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대구강의 6] - [피 92] -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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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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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4,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277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임금이 혼인잔치를 마련했지만, 초대받은 자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참석을 거부했다.
여기에 임금님의 혼인잔치가 나오는데, 일반 가정의 혼인잔치와 임금님의 혼인잔치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런 뉘앙스가 들어있다는 말이다. 임금, 즉 왕인데, 이 왕에 대해서 근대에 들어와서 따지지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에는 그렇지가 않지만 말이다. 그게 뭔고 하니, 사람들이 왕이라고 해서 왕인지, 아니면 자기가 왕이라고 우겨서 왕인지 말이다.
◈ 카리스마, 그것이 궁금하다 !!
그런 문제가 있는데, 즉 사람들이 지도자라고 해서 지도자인지, 아니면 자기가 지도자이라고 우겨서 지도자인지 말이다. 자기가 지도자라고 해서 나서는 것을 두고 '카리스마' 라고 하는데, 이 카리스마는 사사기나 사무엘상 등에 보면, 하나님의 신을 받아서 일반 백성들이 가지지 못한 특별하고도 특출한 능력을 발휘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을 영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즉 '영적 사람'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한 능력이라는 표현은 좀 잘못이고, 오히려 특별한 자리, 혹은 특별한 위치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다.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특별한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소유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지정한 자리에 갔더니만, 그게 남들이 보기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모세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보는데, 사실 모세의 경우에 무슨 특별한 재주가 있는가? 사람들은 모세가 재주를 부린다고 여기는데,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리키니 갈라지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 모세에게 물어보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
그것을 히브리서 3장에 보면,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모세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 사환이지, 전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일을 시키는데, 그 시키는 일이 질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것들과는 달라서,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세가 지도자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 그 목적이 다르면, 질적으로 달라 !!
이것을 잠시 살펴보면, 여기에 이렇게 두 사람이 있는데, 즉 A와 B가 이렇게 있는데, 전혀 일반 사람들과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행동하는 것과 B라는 사람이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이 똑같으니 그것도 같다고 생각하는데, 한 사람은 두 개의 팔을 가지고, 다른 사람은 네 개의 팔로 움직이고 하지는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것이, 그 목적이 다르면 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목적이 다르면 말이다. 똑같이 밥을 먹어도,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먹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똑같이 밥을 먹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차이가 난다는 말이다.
◈ 기도의 방향성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는 차이가 없지만, 기도의 방향성을 가지고 시비를 거신다는 것이다. 즉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와 너희들이 하는 기도가 달라야 한다" 라고, 그 방향성을 말씀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고, 무엇을 위해서 달라고 하는지, 그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방인들의 방향성은 무엇인가? 그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라는 것에 그 관심을 두고 있지만, "너희들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구하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먼저 그 나라의 의와 관련된 것을 하라는 말이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지만, 모세의 카리스마의 경우에, 즉 모세의 영적 자리의 경우에는, 모세는 이미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자리를 받고 내려오니, 모세는 특별한 능력이 없지만, 모세에게서 뿜어 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 지상에서는 인간들이 행함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을 가진 자가 곧 '선지자' !!
그러면 여기서 결론은 매우 간단한데,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을 가진 자가 선지자다" 라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을 본인이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선물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에베소서 2장에서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선물로 준 믿음과,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행해서 자기를 천국에 보내겠다고 하면서 열심을 끄집어내는 그 모든 노력과는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것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그것부터 먼저 설명해드리겠는데, 여기 교재에 나오는 '비유' 라는 것은 난해하기가 이를 대 없기 때문에, 먼저 이런 것부터 해야한다는 것이다. 지난 설교시간에도 말했지만, 구약의 언약은 산 사람과 언약을 맺는데, 살아있는 사람과 말이다. 지금은 설교시간이 아닌 공부하는 시간이니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는 것이다. 먼저 창세기 31장을 봅시다.
(창 31:43) 라반이 야곱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딸들은 내 딸이요 자식들은 내 자식이요 양떼는 나의 양떼요 네가 보는 것은 다 내 것이라 내가 오늘날 내 딸들과 그 낳은 자식들에게 어찌할수 있으랴
(창 31:44) 이제 오라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그것으로 너와 나 사이에 증거를 삼을 것이니라
(창 31: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 누구와 누구와의 언약인가?
여기에 44절에 "너와 내가 언약을 세워" 라고 하는데, 즉 언약이 나오는데, 누구와 누구의 언약인가? 외삼촌 라반과 야곱의, 즉 사람과 사람의 언약이란 것이다. 이처럼 인간 대 인간이 세운 언약방식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사용하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을, 마치 인간 대 인간의 언약처럼 보이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이러한데, 즉 마치 사람들이 능히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그러한 식으로 다가와서는, 실제로는 인간의 해석을 거부하는데, 인간의 접근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창세기 3장에서 "너희들은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그 금지 때문인데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금지의 이쪽 편에 있는 생명나무도 설명해야하고, 또한 그 반대편에 있는 선악과의 상황도 설명해야하는데, 즉 금지 이전의 상황과 금지 이후의 상황을, 즉 인간이 금지된 것을 타넘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게 곧 금지, 즉 "안 돼! 할 수 없어! 오지마!" 라는 것이란 말이다.
