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412a-히2장6절(사람과 인자) - 이 근호목사
안양20130412a-히2장6절(사람과 인자) - 이 근호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250)
안양20130412a-히2장6절(사람과 인자) - 이 근호목사
히브리서2장6절부터 할 차례입니다.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이것은 시편 8편4,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창조에서 마지막 심판까지 이어집니다. 시편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시간이 흘러간다면 시편이 여기 있었고 히브리서 2장은 십자가 이후에 여기에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있는데, 히브리서 쓰신 분이 하나님이 성령에 의해서 시편내용을 히브리서에 기록을 했어요. 기록을 할 때는 십자가라는 것을 우회로 넘어서서 가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통과해서 가야 되겠지요. 십자가 사건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라 하는 것은 앞에 있는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이룬 것이 십자가잖아요. 그래서 그 말씀 가운데 시편이 들어있으니까 히브리서 할 때는 십자가를 통과하게 되는 겁니다. 어릴 때 촌에서 개들이 사람들이 있으면 좋아서 까불고 재롱부리고 하잖아요. 추수가 되어 짚단이 있으면 개들이 짚단 속에 뛰어 들어가면 들어갈 때는 개 몸체로 들어갔다가 짚단 속에서 나올 때는 짚단을 뒤집어쓰고 나오지요. 온 털에 짚단 다 묻어있지요. 시편이 십자가를 들어갈 때는 말끔하게 나오는 법이 없지요. 십자가사건을 뒤집어쓰고 히브리서에 도착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시편의 내용이 여기에 보면 인자라는 말이 나오지요. 인자, 하나님의 아들, 인자라는 시편의 내용이 여기 십자가 이후에 이 내용은 뭐로 바뀌느냐, 반드시 바뀌게 돼 있지요. 예수님으로 시편에 먼저 기록이 돼 있고 그 인자라고 하는 또는 인간, 참된 인간의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보여주시고 그 짚을 뒤집어쓰시고 히브리서에 등장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해석을 할 때, 십자가사건을 걷어치우고 그냥 시편에서 히브리서로 연결해 버리면 이걸 보고 있는 관객 또는 관찰자, 언젠가 안양에서 했는데, 우리는 그 시편을 내가 외워가지고 히브리서 내용을 내가 그냥 들어가 버려요. 내가 들어가 버리면 여기 십자가 사건이 없어져버려요.
그러면 성경에 가서 구원 받는 식이 돼버려요. 몇 구절 외웠어요? 40구절 외웠어요. 그럼 40구절 외운 사람은 탈락이고, 41절 외운 사람은 합격이고, 그렇습니까? 성경구절이 있는데 그 단어를 내용을 알면 합격이고 모르면 불합격이고 그런 겁니까? 네 생물이 무엇이냐? 그걸 알면 구원이고, 그거 모르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니 그 자체가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빠진 상태에요. 빠져버린 상태에서 이것저것 외워서 챙겨서 바구니에 슈퍼에 가서 물건 담듯이 중량 달아서 높으면 천국 가되 좀 높은 곳으로 가고 낮으면 지옥가고 이리 되면, 굉장히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구원받겠다, 하는 것은 옛날에 바리새인들이 그 짓을 해왔어요. 사두개인들이.
