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405b 울산강의-출애굽기 26장 : 성막과 낮아지심
20130405b 울산강의-출애굽기 26장 : 성막과 낮아지심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405b 울산강의-출애굽기 26장 : 성막과 낮아지심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성막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함께 거하기 위해서 성막을 지었다. 그래서 성막이 없는 하나님은 뭘 잊어버렸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낮아졌다는 사실을 빼먹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이죠. “하나님이여, 저 받아주소서.” “내가 너 찾아갔잖아요.” “주님이여, 죽고 난 뒤에 만납시다.” “무슨 소리 하고 있노.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언제요? 어데요?”
그렇다면 아까 분명히 피 이야기했잖아요. 무슨 피 말입니까? 십자가 피 이야기했잖아요. 사울이 율법의 도사입니다. 그 사울이 나중에 주님 만나고 바울 되고 난 뒤에 인간들이 모든 걸 알아도 하나 모르는 게 십자가는 인간이 모르는 거예요. 성령이 알려줘야 비로소 아는 것, 이게 십자가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아는 것은 열심히 행하면 행한 만큼 성과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맛볼 수 있어요. 누구든지.
아까 이종호 목사님과 이야기했지만 목회 십년 했는데 성과 없다고 교인들이 한다는데. 예배당 사놓은 것도 성과 아닌가? 이러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만큼 10년이라는 것, 열심히 했다는 것, 성과를 보기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성과 없는데 있는 성과, 기대하지도 않은 성과, 행한 것도 없는데 경건치도 않는 자를 의롭다하는 성과, 땡잡은 거예요.
로또는 돈 주고 사야 되잖아요. 이것은 돈 주고 산 적도 없어요. 아예 로또를 갖다 안겼다니까. 꿈에 돼지 여섯 마리가 지나가는데 3, 17 숫자를 얼른 긁었다. 그렇더라도 로또를 돈 주고 사야 된다니까. 이것은 사고자시고 간에 주께서 쳐들어와서 네 인생을 내 집으로 해야 되겠다. “주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너만큼 낮아졌기 때문에. 주님의 낮아지심 때문에 주님이 안 들어가는 구석이 없습니다.
내가 노숙자가 되던, 부도 맞아 왕창 망하던, 이혼을 하던 간에, 이 집에 냄새나서 못 오겠다. 이런 것 없어요. 냄새가 나던, 똥오줌을 처발랐던 간에 수입이 한 푼도 없던 간에 그곳을 하늘나라로 만들어낼 정도로 주의 낮아지심을 끝도 없고 한도 없는 거예요. 돈만 아는 세리 삭개오, 그리고 소경 바디매오, 남들은 거지하고 있는데 소경도 격이 있는 모양이라. 예쁜 소경도 있는 모양인데 이 바디매오는 거지 바디매오에요. 그런데 그 자리를 주께서는 천국으로 만들어내세요. 영생이 있으니 천국이죠. 주님이 그 자리를 접수했다니까.
어떻게 가능합니까? 피. 그 거룩한 피가 주님은 죽으심으로 들어왔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지옥에서도 천국을 만들어내시는 예수님의 피. 그 피는 인간의 행함의 업적이 아니고 인간이 신앙생활 열심히 한 결과물이 아니고 예수님이 홀로 다 한 결과물이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그곳이 곧 천국이고 영생입니다. 뭐가 더 필요한데요, 도대체. 예배당이 얼마나 커야 속이 시원해요? 교인수 몇 만 명 돼야 됩니까? 돼봐야 쓰레기인데. 쓰레기는 모아봐야 쓰레기입니다. 똑같은 인간들 다 모아봐야 쓰레기고, 서울시민 다 모아봐야 그게 천국 아닙니다.
