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기쁨 130407
구원의 기쁨 130407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구원의 기쁨(합 3:16-19)
이근호
13-04-07 15:33
구원의 기쁨
2013년 4월 7일 본문 말씀: 하박국 3:16-19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구약에서는 인간의 한계와 무능력을 까발려서 자신의 행함으로는 도저히 스스로 구원될 없는 입장인 것을 알려주고, 미래에서 일어난 그 어떤 일로 통해서 자신의 구원이 성취됨을 말하는 식으로 알려줍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사실에 근거해서 그 이루어짐 속에 포함된 인사들을 찾아다녀서 건져내십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과는 달리 신약에서는 자신이 한계라고 느꼈던 그 한계마저 너머서는 한계를 직면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그래, 내가 이 정도로 당하면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하나님께서 항복하고 자신을 포기하고 그냥 맡겨야지”라고 짐작했던 그 예상마저 실제 구원에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는 겁니다.
갖은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이 결코 그 인간을 구원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도리어 인간은 예상하는 역경과 어려움을 기회로 해서 자기 구원을 시도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자기 구원의 사전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 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고난 주간이 처절하게 자신이 학대하는 모습을 보이므로서 그것이 하나님의 동정을 유발할 수있는 요인이 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십니다. 이것은 곧 인간하여금 마음껏 자기 선택에 나서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그 모든 선택은 실은, ‘실패할 수 없는 존재임’을 확인케 하기 위해 제공되고 강요된 선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인간들의 ‘피동적 선택’은 참된 선택자의 선택행위를 보여주는 환경이 됩니다.
즉 인간은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행위를 하면서 기대한 그 기대치는 하나님의 선택의 취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대치임이 폭로되는 현장을 조성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0장에 아비멜렉 추장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우거하며
그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보내어 사라를 취하였더니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한 고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 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1절-7절)
이 대목에서 참으로 기이하게 느껴지는 의문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벌이란 필히 죄 책임소재가 분명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 상식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로 봐서 “네가 속한 자가 정녕 다 죽을 줄 알지니라”는 말씀에 입각해서 보면 이미 아비멜렉은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누가봐도 아비멜렉은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지한 것이 아니라 취할 뻔 했고, 그것도 본인의 탐욕성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전혀 사라에게 남편이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나오는 정당하기 짝이 없는 선택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죄 책임 소재와 책벌 사이가 직접 연결이 안됩니다.
직접 연결이 아니될 때는 연결지점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존재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비멜렉에서 주어진 징벌은 아브라함의 존재를 경유하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죄에 따른 벌 마저로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비멜렉은 저질른 죄가 없다 할지라도 아브르함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아브라함 아내를 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요 죽을 죄인가를 드러내는 작업에 그는 말려든 겁니다. 실제로 아비멜렉에 속한 모든 여인들의 태가 일시적으로 닫혀서 자손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죄라는 것이 인간의 선택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죄 발생’을 염두에 두고 인간의 모든 선택행위는 허락받게 되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겁니다. 이것이 구약에서의 구원관입니다. 구원의 구원관은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내면서 그럼에도 구원받는 것은 미리의 다른 인물의 대속 작업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 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외양간를 거론하는 것은 그런데서 소출이 없을 경우에만 자신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장차 오실 하나님 구원의 위세가 그동안 하박국 자기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기쁨을 능가하기에 생활적인 기쁨에 신경 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혼자서 도를 닦는 수행자 옆으로 거대한 크레인이 천천히 위세 떨면서 지나가게 되면 그동안 자신이 수행해서 얻은 모든 정돈된 감정들이 빛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선택 행위를 하면서 예상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구원방식 실시에서 보여지는 구원의 원칙들에 합류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즉 “내가 이 정도로 양보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희생을 가상히 여겨 구원받도록 도와주시겠지”라는 생각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행위와 구원의 엮는 것은 구원받는 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 따로 연결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이미 구원된 자들을 찾아다니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건져내십니다.
그렇게 될 때, 성도는 새로운 차원의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자신의 노력과 희생과 열심과 전혀 무관하게 구원된다는 점을 통해서 성도는 자신의 선택행위의 결과부터라도 자유롭게 됩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책망 받고 난 뒤, 그 점을 반성한다고 해서 그 반성된 행위를 근거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큰 희생 치렀다고 그만큼 믿음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거기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진정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4-09 17:58
10강-합3장16-19(구원의 기쁨)1304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하박국 3장 16절부터 1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305페이지입니다.
