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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a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다니엘

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a -이 근호 목사

제 17강a

오늘은 214페이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70이레를 하기 위해서는 지금 무슨 대목을 언급해야 되느냐 하면 인간의 주체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70이레 하는 것이 70☓이레니까 일주일, 그 일주일을 7일이라 하지 말고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면 7년, 그러면 70☓7년=490년, 그래서 딱 나와서 우리 70이레 끝나는 날이 훤히 나오네,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레’라는 것을 계산할 때 인간의 자아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우리 나름대로의 자아를 형성하는 시간관이 있다 이 말이죠. 그 시간이 365일은 1년, 이레는 일주일이다.

하나님께서 그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인간이 생각하는, 인간이 따지고 있는, 계산하고 있는 이 시간을 가지고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그 시와 그 때는 모르게 감추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몇 년도에 오신다. 19..년도에 오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텐데 2014년도 5월 달에 주께서 오신다.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준비해서 주요소에 가서 기름준비해서 신랑 오시면 영접해라. 구원 시키는데 이렇게 쉬울 수가 없잖아요.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지옥 가는 인간들 불쌍해서 하나님이 천국을 만들어 놨습니까? 2014년도 5월 달에 그때 갈 테니까 기름준비 하고 오너라. 얼마나 쉽게 구원할 수 있는데 왜 그런 방법을 사용을 안 하느냐?

그것은 인간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놨어요. 그것은 인간이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인간이 인정을 안 하려고 해요. 침해 걸린 사람이 자기 침해 걸렸다는 것을 인정을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는 잘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집 찾아올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변은 다 알죠. 집을 못 찾고 지금도 헤매고 있다는 걸 다 알잖아요.

인간도 침해 걸려서 천국을 찾아올 수 없어요. 그런데 본인은 찾아간다는 거예요. 날짜 이야기하고 어느 장소에 가라고 하면 간다는 겁니다. 어느 특정 장소에. 하늘나라가 이때니이까? 또는 다른 말로 이곳입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이때, 이곳, 전부 다 뭐냐 하면 천국과 해당이 안 되고 이 세상 속의 일부입니다. 팔짝팔짝 뛰는 것밖에 안 돼요. 아무리 팔짝 뛰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갇혀있다. 갇힌 자가 빠져나온다? 말이 안 되죠. 빠져나올 것 같으면 그건 제대로 가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갇혀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게 뭔 뜻이냐 하면 못 빠져나온다.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성경을 보고 공부하러 나왔다. ‘왜 나오십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이 답변은 뭐가 문제가 있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답변하겠어요? 만약에 ‘니가 뭔데 구원을 왜 받아야 되지?’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거저 구원받고 싶어요.’이란 말은 안 돼요. 왜냐 하면 먼저 우리로부터 왜 따져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과연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우리가 점검을 안 한 겁니다. 구원받을 자격이 점검되고 난 뒤에 거기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해답이 주어질 때 ‘너 구원 한번 실습 받아봐.’ 이렇게 돼야 논리가 맞거든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는데 ‘이번 가을에는 내 아들 운동회 때 몇 시에 참석하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교도소장이 뭐라 하겠습니까? ‘니 지금 갇혀 있어. 왜 이래, 정신 차려. 침해 걸렸어? 왜 이래. 가기는 어딜 가. 못 나가. 너 15년 남았어.’ 그렇게 된다 이 말이죠.

세상 교도소는 15년이란 기한이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갇혀있어 버리면 이게 15년 정도가 아닙니다. 죄를 적당히 지었으면 어떤 사람은 15년, 20년 되는데 인간이 따먹은 선악과는 스스로 선악과를 세척을 안 하는 이상은 이건 성립이 안 돼요. 선악과 안 따먹은 것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인간은 생명나무 끝났습니다. 없습니다. 선악과를 토해내든지 세척하든지 그렇게 해야 돼요.

