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09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20130409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409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파르메니데스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 있는데 순서상 바꾸어서 헤라클레이토스부터 먼저하고 그 다음에 파르메니데스 하도록 하겠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란 사람이 유명한 사람인데 현대철학이나 오늘날 과학에서 사실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이 두 사람의 견해가 대립이 되거든요. 이 대립을 왔다갔다는 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철학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에 동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늘 바뀐다는 겁니다. 물이 흘러갈 때 늘 바뀌듯이 모든 것은 자꾸 바뀌는데 그 바뀌는 걸 ‘로고스’라 합니다. 벌써 로고스 나오면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얼마나 앞선 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로고스란 중세신학에서 이야기하기를 신은 있고 신이 로고스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로고스란 뜻은, 뜻보다는 느낌이 뭐냐 하면, 다양하게 변한다는 것을 항상 전제로 깔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한 분이다. 숫자로 하나잖아요. 하나님은 하나인데 어떻게 다양성이 나오느냐? 이 문제에 있어서 옛날 사람들은 로고스를 집어넣었단 말이죠. 로고스란 뭐냐? 헤라클레이토스 이야기한 그 로고스 개념을 그대로 집어넣은 겁니다. 로고스는 뭐냐? 세상의 변화되는 모든 총체를 로고스라 합니다.
불은 항상 불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이 물이 되고, 물이 흙이 되고, 흙이 물이 되고 다시 불로 바뀌는 것.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특정에 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뀐다는 거예요.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변화되는 모든 것의 앞에 있는 불로써 의미하는 겁니다. 불이라는 것은 불이 꺼지면 다시 켜지고 켜지면 다시 되살아나고. 산불 경우에 그런 경우도 있고. 불이 있다, 없어졌다. 그런데 불이 다시 등장한다. 이걸 통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있음은 무로 가고 무에서 다시 유가 되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있다, 없다. 씨스타 노래에 그런 게 있잖아요. 있기, 없기.
신은 한 분이지만 신이 인간을 만들 때는 있다, 없다 식으로 한 거예요. 있다, 없다는 반대니까 모든 것은 자기의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헤겔의 변증법이 나오는 겁니다. 나란 누구냐? 나와 반대되는 것을 찾아야 돼요. 내가 반대되는 것을 찾아서 반대를 통해서 미처 내가 반대를 만나기 전에 몰랐던 것을 반대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감으로써 자기를 발전적인 자아 생각이 더 풍성해지는 겁니다. 더 완벽해지고 완숙해지고 성숙된 자아를 고취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서 나는 잡채밥을 안 먹는다. 그런데 군대 가서 갑자기 잡채밥을 먹었을 때 내가 이렇게 잡채밥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절대 안 먹는 것인데 막상 먹고 보니까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잡채밥까지 먹을 수 있는 보다 완숙하고 성숙되고 발달되고 발전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이것은 기독교 내에서도 그런 게 많지요. 어떤 사람이 기복신앙을 갖고 있다. 헌금 내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알았는데 십일조 잘 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죠. “하나님이여, 남편이 잘 되기 위해서 헌금해놓고 십일조 해놓고 남편 잘 못되면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는데 나중에 남편이 다리 잃고 난 뒤에 그렇게 고집스럽게 교회 안 가던 남편이 교회 간다면, “내가 그동안 너무 기복신앙에 있었구나. 나 잘되는 게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은 역경과 환란을 통해서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남편이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하게 해서 남편도 구원받고 내가 내 복만 챙기는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용하는구나.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새롭게 알 때 이게 헤라클레이토스.
우리가 신앙이라 여기고 이정도 하면 깊은 신앙심이라 여겼는데 이미 그런 아이디어가 기독교 이전에 성령과 상관없이 헤라클레이토스에 다 나오죠. 세상의 모든 것은 반대편을 통해서 다시 자기에게도 되돌아온다는. 자기 안의 대립이나 반대를 통일해서 보다 더 발전된 것을 만들어낸다. 얼마나 중요한 사상을 기원전 540년경에 이미 그런 걸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공부를 안 하고 성경 보면서 깨달았다 하면 그 깨달음이 마치 성령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많지요.
