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호적 130417
이스라엘 호적 130417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이스라엘 호적(겔 13:8-12)
이근호
13-04-17 21:33
이스라엘의 호적
2013년 4월 1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3:8-12
(겔 13:8,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3:9, 개역)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3:10, 개역)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겔 13:11, 개역)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겔 13:12, 개역)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의 공식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평강을 주시지 않으신다” 참 이상해보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상식으로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평강을 주신다”입니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들끓게 된 것입니다.
참된 선지자인 에스겔이 투입되는 것이 이런 시점에서입니다. 거짓 선지자를 가려내기 위해서입니다. 이 거짓 선지자를 의도적으로 가려내시는 이유는 그래야지만 ‘이스라엘 족보’가 갖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거짓 성도들이 생겨나게 되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참된 선지자를 보내시어 거짓 것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병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 백성들이 좋아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취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가 차단된 입장에서 철저하게 백성들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의식은 이러합니다. “내가 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받아 구원되어야만 된다”입니다.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열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고 싶다고 해서 다 사랑받는 것 아니요, 구원받고 싶다고 다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창세기 21:10에 보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매”
여기에 보면, “내어 쫓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나는 여기 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 찾으면 구원되어야 된다”는 식이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어 쯫으라”가 성사되는 와중에서 구원이 비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같이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이스마엘이 구원을 원해도 말입니다.
이 구분과 결정은 아브라함 가정이 내릴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 가정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도 그들이 구원받을 만한 자격자라서가 아닙니다. 순전히 아브라함이 이삭과 야곱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어느 누구도 할 것없이 다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심판에서 면제될 의로운 자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바다에 도착했을 때, 이스라엘 민족 의식에게는 ‘홍해 건너편’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홍해 바다는 그냥 막혀 있는 곳입니다. 홍해 바다를 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주의 오른손’으로 행하신 심판 행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곧 심판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구원이란 심판의 부산물입니다. 그래야지만 홍해 건너편이 결코 이스라엘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임이 분명해집니다.
분류되어진 본인들이 귀한 존재가 아니라 분류하신 분이 귀한 분이십니다. 홍해 바다 사건은 이스라엘 구원을 위한 사건이 아니라 주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사건입니다. 누가 구원받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분류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시편 1:5에 보면,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주님되심을 보여주시는 기능은 ‘의인의 회중’을 그때그때 마다 분류하시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이스라엘은 곧장 약속의 땅에서 이 주님의 기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신명기 20:16에 보면,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고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3에 보면,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갓난 아이까지 다 죽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조치는 인간들의 자의적인 생각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조치입니다.
즉 약속의 땅이란 철저하게 구원받는 자의 땅이 아니라 약속하신 분의 땅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이 벌리시는 심판 행위가 그대로 이스라엘 성회에서도 도출되어야 함이 마땅합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구원받은 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도리어 본인의 구원마저 본인이 원한 구원이 아니라는 점을 이런 심판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인의 회중’에 든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하고 귀한 일입니다. 신명기 32:8-9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타민족들의 경계는 오로지 ‘이스라엘 호적’의 중요함을 위함입니다. 오늘날 이런 하나님의 구원작업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참으로 구원된 자들은 주변에서 늘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목격하게 됩니다. 즉 “내어 쫓으라”를 늘 경험하게 됩니다. 구원받고자 애쓰는 것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님의 심판 행위 속에서 늘 자비를 만끽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 양의 생명책’에 명단이 들어 있는 자들의 삶이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의인의 회중에 들어간 복은 이 세상에서 불어오는 그 어떤 환란과 궁핍에도 소멸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환란과 궁핍마저 당연한 심판 행위에 속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의인의 회중’ 이외는 다른 행복이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에스겔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하나님의 언약 개입으로 인해 발생된 결과로서만 구원자가 생겨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 호적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4-19 01:25
