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3. 22) 1강
광주 강의(2013. 3. 22)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3. 22) 40-1
에스겔 37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막대기 하나는 ‘유다 자손’이라 쓰고, 다른 하나는 ‘에브라임 자손’이라고 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막대기를 하나로 합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에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단(오용익 목사님 아들 오단)을 만나기 위해서는 단이 다니는 학교를 가야지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지요. 그런데 단이 하나님이라면 목포에 가도 계시고, 곡성에도 계시지요?
우리는 하나님은 안 봤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접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모든 면이 하나님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예를 들어, 산에 단풍이 들었다면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쉽지요. 바다에 파도가 친다. 누가 하셨지?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면 어느 병원에 있는 한 아이가 막 숨이 끊어질 때, 누가 숨을 끊었습니까? 단풍이 든다. 파도가 친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는데, 어린 자식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직 어린 나이기에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숨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 생명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어떻게 일 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가장 실감나는 식으로 인간을 사용했습니다. 단풍 들게 한 것도 하나님, 파도를 치게 하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써 가장 실감나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하면, 살고 싶은데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인간은 하나님이 보고 싶다. 만약 하나님을 보여주면 국소적이 되어 그 지점에서만 만나기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지요.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하나님인데,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운 것이 뭔가 하면, 나는 계속 살고 싶은데 죽이실 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고리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모든 복음은 죽음을 바탕에 놓고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우리도 죄 값으로 말미암아 죽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어느 인간도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죽으니까.
어제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균에 감염되었다는 것은 이미 병균이 그 지점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감염되니까 있었다는 것이 확실시 되지요. 사람이 죽을 때, 그 때만 죽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기에 죽는 순간 그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면 제일 먼저 번호표를 뽑지요. 번호표는 뽑았지만 은행원과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대기상태입니다. 이 때 은행원은 이 사람이 은행에 왔는지 안 왔는지 몰라요. 그런데 언제 압니까? 순서가 되어 번호표를 제시하고 만날 때, ‘이분이 벌써 은행에 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 번호표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죽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장자의 죽음을 사용합니다. 노아 시절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 보여줍니까? 모든 사람을 물로 죽게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죽었다는 흔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제사라는 방식(피 흘림이죠)으로 장착해 놓고 하늘에는 무지개를 둠으로 말미암아 “이미 너희는 죽었지만 내가 살리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시기 위해 셈, 함, 야벳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하나님이 살려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아야 하고, 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었기에 저주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계속 후손이 태어나야 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언약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약 안에는 두 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저주 받기위해 살아가는 사람, 또 하나는 축복 받기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결국 언약의 내용대로 양과 염소가 구분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좋다고 왔다가 도중에 가버렸어요. 이것을 설명해 줘야 37장 14절 말씀이 이해됩니다.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너희로 살게 하고’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숨을 쉰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신이 임해야 됩니다. 내 심장이 뛰어 사는 것과 또 다른 종류의 삶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메시아가 오면 두 윤곽이 드러납니다.
‘산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뱀이 인간에게 제안한 것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신처럼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이 가인과 아벨인데, 아벨은 괄호 칩시다. 있어도 없다고 칩시다. 왜냐하면, 아벨은 가인이 누구인가를 위해서 차후에 등장하기 때문에 아벨은 없는 존재입니다. 가인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벨이 희생타로 있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의 주인공은 가인입니다. 여기서 가인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모든 일에 관여를 해요.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가 제사 드리기 전까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거절했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아벨을 등장시켜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 때 가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등장시켰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순종을 안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그 믿음을 주님이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바로 그 순간, 주님이 거부하실 때 비로소 신의 신다움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에게 잘 보이려고 신에게 순종하고 신께 감사하는데 이때는 우리가 신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신이 나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신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을 시도했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나는 순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면 우리는 비로소 나의 순종을 안 받는 그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요. “당신이 뭔데 내 사랑을 사랑으로 안 받는가”라는 것이지요. 그 때 비로소 누가 신입니까? 신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사실은 누가 신입니까? 내가 신이고, 진짜 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내 사랑이나 받고 고마워 해.” 라는 식으로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주여, 주님을 믿습니다.” 이 말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내가 예수 당신을 믿을 테니까 당신도 나를 신으로 인정해 줘!” 그런 의미가 담겨 있어요. “주여, 우리 가정이 평안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기도 응답이 안 될 때, 내 기도의 가치를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 기도를 거부하는 자는 없애버려야 내 기도가 유효하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기도가 그렇게 만만하니?”하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가인이 선악과를 먹어놓고 하나님을 찾고 있단 말이지요. 자기 주재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이 때 하나님의 거부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를 알겠지요? 주님이 베드로의 순교마저 거부하신 이유를 알겠지요? 베드로가 화 날만 하지요. 자기가 그 정도로 제안했는데 주님이 그 제안을 거절했을 때, ‘장사를 같이 하겠다는 것인지 따로 놀겠다는 것인지?’ 굉장히 불쾌하지요. 그러니 예수님 잡히실 때 베드로는 “모른다”고 하잖아요. “나는 저 사람 모른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런 소리 했겠습니까?