◈ 인간은 항상 금지의 테두리 안에 !!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할 때는 무엇이 금지되었는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금지되어있는데,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무엇이 금되어있는고 하니,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을 수 없어!" 라고, 역시 그것도 금지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항상 금지의 테두리 안에서만 놀게 되어있는데, 그런데 인간은 무엇만 소망하는가? "나는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어제 오전설교가 그것인데 말이다. 요즘 봄철이 되어서 설교하기가 힘든 것이 무엇인고 하니, 뭔가 좀 해보려고 하면 전부가 힘이 빠져있으니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담배 케이스를 보면 "담배는 몸에 해롭습니다!" 라는 문구가 들어있는데, 이게 얼마나 앞뒤가 안 맞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로 몸에 해롭다고 하면 그런 소리를 하지 말고, 아예 담배회사의 문을 닫게 하면 되는데, 그게 진정성이 있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라면을 좀 끓여주세요" 라고 하면, 엄마는 보통 "야야, 라면은 몸에 안 좋아. 수프에 소금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 라고 하는데, 그러면 엄마가 라면을 끓여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래야 앞뒤가 맞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면을 끓여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먹으라는 소리인지 보고도 참으라는 소리인지 헛갈린다는 말이다.
◈ 인간은 하나의 미끼상품 !!
그런데 하나님은 보고도 참으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선악과를 심어놓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당연히 심어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어떠한가? 선악과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약을 올려놓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의 미끼상품인데, 인간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잡기 위해서 말이다. 누구를 잡는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옛 뱀, 즉 악마를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야말로 바보인데, 주님이 자기와 약속을 맺는 줄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언약을 구분할 수 없어 !!
여기 창세기 32장에 보면 라반과 야곱이 언약을 맺는데, 이렇게 인간 대 인간으로 맺은 언약은 인간들이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지만, 평소에 모든 것이 그런 계약으로 이루어지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계약서 속에 슬그머니 하나님의 계약서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는 "하나님의 계약서도 우리의 계약서와 똑같겠지" 라고, 그런 오해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계약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어기기 전까지만 유지하고, 그만 어기게 되면 깨어지는 계약이라는 것이다. 그렇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계약, 즉 언약은 "인간의 행함으로 깰 수 있다. 혹은 없다" 라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들이 아무리 위반해도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있는 언약인데, 그것을 인간의 언약 속에 그만 집어넣어 버리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과 인간의 언약을 구분할 수 없다는 말이다.
◈ 나는 혼인잔치에 바빠서 못 갑니다 !!
아까 보았던 그 임금님의 혼인자치의 경우에, 그것을 사람들은 그게 자기들의 친척 혼인잔치와 같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석여부를 그런 기준을 가지고 결정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오는 말이 "나는 바빠서 못 갑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빠서 못 가서 손님이 없으면 혼인잔치가 빛이 나지 않는데, 잔치가 영 썰렁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도 인간들이 그렇게 아니라고 하면 깨지는가? 과연 그러한가?
임금님이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바빠서 못 갑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임금님이 "사람들이 바쁜지 안 바쁜지 미리 연락해서 알아보고 날짜를 잡을 건데, 내가 너무 경솔했어. 손님들도 없고, 임금 아들의 결혼식이 이게 뭐야?" 라고 하는가? 그렇게 해서 결혼식이 실패로 끝나고 마느냐는 것이다. 그게 과연 임금님의 결혼식이냐는 말이다.
이것을 어렵게 이야기해보면, 하나님이 혼인잔치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즉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성사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이용해서, "너희들이 아무리 비협조적으로 나온다고 해도, 나는 너희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달성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평소에 얼마나 나와는 무관하게, 오히려 나에게 대적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을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대들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 성령의 인치심이 오면, 그 '틈' 사이에서 !!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 라고 하니, 제자들이 뭐라고 하는가? "안 믿을 랍니다. 우리는 삐쳤습니다" 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안 믿겠다고 하는데 무슨 구원이 되겠는가?" 라고 겁니다. 그때 주님은 이미 구원에 대한 근거를 다 마련하시고 찾아와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령을 부어주니, 그만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령의 인치심' 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금지'가 오게 되면,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인치심'이 오게 되면, 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은, 이쪽 상황과 저쪽 상황을 다 보여주는, 그러한 틈 속에서 비로소 금지, 성령, 십자가 지심의 취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틈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쪽 상황과 저쪽 상황을 다 알아야 하는데, 이쪽 상황은 의인의 상황이고, 저쪽 상황은 죄인의 상황이라고 한다면, 즉 의인이 무엇이며 죄인이 무엇인지를 다 이야기해주어야만, 무엇이 진짜 주님께서 알려주고자 하는, 그 주님의 진짜 언약의 취지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가? "나는 예수님을 믿었으니 더 이상 죄인은 아닌데, 그러니 그건 그만 잊어버리자"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각되는가? 그 틈 사이에 있는 주님의 취지가 부각되는 것이 아니라, "나도 구원을 받았다"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게 사이비 기독교이고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즉 가짜라는 말이다.
