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욥은가짜다)(총11강) - 재정리
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욥은가짜다)(총11강) - 재정리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0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_ cross070730a(1강)
* 욥은 가짜다, 나는 늘 가짜다 !!
강의, 이근호 녹취, 한윤범
시간이 됐는데 시작할까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근각지에 흩어져 있던 복음을 아는 성도들이, 욥기를 중심으로 다시 깊이 사모하고 상고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주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주시는지, 그 내막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귀한 2박 3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먼저 욥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가 이번 강의할 것이 '욥기' 라는 것입니다. 욥기는 구약성경 761페이지에 있습니다. 일반 초신자들은 '에스더' 다음에 욥기가 있어서, 마치 욥이란 사람이 에스더보다도 더 나중에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에스더' 라는 사람은 훨씬 뒤에 있는 사람이고, 욥은 훨씬 앞에 있어요. 욥의 시대는 아브라함과 야곱, 그 정도 언저리 정도로, 같은 시대에 살았지 않은가 하고 생각이 드는 겁니다.
◈ 율법이 없던 시대 !!
21세기 초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욥기를 보면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어떤 갭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이니까, 그리고 그들은 아직까지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성립이 되기 이전이라서 율법도 없었어요. 법이 없었습니다. 법이 없는데, 자기들이 무슨 하나님을 아냐는 말이죠. 십계명도 없는 주제에 말이죠. 자기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겠어요? 그러니 "그것을 무슨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구심도 든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5장에 보면, 율법이 오기 전에 이미 사람들이 죄 아래 있어서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것에 의하면, 그들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계시도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무엇을 밑천으로 삼아서 신앙생활을 했겠는가?" 라는 의문점이 든다는 말입니다.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니까 "아담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이스라엘에게 시내산에서 구체적인 문자로 된 십계명을 주기 이전까지 공백기간에 뭔가 참고서 같은 게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어떤 식으로 신앙생활 했을까?" 라고, 상당히 궁금해합니다. 그런데 그게 욥기를 보면 나와요.
◈ 그들은 자연을 기준해서, 의와 죄를 !!
그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신앙생활을 했는고 하니, 그들은 자연의 순응하면서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의'와 '죄'를 끄집어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의'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자연에 잘 순응할 때 그것을 '의' 라고 하고, 반면에 자연법칙에 순응을 제대로 하지 않고 이탈할 때 그것을 '죄' 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프린트로 되어있는 성경이 있기 때문에 "옳은지 그른지를 한번 따져볼까?" 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펴들고서 시도하겠지만 말이죠. 물론 지금 이 시대에도 어릴 때부터 교회에 가본적도 없고 성경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의와 죄에 대한 관점이 없겠느냐는 겁니다. 나름 분명히 있거든요.
그러면 그들한테 이야기하지요. "당신은 교회에 간 적도 없고, 누가 성경을 이야기한 적도 없고, 그냥 깊은 강원도 산골에 살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이거는 죄야, 이거는 의야' 라고 할 때, 당신은 무슨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함부로 단정을 지어서 '의다, 죄다' 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윽박지르면, 그들로서는 사실상 할 말이 없습니다.
◈ 조상님과 이웃사람들이 죄라고 해 !!
그래서 그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웃사람들이 또는 대대로 조상들이 '이것은 나쁘다' 라고 해서, 그것이 내 속에 각인이 돼서 나쁜 것이고, 그리고 이웃사람들이 '그건 나쁜 거야' 라고 하니까 그것이 나쁜 것이다" 라고 판정을 내린다는 말입니다.
제가 "오늘날 시대에도 교회를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사람이다" 라는 말을 왜 했느냐 하면, 이 욥기에 초반부터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라고, 그렇게 시작하거든요.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 '욥' 이란 사람이 의인이라고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그 당시에 십계명이 있고, 모세율법이 있다고 하면, 욥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의인이 되었는지는 율법을 딱 들이대서 확인해보면 "아, 이 사람은 의인이 맞구나" 라고 판정을 내릴 수 있는데, 오늘날 객관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계시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욥이란 사람이 의인이다" 라고 팍 떴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욥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의인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 현대의 성경이 완료된 상태에서는 우리가 여기서 혼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날 시대에서는 기준을 적용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욥기를 안 보고, 그냥 건너뛰게 되어있습니다.
◈ 노아도 마찬가지 !!
그건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 라고 하는데, 창세기 6장에 말이죠.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십계명도 없는데 의인이라니, 도대체 어떤 점에서 의인이냐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신은 이렇게 해서 의인이다" 라고 말할 수 없고, 반대적으로 대조하는 방식으로 의를 추려낼 수 있어요.
(창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게 뭐냐 하면, 의와 죄는 서로 대립이 되잖아요. 여기서는 서로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몰라도, 하지만 우리가 죄가 뭔지를 알면 그것을 빼놓고 나머지가 다 의가 된다는 겁니다.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죠. 죄를 빼놓고, 즉 죄인을 빼내버리면 나머지가 의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럼 죄인을 어떻게 죄인이라 합니까? 성경말씀도 없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도 없는데, 어떻게 죄인이라 합니까?" 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심판을 받으면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심판을 받지 않고 면제되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의인이 되는 겁니다.
◈ 심판의 유무는 누가 결정하는가?