어디 주님의 진리가 사람 숫자에 기죽는 진리가 어디 있어요. 너희들이 그걸 진리라고 우겨? 할 수 없다 내가 고집 꺾을 게. 이런 주님 없습니다. 사람들이 바꿔달라고 데모한다고 바꿔주는 이런 주님 없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두 번째가 고정, 또는 불변. 한 고집 하시는 겁니다. 이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막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얼마나 착하고 훌륭한가는 내가 안 물을게. 성막 안에서 벌어지는 그 고집, 피 잡아서 용서하시는 그 고집, 이것은 만고에 누가 변개할 수 없는 확정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성막 없는 하나님과 성막 만들라고 허락하신 하나님이 다르다고. 왜? 이미 고정과 불변을 격리를 하신 거예요. 그러면 고정과 불변은 찾아오심으로 나타난 고정과 불변이죠.
사람들 이리 와 봐라. 우리 아이디어 꺼내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보자. 이것은 우상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성막이 고정과 불변이 돼버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늘 변하는 존재란 뜻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나는 안 달라졌다고 여기면서 성경을 봐요.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하다. 그러다보니까 어제 믿은 것으로 오늘까지 때우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어제 믿음 좋았으니까 며칠 가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 자체는 불변이 아니에요. 인간은 시간 따라서 늘 다릅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나라는 주체는 없는 겁니다. 라캉이 그랬는데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신체로 돼 있잖아요. 인간의 신체는 욕구가 있어요. 욕구가 가만있지 않고 뭘 요구하게 돼있어요. 욕구에서 요구를 뺀 것을 욕망이라 합니다. 보통은 구분 없이 그냥 사용하거든요. 어쨌든 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신체는 자아가 다스릴 수 없는 대상이에요.
드라마 같은 걸 보게 되면 이상스럽게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탤런트가 있어요. 그 사람과 사전에 돈 관계, 사기 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보기만 해도 인상 자체가 자기한테 미운 거예요. 반대로 보기만 해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인상, 심지어 드라마에서 악한 역할해도 뭘 해도 예뻐. 그런데 꼴보기 싫은 사람은 착한 역할을 하면 착한 게 더 얄미워. 패주고 싶어. 어디 주제에 착한 역할을 해. 네 주제에 나쁜 역이 맞아. 이런 식으로.
같은 자식이라고 깨물어서 안 아픈 순간도 있답니다. 서로 비교가 되거든요. 그것은 우리 이성에서 나온 게 아니고 우리 신체에서 나온 겁니다. 이걸 아무리 그러면 안 돼. 예수 믿는 내가 그러면 안 되지. 아무리 자제를 해도 화를 키웁니다. 폭발할 때는 10년 전 것까지 한꺼번에 다 하게 돼있거든요. 인간의 신체의 욕구라는 것은 미움, 사랑, 감정. 네가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네 속에서 나오는 더러움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해도 자제할 수 없습니다. 그냥 위장할 뿐이다. 위장할수록 가면이 두꺼워져서 점점 더 감당이 안 됩니다.
인간의 신체가 욕구로 나오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 자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가 안고 있는 여기에다 공격을 해버려요. 어떻게? 말씀과 율법으로. 그러니까 탐내지 말라는 말은 지금부터 탐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탐내왔잖아. 이실직고하라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나온다면 그래요. 처음부터 탐냈습니다. 이렇게 막 나오네. 처음에 나쁜 짓 할 때는 굉장히 어려워해요. 일주일 동안 벌 받을 준비해야지. 이러다가 얼마 지나면 나쁜 짓하는 게 재미있단 말이죠.
대도 조세형이 도둑질 하는 이유가 선교센터 세우려했다는 것은 핑계고 도둑질은 희열이 있어요. 그 나름대로 짜릿한 면이 있어요. 똑같은 일을 시켜도 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얘가 그걸 할 때 그 얘는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갖고 합니다. “공부하지 마.” 이랬을 때 본인은 엄마는 나를 미워하지만 내가 공부를 재미있어 할 줄 몰랐지. 그런데 “공부해.” 하면, 이미 공부하라는 명령을 자기가 내리기 전에 엄마가 명령 내렸다는 자체가 기분 나빠. 내 몸은 내가 명령내리는 데 왜 간섭하는데.