성경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새로운 피조물 돼야 된다고 해요. 또 다르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니 니가 다시 한 번 태어나 봐라. 우리가 무슨 수로 다시 태어납니까? 우리가 무슨 수로 새로운 피조물 됩니까? 우리가 창조주 같으면 창조주 내가 나라는 피조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데, 우리는 창조주가 아니고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 입장에서 피조물이 자기를 만들어 버리면 지가 창조자이지 그게 피조물이겠어요? 안 되는 겁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전부 다 이건 사기에요. 되지도 않는 것을 예배당 빨강 건물 만들어서 사람들 모집하게 된 거예요. 이것을 부동산 사기라 하죠. 개발도 안 되는데 돈 받아먹은 거예요. 투자하라고. 십일조 하라고.

오늘 다니엘 9장에 보면 아까 쉬는 시간에 질문했습니다만 24절에 보면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이 정하라고 한 게 누구 아이디어입니까? 다니엘 자기 아이디어에요? 아니면 누구 아이디어죠? 누가 일러준 거예요? 가브리엘이죠. 그럼 가브리엘이 안 왔다고 치면 다니엘을 이걸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죠. 다니엘 본인도 안 되는데 우리가 어떻게 돼요? 본인도 안 되는데.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쳤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죠. 만약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 바쳐서 구원 받을 거 같으면 지나 걔나 지 아들 낳아서 다 잡습니다. 구원이 더 중요하니까. 인생은 짧고 천국은 영원하잖아요. 짧은 인생 안 되잖아요. 길게 살아야 되니까. 어느 집에 딸 하나밖에 없다. 그럼 새장가 들어야지. 해서 아들 낳아서 아들 잡으러 가까운 산에 올라가서 잡아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 그걸 잡을 때 아브라함이 뭐라 한지 알아요? ‘내가 아들 잡아서 구원받는 게 아닌데.’ 이러면 아들 잡은 게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피 흘려서 구원받은 거예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는 어떤 인간이 자기 아들 잡아도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거예요. 행함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니가 예수를 믿은 것이 행함이냐, 아니면 성령의 선물이냐, 묻는 겁니다. 성령의 선물로 온 겁니다. 그렇게 구원받게 되면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못하고 주께서 구원시켜 주려고 믿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창세전부터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으라고 우리에게 성령 주셔서 믿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자기가 믿음으로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이 주신 것으로 예수를 믿게 되는 거죠. 그러면 뭐가 부정돼야 돼요?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도 부인돼야 돼요.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그걸 믿는 걸 믿음이라 해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줘야 되겠죠.

다시 이야기해서 선악과 따먹고 인간은 죄에 갇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 24절에 “니는 올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나머지 모든 일들은 뭐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시도해도 오지 못했다. 이 이야기가 되겠죠. 아무리 인간들이 노력해도 오지 못했다. 기어이 오지 못했다. 그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 같은 경우에는 뭐냐 하면 그래도 온 사람이 있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요, 그리도 예레미야, 다윗 다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떤 부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온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모든 걸 팔고 오라 하니까 그 소리 듣고 가버렸죠. 그 사람이 모든 걸 팔았으면 구원받았겠습니까? 안 됩니다. 팔고 예수님 따라오면 또 예수를 결국 버리게 될 사람 이예요.

그러면 부자 청년이든 백부장이든 소위 어떤 사람이든 예수님께서 건져주셔서만 구원된다는 명확한 결론이 되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건져줬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이 되느냐 하면 ‘내가 그동안 내 힘으로 구원받고자 한 것 때문에 주님께서 피를 흘려야 했다.’는 사실을 안 겁니다.

우리가 구원 안 된다 해서 가만있을 인간들이 아니거든요. 부지런히 찾잖아요. 그런 부지런히 찾고자 하는 것 때문에 정작 예수님의 죽음이 의미 없이 돼 버렸어요. 시시하게 돼 버렸어요. 내가 십일조도 바치고 내가 봉사도 하고 내가 어쩌다 보니까 점점 더 예수님이 거저주시는 피 흘리신 그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겁니다.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나를 무능한 자로 만드느냐, 전적으로 너는 아무리 해도 안 돼, 이런 식으로 자꾸 우리를 구박하고 몰아세우느냐, 나는 십자가는 이제 듣기 싫어.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를 하고 싶어. 십자가 믿는 것도 내 믿음으로 믿고 싶고, 뭐 하는 것도 성령 받아서 내가 기도 빡세게 해서 얻고 싶고, 전부 다 내 쪽에서 시도해서 내 쪽에서 다시 수확을 거두고 열매를 거두는 그런 식으로 살고 싶어.‘라고 하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아닌 거예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그런 사람들을 논문대로 하면 주체라고 할 수 있어요. 인간의 주체란 말은 쉽게 하면 이런 컵이라든지 돌멩이, 라이터, 책, 카메라, 이런 것들은 무생물이라 하죠. 무생물의 특징은 자기주장을 안 한다는 거예요. 컵을 여기 있다가 여기다 놓으면 컵이 반발합니까? ‘이건 내 자리다.’ 라고 돌아가려고 합니까?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은 여기 있다가 여기 가면 ‘아, 이거 내가 맘에 안 드는데.’ 내가 전에 있던 자리를 생각하죠.

