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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성막과 낮아지심 130405강의출애굽기

성막과 낮아지심 130405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4-10 11:27

20130405a 울산강의-출애굽기 26장 : 성막과 낮아지심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6장 1절. “너는 성막을 만들되 앙장 열 폭을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공교히 수놓아 만들지니”

성막을 만들라고 했는데 성막이 없을 경우에 우리가 뭘 놓칠까요? 성막이 없어도 하나님이 이렇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구태여 성막 같은 것 무시해도 될 것입니다. 성막 만들라 할 때 “성막 안 만들고 하나님 알래요.” 이렇게 고집부릴 수 있는 문제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막을 만들라 하니까 이것은 성막 있는 하나님과 성막 없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만들라 해서 성막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아는 하나님과 성막이 없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이 나온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강의의 결론은 이미 끝났어요. 뭐냐 하면, 성막을 만들라 할 때 이걸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뭔가 얻어 챙기려는 생각이 간절했을 거예요. 우리는 참된 하나님 믿기 때문에 하나님 없는 쪽보다 이것저것 많이 챙길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날 때는 나는 나다. 여호와의 뜻이 나는 나다. 나는 나라는 말은 내가 알려주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말고 내가 보따리 하나, 둘씩 풀어낼 때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구나.” 하고 하나님 자체를 아는 것.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성막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많이 교회에서 성막강의하고 번제가 어떠니 강의할 때는 그들의 관심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내가 구원을 받겠다는데 관심사가 돼버리면 그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대목이 나오는데 3절에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면 제가 영생이 아닌 게 뭔지 설명할게요. 영생이 아닌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는 게 영생이 아닌 거죠. 그러면 모든 사람이 영생을 아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영생과 상관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영생도 못 가진 채, 영생도 알지 못한 채, 영생과 무관하게 살아왔는데 예수님을 보내서 이게 영생이라고 이야기할 때 “주여, 영생이 비로소 나타났군요.” 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를 세 자로 이야기하면, ‘관심사’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자체에 관심을 둬야 되는데 교회가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관심을 두면, 그것은 관심이 하나님한테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자기한테 있지요. 제가 초반부터 어렵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말을 구분할게요.

①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②영생을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지금 성경의 뜻이 일 번입니까, 이 번입니까? 이 번이죠.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사람은 영생을 얻지 못하게 돼있어요. 관심사가 하나님께서 가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뭔가 빼먹을 생각만 있지. 빼먹는다는 말은 하나님한테 관심이 없고 하나님은 그냥 경로로만 통과하는 과정으로만 이용하다가 여전히 최종도착지점은 자기가 잘 되는 것. 그런데 인간은 이미 성경에 의하면 확정적입니다.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다. 확정된 것은 어떻게 틀어보려고 하지 마세요.

예를 들어서 “제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하고 나오면 하나님께서 대번에 묻는 게 뭐냐 하면, 네가 영생 얻을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느냐고 나온다 말이죠. “너는 왜 영생 받아야 되지?” “그냥 받고 싶어서요.” “그러면 네가 영생 받을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나한테 오기 전에 스스로 점검해본 적이 있나?” “무조건 받아야 됩니다.” 무조건이 어디 있어요. 무조건이라는 것은 유행가에나 있지. 어디 주님이 짜놓은 계획에 무슨 무조건이 있습니까? 네가 뭔데 무조건이야. 인간은 영생을 못 받게 돼있는데 주제넘게 영생 받고자 하는 것은 이미 초반부터 하나님의 뜻과 틀어져있는 겁니다.

“교회 왜 나왔어요?” “구원받기 위해서.” 아이고. 주님에겐 가당치도 않아요. “네가 뭔데, 왜 구원받아야 되는데?” “그냥 받고 싶어요.” 그냥 받고 싶은 게 어디 있어요. 모든 게 하나님의 계획되는 대로 되는데.

“하나님, 저는 영생을 받고 싶지만 안 되겠지요. 영생 어림도 없겠지요. 저는 천국 가고 싶지만 천국은 어림도 없고 지옥 가야 되겠죠.” 그런 마음 자세로 오란 말이죠. 그래야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에요. 인생 살면서 자기 비밀을 모르면 헛산 거거든요. 사람은 자기의 비밀을 아는 순간 그 인간은 죽은 인간입니다. 우리가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열심이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뭔가 희망이 있을까 싶어서 낙이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비밀을 모르고 백날 살아봐야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는 마지막 팻말만 우리 눈에 띠는 겁니다. 실컷 살았는데 생명나무 가는 길이 막혔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에 아는 거예요. 애초부터 심판이었구나. 나쁜 짓을 해서 심판받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심판받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사람은 예수님이 심판주라는 걸 빼고 믿고 싶어 해요. 주님을 사랑하되 자기 구미에 맞는 식으로 조정해놓고 그 예수를 믿어요. 심판주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사랑해주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겁니다. 여러분, 그 말이 같은 말이 아니에요. 주님이 심판주라는 말은 우린 이미 심판의 대상이란 뜻이거든요. 이미 우리는 심판받아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님 나타났는데 그 주님 앞에서 “저 어때요? 판정 내려주세요.” 판정내릴 것도 없어요. 예수님의 판정은 우리가 죽는 죽음을 함께 죽는 게 그것이 예수님이 내린 마지막 판정입니다.

“너? 내 모습이 네 모습이야.” 하고 십자가에서 버림받았잖아요. 이게 우리의 비밀이에요. 이름 석 자에 비밀? 그런 건 없어요. 십자가가 비밀이에요. 우리는 예수님 죽음을 통해서 모든 진리는 그 속에서 퍼내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때요 하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안에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우리의 비밀이 몽땅 거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버림받았으면 이것은 곧장 우리가 버림받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대신해서 죽으심이라 하는 거예요. 우리의 모습을 대신해서 적나라하게 죄 된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가를 미리 다 보여준 겁니다.

옛날에는 사울이란 사람은 자기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거든요. 사도행전 9장에서 예수님 만나고 “사울아, 사울아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했단 말이죠. 그러면 사울이 들었던 예수가 진짜 예수라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진짜 만났으면 우리도 그런 입장에서 그걸 받아들여야 돼요. “누구야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그럴 때 우리는 생명나무는 어림도 없는 거구나. 괜히 헛물만 켰네. 바보 같이 주제 파악도 안 한 체 생명나무 좋다하니까 영생 좋다 하니까 그것만 덜렁 따먹으려고 교회 와서 신앙생활하지 않으면서도 하는 척하고 열심을 냈지만 이건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교회 신앙생활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그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우리의 사랑의 대상, 하나님과 이웃을 우리가 판정내리고 우리가 골라잡는 게 아니고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나올 때만 사랑의 대상도 같이 나타나요. 옆에 있다고 이웃이 아니고 주께서 사랑을 주면서 사랑할 사람도 같이 주시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저 사람 사랑해야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내가 나를 좋아하는 그 범위 안에서 그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실은 사랑이 아니고 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고자 하는 정치적인 수작에 불과해요.

