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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문턱을 넘어서 130421우리교회스바냐

문턱을 넘어서 13042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문턱을 넘어서( 스바냐 1:7-11)

이근호

13-04-21 15:27

문턱을 넘어서

2013년 4월 21일 본문 말씀: 스바냐 1:7-11

(습 1:7, 개역)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습 1:8, 개역)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습 1:9, 개역)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습 1:10,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이구역에서는 부르짖은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습 1:11, 개역)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선지자는 특이한 분들입니다. 우리와 같이 밥먹고 잠잔다고 해서 그들의 역할까지 평범하다고 보시면 안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맡은 참으로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그들의 소리나 주장을 평가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의 내막부터 먼저 살펴야 합니다.

천국이란 ‘아들을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이 문장에 두 개의 중요한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아들’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 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인들은 대자연 속에서 기괴하고 특별난 장소를 찾아서 거기에서 신과 교섭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제가 어느 식당에 들어갔는데 밖에서 보니 보이지 않던 부적 두 장이 들어가 보니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 부적이 결코 ‘아들’이 아니라 그 가게가 결코 ‘아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도 아닌 것들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서 부적을 입구 위에다 붙여놓은 것입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들이 나름대로 사랑하는 것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님 아들’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랑한다’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성질에 ‘하나님 아들’이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의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사랑하는 가운데 예수님마저 사랑하면 한 소쿠리에 같이 담길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들면 기존의 것을 사랑하는 그 방식과는 정반대로 자기 자신을 대시 봐야하게끔 만듭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바로 이러한 취지가 담겨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 이삭은 결코 죽도록 미워하는 자식이 아니라 죽도록 사랑했던 자식이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자기 사랑이 담겨 있는 대상이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여서 바치라고 하신 겁니다. 사랑의 질을 바꿔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워할 줄 모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내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찾아들면, 평소에 우리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바로 그것을 잃는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전혀 사랑한 바가 없음이 들통납니다. 도리어 우리는 아들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내민 그 주먹에 얻어막게 하십니다. 그러면 피가 흐르고 그 흐르는 피 속에는 우리의 학대가 미움이 담기게 됩니다. 피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자신이 미워하고 미안스럽기 한량없게 하십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 유대 나라는 율법에 의해서 질서 잡힌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강포와 속임수로서 일관한다고 평가받는 자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요? 율법에 의한 공동체의 내용이 출애굽기 22장부터 줄이어 나옵니다. 출애굽기 22:1-4에 보면,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적질한 것이 살아 그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무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정도는 충분히 제대로 지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과거에 제대로 이 말씀을 준수해 왔더라도 어느 순간에 갑자가 화가 치밀어 오른다든지, 분통을 폭발하고 싶은 순간이 오게 되면 우리는 율법의 뭍문턱을 넘게 됩니다.

신전에 있어 문턱을 넘는다는 것은 밖과 안에서 각자 적용되는 원리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동일한 질서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성과 속이 구분되어지는 경계선이 문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경계의 취지를 무시할 만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이번만 한 번 눈을 감아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제가 이 순간에 율법이 순종하게 되면 저에게 엄청나게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제가 율법을 지킨 것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으니 제발 이번에는 하나님쪽에서 위반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는 식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핑계를 빙자해서 권력을 잡은 자들이 바로 방백이나 왕자들이라는 겁니다. 즉 권력을 잡은 자들의 율법 위반은 그로 인한 피해자들이 다수가 됩니다. 출애굽기 22:25-27에 보면,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 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바보같이(?) 율법대로 살면서 누가 뭐래도 하나님 섬기는 자들이 율법의 문턱을 넘어온 자들에게 의해서 피해를 보는 상황이 벌어지게 하나님께서 상황을 조성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벌 내리시는 상황이란 인간이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나름대로 율법지키기를 일시적으로 보류하게끔 유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쉽게 문턱을 넘어서 그 행위로 인하여 여기저기서 피해를 보는 가련한 자들이 유발하게 됩니다.

바로 이들이 고통스러움을 근거로 삼아 율법의 문턱을 넘어온 자들을 벌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스바냐가 지적하는 시대는 역사적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에는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런 과오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이 살겠다고, 자신이 지킬 만한 것들이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피해본 자들이 누구에게 호소하는 지를 잊지 말아야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망나니처럼 산다는 것을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4-23 13:19

2강-습1장7-11(문턱을 넘어서)1304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스바냐 1장 7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6페이지입니다.

