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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고대 신학 130409강의[신학]

고대 신학 130409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4-13 12:05

20130409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이야기하는데 이게 진리에 관한 문제거든요. 옛날 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이왕 사는 것 제대로 살아보려고 한단 말이죠. 제대로 사는 것,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은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이 있다면, 진리라는 것은 바르게, 바른 것. 지금은 인간에게서 진리가 나왔다고 고집하는데 옛날에는 신에서 나왔다고 보거든요. 현대철학에서는 신이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거고 인간이 만들어내서 신의 진리, 계시라 해서 나와 버리면 신에서 나온 진리도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거죠.

우리가 오늘 공부해야 될 게 고대신학인데요. 신학이란 말은 결국 따지고 보면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죠. 왜냐하면 옛날에 진짜 신을 믿을 때는 신학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어머니학’, ‘아버지학’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더 이상 아버지, 어머니를 섬기기 싫다는 뜻이에요. 그냥 아버지 계시고 효도하면 그만인데 ‘효도학’ 나왔다는 말은 효도하기 싫다는 그 말과 같은 말이고 볼 수밖에 없어요.

부모를 섬기는데 방법, 학문을 연구하겠다는 말은, 부모에 대해서 부모 자체, 부모 섬기는 것도 내가 하고 싶은 범위에 가둬놓겠다는 그런 의지가 강렬하죠. 옛날 조선시대나 정에만 있을 때 자녀교육학이란 게 필요했습니까? 그냥 얘들 살면 되지 학문이란 게 필요치 않았단 말이죠. 그런데 얘들을 학교 보내니까 그 다음에 ‘교육학’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신학이 등장한다는 것은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 신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신을 거부하겠다는 게 아니라 신을 내 마음에 흡족한 하나님으로 만들어서 그것만을 섬기겠다는 그런 의도가 강하죠. 이것은 결국 누가 누굴 섬기는 겁니까? 본인이 본인을 섬기는 거예요. 신학에 대해서 거론된다는 말은 이미 인간은 신으로부터 슬슬 눈치 봐서 벗어날 기운이 싹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당시에 기원전 600년경인데 이러한 기운이 나왔다고 하면서 신을 거부한다고 노골적으로 나온 게 아니에요. 소크라테스도 신을 거부했다는 것 때문에 참두정치에 있어서, 배심원들에 의해서 스스로 사형하기를 강요했지요. 처음에는 벌금형을 내렸다가 소크라테스가 벌금형을 수용하니까 벌금형으로 모자란다. 스스로 자결하도록 해야 소크라테스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고 해서 그 당시에 배심원들이 결정한 것이 자결의 방법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죽었어요.

죽인 핑계가 뭐냐 하면, 소크라테스는 신을 믿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안 믿는 게 아니에요. 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지. 소크라테스가 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하는 이야기에 젊은 사람들이 따라온 거예요. 결국 추종자들이 문제였어요. 소크라테스가 개혁하고 시위한 사람이 아니고 추종했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한테 뭔가 배우고 난 뒤에는 기성세대에게 반발한 겁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들이 보기에 젊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전적으로 쏠리니까 뭐가 기분 나쁜 겁니까?

여기 중요한 나오는데. 그게 전통이에요. 모든 세상의 공동체라는 것은 전통에 의해서 유지되는 겁니다. 전통은 옳고 나쁘다고 표현할 권한 밖에 존재하는 거예요. “왜 뇌물 받았습니까?” 뇌물 아닌데. 관행인데.“ 그러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관행은 옳고 그름 완전히 젖혀놓은 거예요. 관행, 관습, 전통이란 말은 따지지 말란 거예요. 따진다는 말은 그게 이성이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거예요. 인간의 판단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 전통입니다. 전통을 학문적 용어로 한다면 역사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왜 돌아가셨어요? 무엇에 부합되지 않아서 돌아가신 거예요? 전통이죠, 전통. 유대교의 전통, 역사.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숭배하는 것은 너희들은 죄를 따르고 있다고 본 겁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신학에 의하면, “한 사람이 죄를 범했음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전통, 역사에서는 아담이 했던 죄가 퍼진 거예요.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죄가 각색을 한 거예요. 죄가 모습을 바뀌어서 역사와 전통의 이름으로 퍼졌는데 그걸 십자가로 보면 죄가 되고, 십자가를 우회하지 아니하면 전통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의 전통, 노회의 전통, 교회의 전통, 가정의전통, 공동체의 전통, 기업체의 전통, 학원의 전통. 모든 전통은 죄라는 의미를 우회해서 표현하게 되면 죄가 되는 겁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전통, 이런 것. 그 전통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옳고 그름을 일체 이야기하면 안 돼요.

자식이 “아빠, 다른 집은 토요일에 놀이동산에 가는데 왜 우리는 어린이날도 놀이동산에 안 가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게 우리 집 전통이다.”

그래서 신이라는 것은 개인이 신을 믿고, 안 믿고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신은 그 공동체를 묶어주는 전통입니다. 전통이니까 이 신을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이스라엘 쪽에서 우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듣는 종족 입장에서는 기분 나쁘지요. “왜 우리가 너희한테 우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돼.” 그럼 너 만큼은 우상이 아닌 셈이 되지요. 누구에게 우상이라고 질책하는 우리는 진짜 신이고 그 외에는 우상이란 뜻이거든요.

그러면 우상이라는 것은 다른 민족들은 기분 나쁘니까 바뀌면 그냥 신이죠. 신이란 민족이 먼저 있고 그 민족을 단결하는 하나의 매개체로써 종교, 신이 들어가는 겁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어요. 탈레스란 사람이 원래 장사하는 사람인데 탈레스란 사람이 장사하면서 여러 동네를 다니면서 신이라는 전통을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인기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사람들한테 인상 좋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전통은 그 집단의 권력이 돼요. 만약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사람은 그 권력의 핍박을 받게 돼있습니다.

70년대에 통기타와 맥주와 청바지, 그리고 장발에다가 미니스커트,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기성세대에 대한 도전입니다. 만약에 그 당시 모든 기성세대가 미니스커트 입고 장발했으면 젊은 사람들은 머리를 깎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행동한다는 것은 기존에 있는 것과 얼마나 차이를 드러내느냐는 차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부각하고 싶어서 사람들은 행동하게 돼있습니다. 파격적이라 하지요. 뭔가 이탈하는 것,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 들뢰즈는 이걸 탈주라고 하는데,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탈. 일탈하지 아니하면 숨 막히는 전통에 복종해야 되지 않습니까.

