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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b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레위기

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b -이 근호 목사

제 15강b

첫째 시간 잠시 요약해 보면 예수님이 주체 자거든요. 예수님이 주체 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체 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이 주어지는데 인간이 언약을 곱게 받는 것이 아니고 지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상태에서 이미 주체가 나름대로 정립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을 주의 사람 만들려면 자동적으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충돌이 일어나는데 예를 들면 창세기 4장에서 가인에게 동생이 욕을 안 했거든요. ‘얼레리 꼴레리 형 제사는 안 받고.’ 이렇게 놀린 게 아니고 그냥 동생은 자기 제사 드린 것뿐인데 형이 때려 죽였을 경우에는 이건 동생이 형을 치는 게 아니고, 눈 뭉쳐서 한번 때리니까 형이 두 번 맞는 게 아니고, 동생을 죽이게 만드는 그 주체가 따로 있었던 거예요. 그걸 창세기 4장에서는 뭐라 하느냐 하면 가인한테는 강아지처럼 죄가 엎드러져 있다고 돼 있습니다. ‘덮친다. 덮친다. 덮친다. 덮친다. 덮쳤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가인도 지 맘대로 못해요. 죄가 시키는 대로, 그걸 가인이 했다고 보지 말고 가인을 덮친 죄가 아벨을 죽인 거니까 결국 하나님은 아벨을 죽게 만들어서 가인 배후에 가인으로 하여금 주체 자로 만든 배후에 숨어있는 실체를 장차 올 예수님의 죽으심과 겨냥해서 비교한 겁니다. 그냥 아벨만 그만 살다 간 거예요. 그 와중에서 아벨만 그냥 낀 거예요. 하지만 죽는다는 것은 그냥 쉼이고 영생 아닙니까? 이 땅에서 별로 고생도 안 하고 죽었어요. 우리 보기에는 너무 얄미워! 회사 부도도 한번 안당하고 그냥 가버렸어요. 북한이 핵 있는 것도 모르고 그냥 가버렸어요. 아이 참.ㅎ

그러니 이 둘째 시간에 해야 될 게 뭐냐 하면 그 하나님의 주체되기 위해서는 껄끄럽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껄끄러운데 우리의 주체라는 것이 일단 세상이 나를 이렇게 불러주면 우리는 그걸 간직하잖아요. 그러면 그게 뭐다? 죄다 했죠. 왜,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다는 말은 우리가 죄인이니까. 그냥 죄라 하지 말고 이미 죄에 물든 주체라고 봅시다. 이 죄 있는 주체가 이 주체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서 내 주체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은 적으로 간주하겠죠. 그러니까 우리 속에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빡세게 기도하고 기도 빨이 어떠니 저떠니 하면서 착하면 복주고 나쁜 짓하면 저주 받는다는 이런 식의 그것을 우리는 때려죽여도 이걸 양보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그 양보 못한다고 해도 ‘아유, 너는 구원하고 싶은데, 나는 니가 너무 고집부리니까 포기할게.’ 이런 분은 아니시거든요. 그러니까 호명이라 하는 것은 그 호명된 이름은 그 사람의 지가 생각한 주체와는 안 맞는 거지만 기어이 호명한 주체 자의 승리로 끝나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반드시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못 이긴다는 것을 계속 보여주면서 ‘그러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봅시다. 214페이지 밑에서 둘째 줄 『구약 성경에서 이런 기존 주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말씀 주체 자로서의 이전 과정을, ‘이름’을 통해서 밝힌다.』이렇게 돼 있죠. 그 이름을 구약 성경에서는 무슨 이름이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라 했죠. 아, 난해합니다. 하나님의 이름! 우리가 생각한 이름은 뭐냐 하면 가슴에 붙인 이름이잖아요. 현철이 이야기했죠? 이름을 붙여 누구 가슴에? 내 가슴에, 확실한 도장을 찍고, 그런 노래 있거든요. 이름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붙이고 다니는 게 이름 이예요. 명찰처럼 이름을 붙이고 다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라고요? 그러면 하나님이 가슴팍이 있다는 말이고, 거기에 이름이 적혔다는 말이고, 나를 부를 때는 요 이름을 부르면 내가 쪼르륵 쫓아갈게. 라는 식이 되겠죠.

그런데 정작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면서 정작 어떤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확실한 도장을 찍고, 그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고, 기존에 있던 이스라엘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꾸기 위한 환경조성이 벌어지게 하는 어떤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힘, 그러니까 그 이름은 글자보고 부르는 게 아니고 달라진 변화 보고 순간적으로 ‘이거 주의 이름이 했죠?’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일부러 내 뜻 안 되게 했죠?’ 라고 할 때 그 이름 이예요.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의 이름이 뭐다? 예수? 여호와? 이렇게 부르면 그건 엉터리예요. 왜냐 하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지저스(jesus)가 되기 때문에.

그러면 모든 만국의 주의 이름은 뭐냐 하면 ‘주여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옵소서.’ 요게 주의 이름이 되는 거예요.