스바냐 1:7-11

“주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지어다 이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므로 여호와가 희생을 준비하고 그 청할 자를 구별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그 날에 문턱을 뛰어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어문에서는 곡성이, 제이구역에서는 부르짖은 소리가, 작은 산들에서는 무너지는 소리가 일어나리라 막데스 거민들아 너희는 애곡하라 가나안 백성이 다 패망하고 은을 수운하는 자가 끊어졌음이니라“

여기 선지자가 등장하는데 선지자 등장하거든 그냥 특이한 분이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니가 뭐고?’ 이러지는 제발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너도 밥 먹고 살고 나도 밥 먹고 사는데 니나 나나 똑같다.’ 그렇게 하시면 그 선지자가 하는 기능을 우리가 모독하는 게 되는 겁니다. 선지자가 본인이 하고 싶어 한다면 이건 가짜 선지자죠. 목사도 지가 하고 싶어 한다면 이것도 가짜 목사죠. 그것은 다 수작이니 수작을 부리게 돼 있는데 본인이 하고 싶어서 목사하고 본인이 하고 싶어서 선지자를 하는 게 아니라면, 자꾸만 그만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외부에서 하나님이 강제로 줬기 때문에 본인도 그게 참 힘겹고 어려워요. 그래서 선지자는 완벽하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 자기 내부의 갈등이 외부로 드러내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 갈등을 지가 수습하는 사람이고 그런 차이가 있어요. ‘나는 이렇게 죄인입니다.’라는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선지자고 또는 성도고, 아닌 척하는 인간들은 성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죠. 그저 거룩 티를 내고 잘난 체를 내야 그게 돈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선지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처럼 어떤 특정 날이 가까이 왔다, 라고 보시면 돼요. 선지자가 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전부 다 무효로 돌릴 날이 가까이 온 거예요. 이것은 선지자가 지가 좋다고 지 좋아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본인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가까이 왔다, 에서 가까이는 빼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냥 왔다, 고 하는 거예요. 가까이 온 거하고 그냥 온 거하고 다르지 않느냐? 다른 점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뭐냐 하면 나중에 오실 때는 가까이 온다고 하고 이미 왔을 때는 그냥 왔다, 가 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오거나 이미 오거나 마찬가지니까 시간 요소를 빼버리면 똑같은 이야깁니다.

세례요한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은 가까이 왔는데 아직 오지는 않았으니까 몇 년 남았을까? 몇 개월 남았을까? 몇 십 년 남았을까? 그걸 계산하는데 가까이 왔다는 말은 그 ‘가까이’ 빼고 믿으라 이 말이죠. 가까이 오나 지금 오나 그분이 오시는 건 마찬가지니까 자꾸 따져서 그럼 나중에 진짜 올 때 잘 믿어야지, 요런 되도 않은 생각 하지 말고 ‘아! 이미 들어 닥쳤구나. 그렇다면 우리의 하는 모든 것은 무효가 되겠구나. 그런데 왜 무효를 시키지?’라는 그런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한다고 선지자가 혼자 하는 게 아니고 본인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온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가 왔을 때 그것을 앞서서 다른 사람은 나중에 들이닥칠 것을 선지자한테는 이미 자기 안에 그것이 장착되어 버리고 이미 자기한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좀 특이한 사람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매를 맞아도 먼저 맞은 사람이라서 세상살이에서 오는 괴로움 같은 것은 괴로움 측에도 들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소식만 전하죠.

방금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보고 ‘니 혼자라도 날 섬기면 되잖아. 자꾸 세상 탓 하지 말고 남들이 안 섬긴다고 니가 짜증내지 말고, 안 섬겨? 그럼 니 혼자 행운 얻었네. 그럼 니 혼자 섬기면 되지. 나만 섬긴다고 불평하지 말라.’ 말이죠. 나라도 섬기면 된다. 라는 이런 마음가짐으로 니는 내가 알려준 그 길을 그대로 가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의문점이 뭐냐 하면 하늘나라가 그냥 오면 되는데 가까이 왔다고 해서 가까이 입장에 맞춰서 선지자를 미리 앞당겨서 보내시는데, 선지자 보내지 말고 된 통으로 그냥 오실 때 한꺼번에 작살내면 되지, 뭘 또 가까이 왔다, 해서 뭔가 유보하는 것처럼 그런 느낌을 왜 주시는가, 그 이유는 구원의 본질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구원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구원의 본질, 천국은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 방금 문장에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또 한 개는 사랑한다는 것. 아들과 사랑.