하박국 3:16-19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방금 보았던 게 구약입니다. 구약으로 구원받느냐?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신약으로 구원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구약은 안 된다는 걸 이야기함으로서 미래의 여지를 따로 남겨두는 겁니다. 구약의 특징은 ‘지금 안 되지?’ ‘안 돼.’ 하지만 안 된다는 걸 통해서 언젠가는 된다는 날이 안 된다는 것과 엮어지게 하는 거예요. 내가 안 되는 걸 통해서 내 바깥에 계신 분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러한 기능이 구약입니다. ‘그렇지, 나 안 되게 돼 있어. 그럼 안 되고말고, 내가 뭘 돼? 안 되지. 하지만 나는 믿는다.’ 뭐냐 내가 안 되니까 더 이상 나는 나에 대한 믿음을 벌써 철수시켜 버린 거예요.
안 되는 걸 왜 믿어요? 구원이 안 되는데. 철저하게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을 명심 하에, 그러면 그 구원은 내가 내 안에서 내가 결심해서 내가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실 분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그 연결이 바로 구약입니다.
방금 제가 말하면서 어려운 말 했죠. 선택이란 말을 했죠. 내가 나를 선택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선택을 안 하면 될 게 아니냐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마음껏 뭐든지 하라고 하시는 것은 이미 제한된 선택이기 때문에, 강요된 선택 속에서 우리는 뭐든지 마음껏 하게 돼 있어요. 우리 맘대로 하게 만들어 놓고 그것조차도 주께서 선택된 범위 안에서 마음껏 한 걸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음껏 하면서 결과론적으로 내가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마음껏 뭐든지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안 돼? 그럼 안 하지.’ 하는 거예요.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안 하는 것도 하는 것이라니까요. 뭐든지 맘껏 하세요. 어차피 결과는 나왔습니다. 뭘 해도 니 스스로 행함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것이 분명히 나온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입니다. 그 구약을 두 자로 율법이라고 하죠.
율법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따로 된다는 것을 따로 마련해 두고 그걸 감춰놓고 그걸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 비밀을 창세전부터 비밀을 감춰놓고 앞서서 안 되는 것을 마음껏 누리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은 지나간 것이 아니고 지금도 우리는 구약 속에 된 통으로 구약을 온 몸으로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은 뭐냐 하면 구약에는 내 쪽에서 안 된다. 아! 저 되시는 분이 오실 것이라고 안 된다,부터 출발해서 되시는 분을 바라보는 게 구약이라면, 신약은 기뻐하라, 이미 너는 합격되었어. 서울 대학교 합격되었어. 기뻐해. 이미 서울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자신한테 들고 오면서 ‘야, 내가 연락해 보니까 통지서 여기 있어. 합격됐어.’ 합격 통지서를 우리한테 내밀면서 하는 말이 ‘꼬라지 하고는. 이런 인간도 합격되었네. 아이쿠, 참, 어이쿠 저런 인간도 합격됐어? 세리와 창녀도 합격됐네.’ 이미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고 난 뒤에 그것과 비교해 나가는 겁니다. 방향이 구약과 반대죠.
구약은 내 쪽에서 ‘안 된다,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안 돼, 안 돼, 안 돼. 하지만 되는 분을 믿어.‘ 이렇게 되지만, 신약에서는 되고 안 되고는 생각도 없었는데 갑자기 침투했습니다. ’기쁜 소식이라. 합격했대, 너 합격했대.‘ ’고뤠? 내가?‘ ’합격했대.‘ 그 다음에 합격한 이유는 너의 모든 선택을 주는 그 선택 중에서 구원받기로 합격한 선택한 그 선택도 너에게 적용됐다.’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울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흠이 없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그렇게 애썼던 모든 것이 나한테는 배설물로 여긴다. 그렇게 구원받고자 애썼던 수고가 다 헛수고가 된 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헛수고 같으면 안 하지.’ 하거든요. 하지만 구약에 우리가 적용받기 때문에 우리는 하고자 하는 모든 것도 주께서 이미 강요된 선택 이예요.