자, 서울 용산에 개발한다 해서 땅 좀 사놓고 아파트 사고 개발되면 땅 값 오를 거니까 은행에서 3억 5천정도 융자내서 샀다. 그런데 개발이 파투났죠? 안 됐잖아요. 그럼 은행 빚 이자는 나오죠. 이젠 망했잖아요. 그때 뭐합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거 배후에서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생돈 퇴직금 받은 것도 다 날렸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이거 누가 일으켰어요? 이거 주님이 이름이 했죠. 라고 할 때 ‘주님 이름이 하셨죠?’ 라고 할 때 그 발설하는 그 인간이 주의 이름과 함께 있는 자예요.

제가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낮에는 이사하고 밤에는 포로 잡혀 간다고. 분명히 은혜의 땅에서 벗어나서 저주의 땅으로 도망치면서 마치 룻 같아요. 룻이 가뭄 들었다고 어디를 갑니까? 은혜의 땅, 약속의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요? 모압 땅으로 가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어서 못사니까 어디로 갑니까? 몰래 은혜의 땅에서 저주의 땅으로 이사 가는데 그것을 주께서 뭐로 바꿉니까? 포로 잡혀 가는 걸로 바꾼 그것이 기존에 니가 몰랐던 주의 이름이 벌리신 일입니다.

사실은 도망가든 이사 가든 다를 게 없어요. 왜냐 처참하게 망가지니까. 처참하게 망가져도 생명을 주기 위한 망가짐과 진짜 망가져서 망가짐과 그건 주의 이름에 의해서 결정될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폼 낸다고 영생 가고 폼 낸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의미를 우리는 새롭게 부여받게 돼 있어요. ‘주께서 하셨죠? 내 인생 내가 아니라고. 주께서 일부러 돈 3억 5천 홀랑 다 날렸죠?’ 서민에게 3억 5천 그거 큰돈입니다. 용산 이촌동 그 사람 피해 본 게 3억 5천이예요. 융자 낸 것 같아요. 3억 5천을. 융자를 왜 냈느냐, 은행에서 그만한 가치를 보장해 주니까 융자 낸 거예요. 왜 이런 횡재인가 했죠. 왜, 융자 내서 그거 가지고 다른 집 사서 또 전세 받으면 월세를 100만원 받을 수 있으니까. 융자 내주겠다는데 그거 놀리면 안 되죠. 개발할 동안에 월세 받으면 되니까. 그런 머리는 육적인 모든 인간들은 공통적으로 돌아가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복음은 육적인 인간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해야 된다니까요. ‘여러분들이 복 받아서 3억 5천 융자 받았으니까 이건 복입니다.’ 이런 소리 하니까 다 알아듣죠. ‘그런데 여러분, 그거 다 망하게 하십니다.’ 하면 그런 것은 아무도 듣고 싶지 않죠. 그래서 주의 이름은 항상 평상시에 몸 건강할 때 잘 돌아갈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든지 잘 먹고 잘 살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바알의 이름을 불러요. 바알은 곡식의 신입니다. 바알과 모토 해서 바알이 이기니 모토가 이기니 하다가 다시 바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모토를 경유해서 부활의 신이니… 이런 우가리트 신화에 보면 나오는데 바알, 엘이 나와요. 뭐의 아들이 뭐고, 나오는데 지역마다 다르니까 폭풍의 신이라고 하는데도 있고 또 같은 이름 바알을 쓰면서도 폭풍의 신이라 하는데도 있고 곡물의 신이라 하는데, 바알을 섬길 수밖에 없는 이것은 용산 개발된다는 소식은 바알이 전해준 거예요. 왜, 납득이 되니까. 이제 아시겠어요? 사람이 납득이 되니까 우리 편이고 납득이 안 되면 적이 되는 거예요. 선지자들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언약을 지키세요. 여러분이 주의 이름으로 왔지, 여러분 이름이 잘 되기 위해서 온 게 아니다.‘라고 그렇게 외쳤고 ’아무리 여러분들이 잘 나가도 주의 법을 어기면 이건 저주입니다. 이방 나라와 같습니다.‘라고 아무리 해도 안 듣습니다. 들을 인간이 들어야지, 사람이 몸 따시고 몸 편하면 최고예요. 이빨 아파 보세요. 지 이빨 아픈데 그 주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 편하게 해달라는 이름의 주의 이름이라니까요.

그래서 치과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고. 아플 때는 그렇게 치료 받기를 기대하지만 낫고 난 뒤에는 두 번 다시 오는가 봐라. 왜, 건강하니까 더 이상 주의 이름이 필요 있다? 없다? 없어요. 필요하도록 내게 있는 이것을 키워주는, 내 이름을 키워주는 주의 이름인데 이건 인간의 언약의 주체가 부합이 안 되게 돼 있어요. 왜 언약의 실체가 십자가기 때문에. 마태복음 16장 23절에 보면 “자기를 부인하라” 하는 게 있거든요. 십자가 내용 안에 반드시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자기가 구원코자 한다면 그 다음에 잃어버릴 것이요, 지금 한국의 교인들 전부 다 잃어버렸어요. 왜냐, 구원받으려고 교회 오니까. “자기를 구원코자 하면 잃어버릴 것이요, 나(예수)를 위하여 자기를 잃으면 얻으리라“ 돼 있거든요.