탈레스가 신을 벗어나도 신을 건드리면 안 되니까 신은 전통이라 건드리면 큰 일 나니까. 이것을 자연이라 합니다. 지금은 자연과학 쉽게 쓰지요. 옛날에 자연이란 이것은 죽을 요량하고 써야 하는 말이에요. 자연이란 말을 썼으면 신은 따로 있고 자연은 따로 있는 게 되죠. 자연을 끄집어냈다는 말은, 자연은 자연 스스로의 질서로 돌아간다. 그전까지는 자연은 없어요. 그럼 뭡니까? 신이 충돌하고 화내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신이 노는 운동장을 세상이라 했어요. 자연이라 하지 않고 세상인데 무슨 세상이냐? 신이 노는 세상.

그래서 탈레스를 철학의 시작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왜? 신의 운동장이라 봤던 세상을 신의 세상이라 본 게 아니고 자연의 세계로 본 거예요. 자연의 세계로 보면, 자연은 관찰을 통해서 파악이 돼요. 인간이라 하는 것도 신이 노는 운동장에서 인간도 가담해서 같이 신과 마찰하고 충돌하고 때리고 한단 말이죠. 신의 말을 어기면 질병이 오고, 신의 말을 위반하면 운명이 꼬이게 되고.

그런데 갑자기 신이 노는 마당이 아니고 세상은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소돔과 고모라잖아요. 이렇게 하다가 이 세상을 신이 작용하는 세상이 아니고 자연을 써버리면, 나쁜 짓은 안 들키면 되잖아요. 나쁜 짓을 해도 자연스럽게 하면 되지요. 나중에 나옵니다. 탈레스 이후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 나오면 그들이 말한 윤리라는 것은 그전까지는 신의 명령을 따라서 하는 거고, 신의 명령은, 신이란 집단, 공동체에서 만들지요. 신의 명령은 공동체의 명령이니까 이것은 관행이고 관습이고 전통이 신의 계시가 되는 거예요.

그동안 줄곧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는 신으로부터 제 때에 비를 공급받았고 신으로부터 가뭄도 적었고 신으로부터 지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철없는 젊은 아들아 이미 우리 조상님들이 신와 거래해서 수천 번 확인하고 얻은 간증이죠. 이렇게 했더니만 복 받고 이렇게 했더니만 벌 받았다는 누적된 경험에 의한 신과의 모든 관계가 관습이 되고 관행이 되는 겁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할아버지가 굉장히 심하게 가르쳤어요. 밤에는 손톱을 깎지 마라. 문턱을 밟고 넘지 마라. 아침에 일어나서 고양이 보면 재수 없다. 이게 누가 창안한 거예요? 누가 창안한 게 아니에요. 옛날에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요. 이야기했다고 해서 그게 관행, 관습되는 게 아니에요. 과연 밤에 손톱을 깎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수천 차례 시험을 해봤겠습니까. 해보니 역시 나쁘더라. 시루떡 할 때 그냥 하지 말고 기도를 하고 해라. 이사를 할 때도 날 잡아서 해라. 이게 누가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게 아니고 수천 차례, 수만 차례 반복해서 하니까 역시 조상님 말이 버릴 게 없는 거예요. 그게 신의 계시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교회 다녀라. 봐라. 네가 교회 몇 번 안 나오더니만 부도났잖아. 하나님이 너를 인도하려고 한다니까.” 그런데 성경책에 하나님 안 믿으면 부도난다는 게 어디 있지요? 로마서 몇 장에 있어요? 골로새서에 있어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성경에는 뭐라고 돼있습니까? “이미 우리는 죽었고”라고 돼있지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삽니까? 치과의사가 하루 종일 낮에 어디에 집중해요? 치과의사가 개성공단에 관심 있습니까? 하루일과가 뭐만 쳐다보고 있습니까? 사람 이빨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자기 하는 일에 집중하는 거예요. 종교라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에 집중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고, 해를 적게 받고 사는가? 그게 종교입니다. 복음 뭐냐 하면, 사람은 왜 죽는가가 복음이에요. 왜 우리는 죽게 되었는가? 이게 복음입니다. 복음을 소통하는 것은 사람의 육이 아니고 성령이죠. 성령이라니까.

여러분, 요한복음 보세요. 예수님 만날 때 니고데모나 사마리아 여인을 보세요. 항상 예수님 이야기할 때 “예수님 말은 이해하겠는데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합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해요. 그게 뭐냐 하면, 38년 병자도 마찬가지고, 눈을 뜨게 된 소경도 마찬가지고. 항상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냥 쉽게 공백상태에서 이해하는 게 아니고 남들은 이렇게 합디다하는 거예요.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에요. 바디매오가 예수님한테 구원해달라고 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게 어디 저주받은 인간이 어디 메시아를 믿어?” 저주받는 인간은 메시아를 만날 수 없다는 게 유대교의 관행이고 관습이었지요. 막달라 마리아가 울면서 향수를 뿌릴 때 바리새인들이 그 행동을 보고 뭐라고 했어요? “아이고, 예수란 양반, 도사인 줄 알았더니만 저 여자가 질이 안 좋은 여자인지 왜 모르지?”라고 한 이야기한 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그동안 신의 계시란 누적된 해석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걸 방금 제가 종교라고 했지요. 종교라는 것은 신이 만든 인간이 어떻게 신 앞에 바르게 사느냐? 그게 종교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종교한테 죽은 거예요. “너희들은 죄의 자식이다.” 더 심하게 했지요. “뱀의 자식이야. 악마의 자식이야.” 이것 이야기해서 예수님 돌아가셨잖아요. 민중들이 예수님 죽인 게 아니고.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고소해서 죽였지요.

우리가 왜 죽지? 이것은 사도 바울이 종교생활 잘 하던 사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종교에서 복음으로 바뀌었잖아요. 복음으로 바뀌면서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밖에 없다고 할 때 그것을 사람들이 믿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사람들이 관심 있는 것은 기존에 관습과 관행에서 내려온 것에 대해서 예수란 인물로 인해서 추가된 어떤 새로운 인간이 행복하게 하는데 어떤 아이디어를 줄까 했는데 갑자기 사도 바울이 전하는 1차, 2차, 3차 전도하면서 전한 내용들이 갈라디아서, 골로새서 편지에 다 나오잖아요. 그 내용이 십자가 이야기라.

그리고 그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걸 믿는 사람이 있을 때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인간의 지혜로 된 게 아니고 내가 전한 것은 인간의 지혜와 설득으로 함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라 했단 말이죠. 그러면 사도 바울은 사람들 꾀려고 전도한 게 아니고 성령을 받아야 될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작업 속에서 오직 십자가 복음을 마주치게 한 거예요.

여러분, 목회 쉽지요. 목회 되게 쉬운 거예요. 십자가 복음 전하면 목회 주체가 누구죠? 목사 아니고 성령이 오고 성령은 예수님 십자가 영으로 오신 분이고 그리고 십자가 뜻을 갖고 있는 성령과 십자가 복음을 아는 사도 전도자와 합작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존의 사람들은 종교를 갖고 있죠. 이미 종교의 세계지요. 종교의 세계에 대해서 탈레스는 자연을 이야기해버렸어요.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속합니까? 신과 맨날 충돌하고 신에게 미워하고 신에게 제사하고 했잖아요.