연애하는 젊은 사람들이 “자기 나 사랑해.” 하고 화이트데이가 어떻고 하는 것은 뭐냐? “저걸 꼬셔봐. 저걸 내 것으로 만들어 봐.” 전부 이런 노림수라니까요. 자기가 자기 사랑하는 범주에서 상대방을 강제로 당기는 수작에 불과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이웃이 있으니까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사랑을 주면 우리가 예상외의 이웃이 같이 등장해서 그 등장한 이웃만 사랑하면 돼요. 참 쉽지요.

얘들 모형비행기 만들 때 고무줄 감아서 하는 것 옛날에 공작시간에 해봤거든요. 모형비행기 제작하는 회사에서 다른 다 주면서 날개 하나를 빠뜨리네. 그러면 그걸 짜 맞추고 본드 붙이고 하는데 날개가 하나 없으면 비행기가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바꿔 줘. 문방구에서 물어 줘야 돼요. 원래 날개가 두 개 있어야 한 세트가 되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주실 때는 사랑만 주는 게 아니고 이 사람 사랑하라고 같이 세트로 담겨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성경에 나오니까 자기가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다보니까 하나님도 고쳐서 자기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덤퍼기를 씌워서 일방적으로 해놓고 그렇게 사랑하고. 그것은 처음부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님의 선택이에요. 주님이 선택한 사람과 사랑이 주어지게 돼있어요.

미국에선가 뉴스에 보니까 급식비 안 낸 사람은 급식을 안 줬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영생 주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사랑을 세트로 주는 거예요. 그런데 영생 안 받은 사람이 그걸 받으면, “너, 안 줘.”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항상 미움과 동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사랑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 사랑할 대상이 나타나는데 그걸 둘로 해서 하나님과 이웃이라 한 겁니다.

그러면 사랑과 미움이 오는데 누굴 미워해야 될까요? 문제가 그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누굴 미워해야 될까요? 상당히 어려운 문제인데 정답은 이렇습니다. 조금 전까지 주님을 사랑했다, 이웃을 사랑했다고 여기는 나 자신을 미워해야 돼요. 왜냐 하면 이틀 치 사랑을 준 적이 없어요. 한 번 사랑주고 6개월 가고 이런 것 없습니다.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미워하도록 매일 사랑해줘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육이 흔히 고깃덩어리 육 같으면 문제가 간단해요. 하지만 육이 고깃덩어리 육이 아니고 뭔가 능력을 발휘하는 육이에요. 악마의 능력,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예수님을 어떻게 하든 간에 제거하려고 하는 그런 악마가 다루는 육이기 때문에 거기에 조치해서 주님도 사랑해주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믿는 그것을 미워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날마다 주님 사랑했다고 까불대다가 돌아서면 주님 사랑한 나 자신을 미워하는 거예요.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하게 되면, 이웃을 사랑할 때 저 사람을 이웃이라고 사랑하면 안 된다고 했지요. 사랑할 때 세트로 이웃도 같이 주셔요. 그것은 내 쪽에서 골라잡은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선택했기 때문에 사랑을 줬고 그 이웃과 하나님도 주께서 선택한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이웃이라고 간주하지 않는데 사랑받고 보니까 우리 이웃이네. 이렇게 된다 말이죠. 그 이웃이 뭔지 조금 있다 설명해드리겠습니다만 그 이웃을 교회라 해요.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을 이웃이라 해요.

저 사람은? 이웃 사랑하게 되면, “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하고 내뱉는 순간 그 은혜의 구조에 내가 주체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 사랑은 자기가 했다고 곧장 바뀌게 마련이에요. 오늘 소수가 왔기 때문에 소수정예처럼 어려운 것도 마구 내질러보는 겁니다.

신은 인간이 접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그냥 고깃덩어리가 아니에요. 고깃덩어리 같으면 영생 먹을 수 있는데 인간의 고기 속에는 선악이라는 게 있어요. 선악이란 따먹지 말라는 팻말조차 뽑아서 자기한테 집어넣은 거예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 하니까 “어디 잔디밭이 나한테 간섭해.” 하고 뽑아서 집어넣은 거예요.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세요가 있을 때만 인간인데 마귀가 뱀을 통해서 와서 그것만 뽑으면 네가 인간에서 벗어나서 신이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인간이 신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권한 밖이에요. 괜히 욕심내지 마세요. 인간은 인간으로 족해야지 인간이 천사되고, 인간이 신되면 오히려 감당이 안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인간이 감당 못하게 만들었단 말이죠. 자기가 피조물로써 대항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전쟁이 먼저 있었거든요.

그냥 고깃덩어리가 아니고 선악적인 것, 우리도 선과 악에 대해서 안다. 이렇게 들이대니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차단막 때문에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고 않고 계속 빠져가는 거예요. 어느 정도 피해버리고 인간 손에 절대로 영생이 안 잡혀야 생명나무 길을 차단했다는 그 취지가 계속 살아있어야 되거든요. 그때 드러나는 게 주체라는 겁니다.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누가? 내가. “나도 신앙 생활한다고 열심히 했습니다.” 누가? 내가.

예를 들어서 밭을 갈 때 그냥 밭을 갈면 돼요. 주위에 아무도 없이. 그러면 밭만 갈린 거예요. 그런데 지나가는 나그네가, “이 밭 참 잘 갈았네. 누가 갈았지?” 그때 나오는 게 “내가 갈았어요.” 선악과 따먹은 자가 누구냐? 제가요.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생명나무 따먹지 못한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주체의식을 갖도록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작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천사들이 날개 짓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했잖아요. 그런데 천사들이 날개 짓하면서 “내가 거룩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리 안 하거든요. 주님 보시지요. 지금 날개 짓한다가 어깨에 오십견 걸렸습니다. 힘들어 죽겠습니다. 어때요? 제 날개 짓. 주님 앞에서는 ‘내가’라는 게 없어요.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나는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주님이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게 성령 안에서만 성립되는데. 그런 은혜가 성령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반드시 네 힘으로 따먹지 못한다. 너라고 여기는 너는 결코 따먹지 못한다. 왜? 너는 선악과 따먹은 자의 표상이 되기 때문에.

선악과가 훼손됐잖아요. 그러면 결국 내가 했다고 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있는 이상은 생명나무 못 따먹어요. 생명나무를 따먹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나무라 해서 예수님의 주체가 그대로 고스란히 우리 속에 넘겨질 때 생명나무가 우리에게 넘겨지는 겁니다. “이것 누가 주셨지?” “주님이 주신 겁니다.” 할 때 천국이고 하늘나라 되는 겁니다.