이것만 해도 놀라는데 파르메니데스는 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보기에 감각적으로 보였던 모든 것은 그것은 감각의 대상일 뿐이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침에는 멋있게 보이는 사람이 오후 되면 추하게 보일 때 어느 것이 그 사람의 진면목입니까? 그렇게 아름답던 음악도 나중에 들으면 짜증날 때 그 음악이 아름다웠던 거예요, 짜증난 음악이었습니까?
헤라클레이토스 다시 봅시다. 중요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은 고정된 게 없고 다 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을 했잖아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이걸 ‘실존주의’ 철학이라 합니다. 실존주의철학은 내 대신 내 머리카락을 깎아준다고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내 대신 목욕한다고 내가 목욕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실존주의철학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란 말이 성립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 아니에요. 내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 입장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그 믿음도 아침에 믿었던 믿음도 오후 되면 달라지죠.
똑같은 현상을 보면 파르메니데스는 말하기를 감각적으로 안 것은 고정된 게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 아침에 아름다운 음악도 오후 되면 짜증나고 멋있던 사람도 오래 살도 보면 저걸 남편이라고 믿었나 싶은 생각이 들고. 이렇게 모든 게 달라져도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 ‘일자’ 그 한 분의 여러 가지 현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나중에 플라톤에 가면 이데아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겁니다. 개는 없어요. 살살이, 발발이는 있지만 그걸 모아놓으면 개라는 형상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수박 세 덩이, 3. 사과 세 개, 3. 자동차 세대, 3. 전부다 3이죠. 그런데 세 개짜리 물건들은 있지만 3이라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인간 속에 3이 있는 것은 인간이 찌꺼기로 와서 이데아 세계에 3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3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이에요. 이데아 세계에 3이 없으면 우리는 그걸 3이라고 할 수 없는데 우리는 뭔가 다른 세계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세계를 볼 때 본래 있는 형상을 닮아서 모든 측정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거든요. 그 선배 격인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면서 특징이 뭐냐? 이 사람 말 들으면 다 맞고, 저 사람 말 들으면 다 맞는 거예요. 파르메니데스는 말합니다. 참다운 것은 변하는 것에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분명히 두 가지 의견이 다른데 여러분은 어느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까요? 이게 다 인간의 육에서 나왔지요. 인간의 육은 항상 인간 자신의 생각을 옹호하는 쪽으로 되돌아오게 돼있습니다. 정답은 이겁니다. 내가 헤라클레토스처럼 생각할 때도 있고, 파르메니데스처럼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그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할 때도 있는데 둘 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둘 다 내가 만들어낸 잠복 돼있던 아담의 죄성입니다. 그게 선악과적인 지식에서 나온 거죠.
그러면 성경은 어떻데 답변합니까? “주님이여, 파르메니데스가 맞습니까, 헤라클레이토스가 맞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그것 알아서 뭐할 건데?” “진리를 알고 싶습니다.” “진리를 알아서 뭐할 건데?” “구원받고 싶습니다.” “너는 구원대상 아니야. 왜 네가 구원받아야 돼. 너는 선악과 따먹었잖아. 따먹은 것 맞지?” “따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아야지 저주받을 생각 안 하고 갑자기 거기서 벗어날 생각하지? 하나님께 불만이 많은 모양이지? 선악과 따먹었으면 저주야. 끝. 넌 왜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어?”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자는 모조리 지옥 간다는 자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귀가 계속해서 불만 가지라고 부추기기 때문에 우리는 불만을 가지면서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죠. 구원받고 싶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고 싶습니다. 이런 용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기 욕망대로 내뱉는 겁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안 나오잖아요. 안 나오니까 방법은 뭐냐? 자연의 일부로서 내가 자연을 어떻게 파악하게 되면 그것이 곧 내가 바르게 살고 올바로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라이토스의 이야기입니다. 대충 해결이 됐다고 보고요.