◈ 야, 언약 덕분에 내가 살았다 !!
주님께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언약' 인데, 그런데 인간은 어떻게 하는가? 그 언약을 덥석 물어서 "야, 언약 덕분에 내가 살았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에 대한 증인으로서 살고자 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증인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어떤 성경말씀을 보아도 마찬가지인데, 성경말씀을 그냥 두면 되는데, 꼭 해석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이 이것을 가지사" 라고 나오면, 사람들은 이것에다가 컵을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컵을 가지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내가 수박이라고? 웃기고 있네 !!
우리가 그동안 공부를 몇 년을 했기 때문에 이제 어려운 것도 좀 소화를 할 수 있지 싶은데 말이다. "이것은 수박이다" 라는 것과, "수박은 이것이다" 라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같아 보이죠? 물론 같을 경우도 있는데, 자기가 수박을 볼 때는 둘 다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둘 다 자기 앞에 놓여있는 동일한 수박을 보고서 하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수박의 입장에서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그렇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수박을 예로 드니까 저금 어려운데 말이다.
만약 북한 김정은의 경우에, 우리가 "김정은은 공산주의자다" 라고 하면, 김정은이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은 실제로 자기들은 '인민사회주의 공화국' 이라고 한단 말이다. 그래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에이, 내가 보니 공산주의인데 뭘?"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즉 "내가 공산주의라고 하면 공산주의야. 무슨 말이 많아?"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 김정은은 "니만 살았나? 나도 살았다" 라고 나오겠지만 말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수박이나 컵이나 난로처럼 죽은 것이라고 한다면, "저 분은 하나님이다" 라는 것이 말이 되는데, 왜냐하면 의미를 자기 쪽에 두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살아있고 하나님도 살아있다고 한다면, 자기가 살아있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방향성과,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있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향성이 같겠는가? 다르겠는가?
◈ 방향성이 다르기에 '십자가' 사건이 !!
물론 다르다는 것이다. 그렇게 다르기 때문에, 그 증거가 곧 십자가라는 말이다. 만약에 방향성이 같으면 십자가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같다고 하면 메시야를 모두 다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진짜 메시야임을 알았다고 하면 예수님을 왜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인데 말이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없다" 라고 하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거들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쪽에서는 "그러면 당신은 좀 죽어줘야겠다" 라고 해서 예수님을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은 이쪽에서 나온 방향성과 저쪽에서 나온 방향성이 달라서 생긴 사건이란 말이다.
"이것이 수박이다" 라는 것은 우리의 입장인데, 그러나 수박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 "너거들은 나를 수박이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수박이 아닌 참외다" 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반박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수박이라고 하면 수박이야" 라고 하면, 그것은 너무 일방적인 통보라는 것이다. "나는 수박이 아니고 참외란 말이야" 라고 나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캥거루 이야기를 했는데, 정작 캥거루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선장과 원주민 사이에서만 말이 주고받고 한다는 것이다. 즉 "저게 무엇이지?" 라고 했을 때, "나도 몰라" 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도 몰라" 라는 것이 캥거루라는 말이다. 캥거루에게는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캥거루에게는 물어봐도 "끼이이끼끽" 이라고 밖에 못하지만 말이다.
◈ 성경해석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만 !!
그렇게 "저건 캥거루다" 라고 의미를 둘 때만 캥거루라고 하는데, 컵이나 수박도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떠한가?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은 누구인가? 우리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데, 그래서 "누구든지 그 보내신 자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라는 것이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러니 인간이 그런 영생도 없으면서, 영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지옥에 가는 주제에 감히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어떻고, 성경해석을 어떻게 하고, 그 따위 소리를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성경해석은 오직 성령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 칸트 - '인간은 확정된 공간과 확정된 시간 속에서' !!
만약에 우리 인간에게 성경해석을 하라고 하면, 우리는 성경해석을 역사적 배경으로 모두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역사와 공간의 범주에서 구성하기 때문인데, 그게 칸트의 이야기인데 말이다. 칸트는 주장하기를 "인간은 확정된 공간과 확정된 시간 속에서 이 세상을 본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확정된 시간이 무엇인가?
