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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30308a-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30308a-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1.211.100.169)

안양20130308a-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 2장하겠습니다. 2장 1절,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라고 되어 있지요. 1장 마지막에 보면,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예수님과 천사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데, 문제는 예수님은 천사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했지만, 우리는 천사는 안 보이고 예수님 당시에만 그렇고 예수님만 보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천사를 누구와 이야기할 때는 그분이 한 경험을 우리도 같이 경험을 해줘야 저 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말합니다. 천사들은 나와 함께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천사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달되겠습니까?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 주님 눈에는 천사가 보이지만, 예수님이 이런 말 했잖아요. 지금이라도 하늘에서 천사를 보내서 나를 빼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잖아요. 대제사장과 제자들 앞에서 그렇게 했잖아요.

그런데 백날 이야기하면 뭐합니까? 우리 눈에는 그 주님이 보고 있던 천사가 안 보이는데. 말씀이 이해가 되려면 반드시 무슨 과정을 거치는가 하면, 경험되었을 때만 우리가 믿는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한 번 정리로 적어볼게요.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앞에 뭐냐 하면, 경험해서 ‘아!’ 이렇게 되지요. ‘아! 그렇구나.’ 이렇게 된다고요. 이걸 믿는다 하거든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건 믿는 게 아니고 뭐냐 하면, 아는 게 되는 거예요. 경험한 게 되지요. 경험했으니까 이미 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 도마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배도 만져봐라, 하니까 “아~ 주님이십니다.”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주님의 엄청난 말씀이 나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니까 진짜 믿음은 ‘아~ 경험하니까 믿는다.’ 는 것을 능가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했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그 믿는다는 말을 주님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경험해야 믿겠습니다, 하고 나올 때 그게 우리네 상식인데, 주님은 그 상식 속에 그걸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님 눈에만 보이는 그 천사, 그것을 믿음의 내용으로서 말씀을 줘버린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경험을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안 믿는 거죠. 안 믿는 거고 못 믿는 거죠. 이것을 주님께서는 믿음의 바탕으로 보는 겁니다. “주님, 저는 못 믿겠습니다.”를 믿음으로 본다는 거예요. “믿습니다.”하면 인정 안하고 “못 믿겠습니다.”하면 인정해 주는 거예요. 결국 예수님을 우리가 못 믿으므로 “내가 예수님을 못 믿습니다.”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오죽했으면 우리 있는데서 기적을 행하라, 한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니까 소문에 성전도 사흘 만에 짓는다고 하니까, 이 성전 짓는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중요하기 때문에 또 하는 겁니다.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고 했을 때, 인간들은 경험해야 믿잖아요. 현재 눈에 보이는 건축 구조물, 요걸 사흘 만에 짓는다고 믿는 거예요. 사람들은. 성전을 헐라, 사흘 만에 짓겠다. 이게 예수님의 말씀이다 말이지요. 그러면 그 예수님의 말씀을 이것을 순수하게 들어버리면 콘크리트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그 말이에요. 다른 거 섞을 수가 없어요. 다른 거 아무리 꼬아도 섞을 수가 없어요. 딱 그 이야기라니까요.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것은 요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는 겁니다. 딱 요 크기의 바로 이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 말이지요.

100m달리기 할 때, 달리기하는 트랙을 그어 놨어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선수는 100m 선을 그어 놓은 것은 달리기하라고 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치매 걸린 할머니가 말하기는 “오, 길이 좋네. 이건 걸어가라는 모양이다.” 하고 걸어간 거예요. 100m 걸어갔어요. 100m걸어가는데 그게 필요한 이유가 없지요. 그렇잖아요.

성전을 사흘 만에 짓겠다, 이 말은 트랙을 6개에 그어서 나눠 놓은 것은 촌에서 트랙터 몰려고 그어 놓은 거 아니라는 말이죠. 이건 용도가 뭡니까? 선수들 달리는 용도잖아요.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비가 새지 않고 그게 성전이에요. 그래서 그걸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하게 되면, 거기에 다른 트랙이나 다른 의미를 삽입시키면 안돼요. 예수님이라도 삽입시키면 안돼요. 하나님이라도 그 내용에다가 추가적인 내용을 집어넣으면 안돼요. 거기에 들어가 보면 사람하고 소통이 안돼요. 사람들의 오해가 뭐냐, 분명히 하나님께서 예수님께서 메시아 이야기를 했으면 그 이야기는 우리하고 소통해서 우리를 건지려고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인간들의 오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못 건져서 환장하신 분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을 피 흘려 죽이기 위해서 보내신 거예요. 아직도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날 구원하려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를 구원하려고 보냈으니까 날 구원하기 위해서 주님을 보냈다. 이거 우리나라가 아니고 기독교 2000년 역사의 상식입니다. 성전을 지으리라 할 때, 새 하늘 성전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에 보이는 46년 된 성전 그 성전을 말하지, 일체 다른 성전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라, 구원을 얻으리라, 하는 로마서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거 있잖아요. 나는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모든 것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다고 믿는 것이 상식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뭘 문제 삼는가 하면, 이 ‘나를’ 지워버린다 말이지요. 이걸 사람들은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지금 내가 구원 받으려고 애쓰는 것에 구원을 안 시켜줘요. 그러나 예수님이 찾아와서 구원해 버리면 그 나라고 하는 것은 전에 내가 구원받고자 애썼던 그 나가 아니에요. 주께서 새로 만들어낸 ‘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나마 내가 같은 걸로 오해를 하는데 같은 게 아니에요. 그게 차이 나는데 그 중간에 뭐가 있는가 하면, 죽음이란 게 들어가 있어요. 죽음이.

