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옛사람과 말씀)130321-16강a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옛사람과 말씀)130321-16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옛사람과 말씀)130321-16강a -이 근호 목사
제 16강a
214페이지 중간에 보면 『말씀이 옛 인간을 삼켜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토해내면 된다.』이렇게 돼 있죠. 옛 인간은 구원 못 받는다. 그런 이야깁니다. “옛 인간을 말씀이 와서 삼켜서“ 돼 있으니까 천국 가려면 우리가 천국 간다고 해서 천국이 ‘들어오세요.‘ 하지 않고 뭔가 끌고 가는 게 있어야 되죠. 그러면 옛 인간과 무엇의 만남? 말씀의 만남이 되는 겁니다. 옛 인간과 말씀이 만나면 나중에 그 생산물이 뭐라고요? 새 인간이 나와야 돼요.
그러면 말씀 안에 어떤 장치가 있단 말입니까? 옛 인간을 새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장치가 이미 말씀 안에 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말씀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걸 좀 더 정확히 하면 언약이라고 보시면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다. 하나님의 언약이니까 우리말로 약속이라고 하면 되죠. 하나님의 약속과 옛 인간이 만나서 새 인간이 된다. 그렇게 방금 전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약속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방에서 10시에 만나자. 우리가 약속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다방에서 10시에 만나는 것은 그건 아무 실내용이 없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거든요. 다방이라는 거, 그리고 10시라는 것도 우리가 익히 옛 인간 속에 이미 담겨 있는 시간관이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알아챌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우리를 비껴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그건 약속의 아들이 아니라고 이 말을 했거든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은 뭐냐 하면 니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다 했는데 아브라함은 그걸 자기 딴아 알아들었다고 여겼는데 막상 알아들었으니까 ‘아, 그러면 제가 자식 낳겠습니다.’ 하니까 ‘아서라 말아라.’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그게 아니라는 말은 자기가 지금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여겼는데 그것은 알아들은 게 아니고 지 일방적인 생각, 그게 뭐냐, 옛 인간 이예요.
옛 인간이 뭘 만나서? 말씀을 만나서 새 인간 될 때에 이 말씀이 주어지게 될 때 여기서 옛 인간은 뭘 발생하느냐, 오해를 발생해요. ‘그래, 저게 약속이야, 그래, 저게 언약이야, 내가 알아챘어. 내가 다 이해했어.’ 그런데 말씀은 그걸 비껴가거든요. 아니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러면 그 내용 말고 특별한 게 있느냐 할 때 있습니다.
말씀 안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여기 예수님이 들어 있어요. 말씀이라고 왔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는 말씀인 줄 사람들이 몰랐죠. 그냥 말, talk 하는 줄 알았죠. 토크 쇼에 토크하고 아나운서들이 이야기하는, 북한의 소행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알아듣는 이야기, 그런 이야긴 줄 알았죠. 북한이 올해 신한은행하고 뭐 이렇게 북한이 했습니다. 우리 알아듣잖아요. 그런데 제 말, ‘북한이 한 게 아니고 예수님이 했습니다.’ 하면 누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는다 말이죠.
그걸 알아들을 때 새 인간입니다. 아! 그러니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에요. 농부가 씨를 뿌렸다. 다 알아듣습니다. 농부가 씨 뿌리지 어부가 씨 뿌립니까? 농부가 씨를 뿌렸다. 밭에다가. 다 알아듣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합니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그 이야기 못 알아듣는 인간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아무도 못 알아듣는데 허락된 사람만 알아듣는데 그 허락된 너희들이 복이 있도다.
제가 오늘 동영상 하면서 두 번째 강의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열 두 제자가 교회냐? 아닙니다. 열 두 제자가 교회가 아니에요. 베드로보고 “니 반석에 교회를 세우리라“ 했지, 장래를 이야기했지, 그 열 두 제자는 교회가 아니에요. 그런데 나중에 성령이 오니까 뭐가 됐습니까? 교회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이거는 사람이 있다고 교회 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되는데, 성령이 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성령 앞에서 열 두 제자, 어느 제자 할 것 없이 다 도망쳤다는 것을 등장합니다. ‘니 도망쳤어. 내가 니 쫓아가서 건진 거야.’ 그렇게 돼야 교회입니다.