제가 여러 번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줄줄이 나가겠는데 말이다. 인간의 시간의식이라는 것은, 이렇게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다면, 인간은 과거에 대한 기억이 미래를 내다본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칸트의 시간관인데, 그런데 세례요한 뭐라고 했는가?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다" 라고 했는데,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한 소리인가?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의식은 없다는 것이다.
(요 1:30)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 말씀대로 응하게 하려함이라 !!
그리고 성령을 받고 난 뒤에 사도들이 외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말씀대로 응하게 하려함이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비추어볼 때,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 시대의 경험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은 앞으로 올 일을 이미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아브라함은 누구를 보기를 원했다고 하는가?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자기의 경험 속에 있는 것인가? 전혀 없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 경험 속에 없는 분이라는 말이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그러니 칸트가 말한 인간, 즉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올라간다는 것이 성경해석에 적용이 되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그런 해석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껏 자기 머리 속의 기억밖에는 안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물론 거기에 대해서 "이게 나의 한계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인간은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마귀가 들렸다고 하면서 말이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장세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들이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서 동원한 그 시간과 공간의 범주를 봐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죄로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 말이다.
같은 성경해석을 두고서, 거기서 인간의 해석을 들추어내는데, 그건 선악과 때문인데 말이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성령께서 해석하게 되면, 성령이 해석한 것과 인간이 해석한 것이 경쟁이 되는데, 그러면 서로 일치되는 것이 아니고 충돌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충돌될 때, 성령이 해석하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그 어떤 해석을 내놓던 간에 그 해석은 죄에서 나온 것이고, 그 죄는 예수님의 죽음을 유발시킨, 그 배후에 있는 악한 영에 의해서 해석된 것이라고, 그렇게 성령께서는 같은 성경구절을 가지고 우리에게 고발하시고 책망을 하신다는 것이다.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 성령이 임하면, 어떤 성경구절을 봐도 !!
그렇다면 모든 성경해석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십자가만 나오면서 동시에 "우리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누구만 의인이라고 한다는 말인가? "예수님만 의인입니다" 라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임하게 되면 성경해석은, 그 어떤 성경구절을 보더라도, 창세기 1장이든 마귀가 한 말이든 간에 말이다. 그 어떤 성경구절을 봐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면서, 우리의 죄성과 그것을 용서하시는 주님의 의로움, 그것만 도출될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느 세월에 성경을 다 알아서 구원을 받겠는가? 성경을 90프로를 알면 구원을 받는가? 그건 100프로가 아닌데 말이다. 도대체 성경공부를 몇 년을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완벽하게 말이다. 하지만 그 어떤 성경말씀을 보더라도 동일한 결론이 도출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설령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다가 지금 당장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그 어떤 말씀도, 어떤 율법도 모두가 한 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서로 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같은 기가, 같은 정신이 흐르고 있다는 말이다.
◈ 계약은 살아있는 자들끼리 !!
구약의 언약은 살아있는 인간들끼리 맺은 언약을 주님이 그 형식을 그대로 사용하셔서 오게 되는데, 그래서 인간들은 그 언약을 지킬 때, 인간 대 인간의 언약은 서로 살아있기 때문에, 죽어있으면 언약이 깨어지니 말이다. 죽은 자는 유언밖에 안 되는데, 그러니 언약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 계속해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조건하에서만 언약이 유효하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집을 계약했다고 하면, 상대방에게 "우리 아버지와 계약을 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계약은 무효입니다" 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죽었으니 말이다. 계약서에 사인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자식이라도 그것을 물려받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죽으면 모두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옛날 구약시대의 계약 경우에는, 그 당사자들이 다 죽었다는 것이다. 다윗도 죽었고 말이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다윗은 죽어서 지금도 무덤에 있다고 했다는 말이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말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지, 아브라함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죽었는데,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지금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죽지 않고 사는 방법은 없는데,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이삭이나 요셉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선배 선지자들이 그렇게 죽고, 그리고 지금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성경말씀을 보면서, 그것을 교과서라고 여기지만, 자기 자신을 교과서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을 보면서 그런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8장에 보면 그의 자식에 관한 것이 나오는데, 그것을 보면서 "사무엘은 다 좋은데, 자식교육을 잘못 시켰어. 그게 뭐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사무엘은 훌륭한데 두 자식은 개판이라는 말이다.
(삼상 8: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삼상 8: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삼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 사무엘은 자식교육에 문제가 있네 ??
우리는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해야하는가? 3절에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라고 하니, 당연히 "사무엘은 자식교육에 문제가 있네" 라는 나오는데, 그게 아니라, 이 본문은 "니 자식은 어떠한가?" 라고 묻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본문을 없애면 안 되고, 즉 "이것은 사무엘의 이야기이니 지워버리고"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분이, 지금 우리 안에서 이 본문을 가지고 우리를 사무엘로 여겨 책망하신다는 것이다. "니 자식은?" 라고 말이다.
