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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3 대구강의 7] - [피 93] - 근원 의미강의[피]

[13 대구강의 7] - [피 93] - 근원 의미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13 대구강의 7] - [피 93] - 근원의 의미

13,04,1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79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라는 제자는 자신의 실존을 붙들었다. '나는 내가 본다는 것만을 인정하겠다' 라고 나선다. 그는 자기의 본질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요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 실존(實存)과 존재(存在) !!

여기에 '실존' 이라는 난해가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본다는 것만을 인정하겠다" 라고 하면, 여기서 "무엇이 보인다" 라는 것이 중요한가? 아니면 "내가 보고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한가? "내가 보고 있다" 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내'가 있고 여기에 건물이 있다고 하면, "'내가 건물을 보고 있다' 라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것을 두고서 '실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존이 아닌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있는 의자나 책상 등은 실존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실존이 아닌 것을 반대말로 '존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가운데서 왜 자기가 사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서 그냥 살아간다면, 그것을 존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존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반면에 존재라는 것은, 사람의 경우에 무엇과 관련이 되는고 하니, 동물, 식물, 광물 등등, 그런 것과 관련되어서 비슷하게 가는 것인데, 그것을 '요구', 혹은 '욕구' 라고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밥을 먹고 싶어서 밥을 먹는다" 라고 하면, 그건 정박아가 아니라고 하면, 어른의 경우에는 정신지체 1급 정도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먹고 싶다, 자고 싶다, 마시고 싶다, 움직이고 싶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치매가 걸리면, 점점 더 실존에서 존재로 가게 되고 말이다.

◈ 실존 - '나는 누구인가?'

그러니 실존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 앞에 뭔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즉 "내가 사회에서 누구인가?", "내가 가정에서 누구인가?", "내가 국가에서 누구인가?", 혹은 "내가 교회에서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스스로 되묻는 것을 실존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실존이라는 말이 옛날부터 있었는가 하면, 그건 아닌데, 그런데 왜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옛날에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본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신분사회' 라고 하는데 말이다. 즉 "너는 양반이니 양반답게 행동하고, 너는 쌍놈이니 쌍놈답게 행동해라" 라는 것이다.

그렇게 신분사회에서는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외부에서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분사회가 끝나고 난 뒤에 어떻게 되는가? 국가가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을 이야기해주기 이전에 자기가 스스로 묻게 되는데, 그때부터 비로소 '실존' 이란 말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너는 이 집에 시집을 가거라 !!

옛날에는 집에서 여자 나이가 17살 정도가 되면, 본인이 미팅을 해서 남자를 고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 어른들끼리 만나서 결정을 하게 되는데, 즉 "너는 이 집에 시집을 가거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의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시집을 가고 나서, "내가 이런 남자와 꼭 살아야 하나?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라고 하면서, "비록 지금은 내가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어서 취직도 하기 힘들지만, 언젠가 취직을 하게 되면 이 남자와 살지 않고 반드시 원하는 사람과 살고야 말겠어" 라고 한다면, 그게 곧 실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 실존은 다른 말로 하면 '자의식(自意識)'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그 원래 의미는 조금은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자의식, 혹은 주체성, 또는 자아 정체성,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실존을 다르게 말하면 말이다.

◈ 성경말씀과 실존 !!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말하는 실존인데,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겠는가? 성경은 과연 이러한 실존에 대해서 옹호하겠는가? 옹호하지 않겠는가?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나타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실존적으로 나타나도록 말이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의 경우에, 이 오네시모는 신분사회에서는 노예이고 종인데, 그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그가 노예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니, 좀 풀어줘라. 나를 도와야 사람이다" 라고 부탁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는 것이다.

(몬 1: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 된 네게랴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에도 보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셨다" 라고 하는데, 즉 성령이 임하면 모두가 '하나' 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 자체가 실존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니 "기독교 집안이라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데, 반드시 성령이 임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성령이 '나'에게만 임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남이 받은 성령에 자기가 끼어들 수가 있는가? 집사님이 성령을 받았는데, 거기에 다른 누군가가 끼어 들어서 함께 천국에 갈 수가 있는가? 그건 부부사이라도 안 된다는 것이다. 티켓은 한 장인데, 두 명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고 하니, 각 사람에게 묻는데, 그게 바로 실존이고 자아 정체성이라는 말이다. 이전에는 자기 개인보다 단체가 중요하고 가정이 중요했는데, 어느 가정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런 경우는 구약에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 !!

룻의 경우에, 그 사람은 분명히 모압여인인데, 스스로 이스라엘로 귀화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즉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 되고싶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싶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게 얼마나 실존적이냐는 말이다.

(룻 1: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 실존이 성경의 핵심은 아니지만 !!

이제 여러분도 실존의 의미를 알았지 싶은데, 이 실존은 기존의 모든 관계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실존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안에 믿음이 있는지, 그것을 확인해보는 실존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실존적인 삶은, 자기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살도록 이끄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닌데,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어떤 사람이 실존적으로 생각해서, "나는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믿었다" 라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성경의 핵심내용이 맞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게 결코 핵심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해석하는 핵심내용은 말이다. 바로 그러한 것을 구분해야한다는 것이다.