분명히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잖아요. 아브라함은 이삭이 뭐냐, 이삭이 약속한 자녀라고 본 거예요. 그런데 수풀 속에서 뭔가 음~메 하고 양이 울더란 말이지요. 그러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은 누구입니까? 사람이 죽인 이삭이 아니고 수풀 속에 음~메 거리고 있는 그 양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겁니다. 그걸 아브라함한테 하나님이 알려줄 때, 그냥 숲 속에 니 자식이 있다, 이리 하는 게 아니고 이쪽을 죽여가면서 저 쪽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죽어가면서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주께서 나를 죽일 때, 내가 알고 있는 믿음, 내가 알고 있는 소망, 내가 알고 있는 사랑을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못 믿습니다.”하면서 우리는 구원을 받는 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나, 하나님 건져줘야 돼요.” “안 건져주면 나쁜 하나님, 나 욕할 거야.” 이렇게 나오잖아요. 인간은 누구나 그러거든요. 인간은 선악과 따 먹은 자기중심이니까.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라서 좋은 게 아니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 구원 안 해주는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에요. 같이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을 탈락시켜 줄 때 우리는 흡족케 하는 마음으로 영광 돌리는 겁니다. 꼴 보기 싫은 남편도 같이 천당 가 보세요. 천당 가서 또 싸울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제발 떨쳐주시는 하나님, 고마운 하나님. 내가 싫어하는 사람 발길을 차서 불교식으로 하면 마지막 팔을 집고 있는 손이 쭉 미끄러져서 완전히 깨져가지고 탈락해서 고물도 못 줍고.

천국에서는 주께서 발길질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자꾸 해당되지 않은, 선택되지 않은,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않은 사람은, 발길질로 자꾸 차요. 그 역할을 천사들이 해주는 겁니다. 지금 천사이야기인데, 어렵기 때문에 지금 쉬운 것을 통해서 어려운 것을 접근해 가는 겁니다. 지금 천사가 경험 안 되는데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믿어야 되는가, 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은 알지요. 우리는 안 보이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을 우리가 접수하거나 이 말씀에 들어오게 되면 도대체 천사는 우리한테 어떤 식으로 경험되고 우리한테 설득이 되는지를 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리부터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 나 여기 있습니다. 천사 보여주세요.” 이러면 나한테 이미 문제가 있는데 나는 마치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고 문제없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 달라는 식이라 이 말이지요. 누구 거래하려고 흥정할 일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하고 거래하고 상대해서 구원할 거 같으면 처음부터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 안했겠지요. 처음부터 했다는 말은 처음부터 말이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자를 통하게 해서 건져내는 몫은 전부 누구 몫이냐 하면, 예수님 혼자 다 담당할 몫이에요. 그러면 예수님만 고생 되게 하는 거예요. 믿지도 않는 인간 믿게 하려고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 겁니다.

매일 우리는 믿는다, 믿는다, 하는 게 전부 다 내 속에서 나오는 가짜 믿음이기 때문에, 그 믿음 쪼개보면 “경험했으니까 믿지.” 요런 소리 했는데 그건 도마한테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거든요. 보지 않고 믿으라 하는데 우리는 뭐라 합니까? “보지도 않고, 싶게 말해서 경험도 안했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라는 게 우리가 할 소리의 마지막 카드는 그거에요. 우리는 할 수 있는 거 다 내놨어요. 어쨌든 보여주시면 믿겠습니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할 소리에요. 예수님도 십자가 아픈 거 안 보여주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기껏 보여주는 게 ‘패션오브크리스트’영화나 보여주는데 맬깁슨 감독의 그건 일종의 폭력영화거든요.