‘내가 교인이니까 교회 간판 보고 왔습니다.‘ 이러면 교회 아니에요. ’너는 도망쳤어.‘ 제가 다니는 교회 교인이 20명 다니는데. 그럼 가짜 교인이겠지. 그건 니가 이해하는 교회는 가짜 교회에요. 진짜 교회는 교회를 안 믿습니다. 믿을 놈을 믿어야지, 사람을 믿으면 되겠어요? 뭘 믿느냐 하면 주님의 용서를 믿습니다. 그게 교회에요. 용서를 믿는 게 교회에요. 두 세 사람이라도 용서를 믿으면 그게 교회에요. 5천 명, 6천 명 있어도 그건 그 자체를 믿으면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자기들의 집결된 힘, 그 권력 체를 믿는 겁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죠. 베드로가 예수님께 내가 어떤 식으로 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 밑에 내가 어떤 식으로 뭘 깔면 주님에게 가겠느냐, 베드로가 생각을 했어요? 안 했어요? 안 했죠. 뭐만 쳐다봤습니까? 예수님만 쳐다봤죠. 그냥 예수님만 보고 가니까 이게 물인지 불인지 구분도 안 하고 갔잖아요. 이게 천국 가는 유일한 방법 이예요.
‘천국 가기 위해서 내가 뭘 걸쳐놓고 내가 걸어가면 되지?’를 주께서는 이걸 허물어 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가다가 보니까 자기가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도 아니고 만화도 아니고 지가 물 위를 걷는 거예요. ‘내가 미쳤지, 내가 물 위를 걷고 있지?’라고 할 때 베드로는 주님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 끊어졌습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인간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법으로 온다면 아무도 갈 수 없는 곳, 천국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을 발판으로 깔아놓고 나가면 그건 천국이 아니고 지옥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천국과 진짜 천국은 연결돼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옛 인간에서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서 아무리 천국이고 좋은 것을 다 상상해도 그건 새 인간이 연결되지 않습니다. 중간에 가로막습니다. 뭐가? 말씀이! 이 말씀에 대해서는 모든 한국교회나 모든 종교단체에서는 이 말씀을 말로 이해합니다. 성경 구절 외우면 되지 뭐. 얼마나 잘 외웠어요? 여호와 증인 달달 외워요. UBF(대학생 성경읽기 선교회), 네비게이터, 전부 다 성경 달달 외우기 아닙니까? 옛 인간이 외운 거예요. 토익 시험 칩니까? 어떻게 사법고시 시험 칩니까? 사법고시 합격했다고 새 인간 되는 거 아니거든요. 왜, 그들은 말씀을 접한 적이 없고 말을 배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말은 공부하면 돼요.
그러나 말씀은 예수님이 들어있어요. 말씀은 예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새로 깔아놓은 거 아니면 우리가 깔아 놓은 것은 전부 다 악성코드 걸립니다. 화면이 안 떠요. 분명히 천국 떠야 되는데 보니까 시커먼 화면에 숫자만 떠 있고, 글자만 있고 뜨지를 않습니다. 마귀가 악성코드를 깔아 놔서 컴퓨터가 열리지를 않습니다.
항상 신약에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 쪽에서 우리에게 다가와야 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2장 한번 봅시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인데 누가복음 2장 29절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그 다음에 뭐죠? “편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누굴 만났습니까?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하는 말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거죠. 뭐 곗돈 탔습니까? SBS에서 로또 당첨하는데 마지막 숫자가 맞아떨어진 거예요. 계약이 안 되다가 계약이 되니까 종이 평안해진 거예요? 시므이가 뭘 기다리는 겁니까? 예수님이죠. 메시아죠. 메시아는 기다려야 되지,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아무도 갈 수 없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예수님의 영이 있을 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보혜사를 보내주노니” 했거든요. 보혜사 안 오면 끝나요. 성령이 안 오면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아버지도 없고 삼위일체도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지가 상상한 삼위일체만 있을 뿐 이예요. 옛 인간은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말이 아니고 말씀에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들이닥쳐야 우리는 말씀과 우리 인간의 만남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안 오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교회라 하는 것은 신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신자 된 자의 기적을 목격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합니다. ‘오! 저 사람 왜 저렇게 하지? 어! 저 사람 달라졌네.’ 달라졌다는 게 뭐냐 하면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 내가 성전에 줄 것 준비하고 헌금 준비하고 뭐 준비하고, 준비하고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베드로가 배 위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도 물에 배를 띄웠습니까? 중국처럼 항공모함을 띄웠습니까? 뭘 띄웠어요?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죠.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어야 돼요. 그런데 사람은 준비 안 해놓으면 지가 허전해서 안 돼요. 지가 불안해서 안 돼요. 뭐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돼요.
마태복음 25장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 나오잖아요. 그런데 뭘 준비했죠? 기름 준비했죠. 기름 준비하면 뭐합니까? 다 잤는데. 기름 준비하고 다 잠을 잤다니까요. 사람이 잠을 잔다는 것은 죽음 상태거든요. 잠을 잤다는 것은 자기 자율과 자기 자유와 행함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란 뜻이잖아요. 잠잘 때 누가 데려가도 모르잖아요. 그때 누가 왔습니까? 신랑 떴잖아요. 그런 식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기름 준비해도 소용없어요. 그 다음에 열 처녀 가운데 네 처녀는 기름 준비하고 여섯 처녀는 기름 준비 안 했다. 그럼 신랑 안 옵니다. 그런데 한 처녀가 오줌 누러 갔다가 이참에 기름 준비해볼까 해서 SK가서 기름 준비하는데 다섯 번째 마저 채우니까 왔다니까요.