우리는 주님을 이용 목적으로 내가 얻고자 이용 목적이지, ‘내 것을 뺏어주세요.’라고 예수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다 빼앗기고 자시고 할 것이 없이 이미 주님께서 전부 다 압류 다 당했어요. 요만한 빨간 딱지를 TV에나 다 붙여놔 버렸어요. 다 빼앗았기 때문에 구차 없이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게 사사기에 되풀이되는 반복되는 역사예요. 아무것도 개뿔도 없으니까 그제사 “천부여! 어서 오시옵소서.” 노래 부르면서 그냥 부르는 게 아니고 몸을 흔들어 가면서 부르면서 와서 ‘이번만 해결해 주시면 그동안 못 다 드린 십일조 다 하겠습니다.’ 아니 갑자기 십일조 이야기를 왜 또 당할 때 합니까? 전에 이야기했죠. 십일조 하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다 깨어나도 죽었다 깨어나도 못 지킨다는 뜻 이예요. 지킬 수가 없다는 뜻인데 갑자기 십일조는 그 이야기를 왜 끄집어내느냐, 내 것 뺏어가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차라리 그게 위기가 기회인 줄 모르고!

간단한 문제예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망했죠? 정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백성이죠? 망합니다. 왜, 구약에서 이미 보여줬잖아요. 그 과정 포기 안 합니다. 그 코스 포기 안 해요. 사람이 망하지 않으면 주의 이름 제대로 안 부르게 돼 있습니다.

여러분들 주부들이 바닷가에서 잡은 통(물)오징어 살 때 어떻게 합니까? 칼 가지고 절개하죠. 팍 하고 먹물 터지죠. 매끈한 피부 있잖아요. 그걸 감히 주부들은 그걸 사정없이 잘라버리죠. 우리 어머니 같은 경우는 닭 모가지를 비틀어버려요. 그러니까 그거 절개할 때 안에 먹물이 터져 나오죠. 그때 내가 되기 싫은 ‘안 돼, 절대로 이러면 안 돼.’라는 걸 먹물로 포함시키는데 주께서는 그 멍 물을 바깥으로 보여 내시는 그 능력은 우리 힘으로 못 합니다. 아파서 못 해요. 자기가 지 피부를 아파서 못해요.

그런데 애들 이빨 뽑듯이 그냥 확, 문고리 잡아당기듯이 뽑듯이 그냥 절개해서 사정없이 할 때 위기가 기회였습니다. 살았습니다. 살은 거예요. 수술해야 됩니다. 눕혀 놓고 수술해야 돼요. 묶어놓고 잘라야 돼요. 해서 안에 있는 먹물 터져야 돼요. 먹물이 매끈한 비비크림 발랐던 피부에 먹물이 도배하듯이 흘러서 이제는 내 매끈한 피부는 잊어야 돼요. 프로포폴 맞아도 소용없어요. 완전히 맞아도 나중에 검찰에 구속되니까. 완전히 뒤집어 써야 돼요.

차라리 이 딱딱한 거 하다가 여러분들에게 재밌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데 어떤 가정이 있는 남자가 자기가 은행원이라고 사기를 쳤는지, 가짜로 돈 주고 결혼식 때 일회용 하객들을 사서 결혼을 해놓고 순진한 여자는 살림 살면서 돈 받아가지고, 그러니 남자가 얼마나 훌륭해요? 그 돈으로 본처한테 생활비 300만원씩 보냈어요. 그래서 본처가 와서 어떻게 사나 보니까 결혼식하고 난리나 버렸어요. 두 여자가 다 놀랬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은 자꾸 가짜를 선망한다는 거예요. 은행원, 변호사, 은행원 되기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 우리교회 아는 사람이 국민은행 시험 쳤는데 안 됐다 하는데 500대 1인가, 얼마나 힘들어요? 변호사는 공부 이만큼 두꺼운 책을 시험 보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지 힘든 건 안 하고 남 되는 건 되고 싶은 거라.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새로운 주체로 바꾸려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지가 되고 싶은 선망하는 주체, 그것만 되면 돈 많은 여자들이 들끓는 그런 주체, 그건 주의 이름이 아니고 누구 이름? 내 이름인데, 그런 내 이름을 위해서 우리는 뭘 도용합니까? 교회 와서 기도할 때 무슨 이름을 부른다? 세상에 주의 이름을 부르니 주의 이름이 그걸 호응하겠어요? 택한 백성 같으면 그 모든 기대를 와르르 다 무너뜨리죠. 부숴버리죠. 그 위기가 뭐다? 기회가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BC586년에 망하잖아요. 그들이 기뻐해야 됩니다. 그리고 주께서 ‘내가 너희를 포로 잡혀 가는 가운데 나도 합류할게.’ 이게 뭐냐 하면 망하게 하시고 그들 속에 합류하셔서 이제 제대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뭐하다? 구원을 얻으리라. 그 주의 이름을 부르기가 그렇게 얼마나 힘들어요? 기적입니다. 주의 이름을 제대로 진정성 있게 부른다는 게. ‘내 이름 부르면 나는 망합니다.’는 뜻 이예요. 내 뜻대로 하면 필히 망합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주께서는 빈틈없이 차질 없이 일하세요? 왜냐 하면 사람이 ‘이쯤 되면 주의 이름 부를 건데.’ 라는 예상을 비껴가서 해버려요. 왜냐 하면 주의 이름을 우리가 부르겠다는 것은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주의 이름이 잘했다고 복 주고 복도 챙기고 구원도 챙기고, 오~! 괜찮네. 주의 이름 불러야지.’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 부르는데 니가 부르는 주의 이름은 다 니 이름이지 주의 이름이 아니에요. 이름표를 붙여, 여호와를, 백날 여호와, 예수, 불러봐야 주의 이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주의 이름 부르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망하는, 나라가 망하는 과정과 더불어서 우리에게 덮 치는 거예요. 덮칠 때 안 불러야 안부를 수 없게 만들면서 튀어나오는 것이 주의 이름 이예요. 그러니까 그 주의 이름은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그 말이 그 말 이예요. 그리고 주께서는 우리를 아예 약을 올려요. ‘이게 너의 선물이다.’