이 때 닭이 울었어요. 이게 참 희한하지요. 닭이 울었을 때 누가 봐도 그냥 닭이 운거예요.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닭이 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울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닭이 울리라”는 그 예언을 예수님이 했으니까 닭은 예수님께 소속된 것이고, 그 닭이 때가 되어 운거예요.
다른 사람은 그냥 닭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닭은 주님이 섭섭해서 닭이 울었다고 여길 때, 베드로 자신의 본색(주님을 싫어하고 거부했던 것)이 드러난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 계십니다.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없다고 여기면서 삽니다. 그런데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접속할 때는 죽음을 연결고리로 해서 나타납니다. 그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 아니고 내가 주님 만나면 멱살을 잡고 죽이고 싶은 그런 충동이 발생되는 그 죽음. 주님이 죽었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죽였습니다.”라고 그 죽음과 나의 행위가 엮여지는 그 지점, 이곳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작용하는 지점입니다.
요즘 교회는 놀이마당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는 하늘나라는 앞에 전제가 붙어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왔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뭘 빼버렸습니까? “회개하라.”를 빼고 천국 가라고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회개하라.”를 집어넣으려면 회개의 기준은 우리가 천국 가는 기준과 동일한 기준이어야 하겠지요?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월드컵 축구 지역 예선전이 한창인데, 어떤 사람이 표를 구입하고 입장하면서 표 받는 사람에게 “오늘 이승엽 선수 출전합니까?”라고 한다면, “여기는 축구장인데요.”라고 하겠지요. 만약 천국이 축구장인데 우리는 야구장을 생각하면 그 축구장에 못 들어가겠지요. 주님은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앞에 “회개하라.”하시고, 회개의 기준으로 축구를 제시했는데 우리는 기껏 제시하는 것이 나는 야구를 좋아하니까 천국에 넣어 달라는 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면 회개의 기준은 피로 정해져 있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회개하라.’고 할 때 뭘 보고 회개해야 돼요? 십자가 피를 보고 회개해야 되는데 교회에서 십자가 피를 빼버리면 그 교회는 회개가 안 되니까 지옥 갑니다. “여러분, 헌금하세요. 교회 충성하고 목사 섬기세요.” 이게 무슨 회개의 기준이 됩니까? 세례 받고, 헌금하고, 충성하면 교회는 되는데 그것으로 천국은 못 가요.
어떤 교회가 빚을 내고 예배당을 지었는데,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안 해서 목사가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화가 나서 설교 시간에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은 예배당 우리가 헌금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이 교회는 회개의 기준이 뭡니까? 헌금 안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가 아니고. 목사는 천국 갈 사람을 교회로 유인합니다. 방법은 다른 회개 기준을 제시하는 겁니다.
주님이 제시하신 천국 가는 기준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죽어가고 있고, 우리의 죽음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 이것이 바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서 교회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전하고, 회개 전하고, 피의 복음 전하면 과연 계속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산다는 것은 내가 보약 먹고 힘을 얻어서 내 발로 교회 들락거리는 이것이 산 것입니까?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는 것은 지금 이야기입니까, 나중 이야기입니까? 이 본문의 입장에서는 나중 이야기죠. 그러면 지금 당장 하시지 왜 나중인가?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합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15, 16절입니다.
14절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그 목표를 두고 사전 작업에 나서는데, 터 닦기를 하면서 나눠졌던 남북이 하나로 결합됩니다. 왜 이런 작업이 필요할까요? 남과 북이 끊어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24절에 나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라고 했어요.