안 믿어지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해체시킵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에게는 형식이라는 게 있어요. 인간은 의외로 형식을 위해서 목숨도 버리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나는 ~~해 라는 형식을 갖춰나요. 그걸 위해서 목숨까지 아낌없이 소비할 마음자세 돼 있는 게 인간입니다. 그걸 자존심이라 할 수 있겠는데, 쉽게 말해서 나는 이런 존재가 아니라면 차라리 한강물에 내 몸을 던지겠다. 하는 그런 게 있다고요. 그럼 우리가 만나고 소통하려면 뭐부터 깨져야 돼요. “나에게는 적어도 요 정도 될 때 나는 나답습니다.” 하는 그것이 깨어져야 되지요. 그러면 그걸 깨면 되는가, 그걸 깨게 되면 문제가 돼요. 깨게 되면 알맹이가 나오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형식이 깨어지면 얼른 다른 걸로 대용으로 채택하는 인간이 있어요. 그게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죄짓고 난 다음에 뭐냐 하면, 대용품을 가지고 자기를 가린 거예요. 뭔지 가렸다는 것은 사실은 가릴 게 없다는 것을 가리는 거예요. 말도 어렵다. 숨길 것도 없는 게 또 가리는 거예요. 뒤태가 아름다운 여인, 그것은 하나의 가능성은 내비쳤지만 앞태를 보기 전까지는 장담하지 말아야 됩니다. 긴 머리 하고 멋있어 보이고 잘빠졌지만, 뒤 돌아봤을 때는 무슨 장면이 연출될지 그건 모른다 말이지요. 남자일 수도 있어요. 대박 반전이지요. 분명히 긴 머리인데 남자일 수도 있거든요.

숨길 것이 없던 것을 숨김으로서 신비화시키는 겁니다. 유사형식을 제조해 내지요. 이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죄라는 것이 발각되면 그것이 주께서 우리 죄인을 건져낸다는 작업의 개시인데요. 우리는 죄가 발각될까봐 죄 아닌 것으로 가리는 겁니다. 이걸 주님께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평토장한 무덤이라 해요. 또는 이쁘게 페인트칠한 무덤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장례비용이 그렇게 많이 드는 모양이에요. 아마 장례비용이 많이 드는 이유는 유족들이 장례비용에 대해서 별로 아깝지 않는 느낌이 들어요. 왜냐 하면, 못 다한 효도를 마지막에 퍼붓는 식으로 뭔가 양심의 가책이 됐는지, 그 장례식 할 때에 죽었는데 마치 산 사람처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이런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았다하는 버릇은 이미 평소에 살아갈 때부터 해오던 버릇이에요. 해오던 버릇이다 말이지요.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신을 대용으로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옷을 가지고 해 입었지요. 그런데 옷을 해 입혔는데, 현대에 와서는 어디까지 됐느냐 하면, 레위기 19장에 보면 애굽 사람들의 풍습에 이런 것이 있어요. 문신을 했던 모양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뭐라 하는가 하면, 문신하지 마! 그런데 문신이라는 게 뭐냐 하면, 옷을 안 입고 있어도 피부가 옷을 대용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면 뭐가 없어져요? 나체라는 게 없어져요. 옷을 입음으로서 뭐가 가린 게 있는데 피부에다 직접 옷처럼 문신을 해놓게 되면 남는 게 뭐냐 하면, 가리개만 남아요. 자기 몸 자체가 가리개가 돼요. 그러니까 가리개 배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담을 옷을 할 때는 아담입고, 그 다음에 옷 입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옷을 갈아 입힘으로서 가죽옷으로 치마를 엮어줬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옷이라는 것이 그 안에 옷 입을 그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옷은 그 자체가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이 옷의 취지에 맞는 인간으로 내가 만들겠다는 작업에 들어가는데, 그냥 문신을 해 버리면 ‘하나님이 나한테 굳이 작업할 필요 없어.’ 이렇게 된다 말이지요.

히브리서 2장에서 천사이야기하면서 내가 이야기하는 멘트 시작이 이겁니다. 주님 쪽에서 작업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모든 구원은 우리하고 협상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내뱉는 것은 전부 다 어설프기 짝이 없어요. 그런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주님께서. 작업에 나설 때, 그 기준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한 천사, 또는 예수님과 더불어함께 있는 성령, 여기가 출발지가 돼가지고 우리에게 작업을 개시하지요.