그런데 이렇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여기서 골치 아픈 문제가 또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심판을 당했다. 안 당했다" 라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고 하니까, 물론 노아처럼 아예 홍수처럼 확실한 심판이 있으면 되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매일매일 그냥 일상적인 일과를 보내는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밭을 갈다가 뱀에 물렸다든지, 아니면 북한산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벼락을 맞았다든지 하면 몰라도 말이죠. 그럴 경우는, 즉 욥의 시대처럼 계시가 없을 때는 어떤 사람이 산에 올라가 벼락을 맞으면, 그 사람은 분명히 죄를 지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어떤 사람이 소경이 되어서 걸어가니까, 사람들이 제자들에게까지 집중포화를 퍼부었지요. "저 사람이 장님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조상의 죄 때문입니까?" 라고, 이미 선입감부터 그랬다는 겁니다. 그리고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나 죽었을 때도, "그들은 그에 상응하는 죄를 신에게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죽었다. 졸지에 죽었다" 라고, 그렇게 규정을 해왔던 겁니다.
◈ 욥은 역시 자격이 있어. 부자니까 !!
그러니 그런 규정에 의하면, 벼락도 안 맞고 온전하게 될 때는 무슨 부류에 속하느냐 하면, 바로 의인의 부류에 속하는 겁니다. 특히 욥의 경우에 그가 의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다음 구절에 보면 뭐냐 하면, 아들이 일곱이요, 플러스 딸이 세 명이요, 그 다음에 소유물이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그렇게 주로 삼삼칠로 나가지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욥이 남들보다 어떤 농업기술이 뛰어난 것이 전혀 아니고, 주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욥이 저러한 큰 부자가 된 것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정도의 재산을 가졌다. 그런 자격이 되기 때문에 가졌다" 라고 말입니다.
◈ 그것을 수용하는 욥 !!
그런데 놀랍게도 욥도 그러한 점을 수용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제가 몇 번 이야기합니다만, 그 당시 사회에는 성경이 없었어요. 구체적인 성경이란 게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아직 나오지 않은 시대예요. 심지어 십계명이란 율법도 없었습니다.
물론 십계명이 오게 되면, 즉 어떤 하나님의 계시가 확정되어 문자로 반영이 되면, 그 문자를 전문적으로 해석하는 제사장 계열이 등장하고, 그 모든 판정은 그 제사장 계열이 독점해서 결정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문자해독을 하는데, 그 문자는 신에게 받은 계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문자가 없다는 것은 무슨 특수 계급이 없는고 하면, 성직자 계급이 없습니다. 성직자 계급이 없다면, 옳고 그름을 누가 판정합니까? 자기들끼리 판정하는 거예요. 그렇게 판정할 때, 자연에 순응하면 복을 받고, 자연법칙에 어긋나면 저주를 받는데, 그런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은 지은 죄가 많다고 하는, 그것을 '게슈탈트(Gastalt, 형태)' 라고 하죠. 그런 인식체제, 사고체제, 그것이 바로 욥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 이런, 무식한 놈들 !!
제가 이쯤 이야기하면 "목사님, 그것은 지나간 이야기니까 우리가 이번 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네요. 옛날에 성경이 없을 때, 희미하고 모호할 때 구체적인 하나님의 뜻도 없는데, 인간 자기들끼리 '의다, 죄다' 라고 결정할 것 같으면, 우리가 구태여 거기에 한 다리를 넣을 이유가 없지 않나요? '이런, 무식한 놈들!' 라고 하면서 그냥 외면해도 될 문제가 아닙니까?" 라고 나올 만합니다.
지금 우리는 확실한 성경이 있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라고 분명하게 되어있으니까, 아무리 부자가 되고 고관대작이라고 해도 예수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특정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지침서가 하늘에서 주어진 적이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욥을 그렇게 여겨야 하겠습니까?" 라고 한다면, 바로 그런 점에 대해서 우리가 꼭 해야 돼요. 바로 그러한 생각 때문에 꼭 해야된다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예언대로 일하신다 !!
지금부터 약간 어렵게 갑니다. 사실 좀 어렵게 가야 돼요. 설교가 아니고 수련회이기 때문에 말이죠. "예언대로 일하신다" 라고 하면, 누가 그렇게 한다는 말입니까? "진짜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예언대로 일하십니다" 라는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욥기에 대해서, "욥, 나와봐. 나하고 붙어보자. 성경에 보니까 세례요한이 아무리 위대해도 천국에 있는 작은 자보다 못하다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세례요한보다 천국에 있는 자가 더 세다고 하는데 말이야. 어이, 구약의 인물들은 나와봐. 너희들이 예수님을 알아? 이게 어디 하수가 까불어?" 라고 나올 수가 있거든요.
구약의 사람들, 즉 계시가 분명치 않은 사람들이 자기 딴에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와 사람들이 보면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욥기를 오해한 겁니다. 아니 욥기뿐만이 아니고 성경전체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 욥의 도화지, 또한 우리의 도화지 !!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욥하고 우리하고 일대일로 맞짱을 뜨자는 것 때문에 성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욥을 하나의 도화지로 생각하고, 우리도 도화지로 생각한다면, 욥이란 도화지에 그린 그 그림과 우리 인생에 그린 주님의 그림과는, 이 두 개가 서로 동질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대로 성취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지금 알고 있는 이 정답, 즉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만 딱 챙기면서, "어떻게, 어떻게 공식을 풀었더니만 정답이 나오더라" 라는 중간 과정을 생략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상태로 정답만 챙기게 되면, 마치 그 문제를 제대로 다 푼 사람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다는 겁니다.
◈ 어떤 과정에서 '8'이 나왔는가?