이 땅에 왕은 없어요. 다만 자리만 비어있는 체 남겨둬요. 이게 다른 말로 하면 블랙홀입니다. 그런데 블랙홀이 있는 주변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래시계를 보면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리지요. 또 하수구 주변을 보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물들이 하수구 쪽으로 모여 물이 빠지지요.
안에는 그냥 구멍만 있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변에 있는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힘이 나와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공간자체가 굽어 있으면 그곳에 걸려들면 모든 것이 그곳으로 빨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입니다. 물질로 인하여 공간이 굽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블랙홀이 설명이 돼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왕은 실체가 없어요. 빈자리만 있는데, 이상하게 그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와 이스라엘 전부 이곳에 말려들어서 파토가 납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 많지만 이런 것이 참 기적입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블랙홀을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왕이 뭔가 하면, 진짜 사장은 따로 있고 바지 사장이지요. 배후에 다윗 언약이 갖고 논 거예요. 그런데 한 때는 다윗 자신이 실재 왕으로 행사한 적이 있었지요. 암몬과 전쟁할 때 다윗은 왕궁에 거질다가 아랫집 여인이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불러 동침하게 되지요.
자신은 왕이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선지자가 찾아와서 꾸짖습니다. 선지자가 찾아왔다는 말은 하나님과 다윗이 대면한 것과 같습니다. “정신 차려. 네가 이스라엘 왕이야?” 라고 추궁하는 그런 개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나라를 망치는 당사자가 바로 당신이야!” 라고 했을 때, 이 나단 선지자의 음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면 바지 사장이 누구와 이야기한 것입니까? 진짜 사장과 이야기를 한 거지요. 다윗이 처음으로 블랙홀을 만났어요. 그렇게 되니 자신에게는 의가 없고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병에 걸린 때에만 병균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병균이 있었다는 것을 병에 걸려 파악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병균이 있었다는 사실을 병에 걸려 알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내가 밧세바와 간음했기에 오늘부터 죄인이야!” 이게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모친의 죄 중에 잉태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우리들 보기에 위대한 점이 뭔가 하면, 세상을 통째로 안다는 점이 위대해요.
아까 식사했던 식당 주인은 세상을 통째로 압니까? 모르지요. “낙지볶음 얼마입니까?” “00원입니다.” 이런 것만 알지요. 세상을 누가 만드셨는지 모르지요. 다윗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번 전쟁에서 훌륭한 장군을 앞세워 승리만 하면 된다’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것만 알만 된다.”고 여겼던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바지 사장으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만약 여기 있는 귤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 귤을 어떻게 까서 먹을까?’ 이것만 생각하면 되지요. 그런데 이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되면 귤을 까면서 웁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귤을 안 까는 것이 아니라 까면서 웁니다.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학생에게 성신이 임하면 학교 그만두고 기도원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양말을 씻을 때 “양말 똑바로 신어야지” 이것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하면 “주여, 이 죄인에게 양말이 웬 말입니까?” 이렇게 된다니까. 그게 블랙홀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전부를 한꺼번에 알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이건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몰랐던 거예요. 그들은 물이 갈라지니까 좋다고 들어간 것뿐이에요.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몰랐어요. 나중에 그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자기 것만 챙긴 거예요.
“하나님, 제가 순종할 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생각했는데 물이 없고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하나님 죽여 버릴 거야.” 이렇게 나왔지요. 하나님이 물과 양식을 안 주심으로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 마음, 이것을 하나님이 블랙홀로 사용하심을 느끼는 겁니다. “우리는 진작 죽어도 마땅한데 귤은 왜 주십니까?” 눈물로 먹는 귤. 이게 성령 받을 때 감사함으로 먹는 거지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왜 갈라졌는가 하면, 다윗 언약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이걸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했어요. ‘우리에게 주시려고 약속 한 땅’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사실은 ‘약속이 발현되는 땅’이었어요.
약속이 뭐냐?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은 아까 24절을 봤지요.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왕으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비어있던 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이 땅은 죽음을 가지고 갑니다.
산다는 것이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그냥 죽은 목숨으로 사는 것, 죽을 목숨으로 버티면서 사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사는 것. 그러면 이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되고, 죽을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왕으로 죽어야 되고. 이 두 개의 죽음을 보여주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이 약속의 땅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개의 죽음이 영원히 고정되는 증거로 천국에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죽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죽으심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겁니다. 십자가를 품에 안았다는 조건 하에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겁니다.