우리가 보통 엘리 제사장의 경우에, 그가 자식 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하는데, 그런데 엘리는 저주를 받고 사무엘은 왜 저주를 받지 않는가? 둘 다 자식을 잘못 가르쳤는데 말이다. 저주의 근거가 과연 성경에 있기는 있느냐는 말이다. 만약에 인위적인 계약이라고 한다면 그 근거를 대야하는데, 하지만 하나님의 계약은 인위적인 계약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과 계약을 하면서 그 살아있는 사람을 죽여버리고, 마지막 새언약에서는 더 이상 산 사람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계약은, 오직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만이 !!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하는데, 즉 예수님이 죽으실 때 모든 인간은 다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약은 죽은 사람과는 안 되기 때문에, 산 사람 대 산 사람이 해야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을 시켰다는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말해서, "너 말고 혹시 산 사람이 있나?" 라고 하면, "아뇨, 전혀 없습니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오직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분만 계약을 맺을 수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의 관건은 누구에게 달려있다는 말인가? 방금 권사님이 예수님이라고 했는데, 그런 답변이 지금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올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눈을 가지고 입을 가지고 살고 있어도, 선물로 받은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곧 교회인데, 그러니 한번 교회라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해병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복음이 주어져야 하는데, 봄이라고 이렇게 가물가물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다(ㅋㅋ). 봄철에 예민한 분들이 참으로 많은데, 여름이 되면 더워도 에어컨을 터니 괜찮은데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
그러니 조금 정신을 집중하시고, 다시 정리하면, 어떤 성경구절을 놓고 우리가 해석한다고 해서 옳은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해석이 성령님이 하시는 해석과 경쟁을 벌이는데, 성령님이 해석할 때의 그 기준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인데, 그것을 근거로 해서 우리의 성경해석과 경쟁을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경해석은 우리가 납득이 되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끄집어내어서 하는데, 그 시간성을 두고 '역사'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역사적 해석인데, 개혁주의의 성경해석이 곧 역사적 해석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이 이미 해왔던 해석이라는 것이다.
또 끄집어내는 것이 문법적 해석인데, 이것도 따지고 보면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법이라는 것은 언어의 규칙을 말하는 것인데, 언어의 규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중첩되어서 마련된 것이기에 말이다.
◈ 역사적 해석은, 인간의 의가 전혀 사라지지 않아 !!
그러면 역사적 해석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과거에 그랬으니 지금은 그것을 반성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되고, 지금 우리가 제대로 하면, 미래는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보너스가 주어질 것이다" 라고 하는 해석인데, 그러니 여기서는 자기 의가 사라질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의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여기에 대해서 "아니, 지금 한번 잘해보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나쁜 것인가?" 라고 반발을 하는데, 즉 "잘 믿어보겠다고 성경해석을 하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나쁜 것인가?" 라고 나온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을 받으라고 설교를 하는데, 그 설교도 죄라는 말인가?"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에 의한 해석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죽으셨던 그분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성경을 해석을 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그 어떤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던, 그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만 계속해서 우리에게 전달될 뿐이라는 것이다.
◈ 여보, 식기세척기 전원을 확인해주세요 !!
지금 식기세척기 전원이 꺼져있는지 모르겠는데, 꺼져 있습니끼? 어제 제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이 내일 교회에 가면 식기세척기 전원을 좀 확인해주세요" 라고 했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방금 생각이 났는데, 큰 죄를 지을 뻔했다는 것이다(ㅋㅋ). 그렇지요?
이렇게 인간은 "내가 식기세척기 전원을 꺼야지" 라고 생각하는 무엇을 잊어버리는고 하니, 비록 그게 짧은 순간이지만, 지금도 물이 없어서 쩔쩔매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 대한 동정심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순간만큼은, 그것도 역시나 죄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은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비가 온다고 하면, 우산 장사를 하는 아들이 있다고 하면, 그 부모는 "야, 좋아. 우리 아들이 장사가 잘 되겠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식당을 하는 딸을 그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점심시간에 비가 줄줄 내리면 식당의 손님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그러면 그 부모는 또 죄를 지은 것인가? 딸의 사정도 몰라주고 말이다.
◈ 성화된 사람이 정말 보고싶어요 !!
이렇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도대체 무슨 수로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디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인가? 하나를 하게 되면 또 다른 하나를 놓치는 것이 인간인데 말이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완벽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정말로 성화된 사람을 한번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이든 시어머니를 집에서 잘 봉양하면 그게 완벽한 것인가? 오히려 짜증이 중첩이 되고 또 중첩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아가 주인공이 아니라 자기 몸이 주인공인데,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몸이 피곤하면 짜증이 제대로 난다는 것이다. "이 정도에서 짜증을 한번 부려봐?" 라고 해서 짜증을 부리는 인간은 없고, 자기는 짜증을 내지 않고 항상 밝은 미소로서 "오늘도 즐겁게!" 라고 하고 싶은데, 그건 자기 생각이고, 우리 인간의 육체는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육이고, 죽을 몸이라는 것이다.