◈ 그러면 도마의 실존은?

그것으로 오늘 강의를 풀어나가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도마가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고 했는가?"나는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겠다. 오직 본 것으로만 믿겠다" 라고 했을 때,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을 보고 믿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보고 믿은 것이 성경의 핵심내용이라면, 그 뒤에 사람들도 그렇게 하나님이 보여준 것을 가지고 믿는 것이 순리에 맞지 않느냐는 말이다.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예수 믿으세요" 라고 했을 때, "안 보이는데 어떻게 믿나?" 라고 하면, "그러면 보여주면 믿겠습니까?" 라고 하자, "보여주면 믿지. 도마도 그랬는데" 라고 하면, 여기서 "도마도 그랬는데" 라는 것이 과연 성경의 핵심내용이냐는 말이다.

"내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지. 그러니 나도 물위를 걸으면 베드로처럼 믿는 사람이 되겠지" 라고 한다면, 그게 맞는가? 틀리는가? 틀리는데,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그런 질문을 받게 되면, 그 자리에서 답변을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꿍꿍 앓는데, "그건 분명히 아닌데, 그때 왜 답변을 못했을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인데, 평소에는 좀 안다고 설쳐도 막상 그러한 경우를 맞이하면 즉시 답변을 하지 못하고, 나중에 "이렇게 말하면 되는데, 그때는 왜 적합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을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 근원적 의미인가? 봉사하는 의미인가?

다시 정리하면, 도마가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고 믿은 것이 맞는데, 하지만 그게 성경전체를 움직이는 핵심내용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봉사하는 의미인데, 근원적인 의미에 것에 대해서 말이다. 즉 근원적인 의미에 대해서 봉사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마의 경우에, 보고 믿었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빼야하지 않습니까? 보지 않고서 믿어야 복이 있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봉사하는 의미를 빠트리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핵심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된다는 것이다.

◈ 막장 드라마 '나비효과' !!

'이초석' 이라는 인간이 다음과 같이 사람들을 꼬드겼는데, 즉 "초대교회에는 기적이 있었는데, 오늘날 우리는 왜 기적이 없는가? 그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라고 했는데, 그것은 조용기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인간은 뭐라고 했는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말이다.

"초대교회는 병도 고치고 방언도 했는데, 왜 오늘날은 교회가 너무 이론적이고 지식적으로 흘러갔다. 정말로 생동감이 있고 살아있는 교회가 진짜 성령을 받은 교회이지, 그런 지식적인 교회는 올바르지 않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해서 그만큼 교회는 키웠다는 것이다. 무엇이 잘못인가? 성경의 근원적인 의미는 도외시하고, 그 근원에 봉사해야하는 의미를 근원의 자리에 앉혀놓고는 "이대로 하면 됩니다" 라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아주 좋게 말해서 말이다.

분명히 사도바울의 로마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만 자꾸 들쑤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이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성경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꾸미고 엮어서 교인들로 하여금 "우리만이 이런 비밀을 알았으니 우리가 성도다. 다른 교회에는 이런 비밀을 모른다" 라고, 그렇게 자긍심을 갖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는가?" 라는 것이 본인에게는 실존적이고 중요한 문제이지만,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그게 근원적인 의미가 되는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근원적인 의미가 아닌데, 그런데 자기에게 무슨 사건이 터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닌데, 막상 그것이 자기에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뭐고 간에 다 필요가 없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근원적인 의미로서 다가올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 무조건 내 딸을 살려주세요 !!

예를 들어서, 어떤 가정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으면서 화목하게 살아가는데, 그런데 갑자기 딸이 말기 암에 걸렸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근원적인 의미가 무엇으로 바뀌는가? 자기 딸을 살려주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다고,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평소에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잠복되어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역시 내가 중심이야.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어. 내가 제일 중요해" 라는 것인데, 즉 자기를 도와주면 참 좋으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자기가 잘 되면 말이다. 성경은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는데,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근원적인 의미에는 관심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 너희들은 근원적인 의미를 가질 자격도 없어 !!

지금부터는 제가 도마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었는지, 그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그것은 바로 "너희들은 근원적인 의미를 가질 자격도 없어. 이 도마와 같은 인간이 바로 너희들 같은 인간이다" 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 곧 도마라는 말이다

분명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인데, 그런데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는 고집쟁이들을, 그래도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너희들이 중심이 아니야" 라고 깨우쳐주시는 배려, 바로 그 배려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아하,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구나" 라고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이 곧 성령을 받은 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즉 주께서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에 보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왜 십자가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그것을 오늘 이 시간에 한번 설명을 해보자는 말이다. 성경에서 근원적인 의미, 중심이 되는 의미는, 즉 모든 것을 한 곳에 끌어당기는 것은 무슨 의미인고 하니, 바로 '십자가' 라는 것이다. 누가 물었을 때 답변한다고 하면, 즉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왜 십자가입니까?" 라고 묻는다고 하면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의 지혜로 접근이 가능하지만, 하지만 십자가는 지혜불능인데, 사실은 지혜불능정도도 아니고, 즉 "야, 알기는 알겠는데 안 믿어지네" 라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지혜로서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이다. 너무 밉상스럽게 말이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성령의 책망하심으로 !!