얼마 전에 죽었던 설교 안 들어봤습니다만, 노아이야기 하던데 그 사람이 설교하면서 나를 의식해서 설교를 했던 모양이에요. 누가 듣고 화가 나고 했는데, 몇일 전에 죽었던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막 살지를 맙시다. 이렇게 나왔던 모양입니다. 날 의식해서 했겠지요. 그래서 제가 의식해서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린 거예요. 평생 막 살아 놓고 막 살지 말라는 게 뭔 뜻이냐? 결국 이것은 뭐냐, 자기 몸에 문신 새기는 거예요. 나는 예수 믿는다는 문신, 나는 믿음 있다는 문신, 나는 소망 있다는 문신, 나는 사랑이 있다는 문신, 이게 무슨 뜻입니까? “건드리지 마, 나는 이렇게 예수 잘 믿는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주께서 입혀주는 옷이 제는 필요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보만 흘려주면 우리는 정보를 캐취해 가지고 이제는 내가 내 있는 그 자체로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외부에서 오는 거 성령이지요. 성령이 오지 아니하니까 마지막 카드가 그거에요. 자기 몸에다가 성령으로 쓴 성경 66권을 다 문신으로 완전히 미싱으로 말씀을 수를 놓는 거와 똑같은 짓이에요.

내가 잘 믿는 거 보라, 이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구원은 간단해요. “보자, 고추 보자.” 해서 치마만 벗기면 돼요. “니 부끄러운 게 뭐지?” “이게 다야?” 내가 가려줄 때 너와 나는 내가 가려준 가리개로 말미암아 소통이 되고 연락이 되는 겁니다. 결합이 되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6장에서 그리스도가 없으면 세대라는 게 확립이 안돼요. 그리스도가 본드에요. 본드를 발라서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게 하고 다시 살 때, 안전유리 하는 게 있잖아요. 안전유리 다른 게 아닙니다. 유리창 두 개 해 놓고 가운데에 고무합성 물질로 해서 본드로 붙여놔서 파편이 깨도 안 떨어지도록 붙어있는 거거든요. 그것처럼 이제는 저주가 와도 주와 함께 받는 저주기 때문에 복이 되고, 주님께서 지옥에 갔다가 음부에 갔다가 천국에 가기 때문에 주님과 안 떨어지고 같이 붙어있으면 썀쌍둥이처럼 머리가 붙은 쌍둥이처럼, 같이 하기 때문에 예수님 덕분에 예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는 주님 덕분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따로 떨어져서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 무실화 시켜버리면 이건 뭐예요? 이건 옷을 안 입고 내가 내 옷을 대용하겠다는 행세하겠다는 이것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니 제 말은 성령이 와야 체험화 된다는 거예요. 아까 분명히 했지요. 천사를 안 봤는데 어떻게 체험화 됩니까? 우리가 예수님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체험화 됩니까? 사도바울은 같이 십자가는 안 졌잖아요. 십자가 진적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성령이 왔잖아요. 성령이 왔다는 것은 안전유리창처럼 그 안에 본드가 붙어있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보이지 않고 뭐가 돼요? 보지 않고 믿어지는 기적이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겁니다.

아, 이런 내용이 참 어려운데요. 이왕 어려운 거 해봅시다. 천사는 시간이 없습니다. 천사는 시간대가 없거든요. 그러면 천사를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결국은 세월이 가고 늙어가지만 시간이 우리한테 삭제가 되면서, 묵시적 존재가 되면서 말씀 안에서는 우리는 반복해서 계속해서 천사를 느끼고 성령을 느끼는 삶이 되는 겁니다. 나이가 흘러가고 바깥 세월이 흘러가고 주름이 져있어도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시간에 무관한 사람이 돼 버린다 이 말입니다.

시간에 무관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그 자리에서 깜빡거리는 기표다. 이 말이 어려우니까 언어다, 이리 보면 돼요. 기표니까 비슷한 말이 해수욕장에 보면 ‘들어가지 마세요.’라고 표시했지요. 떠있는 표시. 부표. 뜨는 표시인데 파도에 삼켜서 없었는데 파도가 물러가면 또 그 자리에서 스치로폼이 왔다 갔다 하지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여기 있다가 해외 놀러가도 맨 그 자리에서 뛰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걸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시고요, 묵시 안에 있는 존재가 그렇다고 보시면 돼요.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 써놓은 거 보셨지요. ‘우는 자가 행복하다.’라는 글, 요한계시록 책 내면서 머리말로 쓴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울고 계속 또 우는 게 성도가 세상사는 방법입니다. 계속 울고 우는 게. 울면 울수록 뭐가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이 가신 발자국이 보이고 흔적이 보이기 때문에. 우는 가운데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거예요. 안 울면 그 기쁨이 없는데. 운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 너무 너무 실망 많이 했다는 뜻이거든요.

