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09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20130409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409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이야기하는데 이게 진리에 관한 문제거든요. 옛날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이왕 사는 것 제대로 살아보려고 한단 말이죠. 제대로 사는 것,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이 있다면, 진리라는 것은 바르게, 바른 것. 지금은 인간에게서 진리가 나왔다고 고집하는데 옛날에는 신에서 나왔다고 보거든요. 현대철학에서는 신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거고 인간이 만들어내서 신의 진리, 계시라 해서 나와 버리면 신에서 나온 진리도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거죠.
우리가 오늘 공부해야 될 게 고대신학인데요. 신학이란 말은 결국 따지고 보면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죠. 왜냐하면 옛날에 진짜 신을 믿을 때는 신학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어머니학’, ‘아버지학’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아버지, 어머니를 섬기기 싫다는 뜻이에요. 그냥 아버지 계시고 효도하면 그만인데 ‘효도학’ 나왔다는 말은 효도하기 싫다는 그 말과 같은 말이고 볼 수밖에 없어요.
부모를 섬기는데 방법, 학문을 연구하겠다는 말은, 부모에 대해서 부모 자체, 부모 섬기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범위에 가둬놓겠다는 그런 의지가 강렬하죠. 옛날 조선시대나 정에만 있을 때 자녀교육학이란 게 필요했습니까? 그냥 얘들 살면 되지 학문이란 게 필요치 않았단 말이죠. 그런데 얘들을 학교 보내니까 그 다음에 ‘교육학’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신학이 등장한다는 것은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신을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라 신을 내 마음에 흡족한 하나님으로 만들어서 그것만을 섬기겠다는 그런 의도가 강하죠. 이것은 결국 누가 누굴 섬기는 겁니까? 본인이 본인을 섬기는 거예요. 신학에 대해서 거론된다는 말은 이미 인간은 신으로부터 슬슬 눈치 봐서 벗어날 기운이 싹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기원전 600년경인데 이러한 기운이 나왔다고 하면서 신을 거부한다고 노골적으로 나온 게 아니에요. 소크라테스도 신을 거부했다는 것 때문에 참두정치에 있어서, 배심원들에 의해서 스스로 사형하기를 강요했지요. 처음에는 벌금형을 내렸다가 소크라테스가 벌금형을 수용하니까 벌금형으로 모자란다. 스스로 자결하도록 해야 소크라테스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고 해서 그 당시에 배심원들이 결정한 것이 자결의 방법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죽었어요.
죽인 핑계가 뭐냐 하면,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지. 소크라테스가 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하는 이야기에 젊은 사람들이 따라온 거예요. 결국 추종자들이 문제였어요. 소크라테스가 개혁하고 시위한 사람이 아니고 추종했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한테 뭔가 배우고 난 뒤에는 기성세대에게 반발한 겁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젊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전적으로 쏠리니까 뭐가 기분 나쁜 겁니까?
여기 중요한 나오는데. 그게 전통이에요. 모든 세상의 공동체라는 것은 전통에 의해서 유지되는 겁니다. 전통은 옳고 나쁘다고 표현할 권한 밖에 존재하는 거예요. “왜 뇌물 받았습니까?” 뇌물 아닌데. 관행인데.“ 그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관행은 옳고 그름 완전히 젖혀놓은 거예요. 관행, 관습, 전통이란 말은 따지지 말란 거예요. 따진다는 말은 그게 이성이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거예요. 인간의 판단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전통입니다. 전통을 학문적 용어로 한다면 역사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어요? 무엇에 부합되지 않아서 돌아가신 거예요? 전통이죠, 전통. 유대교의 전통, 역사.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숭배하는 것은 너희들은 죄를 따르고 있다고 본 겁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신학에 의하면, “한 사람이 죄를 범했음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전통, 역사에서는 아담이 했던 죄가 퍼진 거예요.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죄가 각색을 한 거예요. 죄가 모습을 바뀌어서 역사와 전통의 이름으로 퍼졌는데 그걸 십자가로 보면 죄가 되고, 십자가를 우회하지 아니하면 전통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의 전통, 노회의 전통, 교회의 전통, 가정의전통, 공동체의 전통, 기업체의 전통, 학원의 전통. 모든 전통은 죄라는 의미를 우회해서 표현하게 되면 죄가 되는 겁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전통, 이런 것. 그 전통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옳고 그름을 일체 이야기하면 안 돼요.