피동적 자발성이라고 말하는데 이미 주어진 자발성 이예요. 자발적으로 하면서도 이미 그것조차도 주어진 거다 말이죠. 그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고 말해도 돌아서면 다 잊어버립니다. 내 쪽에서 하는 모든 것이 부족하니까 오실 분의 약속을 믿습니다. 이게 주의 일을 하박국이 믿잖아요. 그거하고 그 다음에 이미 나하고 상관없이 내가 잠을 자나 꿈을 꾸든지 이미 나하고 의논도 하지 않고 다 이뤄놓고 그걸 우리한테 덤터기로 그걸 우리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예요. ‘일어나, 잠에서 깨어나, 너는 합격이야.’ 깨워줄 때 ‘제가 뭘 했다고 합니까?’라는 그러한 고백, 그것이 신약의 성도들의 특징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이렇게 없다고 돼 있거든요.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그리고 외양간의 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꾸려나갈 때 필요한 나의 환경 같은 겁니다. 소를 키우면서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나 소 키우는 사람입니다.’ 돼지 키우면 ‘나 돼지 키우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락교회에 치과의사가 한분 나오는데 그 치과의사가 하는 치과에 가본 적이 있어요. 이름도 구원치과에요. 아이구, 믿음도, 이렇게 왜 구원치과입니까? 믿음도 좋습니까? 그게 아니고 자기는 주인이 아니니까 자기가 다니는 교회 장로님이 그걸 세워놓고 자기한테 맡겼는데 그분은 이렇게 항상 하루 종일 이빨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는 겁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 적용해서 한다면 “구원치과에 손님이 없을지라도” 이렇게 되는 거죠. 치과에 종사하는 사람 하는 말이 내가 치과의사로서 치과에 손님이 있을 때 나는 치과의사로서의 자부심이 생기는데 오늘 본문대로 하면 “우리 치과에 손님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기뻐한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참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그동안 먼저 하나님께서 어떤 것들이 구원에 방해되었는가를 먼저 우리에게 경험을 시킵니다. 그게 뭐냐, 우리의 생업이라는 거, 우리의 직업이라는 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즐거움을 느끼면서 이 즐거움이 진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즐거움을 가린다는 생각을 우리는 까마득하게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 16절에 봅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 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흔들리고 요번에는 떨리죠. 그리고 환난 날에 그 다음에 내 뼈가 썩고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죠.
이건 뭐냐 하면 내 몸이 떨리고 내 창자가 흔들리는 입장에서 ‘음메’라고 소가 부드럽게 말하는 평화로운 소의 정원이 내 창자가 꼬이고 떨리는 가운데서는 그런 외양간이나 무화과나무가 잘되는 게 별 의미가 없는 거예요. 자기 몸이 지금 문제가 되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신약에는 이런 겁니다. 우리가 하는 생업에 주께서 손대지 않고 직접 우리의 몸을 가지고 강탈해 버립니다. 구약에서는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고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지는 이런 역사적이고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서 우리 집안을 거덜 나게 해서 ‘아! 나는 안 되는구나. 그리고 오실 분을 기다려야지.’라는 방식이 구약이라면.
신약에는 집이 있고 외양간에 소가 있고 소출이 잘되고 있더라도 직접 우리 몸에다가 강탈해 버립니다. 저는 자식이 어려워서 예수 믿었다. 그런 분이 있거든요. 딸인데 미국에서 공부 잘해서 판사가 됐다. 그런데 딸이 암에 걸려서 죽고 난 뒤에 이어령이라는 유명한 문공부 장관까지 하고 학계에서 유명한 분이 딸이 죽고 난 뒤에 비로소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렇게 이야기하거든요. 저는 도저히 못 믿겠어요. 그건 구약 방법이거든요. 흔히 간증집회에서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도저히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돼요. 만약에 내가 이어령 교수라면 딸이 죽어서 나는 주님을 깨달았다 하지 말고, 나는 주님을 아는 순간 딸이 있든지 없든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이렇게 나와야 된다니까요. 딸 죽음과 자기 구원을 연결시키는 것은 구약 적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해놓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구약 적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어떤 것도 안 망해요. 왜, 이미 망했기 때문에. 