그 다음에 엠페도클레스, 7페이지. 엠페도클레스란 이 사람도 상당히 중요한 것 했는데 중요한 것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싫어요. 왜? 하도 중요한 게 많아서 자꾸 중요하다면 식상해도 중요하지도 않아. 하지만 이 사람의 특징은 알아야 돼요. 세상이란 구체적으로 미움과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어진다. 8페이지. 엉겨 붙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면 흩어지게 건 미움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이 말을 듣고 모든 걸 보세요. 다 맞습니다. 개나 소나 인간이나 사랑은 뭐냐? 붙고 싶은 게 사랑이고 미움은 뭡니까? 제발 떨어져줘. 그러면 이걸 성경에 적용시켜봅시다. 구원은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죠. 사랑이란 너와 내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게 사랑이고, 미움은 뭡니까? 아까 엘리 제사장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저주가 뭐예요? 이가봇, 주의 영광이 떠나는 거잖아요. 주의 얼굴을 가리는 거잖아요. 보기 싫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엠페도클레스가 이야기한 것, 세상의 모든 변화는 심지어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모든 변화는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미움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람은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이것과 “안녕하세요.” 말로 하면 똑같지만 진짜 좋아할 때 “안녕하세요.”와 미워할 때 “안녕하세요.”는 벌써 본인이 알지요. 어떤 질서와 법을 지키라고 할 수는 있어요. 인간의 본심은 어디 담겨 있느냐 하면, 사랑이냐, 미움이냐? 미움이냐, 사랑이냐? 그것으로 모든 본심은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 말씀. 결국 하나님마저 돈이나 내라고 헌금 바치라는 게 아니고, 전도하라는 게 아니고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는 건 뭡니까? 사랑이잖아요. 사랑이란 게 뭐라고 했어요?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주님이여, 하나 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미리 이야기한 셈이 되네. 그렇게 많이 복잡하게 이야기했는데 엠페도클레스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됐나? 내 얘 낳아도.” 같이 살고 싶으면 사랑이고, “아이고, 이 웬수. 각방 쓰자.” 이건 미움이잖아요. 사랑할 때는 늘 붙어 지내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귀찮아서 너는 친구도 없나. 미치겠네, 정말. 남자가 퇴직하게 되면 여자가 꼴보기 싫어서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다 들어오라고 내보듯이. 그게 같이 있기 싫다는 거예요. 그게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뭡니까? 미움이죠. 사랑이 아니니까 미움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벌꿀이 합치는 것, 그리고 모든 동식물이 생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랑과 미움으로 된다. 맞는 것 같지요.
엠페도클레스는 워낙 자기주장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라고 자기의 영원불멸을 주장해서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졌습니다. 내가 불이요, 불이 곧 나니까.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보세요. 이런 신앙심, 사명감,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한 이론을 이론이 아니고 실제인 것을 논개처럼 몸 바쳐서 그걸 증명했어요.
그 다음에 아낙사고라스. 아직까지 소크라테스에 안 들어갔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장들이 앞에 나오고 소크라테스는 회의주의거든요. 회의주의란 모든 걸 의심하는 거예요. 의심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와 비슷하지요. 계속 “아닐 수도 있어. 십자가? 그것만 옳다고 하지 마.” 아닐 수도 있는데 아닐 수 있는 게 뭘까? 계속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게 소크라테스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진리라 했을 때 그것만 안 맞는 경우들을 다 찾아내는 거예요. 3+5=8. 이게 7이면 왜 안 되지? 9면 왜 안 되지를 파악해 들어가는 겁니다.
아낙사고라스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가 나오거든요. 이 사람이 원자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에게 제사해서 신 앞에 진노와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그러한 시대에서 우리는 작은 원자라는 알갱이, 덩어리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이제는 뭘 잊어라? 제발 신이라는 걸 잊어 줘. 신이란 원자로 된 인간의 머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투영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니까 두뇌 세포가 하다보니까 만들어낸 것이 신이지 무슨 신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관찰한다는 뜻은 조금씩 알아가는 폭만큼 믿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관찰하고 받아들이고 도 관찰해서 받아들이고. 논리적인 순서로 자꾸 알아 가면 그 안 만큼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아까 엠페도클레스처럼 내가 따져보니까 불이 맞아. 내가 곧 불이고 불이 신이고 모든 건 하나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에트나 화산 폭발할 때 자기 몸 던졌잖아요. 그 정도로 뭔가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게 있어야지만 인간은 살맛이 난다는 것이 그 시대의 철학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저 돈이나 받으려고 사람 꾀여 장사하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주장에 자기 목숨까지 올인한 거예요.