자식이 “아빠, 다른 집은 토요일에 놀이동산에 가는데 왜 우리는 어린이날도 놀이동산에 안 가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게 우리 집 전통이다.”
그래서 신이라는 것은 개인이 신을 믿고, 안 믿고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신은 그 공동체를 묶어주는 전통입니다. 전통이니까 이 신을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쪽에서 우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듣는 종족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지요. “왜 우리가 너희한테 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 그럼 너 만큼은 우상이 아닌 셈이 되지요. 누구에게 우상이라고 질책하는 우리는 진짜 신이고 그 외에는 우상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면 우상이라는 것은 다른 민족들은 기분 나쁘니까 바뀌면 그냥 신이죠. 신이란 민족이 먼저 있고 그 민족을 단결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써 종교, 신이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요. 탈레스란 사람이 원래 장사하는 사람인데 탈레스란 사람이 장사하면서 여러 동네를 다니면서 신이라는 전통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인기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사람들한테 인상 좋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전통은 그 집단의 권력이 돼요. 만약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사람은 그 권력의 핍박을 받게 돼있습니다.
70년대에 통기타와 맥주와 청바지, 그리고 장발에다가 미니스커트,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입니다. 만약에 그 당시 모든 기성세대가 미니스커트 입고 장발했으면 젊은 사람들은 머리를 깎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행동한다는 것은 기존에 있는 것과 얼마나 차이를 드러내느냐는 차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부각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파격적이라 하지요. 뭔가 이탈하는 것,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 들뢰즈는 이걸 탈주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 일탈하지 아니하면 숨 막히는 전통에 복종해야 되지 않습니까.
탈레스가 신을 벗어나도 신을 건드리면 안 되니까 신은 전통이라 건드리면 큰 일 나니까. 이것을 자연이라 합니다. 지금은 자연과학 쉽게 쓰지요. 옛날에 자연이란 이것은 죽을 요량하고 써야 하는 말이에요. 자연이란 말을 썼으면 신은 따로 있고 자연은 따로 있는 게 되죠. 자연을 끄집어냈다는 말은, 자연은 자연 스스로의 질서로 돌아간다. 그전까지는 자연은 없어요. 그럼 뭡니까? 신이 충돌하고 화내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신이 노는 운동장을 세상이라 했어요. 자연이라 하지 않고 세상인데 무슨 세상이냐? 신이 노는 세상.
그래서 탈레스를 철학의 시작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왜? 신의 운동장이라 봤던 세상을 신의 세상이라 본 게 아니고 자연의 세계로 본 거예요. 자연의 세계로 보면, 자연은 관찰을 통해서 파악이 돼요. 인간이라 하는 것도 신이 노는 운동장에서 인간도 가담해서 같이 신과 마찰하고 충돌하고 때리고 한단 말이죠. 신의 말을 어기면 질병이 오고, 신의 말을 위반하면 운명이 꼬이게 되고.
그런데 갑자기 신이 노는 마당이 아니고 세상은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소돔과 고모라잖아요. 이렇게 하다가 이 세상을 신이 작용하는 세상이 아니고 자연을 써버리면, 나쁜 짓은 안 들키면 되잖아요. 나쁜 짓을 해도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요. 나중에 나옵니다. 탈레스 이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나오면 그들이 말한 윤리라는 것은 그전까지는 신의 명령을 따라서 하는 거고, 신의 명령은, 신이란 집단, 공동체에서 만들지요. 신의 명령은 공동체의 명령이니까 이것은 관행이고 관습이고 전통이 신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동안 줄곧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신으로부터 제 때에 비를 공급받았고 신으로부터 가뭄도 적었고 신으로부터 지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철없는 젊은 아들아 이미 우리 조상님들이 신와 거래해서 수천 번 확인하고 얻은 간증이죠. 이렇게 했더니만 복 받고 이렇게 했더니만 벌 받았다는 누적된 경험에 의한 신과의 모든 관계가 관습이 되고 관행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할아버지가 굉장히 심하게 가르쳤어요. 밤에는 손톱을 깎지 마라. 문턱을 밟고 넘지 마라.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 보면 재수 없다. 이게 누가 창안한 거예요? 누가 창안한 게 아니에요. 옛날에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게 관행, 관습되는 게 아니에요. 과연 밤에 손톱을 깎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수천 차례 시험을 해봤겠습니까. 해보니 역시 나쁘더라. 시루떡 할 때 그냥 하지 말고 기도를 하고 해라. 이사를 할 때도 날 잡아서 해라. 