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89년도 설교강해, 설교노트
창세기 1989년도 설교강해, 설교노트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http://media.woorich.net/~woorich/성경강해/창세기-1989/창세기1989설교노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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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203.♡.42.222)
13-04-19 23:09
우리교회
08-03-22 14:13
창세기 1989 설교노트
1. 말씀으로 창조 (창 1:1-5)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가 보면 놀라운 일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사건들 중에서, 뭐니 뭐니해도 가장 놀랍고 우리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바로 그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이 이러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을 안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너희 인간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안 했으니까, 꼼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우리 인간들을 보시고 같이 만들자고 해서 힘을 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우리가 좀 할말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홀로 해와 달과 별 등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인간을 제일 뒤에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만들고 난 다음에 등장했으니,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음에 불구하고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달라고 합니까? 마치 자기의 것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의 이러한 마음을 잘 아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욕심을, 탐욕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꿈깨라” 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내 소유가 없는 것을 불교에서는 말도 안돼는 말로 “무소유”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놀랍게도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 어째서 “나의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 어느 것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잘못 이루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반대로, 무슨 일만 생기면 걱정하고 조심하고 끙끙거리며 앓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격이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은 그런 경우도 있어 보이겠지만, 그런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기 성격과 상관없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주님을 믿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맡기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식도 자기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식이요, 아내도 남편도 자기 아내,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집도 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것은 자기가 알아서 안하고, 다 하나님께 맡기니까 책임감이 없어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이 세상 천지가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알고 사는 것이 바로, 창세기 1장 1절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고 무엇을 믿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창세기 1장 1절에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고 계시느냐는 점에 대해서 명심, 또 명심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도 믿지 않으면서 성경 말씀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창세기 1장 1절은 너무나 우리의 자존심을 깨뜨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런 일방적인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고 맙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은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신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무엇하나 맡겨 놓아도 제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자식에게 핸들을 맡기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아버지가 직접 핸들을 잡고 운전을 해야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믿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라보고 믿는 것이 다른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다른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로 말입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전에는 야곱, 즉, 약탈자, 강도에서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람으로 정반대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을 만나고 180도 바뀌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그러한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교회에 나오기 전에는 야곱이었지만, 그 어떤 이름을 가졌어도 야곱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름은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는 야곱과 같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인생이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처럼,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자가 믿음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정신 상태를 가리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 창세기를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절의 중들은 성경책을 다 한 권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읽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을 받습니까? 성경책을 읽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자기 힘만 믿는 야곱 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을 가질 때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적인 사고방식, 믿음은 누가 줍니까?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아니한 자는 성경을 백번 읽어도 소용이 없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는 한 번만 봐도 말씀을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쪽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 중심을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다 만들었다는 내용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과학적으로 생각해서, “야! 이 세상이 이렇게 해서 만들어 졌구나!” 하면서 창조론을 주장합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창세기는 인간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 위해서, 과학적으로 이 지구의 기원을 밝혀 주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서 대답이나 해주시고, 그런 궁금증을 풀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을 야단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 서적이 아닙니다. 과학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성을 증명해 낼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줍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부모에서 왔기 때문에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우리 자신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해야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것을 하지 아니할 때, 그들이 가야 할 곳은 한군데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곳으로, 지옥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을 다 만드셨기에 모든 권리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시키는 데로 살면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리가 다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 순종하며 사는 인생이 구원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제대로 주로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주로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그냥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아니라고,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해서 믿는다 던 지, 복 받기 위해서 믿는다 던 지하는 조건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혹시나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정말 우리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내가 영원히 섬겨야 할 분으로 믿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안됩니다. 우리의 주인으로 믿고 섬기고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때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운전사가 버스를 몰고 가다가 그만 연료가 바닥이 났습니다. 버스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버스 기사가 마침 옆에 냇가가 있어서 거기에 가서 물을 한 바가지 퍼 가지고 와서 그 버스의 연료 통에 넣었다고 해 봅시다. 그 버스가 움직이겠습니까? 안 움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단 한가지, 버스는 기름을, 그것도 경유를 넣어야 움직이도록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졌다면 제대로 된 연료를 넣어야만 버스가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버스 기사가 물을 한 바가지를 연료 통에 넣어놓고 차가 안 움직인다고 불평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그렇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도 없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인생이 행복하니, 불행하니 하면서 불평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럴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버스에 물 한바가지 부어 놓고 차가 안 움직인다고 투덜투덜되는 버스기사와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창세기 1장은 우리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합니다.