지팡이 들고 홍해 가른 사람을 우리는 모세라 하지요. 그런데 변화산에서 모세가 등장하고 엘리야가 등장할 때 모세는, “주님 제가 들었습니다.” 이런 소리 합니까? 아니에요. “주님, 언제 돌아가셔서 제 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그 이야기했단 말이죠. 그 지팡이는 주께서 시켰잖아요.

아브라함이 아들 바쳐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들 바쳐서 구원받을 것 같으면 예수님 오시기를 기다릴 필요 없어요. 이미 합격했는데 뭣 때문에 기다립니까.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바친다는 모든 행동의 주체가 나에서 출발한 행동이 아니고 주체자가 따로 있다는 관계에요. 어떻게 자기 아들 바치겠습니까? 주께서 시키신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에 관한 것은 주께서 이미 실시해서 나한테 덮친 결과물이 믿음이고 납니다.”라고 고백하는 거예요.

그럼 그 주체가가 누구냐?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버지가 아들을 바치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는 도저히 아브라함 머리에서 안 나옵니다. 항상 신자가 보여주는 것은 지 머리 속에서 안 나오는 일들을 벌여요. 나 같으면 때려죽여도 안 할 일을 주께서 벌이십니다. 그게 뭐냐? 사랑이 올 때는 사랑의 대상도 같이 와요. 우리에게 사랑하라 하면, 저 인간은 때려죽여도 사랑 안 하고 이 인간은 어떤 경우라고 사랑하리라. 했는데 막상 사랑이 와버리면 원수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던 사람들은 어느새 내 곁을 떠나버리고. 붙잡아도 소용없어요. “십자가만 아는 너와 안 놀아.” 하고 가버렸다는 거예요. 심지어 한 가족이 복음을 모를 때는 단란한 가족도 복음 알고 난 뒤에는 “나는 너하고 말도 섞기 싫어.” 남남이 되고 원수가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가 만든 원수는 원수가 아니고 주께서 만든 원수가 불쑥불쑥 등장하도록 만들고 반대로 우리가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저 인간 살아있는 한 내가 자살하는 게 낫다. 빨리 죽어서 저 인간 안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는데 사랑이 와버리니까 저 인간도 주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나의 형제라고 깨닫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 동안 구원받을 자를 미워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더 미워져야 되겠어요.

성막 없이는 하나님 몰라요. 우리는 이 본문 보면 백이면 백 다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여기 성막이 무슨 의미입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이 뭐냐? “알아서 뭐 할 건데.” “이것 알아서 구원받으려고 하거든요.” 네가 구원받아야 될 인간인지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느냐? 누가 너에게 구원받으려고 했어?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것이 함부로 입을 떼느냐 말이죠. 우리는 구원받으면 안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써 구원될 뿐이지 내 자격으로 구원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아브라함, 모세, 그리스도 몸의 자격으로 구원받지 예레미야 자격으로 구원 없습니다. 그걸 간단히 이야기하면, 구원 없습니다. 그걸 더 간단히 줄이면, 구원 없다.

세상에 구원이라 하는 것은 아들만 구원해요. 예수님만 구원하지 구원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네가 원하는 사람 구원하라고 일임했지 우리에게 준 게 아닙니다. “어이. 근호야. 구원해줄까, 말까?” 우리에게 물은 게 아니에요. 우리에게 아예 묻지도 않습니다. 예수님한테 너한테 일임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 원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구원받거든 “주님이여, 왜 저를 구원하십니까?” 이렇게 나와야 된다고. “이제 구원했구나.” 이러지 마시고. “왜 피의 능력을 알게 하셔서 구원하시니 무슨 난리인지 모르겠어. 저는 구원받을 생각도 없었는데 왜 구원하시죠?” 이렇게 좀 엉뚱하다는 것.

다시 할게요. 내가 생각한 것을 일부러 피해갑니다. 내가 생각해버리면 내 주체가 구원받아요. 주님의 구원, 하늘나라는 내가 주체가 아니고 예수님이 주체기 때문에 내가 주체로서 나설 수 있는 모든 길을 일부러 피해버려요. 내가 하고 싶은 것 일부러 피해버려요.

성도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면, 기도한 내용대로 절대로 응답이 안 되는 능력이 있습니다. 백 프로 보장합니다. 엘리야가 비가 오기를 기도할 때 비가 안 왔거든요. 그래서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하니까 비가 안 왔거든요. 그러면 첫 번째 비 오기를 기도할 때는 자기가 주체인데 그 주체를 충분히 드러내고 그걸 피해갈 때 엘리야 속의 주님이 움직여서 주님의 뜻대로 그 다음부터 비가 안 온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왕상17:8-16), 엘리야 시대에 사렙다(사르밧) 과부가 밀가루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래서 자살할 시점에 엘리야가 들이닥쳤지요. 마지막으로 이것 먹고 죽자. 얼마나 슬픈 이야기입니까. 처음부터 충분히 밀가루를 채워주지 왜 밀가루 없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나쁜 사람이에요. 사람을 어찌 그렇게 비참하게 만듭니까. 비참하게 만들 때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기도했겠어요. 그래도 양식이 없잖아요. 밀가루 통에 양식이 없는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공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쓸데없이 성경 백독하고 성경공부 왜 했어요. 밀가루도 안 생기는데.

말씀대로 됐어요. 그 과부로 하여금 자기 것이 만들어요. 만들어놓고 그 다음에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채워진다면 주님의 주체가 과부의 주체를 대신해서 그 과부는 영생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죠. 과부는 영생을 얻는 게 아니고 영생이 뭔가를 보여주는데 참여된 거죠. 영생은 여전히 예수님이십니다. 영생은 누구한테 빼앗기지 않아요. 구원받은 사람에게 주님은 영생을 안 빼앗겼습니다. 구원받은 자 안에 함께 있어서 여전히 영생은 예수님이 영생이에요.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생명은 우리에게 양도하는 게 아닙니다. 아예 우리의 주인공으로 오신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다. 날마다 죽음에 넘기고 내 안에 주님이 살아있는 거예요.

과부의 개인적으로 영생을 챙긴 게 아니고 아예 영생이 과부를 장악해서 거기다 자기 자리를 깔아버리네요. 그러면 그 전에 사전 작업이 과부 본인의 주체를 거덜 내야 되는 거예요. 거덜 낼 때는 오죽하면 아이와 자살하려고 했겠어요. 거덜 낼 때는 자기 것이 박탈당하니까 그 동안 자기 것으로 살아왔다는 게 티가 나잖아요. 내 것으로 살아왔는데 내 것이 점점 없어지니까 차라리 자살하는 게 좋은 거예요.

