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30강, 31강) 세상, 교회의 과오 130418
유튜브 (30강, 31강) 세상, 교회의 과오 130418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30강
31강
유일자(IP:116.♡.234.248)
13-04-23 17:10
30강-YouTube강의(세상)1304018-이 근호 목사
제목은 세상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는 좀 안다고 자부하죠. 성경은 이 세상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지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됩니다. 성경에서 세상은 이스라엘과 만나면서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그 성질도 드러나고, 성격도 드러나고 구약 출애굽기 5장에 보면 애굽이라는 나라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와 아론을 만나게 되는 대목이 나옵니다. 모세와 아론은 애굽 나라의 바로왕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거기서 모세와 아론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나를 보내서 우리 민족을 가지고 광야에 가서 하나님앞에 절기를 지키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왕이 정말 세상적인, 참으로 인간적인 멋진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여호와라는 신이 보냈던.. 불쑥 내 앞에 나타났는데 거기에 대해서 이 천하의 바로 왕이 쫓아서, 기죽어서 예. 보내드리겠습니다. 네. 섬겨야죠. 이렇게 나올 리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오늘 강의의 핵심이 되는 “세상이라는게 뭐냐.” 가 얘기입니다. 세상의 진면목은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 앞에서 그들의 반항을 통해서 세상이라는 것이 아하! 이런 거구나. 하고 그 본질을 드러내게 돼있습니다. 출애굽기 5장에 나오는 그 바로 왕의 얘기를 우리가 좀 더 들어 봅시다.
바로왕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 히브리인들이 지금 이 나라에서 많은 노역을 하고 있는데, 노역하는 그들을 대표해서 모세와 아론이 등장해서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되니깐, 우리 민족을 광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시오.” 이렇게 나왔다 그 얘기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바로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게을러서, 너희들이 일하기 싫어서, 노역을 하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 섬긴다는 것을 빌미로 핑계 삼아 노동을 쉬고자 하는데, 9절에 보면, “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이렇게 지시합니다.
바로 왕이 자기 부하들에게, 지금 모세와 아론이 하는 이런 이야기는 자기 민족, 자기 백성들을 쉬게 하려고, 꾸며낸 거짓말이기 때문에 말려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역의 강도를 더욱더 심하게 하라고 부하에게 지시를 하죠. 출애굽기 5장 9절에서 그들은 말합니다.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뭐가 거짓말이냐 하면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데리고 간다고 하고, 따로 모집 한다는 자체가 바로는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은 뭐냐. 세상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말씀 앞에서 그것을 거짓말로 단정 짖는 그룹, 그러한 사고방식, 생각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앞에서 비로소 드러내는 세상의 정체입니다.
이 말은 곧 이스라엘은 이 세상 속에 포함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거참 이상하죠. 우리가 아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긴 모든 사람들을 총괄해서 그걸 세상이라 하거든요. 이스라엘이 됐던, 그 누가 됐던 다 같이 인간 같으면, 그 인간들의 집합체가 세상이다. 우리의 상식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세상은 이스라엘을 포함시키지 않는, 이스라엘이 빠져있는 그 나머지가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 믿는 사람은 뭐냐. 세상에 안속한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하나님 믿는 사람의 집합과, 하나님 믿는 사람 빼고 나머지기 집합이 세상이라면,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뭐냐. 기준은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에서 쏟아지는 모든 것을 거짓말로 간주하는 그룹.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교회를 더 자주 나간다든지, 하나님 섬기는데 이쪽은 안 섬기고 그게 아니고, 바로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예요. 출애굽기 5장 9절에, 그들은 지금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
뭐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냈고,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며” 라는 이 모든 내용이 이거는 분명한 거짓말이야. 왜 거짓말인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같은 인간이니깐 우리도 알아야 되는데,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그들만이 알았다는 자체가 그들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거짓말로 추궁해도 마땅하다. 라고 생각한 그 집단을 성경에서는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 나가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도 구원받는다는 말은,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구원받는다는 말은, 죽어서 당장 천당 가는 것 가지고 구원받는다고 얘기하지 않고, 누가 들어도 거짓말일 수밖에 없는, 그 이야기를 이상하게 우리는 진실로 알아먹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로 모여서 교회라는걸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공동체 사용 안 한다고, 그것이 세상이 아닌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세상의 일부예요. 종교란 이름의 일부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의 세상의 일부입니다. 진정한 세상이 아닌 사람은, 그 기준이 성경 말씀의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하면은, 이미 성경의 모든 말씀이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는 사람의 일단의 무리가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을 빼놓고 나머지기를 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그러한 기뻐하는 것을 증거 한다면 바로 그 교회가 세상의 일부고, 천국의 일부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이 소위 하나님 믿고 있는 것을, 세상 사람들도 연구해서 같이 믿을 수 있지는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거예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이 하나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을 자기 조상으로 섬기고, 자기도 거기에 속해서 하나님 믿는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말씀의 완성이 십자가에 대해서는 그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은, 거리끼는 것이고, 듣기 싫어하는 것이고 이방인한테는 미련한 것입니다.