첫째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나는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는, 하나님 아니면 없었다는 그 사실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는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의지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온 것을 안다 할지라도 그분을 믿고 의지하지 아니한다면, 그것 역시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면, 이 세상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다 맡기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서, 여전히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이 남아 있고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대해서 걱정하지,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뛰어나시고 잘 하실 줄 알기 때문에 절대로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 15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러면 됐지 않습니까? 죽음마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인데, 우리가 왜 이 세상에 대해서 염려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직접 만드셨습니다. 첫째 날에 무엇을 만드시고 둘째 날에 무엇을 만드시고, 그러한 구체적인 것들을 알면 좋지만 몰라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 만드셨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좀 특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만드시고 난 뒤에, 무엇을 만들었는고 하니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을 만드는데 어떻게 만들었는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그냥 만들었는데, 유독 사람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날은 그냥 좋았는데, 마지막 날에는 이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우리가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의 말만 들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지옥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경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경우밖에 없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은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지옥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짐승 같아” 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합니까? 부모도 모르고 완전히 개망나니 같이 함부로 굴 때, 그런 사람을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아무리 점잖고 예의바르고 효자이고 신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짐승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그러합니까? 참 인간은 하나님께만 예배 드립니다. 누가 주인인가를 제대로 아는 자가 인간의 자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분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 드리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 멘
2. 선악과를 먹은 결과 (창 2:4-17)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 이렇게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주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왔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주일에 당연히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이일을 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우리 지역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까? 안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훨씬 적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교회에 안 나옵니까? 그것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은 이제 곧 추락될 비행기에 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탄 비행기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하기 때문에 비행기 안에서 서로 이야기하고 신문보고 밥 먹고 즐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지금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이 세상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바로 종말을 향하여, 우리 예수님의 심판의 그 마지막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가면 그 누구나 다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를 믿던 사람이던 절에 가서 부처 앞에 백일기도를 한 사람이던, 예수도 부처도 싫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만 믿던 사람이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 앞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광스런 부활의 몸으로 만나게 될 것이요,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습니다.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미리 죽 당겨서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셔서 심판 받아 지옥 갈 우리들을 자신의 피로 대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예수임께서 십자가로 다 지시고 우리를 영생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원래는 그냥 예수가 아니라, “주! 예수를 믿는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고 모시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기는 믿되, 예수님을 이용해서 자기가 한 번 잘살아 보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31절에 분명히 기록되기를,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죽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꼭 붙잡고 주인으로서 데리고 다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영생 길로 천국으로 가는 것이지 우리가 앞장서서, 적당히 해서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만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꼭, 우리는 주 예수를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잘못된 예수를 믿다가는(사실 이것은 예수가 아니라 우상입니다만), 예수 믿고 지옥 가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해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무슨 말씀이 있는고 하니,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까지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나의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 자신조차도 하나님의 것이고, 자식도, 돈, 집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창세기 1장이 밝혀 놓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이 창세기 1장부터 우리의 현실에 집어넣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다” 라고 합니다만,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피땀 흘려서 내가 일구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것이라고 감히 인정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래도 하나님, 저도 열심히 했는데, 제것도 있어야지요” 라고 하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씀의 세계와 우리 현실을 분리해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인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씀하면서도 내 것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려고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본성인 것입니다. 알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싸워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전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천하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뜻한 바대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 이끌어 가신다고 한다면, “왜 세상이 이처럼 엉망인가, 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병은 왜 들며, 교통사고는 왜 나서 이처럼 우리들을 괴롭히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심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정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2장 8,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8,9)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리 인간들에게 주신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나쁜 세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셔서 너무나도 좋은 세상, “에덴 동산”을 주셨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즐거움, 기쁨”이라는 의미인데, 다시 말씀드려서 너무나도 기쁘고 즐겁고 희락이 넘치는 그런 동산을 우리 인류에게,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할 그런 즐거운 세상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고 하니, 10절 이하를 보면 계속 나오고 있는데, 금이 흘러 넘치고 보석이 나오는 그런 강들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 것도 풍성하게 주셔서 모든 것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씀드려서,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마음껏 자유를 누리면서 또 그것을 가지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뭐 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런 세상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은혜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동산 중앙에 선악과를 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가 다 생명 