지금 잡채, 탕수육, 맛있는 게 있는데 “너 먹고 싶은 것 먹어.” 이러면 되는데 “얘야 갈비 한 번 먹어봐라.” 하면, 먹고 싶어도 먹기 싫다니까요. 떡갈비를 먹는 순간 내가 시어머니 종으로 오해할 소지가 강하거든요. 젓가락이 가더라도 “그래 그것 맛있는 거야. 니가 맛있는 걸 아네.” 할 때 콩나물로 가요. “어머니, 이것 먹겠습니다.” “그래 니가 콩나물 좋아하면 할 수 없지.” 해놓고 기회 본다고. 콩나물 거쳐서 또 가면, “그렇지.” 그러면 또 거두고.
아무리 좋은 일도 들키면 하기 싫어. 왜? 이 신체는 누구로부터 간섭을 차단시키고 자기가 신이 되라고 격려하는 게 있어요. 탐내지 말라고 할 때 이왕 들킨 것 본격적으로 탐내보자. 하고 막 살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율법은 박수를 쳐요. 진작 네 본색을 드러내야지. 그래서 제가 막 살지 말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막 살지 말란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 막 살아서 죽었다니까. 의의 종, 그것 아니에요. 그냥 막 살아서 죄 값으로 죽은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죽어 있어요. 죽었다는 말은 그 동안 죽어왔다는 확인절차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 했는데. 날마다 장례식이고 날마다 발인예배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인간은 욕구기 때문에 잠재울 수 없어요. 감당이 안 됩니다.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아가 있어서 기존의 윤리 체계가 있거든요. 윤리체계에서 욕구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제와 절제를 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주체, 선이라고 본 거예요.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자제를 했다고 의가 나올 때 의의 주인공을 본인으로 간주하는 이게 주체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대도 조세형이 부잣집에서 물건을 훔쳤잖아요. 분명히 자기도 나쁜 짓인지 알지만 처음부터 나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나쁜 짓하는 것은 별로 양심의 가책도 안 되고 즐거움으로 하는데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그 불쌍한 사람에게 목걸이를 하나 줬단 말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잡혀서 판사한테 이 사회가 돌보지 않은 가난한 사람을 내가 돌봤습니다. 지가 홍길동이라도 된 것처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봅니까? 이런 어려운 사람에게 목걸이를 줄 정도로 자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희생해가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것이 진정한 나다운 나라고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주체는 항상 자기 의가 형성될 때 주체지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자기는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악이라고 나무라는 쪽에 서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이지만 원치 않은 악이 있어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누가 이긴다? 악이 나를 사로잡아가는구나. 나는 거기에 완전히 휩쓸리는구나.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악한 일도 했지만 착한 일도 한 그쪽이 바로 자기라는 거예요.
이러한 심보를 가지고 성령 받지 않은 상태로 교회에 나오니까 전부다 지 자랑하는 판이 된 겁니다. 어느 주일오후에 바바리맨 이야기했지요. 바바리맨이 바바리 입고 여학교 앞에서 벌리는 것은 원래 볼 것도 없으면서 마치 볼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거예요. 잠시 보여 줄 때는 놀라겠지만 2박3일 보여주면 여학생들 시시해서 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5분 동안 나훈아처럼 보여줄까요? 나훈아가 왜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잘린 게 아닌데 잘렸다고 해서.
도대체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바바리 입고 와요. 주님은 다 아는데 처음부터 탐내왔고,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간음해왔고, 처음부터 도둑질 해왔고. 처음부터 남을 미워하고 왔는데 새삼스럽게 바바리 입고 와서 앉아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패 까라. 38 한 끗 쥐고 있으면 장땡 쥐고 있는 것처럼, 까봐라. 화투패 주께서 다 나눠줬거든요. 까봐라. 끝난 이야기라니까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는 것이고, 주께서는 산 자를 부르는 게 아니고 죽은 자를 자신의 죽었다고 살아난 부활의 능력으로써 죽은 자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주님께서 죽은 자로 간주해야 되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이래서 너는 죽은 자 맞는다고 우리에게 들이대는 거예요. 성경을 안 보면 산 자에요.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죽은 자에요.