그러면 아들을 사랑하니까 아들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식은 우리의 아들이니까. 진짜 하나님의 아들, 우리 아들은 메시아가 아니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그 다음에 사랑해야 돼요. 그건 외부에서 주어져야 돼요. 이 말은 세상에 있는 고상한 것과 건전한 것을 아무리 붙잡고 뭘 해도 그것은 아들이 아닌 고로 천국에 가지를 못합니다.

이렇게 촌에 가면 항상 고목이 비틀진 곳, 그리고 기암암석이 있는 그런 곳에는 항상 촛불을 켜놓죠. 기괴한 고목이나 기괴한 암석에는 촛불을 켜놓고 거기서 사람들이 빌었던 흔적이 있어요. 사람들이 보고 믿는 거예요. 기괴하고 뭔가 기묘하고 신비한 것, 신묘한 기운이 나타날 것 같은 느낌 같은 것, 그것은 아드님이 아닙니다.

제가 동대구 고속터미널 휴게소에 있는 식당을 갔어요. 바깥에서 딱 들어가서 보니까 부적 두 장이 붙어있어요. 자, 부적을 붙임으로써 그 공간이 보통 더러운 공간에서 그 다음부터 어떤 영적 기운이 임하는 공간으로 부적을 붙여놓으면 그렇게 공간이 변한다는 겁니다. 거룩한 공간으로.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손님도 잘되고 액운도 떨어지고 하겠죠. 그런데 그 식당은 아들이 아닙니다.

다시 설명할게요. 천국은 아들을 사랑해야 되는데 부적 붙여놓은 식당 아줌마는 자기 가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은 천국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제 말 한번 들어보세요. 부적을 안 붙였다 합시다. 부적을 안 붙이면 구원받습니까? 부적을 붙였다는 말은 붙이기 전부터 이 가게를 사랑한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아들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적을 두 장 붙인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들이 아닌데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구원해주는 메시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내가 사랑했기 때문에 부적을 붙인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부적 붙인 아줌마 욕 할 게 아니라 평소에 우리 생활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한 이유가 이젠 알아야 돼요. 뭐냐 하면 평소에 우리가 사랑하는 게 있어요. 우리의 사랑하는 것과 우리의 사랑하는 것을 죽이라고 하는 순간에 아들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등장시켜서 평소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 앞에서 부딪히게 만들어서 그래서 ‘니가 사랑하는 걸 사랑할래? 아니면 아들을 사랑할래?’라는 식으로 아들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아! 참 하나님 못 됐죠. 그렇죠?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라 하면 집에 있는 내 아들도 내 딸, 딸, 딸도 사랑하고 집에 있는 그 강아지도 사랑하고 다 사랑하고 거기다가 초과해서 예수님까지 사랑하면 그걸로 우리는 사랑한 걸로 그만 되는 걸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그것은 평소에 우리는 내 자식, 내 아파트, 내 통장, 내 교회, 하여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그 사랑하는 질이요? 아들 사랑하는 데에는 통하지를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다가 거기다 뭘 집어넣느냐 하면 주님 사랑을 집어넣으려고 하니까 주님은 내가 사랑하는 그런 방식으로는 들어오지를 안 해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서 사랑의 성질까지 바꿀 필요가 있는데 우리가 호락호락해서 안 바뀌어 집니다. 안 바꿔질 때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죽여 버리고 그 죽이는 힘으로 묻습니다. ‘이제사, 니가 아들, 메시아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평소에 ‘주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하다가 진짜 지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렸을 때 그때는 우리는 그 예수님이 사랑되는 것이 아니고 미워도 너~~무 미워지는 겁니다. 거창하게 아들 죽고 딸 죽고 그거까지 갈 것도 없어요. 그냥 손지갑 하나 잃어버렸을 때.

