노태우 때 압력을 넣어서 동화사에서 갓바위보다 더 비까번쩍한 불상을 만들어놓고 필히 세트로 헌금하는 것을 만들어 놨거든요. 영 인기가 없어. 그리고 갓바위로 가지 말고 동화사 오라고 했는데 그게 노태우 정권 물러가고 난 뒤에 철거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성전을 하라는 것은 모든 세트가 성전이잖아요. 비록 우리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전만큼은 안 깨질 것이라고 여겼는데 선지자 하는 말이 성전이 깨진다고 했거든요. 성전이 깨지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도가 깨지는 겁니다. 그 예를 이렇게 들었어요.
남편이 퇴근하면서 오늘 직장동료들 가니까 해물탕 끓여 놓으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뭔 뜻입니까? 저녁 안 먹고 갈 테니까 해물탕 먹겠다는 거지요. 그런데 막상 오더니만 저녁은 먹고 왔다면 그 다음부터 남편 말 듣겠어요? 안 듣지요. 거기다 해물탕을 발로 차버렸어요. 그러니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안 믿지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절대로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준 거예요. 아무도 믿지 못하도록 준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욕하지 마세요. 우리라도 안 믿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만든 성전을 스스로 불태웁니까? 지가 무슨 숭례문입니까? 라이터로 그러게. 새로 세운 숭례문, 예전 숭례문보다 영 못해요.
도무지 성경 어느 말씀도 우리가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은 없습니다. 항상 우리와 반대로 나가요. 여기는 하나님 계시겠지, 이러면 하나님 찾아오시겠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성전이 없다면 끝난 거예요. 성전이 있어서 메시아가 연결되는데 성전 없다면 메시아와 현재 백성과의 연결점은 뭐냐? 그게 바로 선지자의 연속성이에요. 그 선지자 이름이 뭔지 알아요? 선지자를 뭐라고 호명합니까? “인자야.”라고 하지요.
선지자 숫자가 문제가 아니고 선지자가 남긴 말을 전부 다 거두어서 그 선지자는 실체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연속성을 준 게 아니고 무대장치 세트와 실제 나무 사이에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단절, 끊어버려요. 누구든지 이것 보고, 이것 지키고, 이것 만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과 영생으로 가는 일은 없게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예수 믿고, 성경공부해서 천국 가는 일은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막아버립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지 우리가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구원받는 않습니다. 교회 등록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의도적으로 끊는 이유는, 끊어야 우리 자리가 붕괴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로 있다는 자체가 소용없는, 비현실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만듭니다. 우리의 모든 것, 내 인생을 내 것이라고 여기는 그 자체가 이미 우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에요. 주께서 막대기로 두드려줄 때 우리는 울산이든 대구든 거기서 그냥 사는 겁니다. 우리는 살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죄라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보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걸 깨달을 때 우리는 언약에 대해서 죄인으로 참여 되고 저분은 죄인마저 용서하시고 영생주시는 하나님으로 메시아로 구원자로 우리와 매치가 되면 거기서 언약은 완성이 되는 겁니다.
정리하면 성막과 나중에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히브리서에 나와요. 제사하는 제사장과 예수님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제사장은 제사하면서 제사하는 본인이 죄를 위하여 속죄제를 따로 드려야 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드려도 소용없다는 것. 그 제사장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그 죽는 것과 자기가 드린 제사와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제사장이 제사를 집례하는 것이 마땅히 죽을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양 잡아서 속죄제 드렸는데 그 속죄제가 단절돼있어요. 우리의 구원과. 그러면 뭡니까? 양 잡았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양의 실체가 되신 예수님이 죽어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양 잡지 말고 제사 드리지 말라고 하지 왜 양 잡고 제사 드리게 하느냐?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우리 속에 죄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바깥으로 토해내는 그런 기회를 우리한테 부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울산바닥에 왜 삽니까? 깊은 산 속에서 도 닦지. 도 닦아도 마찬가지지만 왜 살게 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어디 가도 변하지 않는 것,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겁니다.