그래서 주체란 뭐냐 하면 ‘내가 보고 있는 나를 보는 것,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내가 생각하는 것’ 나는 생각한다. 누가 생각해? 내가 생각하지. 그걸 어려운 말로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다. 그림이라 보면 돼요. 그림은 생물입니까? 무생물입니까? 무생물이죠. 저 화분 무생물이잖아요. 딱딱하잖아요. 때려도 ‘아야’ 하지 않잖아요. 그처럼 인간도 하나의 저런 것처럼 자기를 대상화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 배고프면 되는데 앞에 뭘 붙인다 했습니까? 내가 배고프다.

지난번에 이런 이야기해서 굉장히 어려워졌는데 또 오늘 어려운 걸 해야 되겠습니다. 배고프면 되는데 ‘지금 난 무슨 상태야? 아! 내가 배고픈 상태구나.’ 내가 나를 배고픈 나를 생각할 수 있는 나, 이게 주체라는 겁니다. 주체는 사실은 없는 거예요. 주체는 실체가 없는데 그냥 배고픈 이 몸둥아리만 있는데 주체는 그걸 뭡니까? ‘저 배고픈 인간이 누구지? 나지, 나야.’ 몸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나’라는 것은 나중에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런 주체 있는 것이 나쁜 게 아니에요. 원래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에 이걸 나쁘다고 보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나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바라보는데 그 바라보는 나를 내가 관리하겠다고 나설 때 그게 나쁜 거예요.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고, 지금도 어두운데 이 추운 밤에 길을 헤매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거예요.

내가 뭔가 되고자 하는 게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어디서 나온 더러운 버릇이냐 하면 선악과나무가 있고 따 먹지 마라 하면 ‘아! 따먹지 마라는 나무가 저기 있고 나는 여기 있다.’ 그러면 끝난 문제를 ‘저 따먹어 봐?’ 왜 이런 실수를 했죠? 인간이. 마귀가 그렇게 꼬였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니가 생각한 그 이상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부추긴 겁니다. 내 몸이 그냥 있으면 되는데 마귀는 현재 나와 다른 나를 하나 심은 거예요. ‘니 지금 신이 아니잖아. 그런데 신이 될 수 있다니까.’ 마귀가 신을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인간 앞에 내세운 겁니다.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너는 신이 될 수 있어.’

벌써 신을,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라고 생각 안 하고, 내가 그 자리를 내가 접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도록 악마가 그렇게 부추긴 것은 마귀가 초장부터 인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늘나라에서 대적했던 그런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그 성질을 인간에게 집어넣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인간이기를 만족하지 않고 신 같은 나를 그리워하게 돼 있고 그걸 목표로 움직이며 나서게 돼 있어요.

그러면 그 신 같은 나와 나 사이에 갭이 생기잖아요. 그 갭을 무엇을 메꿉니까? 메꾸는 방법 있어요? 없어요? 애초부터 하나님이 그 메꾸는 방법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요. 허락한 적이 없다는 말은 인간은 비현실적인 존재예요. ‘아! 내가 날개가 있다면 날아볼 텐데.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날개 없는 나를 하나님이 만든 건데 그 날개 없다는 것을 내가 만족을 안 한다고요. 왜, 나는 날개 없어? 그러면 있는 나를 인간은 상상하거든요. 지금 내가 생명나무가 없어? 내가 생명을 따먹는 걸 한번 생각해봐? 이런 게 바로 구원론이 되는 거예요.