지난 시간에 한 것 기억 안 나지요. 신과 인간의 만남은 중간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제사지요. 그런데 탈레스는 제사가 아니고 내가 왜 바치느냐 말이죠. “나는 자연의 일부다.” 참 이건 해방선언입니다. 나는 신에게 속한 게 아니고 자연의 일부라는 거예요. 데모크리토스쯤 나가면 인간을 포함해서 나무고 꽃이고 모든 것들은 원자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원자의 덩어리가 인간이다. 원자의 배열과 원자의 충돌과 원자의 만남이 오늘날 자연을 이루었고 인간을 이루었다면 여기에 신의 계시란 이름, 신의 말씀, 전통, 이런 것은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신학자들은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해야 될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전부다 이 사람들은 앞의 선배 자연신학자들이 이야기했던 것을 정보를 추가해고 추가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게 과학입니다.

이렇게 전통을 쌓아나가는데 전통을 그냥 추가하지 않습니다. 꼭 선배를 비판합니다. 우리는 비판당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 양쪽을 다 보는 거예요. 우리는 후대니까. 도대체 인간 속에서 무슨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게 튀어나오느냐? 알 수 있고 그걸 대충 훑어만 봐도 도대체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고 하나님을 믿었다는 모든 아이디어가 선배들한테 이미 다 나왔다는 사실. 새로 나올 게 없어요.

미리 예를 들면 플로티누스 같은 경우에 플로티누스는 2세기 경이거든요. 플로티누스 이런 사람들도 우리가 보기에 기독교 신자냐, 아니냐? 기독교 신자 아니거든요. 플로티누스 이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선배들이 이야기한 것이 나와요. 그 선배 격인 크세노파네스란 사람이 있어요. 기원전 5세기경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신은 하나이고 모든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11장 35절, “모든 것이 주로부터 나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 이런 게 벌써 나온다. [신은 모든 것이 하나이며 신성은 동일하며 시작과 끝이 없고 항상 자기 자신으로 남아서 불변한다.] 이것은 알파와 오메가와 같은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기독교 들어오기 600년 전에요. 이게 인간의 생각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런데 왜 진작 이런 생각을 안 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이게 인간 속에 창조된 게 아니고 가능성, 인간에 잠재돼있어요. 어떤 누가 아이디어를 이야기하면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자기 딴에 새로운 것이 추가가 되면 그것이 마치 창조된 것처럼 튀어나오는데 사살은 인간 속에 잠복돼있던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후대 중세철학은 플로티누스에서 나왔거든요. 어거스틴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기독교란 이름으로 신학을 전개했는데 그 신학을 전개하면서 나온 논리적인 아이디어는 이미 그리스 철학에서 다 나옵니다. 그걸 헬레니즘이라 이야기해요. 헬레니즘은 사실은 헬라마케도니아니까 기원전 331년이니까 탈레스부터는 아니고 중간에 플라톤부터 시작하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에 헬레니즘이 나오는데 헬레니즘이 나오면서 세상에 현재에 나온 모든 철학은 그 안에 집대성 되어서 다 나옵니다. 그걸 이번 시간과 다음 시간에 다 해볼 요량입니다.

그걸 어떻게 다 하는가? 우리는 인간이거든요. 인간이라서 이것을 어렵게 설명할 필요 없어요. 관찰한다는 것은 모든 변화를 관찰하잖아요. 관찰할 때 생각부터가 세상은 모든 것이 파생되어서 나오는데 원래 것이 뭐냐? 원질이 뭐냐? 시초가 뭐냐? 그게 탈레스는 이렇게 봤어요. 축축하다. 간단하지요. 축축하다는 것은 습기가 있다. 인간의 모든 것도 사실은 물로 돼 있잖아요. 그래서 모든 것은 물일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그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 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물로 돼있다는 것은 아직도 근원을 깊이 있게 안 들어가서 그렇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무 감각적으로 보지 말자. 이 말은 동물이나 감각에 머물지 적어도 동물과 다른 인간이라면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갈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추상적인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보이는 것이 나왔기 때문에 적어도 원판 정도면 보이지 않는 정도는 이야기해줘야 좀 깊이 연구했다는 소리 들을 수 있지 않느냐. 그래서 무한정, 한정되지 않은 것으로 본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현대과학과도 통하고 있지요.

그 다음에 아낙시메네스가 있죠. 처음에는 신을 믿었잖아요.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을 대체할 만한 다른 게 있어야 “나는 신보다 이게 더 좋아.”라고 내세울 수 있는 거예요. 추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달걀이 먼저입니까? 그냥 물음 자체가 평범한데서 묻는 게 아니고 물음 자체가 답변을 제한적으로 가둬놓고 묻는 질문이 되는 겁니다. 시간적 순서라는 속에서 가둬놓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고 묻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논리적 순서를 확장시켜서 물으면 정답은 생명이 먼저지요. 왜? 닭도 생명이고 달걀이고 생명에서 나왔으니까. 그런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둘 다 보다도 생명이 먼저라고 할 때 생명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죠. 논리적으로 들어가면 이미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죠. 그게 바로 아낙시만드로스가 스승을 극복하면서 한 이야기란 뜻입니다. 적어도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라면 시시하게 수준 낮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간이라 하면 너무 촌스럽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더욱 더 깊이 있게 논리적으로 들어가면 생명이라는 추상적인 것까지 건져낼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라는 것은 정해진 게 없다. 정해진 게 없다는 말이 어떻게 나왔느냐? 너무 구체적이어서는 안 되고 감각에서 벗어나야 된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감각에서 추상으로 나오느냐? 그것도 논리로 설명이 나와야 되겠지요. 이 설명을 그 뒤에 아낙시메네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재 3페이지에 나와 있지요.

아낙시메네스는 생명이란 추상에서 구체적인 사물이 나오기 위해서 ‘농도’로 본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으면 현대과학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에요. 밀도라는 것. 에너지가 뭉치면 물질이 되거든요. 이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입니다. E=MC²질량이 없는 힉스입자가 뭉치면 질량이 생겨요. 현대과학에서도 에너지 농도 문제가 세상의 모든 근원으로 보는 겁니다. 이걸 아낙시메네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그 에너지를 공기라고 한 거예요. 이것이 그 당시에 얼마나 놀라운 건지 공기에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생명은 물론 눈에 안 보이지요. 눈에 안 보이면서도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발상이 전환되어야 그게 가능할까요? 공기라는 것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에 아는 사람 누가 있어요. 공기 안 보이는데 있다고 했을 때에 서양에서도 근세에 들어와서 이걸 확인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4페이지에 피타고라스라는 사람은 수를 주장한 거예요. 피타고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종교단체에요. 종교단체에서 피타고라스는 나름대로 전통과 관행, 관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세 가지에 복종하라 했습니다. 선배, 스승, 국가에 복종하라 했습니다.