아낙사고라는 ‘정신’이란 물질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걸 누스, 이성이라 하는데 정신이 씨앗인데 여기서 모든 물질이 나왔다. 물질과 함께 정신도 나온 거죠. 정신주의에서 유물주의로 나가는 거예요. 유물주의가 뭐냐 하면, 네가 말로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많이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내 말이 옳다고 그따위 소리하지 말고 실제로 내놔라.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 그런 소리는 많이 들었으니까 한 달 수입이 얼마고, 결혼하게 되면 어느 아파트에 살며, 통장 보여주며 내놓으란 말이죠. 이게 가정의 씨앗이에요.
이걸 성경해석에 인용해봅시다. 신은 있다. 신은 한 분이다, 두 분이다, 세 분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지 말고 십자가에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느냐. 그런데 문제는 이거에요. 십자가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만 보인다 했으니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의미해요.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다. 복음은 뭐냐? 십자가에 죽었던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복음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복음을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다 아는 이야기란 말이죠. 복음을 믿어야 되는데 왜 자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 못 받는데.
제 이야기는 이런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없을 경우에 하나님 믿는다면 인정하겠는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사건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 믿는다는 것도 엉터리란 게 드러났잖아요. 사도 바울이 원래 그랬던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십자가’가 아니고 하나님을 버리기 위한 십자가뿐이다. 이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게 하나님의 의가 아니에요. 지난 주일에 설교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 지신 그 사건이 의라 했지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복음을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나야 의라면 그동안 하나님의 의라고 믿었던 것은 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여러분 하나님 믿어요?” “믿습니다.” “그러면 형제네요.” 그 소리 하려고 믿은 게 아니고 십자가 믿어야 그게 바로 하나님 뜻이라고 전하다가 순교당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에 의하면, 신이 있다, 없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실제로 모든 물질을 낳게 하는 최초의 씨앗에서 물질이 나왔다. 씨앗하니까 너무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성이란 말이 옳습니다. 이성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기본적인 이성이다. 이성이니까 사람들이 관찰하게 되면 마지막 도달되는 여기는 뭔가 만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탈레스나 아낙시메네스처럼 궁극적으로 찾아가면 어떤 물질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씨앗이. 그런데 씨앗이 원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물질 속에 씨앗이 다 들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보면 뭐가 됩니까? 식물 보고 욕하면 식물이 기분 나빠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식물 안에도 내 안에 있는 나를 나 되게 씨앗이 있거든요. 나라 할 때 정신도 있지만 물질 아닙니까. 식물의 물질은 나무 잎사귀잖아요. 나뭇잎사귀나 이거나 전부다 공통적으로 근본적으로 씨앗에 관련돼있기 때문에 미워하면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신이 무엇이냐, 우주가 무엇이냐 하다가 점차 윤리관을 갖추게 돼요.
사람을 함부로 때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 속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아이디어는 철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제가 계속 강의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데모크리토스 원자론, 9페이지. 아낙사고라란 사람과 데모크리토스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둘 다 원자론인데, 아낙사고라는 질적인 원자론이라면 데모크리토스는 양적인 원자론이에요. 양적 원자론은 모든 원자는 동일한데 모양은 각각 두꺼운 모양, 다각형, 계란형, 꺽쇠모양, 이렇게 다양하단 말이죠. 질적으로 다양한 게 아니라 양적으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원자개념에 더 가까이 간 거예요.
현대의 원자 개념이 신기한 게 원자란 동일한데 원자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따라서 산소가 되기도 하고 과산화수소가 되기도 하잖아요. 똑같은 산소인데 산소가 두 개 모이느냐, 세 개 모이느냐에 따라서 어떤 산소를 마셔야 살고, 어떤 산소를 마시면 중독되는. 일산화탄소 같은 경우에 CO2는 탄산가스지만 CO는 일산화탄소. 참 이상한 게 같은 탄소로 돼있는데 배열에 따라서 사람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에게 양식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도대체 인간은 뭡니까?