그걸 성막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성막 앞에서 격리 수용된 사람이고, 왜? 하늘나라에 참석 못 하니까. 이것은 피 없이는 못 들어가니까. 성막이 고정되고 불변이라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금새 사랑했다가, 금새 미워했다가, 이것은 자신도 자기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왔다갔다. 모든 인간이 다 치매 걸린 것 같아. 지가 한 소리도 자기가 부정해버리고. 내가? 왜 그랬지? 도대체가. 여기 회사야? 술집이야? 지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사람은 늘 달라집니다. 믿을 걸 믿어야지. “나는 자기를 믿어.” 아이고. “그럼 날 믿어.” 나중에는 날 믿었으니까 그만큼 당해도 싸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로 하여금 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 주께서 성막의 취지로 들어와 버립니다. 우리 안에 불변의 요소, 격리된 피가 있는 성막이 들어온 셈이 돼요. 그러면 우리 껍데기는 맨날 달라져도 속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걸 다양성이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종잡을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될 때는 변화되는 우리를 더 이상 안 믿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 효과입니다.
십자가 효과는, 내가 착한 일했다고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이 제단 쌓은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복 받은 거예요. 불변의 요소를 봐야지 최종적인 확정 날짜를 봐야지. 처음에 계약서 썼다고 계약된 게 아니거든요. 마지막 다 이루었다는 걸 검토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주님이여, 나는 맨날 달라집니다. 맨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정상이에요. 저는 막 살 수밖에 없네요. 정상입니다.
막 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홍해 갈라진 것보다 더 큰 기적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기 따라 가기 때문에 자기가 달라지면, “왜 이러노. 내가 왜 이카노.” 니가 원래 그래. 새삼스럽게 “내가 왜 이러노. 주여, 아침에는 믿었는데 오후에는 안 믿어집니다.” 원래 믿는 너를 믿었으니까 달라지게 마련이에요.
가족을 사랑해도 내 몸이 건강할 때 사랑하지요. 내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귀찮은 정도가 나중에 원수가 돼요. 내가 몸 아픈 것도 저 인간 때문에 아프고. 내가 아픈 것도 너 낳는다고 산후조리 잘못해서 너 때문에 평생을 아프다고 그걸 자기 며느리한테 이야기해서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고. 그래놓고 돌아서서 엄마 나한테 그런 험담했잖아. “왜 이러노.” 또 그러고. “엄마, 그것 치매 아니야.” 그러면 “내가 왜 이러나.” 치매 현상의 특징이 있어요. 자기반성이 안 돼요. 고집이 세서 절대로 반성이 안 돼요. 당당해져요. 정말 돌멩이가 된 것 같아. 완악한 마음.
여기서 고정된 것, 불변. 불변인데 이게 48개의 조각목으로 만들어요. 성막을 짓는데 조각목으로 북쪽을 위하여 20장, 남쪽을 위하여 20장, 후미 벽 8장, 총 48장.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 남편을 위하여 널판 스물을 만들고 …… 성막 다른 편 곧 그 북편을 위하여도 널판 스물로 하고 …… 성막 뒤 곧 그 서편을 위하여도 널판 여섯을 만들고 성막 뒤 두 모퉁이 편을 위하여는 널판 둘을 만들되 ……”(26:15~30)
어쨌든 간에 불변인데 다양성으로 와요. 이게 조각목. 자기 닉네임, 아이디를 조각목으로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가짜 조각목들이 왜 걸핏하면 조각목이라. 조씨 집안에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 이름 각목인가? 군에서 많이 맞은 모양이지.