이게 누가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게 아니고 수천 차례, 수만 차례 반복해서 하니까 역시 조상님 말이 버릴 게 없는 거예요. 그게 신의 계시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교회 다녀라. 봐라. 네가 교회 몇 번 안 나오더니만 부도났잖아.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려고 한다니까.” 그런데 성경책에 하나님 안 믿으면 부도난다는 게 어디 있지요? 로마서 몇 장에 있어요? 골로새서에 있어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성경에는 뭐라고 돼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죽었고”라고 돼있지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삽니까? 치과의사가 하루 종일 낮에 어디에 집중해요? 치과의사가 개성공단에 관심 있습니까? 하루일과가 뭐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사람 이빨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자기 하는 일에 집중하는 거예요. 종교라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집중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고, 해를 적게 받고 사는가? 그게 종교입니다. 복음 뭐냐 하면, 사람은 왜 죽는가가 복음이에요. 왜 우리는 죽게 되었는가?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을 소통하는 것은 사람의 육이 아니고 성령이죠. 성령이라니까.
여러분, 요한복음 보세요. 예수님 만날 때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을 보세요. 항상 예수님 이야기할 때 “예수님 말은 이해하겠는데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합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해요. 그게 뭐냐 하면, 38년 병자도 마찬가지고, 눈을 뜨게 된 소경도 마찬가지고. 항상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냥 쉽게 공백상태에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남들은 이렇게 합디다하는 거예요.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에요. 바디매오가 예수님한테 구원해달라고 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게 어디 저주받은 인간이 어디 메시아를 믿어?” 저주받는 인간은 메시아를 만날 수 없다는 게 유대교의 관행이고 관습이었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향수를 뿌릴 때 바리새인들이 그 행동을 보고 뭐라고 했어요? “아이고, 예수란 양반, 도사인 줄 알았더니만 저 여자가 질이 안 좋은 여자인지 왜 모르지?”라고 한 이야기한 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동안 신의 계시란 누적된 해석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걸 방금 제가 종교라고 했지요. 종교라는 것은 신이 만든 인간이 어떻게 신 앞에 바르게 사느냐? 그게 종교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종교한테 죽은 거예요. “너희들은 죄의 자식이다.” 더 심하게 했지요. “뱀의 자식이야. 악마의 자식이야.” 이것 이야기해서 예수님 돌아가셨잖아요. 민중들이 예수님 죽인 게 아니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고소해서 죽였지요.
우리가 왜 죽지? 이것은 사도 바울이 종교생활 잘 하던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종교에서 복음으로 바뀌었잖아요. 복음으로 바뀌면서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고 할 때 그것을 사람들이 믿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기존에 관습과 관행에서 내려온 것에 대해서 예수란 인물로 인해서 추가된 어떤 새로운 인간이 행복하게 하는데 어떤 아이디어를 줄까 했는데 갑자기 사도 바울이 전하는 1차, 2차, 3차 전도하면서 전한 내용들이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편지에 다 나오잖아요. 그 내용이 십자가 이야기라.
그리고 그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걸 믿는 사람이 있을 때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된 게 아니고 내가 전한 것은 인간의 지혜와 설득으로 함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라 했단 말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사람들 꾀려고 전도한 게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작업 속에서 오직 십자가 복음을 마주치게 한 거예요.
여러분, 목회 쉽지요. 목회 되게 쉬운 거예요. 십자가 복음 전하면 목회 주체가 누구죠? 목사 아니고 성령이 오고 성령은 예수님 십자가 영으로 오신 분이고 그리고 십자가 뜻을 갖고 있는 성령과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도 전도자와 합작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의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있죠. 이미 종교의 세계지요. 종교의 세계에 대해서 탈레스는 자연을 이야기해버렸어요.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신과 맨날 충돌하고 신에게 미워하고 신에게 제사하고 했잖아요.