무슨 선물이 그런 선물이 있어요? 퇴직금 3억 5천 다 날리는 그런 선물이 다 있어요? 완전히 돈의 족쇄가 됐는데, 돈을 안 빌렸으면 몰라도. 3억 5천 받을 때는 굉장히 희망이 부풀었었지, 이걸로 아파트 사서 전세 받으면 100만원 받는다. 얼마나 부풀었어요? 그러면 애들한테 돈 의지 안하고 내 여생은 끝났다. 행복하다. 끝났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거 보고 박근혜 찍어줬는데 정부는 개입 안 한다 하니 끝나 버렸어요.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납득이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이름에서 내 욕망에서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주의 이름을 그냥 좋은 관계로 하면 납득이 안 돼요. 그러나 우리가 직접 손 대고 아까 절개해서 폭파 시키면 이건 납득이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지금 자기 것이 날라 가 버렸는데 무슨 그게 자기하고 의논한 게 아니잖아요. ‘얘, 이제부터 니 재산 날리니까 괜찮지?’ 이렇게 의논한 게 아니라고요. 우리는 몸부림쳤어요. 그런 사회가 오지 않기를. 제발 부탁하오니 이것만은 손대지 말라고. ‘사랑하는 내 자식입니다. 사랑하는 내 딸입니다. 이것만큼은 주께서 손대면 안 됩니다. 그럼 섭섭합니다.’라고 우리는 발악을 했다고요.

그게 기회인줄, 그 위기가 기회인줄 상상도 못했어요. 남은 몰라요. 아픔을, 내 인생이 감당이 안 되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니가 왜 니것도 아닌데 감당을 하려는 그게 잘못이잖아.’ ‘주여!’ 감당하려는 이게 죄인 줄 처음으로 안 거예요. 이게 우리 뜻대로 안 될 때 이게 처음으로 오는 거예요. ‘주여! 회개합니다. 감당도 안 되는 일을 건방떨면서 감당하면서 내 인생 이렇게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았다는 그거 남한테 과시하려고 이렇게 멋진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살아왔던 그것이 얼마나 주님의 십자가 대신 죽으심을 모독하는 짓인지를 우리는 몸부림치면서 후회합니다. 진짜 ’미워, 미워, 미워‘ 누가? 내가 미워, 말씀이 성취된 거예요.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생명을 얻었다.” 이런 느낌 몇 초 가지도 않아요. 또 슬슬 바람이 또 하거든요. 어떻게 빚은 갚아질까 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주의 이름은 우리가 부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의 이름을 집어넣는 거예요. 집어넣으면 그것은 그냥 집어넣는 게 아니고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 사건은 나의 이름을 박살내는 교체되는 사건으로 주의 이름이 오는 거예요. 그렇다면 목사님, 현재 우리 집이 홀랑 타야 됩니까? 불타도 내가 불 지르면 안 돼요. 우리는 방화범 됩니다. 내가 불 지르지 말고 그저 불나야 되는데 집에 가니 불 안 났거든요.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불내고 안 내고 니가 선택해서 내가 이런 짓하면 비참할 거야, 비참을 니가 만들지 마라, 니가 뭔데 니 비참을 니가 만들어요, 비참 안 돼도 우리는 비참한 존재인데 우리가 얼마나 비참하면 한 달 수입이 1500만원이고 땅이 2만 5천 평이고 그것도 비참 이예요. 아이쿠, 미장원에 가서 머리해도 머리 모양도 안 나오고 미치겠네. 이게 비참 이예요. 프로포폴 100번 맞아도 맞을 때뿐이고 인기 다 떨어져 버리고 이게 얼마나 비참합니까? 가만히 있어도 늙어가니까, 비참에 대해서 너무 당겨서 걱정하지 마시고 사시면 머리 빠지고 비참해져요.