인간을 유기체라 하잖아요. 탄소화합물을 유기체라 합니다. 탄소는 언제 생기느냐 하면, 빅뱅이 일어나고 난 뒤에 그때 수소원자와 헬륨이 있다가 그 이후에 점점 빅뱅이 커지면서 원소수가 많은 무거운 물질로 바뀌면서 탄소가 생겼단 말이죠. 탄소 생겨서 지구에 날아와서 암모니아와 화합했다고 현재 과학자들이 생명의 탄생을 설명할 때 그렇게 설명하거든요. 그게 데모크리토스의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물론에서 윤리관이 나와요. 데모크리토스의 윤리관은 결국 인간이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신과 관련된 것도 없고 그저 원자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인간이 평소에 울고불고 할 때 행복은 뭐냐 하면, 울지도 말고, 웃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걸 데모크리토스는 ‘부동심’이라 해요. 부동심이란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말자. 그러니까 이것은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이 말도 전도서에 너무 착하지도 너무 악하지도 말라고 나오죠.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건 또 불교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희망, 공포, 사랑, 질투 이것은 다 원자의 하나의 배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너무 좌절감이 큰 죄 지었다고 하지 마라. 내가 마음이 좀 급했다. 내가 마음이 급한 게 아니고 나를 구성한 원자 덩어리가 급한 거예요. 그러면 급하지 말고, “원자야, 캄다운, 릴랙스.” 이렇게 하면 이게 바로 윤리고 행복이란 말이죠. 데모크리토스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추악과 악독한 것은 본인이 평정심을 잃어서 나온 현상이기 때문에 각자, 각자가 평정심을 갖추면 남한테 해코지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렇게 보는 거예요.
처음에 제가 질문이 유물론에서 어떻게 윤리가 나오느냐 했지요. 가만히 들어보니 말이 되지요. 하나의 쇳덩어리고 흙덩어리고 원자로 돼있는데 내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데 죽으면 흙인데 울고불고 하느냐 말이죠. 이게 나중에 스토아학파에 나와요. 에피쿠로스학파. 아까 식사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할게요.
스토아학파는 참된 행복은 절제 못해서 나온 거예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참된 선이 있는데 그 선은 인간의 충동과 욕구가 선을 가려서 그런 거예요. 따라서 바르게 선대로 살면 행복한데 그걸 가렸기 때문에 충동과 이런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모든 버리는 겁니다. 가족, 직장, 모든 걸 버리고 오직 은둔 생활하는 거예요. 무소유지요. 그러니까 스토아학파 이해하고 싶거든 불교, 불자 도 닦는 것 생각하면 딱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성령의 열매 있잖아요. 이걸 해석하다보면 모든 목사들이 스토아학파로 다 빠져요. 절제하라, 온유하라. 왜? 참된 진리를 얻으려면 그런 어려움은 감수해야 된다.
퀴니네학파가 있어요. 그 반대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즐거움에 있다. 사람이 즐거울 때 죄를 안 짓는다는 거예요.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짜증나서 죄 짓거든요. 그래서 항상 즐거워라. 그런데 나중에 스토아학파가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된 게 뭐냐 하면, 선을 이루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기의 욕심을 줄이기 위해서 실제로 아무리 도 닦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했어요. 부자가 되니까 착한 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분명히 은둔 생활하고 모든 걸 비우라고 했지요. 나중에 보니까 비우면 비울수록 애착과 집착이 더 강렬해지니까 본인이 힘들어지는 거예요. 방법은 아예 넉넉하게 가지면 자연적으로 그 다음부터는 별로 먹고 싶은 게 없는 거예요. 잡채밥에 기름기가 많으니까 이 목사님 별로 먹고 싶은 마음 없지요. 스토아입니다.