예를 들어서, '8' 이라고 하면 그 8이 나올 경우의 수가 많아요. 3+5도 8이고, 10-2도 8이고, 2의 3승도 8이고, 2×4도 8이고 말이죠. 그냥 8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과정에서 8이 나왔느냐?"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수학에서 주관식 문제가 있으면 풀어야 돼요. 풀어서 그 과정을 수학 선생님이 봐서 "이건 됐구나" 라고 판정을 내리는데. 지금 정답을 안다고 해서 그 문제의 취지를 안다고 같이 인정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욥이 느끼고 있는 그것이, 평소에 우리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데, 만약에 욥기를 우리가 도외시하고 무시해버리면, 우린 정답만을, 즉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라는 정답만 챙기고, 그 십자가가 어떤 의도에서 나왔는지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죠.
◈ 욥까지 끌어안아야 !!
욥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예언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과 예수님 사이에 연결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급하게 예수 그리스도만 챙기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런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통을 끌어안고 "주님, 사랑합니다. 천당에 보내주세요" 라고 해도, 예수님의 긴 다리의 발가락은 욥에 가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발가락까지 회수해야 돼요. 그냥 몸통만 가져오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발가락이 욥에 걸쳐 있으면, 그래서 예수님을 만약에 껴안는다면 욥까지 껴안을 줄 알아야 됩니다. 즉 욥을 이해할 줄 알아야 되고, 욥이 그 당시에 어떤 의식에서 신앙생활을 그렇게 했는지를 알아야 됩니다.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현재 성경 없다. 십계명도 없다. 지금 그 당시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신앙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의 수백 년 뒤의 사람이 우리를 보고 비웃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저것들은 말이야,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말이야. 도대체 누구야? 욥 시대에 산 사람들이 누구야? 십자가 마을 사람들이야? 십자가도 모르고 말이야" 라고, 얼마나 씹어대겠습니까?
하지만 욥은, 본인이 전혀 원치 않는 상태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를 하나의 예언자로서 당첨이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욥기를 모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깊은 취지를, 그 중요한 것을 우리가 뭉텅이로 놓치게 돼요. 욥기를 빼버리면 왕창 뭉텅이로 놓친단 말이죠.
◈ 욥 당시의 사고방식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끄집어내는가?
그러니 우리가 지금 풀어야 될 숙제가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욥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가 안다고 치고, 그러면 욥 당시의 사고방식 속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끄집어내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다 알잖아요. 물론 욥도 고난을 받았지만 말이죠.
그렇다면 "욥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치성 가운데서, 욥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라는 것인데, 그 중간에 시편이라든지, 이 시편은 다윗 언약이죠. 앞에 보면 모세언약의 모세, 시편에 나오는 다윗, 선지자의 고난 등등, 이런 것들이 줄줄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어서 나올 때 문자적으로 몇 개를 뽑아서 연결됐다고 하면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 욥 전체가 이동을, 친구들까지 !!
욥이 알고 있던 그 정신이 후대로 밀어붙이는, 들이대는 식으로 가까이 접근을 해야됩니다. 욥 전체가 다 이동해야 돼요. 욥만 이동해선 안 되고, 욥에게 고난을 안겨줬던 욥의 친구들도 다같이 병행해서 후대의 모세 쪽으로, 다윗 쪽으로, 선지자 쪽으로, 그리스도 쪽으로, 오늘날 교회 쪽으로 쭉쭉 이동을 시켜야 돼요. 욥과 욥의 친구들의 사고방식 전체를 다 이동시켜야 된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욥의 친구와 욥 사이에 논쟁이라든지, 다툼이라든지, 그런 것에 우리는 거기에 끼어 들어가야 돼요. 참여해야 돼요. 우리가 만약에 그 시대의 사람이라면, "나는 과연 욥의 친구 편을 들것인가? 아니면 욥의 편을 들것인가?" 라는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됩니다. 결정해야 된다고 하니까, "그것은 우리가 욥의 편이지, 어떻게 욥의 친구 편이 되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성경이 주장하는 바를 알아듣고 해야지, 미리 자기가 정답을 안다고 누구 편을 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싸울 때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 편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세요. 평소 우리의 신앙생활하고도 똑같아요.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편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논조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건 욥의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죠.
여러분 가운데 이 욥기를 미리 한번 읽어보신 분이 계시지만, 욥기를 쭉 보면서 욥의 친구들을, 특히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꾸중을 들었던 욥의 친구들의 사고방식을 따로 뽑아서 보세요.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다는 선입관을 잘라버리고, 우리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고 생각하고 욥의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란 말이죠. 어디에 하자가 있는지, 완벽해요. 완벽 그 자체입니다. 문제가 될 게 없어요. 오히려 욥이 더 짜증을 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이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이 잘못됐다고 하고, 욥의 손을 번쩍 들어주느냐는 겁니다. 욥의 손을 들어주려면 "욥은 이래서 완전하다" 라고 나와야 되는데, 욥도 하는 이야기를 보면 어설프기가 짝이 없거든요. 그럼 우리가 보면 둘 다 어설픈데, 도대체 하나님은 무슨 뜻을 가지고 어설픈 것 중에서, 한 쪽은 손을 들고 한 쪽은 내리느냐는 말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아이고,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냥 나는 십자가만 알뿐이다" 라고 할지 몰라도, 이것을 모르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십자가의 중요한 부문이 뭉텅이로 다 날아가 버려요.
◈ 왜 신앙생활을 꼭 해야합니까?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직접 하면 이렇습니다. 욥기는 소위 "신앙생활을 안 하면 왜 안 되느냐?" 라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따로 끄집어낼 때, 그것이 그 사회에 얼마나 이질성을 주고, 파격적이고, 남들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는지를 아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그냥 정상적으로 살면 되지, 왜 굳이 신앙생활을 꼭 해야 되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통해서는 우리가 뭘 해야하느냐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이유가 없는 모든 사례와 모든 경우를 다 동원해서, 소위 신앙생활이라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욥의 친구나 욥을 통해서 쳐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를 쳐버려야 돼요.