어떤 사람이 부자가 남편 죽고 난 뒤에 남편이 그렇게 아끼는 브로찌를 잃어버렸어요. 브로찌를 잃어버려서 그 브로찌를 누가 가져 갔나 생각해보니까 자기가 음식 먹으라고 초청한 그 사돈 할머니가 가져갔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사돈집에 가서 따집니다. 우리 브로찌가 어떤 브로찌인데 그걸 왜 가져갑니까?‘ 나중에 브로찌가 의자 모서리에 박혀 있던가 했어요. 오자룡이 간다 라는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그런 게 있다 이 말이죠. ’사돈이여 잘 계십니까?‘ 전부 다 거짓말 이예요. 사돈이 내 브로찌 가져갔다고 한 다음부터는 ’잘 계십니까?‘ 가 아니라 웬수예요. 웬수.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아들을 우리한테 원수 같은 인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힘 센 우리 주먹에 아들이 얻어맞아서 죽게 만들고 거기서 피를 나오게 만들죠. 그 피가 밉다고 때린 우리 주먹을 살리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메시아가 나중에 우리에게 나타나거든요. 이걸 두 자로 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광주 강의하면서 언약의 적용사항을 7가지로 나눠서 설명했습니다.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중에 하나가 재미있는 게 뭐냐 하면 언약은 우리보고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리고 넣어준다고 이야기했거든요. 하나님은 언약이 있으면 언약은 그냥 넣어주는 거예요. 왜, 우리는 가기 싫어해요. 우리는 오히려 미워요. 거기 가면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더 미워할 것 같아요. 왜, 내 브로찌를 가져갔으니까. 그런데 미워하는 그 인간을 세상에 사랑하는 아들 나라로 넣어줌으로 말미암아 미워했다는 그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만드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브로찌를 잃어버렸는데 가져갔다고 오해해서 사돈하고 큰 소리를 쳤거든요.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으면 이러면 돼요. 누명 쓴 사돈이 먼저 찾아가서 ‘아이고, 브로찌 잃어버려서 얼마나 오해했습니까? 이 할머니가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게 했는데 찾았다니 참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나서면 저쪽에서 화날 일이 없잖아요. 물론 그런 할머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예요. ‘니 나 미워해서 나한테 상당히 니가 미안해하지? 미안해하지 마라. 일부러 내가 널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어.’라는 방식으로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안하다가 더욱 더 미안해지는 거예요.

스바냐 선지자가 그런 식으로 지금 본문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차 오실 천국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들 사랑하는 게 우리한테 없으니까 미안하게 만드는 방식을 여기다 그대로 적용시켜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바냐 성경 해석한다는 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의 입장에 근거해서 성경해석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기 8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라고 돼 있는데 이 벌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뭔가 이방의 옷을 걸쳐 입은 자들은 평소에 생활방식이 주님께서 먼저 찾아와서 천국에 먼저 허락해 주신다는 그 원리와 안 맞는 방식의 삶을 그들은 옷을 입음으로 표현을 해낸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흥, 주님께서 나를 허락 안 해도 내가 스스로 알아서 주님 섬겨서 천국 가면 되지 뭐.’라는 방식을 주님께서 벌함으로 말미암아 자기 힘으로 천국에 가겠다는 그 모든 것은 나는 일체 예정한 적이 없다. 인정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선지자가 우리한테 이야기해주는 겁니다. 그냥 사랑으로 허락하는 거예요.. 용서함으로 허락해 주는 겁니다.

내 힘으로 힘을 가지고 들어가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겠다는 방식이 벌한다는 방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 예가 출애굽기 22장에 미리 나오는데 전체 내용에서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지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 민사 재판을 보여주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그 날에 문턱을 넘어서 강포와 궤휼로 자기 주인의 집에 채운 자들을 내가 벌하리라” 이렇게 돼 있어요.

여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출애굽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죽 해놓고 결국 차이점이 뭐냐 하면 27절에 보면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은 누가 공격하면 공격당하게 되고 누가 위반하면 얼마든지 위반될 수 있는 법을 제시해서 그 법에 의해서 남한테 상처를 입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 등신아, 이 바보야, 그래, 하나님의 법을 곧이곧대로 해서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더 살겠느냐.’라고 꾸지람을 들을 수밖에 없는 바보 병신들을 계속 생산해 내는 것이 주의 법이예요.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법, 율법이라 하는 것은 그걸 그대로 곧이곧대로 지키다가는 남한테 당하기 십상인 사람들이 양산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양산된다는 말은 그 사람 때문에 약탈과 강포가 문턱을 넘어, 하나남의 법을 넘어서 ‘야, 이까짓 법, 법이 밥 먹여줘? 에이구, 뭐 하나님이 눈에 보이나? 하나님의 법이 뭐 중요해?’ 하고 그걸 넘어서서 얼마든지 그걸 무너뜨리고 ‘이 까짓 법, 내가 무시한다.’ 무시하는 사람에 의해서 피해를 받는 사람들을 양산시킴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비한 사람 쪽에서 구원하는, 자비를 원하는 사람, 오직 하나님의 개입을 원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와서 구원해줘야 살겠습니다. 숨통 트이겠습니다.‘라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거예요.