그 시점에 바로 엘리야가 개입했습니다. 엘리야가 세상에 나쁜 사람이에요. 마지막 밀가루 맛도 못 보게 날름 빼앗아 먹어요. 세상에 그런 나쁜 목사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걸 왜 빼앗아 갑니까? 빼앗아 가는 이유는, 나는 너한테 줄 건 없지만 나한테 있는 걸 주노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그 취지입니다. 나는 너한테 밀가루 주지 않는데 다만 영생을 줄 뿐이다. 해놓고 준 게 뭡니까? 밀가루잖아요. 그 밀가루가 그 밀가루가 아닙니다.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지요. 그 양식이 그 양식이 아니면서 얻어먹는 것은 스테이크. 스테이크가 그 스테이크가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스테이크 먹고 지옥 가고 어떤 사람은 스테이크 먹고 천당 가고. 왜? 스테이크를 주님이 주신 것으로 본단 말이죠.

그래서 성경은 어떻게 구원받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사기 치는 것이고.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게 시작이고 끝이에요. 주님이 누구신가? 이런 분이구나. 그 상태 유지하는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가서 잘 사는 것 소용없어요. 지금부터 천국 삶이 되려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우리가 짧은 인생이지만 동원된 거예요. 우리가 동원예비군된 거예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거지같은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찢어질 대로 찢어지고 꿰맬 때 주께서 친히 꿰매시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장막은 무엇인가? 장막은 격리인데요. 격리로부터 시작해서 확정입니다. 확정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불변입니다. 불변이란 변하지 않는 거잖아요. 인간들이 사는 것과 더불어 성막 짓는 지역은 민간인들은 못 와요. 제사장들만 오는데 그들도 그냥 오면 안 되고 피를 들고 가든지 뿌리든지. 이걸 좀 어렵게 이야기할 테니 여러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싸이란 가수가 강남스타일 뜨고 난 뒤에 서울광장에서 그날 목요일인데 제가 근처에 있었어요. 서울역에 있었으니까. 시끄러웠어요. 서울광장에 무대 해놓고 같이 10만 명이 강남스타일 춤췄다고 기네스북에 올랐어요. 분명히 장소가 있잖아요. 지금 서울광장에 가면 싸이가 춤추고 있습니까? 이걸 고상한 말로 부재라 해요. 그 자리에 없다. 반대말로 존재한다. 지금 거기에 무대도 없고 가수도 없어요. 그때 작년에 있었지요. 그래도 자리, 공간, 장소는 있을 것 아닙니까. 장소가 장소 되려면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싸이란 가수가 여기서 춤을 췄다는 사건.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그 사건 이전에는 그냥 잔디밭인데 그 사건이 있고 난 뒤에는 강남스타일을 10만 명이 같이 춤 췄던 사건 안의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원래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 하면,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 바깥이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 있잖아요. 지구. 이 물리적인 세상 바깥에 하나님이 계신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밖 또는 바깥이라고 한다면 이걸 기준으로 해서 바깥이기 때문에 그 바깥도 이것과 같은 공간개념이 돼버려요.

예를 들어서 어떤 아빠가 회사 오다가 죽었다. “엄마, 아빠 어디 있어?” “골목 끝에 조쪽에.” 그럼 얘는 골목 끝에 가서 아빠를 기다리죠. “아빠 아직 안 오는데?” “오실 거야.” 지금 아빠 어디 있지요? 분명 엄마는 골목 끝이라 해서 얘들이 알고 있는 공간관을 사용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이 세상 바깥에, 하늘나라에. 인간에게 하늘나라는 이 땅을 인정하고 이 땅은 무조건 땅이고 그 다음에 하늘나라라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는 우리가 사는 이 땅과 달라요. 예수님은 하늘나라 입장이고 우리는 이 땅을 인정해달라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 땅은 땅이고 죽으면 하늘나라 간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워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보는 땅과 개념이 달라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예수님 계신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물으면 안 돼요. 우리가 아는 공간 개념으로는 질문 자체가 성립 안 돼요. 변화산. 분명히 변화산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있잖아요. 지금 변화산에 교회인가, 성당인가 세워놨어요. 거기 가면 예수님이 앉아 있습니까? 없다 이 말이죠. 왜? 그때 한 사건이잖아요.

그러면 사건이란 우발적으로 돌발적이라고 우리 쪽에서 붙잡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건 쪽에서는 붙잡을 수가 있습니다. 사건 쪽에서 붙잡게 되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란 고백이 나옵니다. 여기가 좋다는 말은 방금 보일러에 불 넣었다는 말입니까? 여기가 좋다는 말은, 여기가 좋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계신다는 자체가 좋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초막이나 궁궐이나 상관치 않고 내가 사법고시에 합격했는지, 불합격했는지, 지금 삼수하는지, 사수하는지, 전방갔든지, 후방갔는지, 예비군인지 관계없이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할 때 그게 하늘나라라 이 말입니다.

새순교회에 합기도라고 적어놨잖아요. 합기도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어요. “내가 주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자체가 땅에 속하고 울산에 속하지만 태화강에 까마귀나 쳐다보고 사는 그런 신세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이에요.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것은 탄식하는 것 같지만 약 올리는 거예요. 그 밖에 있는 사람은, “웬 고백이야. 당신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하고 이야기 안 해. 주님 보고 이야기해.”

“주여, 누구십니까?” 할 때 다른 사람은 못 들었어요. 사울은 지금 찾아오신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하늘나라에요. 그게 십자가 안이고. 장수? 한 달 수입? 지금 암 걸렸다. 말기 암이다. 그것 아무 소용없어요. 주체를 거덜 내고 밀가루 통을 거덜 내는 겁니다. 마지막 남은 것을 날름 잡수시고 난 뒤에 차고 넘치도록 엘리사 같은 경우에는 그릇마다 참기름 넘치고. 그게 오늘날 신약시대 우리들도 구약의 과부처럼 똑같이 구원될 것이다.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물 길러 간 여인이 자체가 우물이 됐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자기가 우물에 물을 길러 갔는데 주님께서는 아예 그 여인 자체를 우물로 만들어서 계속해서 나오도록 그러니까 옛날에는 지가 물을 퍼야 되는데 주께서 우리로 주님이 물을 퍼내고 있네. 자기가 준 영생을 자기가 끄집어내고 있어요. 우리 뜻은 맨날 박탈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과연 우물인지 성령의 전인지 어떻게 파악하느냐? 그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의 과거사 다 발각되었잖아요. 제가 가락교회 할 때는 남자들 다섯 명 이름까지 했어요. 그것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내가 주체가 되어서 저지른 모든 것들을 발각시키는 게 뭐냐 하면, 해물전 뒤집듯이 성령은 우리의 뜻을 뒤집어서 우리의 뜻 자체가 주님의 뜻으로 뒤집는 거예요. 100원짜리 동전 앞면에 이순신 뒤에 숫자 100이 있지요. 이걸 지금까지 내가 선택해서 내가 애써서 얻은 내 인생이라는 것을 성령은 이걸 뒤집어서 주께서 하셨다는 식으로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게 하늘나라에요. 그러니까 죽음이 없지요. 죽는 것은 쉬는 거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죽는다 했잖아요. 십자가 모를 때는 내가 죽는다인데 십자가 알게 되면 우리는 살아도 이미 죽은 게 돼요. 뭘 새삼스럽게 죽어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는 게 신기한 게 아니고 오히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되게 신기해. “안 살아야 되는데 왜 살지. 주께서 참새 키우듯이 잡초 키우듯이 키우시는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뒤집어서 이야기해야 돼요.