"야,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다. 자, 우리 모두 힘을 내자" 라는 것은 불교이고, "나는 아예 저것은 꼴도 보기 싫어" 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란 말이다. 우리는 솔직히 십자가는 듣는 것 보는 것 자체가 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싫어버림 바'를 당했기 때문인데 말이다.

그래서 성령이 책망하신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니가 그렇게 싫어하는 그분이 너를 구원했는데, 너는 아직도 여전히 그분을 싫어하는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항상 근원적인 의미를 가지고서 주변에서 몰리게 하는 방식으로 끌어당기는데, 그 방식이 곧 '책망' 이라는 것이다. 그런 책망을 받게 되면 우리에게는 회개가 주어지고 말이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않으면 그 근원적인 의미가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구원이 곧 근원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오늘도 성경말씀을 가지고 큐티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기뻐할까?" 라고, 그렇게 자기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서 예수님이 있고, 또한 성경말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고, 그런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진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이 살아계신다고 하는 증거를 나중에 어떻게 하는고 하니, 자기가 기분이 좋았다고 하는 것들만 끌어 모으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성령의 역사는 무엇인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책망하시는데, 그렇게 책망하심으로서 우리가 평소에 오해하고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바로 잡게 하시는 지침, 그것이 곧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는 증거라는 말이다. 우리의 오해, 즉 죄와 의와 판단에 대한 성령의 책망하심이란 것이다.

이제 교재 280페이지를 보자.

** 도마에게 주님의 본질이 덮쳤다. 그 이전까지 그는 그의 본성에서 나온 고백밖에 할 것이 없었던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실존만 나타낼 뿐이었다. "'나' 라는 인간이 이렇다는 것을 증거한다" 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도마에게는 다른 증거가 들어오게 된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이는 증거물이 도마와 결합된 것이다.

(요 6: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 6: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 도마에게 주님의 본질이 !!

여기에 상당히 어려운 말이 있는데, "도마에게 주님의 본질이 덮쳤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도마에는 다른 증거물이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때문에 피를 흘리신 그 창자국과 못자국이, 이제는 그것이 "내가 믿었다" 라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명으로 자기 앞에 들이닥친다는 말이다.

이전에는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면서 살았는데, 즉 "나는 예수님도 믿고 또 뭐도 잘합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인고 하니, 자기 때문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분의 창자국과 못자국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 나 때문에 '주님께서' 살과 피를 찢기고 흘렸습니다 !!

그러면 그게 무엇이 연결되는고 하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옛날에 자기 실존이 중심이 될 때는, 피를 컵으로 마시든지 빨대로 빨아먹든지, 아무튼 먹고 마시는 자기 자신이 주목의 대상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인가? "내가 그 피를 먹었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 때문에 주님께서 살과 피를 찢기고 흘렸습니다" 라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증거하게 될 때, 그 사람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과연 누가 근원인가?

그러므로 요한복음 6장의 이 말씀을, 자기가 근원이라고 생각하면서 해석을 하니, 전혀 해석도 되지 않고, 또 남에게 설명도 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기 피를 먹으라고 했지만, 어떻게 그 피를 마시느냐는 것이다. 소 피라면 선지국이라도 해서 먹으면 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람의 살을 어떻게 먹느냐는 것이다. 삽겹살이면 구워먹으면 되는데 말이다. 육회로 해서 먹으면 되는가? 예수님의 몸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도대체 몇 사람이나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표현이 너무나 엽기적입니까? 아무튼 전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모든 출발점을 "이 말씀대로 내가 지키겠다" 라고 하니, 그것이 결국 근원적인 의미로부터 자꾸만 이탈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새롭게 다시금 해석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 내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그렇게 구원을 받겠다는 것 자체가 틀려다는 것이다. '내'가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는 말이다. '내'가 구원을 받아야할 이유가 정말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게 성경에서 중심이 되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물론 성령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고칠 수가 없고 말이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책망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니가 생각하는 죄, 니가 생각하는 의, 니가 생각하는 판단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었다" 라는 것을 말이다.

◈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그렇게 십자가와 관련된 것을 '하나님의 의' 라고 하는데, 어제 낮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말이다. 마치 마그마가 분출이 되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진짜 죄의 진수가 나온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인데,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거기에 누구의 죄가 포함(?)되어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죄가 들어있는 상태에서, 그러니 사실은 우리가 나서서 해야되는데, 예수님께서 대표로 나서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여, 어떻게 하실 겁니까?" 라고 하니까, "나는 너를 버린다" 라고 하시니, 예수님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나' 중심의 의미를 벗어나서, 다시 '주님'에게로 !!