지난 시간에 한 것 기억 안 나지요. 신과 인간의 만남은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제사지요. 그런데 탈레스는 제사가 아니고 내가 왜 바치느냐 말이죠. “나는 자연의 일부다.” 참 이건 해방선언입니다. 나는 신에게 속한 게 아니고 자연의 일부라는 거예요. 데모크리토스쯤 나가면 인간을 포함해서 나무고 꽃이고 모든 것들은 원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원자의 덩어리가 인간이다. 원자의 배열과 원자의 충돌과 원자의 만남이 오늘날 자연을 이루었고 인간을 이루었다면 여기에 신의 계시란 이름, 신의 말씀, 전통, 이런 것은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신학자들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해야 될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전부다 이 사람들은 앞의 선배 자연신학자들이 이야기했던 것을 정보를 추가해고 추가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게 과학입니다.
이렇게 전통을 쌓아나가는데 전통을 그냥 추가하지 않습니다. 꼭 선배를 비판합니다. 우리는 비판당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 양쪽을 다 보는 거예요. 우리는 후대니까. 도대체 인간 속에서 무슨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튀어나오느냐? 알 수 있고 그걸 대충 훑어만 봐도 도대체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고 하나님을 믿었다는 모든 아이디어가 선배들한테 이미 다 나왔다는 사실. 새로 나올 게 없어요.
미리 예를 들면 플로티누스 같은 경우에 플로티누스는 2세기 경이거든요. 플로티누스 이런 사람들도 우리가 보기에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 기독교 신자 아니거든요. 플로티누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선배들이 이야기한 것이 나와요. 그 선배 격인 크세노파네스란 사람이 있어요. 기원전 5세기경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신은 하나이고 모든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1장 35절, “모든 것이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 이런 게 벌써 나온다. [신은 모든 것이 하나이며 신성은 동일하며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자기 자신으로 남아서 불변한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 들어오기 600년 전에요. 이게 인간의 생각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런데 왜 진작 이런 생각을 안 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이게 인간 속에 창조된 게 아니고 가능성, 인간에 잠재돼있어요. 어떤 누가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자기 딴에 새로운 것이 추가가 되면 그것이 마치 창조된 것처럼 튀어나오는데 사살은 인간 속에 잠복돼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후대 중세철학은 플로티누스에서 나왔거든요. 어거스틴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기독교란 이름으로 신학을 전개했는데 그 신학을 전개하면서 나온 논리적인 아이디어는 이미 그리스 철학에서 다 나옵니다. 그걸 헬레니즘이라 이야기해요. 헬레니즘은 사실은 헬라마케도니아니까 기원전 331년이니까 탈레스부터는 아니고 중간에 플라톤부터 시작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헬레니즘이 나오는데 헬레니즘이 나오면서 세상에 현재에 나온 모든 철학은 그 안에 집대성 되어서 다 나옵니다. 그걸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다 해볼 요량입니다.
그걸 어떻게 다 하는가? 우리는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라서 이것을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어요. 관찰한다는 것은 모든 변화를 관찰하잖아요. 관찰할 때 생각부터가 세상은 모든 것이 파생되어서 나오는데 원래 것이 뭐냐? 원질이 뭐냐? 시초가 뭐냐? 그게 탈레스는 이렇게 봤어요. 축축하다. 간단하지요. 축축하다는 것은 습기가 있다. 인간의 모든 것도 사실은 물로 돼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은 물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 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물로 돼있다는 것은 아직도 근원을 깊이 있게 안 들어가서 그렇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무 감각적으로 보지 말자. 이 말은 동물이나 감각에 머물지 적어도 동물과 다른 인간이라면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추상적인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보이는 것이 나왔기 때문에 적어도 원판 정도면 보이지 않는 정도는 이야기해줘야 좀 깊이 연구했다는 소리 들을 수 있지 않느냐. 그래서 무한정, 한정되지 않은 것으로 본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현대과학과도 통하고 있지요.