다양성, 여러 가지 다양한 조각난 나무 조각이 하나가 된다는 이것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성전, 교회라는 것을 뭔가 두르는 게 있어요. 그걸 각자 모든 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하나로 묶는 끈 같은 게 있어요. 그걸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로 묶기 위해서 모든 다양성을 전부다 고유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아야 돼요. 어느 회사 다니느냐, 믿음이 좋으냐, 나쁘냐, 연조가 얼마냐? 완전히 무시하고 성령으로 매거든요.
주님의 영이 임하니까 발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하면 안 돼요. 모든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도 동일하기 때문에 그 동일함을 말하기 위해서 동일하지 않은 조건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삐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어놓고 아서라, 말아라. 그래도 동일하다. 동일하지 않은데 동등하지 않고 평등하지 않아 보이는데 가난한 자도 있고 부자도 있는데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차이가 일소될 정도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걸 하나로 묶는 겁니다.
그것이 아까 첫째 시간의 이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에요. 나의 변화무쌍함과 그리고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고정된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받는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할 수 없어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기 때문에. 도대체 어느 날을 잡아서 사랑해요. 어느 것을 잡아서 이건 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일체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미워하라는 말로 나오는 겁니다.
새순교회 다니다가 이름이 순자라든가 하는 분이 질문을 했지요. 사랑의 침례교회의 설교한 평을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습니다. 그 사람 설교가 성경구절을 무지무지 많이 인용해요. 특히 성막, 히브리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단번에 씻어줬다고 해요.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그걸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멘붕이에요. 멘붕상태. 여러분, 우리의 죄를 씻어줬으면 예수를 안 믿는 죄도 씻어줘야죠. 내 말 틀렸습니까? 이것 빼놓고 다른 죄, 이러면 죄라고 할 수 없거든요.
인간의 죄가 뭐냐 하면, 자기를 믿는 죄거든요.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인간에게 요구한 게 뭡니까? 저걸 따먹는 날에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고 선악과 지식을 안고 있는 누굴 믿어야 돼요? 이미 선악과가 자기 수중에 있잖아요. 그럼 누굴 믿어야 돼요? 선악과 없는 하나님을 믿을까요? 그럼 뭐 때문에 따먹게요? 저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가치가 향상되고 나라는 것이 질적으로 나아진다는 애초부터 믿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그걸 믿는 거예요.
가인이 제사 지낼 때 “내 제사는 헛방이야.” 이렇게 제사 드렸습니까? 그러면 화 낼 이유도 없어요. “하나님이여, 내 제사는 장난치는 거니까 제 제사 안 받아도 돼요.” 이렇게 제사 드렸습니까? 정성과 정성을 다 했습니다. “안 받기만 해봐라.” 그래서 아벨을 죽인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 제사 받아주세요.” 그래서 화가 난 겁니다. “농담했는데. 역시 하나님도 농담하나보지.” 이러면 화 안 나요. 자기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안 받았습니다. 일부러.
아까 했지요.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것은 피해간다. 왜? 하늘나라는 그리스도만 주체가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에 불과하거든요. 주께서 하셨습니다가 천국이란 말이죠. 내가 한 것 알아주세요. 이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 가도 못 삽니다. 짜증나서 못 삽니다. 천국에는 교대근무 없어요. 찬양도 드리고 쉬고 순번제, 그런 것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진짜 그 노래의 대상을 만나기 싫어서 그걸 대체하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서 노래 부른다 했어요. 자기 목소리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음악을 받아야 될 그분의 목소리를 차단시키기 위해서 자기 노래를 부른다는 거죠. 얼마나 예리합니까. 찬양 보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아모스에 보면, 그들의 찬양하면서 멸망 받아요. 너희들이 다윗의 비파처럼 노래 부르고 해도 나는 그런 것 안 받는다. 노래하는 본인이 즐거운 거예요. 조수미 노래하면 조수미와 다 즐겁죠. 주님이 즐겁습니까? 주님이 소프라노 못해서 조수미한테 시켰어요?