정작 우리가 버림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해서 버림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면, 그것도 역시 자기 구원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자기 구원을 봉사하는 의미가 아닌, 근원의 의미로 오해를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원해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하게 되면, 즉 '나' 중심의 의미를 벗어나서 주님의 의미를 되받아오는 것인데, 바로 그 기능을 성령님이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못된 짓을 하고 실컷 바람을 피우라는 말이다. 다만 받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 성령님과 노령연금 !!

저희 어머님이 이번에 경산에서 대구로 이사를 하셔서, 노령연금 때문에 동사무소에 가서 물어봤는데, 다시 신고를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말이다. 그러니 그쪽에서 하는 말이, 한번 탄 사람은 계속해서 그대로 통장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금액은 경산시에서 정한대로 대구시에서 그대로 인수를 받아서 말이다.

그러니 노령연금을 타기 위해서 어머님이 동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한 것이 아닌데, 또한 아픈 척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냥 집에서 먹고 주무시고, 또 먹고 주무시고, 그렇게 집에 계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노령연금은 통장에 계속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동사무소에 가서, 요즘은 주민센터라고 하는데, 아무튼 거기에 가서 "오늘도 아파요. 내일도 또 아플 거예요" 라고 외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다만 통장이 그것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역할을 성령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즉 "니가 설치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렇게 까부노?" 라고 말이다. 그러니 책망을 통해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미 통장에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걱정하는 것은 다 씨잘데기 없는 것들인데, 모두 다 쓸데없는 걱정들이라는 말이다.

◈ 이스라엘의 내부에 왜 균열이?

구약에서 난해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더 그런 것이 무엇인고 하니, 처음에는 이방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했는데, 처음 이스라엘이 만들어질 때 말이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핍박한다는 것이다. 즉 내부에 균열이, 즉 분열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런 이스라엘 내부의 분열을, 오늘 우리 자신의 실존에서 적용시키는 그 논리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다. 구약의 사람들도 우리와 동일한 사람들이라서, 그들도 "하나님!" 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라고 나왔던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이, 진짜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을, 그렇게 내부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핍박해버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나라를 만들었으면, 그 나라의 관계까지도 모두 다 책임을 져야하는데, 일단 '이스라엘' 이란 나라는 만들어놓고는, 거기에 내분이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일부러 서로 다른 방식을 그만 적용시켜버리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내 꼴이 말이 아니다"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실존적으로 말이다.

◈ 내 꼴이 말이 아냐 !!

하나님이 십자가를 졌는데, 그래서 "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니, "니가 구원을 받았어" 라고 하면,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그렇게 '나' 자체가 구원을 받으면 되는데, 그런데 주님이 구약을 적용시키기 때문에, '나' 자체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분열이 무엇인고 하니까, 육과 영의 싸움이 계속해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분열을 실감나게 생각나게 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운다고 하는데,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인데 말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해를 짊어지고 있는 여인이 나오고, 그야말로 '써니' 인데, 그리고 그 여인을 핍박하는 자로서 옛 뱀, 즉 용이 나온다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계 12: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계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계 12: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계 12: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계 12: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 사도바울과 개인적 갈등 !!

그러니 이런 우주적으로 나오는 대갈등이, 아까 성령이 임하면 실존적이 된다고 했는데, 그것이 자기 내부에 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즉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지만, 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사로잡는다" 라고 말이다.

(롬 7: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것을 개인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봉사의 의미에 불과하게 되는데, 근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자기 속에서 분열이 일어나서 싸우는 것이 근원적인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근원적 의미를 배웠으니 좀 싸먹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자기 속에서 그렇게 싸우는 것을 본인만 알고 있으면 되는데, 그것을 외부적으로 왜 알리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만을 증거해야하는 줄로 알고 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싸우니까, 나는 믿음이 있는 것으로 봐줘"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문제가 되는데, 어렵고 말이다. 그렇다고 피하면 안 되고 한번 부딪쳐보자는 말이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리고 나를 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싸움이, 그러한 분열이 '이스라엘' 이란 나라를 만들어도 해소가 되지 않는다고 방금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처음에는 참 좋았다는 것이다. 같이 단결해서 이방나라를 쳐부수고 말이다. 그때는 얼마나 신이 났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면 갈수록 이스라엘 내부에서 다윗과 사울이 싸우고, 또한 선지자와 왕들이 싸우고, 왜 그렇게 이스라엘 내부가 복잡하게 되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느냐는 말이다. 그런 것을 지켜주면 되는데, 그야말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은 망하고 마는데 말이다.

르호보암 왕 이후에는 나라가 나누어지는데, 북쪽 10지파가 독립해서 가버리고 마는데, 그래서 달랑 남은 것은 베냐민과 유다지파, 그 두 지파뿐이라는 것이다. 나중에는 이 두 지파도 다 깨지고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나라꼴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왜 내 꼴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시는가?"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매일 내가 거기에 휘둘리고, 왜 그렇게 죄에 시달리도록 하시는가?" 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난처하게 만드느냐는 말이다.

