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왕노릇 130421
은혜의 왕노릇 13042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은혜의 왕노릇(로마서 5:17-21)
이근호
13-04-21 13:30
은혜의 왕노릇
2013년 4월 21일 본문 말씀: 로마서 5:17-21
(롬 5:17, 개역)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개역)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개역)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20, 개역)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롬 5:21, 개역)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예수님, 두 분을 가지고 역사를 만들어 나가십니다. 우리 각 개인은 빠져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서 정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죄인이라서 벌을 받기에 이 벌에 대해서 마치 본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나설 수는 없는 겁니다.
“내가 조금만 처신 잘 했으면 되었을걸”이라는 후회 같은 것은 다 부질없는 겁니다. 혹은 “내가 이렇게 우수하게 살기에 보다 나은 미래가 보장 될걸”이라는 기대로 소용없습니다. 제발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빠져 있어야 될 처지입니다. 이는 각자 개인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도 집결시켜 종결해버립니다. 자기에게로 끌어 모아놓고서는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즉 자신을 절대적인 유일한 ‘한 1’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곧 자기 자신을 이미 ‘왕’인양 여기면서 자기 주변을 감싸는 현실상 여기에 맞추어서 구성하면서 살아가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니 사람마다 현실상이 다 다릅니다. 다들 그 현실 안에서는 자신이 왕이 되어 있고 신이 되어 있습니다. 뭐든지 자신이 최종 잘 되어야 한다는 우김 같은 적이 작용합니다. 이것은 온전한 해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해답을 주시려는 겁니다.
제발 인간들 각자는 빠져라는 겁니다. 인간들 개인이란 마치 도마 위에 얹어져 있는 활어같은 존재입니다. 일본 복장의 주방장이 사시칼을 마주치면서 막 요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활어입장에서 자신이 “나 잘 살았어요”라고 우겨도, 혹은 “나는 막 살았어요”라고 반성해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전혀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인간은 죄인으로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사망의 왕노릇’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인 그 사망이 모든 인생 속에 개입해서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늘 쫓기듯이 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들은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시달립니다.
늘 불안합니다. 무엇에 불안한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자신의 불안정과 불행의 탓을 주변에다, 그리고 신에다 미룹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자기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신은 전혀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기에 신은 ‘나쁜 신’이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항시 신을 미워할 마음 준비를 하고 다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 바로 자꾸만 힘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입니다. 다. 자신이 만족할 만큼의 힘을 증강하기를 도모합니다. 그래서 흔히 교회에 와서 기도하면서 은혜를 달라는 것은 실은 ‘힘’을 달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곧 힘의 왕노릇 밑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말로는 은혜이지만 본심은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힘을 무한정 공급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망이 실제적으로 왕노릇’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출애굽이 5:9에 보면, 이 점에 대해서 바로 왕이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즉 히브리인들에게 찾아온 모세와 아론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파견받았다고 주장을 늘어놓으면서 히브리 민족의 노역을 중지하려는 그런 수작을 벌리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현실적으로 봐서 거짓말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입장에서 자신의 현실보기를 제대로 증거해주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히브리인들 조차 바로왕 못지 않고 동조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와 아론이 괜히 자신들 곁에 와서 ‘여호와 제사’ 운운하면서 자신의 생활만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히브인들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이 중심되는 현실상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 위주의 생활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4:11-12에서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망의 왕노릇’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죄들은 모두 아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작용되어진 현실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는 ‘예수님 한 분’에 의한 ‘은혜의 왕노릇’입니다. ‘은혜의 왕노릇’에 대해서 출애굽기 13:12-13에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는 무릇 초태생과 네게 있는 생축의 초태생을 다 구별하여 여호와께 돌리라 수컷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나귀의 첫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중 모든 장자된 자는 다 대속할지니라” 예수님의 대속을 위해서는 먼저 아담이 모든 인류를 대속해서 죄를 지어야 될 원리가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아담의 이러한 대표성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앞장 세워서 그분에게 ‘대속’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모든 공로는 예수님이 독점하고 있으면 이 공로덕분이 성도가 사는 겁니다. 그 ‘대속의 사명’은 아담의 대표적 죄의 적용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범죄한 것은 실은 ‘은혜의 왕노릇’을 위한 배경을 미리 깔아놓기 위한 보조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은혜의 왕노릇을 증명하기 위해 죄에 죄를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치 물을 국냄비에 계속 퍼붓는 것은 간장의 가치를 계속 드러내기 위함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란 죄인이 스스로 자기 개선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기대를 걸지 않기 위해 주어진 겁니다. 그래야 자기 말로 하나님께서 지정한 그 한(1)분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것이 죄이라는 고백만큼은 빠뜨리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공로를 강탈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4-2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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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13-04-24 07:36
30강-롬5장 17-21(은혜의 왕 노릇)1304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5장 17절에서 2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5페이지입니다.