그 다음에 아낙시메네스가 있죠. 처음에는 신을 믿었잖아요.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을 대체할 만한 다른 게 있어야 “나는 신보다 이게 더 좋아.”라고 내세울 수 있는 거예요. 추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그냥 물음 자체가 평범한데서 묻는 게 아니고 물음 자체가 답변을 제한적으로 가둬놓고 묻는 질문이 되는 겁니다. 시간적 순서라는 속에서 가둬놓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논리적 순서를 확장시켜서 물으면 정답은 생명이 먼저지요. 왜? 닭도 생명이고 달걀이고 생명에서 나왔으니까. 그런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둘 다 보다도 생명이 먼저라고 할 때 생명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죠. 논리적으로 들어가면 이미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죠. 그게 바로 아낙시만드로스가 스승을 극복하면서 한 이야기란 뜻입니다. 적어도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시시하게 수준 낮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간이라 하면 너무 촌스럽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더욱 더 깊이 있게 논리적으로 들어가면 생명이라는 추상적인 것까지 건져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게 없다. 정해진 게 없다는 말이 어떻게 나왔느냐? 너무 구체적이어서는 안 되고 감각에서 벗어나야 된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오느냐? 그것도 논리로 설명이 나와야 되겠지요. 이 설명을 그 뒤에 아낙시메네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재 3페이지에 나와 있지요.
아낙시메네스는 생명이란 추상에서 구체적인 사물이 나오기 위해서 ‘농도’로 본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현대과학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에요. 밀도라는 것. 에너지가 뭉치면 물질이 되거든요. 이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입니다. E=MC²질량이 없는 힉스입자가 뭉치면 질량이 생겨요. 현대과학에서도 에너지 농도 문제가 세상의 모든 근원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 아낙시메네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 에너지를 공기라고 한 거예요. 이것이 그 당시에 얼마나 놀라운 건지 공기에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생명은 물론 눈에 안 보이지요. 눈에 안 보이면서도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발상이 전환되어야 그게 가능할까요? 공기라는 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아는 사람 누가 있어요. 공기 안 보이는데 있다고 했을 때에 서양에서도 근세에 들어와서 이걸 확인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4페이지에 피타고라스라는 사람은 수를 주장한 거예요. 피타고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단체에요. 종교단체에서 피타고라스는 나름대로 전통과 관행, 관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 가지에 복종하라 했습니다. 선배, 스승, 국가에 복종하라 했습니다.
현대 인간 자체에서는 뭐가 빠졌지요? 제일 중요한 게 빠졌지요. 자기 부모지요. 이 말은 선배와 스승과 국가에 복종하란 말은 네 혈육과 가정에서 벗어나라. 이 주장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와 너무나 유사하잖아요. 너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기존의 공동체가 너를 잡아먹는다는 말이거든요. 기존의 공동체의 관행과 관습을 따르면 너는 어디 간다? 너는 멸망당하고 지옥 간다. 그러면 영생 얻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됩니까? 기존의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도약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겁니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거든요.
육의 단체에서 벗어나서 영의 단체로 옮기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 영의 단체가 교회잖아요.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주라고 고백하는 새로운 단체, 공동체가 뭐냐? 교회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필히 육으로부터 끊고 영으로 갈 필요가 있지요. 갈라디아서에서 두 가지 노선을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의 노선, 이것은 하갈 쪽이고 또 하나의 노선은 성령에 따른 약속의 노선, 이것은 사라의 노선이죠. 결국 모든 인간은 두 가지 노선밖에 없고, 양과 염소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이 구분되는 거다.
방금 했던 이런 이야기가 이미 피타고라스에서 나왔잖아요. 따라서 성경을 이용해서 기존의 가정을 버리고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해보자는 것은 복음적이에요, 복음적이 아니에요? 복음적이 아니고 피타고라스적이죠. 바로 그러한 사이비 단체들, 신천지나 모든 단체들이 가정을 버리고 초대교회처럼 공산주의를 이루어서 서로 자기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은 피타고라스적입니다. 복음적이 아니에요.
오늘 쉽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갈 수가 없네. 다시 해봅시다. 방금 추상이라 했지요. 생명이란 추상이잖아요. 사람들은 추상을 가만두질 않아요. 비가시적이에요.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가만두지 않고 구체화시키면 가시적이 되지요. 가시적으로 보고 싶은 것이 공동체 아닙니까. 공동체주의, 공동체. 그럼 뭘 믿어요? “비가시적임을 믿습니다.” 해놓고 실제적으로는 이걸 믿고 싶은 거예요. 피타고라스적이라 이 말입니다. 내 말은.