기름 준비가 구원받는 요건이 될 수 없어요. 그냥 주님께서 찾아 와서 그냥 공짜로 주시는 겁니다. 안양에서 마트에서 광고한다고 공짜로 줬다면서요? 힘이 부쳐가면서도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공짜를 마트에서 집까지 이동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고가 많았겠습니까? 공짜니까. 공짜니까 힘든 줄 모르죠. 그러니까 구원도 공짜로 주니까 구원받는 기쁨! 종을 평안히 놓아주는 기쁨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엎어지고 자빠져도 괜찮다 이 말입니다. 공짜를 이동시키는 즐거움, 옛 인간이 새 인간을 들쳐 업고 가는데 신바람 나잖아요. 신나야 됩니다. 새 인간인데요. 힘은 부치겠지만. 옛 인간은 70키로고 새 인간은 50키로면 괜찮은데, 옛 인간은 70키로고 새 인간이 90키로 같으면 힘은 부치겠지요. 그래도 새 인간이 어디인데요.
종을 평안히 놓아준다는 말은 시므온은 뭘 기다리느냐 하면 분명히 오신다는 걸 기다린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이라는 거예요. 내 행한 것을 보상해 주는 게 아니고 내 한 것과 상관없이 그분께서 다 이루신 것을 주실 것이다. 물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시므온이 몰랐죠. 그냥 메시아가 온다는 건 알았지만 나중에 요한복음에 보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하는 말씀을 우리 육신이 지키지 못하는 그 말씀을 친히 육신이 되셔서 다 지켜서 우리가 못 지키는 우리 육을 대신해서 지키시는 그 육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 대신 지키신 육을 한 자로 ‘영’이라고 합니다. 영! 영에서 영, 영에서 성령이 나오는 거예요. 이미 예수님은 영이예요. 그래서 성령을 그리스도 영이라 하죠. 그리스도 영은 전부 다 저쪽에 계신 분이 성령이 오게 되면 저쪽에 계신 분 속에 우리들이 이미 여기에 잠식시켜서 우리를 들이닥쳐서 삼켜 버리면 새 인간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 안에 있었죠. 예수님이 새 인간이니까. 예수님의 것으로 우리를 덮쳐 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예수님 몸에 붙어있는 지체로 변하고 머리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지체로 행세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 머리에서 주시는 살려주심, 용서하심, 살려주심의 능력인데 성경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용서받았다는 뜻입니다. 용서 받지 않으면 안 살려줘요. 그만큼 우리는 예수님의 살려주심을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우리는 범죄가 우리 몸을 통해서 계속해서 발굴되어지고 만들어져야 됩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잠간 이야기했던가, 우리 몸을 죄의 박물관이라고 했는데, 박물관! 박물관이 뭡니까? 죽 이렇게 스쳐지나가면서 옛날에, 옛날에 이러했다고 보잖아요. 우리 몸 자체가 박물관이라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는 거예요. 우리가 날마다 죄들을 박물관에서 유물 보듯이 보는 거예요. ‘아! 이런 죄도 용서받았구나. 아유, 이런 죄도 지었네. 아유, 솜씨도 좋네, 이런 죄를 진다고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 아이구, 다 지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걸, 이런 죄도 지었네.’ 마치 남의 일 보듯이 그렇게 보는 거예요. 박물관 보듯이 관람하고 공짜로 죽 내 죄에 대해서 내가 여유롭게 관람한다는 거, 그게 어딥니까?
만약에 우리가 용서받지 않았다면 자기 그 죄 속에서 못 빠져 나온다면, 빠져나올 수는 없고 빠져나오려고 시도하게 되면 이제 빠져나왔다고 여기는 순간 더 큰 유혹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우리는 그 유혹에 전보다 더 큰 시험과 죄에 빠져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만약에 우리 몸을 박물관으로 본다면 바로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거예요. 여기서 나와서 착한 일이라고 빠져나왔는데 아이쿠, 된 통으로 더 걸렸네. 더 큰 죄를 지었네. 이걸 해소해 보려고 아이쿠 교회로 어지간히 돈도 갖다 바치고 했는데 소용없네. 목사가 돈 가지고 도망갔네. 소용없네. 그걸 죽~ 비디오 보는 거예요. 아이쿠, 장로 됐다고 교회 피아노 기증했고, 어이쿠, 피아노 기증한 거 목사가 피아노까지 팔아먹었네. 교회 충성했는데 목사가 토사구팽, 사냥하게 해놓고 나를 잡아먹는. 모든 살아온 행적들이 예수 믿는다 해놓고 보니까 오! 예수보다 자식을 더 좋아하는 그런 모습들이 보이죠. 원래 보름달이 떠야 주부가 주님 사랑하지 않고 자식만 사랑했다는 것이 티가 나죠.