다시 이야기하겠는데, 아까 '봉사의 의미' 라고 했는데, 즉 '나' 라는 인간은 근원적으로 봉사를 해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이렇게 봉사한다는 것은, 자기 실력과 자기 자질에 대해서 봉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근원적인 의미가 침투해버린다는 말이다.

◈ 소위 '달란트 비유'에 경우에 !!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 그렇게 말이다.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전부가 다 개인인데, 그러니 그것을 봉사의 의미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 본문을 보면서 십자가의 그 근원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어야 하는데, 복음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나는 이렇게 충성해서 많이 남겼습니다" 라고, 그렇게 교회실적을 가지고, 즉 주변의 의미를 가지고 근원적 의미로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달란트가 어쩌고 하다가 그게 나중에는 그만 탤런트가 되고 마는데, 무슨 연예인이 될 일이 있느냐는 말이다.

◈ 주님은, 말씀으로 내부적 분열을 !!

그것을 목사가 뭐라고 하는가? "여러분, 여러분의 달란트를 교회에 바치세요. 돈도 마음도 몸도, 모두 바치세요. 그러면 다섯, 열 달란트를 남깁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를 비유로 말씀하실 때는, 이미 내부적으로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한 달란트 쪽과 다섯 달란트, 열 달란트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지금 직장에서 직원이 세 명인데, 요즘은 세 명이라도 4대보험이 다 되어야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조그마한 중소기업인데, 이런 작은 기업이라도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갈라진다는 것이다. 질적으로 갈라진다는 말이다.

◈ 나는 왜 주님의 반대편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

그렇게 갈라질 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될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그 사람은 왜 주님 쪽에 속하지 못하고, 주님이 없는 그 반대편에 속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만 지금 '나'의 실존을, 즉 '내' 속에서 진정 '나'를 분열시키는 그 나쁜 쪽의 실상을, 그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유, 나는 그냥 죄만 짓네. 죄가 뭔지 몰라도, 나는 무조건 죄만 짓네. 성경에 그렇게 되어있잖아" 라고 하지 말고, 도대체 '나'로 하여금 십자가가 아닌 다른 쪽에 눈을 돌리게 하는 그 속성, 못된 성깔, 못된 캐랙트, 그렇게 몸에 배이고 찌들린 성질머리,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인기' 라는 것이다. 남이 '나'를 알아주는 것,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

헤겔이 여기에 대해서 아주 예리하게 지적해내었는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변증법이란 말은 어려우니 빼고,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있어서, 그게 무엇인고 하니, 주인은 노예가 없으면 주인노릇을 할 수 없어서, 항상 노예를 주인처럼 섬긴다는 것이다.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인데 말이다.

남자가 늙으면 혼자 놀면 되는데, 그런데 60년 동안이나 잔소리를 했던 마누라가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남편이라는 의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 떠와. 밥 해. 텔레비 켜봐. 아이한테 전화해봐. 신문 가져와. 커텐을 열어. 차가 몇 시에 있는지 알아봐" 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아내가 일찍 죽었다고 하면, "중국집 전화번호가 몇 번이지? 참, 아내가 없지. 버스가 몇 시에 있지? 참, 아내가 없지. 보일러 기름집이 몇 번이지? 참, 아내가 없지" 라고 되는데, 그러니 아내가 없어지니 그만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인이 노예에게 시키면서도 누가 주인인고 하니, 노예가 주인이고, 주인은 노예의 종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자기가 따로 있고 타인이 따로 있다고 하면, 자기가 남이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는 순간, 그 남은 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남이 되기 때문에, 진정한 남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 - '메시야는 낯선 얼굴로' !!

그래서 '레비나스' 라는 철학자는, "너를 위한 이웃을 타인이라고 하지 말고, 진정한 이웃은 너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이웃으로 메시야가 뚜벅뚜벅 온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메시야는 낯선 얼굴로 온다는 말이다. 그렇게 낯설기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주물이고 조절하고 관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말이다.

예를 들어서, 아이가 자기 집에 친한 친척이 오면 어떻게 하는가? 평소보다 더 까불고 떠들고 하는데, 코피도 나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집에 낯선 사람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유치원에 갔다와서는 가방을 던져놓고 "엄마, 나 이번 시험에서 60점이나 맞았어" 라고 하면서 큰소리를 치고,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에 열중하려고 하는데, 그런데 집안에 어떤 낯선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그만 조용해지고 마는데, 가방도 자기 자리에 가져다놓고 옷도 다시 정리하고 말이다.

◈ '나' 라는 실존은 새롭게 구성되어야 !!

왜 그러한가? 자기에는 낯선 얼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새롭게 등장하는 저 사나이, 자기가 생전에 보지도 못한 사람이 왔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물론 그것이 주전자나 탁자처럼 존재, 즉 물건이라고 하면 그냥 놔두면 되는데 말이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실존이란 것은 그게 아니고,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에, 즉 그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나' 라는 실존은 새롭게 구성되고 정립된다는 것이다. 새롭게 정립이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돌맹이가 아니기에 말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가 흔히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평소에 자기 식구들끼리 있을 때는 집에서 옷을 벗고 있어도 되는데, 편안하게 말이다. 그런데 낯선 손님이 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벗었던 옷을 다시 입는다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손님을 포함해서 '나' 라는 것을 다시 새롭게 구성하고 정립한다는 것이다.