"굳이 교회에 안 가도 되잖아. 예수를 안 믿어도 되잖아. 왜 믿어야 돼? 나중에 죽을 때 믿어" 라는 식으로 우리 신앙생활 자체를, "이것은 안 해도 될 일을 번잡스럽게 하고 있는 짓거리다" 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를 다 끄집어내야 돼요.
다 끄집어내서 "그래, 신앙생활을 안 해도 되는구나" 라는 결론에 도달이 돼야, 비로소 욥의 고난을 이해합니다. 그런 것은 하지 말자는 거예요. 신앙생활이고 뭐고, 교회도 다니지 말고, 하나님도 생각하지 말고, 그런 것 없이 살아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나는 삐쳤습니다. 신앙생활은 안 하겠습니다 !!
그러니 신앙이라는 것은, "잘 믿겠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매일 우리한테 물어봐야 돼요. "안 하면 안 됩니까? 예수를 꼭 믿어야 됩니까? 안 믿어도 잘 되는 사람이 많은데. 왜 이것을 꼭 해야 됩니까? 나는 삐쳤습니다. 안 하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날마다 되풀이 해줘야만 돼요.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를 위선자로 만들어서, 가면 갈수록 위선자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겁니다.
욥기는, 사실은 욥기 말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는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싸우면 당연히 자기는 예수님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행동하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바리새인인데 말이죠. 그런 것을 우리가 "예, 저는 바리새인이 맞습니다" 라는 쪽으로 돌려야 된다는 말이죠. 그렇게 돌릴 때, 비로소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미가 그때 제대로 다가와요.
◈ 우리는 적군의 편에 서서 !!
그냥 묻어가지 마세요. 예수님을 붙잡고 묻어가게 되면, 자기가 바리새인인 채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돼버려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별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잘나서 예수를 믿는 게 돼요. 철두철미하게 그리스도의 적으로서 아군이 아니라, 적군의 편에 서서 계속 그쪽에 서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쪽으로 성경해석을 해줘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이 쓰시는 도화지가 돼요.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화지라는 말은, "내가 내 신앙생활을 할 이유도 없고, 할 필요도 없고, 할 재미도 없고, 그런 취미도 없고, 할 생각도 없고, 하고 싶은 능력도 나한테 없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는 것인데, 그래야 비로소 주님이 원하는 신앙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겁니다.
그러니 "해야지. 잘 해야 돼. 열심히 해야 돼" 라고 하면 모두 가짜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께 책망을 받는 이유는, 본인들이 지금 신에 대해서 너무너무 잘 알고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겁니다.
◈ 욥의 고난은, 우발적 고난 !!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고 였습니다. 욥도 평소에 이들과 생각이 같았어요. 욥에게 고난이 오는 것이, 자기에게 고난이 오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까? 욥이 "이 정도에서 고난이 좀 와야 될 텐데" 라고 하면서 기도한 적 있습니까? 전혀 없어요. 그것은 그냥 즉흥적이고 우발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발성' 이라고 하는 것은, 늘 터지면 우발성이 아니잖아요. 가끔 터져야 우발성이 아닙니까? 북한산에 번개가 계속 치면 못 올라갑니다. 가끔 터지니 그래도 올라가잖아요.
◈ 욥기 주제 - '나는 늘 가짜다' !!
평소에 우리가 하는 것이, 욥의 친구들처럼 한번 신앙은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계속해서 그 신앙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그 버릇, 그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의 사고방식과 꼭 닮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기를 보면서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안 해야 된다는 쪽으로 가야 돼요. 신앙생활을 만약에 하고 싶다면, 그건 백이면 백 가짜인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문장을 하나 쓰겠습니다. "나는 늘 가짜다" 라고 말이죠. 제가 이렇게 쓸 때는 그냥 노트에 좀 적어놓으세요(ㅋㅋ). 우리는 어제 '나'와 오늘 '나'가 달라요. 내일이 되면 또 달라요. 이렇게 다르다는 말은, 즉 변화한다는 것은, 어느 것 하나라도 진짜배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매일 가짜예요. 매일 가짜란 말이죠. 바로 그것이 욥이 받은 낯선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욥도 해석하지 못하고 욥의 친구들도 해석하지 못한, 이 세상의 인류 가운데서 그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욥의 고난을 가지고, 모조리 전부가 다 가짜임을 폭로하는 것, 그것이 욥기의 주제입니다. 즉 모두가 가짜예요. 왜 가짜이냐 하면, 모두가 신을 알기 때문에, 그 안다는 것 자체가 가짜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일의 신앙을 따로 준비했는데, 우리는 어제 받았던 신앙을 가지고 오늘도 우려먹는 거예요. 그러니 유통기간이 지난 겁니다.
어제 신앙을 오늘까지 이어서, 그것을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어제 했던 대로 계속해서 믿으면, 그게 신앙이라 알고들 있어요. 즉 주체가 '나'가 되는 겁니다. 주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체가 되어서 "내 신앙, 내 구원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거예요. 즉 "내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한다" 라는 겁니다. 옆 사람이 안 도와 준다는 겁니다. 그게 욥의 친구들의 주특기죠. 물론 욥도 마찬가지이고 말입니다.
◈ 측면도와 평면도 !!