지금 격리는 이야기했는데 불변을 이야기 안 했어요. 불변을 이야기할게요. 성령을 준다는 것은 지금 땅에다 하늘나라 땅이 쳐들어오는데 그 땅은 하나님이 거주하는 땅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들이 사는 번지수에 거주하네. 그것은 하나님이 일부러 낮아져서 그래요. 하나님이 그만큼 자기를 낮추어서 그런 거예요. 진짜 죄인만큼 낮추지 아니하면 죄인과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 스스로 인간들이 사는 흙으로 되어있는 땅을 주께서 거주지로 삼은 것은 그만큼 마음을 낮추어서 그런 겁니다.

낮추어놓고 땅은 땅이로되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에 격리가 되는 겁니다.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피를 갖고 들어오죠. 그렇다면 성막을 만들어놓고 열 가지 도구 만들어놓은 것은 결국 여기는 피만 인정한다.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피를 앞장세우고 결국 앞마당은 피를 만드는 공장인데 그냥 피는 안 되고, 인간 피는 안 받아줍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한 대로 절차를 거친 피.

매매 계약할 때 나라에서 인정하는 것은 법무사 관인계약서가 있어요. 행정절차가 그래요. A4용지에 알아보지도 못하게 아무렇게나 쓴 것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나라에 들어가는 세금문제에 있어서는 관인계약서가 따로 있어요. 요 근래에 처음 알았어요.

피를 만들 때 면도하다가 주여, 피입니다. 이런 짓 한 사람이 있었지요. 베드로. 주님이 간다 하니까 자기도 제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아서라 오지 말라 했잖아요. 우리가 만든 사적인 계약서는 안 받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계약서대로 계약을 해야 돼요. 그러려면 하나님의 제사법에 맞추어서 생산된 피만이 주를 만납니다. 그 법을 주님이 줬기 때문에 주님의 법에 담겨야 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성막 앞의 모든 기구들은 주님에 합당한 피를 생산하는 것이다. 피니까 다른 말로 죽음이죠. 우리가 죽는 죽음은 소용없습니다. 뭔가 다른 죽음에 의한 피, 이게 바로 영생입니다. 그러니까 현재 죄 있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는 중간에 다른 죽음이 개입돼야 됩니다.

그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한윤범(IP:14.♡.134.60)

13-04-10 11:28

20130405b 울산강의-출애굽기 26장 : 성막과 낮아지심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성막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함께 거하기 위해서 성막을 지었다. 그래서 성막이 없는 하나님은 뭘 잊어버렸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낮아졌다는 사실을 빼먹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은 엉터리 하나님이죠. “하나님이여, 저 받아주소서.” “내가 너 찾아갔잖아요.” “주님이여, 죽고 난 뒤에 만납시다.” “무슨 소리 하고 있노. 이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언제요? 어데요?”

그렇다면 아까 분명히 피 이야기했잖아요. 무슨 피 말입니까? 십자가 피 이야기했잖아요. 사울이 율법의 도사입니다. 그 사울이 나중에 주님 만나고 바울 되고 난 뒤에 인간들이 모든 걸 알아도 하나 모르는 게 십자가는 인간이 모르는 거예요. 성령이 알려줘야 비로소 아는 것, 이게 십자가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이 아는 것은 열심히 행하면 행한 만큼 성과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맛볼 수 있어요. 누구든지.

아까 이종호 목사님과 이야기했지만 목회 십년 했는데 성과 없다고 교인들이 한다는데. 예배당 사놓은 것도 성과 아닌가? 이러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만큼 10년이라는 것, 열심히 했다는 것, 성과를 보기 원하는데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십자가라는 것은 성과 없는데 있는 성과, 기대하지도 않은 성과, 행한 것도 없는데 경건치도 않는 자를 의롭다하는 성과, 땡잡은 거예요.

로또는 돈 주고 사야 되잖아요. 이것은 돈 주고 산 적도 없어요. 아예 로또를 갖다 안겼다니까. 꿈에 돼지 여섯 마리가 지나가는데 3, 17 숫자를 얼른 긁었다. 그렇더라도 로또를 돈 주고 사야 된다니까. 이것은 사고자시고 간에 주께서 쳐들어와서 네 인생을 내 집으로 해야 되겠다. “주님, 왜 그러십니까?” 나는 너만큼 낮아졌기 때문에. 주님의 낮아지심 때문에 주님이 안 들어가는 구석이 없습니다.

내가 노숙자가 되던, 부도 맞아 왕창 망하던, 이혼을 하던 간에, 이 집에 냄새나서 못 오겠다. 이런 것 없어요. 냄새가 나던, 똥오줌을 처발랐던 간에 수입이 한 푼도 없던 간에 그곳을 하늘나라로 만들어낼 정도로 주의 낮아지심을 끝도 없고 한도 없는 거예요. 돈만 아는 세리 삭개오, 그리고 소경 바디매오, 남들은 거지하고 있는데 소경도 격이 있는 모양이라. 예쁜 소경도 있는 모양인데 이 바디매오는 거지 바디매오에요. 그런데 그 자리를 주께서는 천국으로 만들어내세요. 영생이 있으니 천국이죠. 주님이 그 자리를 접수했다니까.

어떻게 가능합니까? 피. 그 거룩한 피가 주님은 죽으심으로 들어왔는데 안 될 게 뭐가 있어요. 지옥에서도 천국을 만들어내시는 예수님의 피. 그 피는 인간의 행함의 업적이 아니고 인간이 신앙생활 열심히 한 결과물이 아니고 예수님이 홀로 다 한 결과물이 우리에게 덮치게 되면 그곳이 곧 천국이고 영생입니다. 뭐가 더 필요한데요, 도대체. 예배당이 얼마나 커야 속이 시원해요? 교인수 몇 만 명 돼야 됩니까? 돼봐야 쓰레기인데. 쓰레기는 모아봐야 쓰레기입니다. 똑같은 인간들 다 모아봐야 쓰레기고, 서울시민 다 모아봐야 그게 천국 아닙니다.