◈ 이 분의 너의 새엄마다 !!

'사랑과 전쟁' 이라는 TV드라마를 보면, 한때 유명했는데 말이다. 어느 날 아빠가 낯선 여자를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자식을 그 여자를, 그 아줌마를 어떻게 대하겠는가? 동네의 동장 아줌마라고 하면, "저는 공부도 잘해요" 라고 할텐데, 그게 아니고 "이 아줌마가 너의 새엄마다" 라고 하면, 그 아이는 갑자기 반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여자가 자기 엄마 자리에 흡수가 안 되니 말이다.

달리 말하면, "당신 때문에 지금까지 내가 정립해놓은 나의 자아를 수정해야하니까,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조용히 살고 있는 집안에 당신이 불쑥 들어옴으로서, 당신 때문에 내가 자아정립을 새롭게 해야하니, 그게 마음대로 잘 안 되니 혼란스럽다" 라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아줌마가 뭐라고 하는가? "애야,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거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아줌마가 지금은 좀 낯설어도, 잘 지내면 앞으로 좋아질거야. 시간이 해결해줄거야" 라고 하는데,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따라서 자아를 수정해나기에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해도, 어느 것을 꼭 집어서 "이것이 나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우리교회 권사님의 로맨스 !!

만약에, 우리 권사님도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고 하면, 말을 하고 보니 좀 이상한데(ㅋㅋ), 아무튼 새로운 사랑이 싹트게 되면 갑자기 즐거워지고, "나도 이 눈을 좀 올릴까?" 라고 하게 되는데, 옷도 화려하게 입고 말이다. 알고 보니 옆 아파트에 50년 전에 알던 남자 동창생이 이사를 왔다는 것이다. 물론 겉으로는 "이런 귀찮게 말이야. 그 놈이 왜 이사를 왔지? 옷도 마음대로 못 입고, 성가시게 말이야" 라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새로운 젊음을 맛보는 자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 동창생이 불쑥 한다는 말이, "그동안 참으로 즐거웠어. 이번에 그만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어" 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짧은 6개월 동안에 정이 들어서 총 맞은 것처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만다는 것이다. 늦게 찾아온 사랑이 마치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듯이 떠나버리고 나면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나' 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환경에 따라서 다시 구성하는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나'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졸지에 권사님 주연의 한 편의 막장 드라마가 되고 말았는데 말이다.

◈ 나는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어 !!

만약에 상대방이 복음을 모르고 진리를 모른다고 하면, 우리가 굳이 그 사람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가 아닌 줄을 알면서 한번 꼬드기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적인 본능 때문에 말이다. 자기가 누구를 만나던 간에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말이다. 즉 상대방으로부터 호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비록 상대방이 사람이 노예이고 자기가 주인이든 간에, 그러한 것에 상관이 없이, 그것은 서로 뒤바뀔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호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충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헤겔은 '상호인정'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 복음보다 진리보다 앞서는 '상호인정'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그렇게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 되는고 하니, 복음보다도 진리보다도 앞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뱀의 후손의 속성으로, 그렇게 우리에게 육적인 모습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저 사람은 복음은 모르지만 뭔가 사귀어보면 나에게 유리할 것이다. 그게 아니고 너무 학대하게 되면 나에게 손해지" 라고, 우리가 평소에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면, 그것이 바로 복음 위주가 아닌 자기 위주로 살아왔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분명히 아니라고 하면, 굳이 그 사람을 꼬드길 이유도 없고 관계할 이유가 없는데, 하등의 그런 의욕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엉터리이니 말이다. 그런 엉터리인 것을, 자기가 사랑해준다고 해서 엉터리가 아닌 것이 되는가? 아니면 그건 무조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이 아니면 말이다.

◈ 하지만, 사도들의 단호하게 '저주'를 !!

그게 바로 사도들이 앞서 걸어갔던 길인데, 사도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계속해서 강조하는데 말이다. 그만큼 사도들은 단호했고 분명했다는 것이다. 추호의 양보도 없이 말이다.

(갈 1: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단호하지 못하고 분명하지 못한가? 그것은 바로 아직도 우리에게 앙금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는데, 즉 타인이 자기를 칭찬해줄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남을 다루려고 하는, 그렇게 자기 위주로, 자기가 다루고 싶어하는 식으로 다루려고 하는, 그래서 스스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 바로 그것이란 말이다.