방금 했던 이야기를, 길게 해봐야 멀리서 왔다고 피곤도 하고 잠도 오니까 하나의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그림을 두 가지로 그려보면, 앞에서 본 측면도와 위에서 본 평면도를 그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사는데, 어떤 법도 없다는 겁니다. 십계명도 없고, 율법도 없고, 성경책도 없고, 아무 것도 없던 시절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렇게 경외했을 때, 신의 세계는, 즉 신은 여기 있습니다. 구름 위에 신이 계시고, 사람들은 이렇게 있습니다. 서로서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이게 측면도거든요. 그러면 평면도는 뭐냐 하면, 앞에 텅 비어있어요. 그렇게 텅 비어있고 사람들은 여기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어요. 오늘 십자가 마을 수련회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림을 못 봐서 못 알아듣겠지만 말이죠(ㅋㅋ).
위에서 보면 안에 빈 공간이에요. 옆에서 보면 신이 있지만 위는 텅 비어있습니다. 텅 비어있는 여기 공간, 그 공간을 통해서 이렇게 오고, 그래서 신의 내려진 뜻을 잘 전달하면, 이것이 의인이고, 만약에 신의 뜻을 옆에 사람에 전달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속시키면, 그게 죄인이 되는 겁니다.
◈ 옆 사람에게 전달, 또 전달 !!
쉽게 말씀드리면, 지금은 물건을 하나 살 때, 즉 안경을 살 때 돈을 주고 사잖아요. 그건 돈의 가치와 안경의 가치가 일치될 때 돈을 주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옛날에는 신이 내려주신 그 축복을, 신의 선물을 옆 사람에게 무상으로 줌으로서, 옆 사람에게 신의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전달함으로 말미암아서, 그래서 가진 자가 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받은 사람은 어떤 의무가 무엇인고 하면, 옆 사람에게 또 전달해야 돼요. 이것을 가지고 '증여' 라고 합니다. 영어로 'GIFT' 라고, 즉 선물이고 은사죠, 자기 몸과 자기 건강과 자기의 모든 물질적인 복이 신으로부터 받았던 선물이기에, 여기가 신이 있는 이층이고, 여기는 우리가 있는 일층이죠. 그렇게 이층으로부터 받았던 그 무상증여는, 신은 보답을 원치 않기에 말입니다. 그 신은 순수증여이기 때문에 증여, 즉 "그냥 준다" 라는 겁니다.
신은 순수증여이기 때문에 신에게 받은 것을 도로 신에게 드리면 반칙이에요. 안 됩니다. 그래서 신에게 받은 그 기프트, 선물은 옆 사람에게 나눠줘야 돼요. 그렇게 나눠지면 그 옆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될 의무가 있고, 그렇게 해서 한 바퀴 돌면 그 사회는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는 겁니다. 어떤 특정인간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고,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 더욱 더 이 모든 구성원들은 신의 은총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고대사회가 이뤄진 겁니다.
이것이 여러분,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어요?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남에게 대접받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라는 겁니다. 이미 욥기에 나오는 신학이 산상설교에도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누가복음 14장 13절을 봅시다. 맞는지 모르겠는데, 12절이네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눅 14: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 도로 그 사람에게 갚지 말라 !!
여기를 보세요. "자기를 청할 때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라고 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네게 갚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안 돼요. 베풀어 준 사람에게 도로 갚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베풂으로 말미암아서, 이로서 신의 순수증여, 즉 신께서 아무 대가 없이 주시는 그 자비가 그대로 온 사회 구석구석에 어두운 곳까지 가난한 자에게 녹아 남아있을 때, 그때 그 고대인들은 그것을 의인된 사회, 하나님의 축복된 사회라고 본 겁니다. 하나님 계시가 없을 때, 그것을 본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욥기를 공부를 안 하고 다음과 같이 나온다고 하면, 누가복음 14장부터 읽어보는데 이 본문을 보고는 "이거 뭐, 십자가 끝났는데 이따위야.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셨지? 십자가를 졌다면서, 이것은 제가 안 본 걸로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라고 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의미가, 이런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아도 십자가의 의미가 밝혀진다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14절에 보면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라고 하는데, 이 말씀 그대로 지금 우리가 삽니까? 못 살잖아요.
(눅 14: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눅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그러니까 로마서 3장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이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들이대서,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두가 다 죄인이다" 라고 하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내가 언제 교도소에 갔는데? 나는 파출소에도 간 적도 없다" 라고, 그렇게 되거든요.
(롬 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이것은 바로 인류 대대로부터 내려오는 근본적인 이웃사랑의 이런 상태, 이런 상황을 모르고 놓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아래에서 "나는 죄를 지은 것이 없다" 라고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은 "나는 술을 먹어도 술 주정은 안 한다" 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 어린 사환의 신 !!
그런데 이러한 '증여의 사회', 즉 "신이 내려준 것을 신은 받지를 않는다" 라는 것을, 일본작가가 쓴 '어린 사환의 신' 이란 소설이 있는데(1929년, 시가 나오야 작), 어느 초밥 집에서 사환, 즉 심부름하는 아이가 너무 초밥이 먹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 겁니다. 초밥이 6엔을 하는데 자기에게는 4엔 밖에 없어서 못 먹고 안타까워하면서 그냥 집에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있던 어떤 점잖은 신사 분이 주인에게 자기 이름을 안 밝히고는, 자기가 무조건 돈을 줄 테니까 초밥을 먹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 아이에게 먹였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초밥을 공짜로 그냥 먹은 그 아이는 그때부터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면, 비로소 신을 생각하는 거예요. 신을 말이죠.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했다고 밝히고, 그리고 나중에 갚아야 된다고, 즉 "초밥을 그냥 먹는 대신에 공부를 잘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훌륭하게 살아야 돼. 그래야 내가 초밥을 먹인 보람이 있는 거야" 라고, 그렇게 뭔가 반대급부를 원하는 게 있는데, 그런데 전혀 그런 것도 없이 먹고 싶은 초밥을 그냥 먹을 때, 그 아이는 신의 순수증여를 처음으로 맛본 겁니다. 값없이 준 은혜를 처음으로 맛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순수증여가 남아있다면, 만약에 그 아이가 A라면 B라는 이웃을 볼 때 그냥 A에서 B를 보는 것이 아니고, 순수증여를 한 신을 거쳐서 B를 바라보기 때문에, B가 어려울 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를 생각해서 베풀어주는 거예요. 이게 고대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이 없을 때, 즉 하나님의 계시가 없을 때 고대사회가 유지되는 방법이었다는 겁니다.