나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선악과를 두신 이유는 인간을 시험해서 타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이 선악과를 먹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런,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선악과는 말 그대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것인데, 이 선과 악의 문제는 하나님께서만 아시는 것이고(창 3:22), 우리 인간들에게는 이런 선악은 알 필요가 없으니, 너희들의 소관이 아니니까 알지 말고, 너희들은 오직 생명 나무의 열매만 먹고 영원히 살아 라고 하나님께서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 나무 열매만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데로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바로 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들어오고, 그만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뒤엉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비극입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인줄 알아야 할 인간이, 드디어 선과 악에 대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좀 잘되면 이것은 자기가 착해서 열심히 해서 잘 된 것으로 착각하면서, 자기 공로인 냥, 자기 자랑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뭐가 잘못되면, 어떤 악한 것이 반드시 있어서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권선징악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신 그런 모습의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그런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인간세계의 잘못된 모습이 누가복음 18장 9절-14절에 보면 나옵니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교입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기가 일 주일에 두 번(월, 목) 금식하는 것, 십일조 드리는 것 등을 자랑하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세리는 감히 하나님께 고개도 못 들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은 선악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기도도 하고 십일조도 하고 불의를 행하지도 아니하고 여자를 보고 음욕도 품지 않고, 한마디로 너무나도 착하다는 것입니다. 저기 저 세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그런 자란 것입니다. 즉, 저 세리는 못된 놈이고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착한 나에게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의 철학, 과학, 의학, 그리고 신학까지 어디 그렇지 아니한 학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들었던 수많은 옛날 이야기들이 다 이러한 내용 아닙니까? 이미 이러한 선악에 대한 생각이 우리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생각을 안하면서 살았습니까?
전혀 이것은 죄된 모습 인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란 내가 특별히 도둑질이나 거짓말하는 것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모든 모습이 다 죄가 되고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모습이 다 죄가 되고 우리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선한 문화가 어디 있습니까? 다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에 비해서, 세리는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어떤 선과 악에 대한 모습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너무나 철저히 깨달았고,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그 생명 나무만을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철저히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는 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래 창조함을 받은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은 바로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입니다.
우리는 에덴 동산을 잃어 버렸고 이제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나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참 모습입니다. 아 멘
3. 생명과 흙 (창 3:13-2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한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에 반해서 그 크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은혜를 사모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 예수님을 믿을 때에는 바로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바로 오직 택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기적임을 깨닫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벌을 내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좋으신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식이 아버지를 대할 때, 좋은 아버지라고 자식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는, 나쁜 짓을 해도 좀 눈감아주고 넘어가는 그런 아버지를 놓은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자식의 태도는 너무나 어리석고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하지만 그 좋다는 것을 자식의 그 좁은 소견처럼 잘못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좋으신 분으로 말씀하면, 받아 드리는 우리들은 대부분이 다, 하나님은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게 해 주시는 그러한 좋으신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좋다는 의미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잘못 오해한 것이 바로 순복음의 조용기 목사입니다. 우리 나라의 성도들 중에 그분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영향을 받아 가지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떤 사람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타고난 모습이 그러합니다만, 제가 순복음을 비판하고 싶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아까운 시간에 그런 비판을 왜 하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자기 좋은 쪽을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벌 내리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좋은 에덴 동산에서 그만 쫓아내고 또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망 선고를 내리고 맙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벌은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무엇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 형벌을 받는 것입니까? 이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 자체가 죄라기 보다는 그것을 금지시킨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의 말을 들어서는 안되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고 순종해야 되는데,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이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고 비록 이 죄가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좀 용서해 주시고, 다음에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타일러 주시면 얼마나 좋겠냐는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용서도 없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고, 남자에게는 평생 동안 저주받은 땅에서 땀흘리고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게 하시고, 여자에게는 아이 낳는 고통을 주시고 한 남자에게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험한 인생을 주시고, 결국 마지막에는 다 죽게 만드는, 흙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가혹한 형벌을 주셔야만 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안 해 보셨습니까? 저만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런 좋으신 하나님입니까? 그야말로 사랑도 없고 무자비하고 무서운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너무하셨다고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창세기 3장 20절입니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전에는 그냥 여자로 불렀는데, 이름을 생명이란 뜻을 가진 “하와”라고 바꾸어 버립니다. 아니, 지금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흙으로 돌아가야 되는 망하는 그런 순간에 있는데, 이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도대체 아담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바로 신앙이라고 믿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될 만한 것을 보고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가운데서, 깜깜한데서 빛을 발견하는, 절망 가운데서 희망을 찾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즉 이 땅이 아니라 바라보는 저 땅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즉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을 이 세상 사람들이 믿던가요? 예수님을 이 세상 사람들이 주인으로 영접하던가요?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의 능력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천국에 가서 생명 책에 기록된 명단을 보고 왔습니까? 그것은 바로 남들은 도무지 못 믿는 예수님과 저 천국을 우리들은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증거입니다. 어떤 분은 거듭남을 자기감정의 확신이라고 말하는데, 사람의 감정만큼 자주 변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구나 하는 사실이 믿어지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참으로 비참한 인생의 모습을 느끼는데, 아담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희망으로 자기 아내의 이름까지 생명(하와)이라고 지어 가면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아담은 천재고 우리는 바보라서 그렇습니까?