어디 주님의 진리가 사람 숫자에 기죽는 진리가 어디 있어요. 너희들이 그걸 진리라고 우겨? 할 수 없다 내가 고집 꺾을 게. 이런 주님 없습니다. 사람들이 바꿔달라고 데모한다고 바꿔주는 이런 주님 없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두 번째가 고정, 또는 불변. 한 고집 하시는 겁니다. 이 고집을 꺾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막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보라는 거예요. 너희들이 얼마나 착하고 훌륭한가는 내가 안 물을게. 성막 안에서 벌어지는 그 고집, 피 잡아서 용서하시는 그 고집, 이것은 만고에 누가 변개할 수 없는 확정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성막 없는 하나님과 성막 만들라고 허락하신 하나님이 다르다고. 왜? 이미 고정과 불변을 격리를 하신 거예요. 그러면 고정과 불변은 찾아오심으로 나타난 고정과 불변이죠.

사람들 이리 와 봐라. 우리 아이디어 꺼내서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보자. 이것은 우상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성막이 고정과 불변이 돼버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은 늘 변하는 존재란 뜻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어떤 오류를 범하느냐 하면, 나는 안 달라졌다고 여기면서 성경을 봐요.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하다. 그러다보니까 어제 믿은 것으로 오늘까지 때우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어제 믿음 좋았으니까 며칠 가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 자체는 불변이 아니에요. 인간은 시간 따라서 늘 다릅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나라는 주체는 없는 겁니다. 라캉이 그랬는데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이 신체로 돼 있잖아요. 인간의 신체는 욕구가 있어요. 욕구가 가만있지 않고 뭘 요구하게 돼있어요. 욕구에서 요구를 뺀 것을 욕망이라 합니다. 보통은 구분 없이 그냥 사용하거든요. 어쨌든 간에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신체는 자아가 다스릴 수 없는 대상이에요.

드라마 같은 걸 보게 되면 이상스럽게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탤런트가 있어요. 그 사람과 사전에 돈 관계, 사기 친 관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보기만 해도 인상 자체가 자기한테 미운 거예요. 반대로 보기만 해도 그렇게 마음에 드는 인상, 심지어 드라마에서 악한 역할해도 뭘 해도 예뻐. 그런데 꼴보기 싫은 사람은 착한 역할을 하면 착한 게 더 얄미워. 패주고 싶어. 어디 주제에 착한 역할을 해. 네 주제에 나쁜 역이 맞아. 이런 식으로.

같은 자식이라고 깨물어서 안 아픈 순간도 있답니다. 서로 비교가 되거든요. 그것은 우리 이성에서 나온 게 아니고 우리 신체에서 나온 겁니다. 이걸 아무리 그러면 안 돼. 예수 믿는 내가 그러면 안 되지. 아무리 자제를 해도 화를 키웁니다. 폭발할 때는 10년 전 것까지 한꺼번에 다 하게 돼있거든요. 인간의 신체의 욕구라는 것은 미움, 사랑, 감정. 네가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네 속에서 나오는 더러움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해도 자제할 수 없습니다. 그냥 위장할 뿐이다. 위장할수록 가면이 두꺼워져서 점점 더 감당이 안 됩니다.

인간의 신체가 욕구로 나오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 자아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 신체가 안고 있는 여기에다 공격을 해버려요. 어떻게? 말씀과 율법으로. 그러니까 탐내지 말라는 말은 지금부터 탐내지 말라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탐내왔잖아. 이실직고하라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주께서 그렇게 나온다면 그래요. 처음부터 탐냈습니다. 이렇게 막 나오네. 처음에 나쁜 짓 할 때는 굉장히 어려워해요. 일주일 동안 벌 받을 준비해야지. 이러다가 얼마 지나면 나쁜 짓하는 게 재미있단 말이죠.

대도 조세형이 도둑질 하는 이유가 선교센터 세우려했다는 것은 핑계고 도둑질은 희열이 있어요. 그 나름대로 짜릿한 면이 있어요. 똑같은 일을 시켜도 하지 말라고 분명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얘가 그걸 할 때 그 얘는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움을 갖고 합니다. “공부하지 마.” 이랬을 때 본인은 엄마는 나를 미워하지만 내가 공부를 재미있어 할 줄 몰랐지. 그런데 “공부해.” 하면, 이미 공부하라는 명령을 자기가 내리기 전에 엄마가 명령 내렸다는 자체가 기분 나빠. 내 몸은 내가 명령내리는 데 왜 간섭하는데.

지금 잡채, 탕수육, 맛있는 게 있는데 “너 먹고 싶은 것 먹어.” 이러면 되는데 “얘야 갈비 한 번 먹어봐라.” 하면, 먹고 싶어도 먹기 싫다니까요. 떡갈비를 먹는 순간 내가 시어머니 종으로 오해할 소지가 강하거든요. 젓가락이 가더라도 “그래 그것 맛있는 거야. 니가 맛있는 걸 아네.” 할 때 콩나물로 가요. “어머니, 이것 먹겠습니다.” “그래 니가 콩나물 좋아하면 할 수 없지.” 해놓고 기회 본다고. 콩나물 거쳐서 또 가면, “그렇지.” 그러면 또 거두고.

아무리 좋은 일도 들키면 하기 싫어. 왜? 이 신체는 누구로부터 간섭을 차단시키고 자기가 신이 되라고 격려하는 게 있어요. 탐내지 말라고 할 때 이왕 들킨 것 본격적으로 탐내보자. 하고 막 살게 돼있습니다. 그럴 때 율법은 박수를 쳐요. 진작 네 본색을 드러내야지. 그래서 제가 막 살지 말라고 한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막 살지 말란 사람은 죽었지만. 그 사람 막 살아서 죽었다니까. 의의 종, 그것 아니에요. 그냥 막 살아서 죄 값으로 죽은 거예요. 인간은 처음부터 죽어 있어요. 죽었다는 말은 그 동안 죽어왔다는 확인절차에 불과합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 했는데. 날마다 장례식이고 날마다 발인예배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인간은 욕구기 때문에 잠재울 수 없어요. 감당이 안 됩니다. 감당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은 자아가 있어서 기존의 윤리 체계가 있거든요. 윤리체계에서 욕구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제와 절제를 했다고 여기면서 그것을 주체, 선이라고 본 거예요. 나름대로 이 정도면 자제를 했다고 의가 나올 때 의의 주인공을 본인으로 간주하는 이게 주체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대도 조세형이 부잣집에서 물건을 훔쳤잖아요. 분명히 자기도 나쁜 짓인지 알지만 처음부터 나는 나쁜 놈이기 때문에 나쁜 짓하는 것은 별로 양심의 가책도 안 되고 즐거움으로 하는데 자기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그 불쌍한 사람에게 목걸이를 하나 줬단 말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잡혀서 판사한테 이 사회가 돌보지 않은 가난한 사람을 내가 돌봤습니다. 지가 홍길동이라도 된 것처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 당신을 어떤 사람으로 봅니까? 이런 어려운 사람에게 목걸이를 줄 정도로 자기 노동의 대가로 얻은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기 희생해가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이것이 진정한 나다운 나라고 주체가 형성됩니다.