그들의 애비가 마귀거든요. 마귀는 안 보이는데 마귀의 자식들이 하는 짓은 왜 그리 잘 보이는지. 마귀는 안 보여도 마귀 자식들이 마귀의 졸개들이 하는 짓들은 온 천지에 다 깔려 있어요. 그걸 통해서 우리는 배후에 마귀가 이런 식으로 일한다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다 끌어 모으는 것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건데, 자기가 구원 받으려고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원하는 사람을 건지지요. 자기 구원을 원하는 본인이 구원 받는 건 아니에요. 예수님이 원하는 자. 바디매오 속에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찾았잖아요. 그것은 이미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원하는 자이기 때문에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을 찾는 믿음이 발생된 겁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믿음은 이미 그 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믿음을 집어넣었다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께서 집어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집어넣은 그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그렇게 하신 겁니다. 소경이 아무리 한다고 해서 주님을 원한다는 것은 주님의 뜻이 있어야 되지, 성경 공부한다고 주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공부를 한 자기 자신을 더 이쁘게 보고, 대단하게 섬기게 돼있지, 주님을 그리워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말은 이렇게 간단하게 시편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그렇게 히브리서에 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간단한데, 십자가를 경유한 것과 경유하지 않을 때, 그런 차이점이 뭐냐 라고 생각해 볼 때, 그걸 알아야 되겠지요.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9절 끝을 봅시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면 해답 나왔지요? 십자가를 경유하는 것은 무엇을 맛보는 것이다? 죽음을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맛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죽음이란 게 특수한 경험이 돼가지고 예를 들어서 음식 맛을 보게 되면, 요리를 새롭게 했다. 동치미를 했다. 맛 있는가 맛보세요, 하면 맛을 봤다. 맛보기 전에 맛보려고 하는 나도 살아있고 동치미 먹고 난 뒤에 아, 맛있네. 시원하네. 라고 맛 볼 때 나도 살아있지요. 뭐든지 경험하려면 경험하기 전의 나도 살아있고 그 인간이 경험 후에도 살아있을 때, 경험이란 게 의미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동치미 먹으려고 하는데 권사님이 독약을 풀어가지고 동치미를 먹는 순간 “윽, 감히 짐을.” 해가지고 “독살하려고 하느냐” 해가지고 죽어버리면, 깨어가지고 아저씨, 동치미 맛은요? 개 거품 물고 죽고 있는데 동치미 맛이 나옵니까? 불이 얼마나 뜨거운가, 하려면 데인 후에도 살아있어야 하는데 불 속에서 죽어버리면 죽은 사람 붙들고 “불이 얼마나 뜨겁던가요?” “흐으, 보고도 모르느냐” 이럴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죽음을 맛 볼 수 없다는 뜻이에요. 왜? 맛보는 순간 인간은 죽어버리니까. 죽고 난 뒤에 “야~ 참, 죽음 무섭데이.”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왜? 이미 죽어버렸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죽어가면서 “아, 죽음은 괴롭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은 죽은 게 아니고 아직 들죽은 거예요. 이 죽음이란 것이 우리에게 아주 특수한 겁니다. 아담에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은 성립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그 전에 한 번 죽어봐 가지고 “야, 죽음이 이렇게 힘들구나!” 아는 사람에게 “전에 한 번 죽어보니까 힘들지? 그러니까 이거 따먹지 마. 힘들어.” 라는 말이 성립이 되는데 죽음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거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따먹지 마” 그 따먹지 마라, 고 하는 그것이 방어책이 될 수 있느냐 그 말이에요.
예를 들면, 화장품이 있는데 아들보고 “화장품 건드리지 마! 니 건드리면 얼굴에 울긋불긋 종기가 난다.” 애는 종기를 경험해 보지 않은 애한테는 그 이야기가 아무 실효성 없는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이야기인데요. 사촌하고 같이 살게 됐어요. 어느 날 숙모가 나한테 화를 내는 거예요. “왜 창호가 고추장 먹도록 그냥 놔뒀느냐?” 그 때 창호가 3~4살 됐어요. 고추장이 빨갛잖아요. 애들이 호기심이 많아서 자꾸 부엌에 들어가는데, 옛날 부엌은 높아서 넘어지면 큰일 나거든요. 애보라 하는데 자꾸 가는 거예요. 다른데 보고 있으면 고추장 보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애가 한 번 먹어보면 매워서 안 먹겠지 싶어서 맛을 보여주니까 애가 매워서 하고 물주고 해서 살긴 살았어요. 화를 내는 거예요. 그 때 처음 알았지요. 아, 여자는 자기 새끼 건드리면 보통 문제 아니구나.
여러분, 약간 어렵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러면 말씀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도 인간 속에 이미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아담이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선악과 따 먹었으니까. 여자는 해산을 고통을 하고. 그게 죽음이 다입니까? 죽음의 징후일 수는 있는데 그게 죽음의 끝이냐 말이지요. 아니지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은 들어왔는데 이 말씀의 끝은 어디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 대신 보여주신 겁니다. 왜냐 하면, 9절에 보면,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그러면 먼저 죽었던 우리 조상들은 그 사람들은 실제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맛볼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목숨 끊어져 죽었으니까. 그 죽음은 죽음도 아니에요. 진정한 죽음은 목숨 끊어져가지고 죽음이 아니고 진짜 죽음은 예수님만 맛봐요. 설사 죽는다 할지라도 온전하게 맛보지를 못해요. 영원한 저주, 오직 예수님만이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느꼈던 느낌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해 주지요.
그러면 인간은 이것 참 어려운 말인데, 살아있기 때문에 죽는 게 아니고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한 번 적어 보겠습니다. 언젠가 한 거 같은데 주일 오후에. 사람에게는 죽음이 정상이고, 사는 것이 비정상이다. 사람은 죽는 것이 당연한 거고요. 지금 우리가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 게 이상해요. 왜 살아있지? 사는 이유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