아까 전도서 할 때 했잖아요. 별도 떨어지고 달도 안 보이고 이게 뭡니까? 눈이 어둡다는 뜻이거든요. 가만히 있어도 주께서 스케줄 따라 비참하게 해줄 테니까 니가 알아서 비참하게 술 먹고 맞아서 얻어터지고 해서 그런 비참 말고 가만있어도 머리 흰 머리 나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 과정이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스라엘 역사, 출애굽할 때 신났습니다. 멋있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망했습니다. 망하고 게임오버 끝나버리고 진짜 숨어있던 주의 이름으로 일을 벌렸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실은 너희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이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관계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렇게 사도행전 2장에서 하죠. 그 앞에 나온 걸 봐야 돼요. 이 대목에서 꼭 봐야 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21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나오죠? 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의 연장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맨 정신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홀려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주의 이름이다? 영을 받은 모든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주의 이름이죠. 그걸 흉내 내서 옆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성령을 받아 버리면 성령 받은 사람이 뭡니까? 이것은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것을 본인이 주의 이름 부르면서 남한테 증거 하겠죠. 주의 이름 부를 때 이건 나는 미친 거야, 이게 바로 주께서 허락하신 주의 이름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 부르면 내게 복 올 거다.‘ 이런 식으로 부르는 주의 이름은 성령 없는 주의 이름 이예요. 이게 언약의 위력입니다. 언약은 안 죽었습니다. 우리는 비록 우리의 육신만 챙기는 순간이라도 언약은 죽지 않았어요.

그리고 언약이 왔다고도 할 수 있지만 주의 이름이 나를 관장합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대로. 그러면 우리는 주의 이름에 의해서 숨겨지는 먹물 통이 어떻게 됩니까? 통 오징어 안에 있는 먹물 통을 그대로 쏟아내면서 하루하루 일과를 보내게 되겠죠. 그때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구약 사람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짜장면 먹고 싶다. 피자 먹고 싶다.‘ 하는 그 이야기가 인간은 자기 육체를 자기가 이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어쩌면 미리 우리 앞에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죠. 뭡니까? 그렇게 못 돼 먹고 자기 밖에 모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는데 주의 이름은 떠났어요? 안 떠났어요? 안 떠났죠. 야!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너희들이 성질이 곧고 곧아서가 아니라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너희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맹세를 이루는 차원에서 너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신명기 9장에 나오는 말씀 이예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노아 언약으로 형성된 땅의 질서』여기 보면 그 앞에 갑자기 왜 노아 언약이 나옵니까? 지금 계속 주의 이름은 무슨 원칙에 따랐다? 언약 따라 왔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이죠.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인 줄 오해한 거예요. 언약이 뭔지 모르니까. 언약은 따로 상 차려다 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은 쑤시면서 먹물 튀기면서 우리의 죄를 끄집어내는 그것을 사용해서 언약을 사용하거든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더라도 그건 지 생각이고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을 끌고 주의 이름이 없는 언약 없는 백성을 일방적으로 이기게 하는 겁니다. 심지어 목이 곧은 백성을 가지고 같이 목이 교만한 백성을 승리케 하는 것은 모든 공로를 누가 가져가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갖고자 하는 일입니다. 이게 언약의 취지에요.

그러니 그냥 사세요. 사시면 주께서 선물로 살아가는 것도 선물이고 주께서 시도 때도 없이 우리에게 주의 일에 니가 참여돼 있지, 니 일은 따로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우리가 물론 인간이 기대하겠죠. 하지만 그거 말짱 소용없는 짓이죠.

그러면 왜 노아 언약이 왜 나오느냐. 여기 노아 언약을 언급한 이유가 심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내가 노아 언약을 언급한 거예요. 우리가 생각할 때 노아 언약이라 하는 것은 심판받았다가 구원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심판은 한 때 있었는데 지금은 뭐다? 지금은 지나갔어. 어쨌든 지금은 구원 받았잖아. 신난다. 이것만 챙기잖아요. 그런데 그것만 챙기면 어린양을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분명히 심판은 물로 심판이잖아요. 요 이야기는 어렵지 않아요. 잘 들어보세요. 물로 심판했죠. 그러면 하늘에서 비 안 오면 심판 끝났어요? 안 끝났어요? 끝났잖아요. 물로 심판한다면서요? 물로 심판하는데 물이 끊어졌으면 심판 받은 거예요? 안 받은 거예요? 심판은 끝났잖아요. 그런데 그게 노아 홍수의 취지였습니까? 아니죠. 끝나고 난 뒤에 정결한 짐승을 잡아버리죠. 그러면 심판은 끝난 게 아니고 '심판은 살아있네.‘ 하는 말처럼 심판은 살아있는 거예요. 그 뒤의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심판 받을 정도로 악하지만 이 제물을 보고 너를 저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심판을 잊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더 이상 심판 받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 안에다 뭘? 칩을 넣어버리는 거예요. “니는 지금이라도 물 심판 받아야 되는데 지금 물 심판 안 받는 이유는 니 속에 들어있는 희생양 때문에 살았다.”라는 것을 심어줄 때 그 사람은 언약의 사람이 됩니다. 언약의 사람이 되면서 언약을 우리가 소지하느냐? NO, 주의 이름이 우리를 장악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는 가게 되면 뭐가 나오겠어요? 자꾸 주의 이름이 멈추지 않고 주의 이름을 가지고 우리를 사용하고 우리는 또 한 고집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내 이름을 또 우기게 되고 우리는 평생 뭐든지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어요.