로마서 5:17-21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인간들이 많은데, 뭔가 인간들이 많은데 인간들 머리 위해서 한 분하고 한 분하고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수님이라는 분 한 분, 그리고 잔챙이나 송사리는 빠지고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처음에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을 대표자로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면 하늘 쪽에서는 예수님이 대표자가 되고 지상에서는 대표자가 인간이 되는 겁니다. 밑에 있는 인간들에 대해서 ‘네 운명에 대해서 너는 좀 빠져줘. 네 운명은 위에서 결정되는 것이지 너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네가 죄를 짓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도소는 그렇지 않아요. 교도소는 각자 지은 죄에 대해서 각자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도소가 과연 현실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느냐, 교도소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죄지은 것에 대해서 벌을 받는 것이 맞는데 안 들킨 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죄를 더 많이 지었는데 들키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런 죄는 이 세상에서 해결할 수가 없지요. 들키지 않으니까 들키지 않은 이상은 없는 겁니다. 없지만 그 사람에게서 분명히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세상조차도 교도소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안에서도 눈에 보이는 세상이 해결 못하거든요. 어떤 사람은 재수 없어서 걸렸고 어떤 사람은 재수로 안 걸렸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죄는 없어지는가,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현실을 확장시키자는 겁니다. 내가 죄 지었는데도 벌 안 받고 반대로 내가 착한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남보다 고생 더 많이 하고 착한 일을 했는데 더욱 더 낭패한 인생을 살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포항의 어떤 경찰 분은 자살하려는 사람을 따라서 바다에 들어갔다가 본인의 시체도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가족은 어떻게 할 겁니까? 자기는 훌륭한 경찰관이고 그동안 상장도 많이 받았는데 남아 있는 가족은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고 말았어요. 남편 없는 아내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족을 생각해서 ‘너는 죽어라. 나는 가족이 있다.’ 해서 안 들어가면 되는데 또 자살하는 사람을 막아야 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잖아요. 그러면 자살 못하게 붙잡는 척이나 할 까요? 자기는 물길이 그렇게 셀 줄 몰랐지요. 들어가도 살 줄 알았지요. 그렇게 열심히 경찰 일을 했는데 그 가족이 아버지와 남편에게 고맙다고 합니까? 가족은 가족대로 자기 할 일이 따로 있고.
이렇게 보니까 현실이라 하는 것이 개인 개인으로 조각조각 다 깨지는 겁니다. 모여서 집합이라고 하지만 보게 되면 집합이라는 개념은 없고요 그저 나 중심, 나 밖에 모르는 그런 세상, 그래서 저질로 놓고 안 들키면 되고 들키면 사회가 그렇게 나를 몰아넣었다고 핑계대면 되고 너무 배고파서 그런 짓을 했다고 하면 되고, 그렇게 그냥 버티면서 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어떤 해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해답을 주려는 거예요. 이 세상은 전부 다 각 개인 중심이기 때문에, 각자 자기중심의 해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해답은 사실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개인들은 핑계대지 말고 좀 빠지라는 말이지요. 빠지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내가 너에게 묻지 않는다, 너는 결과물이기에 새삼 너에게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한 분 설정하고 이쪽에 인간을 총괄해서 하나가 대표하는 거예요. 인간을 대표하는 그 아담은 어떤 점에서 우리한테 기쁨이 되느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을 우리한테 묻지 않겠다고 하는 거예요. 누가?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해서 묻지 않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가 없는 입장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결국 남한테 민폐를 끼치는 겁니다.