36강-에스겔13장 8-12(이스라엘의 호적)1304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3장 8절에서 1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3:8-12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또 말하노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러므로 너는 회칠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그것이 무너지리라 폭우가 내리며 큰 우박덩이가 떨어지며 폭풍이 열파하리니 그 담이 무너진즉 혹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것에 칠한 회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것,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 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을 힘들지 않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힘들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린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두 가지를 놓고 본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신다. 이스라엘을 위하기에 이스라엘을 힘들지 않게 하신다.’ 다시 정리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신다. 이스라엘을 위하기에 이스라엘을 힘들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정리가 될 때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말도 안 된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척 힘들 것이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사랑한다면 힘들지 않게 해줘야 이것이 앞뒤가 맞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것 같으면 힘든 것이 당연한데 사랑한다고 해놓고 힘들게 한다면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이니까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누가 들어도 거짓선지자들이 하는 이 이야기가 바른 이야기죠. 거짓선지자들이 하는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에스겔이 이야기한 것이고요, 그 당시 일반백성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힘들지 않고 사랑을 받아서 평안하다.’라는 공식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10절을 보세요.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그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증거가 뭐냐, 평강이 없게 하는 이것이 정답입니다. 이것이 정답인데 거짓선지자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니까 환난이 없고 평강이 있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평강이 없어야 되는데 거짓선지자들은 평강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옳은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겁니다.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힘들게 했을까요?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보고 믿으라고 했을 때에 이 사실을, 이 공식을 우리가 받아들이려면 뭔가 우리의 마음가짐이 평소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평강이 없게 하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나오든지 “하나님이여, 내 인생을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든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합니다.”라고 나오든지 그렇게 돼야 돼요. 그래서 이런 본문이 제시될 때 단순히 옛날이야기로 치우지 마시고요, “요즘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요즘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 하십니다. 우리한테 문제가 뭐냐, 하나님의 뜻 자체는 관심이 없어요. 내 인생이 행복하면 이것은 좋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정상이고 내 인생이 영 맘에 안 들고 불행하다 싶으면 이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나를 잘못 알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아니하고 자기생각만 먼저 우선적으로 챙겨버리면 우리가 거짓선지자가 되든지 아니면 거짓선지자를 좋아하는 백성이 되든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풀어내는 그 핵심은 어디에 있느냐, 9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 것을 점쳤으니 내 손이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여기 “내 백성의 공회”라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땅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자칭 하나님 믿고 자칭 성도라고 우기고 자칭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 뜻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니까 다 넣어준다, 가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의 공회에 못 들어가고 이스라엘 호적에 기록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나님께서 이야기할 때 단박 우리가 정리해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공회, 천국이죠, 성도의 집합, 그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이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천국 가고 싶다, 그러니 하나님이 천국 넣어주세요, 라고 할 때 하나님 쪽에서 하는 말이 “네가 이스라엘 나라의 호적이 들어갈 수 있느냐?” 이스라엘 나라의 호적 이야기를 먼저 거론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호적 같은 것은 모르겠고 내가 여기 있고 여기 있는 내가 천국에 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그러니까 넣어주세요.” 막무가내 밀어붙일 수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요즘 교회사 책을 보게 되면 2천년 동안 온갖 종류의 교파들이 다 등장했습니다. 그 교파들이 자기 교세를 키울 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던 공통점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없어서 불행했는데 이제는 하나님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이 평화롭기를 원하는데 여러분도 평화를 원하시지요?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시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새로운 평화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다들 그렇게 해서 자기행복, 세상평안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큰 교세의 교파를 이루었던 것을 여러 곳에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고 평안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되고 인생의 행복을 원하는 사람도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시중에서 전도하는 모든 전도내용이 그겁니다. “여러분, 인생의 목적이 뭡니까? 성공? 아닙니다. 돈? 아닙니다. 뭡니까? 하나님입니다.” 자기 교세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평소에 사람들이 뭘 원하고 있는지를 간파해서 그들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을 직접 매칭을 시켜주면 그들은 어떤 희망을 품고 교회 오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그들은 구원되었다, 하늘나라가 확정되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거 아니거든요. 성경을 엄청나게 잘못 본 겁니다. 창세기 21장 10절부터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 여종의 자식 이스마엘은 그 하갈 여종과 함께 아브라함 집에서 내쫓으라는 거지요. 하나님은 내쫓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저런 인간들은 천국에 오지 못하니 내쫓으라.” 합니다. 이 ‘내어 쫓으라.’를 알지 못한 가운데서 내 인생을 어떻게 행복하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을까, 세계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되겠나, 내 가정을 평안하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되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창세기 21장 10절 말씀이 들어있지를 않아요.