조금 전에 예를 든 권사님의 로맨스의 경우에, 50년 전의 동창생이 옆집에 이사를 왔는데, 물론 처음에는 반갑기도 했지만 복음을 전하니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아니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과거의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만나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물론 잠시 동안은 얼굴에 화색이 도는데, 남자든 여자든 사랑을 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엔돌핀이 온 몸에 돌면서 '오메가3' 열 통을 먹은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화색이 없으면, 그것은 계속해서 사랑을 공급받지 못해서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그런 것들은 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이고,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후손의 갈등, 이스라엘의 갈등, 나의 갈등 !!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무엇인고 하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갈등이 있는데, 그리고 이스라엘 속에도 그런 갈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없다고 하지 말고, 지금은 그게 우리 내부에 실존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그 내부에 있는 정체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남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즉 '자기 의'를 인정받으려고 하는 본성이, 뱀에게 말려들어서 우리는 계속해서 끊어 내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끊어내지 못한다기보다는 주님께서 일부러 하신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우리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도록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를 더하게 해서, 그 죄가 넘친 곳에 은혜도 같이 넘치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방식을 주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예수님 입장에서 도마에게 보여준 증거물은,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본질을 드러냄이었고, 이러한 시도는 세상 끝 날까지 성령을 통해서 계속 전달되고 실시된다.

◈ '십자가' 라는 본질에 봉사는 의미로서 !!

여기에 "십자가 사건으로 인한 자신의 본질을 드러냄이었다" 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근원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다른 의미는 틀렸다기보다는 봉사하는 의미로서, 그렇게 우리가 근원적인 의미와 봉사하는 의미를 구분해도, 어느 누구를 만나도 우리가 복음으로 다 답변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것은 맞는데,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물위를 걸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다" 라고 말이다. 비록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지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그러니 그게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위를 걷다가도 곧바로 바다에 빠지고 말이다.

◈ 근원적인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병 들림과 병 나음 !!

어떤 분들은 "목사님, 요즘도 기도를 하면 병을 낫습니까?" 라고 하는데, 기도를 해서 병이 낫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기도를 하게 하셔서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말이다. 완벽한 기도는 없기에 말이다. 그러니 그것은 근원적인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병 들림과 병 나음이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십자가는 그만 날아가고 자기가 병에서 나았다고, 그렇게 자기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악마의 본성과도 같은 것인데, 조금 전에 이야기한대로 하면, 하나님마저도 자기의 노예로 삼으려고 하는 심보와 동일하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그렇다면 이 십자가 사건은, 실제로 예수님의 손과 창자국을 만지지도 보지도 못한 자에게 여전히 복이 되는 방식으로 도입됨을 의미한다. 그것은 도마의 경우에서처럼, 인간이라는 실존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존과의 만남이 가능한 유일한 접촉점으로서 십자가 사건이 적용되려면, 십자가 사건은 더 이상 물리적으고 물질적인 '보이는 방식'은 아닌 다른 형태로, 도마가 고백하는 그런 고백이 나오게 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 보면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보이는 방식은 아닌 다른 형태로 고백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그렇다면 물질적인 방식은 없애야 합니까?" 라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러면 예수를 믿으면 굶어야 하는가? 탄수화물과 지방과 단백질을 흡수하지 말아야 하는가?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었으면, 이제는 그런 것들이 과연 필요가 없느냐는 것이다.

◈ 십자가를 물리적으로 이해하는 방식 - '그것은 아니거든' !!

그러면 "십자가를 물리적이고 물질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라는 것을 설명해드리겠는데, 설명을 들으면 쉽게 이해는 되지만, 막상 설명을 하려고 하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물리적이고 물질적 방식을 주님이 들이미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의 눈이 물리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스톱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같이 아울러서 노출을 시키면서, "그것은 아니거든!"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물고기의 입을 벌리니 동전이 나왔다고 하면, 그건 분명히 물리적인데, 물고기는 물렁물렁하고 동전은 딱딱하고 말이다. 그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 분명히 보이고 만져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그러니 "십자가를 믿는데, 그게 왜 필요하지?" 라고 하지 말고, 그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니거든!" 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 성도는, 조용히 살아갈 수가 없어 !!

이제 더 어려운 것을 해보면, "우리가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조용히 살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데, 성도는 조용히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 왜냐하면 성도 자체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기능을 해주어야 하니 말이다.

자기는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데, 그런데 그만 하는 자기 사업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그 다음부터는 복음이고 뭐고 간에 돈을 대출하기에 바빠서, 이러 저리 은행을 쫓아다닌다고 정신이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뇌물까지 써서 대출을 받아서 돌아오는 급한 어음을 막았는데, 그러니 그때는 십자가고 뭐고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가 그런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서, "내 인생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 라는 것과, "내가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회사가 부도가 나기 이전에 교회에서 "여러분, 회사에 어려움이 있고 설령 부도가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론 그런 가능성이 거의 없지만 말이다(ㅋㅋ). 그때는 마치 자기가 그것을 다 아는 것처럼 들리는데, 왜냐하면 그때는 부도가 나지 않았으니 그렇게 어려운 일도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나는 회사가 부도날까봐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지 않고 회사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참 한심스러워" 라고 하는데, 분명히 자기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왔는데, 그런데 막상 자기에게 그런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마도 은행에 텐트를 치지 싶은데 말이다.

◈ 아하, 내가 십자가를 훼방하는 인간이구나 !!