그러면 주체는 항상 자기 의가 형성될 때 주체지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티입니다. 선과 악 중에서 자기는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악이라고 나무라는 쪽에 서는 거예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선이지만 원치 않은 악이 있어서 사도 바울은 오히려 누가 이긴다? 악이 나를 사로잡아가는구나. 나는 거기에 완전히 휩쓸리는구나.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악한 일도 했지만 착한 일도 한 그쪽이 바로 자기라는 거예요.

이러한 심보를 가지고 성령 받지 않은 상태로 교회에 나오니까 전부다 지 자랑하는 판이 된 겁니다. 어느 주일오후에 바바리맨 이야기했지요. 바바리맨이 바바리 입고 여학교 앞에서 벌리는 것은 원래 볼 것도 없으면서 마치 볼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는 거예요. 잠시 보여 줄 때는 놀라겠지만 2박3일 보여주면 여학생들 시시해서 보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5분 동안 나훈아처럼 보여줄까요? 나훈아가 왜 그런 이야기했습니까? 잘린 게 아닌데 잘렸다고 해서.

도대체 교인들이 교회 올 때 바바리 입고 와요. 주님은 다 아는데 처음부터 탐내왔고,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간음해왔고, 처음부터 도둑질 해왔고. 처음부터 남을 미워하고 왔는데 새삼스럽게 바바리 입고 와서 앉아있는 거예요. 주께서는 패 까라. 38 한 끗 쥐고 있으면 장땡 쥐고 있는 것처럼, 까봐라. 화투패 주께서 다 나눠줬거든요. 까봐라. 끝난 이야기라니까요.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는 것이고, 주께서는 산 자를 부르는 게 아니고 죽은 자를 자신의 죽었다고 살아난 부활의 능력으로써 죽은 자를 살려야 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를 주님께서 죽은 자로 간주해야 되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이래서 너는 죽은 자 맞는다고 우리에게 들이대는 거예요. 성경을 안 보면 산 자에요. 성경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죽은 자에요.

그걸 성막적으로 한다면, 우리는 성막 앞에서 격리 수용된 사람이고, 왜? 하늘나라에 참석 못 하니까. 이것은 피 없이는 못 들어가니까. 성막이 고정되고 불변이라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금새 사랑했다가, 금새 미워했다가, 이것은 자신도 자기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왔다갔다. 모든 인간이 다 치매 걸린 것 같아. 지가 한 소리도 자기가 부정해버리고. 내가? 왜 그랬지? 도대체가. 여기 회사야? 술집이야? 지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사람은 늘 달라집니다. 믿을 걸 믿어야지. “나는 자기를 믿어.” 아이고. “그럼 날 믿어.” 나중에는 날 믿었으니까 그만큼 당해도 싸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로 하여금 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 주께서 성막의 취지로 들어와 버립니다. 우리 안에 불변의 요소, 격리된 피가 있는 성막이 들어온 셈이 돼요. 그러면 우리 껍데기는 맨날 달라져도 속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걸 다양성이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매일 다른 사람이 되는 거예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종잡을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될 때는 변화되는 우리를 더 이상 안 믿게 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 효과입니다.

십자가 효과는, 내가 착한 일했다고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이 제단 쌓은 게 아니고 예수님 때문에 복 받은 거예요. 불변의 요소를 봐야지 최종적인 확정 날짜를 봐야지. 처음에 계약서 썼다고 계약된 게 아니거든요. 마지막 다 이루었다는 걸 검토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주님이여, 나는 맨날 달라집니다. 맨날 종잡을 수 없습니다. 정상이에요. 저는 막 살 수밖에 없네요. 정상입니다.

막 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홍해 갈라진 것보다 더 큰 기적을 받은 사람입니다. 보통 인간들은 자기 따라 가기 때문에 자기가 달라지면, “왜 이러노. 내가 왜 이카노.” 니가 원래 그래. 새삼스럽게 “내가 왜 이러노. 주여, 아침에는 믿었는데 오후에는 안 믿어집니다.” 원래 믿는 너를 믿었으니까 달라지게 마련이에요.

가족을 사랑해도 내 몸이 건강할 때 사랑하지요. 내 몸이 아프면 만사가 귀찮습니다. 귀찮은 정도가 나중에 원수가 돼요. 내가 몸 아픈 것도 저 인간 때문에 아프고. 내가 아픈 것도 너 낳는다고 산후조리 잘못해서 너 때문에 평생을 아프다고 그걸 자기 며느리한테 이야기해서 아들한테 압력을 가하고. 그래놓고 돌아서서 엄마 나한테 그런 험담했잖아. “왜 이러노.” 또 그러고. “엄마, 그것 치매 아니야.” 그러면 “내가 왜 이러나.” 치매 현상의 특징이 있어요. 자기반성이 안 돼요. 고집이 세서 절대로 반성이 안 돼요. 당당해져요. 정말 돌멩이가 된 것 같아. 완악한 마음.

여기서 고정된 것, 불변. 불변인데 이게 48개의 조각목으로 만들어요. 성막을 짓는데 조각목으로 북쪽을 위하여 20장, 남쪽을 위하여 20장, 후미 벽 8장, 총 48장. “너는 조각목으로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어 세우되 …… 남편을 위하여 널판 스물을 만들고 …… 성막 다른 편 곧 그 북편을 위하여도 널판 스물로 하고 …… 성막 뒤 곧 그 서편을 위하여도 널판 여섯을 만들고 성막 뒤 두 모퉁이 편을 위하여는 널판 둘을 만들되 ……”(26:15~30)

어쨌든 간에 불변인데 다양성으로 와요. 이게 조각목. 자기 닉네임, 아이디를 조각목으로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가짜 조각목들이 왜 걸핏하면 조각목이라. 조씨 집안에 왜 그렇게 많은지 몰라. 이름 각목인가? 군에서 많이 맞은 모양이지.

다양성, 여러 가지 다양한 조각난 나무 조각이 하나가 된다는 이것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성전, 교회라는 것을 뭔가 두르는 게 있어요. 그걸 각자 모든 게 다른데도 불구하고 하나로 묶는 끈 같은 게 있어요. 그걸 성령이라 합니다. 성령으로 하나로 묶기 위해서 모든 다양성을 전부다 고유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지 않아야 돼요. 어느 회사 다니느냐, 믿음이 좋으냐, 나쁘냐, 연조가 얼마냐? 완전히 무시하고 성령으로 매거든요.