주께서 방법이 그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울게 하는 겁니다. ‘울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울리는 거예요. 울리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미련을 두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요번에 WBC 떨어져서 속으로 울었지요? 사람이 이렇게 절망을 느끼고 울 일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가신 핏자국이 비로소 그 때만 잠시 보입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기뻐하고자 하는 것은 시간대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에 기다렸다가 복권 사는 이유가 뭡니까? 시간을 버는 거예요. 1주일만큼의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겁니다. 그게 하나의 삶의 동기부여가 되는 거죠. ‘지금은 이렇게 직장에서 욕 얻어먹고 힘들지만 요번 토요일에 보자, 대박 난다.’ 그걸 돈 주고 사는 거예요. 그걸 돈 주고 사다보니까 그 기쁨이란 것은 누구한테 속했느냐 하면, 내가 보고 믿는 곳에 포함된 기쁨이에요. 보고서 기뻐하는 그 기쁨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거기에다가 안 보여주는 성령, 안 보여주는 예수님, 안 보여주는 천사를 이야기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씀을 들어도 말씀에 합체가 안 되지요. 왜? 우리는 항상 기쁨에 재료를 보는데서 찾고 내가 기다리는데서 찾기 때문에 그래요. 로또를 저는 사본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복권도 사본 적이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왜? 그걸 산다는 것은 나의 시선이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느낌이 들어서 그래요. 그런 이야기해서 또 시험 드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네. “취미입니다.” “재미로 삽니다.” “그냥 의미 없이 사는 거지 의미 안 둡니다.” 한 둘이 아닐 건데, 내가 또 이런 소리해서 신앙 측정을 그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사시는 것도 주의 뜻이고 복권해서 당첨되면 십일조 내고 십자가마을 헌금할 수도 있는 문제이고. 당첨돼서 십자가마을에 헌금 10억 들어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십자가마을은 망한 거지요. 주님이 세운 것이 아니고 인간의 야망이 세운 단체가 되겠지요.

부표의 특징이 뭐냐 하면, 파도치면 ‘없다’ 잖아요. 그런데 파도 지나가면 ‘있다’지요. 아까 그래서 뭐냐 하면 깜빡, 깜빡 했지요. 전에 김 수희의 남행열차 중에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기억 속에, 가사 나오잖아요. 없네, 있네. 없네, 있네.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흔적’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이걸 흔적이라 하지 않고 ‘그림자’라고 합니다. 또는 ‘표상’이라 합니다. 오늘 강의 참 어렵지요?

지금 강의가 계속 어디서 맴도는가 하면, 지금 보이지 않는 천사이야기 했잖아요. 보이지 않는데 우리가 보고 믿겠다고 하면 우리 믿음 자체를 주께서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믿어져야 돼요. 보이지 않고 믿어지려면 작업을 내 쪽에서 시작하면 안 되고 외부에서 해야 돼요. 외부에서 하는데 외부에서 들어오게 되면, 왜 우리가 보고 믿는 것은 안 되는가를 알아야 돼요. 우리가 무엇을 보고 믿겠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시간대에 묵시가 아니고 역사 시간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는다, 기뻐한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내가 저 만치 기대한 거예요.

아까 성전 이야기했지만, 성전을 46년 동안 지었지만 못 지었잖아요. 그럼 46년 짓는다는 말은 에이, 그만 짓자가 아니라 지금 지어진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계속 짓게 된다, 말이지요. 예수님은 그 46년과 같은 시간을 해버리는 거예요. 뭐냐 하면, 사흘 만에. 46년간과 사흘 이란 말, 주께서 사흘 이란 말을 쓸 때는 사람들은 오해한 거예요. 지금 이 건물을 사흘 만에 짓겠다고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46년 시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아까 윤 집사님 오시면서 이런 이야기했잖아요. 큰 귀신이 있고 작은 귀신이 있고. 분량이 있다고. 물리적 개념이거든요. 크고 작다는 것은 물리적 개념 아닙니까? 천사는 형식이 없잖아요. 형식이 없는 데는 물리적 개념 쓰면 안돼요. 물리적 개념이라 하는 것은 뭐냐, 크기, 질량, 부피 이런 것은 차원개념이잖아요. 눈에 보이는 개념이란 말이지요.

과학이라는 것은 관찰입니다. 관찰해서 동일한 것을 끄집어낼 때, 성공했다고 보는 거예요. 모든 변화는 수학의 삼각함수를 집어넣어서 모든 변화를 파동화 시키고 삼각 함수화 시켜 버리면 거기서 미분방정식되고 그런 방정식으로 화시킬 수가 있어요.