예를 들어서 한 목사님이 나한테 ‘목사님, 이거 용돈 쓰이죠, 20억인데 쓰세요.’ 할 때 우리는 기분 나쁜 이유가 있어요. 먼저 20억을 달라고 해야 받을 때 기분 좋아요. 그런데 안 달라고 했는데 20억을 줘버리면 이게 무슨 용산 개발 같이 ‘목사님, 그 계약서 안 썼죠?’ 분명히 이자 쳐서 달라고 한 건데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왜 세상 일이 내 계획 안 된 좋든 나쁘든 그건 나중 문제고 왜 내가 한 것을 누가 방해하느냐 이 말입니다. 내 계획을! 기분 더럽죠. 그런데 그게 위기잖아요. 이 위기가 기회라니까! 그렇게 위기 받으면서 그게 주께 영광이라. 주님 지독하십니다. 뭐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실제는 이렇습니다. 애보고 ‘얘, 딸아 연속극 보지 말고 공부해라’ 하잖아요. 그런데 애가 공부하잖아요. 미치는 거예요. 왜 분명히 공부 안 해야 되잖아요. 또 미치는 거예요. 그때 뭐라 합니까? ‘주여 용서하소서.’ 나는 공부 안 할 거라고 잔소리 했는데, 세상에 한마디 했는데 공부할 줄이야, 그거는 또 우리는 뭘 해도 내 뜻대로 안 돼요. 반찬 없어도 ‘여보 반찬 없어도 그냥 내가 바쁘니까 당신 먹어라.’ 분명히 안 먹을 줄 알고 했는데 ‘예’ 하고 먹거든요. 미치는 거예요. 이러면 당신답지가 않아. 이상해, 말도 안 돼, 주께서 또 뭐든지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누가 인도하시는 거예요? 이걸 우리는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뭐든지 내 인생은 끝났다. 나는 누가 주무른다. 이것은 뭐냐, 까라면 깐다. ‘주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라는 것을 사람한테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누구한테 합니까? 혼자서 기도하면서 ‘주여, 손들고 졌습니다.’ 졌습니다. 해도 몇 초 가지도 않아요. 안 졌습니다. 우리는 알거든요. 졌다고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슬슬 내 이야기가 풀리게 해달라는 그 수작 하는 거예요. 나도 알아요. 내가 나를 아는데 주님이 모를 리가 있습니까? 주께서 ‘그 맘 아닌 거 내가 알지. 니가 하는 모든 회개, 반성 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는다.’ 우리는 그냥 만들어진 대로 갈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사세요! 주께서 손대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손 안대면 어떻게?’ 주께서 손 안대는 것도 내 뜻대로 안 되는 거예요. 감사하면 되죠. 여러분, 주께서 안대는 것도 이것도 주의 뜻인지 믿으시면 되는데. 행하지 마시고 믿으세요. 주의 말씀을 행하지 마시고 그냥 믿으세요. 일 시켜놓고 해놓고 그 행함을 내 행한 것을 믿지 마세요. 행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걸 믿으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심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주께서 한 거예요.

심판을 미리 아는 즐거움! 이 쾌재! 만약에 우리가 김정은 앞에 섰다. ‘내가 당신 살려줄게.’ 별로 안 좋아요. 살려내시는 분이 누굴 살려냅니까? 이미 우리는 다른 길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인간들이 살려낸다는 것은 자기 멸망하는 자기 식으로 우리를 똑같이 만들겠다는 뜻이거든요. ‘내 곁에 일 하면 당신 사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그걸 거부해요? 거부하지 말까요? 거부할 필요 없죠. 왜 그걸 거부해요? 월급 많이 준다는데. 커피 바리스타를 왜 거부해요? 하지만 그건 누구 뜻입니까? 니 뜻 아니야, 그것은 주께서 니한테 붙여준 뜻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그게 막사는 거예요.

왜 우리는 고집 부립니까? ‘난 당신 같은 지옥 가는 사람하고 안 사귑니다.’ 왜 그렇게 지 뜻을 반영해야 돼. 그럴 필요 없어요. 뭐든지 어떤 손님이 오든지 그거는 내가 거부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런데 몸이 힘든 것은 그거는 감당이 안 되니까 힘든 것이고, 왜 육신은 우리 맘대로 안 되고 주께서 맘대로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지만 나머지 그거는 그냥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가면 어떻습니까? ‘이러시면 저주 받습니다. 그러니까 행동 똑바로 하시고 개가 토했던 걸 되풀이하면 여러분 저주 받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자꾸 자기가 자기를 관리시키게 되면 관리된 그것은 누구 뜻입니까? 자기 뜻이 되죠. 점점 더 마귀가 쳐놓은 굴레에 빠진 거예요.