많은 걸 경험해버리면 남들이 “목사님, 이런 건 너무 새로워요. 너무 기뻐요.” “나도 다 해봤는데 별거 아닙니다. 침착하세요. 그러다 시험 들어 넘어집니다.” 이것 스토아입니다. 이걸 교회에서 성령의 열매라 하지요. 그리스도의 참다운 삶, 성화된 성숙된 거룩한 삶이라 하잖아요.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프로타고라스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한 마디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이 사람은 모든 것은 사람의 감각에서, 경험에서 나온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본 겁니다. 예를 들어서 빨간 불빛에서 책상을 보게 되면 책상이 빨갛게 보이고 노란 불빛에서 보게 되면 노랗게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란 그게 뭔지 모르고 기껏 저 사람을 뭐라고 보는 선입관에 의해서 이미 모든 진리는 자기 선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돼있다고 본 것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20세기 초에 가다머의 선이해와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지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네가 보기에 그렇게 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이렇게 보이니까 모든 것은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상대적인 자기주장만 옳다고 봅니다.
이게 현대 언어학에서 이렇게 봐요. 이것은 꽃이라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이것은 꽃이다. 또 다른 사람이 이것은 꽃이라고 할 때 다 같은 생각일까요? 다 다르지요. 동일한 것을 볼 때 예뻐, 예뻐. 해도 전부다 각자의 생각, 주관일 뿐이고 객관성을 따로 모을 수 있습니까? 모을 수 없다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의 생각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설교하니까 교인이, “그것은 목사, 니 생각이고.” 프라타고라스입니다.
엠페도클레스는 뭐라 했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미움. 특징 하나만 외우세요. 데모크리토스는 뭐라고 했어요? 인간은 그냥 원자 덩어리. 헤라클레이토스는 일자고 신이고 모든 것은 흐르고, 흐르고, 변하고, 변하고. 이거다 할 게 없어요. 이거다 하면 또 변하는 것. 세상은 다 그렇다. 파르메니데스 변해봤다 같은 덩어리가 모습만 바꾼 것이다. 일자의 다양함이지.
시간이 변하지만 시간은 안 변하죠. 제가 어려워서 말장난하는 겁니다. 시간은 변하는 것 맞잖아요. 하지만 시간 자체는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제 말 못 알아들었어요? 못 알아들은 척하고 있지요. 그게 일자라니까. 시간 자체는 안 변하잖아요. 시간은 안 변하기 때문에 시간은 계속 변한단 말이죠. 강물이 흐르죠. 하지만 물 자체는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맨 그 물이 흘러가잖아요. 그러니까 안 변하잖아요.
헤라클레이토스가 맞아요, 파르메니데스가 맞아요? 도대체 누가 맞습니까? 꽃 지면 떨어지지요. 꽃은 있어요, 없어요? 꽃은 변함이 없지요. 떨어지는 꽃잎을 가진 꽃은 맨 꽃이잖아요. 그게 파르메니데스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뭐라고요? 꽃은 없고 떨어지는 것을 꽃이라고 하자. 묻는 내가 나쁜 사람
이제 소크라테스 해봅시다. 소크라테스보다 앞서서 고르기아스, 11페이지. 고르기아스는, “네가 말한 것은 하나도 이해 못하겠어. 왜냐하면 너는 네 생각만 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여보게. 여기는 대구가 아니고 부산이야. 그러면 고르기아스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동의한다. 하는 게 아니고, 네가 방금 여기는 부산이고 대구는 아니라는 말을 나는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고르기아스가 지금 틀린 소리하는 겁니까?
여러분, 잘 이해 안 되십니까? 어떤 여자가 지나가는데 “당신은 참 예뻐요.” 할 때 여자가, “맞아요. 나 예쁩니다. 동의합니다.”라는 여자 없습니다. “아저씨. 그 이야기 뭐 때문에 하는데요?”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니까. 무슨 의도로 여기는 대구가 아니고 부산이라고 합니까? 혹시 도를 아시냐는 그런 의미인가요? 그래서 말 걸려고 숨어있는 딴 소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의심의 극치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선이 있는데 그 선이라는 것은 반드시 네 자신을 알 때 그 선의 기준이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럼 내 자신을 아는 방법이 뭐냐? 계속 질문을 해대는 거예요. 질문을 함으로써 나중에 나타나는 게 뭐냐? 내가 안다고 여겼던 것이 제대로 모르면서 안다고 우겼구나가 나올 때까지 계속 질문하는 거예요.