수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개념화시켜서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원칙이 수학입니다. 그래서 수학은 어디에 있느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중간개념에 있다고 본 거예요. 관념의 세계와 이걸 철학에서는 형이상학이라 해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형이하학 물리적 세계의 중간에 수학이 있어가지고 수학을 매개로 해서 설명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요새 애들이 “엄마, 이 골치 아픈 수학 왜 해야 되는데?” 합니다. 그 이야기 좀 더 하지요. 수학을 더 해보겠습니다. 사과가 3개 있잖아요. 그걸 뭐라 하냐 하면, ‘삼’이라 하는 거예요. 전에 수련회 때 했는데. 다시 해보겠습니다. 전 세계에 만약에 사과가 3개 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전 세계에 달랑 3개. 3개 밖에 없다면. 사과가 여기 하나가 있다면 이것은 사과를 1로 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⅓로 봐야 된다는 거예요. 3은 무엇을 뜻합니까? 전 세계에 3개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1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사과를 뭐로 봅니까? ⅓로 안보고 뭐로 봅니까? 1로 보지요. 그러면 사과가 몇 개란 말입니까? 무한대지요. 그런데 따져 보세요. ⅟∞은 수학에서 뭐가 되는가 하면, 0이 되잖아요. 1/7억6천해보세요. 작아도 너무 작지요. 이건 그냥 0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1+1=2가 아니고 뭐가 돼요? 0+0=0이 되는 것처럼, 1+1해도 0이 돼요. 그래서 칸트라는 수학자가 무한대를 발견하고 난 뒤에는 이걸 발설해서는 안 되는 비밀로 여긴 겁니다. 무한을. 왜냐? 무한이 발견되니까 인간의 수학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게 돼요. 의미 없는 게.

그야말로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소고기 사먹는 식이에요. “그래, 살면 뭐하노?” 살아도 안개니까. 잠깐 깜빡이니까. 잠깐 살았잖아요. 살았다가 죽고 난 뒤에는 한 일주일 동안 기억하지요. 나중 되면 누구 유명한 목사 죽어도 한 6개월 지나면 다 잊어버리지요. 그러면 나중에 “다하면 뭐하노?” “나중에 기분 좋다고 소고기나 사먹겠지.” 그런데 그 소고기 사먹는 자기가 죽으면 뭐해요? 다른 사람이 소고기 사먹겠지요. 또.

그렇다면 수학이 무한을 발견했는데 수학을 발견한 무한이 거꾸로 수학을 무의미한 걸로 했을 때, 무한을 발견한 이 모든 것도 의미 있다? 의미 없다? 의미 없다고 되니까 결국은 발설하지 말자. 왜? 내가 수학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아는 게 아니고 수학을 하기 때문에. 수학자기 때문에 수학을 손해되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결국 남는 것은 뭡니까? 무엇이 진리냐? 내가 진리요. 그걸 감추는 거예요. 그걸 현대에서는 들추어내지요.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주체는 분명히 없는데, 있는척한다 해서 주체에다가 이렇게 빗금 쳐 버려요. “에라, 죽어라, 이 주체야!” 주체가 있는 이유는 죽어야 될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주체가 있다는 거예요. 프로이드 이후에 라캉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사람은 왜 사느냐, 죽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이거는 하이데거도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사는 이유는 죽음을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죽음을 비현실이라고 내몰지 말고 죽음을 내 안에 담아버리자. 이걸 가지고 실존주의 철학이라 합니다. 실존주의.

실존주의 철학 이게 뭐냐 하면, 옛날에 중세 때, 신학자들이 당나귀 이빨이 몇 개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논쟁을 했어요. 요즘도 그렇지요. 666이 뭐냐, 똑같은 소리에요. 부산강의에서 했잖아요. 촛대의 가지 수가 왜 7개냐, 왜 6개가 아니고 7개냐, 왜 5개가 아니고 8개냐, 그러니 뭐라고 정답을 내렸습니까? 그런 걸 따지는 인간이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지요. 그럴 때, 어떤 중세 신학자가 당나귀 이빨이 몇 개 되어야 영광이 되느냐, 하여튼 하나님의 영광 밖에 모르는 시대이기 때문에 충성심이 과해서. 그 사람들 비웃지 마세요.

“하나님 아버지, 제가 커트해야 영광이 됩니까? 파마해야 영광입니까?“ 그 아줌마와 똑같아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우리 애가 법대를 가겠습니까? 의대를 가겠습니까?“ 와 똑같은 거예요. 아까 했지요. 그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내 즐거운 것을 찾고자 하는 내 쪽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기도 제목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떤 학자가 이리 했어요. 그러지 말고 직접 세어보자고 했거든요. 그게 정답인 거예요. 그게 실존주의 철학이에요. 실존주의 철학 이전에 무슨 철학인가 하면, 존재고 이 존재는 뭐냐, 신이 주신 거예요. 존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 있게 했잖아요. 그러면 이 존재는 그냥 있으면 안 되고, 누굴 기쁘게 해야 된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될 존재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렇게 연구한 거예요. 저 당나귀가 영광 돌리려하면 이빨이 몇 개여야 하는가, 이리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그러지 말고 직접 세면 될 건데. 세어 보면 될 것 아닙니까? 있는 그 자체가 영광이잖아요.