주여 어떻게 하면 생명나무를 따먹습니까? 그럼 주께서 ‘니가 뭔데 구원받으려고 하느냐를 한번 점검해 본 적이 있느냐, 점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걸 왜 하느냐? 내가 그러고 싶다는 거예요. ’니가 왜 그러고 싶은데?‘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나도 몰라요.‘ ‘나는 죄를 져도 천국 가고 싶어요.’ ‘왜 그런데?’ ‘나도 왜 그런지 몰라요.‘ 요 미지의 X를 하나님께서는 악마라고 규정한 겁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 바리새인보고 19절에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사람이 하는 일이 기껏 뭡니까? 손으로 씻는 일을 하죠. 그러면 사람이 못하는 게 뭡니까? 자기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음란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 이런 것을 인간이 지배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 했을 때에 마음속으로 간음을 안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없어요? 없다니까. 심지어 여자를 본적도 없는 소경도 간음을 한다니까요. 여자 구경도 못한 소경도 간음한다니까요. 사람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신적 이예요. 왜, 마음속으로 뭐가 있느냐 하면 미지 X가 있다고 하죠. 이 X가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원래 하나님이 딱 만들어 놓은 그 인간을 추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걸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근본적으로 안 맞아요. 마귀 적 이예요. 악마적입니다. 그러니 결국 인간은 악마에게 매여 있고 그건 죄에 매여 있는 겁니다.

창세기 4장 7절에 보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이렇게 돼 있죠?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라고 했잖아요. “죄를 다스릴찌라” 했지만 결과적으로 죄를 다스렸어요? 못 다스렸어요? 못 다스렸죠. 못 다스릴 것을 왜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이야기했겠는가? 그것은 니 주제파악을 하라 말이죠. 니가 주의 명령을 지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겁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주의 명령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소용없게 댐이 터져버린 거예요. 다만 주의 법을 이야기함으로서 뭐가 터져 나오는가를 알라 말이죠. 주워 담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죽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죽게 돼 있는 것을 건방지게 어디 브레이크를 걸어서 지가 방향을 틀어서 천국 간다고요? 이미 죽게 돼 있는 걸, 죽게 돼 있는 방향이 지옥인데 무슨 천국으로 방향을 틀어요? 그건 성경 전체를 주님의 기본 취지를 완전히 모독하는 또 하나의 악마의 생각입니다. 구원받겠다는 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봐도 알지 못하게 만들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평소에 왜 우리는 이러한 성경 내용을 왜 모르는가? 그것은 출발점을 자기 자신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말씀에서 내가 누구냐를 보는 게 아니고 무조건 나는 나고, 나라 하는 것은 확실히 만져 봐도 나는 나고 내가 남인가? 내가 맞지. 이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보고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물었죠. 그 전에 예수님께서 “나는 진리를 위해서 이 땅에 왔다.” 할 때 본디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거든요. 예수님께서 답변 안 하셨습니다. “니가 바로 진리 때문에 나한테 지금 심문하고 있다.” 진리에 속해 있으면서도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미국에 와서는 ‘아저씨, 미국이 여기서 어디입니까?’ 묻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진리 때문에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님이 쥐고 있다 이 말이죠. 본디오 빌라도가 심문하는 것도 어디에 포함됐어요? 진리를 진리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지금 하고 있는데, 지가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이건 출발점이 예수 그리스도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로부터 출발하니까, ‘나는 진리다. 당신이 모른다면 진리하나 보태지.’ 추가 밥 하듯이 밥 하나 추가하듯이 보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람은 기본적으로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성경들을 보시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에서 구원받는다 하니까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겁니다. 믿으라 하면 믿고, 소망하라면 소망하고 사랑하라면 사랑하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성령이 안 오기 때문에.