젊을 때 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연세 많아서도 민폐 끼칩니다. 여러분,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실입니다. 죽으면 괜찮은데 살아있기에 계속 민폐를 끼치는 거예요. 부부사이라도 마찬가지죠. ‘저 양반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여러 번씩 들 때가 있습니다. 밥 해줄 때는 고마운데 ‘저거 죽으면 새로 장가가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 때가 있어요.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는 거예요. 서로가 서로에게 민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잘했다든지 못했다 하는 말, ‘나는 잘했지요, 못했지요.’라는 말을 네가 내 앞에서는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잘한 것도 잘한 것이 아니요 못한 것도 새삼스럽게 못한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한 밥 달라고 외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강아지도 밥 달라고 하는데 사람이야 오죽 하겠습니까? 자식들이 부모한테 밥 달라고 하게 되면 부모가 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해요. 네가 무슨 권리로 나한테 밥을 달라고 하느냐, 그 말이죠. 자기가 무슨 주인도 아니고 돈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자식한테 돈 가져오라고 하는 일은 없지요.
그러면 부모가 하지요. “아이고 내 새끼야, 네 입에 밥 들어가니 그렇게도 좋더냐? 밥 줄게 기다려라.” 이 심정을 자식들이 알까요? 알랑가몰라! 자식들이 그 심정을 모른다는 말이지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 그 말은 너희에게는 너희의 죄 값을 묻지 않을 테니까 제발 입을 놀려도 종알대면서 “주여, 내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말도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것만 잘못되고 나머지는 잘못 안 되었는지 알고 오해를 하잖아요. 네가 살아있는 자체가 주위에 민폐를 끼치니까 새삼스럽게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할게요.” 하는데 다시는 안한다는 그 말이…….
담배 끊겠습니다, 술 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하는데 다시는 이런 짓을 안 하겠습니다, 하는 그 말을 다시는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중요한 말을 했어요. 교회에서 구원, 구원, 하는데 구원 받겠다는 데서 벗어나는 그것이 구원이다. 구원받겠다는 그 구원에서부터 구원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내가 교회 가서 구원받아야 돼, 라는 생각 자체를 네가 포기해라. 그러면 그것이 구원이 될 것이다.” 자꾸 자기 주제를 모르는 거예요. 주께서는 묻지를 않겠다는데 자꾸 ‘나는 죄를 지었으니 지옥 갈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든 천국에 가야 해.’라고 뭔가 시도를 하는데 이 시도는 결국 뭐로 이어지느냐 하면 하나님 미움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을 미워할 마음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을 의미하거든요. 하나님께서는 네가 뭘 시도하지 말고 현재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 너는 그대로 두고 내가 알아서 하마, 라는 것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참 구원 쉽지요. 저는 이런 것을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일식집에 가서 회 뜨기 전에 회 뜨는 요리사가 회 뜨기 전에 칼을 들고 갈기도 하면서 뭔가 사전 동작을 할 때 있잖아요. 요 기분이요, 요 기분. 우리는 그냥 도마 위에 있는 생선처럼 나름대로 퍼덕여요. 마구 퍼덕거리면서 “하나님, 이것은 잘못되었지요? 용서를 구합니다. 복 주세요. 이것은 참 잘했지요? 복 주세요.” 혼자 교회 와서 퍼덕거리고 있는데 주님께서 번쩍 번쩍 벼려진 칼 들고 ‘한 번 요리해 봐?’ 이런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퍼덕거리고 있다고 해서 ‘아이고 퍼덕거리는구나. 불쌍하다.’ 이렇게 봐주는 것도 없고 가만 누워있다고 해서 곱게 봐주는 것도 없고 퍼덕거리든 가만 누워있든 상관없이 칼질은 칼질대로 시행되는 겁니다. 그 칼질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그 퍼덕이는 것이 뭐냐 하면, “네 조상 때문에 네가 살아가는 것이 전부 다 너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 같이.” 네 죄 때문에 죄인된 것이 아니고, 너 말고, 한 사람 때문에 죄인 되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아담이 죄인된 거예요. 우리를 대신해서 아담 한 사람 잘못한 거예요. 아담과 하와가 독, 김장을 담글 때 쓰는 큰 독이 있잖아요, 그 독안에 두 사람이 들어 있다면 그 안에서 새끼를 까면 그 안에 무수한 새끼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백날 까도 그것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서 그 안에서 오글오글 그 아버지와 어미를 닮은 거예요. 