잠언서에 나오잖아요. 가난한 자는 가난해야 영광이고, 부자는 부자 해야 영광이라고. 그런데 그 말을 이렇게 하면 안돼요. 나는 부자니까 영광 돌린다는 소리를 본인이 하면 안돼요.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영광입니다. 이런 소리를 본인이 하면 안 돼요. 잠언서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다시 할게요. 어려워서 내가 할 말이 없는데. 잠언서에 가난한 자와 부자를 지은 자는 하나님이지요. 그걸 나에게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니까요. 왜? 나는 보는 것대로 믿는 오류를 발생시키는 사람이거든요.

하나님의 율법이라 하는 것은 왜 법을 지키라고 하느냐 하면, 법을 지켜야 우리가 위반자인 것을 알거든요.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어길 때, 비로소 법의 가치가 드러나요. 벌 받기 위해서 법을 줬기 때문에 우리는 법 앞에서 항상 못 지킨다가 돼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못 지킨다가 돼 있을 경우에 문제가 뭐냐 하면, 그러면 이것이 못 지킨다면 그럼 온전하게 지킨 게 뭐냐, 문제가 등장하잖아요. 그걸 모른다니까요. 인간은.

그것은 다른 법을 대용해서 지켜봐야 알아요. 그러니까 이쪽 법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법을 또 동원시키고 다른 원칙과 규칙을 또 동원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계속해서 제자리 뛰기이고 계속해서 그 법에다가 또 그 법이 왜 위반이냐, 모르는 그 자체가 죄인데, 그 죄를 죄답게 그 주께서 원하는 죄가 내가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를 경험하기 위해서 또 다른 법을 동원하다 보니까 또 추가적으로 죄를 더 짓는 거예요.

따라서 죄인이면서도 뭘 모르느냐 하면, 왜 죄인인지를 한없이 모르기 때문에 계속 알아가야 될 그러한 운명을 짓는 자가 인간입니다. 오늘 강의 서너 번 듣던지 해야 돼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말려든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에게 말려든 거예요. 예수님이 왜 죽어야 되는가를 그 사실을 위해서 계속 노리개 감으로 말려든 겁니다.

에버랜드에 조각 레고 있잖아요. 만약에 내가 하나의 조각 레고라면, 신데렐라 사는 공주가 사는 멋진 궁전에 들어가 있는데 아니 그걸 빼가지고 배를 만드는데 해적대의 배를 만드는데 그 부속품으로 들어갈 때, 나는 기분 나쁘다 말이지요. 나는 분명히 공주방에 있던 비데에 박혀 있던 레고인데, 어떻게 해서 내가 애꾸눈 재크의 침대 레고냐 말이지요. “바꿔 줘! 씨~ 바꿔 줘!” 우리는 레고를 만든 아이한테 말려든 거죠. 색깔이 같아서 바꿨다. 할 말이 없지요.

가난한 자나 부자나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영광이다. 이것은 성립이 안 된다니까요. 이건 성립이 안돼요. 말씀과 우리 사이는 갭이 있어 가지고 창세기3장 24절에 이미 두루 도는 화염검이 있어 못 가게 했잖아요. 그러니까 아무리 우리가 법을 봐도 그 법의 밑바닥을 볼 뿐이지 안 보여요. 심지어 모세 같은 경우도 답답하지요. 아예 법을 손에 들고 왔어요. 얼마나 확실합니까? 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확실하지 않은 거예요. 분명히 보기 때문에 그걸 믿음이라고 볼 수 없는 거예요. 보니까 믿어지고 믿으니까 그게 믿음이 아니고 어쩌란 말입니까? 보이는데.

예수님을 밀고 당기고 예수님 가니까 밀고 당기고 만지고 주물고 난리 했잖아요. 전혀 안 믿은 거예요. 왜? 만지기 때문에. 보고 있기 때문에. 귀신 쫒아내는 것을 봤고, 물 위를 걷는 것을 봤기 때문에 예수님이 안 믿어지는 거예요. 왜? 뭐가 문제입니까? 자기한테 문제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와서 우리를 부셔버려야 돼요. 우리가 그냥 있어 버리면 이 몸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못가는 몸이에요. 지옥 갈 몸을 천국 갈 몸으로 빼돌려 주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우리가 안다는 것, 믿는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모조리 다 부서져야 돼요. 사랑은 왠 개 코, 누굴 사랑하는데요.