불변 이야기했지요. 성령께서 다양성을 만들어줄 때는 우리가 볼 때에 “하나님 너무 심합니다. 어떻게 같은 예수님 믿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되고 왜 이렇게 꼴아 박습니까? 너무 불공평합니다. 저 사람은 하는 족족 잘 되고 나는 하는 족족 안 되고. 이래서 어떻게 천국 가겠습니까?” 이런 불평등을 통해서 자기가 했다는 것을 못 나타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할 때 창기가, “주님, 파주에서 미군 상대로 창녀 짓 참 잘 했지요.”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창녀 짓이 자랑거리가 되서 누구든지 창녀 안 되면 구원 못 받는 식이 돼버려요. 창녀라 할지라도 구원받아요. 막달라 마리라라 할지라도 구원받지 막달라 마리아의 그 짓이 자기를 구원하지는 않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왜 직업을 가지느냐 하면, 왜 목사가 되고 그러느냐 하면, 이게 구원과 관계없음을 내가 하면서 나의 기본적인 주체가 발견되게 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말은 이미 선과 악을 가진 내가 빼앗긴 하나님보다 더 믿을 만 하고 그걸 신봉하고 싶다는 의도에서 하나님과 결별 상태를 야기한 거예요. 저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고 이제는 하나님처럼 된 나 자신만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오늘도 얘들을 통해서 아직까지 서툰 위선을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기차에서 얘가 막 뛰어다녀요. 또 전에 같이 하다간 그 부모한테 당하겠고, 참자. 울산 금방인데. 간섭한다고 나이 들은 티낸다는 소리할 거고. 그래서 참았는데 얘들은 지밖에 모릅니다. 얘들한테 효도를 바란다고요? 얘가 무슨 효도를 합니까? 얘들한테는 효도라는 게 없어요.
얘들한테 제일 나쁜 질문은 뭐냐?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해야 돼요. 아빠가 미워? 엄마가 미워? 얘들은 둘 다 미워요. 왜냐하면 얘들은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한 만큼 누가 사랑해주면 아빠가 되던, 엄마가 되던, 옆집 아저씨가 되던 관계없이 그를 사랑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자기한테 안 해주면 아빠가 밉고, 엄마가 밉고, 동생이 밉고. 나중에 크면서 그걸 자기의 솔직한 것을 감추는 방법이 발달할 뿐이지 인간 자체가 선해지는 건 전혀 없습니다.
여기 조각목들 한 것은 바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차이들을 오직 그걸 묶어내는 것은 피 밖에 없다. 십자가 피가 결국은 성막을 허름한 넉 장으로 돼있거든요. 넉 장의 앙장. 앙장이란 지붕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주 초라하고 허름하죠. 초라하고 허름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불변이고 또 초라한 그것이 불변이란 말은 초라한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대단한 하나님이 아니고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었어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근처만 되도 황공무지로소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에 예수님이 너는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그럴 때 그 제자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나중에 가면 안 되느냐고 한다는 것은 격리와 불변의 가치를 아직까지 수긍이 안 간다 이 말입니다. 자기 세계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세계에 주님을 끌어당기고 싶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주님은, “네 아버지 죽었다고? 잘 됐네.” 이런 뜻이거든요. 네 아버지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죽지 않는 자의 차이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안 죽을 사람이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몽땅 죽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격리가 돼버리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결국 뭘 드러냅니까? 무엇과 무엇이 격리되며 무엇이 불변이며 무엇이 변하는지를 구분하는 그러한 경계선에서 주께서 멘트를 날리거든요. 따라서 그 경계선을 발견하게 되면 그게 주님의 말씀의 본 뜻의 의미를 발견한 거고 찾아낸 겁니다. 격리구나. 우리는 안개 같이 늘 변하는구나. 변하지 않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구나.