그래서 한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 죄 안에 가두어져 있었는데 그 가두어진 상태에서 아무리 퍼덕이고 숫자가 들어나도 독 안에 들어 있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독안에 있는 아담의 자식중의 하나가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번쩍 번쩍 하는 칼을 가지고 칼질을 하는 거예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와서 죄 안에 갇혔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는 죄가 왕 노릇 한다고 하는 겁니다. 죄가 왕 노릇 한다는 이것이 너무 이론적이다, 실제적이 아니다,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하신다면 성경에서는 그것을 다른 말로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한다, 누구나 다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경전을 반복해서 읊게 되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불교에요. 마음의 평안을 얻으니까 은율도 맞춰서 가장 입체적으로 안정감을 얻을 수 있는 곡조와 파동을 찾아서 아이우에오, 이런 식으로 해요. 그것마저 복잡하다고 하나로 딱 뭉친 것이 있어요. 그 하나로 뭉친 것이 뭐냐 하면, 이것은 불교신자만 아는 것인데 알려드릴게요, 그게 “옴~!”이라고 하는 거예요. “옴!”하면 단전에서부터 울림이 생겨나서 온 몸의 경락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반야밀다……, 이것도 귀찮거든요. 하나만 하면 돼요. “옴!”
그것을 가지고 세운 교단이 일본에 있어요. ‘옴진리교’ 그러면 오늘도 옴, 내일도 옴, 옴 하다가 죽는 거예요. 그런데 옴, 하면서 느끼는 게 뭐냐, 그런데 살고 싶어요. 종교적인 요령, 기술 같은 것을 동원해서 순간적인 평화를 얻고자 했는데 항상 옴, 하고 있는데 한 두 시간 반 쯤 하니까 슬슬 배가 고프네요. 살고 싶은 거예요. 뭔가 양식을 먹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백날 옴, 해 봐야 배고픈 것이 해결이 안 되거든요. 가장 현실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죽음에 쫓긴다는 것, 이것은 철학의 대가든 신학의 대가라도 피할 수가 없고 무식한 아줌마도 피할 수가 없어요. 그게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행동은 바로 이 죽음이 온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서 분통을 터뜨리면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행동이라는 것이 나와요. 행위죠. 행위를 톡 깨보면 그 안에 분노가 들어 있어요. 몰랐지요?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미지의 공포에 대한 미움과 도전과 반항과 욕설이 그 안에 소복이 담겨 있습니다. 제 집에 오스트리아에서 온 초콜릿이 하나 있는데 포장지를 벗기면 그 안에 초콜릿 말고도 아몬드니 뭐니 해서 겹으로 되어 있어요. 그게 꼭 뭐와 같으냐 하면 우리의 마음 같아서 우리는 겉으로는 점잖은 행동이 나오지만 안으로는 격동과 분노와 한 맺힘 같은 것이 똘똘 뭉쳐있어요.
그런데 누구한테 그렇게 분통을 터뜨리느냐하면, 글쎄 우리는 그걸 모른다니까요? 괜히 화가 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정신분석학에서 ‘미지의 X’라고 하거든요. 모든 사람의 행동은 어떤 미지의 X에 대해서 그것을 의식하고 느끼면서 그것에 반항하듯이 행동을 하면서 ‘너는 나를 죽인다 할지라도 내가 보란 듯이 살아내고야 말리라.’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 행동으로 나오는 거예요. 자, 어렵게 이야기했는데 이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사망이란 죽을 때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인데 성경에서는 죽을 때만 사망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도 사망의 기운이 펄펄 넘친다, 이것을 가지고 뭐라 하느냐, “사망의 왕 노릇”이라 합니다.
미지의 X, 자꾸만 쫓겨요. 눈만 뜨면 쫓깁니다.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누구한테 내가 쫓긴다는 것을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는데 자꾸 뭔가가 불안하고 공포스럽습니다. 공포스럽기에 남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서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을 찾는데 그것을 고대의 역사에서 찾아보니까 군인들이 전쟁 중에 그토록 공포스러울 때 그들이 찾는 것이 뭔가, 미(美) 였습니다.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남자들이 소주 광고하는 달력의 미인을 보고 소주 마시면서도 달래고 그 소주를 광고하는 비키니 입은 미인을 보고도 달래는 것은 아름다움만이 나의 이 불안과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있다는 겁니다.