예수님은 천사들한테 시중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도한테도 와서 시중들어요. 성도가 좋아서 성도 말 들으라고 천사가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돌보라고 시킨 거예요. 어제 홍선교사님과 통화하면서 그 선교사님이 아마존 하잖아요. 지금 교회도 몇 군데 되고, 자기는 말기 암 퍼져가지고 지금 언제 돌아가시는지 모르는데 미국에 있는 어떤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 여전도사님이 있어요. 여전도사님을 생활비나 여비까지 다 준비하면서 지금의 선교사님의 남편분도 선교사입니다. 그 분이 지금 아마존에서 왔으니까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으니까 당신이 교회 하지 말고 한 달동안 허선교사님 섬기라고 오늘 미국에서 온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같이 만나기로 했는데.

이거 보세요. 혼자서 약도 못 챙기고 그 정도로, 강단에 서면 외치지만, 다른 것은 못 챙기는 정도가 아니고 아프지요. 암이 주도권을 쥐니까 아프잖아요. 그리고 혼미한 상태지요. 아무것도 못하니까. 애들도 다 거기에 매달려 있으니까. 그러니 세상일이 그래요. 처음에는 자기가 일을 하는데 나중에는 일이 자기를 시켜요. 원래 술꾼이 처음에는 술을 먹잖아요. 나중에는 술이 자기를 삼킨다고 하잖아요. 술도 마찬가지, 도박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일을 한다는 것은, 사업한다는 것은, 목회한다는 것은, 일종의 도박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일에 치이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의 증거는 일로 증거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 된 것을 통해서만 증거 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일이 없어서 일 달라고 하지 마세요. 일주면 또 일에 치여서 또 불편하고. 일 주실 때, 살살 주세요. 돈은 되면서 살살 주세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지금 주님과 천사는 바쁘게 돌아갑니다. 그 바쁘게 돌아가는 것. 예를 들면, 옛날 방앗간, 정미소, 어릴 때 유일한 가까운 공장 아닙니까? 그대 애들한테 공포를 느껴요. 왜? 기계는 너무 시끄럽고 톱니바퀴에 빨려 들어가면 그 빨리 도는 톱니바퀴에 우리를 집어넣어 버려요. 우리는 지금 신앙생활이 한가하고 있는데 그 순간에도 주께서는 천사한테 바쁘게 돌아가는 거예요. 우리를 집어넣어서 뭐하느냐 하면, 파쇄해요. 우리 뜻대로 안돼요. 만사가. 이거 고함질러야 돼요. 이거 음성 나가도 할 수 없어요. 모든 만사가 우리 뜻대로 안돼야 돼요. 뜻대로 안되고 그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은 저희들이 하는 짓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 다음 구절을 봅시다. 여기에 2절에 보면,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공변된 보응이란 단어가 어렵지요.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쉽게 하면 이런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만약에 방앗간을 운영한다든지, 아니면 사업체 한다든지, 아니면 부동산 임대를 할 때는, 그걸 하는 게 아니에요. 죄와 공변된 쉽게 말하면 공인된 하늘나라에서 천사들과 주님이 인정한 그 의로움, 그 의로움을 공변된 공인된 거기서 그들이 1절에 보면, 혹 우리가 간절히 들은 것을, 복음을 떠내려갈까, 떠내려간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단어가 재미있는 단어에요.

반지가 손가락에서 미끄러지는, 빠지는 거예요. 분명히 복음의 가락지를 꼈는데 빨래하다 보니까 어느새 빠져버렸어요. 이처럼 반지라 하는 것은 뭐냐,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반지거든요. 이 반지를 차면 수갑이고, 쇠고랑이다 말이지요. 쉽게 말하면 전자발지. 우리가 전자발지 때문에 구원받은 거예요. 십자가 전자발지인데,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죽었잖아요. 그게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를 한다는 것은 우리는 전자발지를 차고 있는 죄인이라는 뜻인데, 어느새 보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에 하다 보니까 거기에 매진하다 보니까 이 주께서 규정하는 죄에서 우리가 멀어진 거예요. 반지가 손가락에서 빠지는 것처럼, 미끄덩하고 빠지는 것처럼, 이게 빠져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하는 일상이 내 죄와 무관한 일에 나의 즐거움과 내 희망사항에 몰입하고 있는 그걸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때 우리는 천사가 안 느껴지고 성령이 안 느껴지고 주님도 안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일이 우리를 뭐한다? 파쇄하고 우리를 개입한다는 말은 다시 우리로 하여금 전자발지 십자가를 복음을 끼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역사하는 것. 그 일을 분주하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안양20130308a-히2장1절(낙하산 구원) - 이 근호 목사.hwp (101.5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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