현대 인간 자체에서는 뭐가 빠졌지요? 제일 중요한 게 빠졌지요. 자기 부모지요. 이 말은 선배와 스승과 국가에 복종하란 말은 네 혈육과 가정에서 벗어나라. 이 주장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와 너무나 유사하잖아요. 너의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기존의 공동체가 너를 잡아먹는다는 말이거든요. 기존의 공동체의 관행과 관습을 따르면 너는 어디 간다? 너는 멸망당하고 지옥 간다. 그러면 영생 얻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됩니까? 기존의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도약의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겁니다.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거든요.

육의 단체에서 벗어나서 영의 단체로 옮기지 아니하면 구원받지 못하는데 그 영의 단체가 교회잖아요.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주라고 고백하는 새로운 단체, 공동체가 뭐냐? 교회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교회라는 것은 필히 육으로부터 끊고 영으로 갈 필요가 있지요. 갈라디아서에서 두 가지 노선을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의 노선, 이것은 하갈 쪽이고 또 하나의 노선은 성령에 따른 약속의 노선, 이것은 사라의 노선이죠. 결국 모든 인간은 두 가지 노선밖에 없고, 양과 염소처럼 도저히 섞일 수 없이 구분되는 거다.

방금 했던 이런 이야기가 이미 피타고라스에서 나왔잖아요. 따라서 성경을 이용해서 기존의 가정을 버리고 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해보자는 것은 복음적이에요, 복음적이 아니에요? 복음적이 아니고 피타고라스적이죠. 바로 그러한 사이비 단체들, 신천지나 모든 단체들이 가정을 버리고 초대교회처럼 공산주의를 이루어서 서로 자기 재산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유하는 것, 이것은 피타고라스적입니다. 복음적이 아니에요.

오늘 쉽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쉽게 갈 수가 없네. 다시 해봅시다. 방금 추상이라 했지요. 생명이란 추상이잖아요. 사람들은 추상을 가만두질 않아요. 비가시적이에요. 사람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을 가만두지 않고 구체화시키면 가시적이 되지요. 가시적으로 보고 싶은 것이 공동체 아닙니까. 공동체주의, 공동체. 그럼 뭘 믿어요? “비가시적임을 믿습니다.” 해놓고 실제적으로는 이걸 믿고 싶은 거예요. 피타고라스적이라 이 말입니다. 내 말은.

안 믿으면서 어떤 교회 단체에 소속되어서 선배 있고, 스승 있고, 또 국가 있지요. 하늘나라도 일종의 국가니까. 그걸 신봉하겠다는 말은 뭐와 떼어놓겠다는 거예요? 기존의 가정에서의 관습과 관행을 떼어놓지 않으면 이 세계에 못 들어온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 나아가면 사실은 돈 문제에요. 네 몸으로 애쓴 돈, 어디에 바쳐라? 옛날에 아버지한테 용돈 주듯이 목사한테 용돈 드리고 돈 모아서 새로운 공동체로써 하늘나라 가보자.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게 있으면 대순진리회처럼 얘들 공납금 다 털어서 그 단체 다 맡기게 돼있어요. 그리고 돈을 맡기고, 지분 사고, 주식회사 되고, 교육관 짓고, 예배당 짓고, 여기에 아낌없이 바칩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보이니까. 복음 위해서 돈 내라. 안 냅니다. 하지만 예배당을 위해서 돈 내라. 왜? 그게 자기 업적이기 때문에. 이런 아이디어는 이미 피타고라스부터 나온 겁니다.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성공한 거죠.

주변에 새로운 국가공동체와 대결해서 결국 쫓겨났는데 피타고라스가 새로운 공동체를 하게 된 것은 제사를 빼기 위해서. 그 당시에는 종교 세계기 때문에 제가 지난 시간에 했지요. 제사를 통해서 신을 달래기 위해서 한 거예요. 제사라는 것은 뭘 갖다 바치는 게 있어야 돼요. 마야나 잉카 문명 보세요. 제단을 왜 만듭니까? 아이들 놀이터로 미끄럼틀 타려고 만들었습니까? 뭐 바치려고 피라미드 만들었지요? 그 꼭대기에 뭘 바칩니까? 처녀나 갓난아이의 생명을 바쳐서 보이지 않는 신의 분노를 누그러뜨려서 제 때에 비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 한 거고 거기에 종사한 사람은 제사장이에요.

제사장들은 농사 안 지어서 좋겠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도 마냥 좋은 게 아니에요. 만약에 얘를 바쳤는데 제 때 비가 안 오면 민중들이 제사장 일가 민중들이 모가지 날렸습니다. 완전히 돈 놓고 돈 먹기라. 한 방 뜨면 완전히 뜨는 건데 만약 실효성이 없 훅 가는 수가 있어요. 왜 부흥사들이 육이오 때 폭탄 맞았는데 살았다는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겁니까? 자기 기적 받은 것으로 계속 수십 년 돈 빼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왜 장로들이, “기도해서 옆에 있는 땅 사게 되서 감사합니다.” 십년 전에 한 이야기를 왜 자꾸 우려먹는 데요? 나 믿음 있다는 걸, 나 장로답다는 걸 하나의 권력으로 관행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그 짓하는 거예요. 사람들 눈에 가시적 효과, 권력을 원합니다. 사람들 몰리는 것.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몰려서 죽었어요. 국가 있는데 어디서 딴 국가 만들어.

자연을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지적인 우월감이 있어요. 무식하게 제사 드려서 신을 달래려고 하는 인간들아 언제까지 그 미신에 매달려있을래. 우리는 자연을 알아서 스스로 관찰해서 나도 자연의 일부로써 “하나님이여, 나는 어떤 인간입니까?” 묻기는 그런 되도 않는 걸 왜 묻느냐 말이죠. 나는 나한테 묻는 거예요.

소크라테스는 세상에 진리는 있는데 첫 번째 진리는 있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네 자신을 알아야 된다. 이게 두 번째였어요. 네 자신을 모르면 정말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프로타고라스란 사람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사실은 같은 이야기에요. 네 자신을 알라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한 이야기가 아니고 텔피 신전의 기둥에 있는 글이지만.