평소에 내가 누굴 사랑했다 하는 것은 뭐가 떠야 돼요. 달이 뜨든 해가 뜨든 뭐가 떠야 돼요. 내가 주님을 사랑한 척 했다는 그 모습을 밤 문화처럼 우리는 지켜볼 필요가 있어요. 죽 스캔을 하는 거예요. 그 스캔은 누가 시키느냐, 몸통은 예수님이 하고 우리는 내 하는 행세를 내가 지켜보는 촉수 역할, 촉수 끝에 카메라 달리고, 일종의 우리는 블랙박스 같은, 카메라 같은 역할 이예요. 우리의 몸통 되신 주님의 시선으로 옛날에 그 시시했었던 나의 했던 행세를 주님의 시선으로 쳐다볼 때 우리는 평생을 막 살았다는 사실! 막산다는 것 때문에 삐져서 다른 교회 가버리고, 그게 막사는 건지 모르고.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언약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아 언약 이야기 나오는데 지금 언약 이야기하는 겁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하니까 내가 염려가 돼서 그런데 언약이란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바꾸는 장치가 그 안에 들어있는데 그 장치가 딴 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언약이 왔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그 이야기예요. 그래서 시므이가 그걸 보고 ‘야, 메시아가 안 왔으면 나 어떻게 됐을까?’ 농부가 비가 안 왔으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에 작년에 비가 한 번도 안 왔으면 농사 다 날려 버리잖아요. 그러면 농사를 날리면 그 다음에 딴 데 취직을 하든지 하면 되겠지만, 만약에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아예 이 땅에 나타나시지 않았으면 우리 죄 어떻게 할 거예요? 어떻게 해야 죄를 씻을 수 있을까요? 씻을 수 없는 거죠. 그러면 그 저주는 그대로 다 받아야 돼요.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메시아가 오셨다는 거. 메시아가 오셨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메시아가 오셔서 오셨기 때문에 오시고 내 속까지 들어오셨기 때문에 아는 거예요. 그냥 바깥에 오시면 안 돼요. 너무나 낯선 존재기 때문에 우리는 거북스럽고 우리는 외면해 버립니다. 외면 안 하도록 ‘똑바로 들어, 똑바로 봐.’라고 목을 잡아서 보게 해서 지적해 줄 때 고개 꽉 붙잡아서 십자가만 바라보게 하는 그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영화에 차태현하고 나오는 여자이름이 누굽니까?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에. 전 지현 나오는 그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어요. 전 지현이가 여자지만 얼마나 대찬지 남자 때릴 대 ‘똑바로 해.’ 하는 장면이 나와요. 자꾸 우리가 예수님이 오셨다고 생각하는데 안 오셨다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이 안 오셨다면, 우리는 희망이 있어요? 없어요? 희망 자체가 살아도 소용없죠.
그러니까 제일 답답한 게 대책 없이 죽음이 다가오고 죽음을 맞이할 때 제일 대책 없는 게 늙어 가는데 죽음 이후는 아무 준비가 안 돼 있고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자꾸 잊어버리고 침해 초기에 자꾸 접어들고 몸은 비틀거리고 당뇨는 370까지 혈당이 올라가고, 그러니 대책이 없을 때 그런 게 이런 겁니다. 집을 팔렸고 이사 나가라 하는데 이사 갈 데가 없을 때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을 때 그때 얼마나 하루하루가 지옥 같겠습니까?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마음이 천국이 돼야 될 이유가 히브리서 11장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아예 떠나야 될 곳이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우리의 살기가 적절치 않은 곳 이예요.
오죽했으면 최백호가 이런 이야기했겠습니까?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나이 60에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어디 부두에 다방에 앉아서 화장 짙게 한 낭만을 찾을까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적절치 않도록 주님께서 조치를 해주시는 게 얼마나 고맙습니까? 여자가 임신했을 때 애가 그냥 있겠다, 하면 보통 문제 아니잖아요. 나중에 배 터져버리잖아요. 밀어내듯이 주님께서 자꾸 ‘니 자리 아니야.’ 하고 밀어내시는 요 고마움, 말은 고마운데 쉽게 말해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죠. 그게 IMF터지고 금융위기 터지고 되는 일이 없다는 뜻 이예요. 엉덩이 걸치고 그냥 앉아 있어야 되는데 밀어내는 거예요. ‘니가 살아도 별로 살고 싶지 않지?’ ‘예’ ‘그래. 그게 정상이야.’ ‘나도 그랬어.’ 예수님께서 자꾸 밀어내는 거예요. 앞으로 달 보고 빌지 말라 이 말입니다. 그저 집안 식구 올 한해 잘되고…‘ 달보고 빌지 말라 말 이예요. 그 말은 어떻게든 집착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기어이 한번 적절하게 살아보겠습니다. 그래도 내 인생에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는 것처럼 그래도 ’나 성공했다. 나 성공한 인간이야.‘ 그거 떠벌이고 가겠습니다. 하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서 실패했어요.