넘어 갑시다. 진도 나가는 재미가 있어야 되니까 죽 나갑시다. 216페이지 중간에 보면 ‘피’ 이야기가 있죠. 심판 끝났는데 왜 피 이야기가 왜 나오느냐, 그러니까 그게 비평하는 사람이 자기도 모르겠다. 하니까 왜 노아에 피 이야기가 왜 들어갑니까? 그걸 보고 다른 교수들이 얼마나 놀렸겠어요? 저 인간 기본도 안 됐다 할 게 아닙니까?

노아 심판에 피가 왜 들어갈까요? 피 때문에 물 심판이 안 온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이겁니다. 그 심판이 악인에게만 안 옵니까? 선인에게는 안 옵니까? 악인과 선인 다 같이 안 오죠. 선인과 악인이 우리끼리 구분해도 주의 은혜는 주님 맘대로 되는 거예요. 비오고 안 오고. 선인이 기도한다고 비오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기도 한다고 비 안 오는 것도 아니에요. 선과 악 관계없이 비는 오게 돼 있어요. 비 안 오는 것도 선과 악 관계없이 안 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다가 피를 줘 보내버리면 그냥 주께서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지상이 지점 이예요. 본점은 어디입니까? 하늘나라죠. 하늘나라에서 누가 그렇게 해요? 가전제품 대리점처럼, 자기 마크가 있는 삼성대리점하고만 연락하지 다른 데하고는 연락 안 하잖아요. 삼성마크 딴 데는 물건 안 주잖아요. 그 대리점이 뭐냐 하면 피를 머금은 선지자죠. 그러니까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 오잖아요. 보세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하늘 쳐다보다가 이제 누구 봐야 돼요? 엘리야 봐야 되는 거예요. 드디어 점점 더 하늘이 인격화 되죠. 그게 마지막 인격화 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그래서 “나를 본 자만이 아버지를 보았다. 도마야 니가 나를 보고 있잖아. 왜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아버지가 나한테 다 일임했는데.‘

여러분, 하나님이 죽습니다. 안 죽는 하나님은 생각하지 마세요. 죽는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을 못합니다. 왜, 우리는 살고 싶어서. 죽어가다 보니까 살아있는 하나님이여, 살려주세요. 하거든요. “나도 죽었는데? 나도 죽었는데?” 하나님은 언약대로 가기 때문에 하나님도 죽어야 돼요. 언약이 중요하니까. 언약 안 지키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나도 죽었는데”

‘그러면 예수 믿고 죽으면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보장이 돼야 되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거예요. “아버지 약속이 내 뜻보다 우선된다는 것을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약속대로 처음부터 약속대로 왔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내 뜻이 안 될 때만 안 될 것이 없는 약속이 믿어져요. 성도에게만 그렇지만. 내 뜻이 안 되잖아요. 그게 안 되니까 자살하자, 아니라 내 뜻이 안 되는 것은 되는 약속을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걸 놓쳤기 때문에 보여주기 위해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내 뜻대로 안 됐잖아요? 약속을 보여줬잖아요. 돌아서면 그 약속을 마치 내 뜻으로 우리는 전환시킵니다. 그 약속 안 되게 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죄인으로 만들어버리죠. 계속해서 우리를 그걸 설교에서 영원한 채무자로 만든다 했죠? 우리는 하늘나라 가서 내 주장을 전혀 하지 못하게 영원한 채무자로 만들어서 ‘거저 받은 겁니다. 공짜로 용서받은 거예요.’라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미 지상에서부터 작업에 들어간 거예요.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기 ‘피’가 들어간 것은 피는 지점이라 했죠? 본점 따로 있고.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은혜주시는 것은 결국 ‘피’라는 것을 통해서 확연히 몸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피는 그냥 주는 거예요? 그냥 피 내게 했기 때문에 죽은 겁니까? 그게 바로 이 땅에 희생자의 모습으로 왔다는 것이 여기 216페이지에 그걸 억울한 자, 억울한 피, 그걸 아벨의 피에서 사가랴의 피까지 다 너희들이 감당해야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죽으시는 것이 아니고 자꾸 지적을 해요. 그냥 본인이 가만히 산 밑에 가서 죽으면 되는데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돼 있다고 하시면서 계속 자기 스스로 죽는다 말은 해놓고 자꾸 끌어당긴다니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을 계속 미워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코너에 몰리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왜, 내 뜻대로 안 되게 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는 당신 없는 곳으로 도망쳐 버립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돼요. 그래야 그 교회 교인들이 나가요. 나가서 복음이 없는 피가 없는 곳으로 가게 돼 있습니다. 피가 없는 곳에는 누가 멋있어 보일까요? 교회를 옮긴 내가 멋있어 보입니다. 이 바른 선택한 내가 멋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택, 우리 교회 온 선택 잘했죠? 란 설교를 하게 되면 교인들이 모이게 돼 있고 ‘선택한 그것도 죕니다.’ 한다면 그 교회 가 놓고 또 다시 나가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예수라 하는 것은 항상 이 땅에서 성공하게 돼 있어요. 단 어떤 자리에서 성공하느냐 하면 진짜 예수가 없는 자리에서는 늘 성공하게 돼 있어요. 진짜 예수는 다른 교회 찾아왔다고 해서 그걸 의라 인정 안 해주거든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선택까지도 인정 안 해주니까 그들은 그 교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통영에서 오신 목사가 우리교회 보고 하는 말이 ‘아이쿠, 교인이 왜 이리 많습니까?’ 이게 많은 건가? 싸움은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교인 수를 얼마나 유지하는 싸움이 아니고 교인에 연연하지 않는 그런 싸움 이예요. 내 목회가 내 일이 아니라는 그 싸움,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라는 그 싸움을 주께서는 하게 하십니다. 참 미치겠어요. 이거는 재주나 기술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맡겨야 될 문제이기 때문에 기술과 재주가 오히려 방해 하거든요. 요령이 방해한다고요. 이럴 때는 기도 5분 동안 하면 되지, 이런 요령들이 전혀 주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냥 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맡길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란 말을 느껴요.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맡기게 하신 그것만이 사랑이지, 맡겼기 때문에 결과가 사랑한 것이지, 내가 맡길 분이 없으면 이 세상에 지밖에 없는데 누구보고 사랑한다 해요? 사실 사랑한다는 말이 이용한다는 것이지. 남자들이 여자보고 ‘사랑해’ 이건 이용하겠다는 말밖에 안 됩니까? 그러니까 진짜 사랑하게 되면 ‘마음대로 하이소’ 이렇게 해야 되죠. 사랑한다 해놓고 ‘그건 아니고’ 그게 무슨 사랑 이예요?