이미 망한 입장이기 때문에 괜히 망한 입장을 다시 망해 버리면 마치 주께서 망하기 직전까지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한다 하니까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베드로를 주께서는 수제자로 삼았잖아요. 수제자로 삼아놓고 주님께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럴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제가 있잖아요. 주님을 고난의 길로 가도록 제가 방치하지 않겠습니다.” 하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했다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후회를 합니까? 후회를 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 점에 대해서.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어. 그래 내가 말을 그리 하는 게 아닌데. 내가 왜 주님을 배반했지?’ 하면 주님은 뭐라 합니까? ” 언제는 안 그랬나? 얘, 왜 이래 이거, 뭐 새삼스러운 것처럼. 너 왜 이래? 니 자꾸 믿는 척 하지 마라. 니 원래대로 해라.“
이어령 교수가 진짜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나는 딸이 죽어서 너무너무 아깝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이렇게 이야기해야지요. 아닌 척 하지 말고. 미치겠어. 정말. 딸 죽었는데 마치 멀쩡한 척 하지 말고 ‘난 미치겠어. 절말. 난 하나님 믿지만 딸도 살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 새삼스럽게 믿음 좋은 척 합니까? 전부 반대로 돼 있으니 이걸 뒤집어쓰려고 하니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남방에 내려가다 아비멜렉을 만납니다. 자기 부인 사라를 데려가니까 아비멜렉이 사라를 보고 아브라함의 누이라 하니까 사라를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나타나시고 “너가 취한 그 여인을 인하여 너가 죽으리라” 이렇게 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아비멜렉이 하는 말이 ‘내가 그 여인을 취하려고는 했지만 그 여인을 정말로 취하지는 않았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줘요. 그런데 하나님의 조치는 뭐냐 하면 이미 취한 걸로 봐서 ‘니가 취할 뻔했다, 아! 내가 그때 실수할 뻔 했어.’ 이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기도하지 않으면 니 집안 다 죽는다.”이렇게 돼 있어요.
이것은 인간의 어떤 변명의 여지를 완전히 다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우리 창자를 흔들고 우리 입술을 떨리게 만들고 우리로 요지부동 떨리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려고 그렇게 한 거예요. 이 동네 큰 트랙터 한번 지나가 보세요. 큰 탱크 지나가면 웅~웅~웅 그런다고요. 우리가 나쁜 짓해서 그런 소리 들어야 됩니까? 그냥 탱크 옆에 지나가니까 웅~웅~거리는 거예요.
오늘 하박국에서 하박국이 나쁜 짓해서 창자가 뒤틀리고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탱크 같은 트랙터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마침 하박국이 그 옆에 있으니까 하나님의 일이 진동이 되니까 몸이 떨리니까 무화과나무가 어떻고 포도나무가 어떻고 외양간의 소가 지금 관심조차 없는 거예요. 딸이 죽든 말든 지금 관심이 없다 이 말이죠. 나는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찾아온 여호와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는 즐거워하리라. 이렇게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본래의 뜻 이예요.
제가 30대에 목사 처음 되고 난 뒤에 대구대학교에 자주 갔어요. 거기에 SFC라 해서 하러 갔는데 행사가 있는데 학생들이 오늘 본문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이 본문을 읽고 또 이 본문 노래를 부르더란 말이죠. 내가 보니 믿음도 없으면서 불러대요. 그래서 속으로 ‘야아, 학생들아, 니가 지금 취직을 못해서 백수가 되니까 이게 몸에 와 닿지, 니가 나중에 취직해봐라. 이거 부르겠는가.’ 지 형편상 취직하고 싶어도 취직이 안 되고 있고 지금 용돈도 궁하니까 ‘그래 이 가운데서 내가 믿음이 있는 척 하려고 하면 이 말씀이 나한테 합당하다고 우기면 된다.’라는 그런 머리를 쓰는 거예요.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이거는 주로 지질이 못난 인간이 부르는 노래에요. 세상에 소외당하고. 스스로 자기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서, 자기 정당화를 위해서 이 노래 부른다 이 말이죠.
이건 그런 뜻이 아니고 내 옆에 탱크 지나가는데 나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뭔가 엄청난 위협적인 존재가 지나가니까 포도고 토마토고 이런 것들이 신경이 안 쓰인다는 자기 솔직한 고백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엄청난 심판주가 달려오는데 그까짓 외양간에 소가 있는지 없는지 그거는 나한테는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는 뜻 이예요.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자유입니다.’