“내어 쫓으라.” 너무 우리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너무 자기생각만 해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 내 마음 아시지요? 하나님, 내 소망 아시지요?’ 거기에 무슨 내어 쫓으라, 가 나옵니까? 만약 하나님이 나타나서 “누구야? 날 찾는 사람이. 네가 나를 찾았어?” 그리고 천사를 보고 “여봐라! 저 인간 내어 쫓으라.”라고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렵니까? ‘내어 쫓으라’ 의 원칙 ‘이런 자는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수 없다. 내어 쫓으라.’ 하는 그 내어 쫓으라, 의 원칙도 모르면서 자꾸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교회 나와서 시키는 대로 하면 구원받는 거예요? 내어 쫓으라, 의 그 원리원칙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사람들은 이스라엘 호적에 들어오지 못한다, 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영의 하나님이시지만 육을 사용해요. 육을 사용하되 육의 질을 다르게 만듭니다. 육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천국 들어갈 육이 따로 있고 지옥 갈 육이 따로 있다, 사람들 보기에 똑같이 보이는 육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구분이 안 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구분하십니다. 리브가가 아기를 못 낳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져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이 말은 뭐냐, 인간 이전에 말씀이 우선이라는 뜻이거든요.
모든 인간은 인간 이전에 말씀이 우선입니다. 말씀대로 한쪽은 에서 쪽이고 한쪽은 야곱 쪽이에요. 한쪽은 버림받아야 되고 미움 받아야 되고 다른 한쪽은 사랑받고 구원받아야 될 두 족속으로 나뉘는 겁니다. 나는 여기 있고 하나님은 거기 계시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면 그게 야곱 되고 이삭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하나님을 찾았어요. 심지어 과거에도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도 찾아왔었습니다. 하나님이 찾아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어 쫓으라, 의 원리를 가지고 찾아오시는 거지요. ‘함께 유업을 이룰 수 없다.’는 원리.
흔히 성경암송대회하면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성경구절인 시편 1편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제가 만약에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할 겁니다. “악인들은 벌 받을 것이다.”라고 하든지 “악인들은 유황불에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해서 “뜨거운 유황불 맛보기 싫으면 어서 하나님을 믿어.”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구분하면서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만 악인의 특징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의인의 회중이 있습니다. 의인들만 모이는 단체에 가입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습니다. 평소에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가정의 행복, 의인의 회중에 있었습니까, 아니면 돈, 돈, 돈, 돈, 돈, 돈 벼락 맞는 겁니까? 사람들이 로또복권 살 때 의인의 회중에 들고 싶어서 환장을 해서 복권 사는 겁니까? 시집가는 딸 혹은 장가가는 아들보고 “얘야, 너는 사업이 망해도 좋으니 제발 의인의 회중에 들기를 기도해라.” 이렇게 부탁하신 일이 있습니까? “네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인의 회중에 들어야 해.” 이게 시편 1편 5절에 나오는 이야기고 창세기 21장 10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딜 감히 이삭과 이스마엘이 같은 동네에서 살려고, 어디서 그런 건방진, 어디서 이스마엘이 함부로 이 의인의 회중에 들려고! 내어 쫓으라.” 하나님의 지시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아브라함 가정에 내린 그 복이 장차 천국과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에는 이삭 계통만 가야되지 이스마엘 계통은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성경 펼치면 분명히 그것이 나오는데 어떻게 기독교가 세계평화와 관련되어 있는지. 그 이야기는 어디서 봤느냐 하면, 제가 얼마 전에 언양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책자 하나를 봤는데 문선명 선생님 일대기가 나와 있어요. 이 사람이 대체 어떻게 전도를 해서 세력을 모았는지를 보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과 인류평화를 이야기했어요. 가정의 평화, 직장의 평화, 인류공영의 평화, 세계평화. “하나님의 뜻은 세계 평화인데 너희들은 왜 싸우는가? 따라서 이 문선명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됩시다.” 그거 이야기했어요. 내어 쫓으라,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이십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우리 통일교 교리에 대해 알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문선명이가 누굴 닮았나 하니까 김일성하고 많이 닮았어요. 지금 대순진리회도 있지요. 신천지도 있지요. 신천지가 글 써놓은 것 좀 보세요. 신천지신문에 사설 보면 세계평화를 운운하고 있습니다. 통일교가 했던 그 소리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세계 평화 그 이전에는 가정평화,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줬겠지요. 성경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세계평화, 인류평화 구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겁니다. 어떻게 싸우는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여호와의 족보, 이스라엘의 족보가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이야기해 드리고 있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오른 손이 나옵니다. 주님의 오른손은 구원하는 자리가 아니고 심판하는 자리에요. 좀 자세히 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섰어요. 홍해는 건너편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홍해는 저쪽, 건너편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아요. 홍해는 벽입니다. 홍해 건너편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홍해는 이스라엘이나 애굽 백성이나 전부 다에게 막혀 있는 거예요. 따라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갈 데가 없는 것이 홍해입니다.