◈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
사도바울은 자기를 쓰레기로 보았는데, 그렇게 자기가 자기 자신을 쓰레기로 본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이 자기를 그렇게 쓰레기로 본 것은 자기 뜻이 아니고 성령의 뜻이라는 말이다. 자기에 대한 누구의 해석인가? 자기의 해석이 아니라 성령님의 해석이라는 것이다. 즉 "나는 만물의 찌끼와 같다" 라고 말이다.
(고전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고전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그런 해석을 가지고 고린도교회에 이야기를 하니,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을 좋아할 리가 있느냐는 말이다. "니 혼자 쓰레기 하세요" 라고 나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참 훌륭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라고 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말이다.
◈ 십자가를 관찰하면 안 돼 !!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령께서 해석하는 그 십자가가 같이 있어주워야만 성경말씀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우리가 십자가를 관찰하는, 즉 멀리서 쳐다보고 구경하는 입장에서 있다고 하면, 전혀 성경해석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만약에 십자가 안에서 성경해석을 한다고 하면, 자기는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끄집어낼 그 어떤 근거도 우리에는 없다는 말이다. 자식이 죽어도 자기 자식이 죽은 것이 아니고, 몸이 아파도 자기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몸이기에 말이다.
사실은 그러한데, 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우리는 어떠한가? 매일같이 우리는 육에 시달리는데, 그래서 "왜 내가 이렇게 아픕니까? 내 것을 왜 가지고 갑니까?" 라고 하는 식으로 짜증을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요? 정말로 매일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까?
다시 교재 277페이지로 돌아오면, 아무튼 돌아오면 걱정인데 아까 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니 말이다. 그래도 걱정은 일단 붙들어매고, 여기 임금님의 혼인잔치 비유에 있어서, 이건 사사로운 혼인잔치가 아니고 임금님이 준비한 혼인잔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임금님에게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아는 사람의 혼인잔치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혼인잔치라고 일방적으로 해석을 해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참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 교재를 한번 살펴보자.
** 그들의 불참석 이유를 들어보니, 이런 것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밭에서 농사를 지을 일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벌여놓은 사업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본인 결혼식이 있었고, 어떤 사람은 소를 새로 사서 검사하는 일이 있었다. 농사를 짓는 것, 사업체를 운영하는 것, 본인이 장가가는 것, 소를 구입하는 것, 그런 일들이 본인들에게는 물론 진리적 가치가 듬뿍 담겨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 임금님의 너무나 일방적인 결혼식 초대장 !!
여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서 본인이 결혼하는 것도 있는데, 그러니 결혼식이 그만 겹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임금님이 그래도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하면, 미리 전화를 걸든지 해서 "혹시, 내 아들의 결혼식에 올 수 있어요?" 라고 최소한의 의사타진이라도 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임금님, 하필이면 그 날이 저의 결혼식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임금님은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아하, 그렇군요. 하필이면 날짜가 겹쳤네요. 정말로 참석할 수가 없겠네요. 결혼식을 잘 치러세요. 다음에 봅시다" 라고 해야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해석인데 말이다.
그런데 임금님은 전혀 상대방의 의사를 물을 생각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결혼식을 강행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혼식이 전혀 상대방의 사정을 봐준다는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보고 바로 그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우리의 소박한 계획이 있는데, 그것은 일말의 고려할 가치도 전혀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짓밟아버리는, 그 축제의 장이 곧 임금님의 혼인자치라는 말이다. 참으로 잔인한데 말이다. 최소한의 예의도 없고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슨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화목'에 대해서 잠시 설교를 !!
어제 '화목'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큰 주제인데,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다 못했는데 말이다. 그냥 간단하게 하면서 넘어갔는데, 그런 가운데 끝 부분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요한일서 4장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화목제물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하면서 끝을 맺었는데, 그 중간에 이야기할 게 많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지금 해보면, 어제 낮 시간에 화목제물을 먼저 이야기하고, 우리가 그런 화목제물 안에 들어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에게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앞에 있어야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사랑인데, 그게 요한일서 4장 10절에 나오는데 말이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우리 사이좋게 같이 살자 !!