주님의 영이 왔다는 말은 이야기 끝난 이야깁니다. 주님과 우리가 같은 동기생, 동창생 돼야 돼요. 주님께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이미 실패한 거예요. 이미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합니다. 실패했다고 느껴지는 그 자체만이 뭘 해도 성공 이예요. 요리할 때 맛이 안 나오다가 ‘딱 이 맛이야.’ 하고 ‘야, 성공했어.’ 하잖아요. 그럴 때 주님 찾아와서 ‘너 요리 성공했으면 평생 요리하고 살지?’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비록 성공했지만 떠나야 됩니다.’ 요런 생각이 들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내 뜻대로 잘된다고 하더라도 자만하거나 교만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기대를 한다는 그것은 기대한다는 자체가 그건 스스로 악성 바이러스를 자기 몸에 세균을 집어넣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임플란트를 하게 되면 ‘잘 돼야 될 텐데.’ 기대 하지 마시고 주께서 이런 경로를 통해서 또 이 세상을 떠나라 하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하시고 오히려 죽이라고 하시는구나, 그렇게 사시면 되는 거예요. 돈 250만 원, 갖다 버리라는 뜻이구나. 이렇게 보시라니까요. 아! 떠날 때 이런 식으로 떠나는구나, 그래, 떠날 때는 말없이. 이제는 척척 되네요. 떠날 때는 말없이 미련 없이, 떠날 때 그냥 떠나지 마시고 임플란트 돈 좀 뿌리시고 돈 흘려놓으시고 그렇게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나중에 이빨 아프고 눈도 고쳐야 되고 뭔가 옷을 벗는 것처럼 우리가 그동안 성공이라고 걸쳐졌던 것을 이제는 소급해서 반납해야 되는 거예요. 성공했던 거 다 떨쳐놓고 ‘어디 실패자가 성공의 티를 내? 어디 성공의 흉내를 내? 어디 마귀 새끼 흉내를 내냐?’고 질책하면서 우리가 억지로 입었던 것을 전부 다 벗겨내는 그 작업이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그게 옛 인간이 주님 만나서 새 인간 되는 절차입니다. 우리는 뭘 가짐으로서 구원받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반대로 박탈하면서 구원시키는 거예요. 요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214페이지의 중간에 보면 『이렇게 되면 호명 받은 자의 선택은 호명하신 분의 선택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아! 요 말 어려워요. 그냥 이렇게 보면 안 어려워요. 『이렇게 되면 호명 받은 자는 호명하신 분에 의해서 전부 박탈당한다.』이러면 안 어려운데 ‘호명 받은 자’의 그 다음에 뭐죠? ‘선택’은, 이 선택한다 하니까 문제가 어려워진 거예요. 이 말은 ‘나 끊임없이 예수님을 선택해.’ 다른 말로 하면 ‘나 예수를 믿을 거야.’라는 그 믿음조차도 매일같이 박탈당한다 이 말 이예요. ‘주여, 나 믿는 거 보이죠? 잘 믿죠?’ 그것도 박탈당하는 거예요.
제가 어젠가 십자가마을에 글 하나 올렸잖아요.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인데 거기에 보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라는 것을 주께서 미운 거예요. ‘니가 사랑을 알아?’ 어떤 대사에 이런 게 있어요. ‘내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멘트가 있어요. 그런 멘트 하는 남자 같으면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하겠습니까?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돼요. 그만큼 사랑은 목숨보다 강하다 이 말입니다. 아가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것처럼,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렬하다 그런 식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의 주님에 대한 사랑을 박탈해 주는 사랑으로 옵니다.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라는 것이 말씀에 들어있거든요.
몇 분 지났다고 다 잊어버렸다. 다시 해봅시다. 옛 인간이 뭘 만난다? 말씀 만나죠. 우리가 이걸 잘 알잖아요. 하나 예를 들어보면 갑자기 헷갈립니다. 말씀에다 “네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란 이 말씀이 여기 들어 있잖아요. 요한일서 4장에. 그렇다면 이 말씀과 우리가 뭣과 충돌됩니까?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가 어떻게 돼요? 대충돌이 일어나겠죠. ‘왜 이리 까불고 있어.’ 하고 꿀밤을 주고 ”너는 나를 사랑한 게 아니야.‘라고 이 말씀대로 돼야, 그 말이거든요.