피타고라스는 세상의 모든 것을 조화로 봅니다. 아름다움이 있다고 본 거예요. 신을 벗어나서 자연 스스로 질서가 있는데 그 질서를 구체적으로 숫자로 이야기한다. 음악도 8음계가 될 때 가장 아름답다. 그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왜 9가 아니고 왜 10이 아니고 왜 8음계냐 말이죠. 현을 1/2, 1/3, 1/4 늘릴 때마다 인간이 가장 감동받는 음악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7/5, 3/7 이런 것은 감동을 안 받아요. 왜 그런가? 그것은 자연 안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그걸 종교적 비밀로 본 겁니다. 제사 바쳤던 종교를 대체해서 자연 안에 있는 질서를 우리끼리만 공유하는 새로운 종교의 비밀을 그들은 시작을 한 거예요.

피타고라스는 모든 것을 숫자로 표현했는데 정의는 4로, 결혼은 5로, 서약은 10으로, 그리고 여자의 아름다움은 8로. 그래서 나온 게 8등신. 여자는 8로 나올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왜 그런데? 묻지 마라. 너는 그렇게 안 보이나. 나는 그렇게 보이는데. 그러니까 옳은 거예요. 세상은 숫자로 질서 있게 돼있는데. 그래서 피타고라스는 무리수를 이야기하면 죽여 버립니다. 이것은 탈퇴정도가 아니고 죽여 버려요. 악마의 숫자기 때문에. √2, √2를 이근호라 하거든요. 어디서 무질서한 것들을 감히 거론하느냐고. 정돈된 숫자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자연에 부합한 인간의 참된 모습이라고 봅니다.

자연은 숫자의 아름다운 음악이 있다. 우리가 음악하는 것은 대자연의 음악의 일부를 차용했을 뿐이지 사실은 우리가 아는 음악보다 더 음악이 대자연을 울리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무엇과 닮았습니까? 시편 19편 1절에 보면, 이 세상은 해는 해에게 달은 달에게 말하노니. 이것은 들리는 소리도 없고 언어도 없으나 서로 통하지요. 이게 피타고라스가 벌써 이야기한 거잖아요.

성경을 해석할 때 이것은 기발하다, 이것은 성령이 주셨다고 생각하겠지요. 철학을 공부해보세요. 그것은 성령 안 받아도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우리는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마치 기발한 아이디어처럼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 이 사람은 민주정치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을 갖고 있어요. 나중에 플라톤은 13페이지에 나오죠. 나쁜 정치를 먼저 언급했어요. 나쁜 정치를 네 가지로 언급했어요. 금권정치, 이건 다 아는 거고. 과두정치. 그 다음에 참두정치. 그 다음에 민주주의. 이 네 가지 전부다 틀려먹었다는 거예요. 나쁜 정치라는 거예요. 금권정치란 돈으로 하는 거기 때문에 뻔히 아는 거고. 과두정치란 소수가 하는 거예요. 소수가 내각을 만들어서 속닥속닥하는 것. 맨날 인사에서 박근혜가 욕 얻어먹는 이게 과두정치죠. 참두정치는 범위가 넓지요. 일종의 귀족정치라 할 수 있지요.

그 다음에 나오는 민주정치도 아주 싫어했어요. 싫어한 이유가 다수에 의한 약한 사람들에 의한 지배가 이뤄진다. 다수결로 하니까 표 싸움이라. 옳고 그름이 아니고. 플라톤의 정치는 옳은 정치를 해야 되는데 숫자 많으면 진리로 취급되고 모든 사람이 ‘아니오’할 때 ‘예’라면 쪼다 되는 거예요. 민주정치라 하는 것은 대세가 뭐며, 지금 사람들이 좋은 게 진리로 간주되기 때문에 정말 억울한 사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심지어 법에서까지 그런 일이 이뤄지니까 나쁜 정치가 되는 겁니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진리에 가까운 게 아니다.

그럼 뭐냐? 철학을 하는 사람이 독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철학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감정적인 사람은 절제를 할 수 있어야 되고, 그리고 혼돈된 사람은 이성적으로 따질 수 있어야 되고, 용기가 있고 지혜가 있고 덕이 있는 사람이 독재를 하게 되면 이 사람은 희생을 할 수 있겠지요. 희생을 한 사람 말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적으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계급을 정해서 피라미드식으로 해야 되는데 여기서 철딱서니 없는 게 여자와 아이들.

그래서 여자와 아이는 집안에서 자기 부모가 키우면 안 돼요. 왜? 부모가 술 먹으면 아이들도 술 먹으니까 안 돼. 여자와 아이는 국가에 위탁해야 되고, 위탁한다는 것은 반드시 공유해야 된다. 남자들한테는 복음이에요, 복음. 네 여자, 내 여자 없이 아주 절제 있고 깨끗하고 용기 있고 훌륭한 사람들은 여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 있고 술 먹고 마약하면 여자 뺏어버리고, 안 그러면 수술해버리든지. 장가도 못 가요. 이상국가지요.

플라톤이 이런 이야기할 때 현대인들은 안 맞지요. 안 맞지만 이것을 추구하는 나라가 있어요. 어느 나라 게요? 지금도 유훈통치합니다. 죽은 귀신이 통치하고 있어요. 그리고 김일성의 국가관은 어디서 나왔는가? 기독교에서 나왔어요. 지금도 기독교의 많은 단체들은 바로 플라톤의 국가관을 합니다. 재산이고 여자고 아이고 간에 우리 위대하신 태양 교주님이 알아서 다 관리한다. 우리 마음속에 은연중에 우리가 교주 자리에 앉고 싶어서 이런 이상적인 모든 것을 지배하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았던 시험, 마귀에게 받았던 그 마귀적인 심성을 사실은 모든 인간이 품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다가 가끔 꿈에서나 실현하지 않는지 이미 꿈이 아니고 철학에서 다 나오고 있습니다.

한윤범(IP:14.♡.134.60)

13-04-13 12:06

20130409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2-고대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여기 파르메니데스 그 다음에 헤라클레이토스 있는데 순서상 바꾸어서 헤라클레이토스부터 먼저하고 그 다음에 파르메니데스 하도록 하겠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란 사람이 유명한 사람인데 현대철학이나 오늘날 과학에서 사실은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이 두 사람의 견해가 대립이 되거든요. 이 대립을 왔다갔다는 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철학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세상에 동일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늘 바뀐다는 겁니다. 물이 흘러갈 때 늘 바뀌듯이 모든 것은 자꾸 바뀌는데 그 바뀌는 걸 ‘로고스’라 합니다. 벌써 로고스 나오면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사람이 얼마나 앞선 지 아시겠지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로고스란 중세신학에서 이야기하기를 신은 있고 신이 로고스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로고스란 뜻은, 뜻보다는 느낌이 뭐냐 하면, 다양하게 변한다는 것을 항상 전제로 깔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한 분이다. 숫자로 하나잖아요. 하나님은 하나인데 어떻게 다양성이 나오느냐? 이 문제에 있어서 옛날 사람들은 로고스를 집어넣었단 말이죠. 로고스란 뭐냐? 헤라클레이토스 이야기한 그 로고스 개념을 그대로 집어넣은 겁니다. 로고스는 뭐냐? 세상의 변화되는 모든 총체를 로고스라 합니다.