하지만 24절에 보면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여기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십자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자체가 모든 인간에게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리석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희안한 일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기괴한 마음가짐입니다.
이거는 마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모세와 아론 두 사람이 덜렁 나타나서 내 백성 보내라.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 위해서 나를 보냈다. 그러니까 바로 왕이여! 요새 같으면 대통령이여! “내 백성 몽땅 광야로 다 보내게 해서, 사흘 길을 가게 해서 거기서 희생하게 하소서.“ 라는 얼토당토한 말을 불쑥 꺼내서 얘기할 때 바로왕은 뭐라고 얘기하겠습니까?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놓고 현재 공사 중인 이 노역을 중지하려고 너희들이 그런 수작을 부리구나.”라는 말을 당연히 하죠. 방금 제가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에 십자가사건 이후에, 진짜 세상은 뭐냐 하면은, 바로 십자가에 대해서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집단이 바로 세상이며, 그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참된 교회요 성도입니다.
유일자(IP:116.♡.234.248)
13-04-23 17:11
31강-YouTube강의(교회의 과오)1304018-이 근호 목사
31강 제목은 “교회가 사람을 버려 놓는다.”그런 주제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교회 갈 때는 잔뜩 기대를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망난이들처럼 살다가 이제는 신성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내속에 들어오면, 나는 개과천선해 참 훌륭한 인간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천국 백성으로 천사같이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날이 앞으로 창창하다고, 그렇게 기대하고, 교회를 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교회가 오히려 사람을 버려놓는 하나의 장소가 된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죠. 그것은 교회라는 단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전에 교인들이 내는 헌금과, 그리고 부동산과, 그리고 그들의 우정과, 교제와, 교류의 집합체로서 교회가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나오는 여러 가지 단체와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죠.
그렇다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것을 교육시키고, 양육시켜서 오늘 죽어도 천국갈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내는 양육의 장으로서, 충분히 감당하려면 교회가면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야하는가. 하는 이점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교회 갈 때 절대로 기대를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은 사람이 뭔가 기대한다는 것은, 그 기대하는 이상향을 내 쪽에서 이미 굳히고 들어가는 셈이 되죠. 무슨 말인가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을 배우게 되면, 사람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아~ 나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아브라함 나오면, 나도 아브라함처럼 이렇게 살아야지. 모세가 나오면, 나도 모세를 본받아야되. 예수님 나오면, 아~ 예수님의 아픔을 이해 못했구나. 이제는 예수님의 아픔을 안고 살아야지. 항상 기대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기대하는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께서 노리는 바입니다.
인간은 자기 속에 뭐를 담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뭔가 하나의 계기가 되고, 어떤 노력을 하고, 목표를 정해버리면 그 순간부터 자기 속에 담겨져 있던 것이, 그 기대에 찬 희망이, 목표와 강제로 억지로 일치시키려고 얘를 쓰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은 모델을 찾게 되고 이상형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형을 찾고, 모델을 찾는 잔뜩 기대하는 그 자체가, 이것이 마귀가 준 가장 근원적인 죄악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선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 하는 것은, 우리의 예상을 항상 빗나가는 식으로 우리에게 작용을 해버립니다. 내가 이런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나서게 되면, 하나님은 그 기대를 벗어나 버립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겁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정도의 고상한 내용은 주께서 응답하리라. 생각하고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반응이 나옵니다. “ 너가 왜 그런 내용으로 기도하지?” 하고 도리어 묻는 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댑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더 돌릴 것이고, 주님께 감사가 될 것이고, 찬양이 될것이고, 하늘나라가 확장이 될 것이고, 이 한 몸 부서져서 하늘나라의 일꾼으로 쓰여지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고, 성경 말씀대로 새로운 피조물답게 생활하게 될 것이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께서 응답하기 이전에 이미 내 나름대로의 기대치가 한껏 부풀어있는 그 상황에서 나온 나의 이상형을 그렇게 고백하게 되죠. 그래서 기도를 안 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항상 기도를 하게 되고,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데, 기도를 하는 그 와중에서 속에 담고 있던 내용들은 여과 없이 다 노출하게 됩니다.
이정도 고상하고, 건전한 내용 같으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응답 하실 거라는 그러한 희망을 품고 기도하게 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를 거두어서 그걸 죄로 매김 해버립니다. 성경에 있는 온갖 좋은 성경구절은 다 뽑아 기도를 하고, 이 응답을 위해서 내 마음 버리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는데, 하나님은 그것마저 수습해서 그것을 죄로 규정해 버립니다.
왜 그러냐하면 항상 우리는 무슨 말을 끄집어 낼 때 자기 딴에는 순수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내용대로 되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결과가 이런 식의 업적이나, 이런 식의 인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미리 상정하게 됩니다.