“탐내지 마라”는 말은 지금 탐내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믿고 성령 받아서 탐 안 냅니다.‘ 그러면 그건 호되게 혼나는 거예요. 그게 ’예수 믿고 탐심을 안 냈습니다.’ 하는 그게 탐심인 거예요. ‘저는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할 때 사람들이 혼동하는 게 뭐냐 하면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이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구분하는 거예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과 신체적으로 간음한 것을 구분해서 ‘아마 하나님께서는 달리 볼 걸.’ 지가 지 맘대로 정한다고요. 여인을 보고 음란을 품은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했는데, 그게 말씀인데 우리는 이 말씀 가지고 내 인간 속으로 잡아당겨서 지가 지 인간의 정당화를 위해서 이걸 조작을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언어라 하는 것이 전부 다 실체가 없어요. 거짓말입니다. 전부 다 은유가 돼서 확정적인 내용을 언어 속에 담을 수가 없어요.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다 할 때 그 음욕을 어느 정도 품는다는 말입니까? 손을 잡는 것? 뒤 태 보는 것? 어느 정도, 어느 정도가 음욕인데? 그림자를 밟는 이런 것? 아니 어느 정도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남자, 신성일이가 엄 행란하고 결혼하고 살면서도 어느 아나운서하고 좋아했다, 라고 고백했죠. 그럴 때 우리 젊은 사람들이야 신성일이가 70이 넘었으니까 하지만, 같은 70넘은 사람들, 그것도 같은 경북고등학교 동기생들 같으면 얼마나 화를 내겠습니까? 남자가 칠칠치 못하고 점잖지 못하게 국민의 인기를 받았으면 인기 값을 해야지, 그걸 자기 자랑이라고 하나? 라고 화를 내는 의도가 뭐예요? 자기는 못해 봤거든요. 그러니 약이 오르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신 성일을 감싸주고 괜찮아, 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같이 해본 사람.
그러니까 예수님이 자꾸 율법을 가지고 우리를 추궁하게 되면 끼리끼리 서로 단결돼요. 누구끼리? 인간은 인간끼리. 주님은 주님만 홀로 남아요.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수님 믿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다 싫어요. 성령이, 주님의 영이 와야 내가 주님 편에 서지 않고 사람 편에 선 게 죄인 줄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고개 숙이고 오는 거예요.
옛 인간은 옛 인간 티를 내게 돼 있습니다. 자꾸 티를 내게 돼 있어요. 지가 종교 만들고 지가 하늘나라 올라가고 지가 바벨탑 만들고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그런 것들, 범죄들은 우리가 이미 잠재적으로 다 지을 수밖에 없는 일들을 선배들이 먼저 다 저질러 놓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강도가 구원받은 것처럼 구원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그 이야기에요. 내가 선택한 것마저도 주님이 꺾어버리고 주님의 선택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구원받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는 인간들이 ‘본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이 실은 ‘비 본래적 선택행위’를 그동안 발휘해 왔음을 비로소 지적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인간은 자기의 본래의 것으로 자꾸 들어가야 돼요. 집에 강아지를 촌에서 열댓 마리 키워 본 사람은 강아지가 자꾸 주인 없으면 담장 넘고 밖으로 자꾸 나가잖아요. 주인이 어떻게 합니까? 부추겨서 주인이 본래의 강아지 집으로 보내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되는데 조금만 믿음 좋다 하면 지가 죄인이 아닌 체 하고 담장 타 넘고 기어 올라가서 도망쳐 버려요. 도망치면서 그냥 도망치는 게 아니고 ‘주님, 쟤 나쁘잖아요.’ 손가락질을 남한테 하면서 도망쳐요.
그래서 본래의 것이 아니고 비 본래의 것에 척하니 지 자리라고 앉아 있는 거예요. ‘주여, 저 믿음 많이 성숙했죠?’ 이러고 앉아있다 말이죠. ‘원래 막 사는 니 자리 돌아가라.‘ 자꾸 지적하는 겁니다. 그 자리 지적했다고 교회 뛰어 나가버리니, 참. 박탈하는 게 그렇게 기분 나빴던 모양이죠. 마지막 남은 그거, 그것마저 박탈하니 그렇게 속이 상하고 미웠던 모양이죠. 우리 십자가마을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었습니까? 이 박탈하는 것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는 거예요. 자기 것을 자기는 꿍친다 하죠. 안 뺏기려고 꽉~ 쥐고 있으니까 아주 발악을 해요. 죄인이라고 놓으면 되는데 바바리 맨처럼 이렇게 놓으면 되는데 바바리를 꽉 모으고 꽉 잡고 있으니까 볼 거 하나도 없는데 괜히 신비한 것처럼... 꽉 쥐고 안 보여주는데, 주님은 ’떼치‘ 손을 떼게 해서 이걸 공개시켜 버립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미워서 박탈하는 것이 아니고 탈탈 긁어낼 때 그 배후에 악마의 얼굴이 비로소 아주 민망한 얼굴을 하면서 그때 얼굴을 내밀어요. 결탁해 있었거든요. 배후에 우리가 모르는 세력하고 우리 자신이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었는데 물론 마귀는 자기 정체를 감추니까 우리한테는 없는 존재죠. 그래서 인간을 박탈해 버리면 인간은 뭐라 하느냐
‘주님이여, 더 이상 없나이다.’ 없다고 하는 거예요. 없다는 걸 한자로 하면 무(無)죠. 그런데 주님께서 무(無)속에 살아있는 진짜 없음 덩어리를 보거든요. 그게 악마에요.