불은 항상 불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불이 물이 되고, 물이 흙이 되고, 흙이 물이 되고 다시 불로 바뀌는 것.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떤 특정에 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뀐다는 거예요.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변화되는 모든 것의 앞에 있는 불로써 의미하는 겁니다. 불이라는 것은 불이 꺼지면 다시 켜지고 켜지면 다시 되살아나고. 산불 경우에 그런 경우도 있고. 불이 있다, 없어졌다. 그런데 불이 다시 등장한다. 이걸 통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있음은 무로 가고 무에서 다시 유가 되고. 세상이라 하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고. 있다, 없다. 씨스타 노래에 그런 게 있잖아요. 있기, 없기.

신은 한 분이지만 신이 인간을 만들 때는 있다, 없다 식으로 한 거예요. 있다, 없다는 반대니까 모든 것은 자기의 반대되는 것을 통해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헤겔의 변증법이 나오는 겁니다. 나란 누구냐? 나와 반대되는 것을 찾아야 돼요. 내가 반대되는 것을 찾아서 반대를 통해서 미처 내가 반대를 만나기 전에 몰랐던 것을 반대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되찾아감으로써 자기를 발전적인 자아 생각이 더 풍성해지는 겁니다. 더 완벽해지고 완숙해지고 성숙된 자아를 고취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서 나는 잡채밥을 안 먹는다. 그런데 군대 가서 갑자기 잡채밥을 먹었을 때 내가 이렇게 잡채밥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절대 안 먹는 것인데 막상 먹고 보니까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잡채밥까지 먹을 수 있는 보다 완숙하고 성숙되고 발달되고 발전된 사람이 될 수 있지요.

이것은 기독교 내에서도 그런 게 많지요. 어떤 사람이 기복신앙을 갖고 있다. 헌금 내면 만사가 형통한다고 알았는데 십일조 잘 냈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원망하죠. “하나님이여, 남편이 잘 되기 위해서 헌금해놓고 십일조 해놓고 남편 잘 못되면 나는 어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까?” 하는데 나중에 남편이 다리 잃고 난 뒤에 그렇게 고집스럽게 교회 안 가던 남편이 교회 간다면, “내가 그동안 너무 기복신앙에 있었구나. 나 잘되는 게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은 역경과 환란을 통해서 나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남편이 다리를 잃는 사고를 당하게 해서 남편도 구원받고 내가 내 복만 챙기는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용하는구나.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새롭게 알 때 이게 헤라클레이토스.

우리가 신앙이라 여기고 이정도 하면 깊은 신앙심이라 여겼는데 이미 그런 아이디어가 기독교 이전에 성령과 상관없이 헤라클레이토스에 다 나오죠. 세상의 모든 것은 반대편을 통해서 다시 자기에게도 되돌아온다는. 자기 안의 대립이나 반대를 통일해서 보다 더 발전된 것을 만들어낸다. 얼마나 중요한 사상을 기원전 540년경에 이미 그런 걸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공부를 안 하고 성경 보면서 깨달았다 하면 그 깨달음이 마치 성령인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많지요.

이것만 해도 놀라는데 파르메니데스는 더 놀라운 말을 합니다. 뭐냐 하면, 인간이 보기에 감각적으로 보였던 모든 것은 그것은 감각의 대상일 뿐이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침에는 멋있게 보이는 사람이 오후 되면 추하게 보일 때 어느 것이 그 사람의 진면목입니까? 그렇게 아름답던 음악도 나중에 들으면 짜증날 때 그 음악이 아름다웠던 거예요, 짜증난 음악이었습니까?

헤라클레이토스 다시 봅시다. 중요하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은 고정된 게 없고 다 변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요한 말을 했잖아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다. 이걸 ‘실존주의’ 철학이라 합니다. 실존주의철학은 내 대신 내 머리카락을 깎아준다고 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가 내 대신 목욕한다고 내가 목욕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실존주의철학에서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란 말이 성립 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 아니에요. 내 믿음으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헤라클레이토스 입장에서는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그 믿음도 아침에 믿었던 믿음도 오후 되면 달라지죠.

똑같은 현상을 보면 파르메니데스는 말하기를 감각적으로 안 것은 고정된 게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 아침에 아름다운 음악도 오후 되면 짜증나고 멋있던 사람도 오래 살도 보면 저걸 남편이라고 믿었나 싶은 생각이 들고. 이렇게 모든 게 달라져도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 ‘일자’ 그 한 분의 여러 가지 현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나중에 플라톤에 가면 이데아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겁니다. 개는 없어요. 살살이, 발발이는 있지만 그걸 모아놓으면 개라는 형상이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수박 세 덩이, 3. 사과 세 개, 3. 자동차 세대, 3. 전부다 3이죠. 그런데 세 개짜리 물건들은 있지만 3이라는 건 없지만 그래도 인간 속에 3이 있는 것은 인간이 찌꺼기로 와서 이데아 세계에 3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3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이에요. 이데아 세계에 3이 없으면 우리는 그걸 3이라고 할 수 없는데 우리는 뭔가 다른 세계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에 세계를 볼 때 본래 있는 형상을 닮아서 모든 측정한다.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거든요. 그 선배 격인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면서 특징이 뭐냐? 이 사람 말 들으면 다 맞고, 저 사람 말 들으면 다 맞는 거예요. 파르메니데스는 말합니다. 참다운 것은 변하는 것에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하는 것이 참다운 것이다. 분명히 두 가지 의견이 다른데 여러분은 어느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까?

정답을 미리 말씀드릴까요? 이게 다 인간의 육에서 나왔지요. 인간의 육은 항상 인간 자신의 생각을 옹호하는 쪽으로 되돌아오게 돼있습니다. 정답은 이겁니다. 내가 헤라클레토스처럼 생각할 때도 있고, 파르메니데스처럼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어떤 그분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할 때도 있는데 둘 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둘 다 내가 만들어낸 잠복 돼있던 아담의 죄성입니다. 그게 선악과적인 지식에서 나온 거죠.

그러면 성경은 어떻데 답변합니까? “주님이여, 파르메니데스가 맞습니까, 헤라클레이토스가 맞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주님의 뜻은 이거에요. “그것 알아서 뭐할 건데?” “진리를 알고 싶습니다.” “진리를 알아서 뭐할 건데?” “구원받고 싶습니다.” “너는 구원대상 아니야. 왜 네가 구원받아야 돼. 너는 선악과 따먹었잖아. 따먹은 것 맞지?” “따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저주받아야지 저주받을 생각 안 하고 갑자기 거기서 벗어날 생각하지? 하나님께 불만이 많은 모양이지? 선악과 따먹었으면 저주야. 끝. 넌 왜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어?”