어제 설교를 잠시 요약해보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화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화목 안에 구원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즉 화목을 위해서 구원이 시작이 된다는 것이다. 화목은 "우리 사이좋게 같이 살자" 라는 의미인데,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목적인 서로 같이 살자는 것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우리가 건져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양쯔강에 가면 아주 큰 댐이 있는데, 세계에서 제일 크지 싶은데 말이다. 그 댐에 터빈이 20여 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만 돌려도 엄청난 전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댐과는 비교가 안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댐을 만들어놓으면 배들이 다니는가? 강을 콘크리트로 가로질러 막아놓았으니 당연히 못 다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가 다녀야 물건을 수송하고 하니, 모든 댐에는 다 관문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가 오면 그 배를 엄청난 유압으로 들어올려서 관문을 통과하도록 조치를 한다는 말이다. 파나마 운하도 그러한데, 물의 높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강제로 물을 넣어서 높이를 맞추어서 배가 무사히 통과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들어가는 배와 나오는 배가 서로 같은 배인가? 다른 배인가? 당연히 같은 배라는 말이다.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서 화물선이 유령선이 되고, 또한 선원이 귀신이 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바로 그런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과하기 이전이나 이후나 똑같은 인간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제 설교에 보면 이 내용이 있는데, 인간은 결국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말이다. 그렇게 혼자 있고 싶어하는데, 사는 것이 힘이 드니 하나님에게 "좀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너희들과 함께 살고 싶다 !!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올 때, 어디 자기들끼리 살아보려고 나왔는가? 그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자기들끼리 사는 나라인가? 아니면 주님이 함께 계시는 나라인가? 당연히 주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인데, 그러니 그들은 애굽에서 자기들끼리 하던 행세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버리고 누구를 닮아야 하는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될 때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얼마나 잘리는가? 40만이 다 잘려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이 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모세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했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들만 들어갔는데,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만 말이다. 물론 장성해서 들어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관문을 통과하듯이, 그렇게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는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 살고 싶고, 하나님은 같이 살자고 하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는 혼자 살려고 하는 그 행세가 그대로 몸에 배여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앞에서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화목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러한 화목제물로 인해서, 그 제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 자체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게 되면, 그 사랑은 바로 "니가 나와 함께 있어도, 니가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라" 라는 차원에서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우리를 쓰레기로 취급하는 것이 곧 '사랑' !!
이렇게 설명을 하면 좀 이해가 되지 싶은데, 설교시간에는 시간이 없어서 다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화목제물을 드림으로서 이제는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더불어서 살아가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요소가 곧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랑은 댐의 관문처럼 통과시켜주는, 그렇게 우리를 용납해주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한 것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를 쓰레기로 취급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는 말이다. 즉 "이런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해" 라고 지적해주는 사랑, 그 사랑만이 화목제물에서 나온 사랑인데, 같이 살고 싶어하는 주님의 본심이 담겨있는 사랑이라는 말이다.
흔히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여기는데, 그러니 그런 것은 전혀 사랑이 아니고,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전달할 때, 그것을 두고 사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주님이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말이다.
그래서 진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나는 이제 주님과 함께 사니 너무 너무 기분이 좋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고 "주님이 돈을 주니 너무 좋아. 나는 앞으로 돈과 함께 살고 싶어" 라고 한다면, 그것은 혼자 살고 싶어하는 선악과를 따먹은 악마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교회는, 사랑을 감증하는 현장 !!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인지 실험하는 장이 되는데,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제일 먼저 에베소 교회가 나오는데, 뭐라고 하는가?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계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 마누라고 교회고 간에, 모두 다 귀찮아 !!
어제 낮 설교시간에 자동차 경주를 가지고 비유를 했는데, 자동차 경주를 하면 보통 시속 200에서 300키로를 놓고 달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교회는 시속 15키로라고 했는데, 어떤 교회는 7키로고, 심지어 뒤로 가는 교회도 있고 말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전부가 다 혼자 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교회도 귀찮고 마누라도 귀찮고 말이다. 사람 꼬라지를 보는 것조차 귀찮다는 말이다.
"마지막 때에 모이기를 힘써라" 라고 하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물론 기존교회에서 그런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게 성경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기존교회에서 주장해도 나쁜 성경구절이 아니고, 역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모이기를 힘써라" 라는 것은 유효하다는 말이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고 "헌금을 하는 것도 죄다" 라고 하지만, 성경말씀은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가 아낌없이 은혜를 받은 대로 헌금을 하는 것도 역시 성경구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들음으로서, 우리가 하는 헌금도 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 임금님은 일부러 우리가 바쁜 날에 결혼식을 !!
아무튼 임금님이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데,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임금님을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오히려 우리가 참석하지 못할 시점에 결혼식 날을 잡아서 결혼예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핑계를 대면서 살아왔는지, 그 본색을 들통나게 하신다는 말이다.
임금님의 혼인잔치는 우리하고 미리 조율하고 입맞추고 한 것이 전혀 아닌데, 오히려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색이 결코 임금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그러한 짓거리를 해왔다는 것을 폭로시키는 식으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고 하니, 사람들에게 맞아죽는 죽음의 길을 가기 때문에 말이다.