◈ 엘 샤다이 !!
여러분, 욥기에 보면 국가관이 없어요. '국가관' 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을 베풀어주는 국가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어요. 신과 더불어 함께 사는 거예요. 이러한 신을 두고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경에서 이러한 신을 가지고 '엘 샤다이', 즉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못하는 게 없고 뭐든지 '내' 뜻대로 해준다는 게 아니에요. '내' 뜻이라 하는 것은, 즉 '나' 라는 인식은 16세기 근대서양주체사상에서 나오지, 그 이전까지는 '내' 뜻이라는 게 없어요. 신의 뜻이 '나'에게 쏟아지면 그걸로 만족하는 겁니다.
(녹취 '구' - 그래도 우리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타고 난 '내 뜻' 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닌가요? 굳이 교육을 받고 깨달아서 아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자연세계에 움직이는 그 자체로 완료된 것, 그것으로서 완결상태를 만드신 하나님, 그러니까 미흡함이 없고, 모자람이 없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 자체로서 욕심을 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유지하는 하나님, 바로 그러한 하나님을 두고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 라고 하는 겁니다.
욥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바로 그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범위는 여호와, 즉 언약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에요. 현재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말고 주신 것에 감사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그것으로 머물러 있는 신을 욥과 욥의 친구들은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 '엘 샤다이' 시절에서는, 의인과 죄인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 맘껏 남에게 베풀어야 되는데,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의인과 죄인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고맙고 고마운 거예요. 이 모든 자연 상태가 말이죠. 여기에서 욥기를 한번 봅시다. 욥기 1장 다시 돌아가서, 하다가 보니 내용이 조금 어려워지고 말았네요.
욥기 1장 5절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 번제를 드리는 욥 !!
욥은 당대의 의인인데, 이렇게 의인이란 말은 "이것이 죄다" 라고, 그렇게 죄라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제 혼자서 하면 재미가 없어서 묻겠습니다. 여러분, 욥이 무엇이 죄라는 것을 압니까? 아니면 모릅니까? 그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짓지 말라고 번제를 드린 거예요. 자식을 불러다가 말이죠. 혹시 무의식 중에라도 죄를 지으면 용서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욥이 평소에 그런 기도를 했고 제사를 드렸다는 말은, 현재 욥이 누리고 있는 것은 그러한 제사를 드린 반대급부로서 자기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겁니다. 이런 욥에게 자식이 죽었다는 말은 자기가 있는 시스템, 신학체제에서 안 맞는 거예요. 맞질 않다는 겁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슬슬 열이 나기 시작하는데 말이죠.
욥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게 아닙니다. 자식들을 보고, "너희는 나처럼만 돼라" 라고 했다는 말이죠. "이 철딱서니 없는 애들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처럼만 되어라"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욥 자신은 뭡니까? "나는 어떻게 부자가 되고 풍족해도, 절대로 그것 때문에 교만하고 자만하지 않고, 행여나 자기 쪽에서 죄를 진 것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할 정도로, 나는 철저히 나를 생각하지 않는 상태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시스템이, 아까 제가 말했듯이 그게 옳기 때문에 당대에 의인이며 많은 재산을 번 것이 아닙니까? 복을 받아서 말이죠. 그 당시 엘 샤다이의 사고방식체제에서 말이죠. 그래야 욥기가 지금 앞뒤가 맞아 들어가잖아요. 욥의 자기 신학대로 세상이 움직이잖아요. 자식들이 죄를 짓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그 기도가 그때그때마다 응답을 받았기 때문에 자식들 안 죽었고 번성했다는 말이죠.
◈ 그런데 왜 욥은 망했는가?
그런데 결과적으로 자식들이 다 죽고 재산이 날아갔다는 말은 뭐냐 하면, 분명히 자기 시스템, 자기 신학체제 안에서는 자기가 죄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없어요. 없는데 어떻게 해요. 이건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절에 다니다가 교회로 바꾸고 난 뒤에, 그만 집구석이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옆집에 살던 교회 권사가 와서는 "당신, 죄를 진 것이 있으면 끄집어 내봐라. 당신이 모르는 죄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윽박지르잖아요. 그 윽박지르는 역할을 욥기에서 누가 하느냐 하면, 욥의 친구들이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욥의 세계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도 말이죠.
◈ 그것은 해석불가 !!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 시스템 때문에, 하나님께서 즉흥적으로 우발적으로 생기게 하신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해석이 불가합니다. 해석이 불가할 것 같으면 겸손하게 못한다고 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당신이 잘못했어!" 라고 하는 거예요. 즉 "당신이 죄 지은 게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 라는 겁니다.