안 믿으면서 어떤 교회 단체에 소속되어서 선배 있고, 스승 있고, 또 국가 있지요. 하늘나라도 일종의 국가니까. 그걸 신봉하겠다는 말은 뭐와 떼어놓겠다는 거예요? 기존의 가정에서의 관습과 관행을 떼어놓지 않으면 이 세계에 못 들어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면 사실은 돈 문제에요. 네 몸으로 애쓴 돈, 어디에 바쳐라? 옛날에 아버지한테 용돈 주듯이 목사한테 용돈 드리고 돈 모아서 새로운 공동체로써 하늘나라 가보자.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대순진리회처럼 얘들 공납금 다 털어서 그 단체 다 맡기게 돼있어요. 그리고 돈을 맡기고, 지분 사고, 주식회사 되고, 교육관 짓고, 예배당 짓고, 여기에 아낌없이 바칩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보이니까. 복음 위해서 돈 내라. 안 냅니다. 하지만 예배당을 위해서 돈 내라. 왜? 그게 자기 업적이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는 이미 피타고라스부터 나온 겁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성공한 거죠.
주변에 새로운 국가공동체와 대결해서 결국 쫓겨났는데 피타고라스가 새로운 공동체를 하게 된 것은 제사를 빼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종교 세계기 때문에 제가 지난 시간에 했지요. 제사를 통해서 신을 달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제사라는 것은 뭘 갖다 바치는 게 있어야 돼요. 마야나 잉카 문명 보세요. 제단을 왜 만듭니까? 아이들 놀이터로 미끄럼틀 타려고 만들었습니까? 뭐 바치려고 피라미드 만들었지요? 그 꼭대기에 뭘 바칩니까? 처녀나 갓난아이의 생명을 바쳐서 보이지 않는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서 제 때에 비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 한 거고 거기에 종사한 사람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들은 농사 안 지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도 마냥 좋은 게 아니에요. 만약에 얘를 바쳤는데 제 때 비가 안 오면 민중들이 제사장 일가 민중들이 모가지 날렸습니다.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라. 한 방 뜨면 완전히 뜨는 건데 만약 실효성이 없 훅 가는 수가 있어요. 왜 부흥사들이 육이오 때 폭탄 맞았는데 살았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겁니까? 자기 기적 받은 것으로 계속 수십 년 돈 빼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왜 장로들이, “기도해서 옆에 있는 땅 사게 되서 감사합니다.” 십년 전에 한 이야기를 왜 자꾸 우려먹는 데요? 나 믿음 있다는 걸, 나 장로답다는 걸 하나의 권력으로 관행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 짓하는 거예요. 사람들 눈에 가시적 효과, 권력을 원합니다. 사람들 몰리는 것.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몰려서 죽었어요. 국가 있는데 어디서 딴 국가 만들어.
자연을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우월감이 있어요. 무식하게 제사 드려서 신을 달래려고 하는 인간들아 언제까지 그 미신에 매달려있을래. 우리는 자연을 알아서 스스로 관찰해서 나도 자연의 일부로써 “하나님이여, 나는 어떤 인간입니까?” 묻기는 그런 되도 않는 걸 왜 묻느냐 말이죠. 나는 나한테 묻는 거예요.
소크라테스는 세상에 진리는 있는데 첫 번째 진리는 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네 자신을 알아야 된다. 이게 두 번째였어요. 네 자신을 모르면 정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프로타고라스란 사람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사실은 같은 이야기에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한 이야기가 아니고 텔피 신전의 기둥에 있는 글이지만.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조화로 봅니다. 아름다움이 있다고 본 거예요. 신을 벗어나서 자연 스스로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구체적으로 숫자로 이야기한다. 음악도 8음계가 될 때 가장 아름답다.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 9가 아니고 왜 10이 아니고 왜 8음계냐 말이죠. 현을 1/2, 1/3, 1/4 늘릴 때마다 인간이 가장 감동받는 음악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7/5, 3/7 이런 것은 감동을 안 받아요. 왜 그런가? 그것은 자연 안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그걸 종교적 비밀로 본 겁니다. 제사 바쳤던 종교를 대체해서 자연 안에 있는 질서를 우리끼리만 공유하는 새로운 종교의 비밀을 그들은 시작을 한 거예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했는데 정의는 4로, 결혼은 5로, 서약은 10으로, 그리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8로. 그래서 나온 게 8등신. 여자는 8로 나올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왜 그런데? 묻지 마라. 너는 그렇게 안 보이나. 나는 그렇게 보이는데. 그러니까 옳은 거예요. 세상은 숫자로 질서 있게 돼있는데.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무리수를 이야기하면 죽여 버립니다. 이것은 탈퇴정도가 아니고 죽여 버려요. 악마의 숫자기 때문에. √2, √2를 이근호라 하거든요. 어디서 무질서한 것들을 감히 거론하느냐고. 정돈된 숫자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자연에 부합한 인간의 참된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연은 숫자의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우리가 음악하는 것은 대자연의 음악의 일부를 차용했을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아는 음악보다 더 음악이 대자연을 울리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무엇과 닮았습니까? 시편 19편 1절에 보면, 이 세상은 해는 해에게 달은 달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들리는 소리도 없고 언어도 없으나 서로 통하지요. 이게 피타고라스가 벌써 이야기한 거잖아요.