그러면 사도바울을 아느냐? 알죠.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요? 사도행전 9장에 주님이 먼저 찾아왔죠. 아까 다니엘에 누가 찾아왔다 했습니까? 가브리엘 천사가 왔죠. 아담에게 누가 먼저 찾아왔죠? 하나님, 사도바울도 누가 찾아왔죠? 예수님, 먼저 찾아와서 “사울아, 사울아, 왜 니가 나를 핍박하느냐”

핍박! 정말 진짜 하나님과 우리 사이 관계는 무슨 관계냐 하면 핍박 관계예요. 몰랐죠?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어요. 자기는 건전하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뭐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건전한 쪽에 속하고 율법에는 흠이 없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밑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해도 꿀리지 않는 그런 인생관을 갖고 있었어요. ‘누구야? 나보고 죄 졌다 하는 놈 나와. 나 죄 안 지려고 오늘도 노력하는 사람이야, 누구야?’ 이런 당당한 자아상에, 그것도 자기를 찾아온 분이 그 당시 현지인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지 몇 년 되신 분이예요. 아니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하고 상관하기도 골치 아픈데 죽은 이순신하고 언제 또 이순신 입장을 언제 고려합니까? 내가 이순신 욕하면 오늘밤에 이순신 나타나서 ‘니 내 욕했지?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합니까? 아니잖아요.

결국은 사울이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이 찾아와서 구원받은 거예요. 이 말을 어렵다 하면 곤란합니다. 못 믿겠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걸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곤란해요. 현대 신학 교수들은 이 말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해요. 이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아요? 그래서 몇 사람이나 구원받겠느냐 그러고 있는 거예요. 그럼 한국 교회 1200만 신도들 다 가짜냐? 그거부터 걱정 하고 있어요. 인간은 원래부터 가짜예요. 1200만이 아니고 2천만, 5천만 다 원래부터 가짜예요.

가짜가 정상이고 가짜 아닌 자가 비정상이죠. 찾아와서 구원받는다니까요. 회사 하느냐, 경쟁하느냐, 말아먹느냐, 그건 의미 없어요. 교도소를 몇 번 왔다 갔다 그건 의미 없습니다. 그냥 누구에게나 핍박 받은 분이 예수님 이예요. 그걸 사도바울은 믿었던 거예요. 내가 사업을 하나 안 하나 내가 교인들을 잡아 가나 관계없이 그저 내가 태어난 자체가 핍박하라고 태어난 존재인 것을 아는, 내가 뭘 하든지 간에. 십자가!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에서 하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다 죽은 것이다.

그래서 이 주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70이레를 70☓7=490년을 알았다고 해서 천당 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거 알아도 소용없어요. 그런데 그 490년은 알라고 준 게 아니고, 니는 모른다고 준 거예요. 우리의 눈은 우리가 보지 못하기 위해서 우리 눈을 박아준 겁니다. 왜, 그래야 우리가 본다고 우기기 때문에. 귀라는 것은 우리가 진짜 듣지 못한다 하기 위해서 귀를 주신 거예요. 왜, 귀 있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듣고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편 19편 누가 읽어 보세요.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언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들리는 소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환장할 지경입니다. 인간이 여기 끼어들 여지가 없죠. 언어 없죠. 소리 없죠. 무슨 수로 인간이 주님을 알아요?

우리가 교회가 많다 보니까 교인이 자칭 다 신자라고 하니까 거기 우리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열심히 믿고 하니까 그걸 흉내 내고 싶고, ‘저 사람도 교회 가서 구원받으면 나도 교회 가서 구원받겠다.’ 하고 모방을 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을 보게 되면 이게 전부 다 서로, 서로 사기를 치고 있었던 거예요. 아무도 구원 안 받아 놓고 구원 받은 척들을 하면서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바바리 맨처럼. 볼 것도 없으면서 바바리로 감추고. 들리는 소리도 없고 언어도 없는데 무슨 수로 알아요? 그런데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죠. 요 이야기가 신약 로마서에 오게 되면 이게 뭐냐, 복음이라 해요. 복음의 특징이 이래요. 복음의 특징은 여기는 언어가 없고 소리가 없죠. 복음의 특징은 오히려 소리가 있어요. ‘예수 믿으라.‘고 외치잖아요. 소리가 있는데 소리가 있어서 우리가 알아채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래서 소리가 있어도 없는 거와 마찬가지로 됐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 나타나도 그들은 그게 모방이 안 돼요. 그걸 사도행전 2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제가 지금 생전 처음 듣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이런 이야기가 내 영을 육체에 부어주니까, 안 부어주면 뭐가 안 돼요? 2장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게 안 돼요. 성령이 오지 않으면 이게 안 돼요. 사람들은 성령이 안 와도 이거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대학생들, 성가대들 성령 안 받아도 주의 이름 부르고 노래 부르고 난리 나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을 가리기 위해서 노래를 불러요. 음악을 만들어서 부른다는 것은 그 음악으로 진짜 하나님 만난 것을 대신하려고 위장한 겁니다. 욥이 하나님 만났을 때 찬양했습니까? 안 그러면 입을 다물었습니까? 재를 뒤집어쓰고 입을 다물었어요. 천사들이 찬양할 때 그때 이사야는 뭐라 했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했습니다. ‘아! 저 노래 곡 괜찮다. 내가 따라 불러야지.’ 이러지 않았어요. 그냥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알게 되면 내가 바로 옆에 있는 강도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강도의 얼굴이 내 얼굴이다 말이죠. 그 강도의 얼굴에가 내 얼굴을 교체를 시켜도 괜찮아요.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강도 있잖아요. 거기다 내 얼굴을 거기에 걸쳐 보세요. ‘쳇, 예수 그리스도 있어도 내 일 도와주지도 않고 전세 올라도 전세금도 안 주고…’ 예수님 옆에 있어도 자기 속의 욕망만 달성하려고 ‘빨리 나 구원해줘. 빨리 내 가슴앓이 하는 걸 해결하란 말이야.’ 이런 식으로 티를 내니까 구원받지 못한 강도 얼굴은 누구 얼굴입니까? 내 얼굴로 갈아치우기 해도 마찬가지에요.