“선악과 때문에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안다는 조건 하에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가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의 체면이 살아요. 선악과 따먹은 후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지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면,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생명나무는 못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이런 분이 아니라,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농락당한 거지요. 선악과에 농락당하고 생명나무에 농락당하고. 선악과 따먹어서 죽게 했고, 죽은 자는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고.
따라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라는 조건 하에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것을 캡슐에 담아서 생명이 제조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아는 그것을 재료로 해서 비로소 주님은 천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국 가면 모든 자들이 면류관 반납한다고 바빠요.
그래서 이 땅에서 그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면 됩니다. 살아가면서 그 티를 내게 됩니다. 주님이 “탐내지 말라.”는 것은 ‘지금부터 탐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벌써부터 탐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하, 내가 탐내고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자꾸 들어야 돼요. 말씀의 내용을 들으면 우리가 이미 해왔던 것입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해라.” 이미 우리는 떡을 추구하며 왔다는 것을 밝혀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은 박물관이라서 전시된 것을 둘러보는 겁니다. 이게 뭐냐? 주께서 마련해 주신 생명의 장입니다.
베드로가 천국 갔을 때, 주님이 “너는 어떻게 여기에 왔냐?”하고 물으신다면 베드로는 뭐라고 답했겠습니까? “제가 원치 않은 길로 왔습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네가 원치 않는데 왜 왔냐?”고 물으면, “주께서 아십니다.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셨잖아요.” 이게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이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착한 사람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악한 자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들을 만들어 내셔서 그쪽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 길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쓰레기를 모아서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죄에다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 우리도 의롭고, 그렇게 건지시는 예수님도 의롭고, 건져주시도록 계획하신 하나님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인데, 이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지요.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 위해서는 사전 정리가 필요한데,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 나라로 나눠졌는가? 왜 너희들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다윗 언약이었지요. 그러면 이것을 합체한다면 누구 공로가 되겠습니까? 다윗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블랙홀에서 실체를 감추고 있던 그분이 오셔서 비로소 갈라진 두 나라가 다시 원상복귀 되면서 하나의 이스라엘이 될 때 그 접합제가 바로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됩니다.
38장을 봅시다. 1절 이하에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37장에서 다윗 왕 이야기를 이 정도 했으면 끝나도 되겠다고 여겼는데, 38장을 보니까 난데없이 곡이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곡이 어디 있는가 하면, 이란 북쪽이 큰 호수가 2개 있습니다. 하나는 카스피호, 또 하나는 흑해입니다. 이 사이에 곡(혹은 마곡)이 있습니다.
로스, 메섹, 두발 이 세 민족이 합해서 곡이라는 나라를 형성한 거예요. 그런데 이 곡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38장에 나옵니다. 37장에서 다윗 왕이 와서 두 나라를 하나로 만들면 끝나는데 왜 38장에 와서 곡이라는 이상한 나라가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가?
다윗 언약에 나타나실 그 왕은 용사입니다. 전쟁하는 용사로써의 다윗입니다. 우리는 전쟁하지 말고 전쟁의 결과물만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함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가 발생됩니다. 용사가 전쟁을 하면서 어떤 원수와 싸우는지 우리는 알 필요 없고, 결과물인 전리품만 편안히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전쟁하면서 나타나는 원수가 중요한데, 그 원수가 누구인가 하면 구원 받는다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는 그 인간들이 진짜 마곡같은 그런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38장이 있는 거예요.
5-6절에 보면, 바사, 구스, 붓, 고멜, 도갈마가 나옵니다. 바사는 극동(동쪽의 끝)에 있고, 구스는 극남에 있고, 붓은 극서, 고멜과 도갈마는 극북(북쪽의 끝)에 있어요. 방금 이런 민족들이 힘을 합쳐 이스라엘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해서 잡아먹는 그런 배치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 “이스라엘 너희들 구원 받았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적들이 일어나는데, 이 적들 보통 적이 아니에요. 극동, 극서, 극남, 극북입니다. 이것은 지구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즉 언약 중심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에 두고 각 극 지방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나라들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격하는가?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2013. 4. 11. 09:0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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