건너편이 보이는 곳이 아니에요. 그냥 바닷물이 보이는 거예요. 애굽이 들어가든 이스라엘이 들어가든 누가 들어가도 죽게 되어있는 그것이 홍해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우선 아무도 못 가게 가로막는 것부터 시작해요. 이것은 바로 심판입니다. 주의 자리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출애굽기 15장 6절에 나오는데요,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술 때 애굽군사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을 위하여 홍해바다가 갈라지니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홍해저쪽편이 보이는 거예요. 처음부터 “우리가 저 홍해를 건너가야 되는데 하나님은 뭐하십니까? 도와주세요.” 이것이 아니고 애굽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든 인간에게는 홍해바다만 보이는 거예요. 즉 건너간다는 이것은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는 없습니다.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부산 태종대에 조카하고 놀러갔는데 “삼촌, 얼마나 기다리면 저 바다가 갈라져서 일본에 갈 수 있어?” 라고 묻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동해바다가 갈라진 적이 없습니다. 일본에는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지 바다 한 가운데로 가는 법은 없어요. 태종대에서 보면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보인다 하죠. 그렇다면 바다 끝은 항상 이쪽의 끝이에요. 세상의 끝입니다. 이쪽을 떠나서 저쪽으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주시는데 그 열어주시는 것이 뭐냐, 심판행위, 애굽이나 이스라엘 사람이나 못 건너간다는 것은 마찬가지니 도저히 못 건너갑니다, 해서 양쪽 다 심판하는 거예요. 심판행위를 통해서 한쪽은 심판가운데서 거저주시는 은혜로 도저히 건널 없는 것을, 그러니까 심판을 통과할 수 없는 인간을 심판을 면제해줘서 저쪽 새로운 땅에 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은 이미 심판이 면제된 사람만 가는 곳이고 거기에 비해서 심판받아야 될 애굽군사는 당연히 심판받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백성의 족보를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회를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도란 하나님의 오른손이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자르고 심판하는 행위를 계속 하나님의 성도주변에서 매일같이 유발하고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빨리 했는데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할 때 반드시 심판을 동원해야 되는데 왜 그런가, 어느 인간도 당연히 나는 구원받아야 되고 당연히 나는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생각을 아무도 가질 수 없게 하시는 겁니다.
나는 당연 구원 받아야 되고 저쪽은 당연히 지옥가야 돼, 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사람의 의견을 들어서 구원해주는 법은 없어요. 다만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시는데 심판행위를 하게 되면 비로소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가 심판행위가운데서 비로소 구분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판받는 사람은 마땅히 심판받고 구원 받는 사람도 ‘아이고, 심판받아야 되는데 횡재했어. 나는 용서받았구나.’ 이런 느낌으로 매일같이 구원되도록 그렇게 조치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모인 것이 여호와의 회중, 이스라엘 족보가 되는 겁니다.
신명기 20장 10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여러분 듣기에 성경에 과연 그런 이야기가 있던가요, 하고 의심할 만한 말이 튀어나옵니다. ‘약속의 땅에 가거든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이라.’ 하는 겁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갓난아이든 어린아이든 여자든 봐주지 말고 하여튼 사람으로서 호흡하거든 다 죽여 버려라. 너희 말고는 아무도 있지 않게 하라.’는 겁니다. ‘왜, 너희들은 하나님의 기업이기에.’ 한 예를 들어 봅시다. 201동이 천국 가는데 202동은 천국 못갑니다. “야, 201동 천국 가” 하면 “예, 가겠습니다. 잠간 기다려보세요.” 하고 권총이나 기관총 가지고 “202동 계십니까?” 해서 나오는 사람들 마다 다 총으로 쏴죽이고 “하나님이여, 202동 총으로 다 쏴죽이고 왔습니다.” 이렇게 할 마음이 우리한테 있느냐는 말이지요.
추호도 없지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해서 이웃에게 “TV 놔두고 갈 테니 잘 보세요.” 할 정도로 아주 마음이 착한 사람들이지 자기 구원받는다고 해서 구원 못 받는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독한 인간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신명기 20장 10절 이하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그렇게 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특정 인간이게 구원받을 권리나 자격이 있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받았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완악한 백성이에요.
