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12:43-51 (유월절의 원칙)
유월절의 원칙2004년 5월 30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12:43-51
12:4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12:44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12:45 거류인과 타국 품군은 먹지 못하리라12: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12:47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찌니라12: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12: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 라 하셨으므로12:50 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대로 행였으며12:51 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사람이란 교회에 나오게 되면 조직 분위기에 편승해 같이 어울려서 재미난 친교에 나서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구원에 핵심 되는 원리와 원칙에서 자연적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왜 설교의 방향을 교회 분위기를 고조하는데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은 걸핏하면 교리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교리보다 사람의 정이 더 그리워하고 원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안일함을 용납하지 않을 태세입니다. 아예 유월절에 모든 백성을 묶어 두려고 할 작정입니다. 마치 거미줄로 곤충을 낚아채는 것처럼 유월절의 원칙 속에 자기 백성을 꽁꽁 묶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교회에 나왔으면 이러한 유월절 원칙에 꽁꽁 묶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 간의 오붓한 정을 찾아 두리번거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유월절의 분위기 속에는 다른 마음 가짐을 요구하십니다. 인간들은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향하는 뭔가 얻고자 하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런데 '묶인다'는 말은 '얻고자' 마음과 정반대 마음입니다. 다 빼앗겨야 합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충이 거미에게 모든 것을 잡아먹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월절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던 자신이 행함으로서 뭔가 챙길 것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복음의 근본을 깨는 겁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백성이 걸려드는 그것으로만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뭔가 얻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같이 '풍덩' 뛰어들겠다는 마음으로만 유월절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믿기'란 취미 생활로 전환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없고 오직 초청 받은 자만이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이죠. 애굽 인들의 장자들은 다 죽었지만 이스라엘 장자들은 살아남았다 라는 것이 세상 적으로 봐서 큰 승리를 얻은 것으로 여기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자식 안 죽었다"가 최종적인 승리 라인이 아닙니다. 죽은 장자나 안 죽은 장자나 유월절의 의미를 모르면 다같이 기왕에 죽은 자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에 들어가는 원칙은 어떤 원칙입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 '할례'라고 되어 있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애굽에서 탈출해 나오는 60만 여명의 무리 속에는 '잡족' 들도 있었다는 점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본토인들만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잡족, 즉 이방인들도 타국인들도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 눈여겨봐야 합니다.
이것은 혈통적인 원리와 다른 원리가 그 유월절 이벤트 속에 들어 있다는 바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히브리인들이라 할지라도 할례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과 상관없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제가 교회에 나와서 교회 분위기 편승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 그런 점을 고려한 것입니다. 원리에 매여야지 사람들의 정이 이끌려서 교회에 다니시면 안됩니다. 다른 교인을 나의 원칙 속으로 끌어당기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이 제시한 유월절 원칙에 매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원칙이란 할례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지 달리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안에는 '내것 의식' 때문에 희생당하심이 들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월절 안에는 '내것 의식'을 정죄하고 그것을 용납 못할 요소로서의 유월절입니다.
할례가 유월절과 연관이 있다는 말은 할례나 유월절이나 같은 취지 하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취지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48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왜 할례 받지 못한 자는 유월절의 어린양의 고기를 먹을 자격도 못되며, 어린양의 피조차도 그들을 지켜내지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유월절 전체 일의 진행이 할례언약의 성취와 관련되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할례란 인간의 신체에 칼을 대는 행위로 보여집니다. 사람 몸에서 피가 나온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즉 그 인간의 자태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죽음을 당할 뿐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살길은 무엇입니까?
그 몸에 언약의 흔적을 지니는 겁니다. 마치 어린양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처럼 그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구원될 자도 피를 흘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할례 받은 자는 어린양의 고난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린양은 할례 받은 자의 표상으로 등장될 것이 뻔합니다. 즉 어린양은 죽음의 심판 주 앞에 어떤 운명을 맞이하느냐 하는 그것이 곧 할례 받은 자는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운명이 되느냐와 같은 이야기가 됩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이미 육신으로 태어난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육신이 벗겨져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따라서 그 사라져버린 육신을 또다시 찾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본능은 그냥 무작정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제 할례 받은 자에게는 그런 인생관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이 죽었다는 흔적을 지니고 있는 자가 자기 본성과 합치되지 않는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육신이 아니라면 어떤 식으로 살게 되는 겁니까? 마치 어린양과 같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자기 몸에 새겨진 언약의 성취를 위해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생명의 원천에 관한 겁니다.
진정한 생명이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나옴을 증거 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골로새서 2:11-15에 보면,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언약이 담겨 있지 아니하면 그 육신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왕 죽어있기에 이런 인간을 살려는 것은 그 인간은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에는 새로운 차원의 할례언약이 대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기해 있는 새 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살게 되는데 그 '다시 산다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병들고 나약해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법 앞에서 저주의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바로 출애굽 당시의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죽음의 사자'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럴 때 유독 이스라엘 사람만 살게 되는데 이는 그들 단독적인 할례로서 살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몸에 있는 할례 언약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주면서 피를 흘린 어린양의 존재 때문에 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마땅히 그 어린양에 동참하는 자는 할례 언약이 된 상태이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로부터 벗어나 있는 자는 늘 그 어린양의 고난 안에 놓이게 됩니다. 유월절의 반복은 곧 어린 양 고난의 되풀이며 이것은 어린양의 취지의 영원함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린양의 취지만큼은 소멸되거나 도중에 죽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 어린양의 고난의 영속성으로만 가능하게끔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이처럼 어린양의 고난을 증거 하는 바로 그 무리들을 두고 말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러분, 목욕탕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몸이 때가 뒤덮여 있음을 인정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고 동시에 목욕탕의 물은 너무나도 깨끗하다는 점을 인정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 대신 죽으시는 어린양은, 곧 '흠 없는' 어린양입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의 몸은 대조적으로 더러운 육신을 갖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의 껍데기는 홀라당 벗겨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육신을 벗은 몸에서는 새로운 규범을 지시할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육신의 껍질을 벗겨져야 하고 새로운 규범을 지켜서 구원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그 상태를 두고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십자가로 완성된 할례 언약을 드러내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원칙에 꽁꽁 묶이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