그게 바로 우리 속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은 자는 모조리 지옥 간다는 자체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마귀가 계속해서 불만 가지라고 부추기기 때문에 우리는 불만을 가지면서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죠. 구원받고 싶습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고 싶습니다. 이런 용어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기 욕망대로 내뱉는 겁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 안 나오잖아요. 안 나오니까 방법은 뭐냐? 자연의 일부로서 내가 자연을 어떻게 파악하게 되면 그것이 곧 내가 바르게 살고 올바로 사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것이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라이토스의 이야기입니다. 대충 해결이 됐다고 보고요.

그 다음에 엠페도클레스, 7페이지. 엠페도클레스란 이 사람도 상당히 중요한 것 했는데 중요한 것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싫어요. 왜? 하도 중요한 게 많아서 자꾸 중요하다면 식상해도 중요하지도 않아. 하지만 이 사람의 특징은 알아야 돼요. 세상이란 구체적으로 미움과 사랑으로 모든 것이 이어진다. 8페이지. 엉겨 붙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면 흩어지게 건 미움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이 말을 듣고 모든 걸 보세요. 다 맞습니다. 개나 소나 인간이나 사랑은 뭐냐? 붙고 싶은 게 사랑이고 미움은 뭡니까? 제발 떨어져줘. 그러면 이걸 성경에 적용시켜봅시다. 구원은 뭡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죠. 사랑이란 너와 내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 된 게 사랑이고, 미움은 뭡니까? 아까 엘리 제사장 이야기했듯이 하나님의 저주가 뭐예요? 이가봇, 주의 영광이 떠나는 거잖아요. 주의 얼굴을 가리는 거잖아요. 보기 싫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엠페도클레스가 이야기한 것, 세상의 모든 변화는 심지어 하나님까지 포함해서 모든 변화는 그냥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사랑과 미움에서 움직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람은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이것과 “안녕하세요.” 말로 하면 똑같지만 진짜 좋아할 때 “안녕하세요.”와 미워할 때 “안녕하세요.”는 벌써 본인이 알지요. 어떤 질서와 법을 지키라고 할 수는 있어요. 인간의 본심은 어디 담겨 있느냐 하면, 사랑이냐, 미움이냐? 미움이냐, 사랑이냐? 그것으로 모든 본심은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21절 말씀. 결국 하나님마저 돈이나 내라고 헌금 바치라는 게 아니고, 전도하라는 게 아니고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는 건 뭡니까? 사랑이잖아요. 사랑이란 게 뭐라고 했어요?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주님이여, 하나 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미리 이야기한 셈이 되네. 그렇게 많이 복잡하게 이야기했는데 엠페도클레스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했어요.

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됐나? 내 얘 낳아도.” 같이 살고 싶으면 사랑이고, “아이고, 이 웬수. 각방 쓰자.” 이건 미움이잖아요. 사랑할 때는 늘 붙어 지내다가 결혼하고 난 뒤에는 귀찮아서 너는 친구도 없나. 미치겠네, 정말. 남자가 퇴직하게 되면 여자가 꼴보기 싫어서 밖에 나갔다가 저녁에다 들어오라고 내보듯이. 그게 같이 있기 싫다는 거예요. 그게 엠페도클레스에 의하면 뭡니까? 미움이죠. 사랑이 아니니까 미움이 되는 거예요. 이것은 벌꿀이 합치는 것, 그리고 모든 동식물이 생식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랑과 미움으로 된다. 맞는 것 같지요.

엠페도클레스는 워낙 자기주장이 옳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라고 자기의 영원불멸을 주장해서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졌습니다. 내가 불이요, 불이 곧 나니까.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보세요. 이런 신앙심, 사명감,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기가 한 이론을 이론이 아니고 실제인 것을 논개처럼 몸 바쳐서 그걸 증명했어요.

그 다음에 아낙사고라스. 아직까지 소크라테스에 안 들어갔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주장들이 앞에 나오고 소크라테스는 회의주의거든요. 회의주의란 모든 걸 의심하는 거예요. 의심을 통해서 진리에 접근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와 비슷하지요. 계속 “아닐 수도 있어. 십자가? 그것만 옳다고 하지 마.” 아닐 수도 있는데 아닐 수 있는 게 뭘까? 계속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게 소크라테스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진리라 했을 때 그것만 안 맞는 경우들을 다 찾아내는 거예요. 3+5=8. 이게 7이면 왜 안 되지? 9면 왜 안 되지를 파악해 들어가는 겁니다.

아낙사고라스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가 나오거든요. 이 사람이 원자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신에게 제사해서 신 앞에 진노와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그러한 시대에서 우리는 작은 원자라는 알갱이, 덩어리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이제는 뭘 잊어라? 제발 신이라는 걸 잊어 줘. 신이란 원자로 된 인간의 머리가 만들어낸 하나의 투영체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니까 두뇌 세포가 하다보니까 만들어낸 것이 신이지 무슨 신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관찰한다는 뜻은 조금씩 알아가는 폭만큼 믿자는 겁니다. 그렇다면 관찰하고 받아들이고 도 관찰해서 받아들이고. 논리적인 순서로 자꾸 알아 가면 그 안 만큼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아까 엠페도클레스처럼 내가 따져보니까 불이 맞아. 내가 곧 불이고 불이 신이고 모든 건 하나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에트나 화산 폭발할 때 자기 몸 던졌잖아요. 그 정도로 뭔가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게 있어야지만 인간은 살맛이 난다는 것이 그 시대의 철학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저 돈이나 받으려고 사람 꾀여 장사하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주장에 자기 목숨까지 올인한 거예요.

아낙사고라는 ‘정신’이란 물질에서 나왔다는 겁니다. 그걸 누스, 이성이라 하는데 정신이 씨앗인데 여기서 모든 물질이 나왔다. 물질과 함께 정신도 나온 거죠. 정신주의에서 유물주의로 나가는 거예요. 유물주의가 뭐냐 하면, 네가 말로 그럴싸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많이 알았으니까 그만해라. 내 말이 옳다고 그따위 소리하지 말고 실제로 내놔라. “나,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면, 그런 소리는 많이 들었으니까 한 달 수입이 얼마고, 결혼하게 되면 어느 아파트에 살며, 통장 보여주며 내놓으란 말이죠. 이게 가정의 씨앗이에요.

이걸 성경해석에 인용해봅시다. 신은 있다. 신은 한 분이다, 두 분이다, 세 분이다. 사도 바울은 그러지 말고 십자가에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느냐. 그런데 문제는 이거에요. 십자가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이지만 보인다 했으니까 실제 있었던 사건을 의미해요.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있었다. 복음은 뭐냐? 십자가에 죽었던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복음이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복음을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다 아는 이야기란 말이죠. 복음을 믿어야 되는데 왜 자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 믿으면 구원 못 받는데.