217페이지 봅시다. 『세상 해석에 있어 이미 주도권이 상실되었으며 실제적인 언약 실행자 쪽으로 넘겨지는 것을 … 』 이 해석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해석을 한다? 사람은 해석 없이 하루도 한시도 해석 없이 안 넘어가거든요. 저게 몇 번 버스지? 저 전철 타면 돼? 이게 해석이잖아요. 해석은 반드시 뭐가 있느냐 하면 ‘있다’ 둘 다가 있는 거예요. 해석해야 될 대상과 사물이 있고 해석하는 누가 있다? 내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해석 해버리면 이건 무슨 세계입니까? 없음의 세계가 아니고 있음의 세계라니까요.

있음의 세계에서 내가 여기 있으니까 잘 들어보세요. 내가 있으니까 있음의 해석에 누가 반드시 포함돼 있어요? ‘나 있잖아’ 가 반드시 포함되게 돼 있어요. 할아버지가 설날에 손자한테 세배 돈을 줬습니다. 주고 난 뒤에 밥 먹고 난 뒤에 다시 만났어요. ‘야야, 내가 준 세배 돈 가지고 뭐 샀지?’ 이런다고요. 무슨 뜻 이예요? ‘니 아버지가 준 세배 돈’ 이게 아니고 ‘내가 준 돈 아직도 갖고 있어?‘ 이런 뜻이고 이건 다른 말로 무슨 뜻입니까? ’내가 줬다는 것을 니가 기억하고 있느냐? 나의 의미가 니 안에 새겨져 있느냐?‘ 그걸 묻는 거예요.

우리가 손자한테도 마찬가지인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할 때도 이걸 잊을 리가 있습니까? 피아노 바치고 꽃꽂이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해석한다는 것은 전부 다 일방적인 있음의 세계를 만드는 거예요. 그 있음의 세계를 우리 힘으로 없음의 세계로 바꿀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이걸 바꾸겠다고 중들이 머리를 깎았는데 여러분, 머리카락은 자라나게 돼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아예 없으면 머리 깎을 시간도 없고 한 텐데 자꾸 신경 쓰이는 것은 자기 머리카락이 자라나니까 해석을 하는 거예요. 지금 5센티, 얼마 있으면 주지 스님이 뭐라 하겠나. 그만큼 파마 하나 머리 깎으나 신경 쓰는 것은 매일반이죠.

이것은 내 머리는 내가 관리해야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해석한다. 그 해석된 결과를 가지고 ‘세상’이라고 해요. 세상! 세상 속에 내가 있거든요. 그런 나는 허구가 있고 귀신은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만든 세상은 허상입니까? 실상입니까? 실상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걸 가지고 어둠이라고 했죠. “빛이 왔으되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 아! 도대체 우리가 그동안 예수 믿은 게 뭐예요? 허구적 예수를 심어놓고 믿는 게 아니에요? 나를 어두움으로 되게 한 것에 대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감사해야 돼요. 내가 무슨 수로 내가 어둡다는 걸 압니까? 내가 뭘 해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내가 무슨 수로 이걸 진정성 있게 느낍니까? 잘 나가잖아요? 잘 나가는 건 아니고. 못 나게 해주시니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 나가든 못 나가든 우리가 판정하고 해석할 문제도 아닌데 우리는 기껏 그거밖에 안 되는 죄인입니다. 성령께서 간섭하사 책망하사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우리의 기준을 무너지게 해주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었던 기준만 우리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교회-70이레 논문(언약과 주체)130314-15강b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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