옆에 있는 강도, 구원받은 강도가 ‘예수님, 오늘밤에 날 기억해 달라.’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어떻게 구원받았죠? 예수님 피로 구원받았죠. 또 옆에 ‘오늘밤에 …’ 이런 소리해서 구원받는다고 전부 다 집에서 십자가 만들어서 한 소리 하지 말고. 인간이 살아가면서 강도한테 하는 역할을 한 거예요. 물론 지금 와서 강도 짓해서 역할 할 필요는 없어요. 일부러 잡아가라 해서 체포돼서 일부러 그 짓 할 필요 없습니다. 그 짓이나 이 짓이나 질은 똑같은 질 이예요. 십자가 앞에서는 그래요.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십자가 피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오늘 일어났던 어떤 일도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조성해 낸 일입니다. ‘니가 진짜 나를 사랑하느냐, 니 엄마나 가족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니 몸을 사랑하는지, 니 체면과 자존심만 사랑하는지, 다시 한 번 이런 일을 통해서 도대체 살아온 것이 누구 덕으로 살아왔는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제 몸의 주체는 제가 되어서는 안 되고, 현재 제 몸의 주체는 주님이 되어야 마땅합니다.‘라는 고백을 우리가 해야 되죠. 머리가 세어지는 것도 할 수 없어요. 머리도 주께서 세게 하신 것이고, 또 염색 해야죠. 그래서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몸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라는 말이 그 정도로 중요한 거예요. 쉽게 정리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체입니다. 주체라고 우겨요. 타고나기를 죄가 살아있어서. 거기에 주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해서 주체자로서 그냥 주체 자가 아니고 핍박 받는 주체, ‘니 때문에 내가 힘들다.’ 하는 ‘니가 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정작 사랑해야 될 내가 니 사랑으로 밀려버려서 내가 힘들다.‘라는 식으로 찾아오실 때 우리는 그동안 내가 주체라는 이것은 허망한 것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깨닫죠.

사나 죽으나 우리는 누구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주체가 허물어졌을 때, 주에 의해서 깨어졌을 때, 부정당할 때. 부정당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의 피를 아는 말씀이 우리에게 쳐들어 올 때입니다.