“어린이 여러분, 이 세상은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얘가 답변합니다. “그러면 목사님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그럼 나도 하나님이 만들었지.” “그런데 목사님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을 어떻게 믿게 되었고 나는 그걸 안 믿는 이유가 뭐죠?” 할 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합니까? 고르기아스죠. 그리고 의심하는 거죠.
오늘 철학을 하니까 사회적으로 철학보다도 제일 좋은 게 뭐예요? 관행이고 관습이고 역사라고 권위로써 그냥 믿어 하는 게 제일 편하지요. 그럴 때 이렇게 한 마디 해주는 거예요. “네가 그렇게 따지는 것 네만 따지는 게 아니고 선배들이 다 따져봤어. 그냥 외워. 그냥 믿어.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야.” 이런 소리한다고. 그러면 얘가, “우리가 알아야 믿지요. 선생님은 내 말에 답변을 못했잖아요.” 심지어 똑똑한 얘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은 누가 만들었어요?” “어린이 여러분, 하나님이 선악과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어서 죽었어요.” 그러면 얘들은 “그렇게 위험한 것이면 아예 치우지 왜 나뒀습니까?” 하면 선생님이 뭐라고 이야기해야 합니까? 그냥 믿어.
소크라테스는 물음으로써 그 사람이 진정 뭘 모르고 있다는 걸 아는 것. 결국 소크라테스가 노리는 것은 인간은 궁극적으로 모른다는 거예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선에 접근해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선을 모를 때 바로 악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선의 결핍이죠. 이것은 나중에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것과 비슷하죠.
교부의 아버지라는 어스거틴은 악이 왜 있어야 되느냐, 악이 무엇이냐? 할 때 선이 모자라면 악이 된다. 이 말은 뭐냐? 악에서 선이 되는 방법은 모자라는 부분을 마저 채우면 선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이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론과 연관돼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잖아요. 잃어버렸으니까 그건 악이 되죠. 잃어버린 걸 찾아서 도로 매우면 그게 선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으면 잃어버린 형상이 보충이 되어서 우리는 선한 나라가 갈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나중에 2세기경에 플로티누스가 그대로 했어요. 플로티누스는 신이 용광로라면 용광로에서 쇳물이 나오잖아요. 그건 정신이에요. 쇳물이 식을까, 말까 하면서 쇳덩어리 비슷하게 된 것은 영혼이고 거기서 나중에 완전히 쇠가 된 것은 바로 육체, 질료, 재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천지를 유출, 토해낸 거예요. 신의 내부에서 토해냈기 때문에 신의 속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영혼도 귀한 거예요. 왜? 그 사람 것이 아니고 신이 토해냈기 때문에.
그래서 플로티누스는 창조란 말을 쓰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창조란 말이 왜 잘못됐느냐 하면, 창조주가 있고 피조물 따로 있잖아요. 연결이 안 되잖아요. 연결이 안 되면 피조물 속에 비록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 할지라도 이 속성은 창조주, 피조물 이 단계를 넘어서서 접근해야 되는데 넘어설 방법이 없어요.
100미터 몇 초에 달립니까? 보통 남자들은 15초정도에 달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100미터 몇 초에 달립니까? 이것은 도저히 시간 계산이 안 되지요. 빛보다 더 빠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과 같이 빨리 달리 수 있지요? 안 되지요. 창조해버리면 단절이 돼버려요.