완악한 백성을 왜 구원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에게 한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맹세의 주인공이 누구냐, 그 주인공이 바로 주의 오른손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이거든요. 따라서 예수님은 반드시 심판할 자다,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구원에는 주님의 심판 작업이 병행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어 쫓으라, 오지 않게 하라,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해야 되는데 이런 것을 생각 못하고 “여러분, 가정이 불행하십니까? 일이 꼬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안 믿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이 오시면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고 여러분이 행복하면 직장이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하면 나라가 행복하고 나중에 더 나아가서 온 인류가 하나로 전부 다 행복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드셨기에 여러분 만드신 분을 믿으면 여러분이 다 행복합니다.” 이런 식으로 전도하고 선교할 뿐이라는 말이지요.
거기에 무슨 내어 쫓으라, 가 있으며 주의 이름으로 하는 심판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어요. 완벽한 가짜, 이단이죠. 신명기 32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종들을 이미 정해놨어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정해놓았다는 이 말은 어떤 인종도 하나님이 원하는 인종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이 만드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민족들을 배치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하기 위해서.
나중에 이방민족, 암몬민족도 회중에 들어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신명기 2장 9절에 보면 모압자손은 영원히 회중에 못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렇게 보시면 돼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나라를 정해놓고 “너희들은 빼도 박도 못하게 구원받는다.”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 투입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계속해서 삽입되면서 구원될 자와 구원되지 않을 자가 계속 분류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누가 개입하느냐, 에스겔이 개입하거든요. 에스겔이 개입해서 에스겔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에스겔 이외의 선지자들의 뜻과 비교해 봐라, 에스겔 쪽에 속한 사람은 여호와의 호적에 들어갈 사람이고 에스겔 쪽이 아닌 반대편에 선 사람은 이스라엘 족보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집어넣음으로 말미암아 또 그 시대에 새롭게 분류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럼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되는 겁니까?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는 것이 결정이 된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이 말은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그렇게 되거든요. “예수님, 나도 예수님 믿습니다. 나도 예수 복음 전합니다.” 해서 예수님 십자가를 전한다는 빌미로 자기가 또 새로운 기준으로 등장하는 인간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자칭 보혜사라 하는 이만희부터 해서. 여러분, 사도바울이 보혜사입니까? 아니죠. 사도바울이 예수님 복음 전한다고 주의 오른편에 계시는 구주십니까? 아니잖아요.
주님은 누구밖에 없느냐하면 예수님밖에 없어요.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닙니다. 나도 아니고 사도바울 당신도 아니에요. 베드로 당신도 아닙니다. 교황도 아니고 목사도 아니에요. 오직 우리의 주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 앞에서 나는 마땅히 지옥가야 됩니다, 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에요. 이런 사람에게 가장 큰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뭐냐, 예수님 덕분에 이스라엘 족보에 들어갔다는 사실, 예수님 생명책 그 명단에 있다는 그 사실을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더 행복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 한 열 명 모여 교회 한다고 합시다. 교회가 잘 된다 못된다, 헌금이 나온다 안 나온다, 교인들 숫자가 많다, 예배당이 어쩌고저쩌고, 이런 것이 그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수는 절대 없는 겁니다.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10명 모여서 교회 하는데 벌써 두 가정이 이혼해서 애들 데리고 힘들게 산다, 그런 것이 전혀 교회 나오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왜, 처음부터 주님만 행복으로 믿고 주님만 소망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그게 아닌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주님께서 지금도 이 에스겔 같은 이런 선지자를 보내서 계속 분리작업을 하는 거예요.
“목사님, 교회 다니면 행복합니까?” “교회 다녀서 여러분들이 원하는 행복은 없습니다. 뭐가 행복입니까? 주의 의인의 회중에 드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런 소리 하면 “저는 그 의인의 회중에 드는 그것이 전혀 감이 안 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니까요. 정신을 딴 데 팔고 있고 세상에 교회가 많으니까 비슷하면 다 교회인줄 알고 간판 걸고 예배당 하면 그게 교회인줄 알고 있어요. 성령께서 오늘도 이 말씀, “평강을 원한다면 거짓선지자다. 이스라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에스겔을 통해서,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 무너져도 그렇게 무너지게 하는 그 하나님이 마땅히 심판하는 그 심판에 우리가 같이 끼어들 때 비로소 심판가운데서 구원해 내시는 주님의 그 십자가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행복이요 소망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령으로 선물로 주신 믿음이 이래 흔들리고 저래 흔들리고 이렇게 시달리고 저렇게 시달리고 온갖 세상 유혹의 파고에 휩쓸리듯이 매일같이 휩쓸리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지켜주셔서 의인의 회중에 든다는 것, 거지가 나사로도 들어간 그것,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