제 이야기는 이런 겁니다. 십자가 복음이 없을 경우에 하나님 믿는다면 인정하겠는데 십자가 사건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사건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 믿는다는 것도 엉터리란 게 드러났잖아요. 사도 바울이 원래 그랬던 사람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십자가’가 아니고 하나님을 버리기 위한 십자가뿐이다. 이게 사도 바울의 복음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게 하나님의 의가 아니에요. 지난 주일에 설교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 지신 그 사건이 의라 했지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복음을 이야기하잖아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나야 의라면 그동안 하나님의 의라고 믿었던 것은 다 하나님의 의가 아니란 말이에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은, “여러분 하나님 믿어요?” “믿습니다.” “그러면 형제네요.” 그 소리 하려고 믿은 게 아니고 십자가 믿어야 그게 바로 하나님 뜻이라고 전하다가 순교당했단 말이죠.

그렇다면 아낙사고라스의 이론에 의하면, 신이 있다, 없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실제로 모든 물질을 낳게 하는 최초의 씨앗에서 물질이 나왔다. 씨앗하니까 너무 비유로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이성이란 말이 옳습니다. 이성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기본적인 이성이다. 이성이니까 사람들이 관찰하게 되면 마지막 도달되는 여기는 뭔가 만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탈레스나 아낙시메네스처럼 궁극적으로 찾아가면 어떤 물질이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씨앗이. 그런데 씨앗이 원래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물질 속에 씨앗이 다 들어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얼른 보면 뭐가 됩니까? 식물 보고 욕하면 식물이 기분 나빠 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식물 안에도 내 안에 있는 나를 나 되게 씨앗이 있거든요. 나라 할 때 정신도 있지만 물질 아닙니까. 식물의 물질은 나무 잎사귀잖아요. 나뭇잎사귀나 이거나 전부다 공통적으로 근본적으로 씨앗에 관련돼있기 때문에 미워하면 안 되겠지요. 그러니까 신이 무엇이냐, 우주가 무엇이냐 하다가 점차 윤리관을 갖추게 돼요.

사람을 함부로 때릴 수 없는 이유는 그 사람 속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야고보서에 나오잖아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아이디어는 철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제가 계속 강의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데모크리토스 원자론, 9페이지. 아낙사고라란 사람과 데모크리토스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둘 다 원자론인데, 아낙사고라는 질적인 원자론이라면 데모크리토스는 양적인 원자론이에요. 양적 원자론은 모든 원자는 동일한데 모양은 각각 두꺼운 모양, 다각형, 계란형, 꺽쇠모양, 이렇게 다양하단 말이죠. 질적으로 다양한 게 아니라 양적으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원자개념에 더 가까이 간 거예요.

현대의 원자 개념이 신기한 게 원자란 동일한데 원자 어떻게 결합하는지에 따라서 산소가 되기도 하고 과산화수소가 되기도 하잖아요. 똑같은 산소인데 산소가 두 개 모이느냐, 세 개 모이느냐에 따라서 어떤 산소를 마셔야 살고, 어떤 산소를 마시면 중독되는. 일산화탄소 같은 경우에 CO2는 탄산가스지만 CO는 일산화탄소. 참 이상한 게 같은 탄소로 돼있는데 배열에 따라서 사람에게 독이 될 수도 있고 사람에게 양식이 될 수 있다는 이 말은, 도대체 인간은 뭡니까?

인간을 유기체라 하잖아요. 탄소화합물을 유기체라 합니다. 탄소는 언제 생기느냐 하면, 빅뱅이 일어나고 난 뒤에 그때 수소원자와 헬륨이 있다가 그 이후에 점점 빅뱅이 커지면서 원소수가 많은 무거운 물질로 바뀌면서 탄소가 생겼단 말이죠. 탄소 생겨서 지구에 날아와서 암모니아와 화합했다고 현재 과학자들이 생명의 탄생을 설명할 때 그렇게 설명하거든요. 그게 데모크리토스의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물론에서 윤리관이 나와요. 데모크리토스의 윤리관은 결국 인간이란 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신과 관련된 것도 없고 그저 원자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라면 인간이 평소에 울고불고 할 때 행복은 뭐냐 하면, 울지도 말고, 웃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걸 데모크리토스는 ‘부동심’이라 해요. 부동심이란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말자. 그러니까 이것은 착하지도 말고, 악하지도 말고. 이 말도 전도서에 너무 착하지도 너무 악하지도 말라고 나오죠.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건 또 불교에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희망, 공포, 사랑, 질투 이것은 다 원자의 하나의 배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으로 너무 좌절감이 큰 죄 지었다고 하지 마라. 내가 마음이 좀 급했다. 내가 마음이 급한 게 아니고 나를 구성한 원자 덩어리가 급한 거예요. 그러면 급하지 말고, “원자야, 캄다운, 릴랙스.” 이렇게 하면 이게 바로 윤리고 행복이란 말이죠. 데모크리토스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세상의 모든 불의와 추악과 악독한 것은 본인이 평정심을 잃어서 나온 현상이기 때문에 각자, 각자가 평정심을 갖추면 남한테 해코지할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렇게 보는 거예요.

처음에 제가 질문이 유물론에서 어떻게 윤리가 나오느냐 했지요. 가만히 들어보니 말이 되지요. 하나의 쇳덩어리고 흙덩어리고 원자로 돼있는데 내가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데 죽으면 흙인데 울고불고 하느냐 말이죠. 이게 나중에 스토아학파에 나와요. 에피쿠로스학파. 아까 식사하면서 나왔기 때문에 미리 이야기할게요.

스토아학파는 참된 행복은 절제 못해서 나온 거예요. 욕심이 많아서 그런 거예요. 참된 선이 있는데 그 선은 인간의 충동과 욕구가 선을 가려서 그런 거예요. 따라서 바르게 선대로 살면 행복한데 그걸 가렸기 때문에 충동과 이런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모든 버리는 겁니다. 가족, 직장, 모든 걸 버리고 오직 은둔 생활하는 거예요. 무소유지요. 그러니까 스토아학파 이해하고 싶거든 불교, 불자 도 닦는 것 생각하면 딱이에요.

성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성령의 열매 있잖아요. 이걸 해석하다보면 모든 목사들이 스토아학파로 다 빠져요. 절제하라, 온유하라. 왜? 참된 진리를 얻으려면 그런 어려움은 감수해야 된다.

퀴니네학파가 있어요. 그 반대입니다. 사람의 행복은 즐거움에 있다. 사람이 즐거울 때 죄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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