그 침례교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할 때 제가 답변하기를, 그러니까 예수님이 다 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은 지옥 가고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한 거예요. 그렇다면 그 이야기에서 뭐가 빠졌어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권한이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창세기 3장 24절은 주께서는 하나마나에요. “선악과 따먹었어?” “예. 따먹었습니다.” “너희 나쁜 짓 한 것 알지?” “압니다. 따먹으니까 부끄럼도 없고 서로 싸워서 안 되겠습니다. 어떻게 생명나무 다시 따먹을 수 없습니까?” “기다려 봐. 예수님 십자가질 때까지 기다려 봐. 나중에 십자가 지게 되면 너희들 따먹은 걸 무효로 돌리고 생명나무 믿는 자에게 구원해줄게.” 이렇게 나와야 맞거든요.
그런데 생명나무 길을 차단했단 말이죠. 선과 악의 지식이 있는 자는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나무가 달랑 두 그루밖에 없었어요. 한 그루는 인간이 조져놨잖아요. 나머지 한 그루는 주님께서 보호하고 지킨 거예요. 그 외에 나무 있습니까? 동산 중앙에. 없지요. 그렇다면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다는 말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에덴동산은 결국 생명나무와 죽음의 나무를 심어놨는데 인간이 넙죽 악마의 말을 듣고 죽음 쪽을 선택한 거예요. 죽음 쪽을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생명은 서로 대치되기 때문에 서로 결합이 되는 법이 없어요. 생명과 죽음은 절대로 결합이 안 되게 돼있어요.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죽음과 생명을 결합시키기 위한 십자가가 아니고 생명을 더욱 더 생명답게 하기 위해서 죽음을 더욱 더 죽음답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가 중간에 서있는 겁니다. “내가 선악과 따먹은 자는 생명나무 못 따먹는다는 취지를 이제는 알았지.” 해서 지옥 만드시고 천국 만들었어요.
정말 주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지옥에 가서 “여기 몇 명 남아있어?” “주께서 사랑해서 다 가고 일곱 명 남았습니다.” “일곱 명 마저 건져갈게. 너희들 지옥에서 고생하니 어때?” “괴롭습니다.” “너희들 천국 가고 싶어?” “가고 싶습니다.” “그럼 해줄게.” 그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결국 지옥은 단 한 명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예 지옥이 없어요. 라고 이야기하는 게 여호와증인입니다. 여호와증인이 다 침례교에서 나온 거예요. 재세례파에서.
그 사람들의 출발점은 뭐냐? 내가 구원받고 싶은 신체의 욕구, 욕망, 영원한 불변의 존재, 나쁜 것은 일절 오지 않게 하는 그 욕망을 성경적 용어로 어설프게 꿴 거예요. “여러분, 당신을 사랑하지요?” “주님도 사랑합니다.” “무엇이 소원입니까?” “천국 가고 싶습니다.” “천국 가고 싶습니까? 천국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 할 때 뭘 가지고 믿는다고 합니까? 만약에 예수 믿고 손들고 나오세요. 한다면, 어떤 사람은 고집 세서 나는 손들고 안 나갈 거야. 그러면 힘센 마누라가 강제로 끌고 가서 데리고 나갔다면 그것도 손든 게 되고. 지금 문제가 뭘 가지고 믿는다고 하는 거냐? 성경에 보면, 믿는다는 것은 뭐냐? 일한 것도 없이 경건치 않은 자, 자기 부인이죠. 나라는 주체는 죄만 짓는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아니하면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마태복음 16장에서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침례교는 십자가에 대한 지식만 얻으면 그게 믿음이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러고 있다.
카이스트에 어느 박사가 세계적인 발명을 했습니다. 만약에 침례교 같으면 박사는 박사대로 하고 그 다음에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은 사람이 되겠죠.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고 십자가를 믿게 되면 자기가 발명한 것이 이것마저 죄가 되는 거예요. 왜?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었기 때문에. 지가 무슨 행동을 해도 죄가 된다 이 말이죠. 내가 뭘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스트레스를 없애는지 몰라요. 왜냐하면 뭔가 의로운 게 있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잖아요. 왜냐? 주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의로울 때 생긴다 했지요. 그런데 아무것도 의로울 게 없다면 나는 맨날 변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안 변하시는 성막의 주인공 어린양, 그분만 믿으면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목사 하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 뭐가 어려운데?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자꾸 내가 뭘 해야 됩니까? 나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이렇게 질문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진짜 쉬운 것은 예수 보고 믿고 예수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 보는 게 아니고 예수 보는 자기를 보니까 갑자기 어려워지는 거예요.