그러니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없이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그것은 아니야!" 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남에게 쓴 소리를 하고 믿음이 없다고 했지만, 자기가 막상 그런 일에 부딪치고 보니, 십자가를 훼방하는 인간이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엄청나게 크게 느낀다는 말이다. 그러한 느낌이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구원을 받는 자인데, 그러니 얼마나 고마우냐는 것이다.

그런 느낌이 없는 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십자가 말고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하는가 보다" 라고 하는데, 그런 오해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를 들어도 마치 자기가 다 아는 것처럼 여기는데,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집안에 어려움이 계속해서 생기면 어떻게 되는가?

"아하, 나는 십자가만 알면 된다고 여겼는데, 그게 틀렸구나. 다른 방식도 있구나. 행함으로 열매도 맺어야, 그렇게 두 개가 합쳐져야 온전한 하나님의 구원방식이고, 그것은 수 천년 동안 신학의 천재들이 연구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게 진리구나"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 개혁주의를 비판해도, 역시 개혁주의 !!

그것을 두고 4글자로 '개혁주의' 라고 하는데, 전통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는 말이다. 개혁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개혁주의가 아닌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으로 구원을 받는다" 라는 것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제 아무리 개혁주의를 반대해도 역시 개혁주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방식을 이미 버린 이상은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버려진 그 빈칸을 어떤 다른 것으로 메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인간의 행함을 동원하지 아니고는 전혀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그래도 교회를 이상적으로 해야지. 사도바울이 교회론을 쓴 이유가 다 있는데, 그건 십자가도 있지만 교회도 제대로 하라고 한 것이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꾸만 그 빈칸에 무엇인가를 꾸역꾸역 집어넣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계속 반복이 되는데, 근원적인 의미와 봉사의 의미를 다같이 섞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이것도 중요하지만, 저것도 중요하다" 라고 말이다. 한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영양갱 봉투와 MP3 !!

제가 이렇게 영양갱 봉투를 들고 다니는 이유가 다 있는데, 어떤 사람은 영양갱을 좀 달라고 하는데, 그냥 빈 봉투라는 말이다. 왜 들고 다니는고 하니, MP3를 그냥 옷안에 넣으면 눌려져서 녹음에 가끔 문제가 있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영양갱을 하나 먹고 나서 넣으니까 딱 들어맞다는 것이다(ㅋㅋ).

그러니 "나는 어떻게 구원을 받지? 개혁주의로 받을까? 십자가로 구원을 받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게 전혀 성경의 근원적인 의미가 아닌데, 우리는 실존적으로 들어가서 십자가 앞에서 "아하, 나는 죄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즉 십자가를 위해서 자기의 죄인 됨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따로 따로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균형이란 없어 !!

그러니 한 쪽에 신경을 쓰면 다른 쪽에 소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 "둘 다 해야 돼. 그것이 균형이 잡힌 것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균형을 잡는다고 하지 말고 솔직히 모른다고 해야지 말이다. "믿음과 행함을 균형을 잡아야지, 한 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죄송하게도 인간에게는 균형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반드시 미워하게 되어있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두 개를 사랑할 수는 없는데, 하나를 사랑하면 다른 하나는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한다. 덜 사랑한다" 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 미워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 이만희를 아십니까?

아닌 것은 정말로 아닌데,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것이다. 새언약인데, 그러니 이제는 제사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제물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메시야도 없다는 것이다. 이만희는 자기가 보혜사라고 하는데, 그러면 사도바울은 무엇인가? 사도바울도 성령을 받았는데,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보혜사가 아니냐는 말이다. 자기의 이론대로 하면 말이다.

그러면 베드로가 어떻게 되는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이만희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이만희에 의하면 "예수도 믿어야 하지만, 보혜사인 나의 말도 들어야 한다" 라고 하니 말이다. 사도바울은 이만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는데, 그러니 이만희의 말도 모르니 지옥에 가야하는가?

다음에 이만희의 신천지에 가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할 것인데, 물론 이만희 쪽에서는 "그건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먼저 있었다" 라고 할텐데,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태어나서 죽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이다.

이만희의 주장대로 하자면, 사도바울이 구원을 받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사도바울은 죽기 이전에 이미 이만희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알았듯이, 사도바울도 이만희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56절이 "사도바울은 이만희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것이 웃을 일이 아닌데, 다른 이름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도바울이 증거했다고 해서 사도바울이 보혜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혜사는 성령인데, 즉 예수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단들이 설쳐줘야, 또 우리에게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새롭게 되는 의미는 있겠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를 보자.

** 십자가 사건은 더 이상 물리적으고 물질적인 '보이는 방식'은 아닌 다른 형태로, 도마가 고백하는 그런 고백이 나오게 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 방식이 무엇일까?

◈ 그 방식이 무엇일까?

어제 그런 설교를 했는데, 즉 "육은 육인데 어떻게 해서 육이 영으로 되는가? 그 방식이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요한복음에 보면, 분명히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육이 영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1장의 예를 들었는데 말이다.

거기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나온다는 것이다. 설교시간에는 자세히 하지 못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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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