그동안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 얽매었는데 정말 나를 가진, 내가 또 가진 것이 아니고 정작 나를 가진 분이 왔을 때, 그동안 내가 가졌다는 것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그 자유성을 그렇게 외쳐대는 거예요.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19절에 보면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사슴이 원래 높은 곳으로 다니는 모양 이예요. 요새 같으면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지 말고 “나의 발을 멧돼지 같게 하옵소서” 이래야, 멧돼지가 사람들을 안 피해요. 만날 높은 데 돌아다니니까.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자유를 만끽하게 하옵소서. 그것이 난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함입니다. 뜻입니다. 이 구절과 비슷한 구절이 시편 4편 7절에 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은 일찌감치 내가 노렸던 거예요. ‘나 여기 있다. 나는 무슨 보람으로 인생을 살지? 아! 나는 곡식과 포도주를 생산하는구나. 그렇다면 나의 기쁨 마지막? 그렇지, 곡식과 포도주가 풍성하게 되면 지금 내가 일하는 보람을 거기서 몽땅 찾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뭔가 우다당 쾅쾅 해서 큰 탱크 같은 트럭 같은 주님이 찾아오니까 “주여 내 기쁨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합니다. 그 뒤에 말이 뭐냐 “나는 평안히 눕기도 하고 자기도 하리리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요새 우리가족이 이걸 절감합니다. 경산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차로 빨리 달려야 40분이예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바로 같은 마당을 쓰실 정도로 비가와도 우산 쓸 필요 없어요. 바로 앞에 딱 있으니까.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눕고 평안히 자리니” 그런데 아직까지는 불안정해요. 아직까지는 경산으로 가버리면 이리 우리 집으로 오면 다행인데 가버리면 앞으로 계속 반복 훈련이 돼야 되는데.
하나님이 바로 앞 동 101호에 계시다고 보세요. 나는 어떤 사업을 하고 있고 치과를 하고 있는데 앞 동에 바로 주님이 계신다면 나는 내 치과 업으로 평안히 누워있던 그 인생관을 접고 앞에 계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내가 평안을 얻겠다는 그것이 시편 4편 7절의 말씀입니다.
이제 그 시편의 말씀을 구약을 과도기로 해서 신약에다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생업에 바빠요. 생업에 바쁘다는 말은 생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말이죠. 평안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십자가 피 앞장세우면서 ‘니 합격이야, 끝났어. 이미 게임 오버야, 끝났어, 니 구원은 니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어.’라는 순간 우리가 하는 생업을 버리란 말입니까? 재산을 팔아서 교회다 바치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사표 내란 말입니까? 그것도 아니고 기도원에 기도하란 말도 아니고 그냥 뭘 하든지 간에 그게 내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는 이미 내 선에서 끝났다. 이미 떠나버렸다. 이 말입니다.
보통 주례할 때 이렇게 하죠. ‘죽음이 여러분을 갈라놓을 때까지 여러분 서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는데 이게 성경적으로 하면 이게 잘못된 말 이예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가 아니고 죽음이 우리를 결합할 때까지, 이렇게 돼야 돼요. 아무리 결혼해도 인간은 각자, 각자 있거든요. 주님이 신랑 되시고 우리가 신부 같으면 죽음이 주님과 결합될 때까지 우리는 지 걱정, 지 마음대로 생업에 종사합니다.
신약에서는 주님 오셔서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우리로 하여금 죽음으로 너와 결합될 때까지 니는 각자의 인생을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철없는 인생을 사는 겁니다.
여기 하박국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하박국이 뭐 때문에 그리 즐거웠겠습니까? 하박국이 진짜 포도나무에 소출 없으면 하박국이 얼마나 속상하겠어요? 포도나무보다 더 큰 덩치가 왔기 때문에, 이거는 내가 이렇게 다루고 내가 하루일과 어떻게 하는 것보다도 이걸 완전히 의미 없게 만드는 더 큰 덩치가 들이닥칠 때에 포도나무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기뻐하는 거예요. 아마 하박국 돌아서면 포도나무에 쫓아갔을 거예요. 포도나무 숨 키운다고. 분명히 소 값 올려달라고 데모했을 거예요. ‘소 값 올려 달라. 정부는 각성하라.’ 이렇게 분명히 나올 거예요.
하지만 요 순간만큼은 그것보다도 나한테 중요한 것은 여호와의 구원! 바로 신약 시대가 분명히 온다는 사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확정된 운명이고 결정 난 건데 쓸데없이 구원에 대해서 천국 갈까, 말까 염려했습니다. 이 염려는 마귀로부터 주어진 염려이오니, 십자가 다시 바라보면서 마귀를 이기신 그 십자가의 능력이 저희들을 덮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