아담은 흙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형벌 속에서, 그것이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임을 알았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영원한 죽음으로 돌아가는 의미도 있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축복의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는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 되고, 누구에게는 그것이 회복이 축복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축복이 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벌주시기 전에, 이들을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을 먼저 벌주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뱀은 죽임을 당하는데, 그런데 그 죽이는 일을 하는 자가 바로 여자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아담은 남자라는 의미입니다) 하와가 안되고, 여자가 하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벌을 단순한 그냥 형벌이 아니고, 그 속에는 생명이 살아 숨쉬는 그러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말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담이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고 지어서 불렀던 것입니다.
아담은 똑똑해서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만 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똑! 똑! 계십니까? 여기 은혜가 왔습니다. 문을 열고 받으세요” 그러면 우리는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면 되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죽음도 되고, 축복도 된다고 했는데, 흙으로 돌아간 자체가 축복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흙 속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은혜를 받아서 산다는 의미 정도가 아니고, 나 자신이 완전히 교체되는 것,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 예수 믿기 전의 내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디를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거듭난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이 마지막날에는 영광스런 부활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쭉 살펴보면, 남자가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장로도 남자고 목사도 남자니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남자로 태어나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성경은 남자보다 여자에 강조 점을 둡니다. 남자가 중심인 것 같지만, 항상 그 배후에서 남자를 제대로 남자답게 만들고 이끄는 것이 여자라는 사실을 성경이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아담이 아니라 여자가 생명이 되어서, 후손을 준비하는 역할을 합니다.
“남자 만세!”가 아니라, “여자 만세!”입니다. 여자가 생명이 되어서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자인 예수님을 낳는 것입니다.(예수님은 남자가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여인의 후손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잘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남자라 해도 인간인 이상 별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여자를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풍성하신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왜곡되게 잘못 생각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저주로 착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담은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저주 같은데,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생명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자신이 죽도록 고생하고 흙으로 돌아간다는 그 사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무엇이 저주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축복이고 가난하고 굶주리고 못사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이 세상은 나그네길이고, 마지막 종착역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기차와도 같습니다. 그 뒤에 모든 것이다 밝혀질 것입니다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미리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꿈과 희망이 가득한 에덴 동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한 에덴 동산은 따로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이던 지간에 망하고 싶고, 천국 가기 싫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난 자들만이, 교체된 자들만이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치 못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옛 모습은 정말 날마다 부인되고, 그 속에서 생명 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증거 되고 있습니까?
우리는 비록 거듭나긴 했어도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을 입기 전까지는, 날마다 우리는 우리의 옛 모습과 싸우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이길 수 있음은, 바로 이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승리하셔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승리는 우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두렵고 염려가 되십니까? 다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아 멘
4. 가인과 아벨 (창 4:1-10)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희락의 동산,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으면 되는데, 그만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평생 동안 죽도록 고생하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저주를 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이것이 단순히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그 속에 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닫게 되고,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이라고 짓게 됩니다. 비록 저주받은 땅에서 땀을 흘리지만, 아내와 함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4장에 보면, 드디어 아담과 하와가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가인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내아이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고, 얻었는데,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아이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시였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던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참 기쁘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가인의 동생 아벨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벨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 장자를 더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 가인은 농사를 짓기 때문에 그 농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언뜻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농산물로 보다 양을 더 제물로서 기뻐 받으시는 줄 알고, 가인보다는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제물이 농산물보다 양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실제는 양이 곡식보다 더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만).
하지만 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있어서 제물은 다 똑같습니다. 어린양이라고 해서 특별히 곡식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제물은 다 같습니다. 가인은 농부였기에 농산물을 바쳤고 아벨은 양을 쳤기에 양을 바쳤던 것입니다. 다 자기의 땀과 수고의 대가로 일군 그 결실을 하나님께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것은 거부하시고 아벨의 것은 받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