욥기를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즉 십자가 복음과 관련을 시키려면, 우리는 욥기에 더욱 더 철저하고 깊숙한 거기에 집착을 해서 그 내막을 들춰내야 됩니다. 이 욥기에 신이 무상으로 주신, 그리고 무상으로 줘놓고 반대급구를 받지 않을 정도로 그냥 주시기만 하고 그냥 베푸시기만 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완벽성, 그 완벽성 속에 인간들은 하나의 자연물처럼 그냥 곱게 누리면서 하나의 꽃봉오리처럼, 코스모스처럼 청초하게 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 증여의 사이클이 끊어지면, 그게 곧 '죄' !!
이것을 알기 때문에 이웃에게 전달을 해주는데,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옆에 A에서 B, B에서 C, 그리고 C에서 D로, 그렇게 전달에 전달이 되는 과정에서, 여기서 만약에 욕심이 생겨서 안 주고 자기 것으로 꼬불쳐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증여의 사이클이 끊어지는 것이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합니까? 그것을 '죄' 라고 하는 겁니다. 돈을 탐낸다든지, 남의 토지를 탐낸다든지, 남의 부인을 탐낸다든지, 남의 가업을 탐낸다든지,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다든지, 이웃에게 거짓말을 한다든지, 그래서 이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그 흐름을, 그 사이클을 갑자기 끊을 때는, 주로 어떤 경우에 끊습니까?
자기 욕심이 갑자기 딱 분열되면, "내가 미쳤나. 저 인간들 이것을 주게. 니는 팔자대로 살아. 나는 못 도와줘. 니 팔자가 그것밖에 안 되는데 내가 왜 도와주는데, 못 도와줘. 나는 내가 키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한테 뇌물을 바치면 바쳤지, 저 인간한테 안 돼. 나에게 아무런 보탬도 안 되는 저 인간에게 왜 내 귀한 돈을 준단 말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귀찮게만 해" 라고 하면서 그 사이클, 자기의 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면, 그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죄' 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 '엘 샤다이'가 아닌, 다른 노선을 암시 !!
그래서 욥의 친구들과 욥은 바로 그러한 죄가 있는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탐색에 들어가요.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의 사이클을 욥이나 욥의 친구들이 끊은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욥은 그런 적이 전혀 없어요. 욥이 그런 적이 없다면, 그러면 욥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낯선 그 무엇의 침투인데, 외부에서 말이죠. 그것은 바로 지금 욥과 욥의 친구들 세계에, 그들이 살고 있는 그 가운데에 엘 샤다이가 아니고, 다른 하나님의 다른 노선이 들어왔음을 암시하는 겁니다. 다른 하나님의 노선이 말이죠.
그런데 욥과 욥의 친구들은 그것을 몰라요. 몰라서 답답한 욥은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다시금 창조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가려고 합니다. 그 창조 이전의 세계를 '혼돈'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혼돈이 온 것 같은데(ㅋㅋ), 이해가 안 되도 할 수가 없어요. 겨우 한 시간을 했는데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왜 혼돈으로 돌아가려는고 하니, 그 혼돈에서 창조가 생겼잖아요. 그것이 창세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창조가 되면, 즉 혼돈에서 창조가 되기 때문에, 그 창조에는 혼돈이 남아있습니까? 안 남아있습니까? 남아있을 이유가 없죠. 왜 그런가요? 그게 창세기 1장에 나오잖아요. 즉 모든 것이 혼돈에서 창조가 되었기 때문에, 창조가 된 이상 혼돈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럼 창조는 뭡니까? 질서 아닙니까? 그 질서에 혼돈이 끼면 안 되잖아요. 욥은 그렇게 알고 있는데, 욥에게 갑자기 뭐가 왔습니까? 고난이 왔어요. 왔으면 그것을 창조의 범위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도 해결이 안 나지요.
◈ 하나님, 되감아주세요 !!
그래서 욥은 어디로 돌아갑니까? 다시금 혼돈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으로, 다시 원위치를 하는 겁니다. 리와인드, 즉 되감기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 되감아주세요!" 라고 부탁을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알던 창조의 영역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욥이 살았으면 몇 살인지 모르지만, 만약에 칠십이라고 하면, 한 살부터 칠십 살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질서는, 즉 칠십 년 경험에 의하면 그것이 정답입니까? 정답이 아닙니까? 정답이죠. 자기가 확인을 해봤거든요. 자식을 위해서 나쁜 짓을 안 하고 말이죠.
그래서 욥은 그게 늘 정답인 줄 알았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자기만 아니고, 이웃사람들도 다 동의를 했습니다. "야, 완벽하다" 라고 말이죠. 심지어 하나님도 인정했어요. "나는 욥 같은 순전한 사람을 못 봤다" 라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완벽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완벽했는데, 만약에 자기 나이 칠십에 그러한 엄청난 고난이 닥쳐왔다고 하면, 그러면 자기가 한 살 때부터 칠십 때까지 진리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어떻게 됩니까? 그냥 도루묵이 되는 거예요. 그때는 달리 방법이 없어요. 새로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 욥의 친구들은 욥의 마음을 몰라 !!
그래서 욥이 "저를 엄마의 모태에서 태어나지 말고, 새로 시작합시다. 그렇게 해서 고난까지 포섭이 가능한, 지금 당하는 고난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시대로 새로 다시 시작을 합시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왜 그런가요? 그들은 낯선 고난에 동참을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은 개별자, 즉 떨어져있기 때문에 자기 아픔을, 손톱이 빠지는 그 아픔을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에 욥의 친구가 왔을 때는 친구로서 위로하려고 왔습니다. 그게 '사막에서 대화'가 아닙니까? 사막이라고 하는 것은, 문둥병에 걸려서 쫓아냈으니까 사막이라고 하는데, 위로하려고 왔다가 나중에 끝날 때는 그만 원수가 되었고 말았지요.