또 창조의 문제가 뭐냐 하면, 인간에게 의로움이 있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 아니에요. 플로티누스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의롭다, 착하다를 넘어서는 분이거든요. 하나님은 모든 걸 포괄하기 때문에 의롭다, 안 의롭다, 악하다, 선하다 하는 자체의 구분이 없어야 신이 되기 때문에 창조가 돼버리면 악하고 의롭다는 신도 그 범주를 공유하기 때문에 이것은 신의 개념에 합당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상당히 이것은 신비주의적이죠. 선과 악 자체의 경계를 허물어버리면 하나님을 선하다, 악하다 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선하다, 악한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선한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는 그것은 창조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 유출에서는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유출이니까 끊어짐이 없지요. 재료, 질료, 육체를 통해서 서서히 영혼으로 가서 영혼에서 정신으로 가서 신에게로 가는데 여기서는 그냥 신과 합일될 뿐입니다. 이걸 플로티누스는 황홀한 합일이라고 표현했어요. 신의 세계에서는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이것도 뭐와 닮았어요? 고린도후도 13장에 내가 삼층천에 올라가니까 그가 누군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지요.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플라톤. 지금 소크라테스, 고르기아스는 의심하는 사람. 의심해서 진리에 접근하다는 것은 더 이상 전통이나 관행이나 관습, 법을 거부하는 거예요.
플라톤은 14페이지 봅시다. 넘을 수 없는 요단강을 상징한다. 플라톤 같은 경우에는 한 마디로 하면, 동굴의 비유라 하는데 사람들이 동굴 입구가 없이 동굴에 갇혀있어요. 죄수들이 묶여있어요. 묶여있으면서 벽을 바라보고 있어요. 빛이 뒤에 있어요. 이 사람들은 묶여있어서 빛이 있는 쪽을 보지 못해요.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이 그림자는 자기들 그림자지요. 이 그림자가 세상입니다. 모든 것은 그림자에요. 왜 그림자냐 하면, 자기들은 죽으니까. 꽃도 시드니까. 토끼도 죽으니까. 그러니까 있다, 없다? 있는데 왜 없어졌지? 없는데 또 생겨나지? 세상의 모든 것은 늘 변화하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연히 사슬이 끊겨서 출입구에 빛으로 가니까 빛만 보이고 자기가 누구인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 그림자 보니까 누구 그림자에요? 내 그림자지요. 그림자 볼 때는 누구를 생각한다? 주체, 나를 생각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림자 보니까 이 물건, 누구? 이 교회, 누구? 이 세상은 그림자인데 이 모든 것은 누구와 관련 있어요? 어떤 건물 있으면, 저 건물은 누구 것입니까? 동주대학교 설립자가 누굽니까? 누구냐고 묻는다는 것은 동굴의 비유에서 모든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막상 빛 앞에 서니까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그 다음에 무슨 질문도 사라져요? “내가 누굽니까?”라는 질문도 사라지죠. 그럼 뭐가 돼요? 이사야 6장에 화로다 망하겠 되었구나. 또는 사도행전 9장에 이제는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고, “주여, 누구십니까?”
왜 플라톤철학이 중세신학에서 그렇게 각광받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구원은 뭐냐? 구원은 그림자밖에 없는 어둠의 세계에서 빛 되시는 주님을 만나서, 에베소서 5장에 나오잖아요. 빛의 자녀들이여 죽은 자에서 일어나라. 서양에서 그런 소리할 때 이미 플라톤철학이 있었단 말이에요. 동굴의 비유를 알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세상의 어둠만 보다가 빛을 봤을 때 내가 어둠에 갇혀서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했던 모든 것들은 다 부질없는 거란 말이죠. 빛 되신 주님 섬기는 이것이 바로 이데아 세계, 영원한 이상적인 세계에 직관으로 접촉이 되는 순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플라톤철학입니다. 성령 관계없어요. 인간이 갖고 있던 본래의 것이 결국 마귀가 이걸 인간들에게 유포하고 가르친 겁니다.
이것마저 마귀의 생각이라면 복음은 뭐고, 성령은 뭐냐? 이런 마귀의 생각을 아는 것이 복음이지요. 바로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구원욕구가 있는 이상은 우리는 시험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은 앎으로써 구원을 해보겠다는 우리의 심보는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많은 사람들이 성령 없이 신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같이 들여다보았습니다. 우리 모습이고 우리가 했던 이야기들이고 우리가 생각해왔던 생각들인데 이것을 통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왜 죽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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