군대 위문공연 할 때 아름다운 가수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노래 부를 때 뭔가 사람을 죽이고 싸워야 할 싸움판에서 그나마 정서를 잠간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는 그런 것을 원하는 겁니다. 완벽한 아름다움이 완벽한 나의 진노를 잠시 억누를 수 있는데요 이 완벽이라는 것이 그저 순간적인 균형에 불과하니까 이것이 미치는 거예요. 완벽해, 하는데 곧장 돌아서면 이것이 산등성이의 꼭지 점에 있는 것처럼 완벽해, 에이 시들해, 식상해, 이렇게 다시 내려가요. 다시 올라가서 완벽해, 그리고 곧바로 또 내려가요.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돌을 굴리다가 꼭대기까지 다 왔는데 또 데굴데굴 도로 굴러갈 때, 인간은 뭔가 이처럼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완벽한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더 이상 쫓기지 않으려고 시도하지만 곧장 그 아름다움이 식상하면서 인간은 계속해서 뭔가 원하고 있어요.
그 아름다운 것이 뭐냐, 에스더에서는 힘으로 작용하고 아름다움을 얻기 전에 인간은 무엇을 하느냐, 힘을 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교회 이야기를 해 봅시다. 교회에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잖아요. 은혜를 주신다 하니까 은혜가 공짜고 하나님의 선물이고 행운이라 하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서 교회 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까 그것은 은혜를 원하는 것이 아니고 힘을 더욱더 증강해 달라는 그런 은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망이 왕 노릇을 하니까 사망이 왕 노릇을 해서 오늘날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을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의 대처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힘을 원하는 거예요. 지금보다 힘이 더 세면 뭔가 불안이 좀 없어지겠지, 지금보다 더 부자가 되면 공포와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겠지, 라고 생각하거든요. 얼마면 되겠습니까? 대체 돈이 얼마가 있어야 우리 마음에서 불안과 공포가 없어질까요? 이건희 회장한테 물어보세요. “이만하면 되었지요?” 그러면 이건희 회장이 “삼성은 앞으로가 문제다. 앞으로의 50년이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삼성의 직원들을 재촉합니다. 이래가지고는 망한다고.
돈이 그렇게 많은데 좀 망하면 어떻습니까? “아니야, 완벽한 부자가 되어야 해. 망하지 않는 것.”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많은 힘을 모아야 돼요. 다시 정리하면 한 사람 아담이 지은 죄는 우리는 몰랐었는데 사망이 왕 노릇 해준 덕분에 아담이 지었던 죄의 실상을 우리는 온 몸으로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것을 간단하게 결론으로 내리면 뭐냐, “하나님이여, 힘을 주시옵소서. 살아가는 그 맛을 느끼도록 힘을 주옵소서.” 여유롭게 사는 그 힘, 힘을 원하는데 그 힘은 내가 바로 왕이기에 왕답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힘이 필요한 겁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지요. 나는 왕이다, 라고 이야기해요. 그 사람 왕 아닙니다. 진정한 왕은 나는 왕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가만있는 사람은 왕이에요. 왕이다, 라고 하는 것은 왕 되려고 애쓰는 중이라는 이야기밖에 안되거든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이미 자기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자기를 왕으로 삼은 이상은 남 줄 것 하나도 없어요. 힘을 모으든 아름다움을 모으든 뭘 하든 남 줄 것은 없고 내게 필요한, 다 나를 위해서만 모든 노력과 행동에 나서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미지의 X와 싸우고 버티면서 “힘이 더 필요해. 나는 힘을 더 원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생긴 것이 뭐냐 하면 , 내가 이 세상의 왕이고 신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것 외에는 모조리 다 현실이 아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까지 사망의 왕 노릇을 설명해 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설명할 것은 뭐냐, 은혜의 왕 노릇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사람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것은 전부 다 힘을 달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 말을 뭐라고 위장하느냐 하면,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누가 들어도 거짓말이에요. 은혜를 달라는 것은 은혜의 알맹이로 힘을 실어서 달라는 것이고 결국 힘을 달라는 거예요.