그렇다면 70☓이레는 뭐냐, 우리가 십자가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시간관, 역사관, 이걸 부수는 그러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쳐들어오는 겁니다. ‘니가 해석해 봐라. 맞는 게 있는가.’ 이렇게 맞추고 저렇게 맞춰도 어떤 해석을 해도 전혀 안 맞게 돼 있어요. 왜 해석을 할 때 나의 시간관이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가 마땅히 구원받을 자라고 자처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마귀적인 해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구원 될 자는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는 해석이 나와야 되는데, ’나도 예수님 덕분에 나도 좀 삽시다.‘ 이런 식으로 한 다리 끼려고 들어가면 이미 해석은 그건 오기입니다.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아들은 오직 한분, 예수님밖에 없어요. 우리는 지옥 가도 마땅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모든 구원을 누구한테 일임했나? 예수님한테 일임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들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이걸 누구 앞에서 이야기했습니까?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했죠. 바리새인들은 한분의 하나님만 섬겼어요. 한분, 여호와만. 하나님이 한분이기 때문에 한분인 그 하나님은 우상이 되는 거예요. 그들이 바알 섬겨서 우상이 아니고 자기 하나님을 섬기는데 그게 바로 우상인 거죠. 왜, 자기의 주체가 거기에 가미된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의 주체가 가미된 하나님, 우리 민족은 반드시 구원받는다는 그러한 전제 요건이 포함된 하나님은 그건 가짜 하나님입니다.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만 아들이라는 걸 드러내는 하나님, 다시 말해서 아들만 나타날 때 그게 하나님 이예요. 아버지는 ‘나만 보냈다.’는 것을 나타낼 때 그걸 믿는 자가 하나님 아들 되거든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 이예요. 그러니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들이 원해서 그래요. 내가 원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죄도, 강도 같은 그런 망발해도 그것조차 구원받게 된 것은 아드님이 원해서 피를 흘린 그 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우리 죄를 묻지 않기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죄를 묻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생산해 줘야 되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가 어떤 짓을 하기에 이런 것도 묻지 않느냐,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그것이 우리 자신이 아니고 예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나 구원받았다.’ 이 구원받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고 예수님만 드러내기 위해서 주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19절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스스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언급한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감춰져 있다. ‘하나님은 너희들은 몰라.’ 그런 뜻 이예요. 너희들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을 모른다. 아들만 아는데, 아들만 안다는 하나님을 너희들은 안다고 했으니까 한번 비교해 보자. 너희들이 하나님 한번 내놔봐. 내가 아는 하나님 내볼게. 둘은 충돌했고 그리고 인간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모든 인간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그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 완전히 폭로됐습니다.

그렇다면 70이레가 뭐냐, 바로 인간이 70이레를 해석하는 와중에서 인간의 감춰진 죄를 들춰내기 위해서 70이레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70이레 알면, 기한이 있다 하니까, 끝이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끝만 알면 끝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역사에다 지점만 이렇게 점만 콕콕 찍어서 그때만 기다리면 우리는 능히 구원되겠네. 라는 의식을 갖는 것 자체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완전히 깡그리 잊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심판을 다 누구한테 맡겼다 했습니까? 아들에게 맡겼죠. 그걸 그 당시 누구한테 이야기했다? 바리새인에게 한 거예요. 바리새인은 우리들의 대표자입니다. 같이 선악과 따먹은 입장이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내뱉은 이야기는 사실 우리 속에 내뱉고, 바리새인의 행동은 평소에 우리가 행동 이예요.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는다는, 이거 바리새인들이 갖고 있는 행동 아닙니까? 우리 중에 누가, 누가 착하나, 바리새인들이 했거든요. 이 바리새인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 믿고 하는 인간들의 행세 바리새인들이 다 해주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모든 심판을 내가 한다.” 하니까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죽여 버린 거예요. 왜, 심판이 아들에게 있다면 그동안 내가 심판 안 받기 위해서 한 모든 짓거리는 이건 그동안 소용없는 짓을 한 거예요. 우리가 그동안 구원에 아무 보탬이 안 되는 짓들을 해온 거예요.

사람이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짓을 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뭔가 아직도 가치가 있다고 미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 씨, 내가 이정도 구원받았으니까 이정도 헌금하면 받아주겠지.’ 그게 엉터리예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러니 도대체 이 세대에 복음을 아는 선지자가 있다는 게 이건 차라리 해가 두 개라는 소리와 같은 소리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와 마찬가지 이야기예요. 이걸 누가 믿습니까? 내가 어떤 걸 해도 구원에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을 이걸 어떻게 믿어요? 이게 우리가 기껏 해야 바리새인 하수인들에 불과한데. 사람들이 하는 것은 자기 것이 있게 마련이고, 자기 것을 어느 것보다 아끼기 마련인데. 주께서 다른 사람 것은 뺏어가도 내 것 뺏어 가면 화나고. 얼마나 화났으면 자살하겠어요? ‘나 이거 없이는 못 산다. 이거 없이 못 산다.’ 분명히 인간은 뭐 있어요. 결혼한 아줌마한테는 딱 깨놓고 자식. 그러면 결혼한 남자한테는 뭐죠? 체면이죠. 자존심.