◈ 고난이 해석이 안 되는 것이 더 고난 !!
고난을 품은 자와 고난이 없는 자, 여기서 사도바울 신학의 '안과 밖' 이란 개념이 성립되고, 그러면 그 기준이 뭐가 됩니까? 난데없이 주어진, 무엇입니까? 고난인데, 그 고난에 대해서 제 아무리 옆에서 해석하려고 해도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욥도 그것을 해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욥은 뭐라고 합니까? "혼돈, 즉 창세 이전부터 다시 원위치해서,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규명합시다. 이 세상 도대체 어떻게 굴러가는지, 나도 좀 압시다" 라는 겁니다. 고난이 아픈 정도가 아니고, 지금 욥의 아픔은 뭐냐 하면, 욥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자기에게 고난이 왜 주어지는지, 그 고난의 토대를 몰라서 괴로운 거예요. 기준을 모르니까 말이죠.
◈ 하나님이 하나님을 공격 !!
선과 악의 기준이 모호해버리면,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 즉 언약의 하나님이 공격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을 공격한 셈이 되어버리는데, 즉 하나님이 하나님을 공격해버렸어요.
아브라함 언약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만 알고 그 가족들만 알아요. 그런데 같은 시대에 사는 욥이 살던 우스 땅은 뭐냐 하면, 에돔인데, 참 에돔이 아니고 그 바깥 변방에 있는, 그러니까 여기는 이방인의 땅이에요. 그러니 이방인인 욥이 아브라함 언약의 내막을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아브라함 언약과 어떻게 접촉되는가?" 라는 중요한 문제가 욥기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이방인 아닙니까?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잖아요. 이방인들이 텅텅 비어있는 게 아니고, 이방인 나름대로의 어떤 신 개념이 있어요. 하나님 개념이 있다는 말입니다.
◈ 신의 증여를 가로채는 왕의 등장으로 !!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신과 그리고 여기 있는 증여의 사이클이, 그게 주체사상이 깨진, 이것만 이야기하고 쉽시다. 벌써 졸기 시작하는 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혼돈이에요(ㅋㅋ). 신의 증여, 순수증여, 즉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 그냥 베푸심, 그러니 주는 대로 먹는 거예요. 그렇게 신이 그냥 주시는 것을 옆에 있는 A, B, C에게 전달해야 될 그런 역할이 다들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도중에 가로채는 사람이 있었어요. 신이 내려준 증여를 중간에서 말입니다. 그게 왕입니다. 그 왕이 나중에 국가가 되고, 왕이 등장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그 왕에게 종속이 되고, 왕은 여기서 증여를 하면서 뭘 뽑아내느냐 하면, 세금을 뽑아낸다는 겁니다.
그렇게 세금을 뽑아내면서, 그때부터 사람들은 왕의 주체를 본받아서 각자 각자가 자기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예를 들어서, 안경 값이 만 원이라고 하면 이전에는 안경 값이 만 원이라도 이만 원을 주던 것을, 이제는 딱 그 값어치에 맞도록 만 원만 주는 겁니다. 등가식에 의해서 말이죠.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동일한 제품에 동일한 가격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옛날에는 물건을 줄 때, 물건만 달랑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이 가고 마음이 가고 신에 대한 은혜가 가고, 그렇게 사랑을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떡 하나, 팥죽, 또는 두부 등을 이웃이 오면 주고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뭐냐 하면, 물건값만 왔다갔다하는 거예요. 주체가 확정한 오늘 이 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우리의 심성에 맞다는 겁니다.
◈ 이젠 십자가도 교환합시다 !!
그런 주체가 있는,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화가 철저하게 된 사람이 욥기가 포함하고 있는 십자가의 은혜를 과연 알까요? 그러면 욥기를 모르는 상태의 십자가는 뭡니까? "주여, 십자가를 믿어줄 테니까 천당에 보내줄 거요? 말거요?" 라고 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관계에서 맞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십자가를 생각하고 복음을 생각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제가 교회에 왔습니다. 복음을 전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잘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죽을 때 봅시다" 라고 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교회에 안 나와요. 왜냐하면, 자기가 얻을 것을 얻었고 챙길 것을 챙겼으니까 말이죠. 그러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종교가 하나의 기능이 되어버렸어요. 구원도 하나의 기능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기능 발휘로서 말입니다.
◈ 누가 믿느냐? 누가 믿게 했느냐?
이러한 것이 바로 욥기를 모르고, 자기 자신의 원초적인 것을 모르고 하는 짓들이에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뭡니까? "예수를 믿는 것도 죄입니다" 라고 하면, "예수를 믿는 게 왜 죄인데?" 라고 나오면서 따지는 거예요. 하지만 욥기 식으로 한다면 예수를 믿는 것도 죄가 되는 겁니다. "누가 믿느냐? 누가 믿게 했느냐?" 라는 것에 따라서 죄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 라고 하면,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게 바로 죄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다음 번 시간에는 "엘 샤다이 하나님에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으로 넘어오는가?" 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혼돈 가운데 고생했습니다.
잠시 10분만 쉽시다.
2013,4,17 재정리함 - 녹취 '구'
첨부파일 : 07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욥은가짜다)(7,30~8,1)(총11강).zip (681.6K), Down:28
이한례(IP:203.♡.42.222)
13-05-01 09:35
2007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욥기 강해 : 매일 나는 늘 가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