“하나님, 천국가고 싶습니다. 내가 의가 있어야 하니 하나님의 의를 주옵소서.” “의 주면 뭐할 건데?” “그것이 나에게 힘이 되니까요.” 성경에서는 입을 다물라고 했거든요. “너는 도마 위에서 퍼덕이는 생선에 불과하고 너의 죄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 했는데 인간은 자기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하기에 내가 왕이고 내가 신이기에 자꾸 나한테 하나님의 의를 주시면 그 의를 가지고 내가 구원받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그 하나가 아니에요. 벌써 잊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한 분하고 아담 한 분, 이렇게 하나인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로 규정하고 그 나라고 하는 하나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어달라는 거예요.
내가 세상사는 것이 너무 힘드니까 세상살이가 나에게 초점 맞춰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그 말이거든요. 주보 뒤를 한 번 봅시다. 세 번째 줄에 보면「이는 각자 개인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의미를 자기에게 적용시켜 종결해버린다. 자기에게 끌어 모아놓고 결론 내려버렸다. 자신을 유일한 절대적인 한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살아간다.」제가 가락교회 강의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남자는 여성을 알기 위해서 결혼했는데 막상 남자가 결혼한 사람은 여성이 아니고 한 여인이었다는 말이지요.
한 여인 가지고는 여성을 몰라요. 그러면 한 세 명, 아니 한 일곱 명하고 결혼해 보면 여성을 알까요? 여성은 계속해서 X에요. 몰라요. 한 백 명? 백 명하고 결혼하면 여성이 뭔지 압니까? 몰라요. 그래서 자꾸 남자는 여자를 바꿔치기 하고 싶어요. 그런데 여자는 참 다행스럽게 남성과 결혼했는데 한 남자만 만나도 남성에 대해서 다 알아요. 그래서 여자는 또 다시는 결혼하기 싫어해요. 왜, 남자에 대해서 다 알아버렸으니까. 남자는 여자를 갈고 또 갈고, 물론 현실에서는 안 되니까 머릿속에서만 그렇지만, 갈고 또 갈고 백날 해도 여성을 몰라요.
현실이라 하는 것은 항상 이처럼 뭔가 미지의 것을 몰라서 쫓기고 못 가져서 쫓기고 불안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은혜 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은혜를 달라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내가 알고 있던 그 힘이 모자라니까 “하나님이여, 뭐 하십니까? 전능하시다면서 폼만 전능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힘만 팍팍 주시면 나도 섭섭지 않게 헌금 팍팍 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거래관계로서 교회 오는 겁니다. 이 시점에서 다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제발 자기 자신을 좀 놓아주세요.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그 하나에 우리가 해당이 안 됩니다. 우리 잘못도 아니니 제발 자책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뭔가 가져야 구원받는다고 특별한 무엇을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리고 우리의 운명은 우리 선에서 결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말립니까? 아무도 말릴 사람이 없어요. 율법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살아가는 죄인인 것을 더욱더 보이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 개인적인 힘으로, 나의 힘으로, “주여, 나는 버텼습니다. 다른 사람은 죄를 지었지만 나는 버티고 또 버티면서 죄짓지 않았습니다.” 하는데 제발 버티지 마세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내가 버틴다고 해서 버텨지는 것이 아니고 옆 사람이 떠밀면 떠밀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혼자 착하고 싶다고 해서 선한 인간이 될 수가 없습니다. 조직이라는 것이 그렇고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기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현실은 나쁜지 알면서도 동조 안할 수가 없고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합세할 수밖에 없도록 세상은 우리를 몰아붙이는데 거기서 독자적으로 ‘나는 그래도 양심껏 했다.’ 하는 핑계는 안대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왕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착해야 되지요? 왕이 망나니가 되면 안 되지요?” 라는 식으로 묻는데 그것은 왕과 왕의 자리를 혼동해서 그래요.