무,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온다는 것은 철학자들도 다들 주장하는 겁니다. 옛날 철학자들도 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철학자들이 모르는 게 있어요. 심지어 요새는 과학자들도 무에서 유를 이야기해요. 없는 데서 있게 한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그 없음의 자리를 힉스 입자, 자기는 질량이 없으면서 남의 질량을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입자, 그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자기한테는 질량이 없는데 질량을 있게 만든다면 그러면 질적으로 질량이 있을 때 뭐냐 하면 책 3권을 무게를 알려면 이 책 다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면 이 책에서 무게가 나오죠? 무게는 다시 뭐로 보낸다? 이 책, 이 책, 이 책 다 원상복귀가 되잖아요. 그런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모든 질량을 힉스 입자로 다 쪼개버리면 결국은 질량이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없는 게 모여서 뭐가 생겼다? 있는 게 돼요. 이게, 이게 과학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힉스 입자를 발견한 것은 99%라고 이론만 있던 것이 실제로 관측했다고 유럽 나라에 세계에서 제일 큰 전자를 돌려서 입자 가속기를 돌려서 충돌시키거든요. 충돌하면 이게 잘 안 맞아요. 100만 개 충동하면 그중에 하나 맞을까, 아는 사람이 입자 물리학 최고 책임자로 있던 분이 있어요. 한국에 와서 삼성에서 상까지 받았어요. 여자인데 한국의 최고의 과학자라고. 그 사람이 하양 사람이거든요. 같이 아는 사람이라 이야기하는데. 그게 충동할 때 잘 안 된대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 개 아다리 될까 한다는데. 어쨌든 간에 없는데서, 과학도 없는데서 있게 한다고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과학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거기서 예수님 얼굴이 나옵니까? 지금 마귀가 뭐냐, 과학 중에서 없는데서 있게 한다 하지만, 마귀는 기어이 뭐를 빼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없는데서 있게 한다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다 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 과학이 종교 대체물이 된 겁니다.
진화론이 왜 나쁘냐? 진화론만 나쁜 게 아니에요. 창조론도 나빠요. 과학 자체가 나빠요. 왜냐, 우리가 나쁘니까. 우리 자신이 죄인이고 나쁘니까. 다시 이야기 하면 박탈하는 이유는 우리가 비켜야 그동안 우리로 인하여 가려졌던 진짜 예수님께 대드는 진짜 악마의 모습이 비시시 웃으며 튀어나오는 겁니다. 맨홀 뚜껑 열면 개구리 튀어나오듯이, 요한계시록에 그런 비슷한 내용 있죠? 뚜껑 여니까 황충들이 나오죠. 그러니까 자꾸 우리가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주님 우리하고 상대합시다. 나하고 상대해요.’ 하면 ‘비켜, 비켜.’ 우리가 비켜버리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공격하는 게 나오는 거예요. 예수님을 공격할 때 인격과 그리고 인간의 명예, 인간의 자율성, 인간의 선택, 이런 걸 거론해서 ‘우리 다 같은 형제 아닌가, 우리 다 같은 인간 아닌가, 서로 평화를 누리자.’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로마 카톨릭 요번에 교황 된 사람이 뭘 하자 했습니까? 서로 종교끼리 관용을 베풀자, 이러죠. 관용 베풀어서 뭐하는데?
예수님에 대한, 십자가 죽으심에 대한 분노가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맞아 죽었어요.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이 분노가 주님의 시선 이예요. 분노가 있는 곳에 용서가 의미가 있었다니까요.
이건 어려운 거니까 해봅시다. 임금이 자기 종이 빚을 졌는데 탕감해 줬죠. 이 신하는 임금에게 막대한 자금을 탕감 받아놓고도 이 용서의 의미를 몰랐던 거예요. 언제 용서의 의미를 아느냐 하면 지가 지 종한테 몇 푼 안 되는 것 안 갚았다고 갑자기 임금이 보낸 군대가 와서 완전히 박탈할 때 소급해서 보면 그때 그 용서가 얼마나 큰 용서인지 아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뭔가 혜택 입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 뿐이지 실제로 감사 안 해요. 전혀 감사 안 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 다 날라 갈 때 비로소 그동안 주께서 많이 봐주고 왔다는 것, 인내성 가지고 많이 용서해 주고 왔다는 사실을 소급해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유구무언, 입이 열 개라고 할 말이 없어요.