모델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모델을. 손 향원 목사님처럼, 주 기철 목사님처럼 아니면 주변에서 남한테 구제 했다고 들었던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처럼, 아니면 이디오피아 가서 병들면서도 고생했던 천주교의 어떤 의사 신부처럼, 그런 것을 미리 생각해서, 그 사람과 접근해 나가고 목표를 잡아서 나가면 그것이 바로 참된 신앙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토록 싫어했던 우상입니다. 교회가 인간을 버려 놓는다는 말은, 교회는 이런 우상적인 모델만 제시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어떻게 일하는가를 말하지 않고, “여러분!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것이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실천해 옮긴다면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신앙인다운 건전한 모습으로 접근할 것입니다.” 라고 목사들이 설교해서 이야기 해버립니다.
교인들은 그 이야기를 또 대단히 좋아합니다. 왜! 지금 나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내가 될 수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이란 것은, 항상 지금보다 향상되고, 진보하고 발전하는데서 자기 인생에 대한 긍정심이 부룩부룩 일어나는 겁니다.
좌절감에 극복하는 것은 뭔가 꿈이 있고, 희망이 있고 자기 자신의 긍정적인 어떤 포부가 보일 때 사람은 주저하지 않고, 불현듯 다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그 희망을 교회에서 듣게 되고 교회에서 제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나 교회 나온 교인들이나 그런 점에서 생각이 일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 그동안 내가 너무 좌절 한거야. 할 수 있어. 나도 저 정도는 다 할 수 있어. 희망을 품고 일어설 수 있어. 지금보다 쉬지 않고 더 노력하면 저 정도 목표는 달성할 수 있어. 이러한 용기를 다시 한 번 갖게 되면 그 용기가 어디에 부여되는가.
내가 설정해놓은 내가 기대한 그 이상형과 목표점을 접근할 수 있다는 식으로 열심히 활동하게 되고, 활동하다보면 몸에 생기도 일어나게 되고 삶의 활력소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게 바로 교회가 사람을 버려놓는 겁니다.
교회는 우리의 발전을 돕는 것이 아니고, 교회라 하는 것은, 우리의 이상과 목표 때문에 뒤에 뭔가 자꾸 잊어 버린게 있고, 놓친게 있다는 것을 끄집어내서 말씀을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가린다는 겁니다.
우리가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긍정적인 삶의 기쁨을 위해서, 생기 넘치는 그런 삶을 위해서 성경말씀이, 또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을 이미 익히 아시고,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버림받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버림받아야 될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서, 이 버림받아야 될 존재가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 그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덕이라는 것을, 그 희생의 덕,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 담겨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유일하게 영광이 되는 존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따라서 나로부터 출발해서 내가 되는 이상형을 생각할 때, 그 틈의 사이에는 뭔가 우리가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된다는 것 때문에 지금보다 더 못한 나라는 생각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피 앞에서 우리는 인정을 하지 안하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보다 더 못해도 되는데, 우리는 자꾸 생각하기를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방향성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악마가 노리던 바로 그 죄악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교회 가서 진정 들어야 할 것은, 더 나아질 필요도 없고, 더 안 나아져도 된다는 그 자유를, 우리는 십자가 피 앞에서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지금 이대로 피를 받아들이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카리스(IP:39.♡.96.250)
13-05-02 22:46
‘교회가 사람을 버려놓는다.'라는 주제에 대한 강의를 듣고 질문드립니다.
강의 내용의 요점은 공감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교회에 대하여는 위의 주제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재 우리눈에 보이는 저마다의 많은 개탄스런 교회(???)들이 과연 교회인가요?
또는, 목사님이 우려하는 사람을 버려놓는 대상이 교회일 수 있습니까?
[엡1:22]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엡1: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계21: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가 교회가 아니던가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가 어찌 사람을 버려 놓을 수가 있습니까?
이근호(IP:119.♡.69.144)
13-05-03 01:46
현실적인 교회 뒤에 참된 교회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교회 개념과 그 기능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교회가 얼미나 실질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는 중인가가 드러납니다. 만약에 이 참된 교회를 따로 설정하게 되면 그 핍박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인든 항상 자신의 옳은 교회라고 자부하기에 '교회'라는 개념을 통일한 것입니다. 따로 참된 교회라고 우겨도 여전히 그 교회는 참된 교회를 배려놓는 교회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참된 교회는 그 참된 교회라고 우기는 그 교회로부터 핍박을 받게 됩니다.
카리스(IP:39.♡.95.122)
13-05-08 06:42
주님이 사도를 통해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듯 주님의 교회도 주님이 주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라는 개념을 통일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교회 뒤에 담겨 실질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는 교회를 '교회'라고 증거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근호(IP:119.♡.69.144)
13-05-08 07:20
'교회'라는 의미 정의를 해놓고 되면 사람이란 거기에 맞추려고 시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마치 참된 교회로 위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날마다의 '회개'에서 본인을 빼게 됩니다. 이러한 자태가 곧 핍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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