왕을 보고 착하라, 훌륭해야 된다, 이런 것을 요구할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 왕은 자리가 왕을 만들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가 왕을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박 근혜 보고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대통령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개인의 성격과 자질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나의 나 됨은 손에 만져진다는 그 점이 나지 이 나가 착할 때만 나고 나쁜 짓 할 때는 나가 아니라든지 그런 것이 있습니까? 내가 나한테 적용하는 원칙을 남한테도 적용시켜야 될 것이 아닙니까? 나는 나쁜 놈이 되어도 살아야 된다고 그 권리를 주장하려면 남도 그렇게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같이 인정해 줘야 되지 않습니까?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그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하면 안돼요.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들 다 버려놓는 거예요. 힘겨루기 대회에요. 누가 은혜 많이 따내고 누가 힘 많이 따냈는가, 누가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아서 성공했는가, 그 보이지 않는 암투, 시기, 질투, 이런 것들이 교회를 완전히 망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를 믿으면 안돼요. 그걸 도가니라고 합니다. 죄인들이 모인 도가니. 그렇다면 성경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은혜가 뭐냐, 이제부터 그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은혜 주옵소서, 힘 주옵소서, 그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고 엉터리에요. 그 은혜를 은혜로 알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5장 9절에 보면 바로 왕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감동적인 이야기를 했어요. 뭐라고 했느냐,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 이 나라를 나가야 합니다, 하는 이야기가 바로 왕 입장에서 보기에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완벽한 거짓말이라고 바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바로의 심정을 백 프로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사실은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이 있다고 우기는, 우리 자신이 뭔가 쫓기는 것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신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를 받으려고 설치는 일종의 조작되고 위장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 예수님이 있다는 것이 전부 다 거짓말일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 속에 있는 기본적인 본심을 고맙게도 남들이 이야기를 해줘요. “여호와가 있다? 모세가 아론을 보내서 사흘 길 어쩌고 광야에서 뭐라 여호와를 섬겨야 된다고? 이것들이 노동하기 싫으니까 온갖 것을 다 지어냈구나. 여봐라! 저들에게 짚을 주지 말고 전과 같은 숫자만큼의 벽돌을 더 굽게 해서 그들이 이런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게 하라.”고 바로 왕이 명령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히브리인들은 동의를 했습니다. 아, 이게 바로 이 세상이 죄 아래 갇혀있는 진짜 현실입니다. 하나님 믿는다고 말들 하지만 막상 자기에게 곤란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닥치니까 그만 하나님이 보낸 자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심정입니다. 이 말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뭔가 기대하고 있어요. 기대하고 있다는 것은 그 기대를 안 들어줬을 경우에는 항상 내가 믿는 하나님마저 부정하고 미워할 마음준비가 이미 장착되어 있다는 거예요. 한시도 우리는 하나님을 안 미워하는 순간이 없어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늘 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리의 진짜 현실을 제대로 이야기해요. 세상은 너희를 거짓말로 간주하는데 놀라운 것은 너희들도 거기에 동조한다, 는 겁니다. 언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동조하고 싶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출애굽기 13장 1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너의 아들 중 모든 장자 된 자는 다 대속할 찌니라.”
여기 대속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대속!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여, 제 힘으로는 구원 못 받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사오니 하나님께 저 대신 하나님의 의가 되어주세요.” 우리가 이렇게 요청해서 우리를 구원한다면 그 대속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요청에 부응해서 예수님 보내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트릭을 쓰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일 경우에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주님께서 익히 아십니다. 따라서 도마 위에서 파닥거리는 광어 같은 생선처럼 일체 우리에 대해서 기대를 안 합니다.
왜, 우리는 기대하면서 그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항상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아예 우리에 대해서 주님은 기대 안 해요.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아담과 이쪽 사이에 이미 일이 끝나버렸어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내가 어떤 불만을 품든지 어떻게 쫓기든지 간에 이미 끝나버린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도 죽기 살기로 그저 살아야 돼, 살아야 돼, 라는 모습들을 보이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만 잘해주면 감사, 못해주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그 모습까지 이미 전부 다 예정된 거예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일이라는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하나님, 이것은 나쁜 짓이죠? 내가 또 그런 짓을 하다니. 하나님, 이젠 내가 착한 일 했으니 복주세요.”라고 자기 자신을 자꾸 한 사람으로 생각해서 자기 스스로 어떻게 자기운명을 결정해 보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서 대속을 하니까 한 아들을 보내서 대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 심지어 구원 받아야 될 인간까지도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거짓말로 간주하는 상황, 그런 전제를 일부러 하나님께서 양탄자를 그렇게 깔아놓은 겁니다.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지 마!” 믿는다는 자체도 거짓말이에요. 죄인이 믿기를 뭘 믿어요.