주님의 영이 임하니까 발이 손더러 쓸데없다고 하면 안 돼요. 모든 인간은 어떤 조건 하에도 동일하기 때문에 그 동일함을 말하기 위해서 동일하지 않은 조건들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삐지고 서로 싸우게 만들어놓고 아서라, 말아라. 그래도 동일하다. 동일하지 않은데 동등하지 않고 평등하지 않아 보이는데 가난한 자도 있고 부자도 있는데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차이가 일소될 정도로 오직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걸 하나로 묶는 겁니다.

그것이 아까 첫째 시간의 이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에요. 나의 변화무쌍함과 그리고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고정된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받는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랑할 수 없어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기 때문에. 도대체 어느 날을 잡아서 사랑해요. 어느 것을 잡아서 이건 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일체 우리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미워하라는 말로 나오는 겁니다.

새순교회 다니다가 이름이 순자라든가 하는 분이 질문을 했지요. 사랑의 침례교회의 설교한 평을 십자가마을에 올려놨습니다. 그 사람 설교가 성경구절을 무지무지 많이 인용해요. 특히 성막, 히브리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단번에 씻어줬다고 해요. 그 뒤에 무슨 말이 나오는지 기다렸어요. 그러니까 그걸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멘붕이에요. 멘붕상태. 여러분, 우리의 죄를 씻어줬으면 예수를 안 믿는 죄도 씻어줘야죠. 내 말 틀렸습니까? 이것 빼놓고 다른 죄, 이러면 죄라고 할 수 없거든요.

인간의 죄가 뭐냐 하면, 자기를 믿는 죄거든요. 선악과 따먹을 때 마귀가 인간에게 요구한 게 뭡니까? 저걸 따먹는 날에는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고 선악과 지식을 안고 있는 누굴 믿어야 돼요? 이미 선악과가 자기 수중에 있잖아요. 그럼 누굴 믿어야 돼요? 선악과 없는 하나님을 믿을까요? 그럼 뭐 때문에 따먹게요? 저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가치가 향상되고 나라는 것이 질적으로 나아진다는 애초부터 믿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그걸 믿는 거예요.

가인이 제사 지낼 때 “내 제사는 헛방이야.” 이렇게 제사 드렸습니까? 그러면 화 낼 이유도 없어요. “하나님이여, 내 제사는 장난치는 거니까 제 제사 안 받아도 돼요.” 이렇게 제사 드렸습니까? 정성과 정성을 다 했습니다. “안 받기만 해봐라.” 그래서 아벨을 죽인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 제사 받아주세요.” 그래서 화가 난 겁니다. “농담했는데. 역시 하나님도 농담하나보지.” 이러면 화 안 나요. 자기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안 받았습니다. 일부러.

아까 했지요. 우리의 주체가 되는 것은 피해간다. 왜? 하늘나라는 그리스도만 주체가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에 불과하거든요. 주께서 하셨습니다가 천국이란 말이죠. 내가 한 것 알아주세요. 이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천국 가도 못 삽니다. 짜증나서 못 삽니다. 천국에는 교대근무 없어요. 찬양도 드리고 쉬고 순번제, 그런 것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진짜 그 노래의 대상을 만나기 싫어서 그걸 대체하기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서 노래 부른다 했어요. 자기 목소리를 들음으로 말미암아 음악을 받아야 될 그분의 목소리를 차단시키기 위해서 자기 노래를 부른다는 거죠. 얼마나 예리합니까. 찬양 보고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아모스에 보면, 그들의 찬양하면서 멸망 받아요. 너희들이 다윗의 비파처럼 노래 부르고 해도 나는 그런 것 안 받는다. 노래하는 본인이 즐거운 거예요. 조수미 노래하면 조수미와 다 즐겁죠. 주님이 즐겁습니까? 주님이 소프라노 못해서 조수미한테 시켰어요?

불변 이야기했지요. 성령께서 다양성을 만들어줄 때는 우리가 볼 때에 “하나님 너무 심합니다. 어떻게 같은 예수님 믿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되고 왜 이렇게 꼴아 박습니까? 너무 불공평합니다. 저 사람은 하는 족족 잘 되고 나는 하는 족족 안 되고. 이래서 어떻게 천국 가겠습니까?” 이런 불평등을 통해서 자기가 했다는 것을 못 나타나도록 조치하시는 겁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할 때 창기가, “주님, 파주에서 미군 상대로 창녀 짓 참 잘 했지요.” 이러면 안 된다니까요. 창녀 짓이 자랑거리가 되서 누구든지 창녀 안 되면 구원 못 받는 식이 돼버려요. 창녀라 할지라도 구원받아요. 막달라 마리라라 할지라도 구원받지 막달라 마리아의 그 짓이 자기를 구원하지는 않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왜 직업을 가지느냐 하면, 왜 목사가 되고 그러느냐 하면, 이게 구원과 관계없음을 내가 하면서 나의 기본적인 주체가 발견되게 하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말은 이미 선과 악을 가진 내가 빼앗긴 하나님보다 더 믿을 만 하고 그걸 신봉하고 싶다는 의도에서 하나님과 결별 상태를 야기한 거예요. 저걸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고 이제는 하나님처럼 된 나 자신만 믿으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오늘도 얘들을 통해서 아직까지 서툰 위선을 갖고 있는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기차에서 얘가 막 뛰어다녀요. 또 전에 같이 하다간 그 부모한테 당하겠고, 참자. 울산 금방인데. 간섭한다고 나이 들은 티낸다는 소리할 거고. 그래서 참았는데 얘들은 지밖에 모릅니다. 얘들한테 효도를 바란다고요? 얘가 무슨 효도를 합니까? 얘들한테는 효도라는 게 없어요.

얘들한테 제일 나쁜 질문은 뭐냐?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해야 돼요. 아빠가 미워? 엄마가 미워? 얘들은 둘 다 미워요. 왜냐하면 얘들은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사랑한 만큼 누가 사랑해주면 아빠가 되던, 엄마가 되던, 옆집 아저씨가 되던 관계없이 그를 사랑할 용의가 돼있습니다. 그런데 자기한테 안 해주면 아빠가 밉고, 엄마가 밉고, 동생이 밉고. 나중에 크면서 그걸 자기의 솔직한 것을 감추는 방법이 발달할 뿐이지 인간 자체가 선해지는 건 전혀 없습니다.

여기 조각목들 한 것은 바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차이들을 오직 그걸 묶어내는 것은 피 밖에 없다. 십자가 피가 결국은 성막을 허름한 넉 장으로 돼있거든요. 넉 장의 앙장. 앙장이란 지붕 역할을 하는 거예요. 아주 초라하고 허름하죠. 초라하고 허름함에도 불구하고 그게 불변이고 또 초라한 그것이 불변이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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