어떤 남편이 25년 만에 처음으로 라면 끓여먹은 사람이 있답니다. 그동안 마누라가 다 해줬는데. 자존심이 대단해요. 결혼 한지 25년 만에 라면 처음 끓여먹은 사람. ‘어디 남편이 라면을 끓여? 아내가 끓여야지.’ 이런 식으로 버틴 게 25년이라. 그러니까 결국 남자는 뭡니까? 남자는 가족도 아니고 지 체면, 나 성공한 사람이다. 자기체면. 여자는? 여자는 난 시장에서 노점에 있어도 내 자식만 잘되면 나는 만족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 자식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 그런데 그 자식을 남편이 건드린다. 남편 죽여 버립니다. 내 자식이니까. 용서가 안 되죠.

요한복음 5장 38절에 보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 나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 보내신 자를 안 믿죠.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못 받죠. 그러니까 아까 사도행전 2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그 다음에 뭐 온다? 성령이 오게 되면 마지막에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너희 자녀들은 예언하고. 이게 전부 다 예언, 환상, 꿈, 이게 전부 다 공통점이 뭡니까? 그러니까 오직 주의 이름만 불러야 구원받는다. 이 사실 아닙니까? 이게 성령 받는 기적이 있어야 돼요.

옛날 성신에 의한 기적이 뭐냐 하면 해가 멈추고 홍해바다가 갈라졌고 그런 기적이 있었잖아요. 그 기적은 백날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성이 무너져도 구원 받았습니까? 여리고성 무너져도 구원 안 받았잖아요. 정말 영원히 구원받는 것은 그런 바로 옆에 홍해가 갈라져도 구원 받았습니까? 그 사람들 홍해 바다 건너가도 멸망됐습니다. 진짜로 구원되게 하는 것은 뭐가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성령이 오게 된 증거를 대라 하면,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이게 뭔 뜻이냐, 나는 뭘 해도 구원받을 입장이 못 되었다. 내가 구원되고자 노력하니까 구원해주는 게 아니고, 내가 구원되고자 노력해서 ‘예수 믿어줄게.’ 해서 구원된 게 아니고 주께로 성령이 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이 온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에 대해서 끝까지 화를 내는 자가 누군지, 바로 미지 X, 미지 X는 그런 것이 용서가 안 돼요. 어디 갇힌 주제에 어디서 탈출을 기도하느냐 이 말이죠. 예수님이 광야에 있을 때 성령을 보내서 누굴 만나게 했습니까? 미지 X를 만나죠. 사람들은 몰라요. 그런데 주님한테는 정체를 드러냅니다. 마귀가. 무덤에 있던 청년이 귀신 들렸을 때 사람들은 몰라요. 그냥 병자인데 주님 앞에 나타나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를 멸망하러 왔죠?’ 결국 우리 인간은, 인간을 멸망하러 온 자에 예속되어서 이 세상의 삶을 꾸려가며 살고 있는 중입니다. 탈출? 꿈도 꾸지 마세요. 안 됩니다. 노력? 노력은 해보세요. 소용없는 노력이었어요.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할 때 그분이 이 몸의 주체가 그분이고, 내 주체는 내 몸의 하등 소용없는 그냥 ‘내 꺼’라고 우기는 그런 나쁜 짓만 유도하는 그런 자아로 살아왔다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 하니까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차라리 눈을 한번 감아 보세요. 뭐가 보입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죠. 그러니까 차라리 눈이 있는 게 원망스럽죠. 눈만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내가 안 보이는데, 눈을 뜨고 거울을 보니까 내가 보이고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하는 게 보이고, 차라리 눈 박히고 귀 달린 게 어떻게 보면 원망스러워요.

요한복음 9장에서 “니가 본다고 하니까 소경이다” 차라리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하니까 차라리 니가 보는 거다. 니 자신부터 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주님을 보겠습니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합니다. ‘나는 평생 죄인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가락교회-70이레 논문(틈)130404-17강a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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