지난 시간에 했잖아요. 죄인인 인간은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다고. 그런데 은혜를 안 주면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문제가 뭐냐 하면 죄가 왕 노릇 하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은혜도 같이 왕 노릇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제가 설명하는 것보다 성경에서 훨씬 더 쉽게 표현하고 있어요. 20절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국에 간을 내기 위해서 간장을 붓거든요. 간장을 붓고 나니 좀 너무 짠 것 같아서 물을 더 부어요. 붓고 나서 맛을 보니 너무 싱거워요. 또 간장 넣었어요. 그 다음에 물 또 부었습니다. 또 싱겁네. 또 간장 넣은 거예요.
국이 죄라면 간장은 은혜죠. 간장의 간장 됨을 위하여 물을 계속 퍼부어 넣듯이 죄는 더욱더 죄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십계명이 해요. 율법이 더한 것은 은혜를 더욱더 은혜 되게 함이라, 더 이상 무슨 수로 쉽게 합니까? 이게 현실이고 이게 세상인데. 쫓기십니까? 쫓기세요. 불안해요? 불안하세요. 그리고 치매 걸려서 죽게 생겼습니까? 돌아가세요. 왜 죽는가, 죽음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신 그 생명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꼭 죽어주셔야 되는 겁니다. 새끼손가락 꼭꼭 걸고, 우리 죽기로 전부 다 약속합시다. 약속 안 해도 다 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전부 죽어야 주님이 우리를 살려낸다는 것이 증명될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이 증명이 돼요. 우리가 죽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난 것도 현실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보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물어보지 않았기에 우리의 죄책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너희가 죽는 것이 너희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너희가 죽는 것이 너희 조상 때문에 죽는 것처럼 네가 사는 것은 네가 착한 일 하고 네가 교회 와서 청소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범죄를 네가 해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속하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네가 용서받는다는 거예요.
여기에 불교가 왜 끼어들고 천주교니 기독교니 하는 종교가 왜 필요합니까? 그 딴 게 왜 필요해요? 기독교가 왜 필요한지. 이게 현실인데, 기독교가 현실이 아니고 천주교가 현실이 아니고 불교가 현실이 아니거든요. 지금 우리는 이 세상에 해답이 없습니다. 왜 해답이 없는가, 다시 말씀드리면 전부 다 내 중심이기에, 자기만 좋아라, 는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뭐든지 안 들키면 잘한 것이고 들키면 재수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은 남이 들으면 정답이 아니에요. 정답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왜, 뭐든지 내 중심이기에.
이처럼 모든 사람은 자기를 일자, 유일한 왕, 유일한 신, 나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백 명이 모여도 모래알처럼 다 푸석푸석 모래알처럼 깨어져요. 출애굽기 14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여기 중요한 것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 애굽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던 편이 훨씬 나았습니다, 우리도 매일같이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장비, 그러한 도구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공로를 빼앗고 탈취해버립니다. 주님의 공로로 죽을 때 까지 살기로, 임시직으로 이 세상을 부여받았는데 우리는 모든 공로를 내 공로로 살아간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주께서 뻔~히 아십니다. 주님의 은혜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우리는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못된 버릇, 물론 우리 잘못 아닌 것은 맞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잊으면 안 됩니다. 내 잘못이 아니든 누구 잘못이 아니든 모든 공로를 나에게 돌리고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내 대신 피 흘려주신 예수님의 공로를 예수님에게 돌리지 않는 더러운 심성, 나밖에 모르는 심성, 이것은 바로 죄입니다, 라는 그 고백은 빠트리지 말고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10년 믿었다고 인간되는 것 아니고 20년 믿어도 마찬가지도 30년 믿어도 자기 몸 편하면 행복이고 해코지 하면 적이 되는 더러운 몸이지만 변명한답시고 계속 버티고 있습니다. 주의 공로를 원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힘만을 증강시키기 위해서 힘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의 모습들, 주께서 익히 아신다는 소식이 복음이고 기쁜 소식이오니 다 아시는 주님 앞에 주의 공로만을 느낄 수 있도록 은혜가 지금 사망 중에서 놀랍게도 사망을 극복하고 은혜로서 생명으로서 작용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