◈ 교회는, 거짓말 같은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
살아있는 사람을 보고 죽는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것인데, 그런데 그 말이 거짓말인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는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세상 사람들에는 거짓말처럼 여겨지는 것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교회도 아니면서 교회라고 행세하는 교회는 어떻게 하겠는가? 거짓말을 동원해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진실은 하나밖에 없는데,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 그것이 진실이란 말이다. 죽는다고 입장에서는 우리는 무엇을 해도 죽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진실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헌금을 해도 죽는구나. 선교를 해도 죽는구나" 라고 말이다. 그렇게 이미 확정된 것을 말이다.
◈ 과장은, 과장이 해야될 일만 해야 !!
어제 낮에 그런 어려운 이야기를 했는데, 교인들은 그게 어려운지도 모르고, 아예 감도 못 잡는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과장은 과장이 해야될 일만 하지, 부장이 하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라고 한 부분인데, 아마 그 설교내용의 취지를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 싶은데 말이다.
그래서 제 나름대로 쉽게 설명을 한다고 하면서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했는데, 즉 지옥은 발을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진짜지옥을 보게 되면 그 순간 지옥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진짜 천국을 보게 되면 그 사람도 천국의 사람이 된다고, 즉 발을 전혀 빼지 못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발을 뺄 수 있는 천국과 지옥을 구경했다고 하면, 그건 전혀 천국과 지옥을 구경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목, 즉 구원이라는 것은 어떤 자리확보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간(맛)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부장짓을 한번 해봐? 부장이 더러워서 하지 않을 거야. 나는 도로 과장을 할래"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자기가 간을 보고 자기가 결정을 지으려고 말이다.
◈ 화목은, 내 마음의 평화가 아니야 !!
하지만 그것은 결국 화목이 아니라 자기 도를 닦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하지만 화목은 '지정된 자리' 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목을 한번 보게 되면 발을 뺄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이 "너는 나와 함게 살아야만 돼!" 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끝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자기 혼자서 사는 것이 좋은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좋은지 맛을 보려고 하면, 그건 화목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화목은 자기 마음 다스리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 내 쪽에서 참아야지" 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의 평화를 누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전혀 화목이 아니라는 말이다.
◈ '금지'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내가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 라고 하시는 것은, 그렇게 분쟁을 일으키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너의 마음의 평화는 기대하지 말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금지를 위해서, 이게 세 번째인데 말이다. 바로 이런 금지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고, 주님만이 의인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금지', 즉 십자가 자체가 증거되기 때문에 말이다.
(마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그런데 우리는 이것도 알고 저것도 다 알아서, 우리 안에서 스스로 평화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행복을 말이다. 하지만 행복은 진리가 아닌데, 죽는다는 것이 진리이지 말이다.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더라도 죽는 순간에는 겁이 나는데,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겁이 난다는 것이다.
'이병철' 이라는 양반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돈이 많다고 '돈병철' 이라고 불렀는데 말이다. 삼성 이건희의 아버지인데 말이다. 그 양반이 죽을 때가 되어서 병원에서 그렇게 몸부림을 쳤다고 하는데, 죽기 싫어서 말이다. 신부와 간호사를 불러서 그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는지, 천국에 갈 수 있는지 말이다. 바로 그 답변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에게 있는데 말이다.
◈ 빌라도, '진리가 무엇이냐?'
이 양반은 전혀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진리가 무엇인가?" 라고 하면, 사실은 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과 이야기를 할 때, 그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예수님께서 "나는 진리에 대해서 증거하려고 왔다" 라고 하니까, 빌라도가 묻기를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 자체가 잘못인데, 그렇게 질문하는 것 자체가 진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진리의 중심이고, 그 주님을 위해서 빌라도가 이 세상에 태어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리이신 분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는 주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우기는 셈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요 18:37)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요 18:38)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님입니다" 라고 믿으면 되지, "오늘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기로 했습니다" 라는 것은, 그것은 새로운 지식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진리가 아니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자기가 진리라고 고수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좀 어렵습니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시점부터 니가 그렇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진행이 되어왔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감염' 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뿐 !!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감염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감염이 될 때만 세균이 덤벼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는 이미 세균이 광범위하게 번지고 퍼지고 있다는 것을 그 '감염' 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확인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주 적절한 예라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창세 전부터 구원을 받았음을, 그게 선물로 오게 되면 소급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하, 지금부터 구원을 받았구나"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창세 전에 구원을 받기로 작정이 되어있구나" 라는 것을 소급해서 확인할 뿐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바둑에서는 전문용어로 '아다리' 라고 하는데, 딱 그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 인간은, 이리보고 저리보고 아무리 봐도 '들러리' !!
오늘 본문인 혼인잔치비유가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들을 조질 거야" 라는 것을 단정짓는 즐거운 혼인잔치라는 것이다. 그런 계획을 이미 사전에 다 잡아놓고 혼인잔치를 일방적으로 실시해버린다는 것이다. 손님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하필이면 그 시간에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를 가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혼인잔치에 누가 초청을 받는가? 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