그게 맥없이 죽었던 이삭과 같은 희생!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의 그 모양새입니다. 이걸 오늘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뭐든지 잘될 때는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다급할 때, 갑자기 이 법 지키다가는 내가 큰 손해가 난다 싶을 때, 또는 이대로 하면 저쪽에서 내가 법 지킨다는 걸 이용해서 이용할 가능성이 많을 때는 ‘내가 미쳤나? 내가 바보야? 내가 등신이야? 내가 곧이곧대로 지키면 나만 손해인데. 하나님 미안합니다. 눈만 잠깐 감아주세요.’라고 여기 문턱을 넘는 거예요. 그날에 문턱을 뛰어넘는 거예요. 문턱을 뛰어넘어 버리면 그때부터는 ‘하나님 미안합니다. 하나님 제 마음 이해하죠? 제가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걸 주께서 충분히 이해하죠? 그러니까 질끔 감아주고 다음에 제가 미안하다고 할 테니까 이번만 참아주세요.’ 하고 문턱을 넘는 사람 때문에 그냥 그대로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는 사람에게 옴팍 피해가 그대로 입혀지게 되는 겁니다.

나의 이 욕망과 나의 이 욕심 때문에. 이 소리 듣고 ‘목사님, 앞으로 문턱 안 넘겠습니다.’ 제발 그런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제가 이 말 하는 것은 문턱을 넘어 설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나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들이 나 살기 위해서 나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들을 주께서 항상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이 말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올 때는 니가 문턱 넘은 것 때문에 이 사람, 저 사람, 저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손해 본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야, 라는 식으로 온다 말이죠. 오면 ‘주여, 또 오늘도 주의 법을 제가 우습게 봤군요.’ 이렇게 하면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입니다. 참~ 미안스럽죠. ‘누구야? 내 브로찌 가져간 사람.’ 하니까 억울한 사돈네 할머니가 ‘이보게 사돈, 내가 가져갔네. 나한테 누명 씌워서 염려하지 말게. 주께서 너를 구원하기를 원한다.’ 이런 식으로 온다 이 말이죠. 우리는 성질을 냈는데.

사람이 성질 안 내고 살 수 있습니까? 그런 힘을 가장 발휘하는 것이 그 당시에 왕족들과 귀족들과 소위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휘두른다는 말은 그들이 한번 문턱을 넘었다 하면 수백 명, 수천 명이 와르르 피해를 보는 그런 입장에서 이스라엘 나라를 주께서는 마련한 겁니다.

복지 공무원이 담당하는 사람이 3000명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복지 혜택을 받은 사람은 전부 다 어렵고 못 배우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라서 복지 공무원한테 따지고 복지 공무원을 자기한테 혜택 안 준다고 때려버렸어요. 그 복지 공무원에 종사하는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업무는 많아지는데 충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더러워서 못 해먹겠다. 더 나아가서 내가 죽어서 이 하소연을 내가 국가에 알리리라. 그러니까 그 사실을 모르는 복지 연금 타먹는 분, 또 노인연금을 하시는 분들은 ‘왜 노인연금 저 사람은 적은데? 뭐 재산 뭐 있다고? 왜 적은데.’ 우리는 자기 것만 따지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복지공무원들이 힘들어 죽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 안중에 없습니다. 나만 힘 안 들면 돼요.

그러니 스바냐 이 모든 말씀은 결국은 우리는 주님의 희생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허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리가 미안한 마음으로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있도록 주께서 은혜 주셨다는 이것이 또 하나의 감사할 거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났다고 우기는 순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고함소리에 마음의 상처를 입겠습니까? 그래놓고도 어쩔 수 없다고 핑계 대는 우리의 뻔뻔함, 하지만 이 뻔뻔함을 만들어서라도 구원해 주시는 그 아드님의 고마움을 깨닫게 해주시니 모든 은혜와 감사가 주께 있음을 다시 한 번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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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