삭개오가 주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 했습니까? 소급해서 4배나 갚아준다 할 때 계산해 보세요. 천만 원 한 사람한테 얼마를 갚는다고요? 4천만 원입니다. 이런 횡재가 없어요. 그 사람들 떡가래하고 밀가루하고 쌀 막 들고 가요. 이런 횡재가 없어요. 마트 그 사람 죄 짓는 일인지 몰라. 4배나 갚으니. 그만큼 자기 가진 거로부터의 자유가 된 겁니다. 용서 받으면. 그동안 ‘내꺼야’ 하고 있던 내 것이라는 것에서 자기가 ‘내꺼’라는 껍질을 홀랑 벗고 내 것에서 벗어나서 탈출 시도가 된 겁니다. 1단계, 2단계, 그 밑에 있는 것이 빠지고 로켓 발사할 때 캡슐만 도망치듯이 ‘이건 내꺼야. 이건 죽어도 안 뺏긴다.’ 하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홀라당 발가벗고 빠져나온 거예요. 벌거벗은 채로 니가 드러나리라, 히브리서 4장 말씀대로 니가 벌거벗을 것을 보게 되리라. 그게 바로 참 자유 아닙니까? 자유! 율법으로부터, 마귀로부터, 자기 죄로부터, 심지어 자신의 살고자 하는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예수님 같이 되는 게 아닙니까? 말씀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의 옛 사람이 도망치듯이 새사람 쪽으로 부리나케 도망치게 되는 겁니다. 들을 때뿐이고 돌아서면 다시 자기 자리로… 요 순간만이라고 도망칩시다.
그래서『묵시적 사건이란 이름으로 역사적 지평위에 지뢰처럼 수시로 터지게 된다.』묵시적 사건인데 사건 자체가 사실은 묵시적 이예요. 사건이라 하는 것은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일어났었어요. 그런데 사건이 터지면 그건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합니다. 감염되기 전에 이미 병균은 그 지역에 퍼져 있죠. 그런데 감염되는 순간 벌써부터 병균이 여기 있었구나, 하는 것을 소급해서 파악하잖아요. 고 감염되는 고 사건, 그 사건이 창세전에 우리가 이미 구원받기로 예정됐구나, 하는 걸 확인해 주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그 사건 하루에 12번이라도 일어날 수 있어요. ‘주여, 제가 떠날 곳이 있는데 왜 걱정했는가요?’ 수시로 주리 틀 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거 보통 축복 아니죠. 우리 마음은 길게 갔으면 좋겠는데 길게 가면 사건 아니에요. 길게 가면 그걸 우리가 소유하게 됩니다. 우리 옛 사람이 ‘나 은혜 받았어. 까불지 마.’ 이렇게 까불게 돼요. 은혜 받은 그것이 좋아서 오래 이 땅에 살고 싶어 합니다. 자랑하고 싶어서. 간만에 온 은혠데 이걸 자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지 자랑하는 재미로 살기 때문에 밥을 먹든지 영화를 가든지 놀러 가든지 지 혼자 가면 재미가 없어요. 왜, 지가 자랑 질 할 사람이 없으니까. 심지어 여자들은 목욕탕이나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가는데.
사람은 자랑 질 하고 싶은 이유가 그게 마귀가 옆 사람을 잡아먹어야 니가 산다는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은 남을 잡아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어요. 치과에 손님 오면 또 잡아먹힐 놈 하나 왔다. 밥 왔다. 밥, 밥, 밥‘ 이러거든요. 교회에 교인 하나 오면 ’밥 왔다. 밥‘ 그런데 보니까 돈도 없어 보인다. ’에이, 장사 망했다. 물 뿌려라.‘ 좀 가지고 교양 있게 생겼다. 이 사람은 ’잘 꼬시면 돈 나오겠네.‘ ’전에 어느 교회에서 오셨습니까?‘ ’고신 측‘ ’와~ 십일조!‘ 고신 측, 합동 측 십일조. 야! 십일조 계산 딱 해서 요번 연말 예산 좀 늘려야겠네. 24시간 목사는 그것만 생각합니다. 참, 그것이 알고 싶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일 하는 사람, 없는 사람 가도 별로 화가 안 나요. 그런데 십일조 내는 사람이 저쪽으로 가면 목사는 돌아버립니다. 전에 설교에서 이야기했죠. 사람이 세상에 살면 지 맘대로 안 됩니다. 미쳐버려요. 미치지 않으려면 뭔가 믿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예수가 되든지 부처가 되든지 관계없어요. 그냥 교회 나오고 그냥 가는 것은 그거라고 안 믿으면 환장하고 미칠 것 같아서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릴렉스, 자기 마음 평정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회개하는 곳이잖아요. 수요일에 이야기했죠. 회개를 이야기해야 되는데, 불에다가 기름을 넣는 거와 똑같은 거니까 안 돼요. 달래줘야 돼요. ‘잘 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러니 교회가 고객관리 한다는 게 참 악마의 촉수로서 움직이는 그게 오늘날 교회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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