“이렇게 보면 됩니까, 저렇게 보면 됩니까?” 그냥 봐. 폼 내지 말고. 달을 봤으면 보름달, 구름도 좋더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달 볼 때 내 스카프 어땠나?” 달 볼 때 입었던 스카프, 바바리 왜 자꾸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폼 나게 믿으세요.” 이러면 그것은 형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라 이 말이죠.
조각목이라 하는 것은 조각난 나무에요. 깨지고 보면 그냥 조각나서 아무 의미 없습니다. 모일 때 모여서 격리되고 불변의 단체로 만들려는 피가 있을 때 비록 우리는 조각난 나무지만 피로써 묶어질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말을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럴 때 함께 계시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함께 하시니까 그런 조각들이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통보해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못 삽니다.” “별 의미 없어.” “주께서 부자 되게 하옵소서.” “부자 된 네 자체를 믿게 하면 안 되지. 스스로 멸망 길이야.” 부자 안 됐는데 기도하니까 부자 되더라. 돼버리면 남는 것은 뭡니까? 가난한 나와 부자 된 나 결국 자기를 믿잖아요. 이것은 마귀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는 그런 유혹에 말려든 겁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예수만 믿어. 얼마나 쉽습니까? 그냥 예수만 믿으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조각목을 하나의 건축물을 만들어내는 은받침이 어떻고 쭉 나옵니다. 그 모든 것은 바로 피로써 만든 격리되고 불변의 요소를 만드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33절 보면,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을 구별하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거궤 위에 속죄소를 두고 그 장 바깥 북편에 상을 놓고”
성소와 지성소가 같은 앙장 속에 있습니다. 네 개로 된 덮개를 앙장이라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입니다. 우리 자신을 만든 분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육신의 아버지 말고. 육신의 아버지를 통해서 만들어낸 그분을 만나고 싶습니까? 십자가에서 만나요. 고정된 성막에서 만나야 돼요. 십자가에서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십자가 영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항상 이것저것 용서하기 위해서 내가 피 흘렸다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저것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면서 일상 가운데서 이것저것이 나와야 되거든요. 그러면 이것저것을 어떻게 만드는가?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것이 이것저것이에요. 오늘 저녁은 짜장면 먹었다. 그러면 짜장면 먹은 것도 이것저것이에요. 짜장면 먹게 하시면서 짜장면 먹기 전에는 몰랐던 죄가 짜장면 먹는 가운데서 밝혀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 집 손짜장 참 맛있네.” 이 말은 뭔 뜻입니까? “앞으로 이보다 맛없는 곳은 가나 봐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갑자기 사라졌던 주체가 행동의 주인공으로 내가 또 다시 그 현장에 드러납니다. 어떻게? “주여, 제가 이 행동을 했는데 선입니까, 악입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이, “네 앞에는 선이고 악이고 없어. 선이고 악이고 안 자체가 죄야. 따지지 마.” 그냥 짜장면 먹었거든 고마운 줄 알고 이것보다 맛없는 짜장면 먹더라도 그것도 고마운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하라.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용서의 효과를 내려주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늘 용서하시는 고마움 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왜? 하는 짓거리가 내가 주인공으로 우기고 싶은 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죠. 매일같이 하지요. 그래서 성막을 통해서 주님을 우리를 고정시키고 우리를 불변시킵니다. 우리가? 아니요. 용서가 우리 안에서 고정되고 불변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성막을 주심으로써 낮아지심을 알았고 용서하심도 알았고 피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구원될 자격도 없으면서 주님의 피 증거하라고 구원되었사오니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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