만약에 이 땅에서 가요를 좋아한다든지, 여배우 브로마이드 좋아하는 사람 같으면 천국 갈 때 가요 테이프와 그것 챙겨갈 거예요. 그게 우리 마음이에요.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인생을 살거든요. 그것 없으면 천국 가도 심심해서 못 살고 천국인지 지옥인지 구분도 안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은 진짜 천국이 아니고 내 자신의 연속성을 보장해달라는 그런 자리로만 그걸 우린 천국이라고 오작동을 하는 거예요.
참 이런 이야기하면 진짜 교회가 사람들 다 버려놨어. 한국교회가.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천국 같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단절돼있다는 이 한 마디로 제가 모든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천국은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아니고 뭐 소가 늑대와 논다고요? 천국에 소 있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봤습니다. 모형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래요. 천국에 소가 있다면 그 소는 수정 맺어야 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신체에 생식기관이 있잖아요. 그것은 시집가고 장가간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천국은 천사와 같이 된다 하잖아요. 그러면 아예 지금부터 천사로 바뀌어야 되는데 안 바뀌고 있다니까요. 이것은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장치가 우리 몸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 안 하면서 죄 짓고, 결혼해서 죄 짓고, 결혼해서 이혼하면서 죄 짓고, 이혼하고 재혼하면서 죄 짓고. 그러니까 이 몸의 장치가 결혼을 하던 이혼을 하던 남자를 다섯 명 사귀든 여섯 명 사귀든 관계없이 이 장치는 죄를 보여주는 장치기 때문에 마음껏 보여드리면 돼요. 눈 뜬 사람은 마음껏 보여드리고 소경은 눈 어두워서 눈으로 죄는 못 짓지만 그 대신 귀는 밝잖아요. 귀 밝아서 죄 지으면 되는 거예요. 장애인 대우하는데 그럴 필요 없어요. 다 같은 사람인데 뭘 대우해요? “네가 장애인 돼봐라. 그런 소리 나오는가.” 하는데 이것은 돼보고, 안 돼보나 피 앞에서는 똑같아요. 단절이라는 걸 분명히 생각해야 돼요.
다시 한 번 정리해봅시다. 성막은 살림집이냐? 살림집이 아니에요. 성막은 뭐냐 하면, 격리돼있죠.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이 사는 곳이 격리돼있어요. 여기에 들어가려면 공통점이 있어야 돼요. 기름과 피를 바르지 아니하면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기름과 피는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바깥에서 가져와요? 안 돼요. 그러면 이 앞에서 잡을까요? 안 돼요. 이 안에서 들어가서 잡아야 돼요. 이 안은 언약의 자리에요. 기름과 피는 그냥 언약의 기름과 피가 아니고 언약적인 지시와 명령에서 나온 그 피와 그 기름을 발라야 활동합니다. 그러면 그 피 바르면 구원받습니까? 아니지요. 다만 여기 있는 제사장은 피 생산을 위해서 참여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거룩한 곳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거룩은 단절을 의미한다. 끊어졌다. 창세기 3장 24절에 생명나무 가는 길은 인간 쪽에서 볼 때 이미 끊어졌어요. 그 끊어짐을 주님께서 이어주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끊어놨는데 미안하다. 다시 이어줄게.” 이런 것 없습니다. 끝까지 가요. 꼭 개성공단 같아. 못 갑니다. 주께서는 끝까지 단절합니다. 단절했기 때문에 죽으면 구원받겠지. 없습니다. 죽어도 안 됩니다. 베드로처럼 목숨 바친다고 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 다음에 선택 소관은 전적으로 주님에 의해서 선별작업에 나가죠. 기름과 피, 거룩, 그 다음에 금으로 입힘. 금으로 입힌다는 것은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영광스럽고 빛난다는 것,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
기름, 피 한 가지 그 다음에 금으로 돼있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채, 이동하는 것. 어디로 가느냐?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어디로 갑니까?’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