성경을 해석할 때 이것은 기발하다, 이것은 성령이 주셨다고 생각하겠지요. 철학을 공부해보세요. 그것은 성령 안 받아도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우리는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마치 기발한 아이디어처럼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 이 사람은 민주정치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을 갖고 있어요. 나중에 플라톤은 13페이지에 나오죠. 나쁜 정치를 먼저 언급했어요. 나쁜 정치를 네 가지로 언급했어요. 금권정치, 이건 다 아는 거고. 과두정치. 그 다음에 참두정치. 그 다음에 민주주의. 이 네 가지 전부다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나쁜 정치라는 거예요. 금권정치란 돈으로 하는 거기 때문에 뻔히 아는 거고. 과두정치란 소수가 하는 거예요. 소수가 내각을 만들어서 속닥속닥하는 것. 맨날 인사에서 박근혜가 욕 얻어먹는 이게 과두정치죠. 참두정치는 범위가 넓지요. 일종의 귀족정치라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민주정치도 아주 싫어했어요. 싫어한 이유가 다수에 의한 약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가 이뤄진다. 다수결로 하니까 표 싸움이라. 옳고 그름이 아니고. 플라톤의 정치는 옳은 정치를 해야 되는데 숫자 많으면 진리로 취급되고 모든 사람이 ‘아니오’할 때 ‘예’라면 쪼다 되는 거예요. 민주정치라 하는 것은 대세가 뭐며, 지금 사람들이 좋은 게 진리로 간주되기 때문에 정말 억울한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심지어 법에서까지 그런 일이 이뤄지니까 나쁜 정치가 되는 겁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진리에 가까운 게 아니다.
그럼 뭐냐? 철학을 하는 사람이 독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철학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감정적인 사람은 절제를 할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혼돈된 사람은 이성적으로 따질 수 있어야 되고, 용기가 있고 지혜가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이 독재를 하게 되면 이 사람은 희생을 할 수 있겠지요. 희생을 한 사람 말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계급을 정해서 피라미드식으로 해야 되는데 여기서 철딱서니 없는 게 여자와 아이들.
그래서 여자와 아이는 집안에서 자기 부모가 키우면 안 돼요. 왜? 부모가 술 먹으면 아이들도 술 먹으니까 안 돼. 여자와 아이는 국가에 위탁해야 되고, 위탁한다는 것은 반드시 공유해야 된다. 남자들한테는 복음이에요, 복음. 네 여자, 내 여자 없이 아주 절제 있고 깨끗하고 용기 있고 훌륭한 사람들은 여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 있고 술 먹고 마약하면 여자 뺏어버리고, 안 그러면 수술해버리든지. 장가도 못 가요. 이상국가지요.
플라톤이 이런 이야기할 때 현대인들은 안 맞지요. 안 맞지만 이것을 추구하는 나라가 있어요. 어느 나라 게요? 지금도 유훈통치합니다. 죽은 귀신이 통치하고 있어요. 그리고 김일성의 국가관은 어디서 나왔는가? 기독교에서 나왔어요. 지금도 기독교의 많은 단체들은 바로 플라톤의 국가관을 합니다. 재산이고 여자고 아이고 간에 우리 위대하신 태양 교주님이 알아서 다 관리한다. 우리 마음속에 은연중에 우리가 교주 자리에 앉고 싶어서 이런 이상적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았던 시험, 마귀에게 받았던 그 마귀적인 심성을 사실은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가끔 꿈에서나 실현하지 않는지 이미 꿈이 아니고 철학에서 다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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