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한계 130322
경계와 한계 130322
이름 : 관리자(IP:119.18.69.144)
서경수(IP:121.♡.190.236)
13-04-11 09:42
광주 강의(2013. 3. 22) 40-1
에스겔 37장 15절 이하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막대기 하나는 ‘유다 자손’이라 쓰고, 다른 하나는 ‘에브라임 자손’이라고 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막대기를 하나로 합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기에 이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단(오용익 목사님 아들 오단)을 만나기 위해서는 단이 다니는 학교를 가야지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지요. 그런데 단이 하나님이라면 목포에 가도 계시고, 곡성에도 계시지요?
우리는 하나님은 안 봤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접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모든 면이 하나님과 접속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예를 들어, 산에 단풍이 들었다면 누가 그렇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쉽지요. 바다에 파도가 친다. 누가 하셨지? 하나님이 하셨다.
그러면 어느 병원에 있는 한 아이가 막 숨이 끊어질 때, 누가 숨을 끊었습니까? 단풍이 든다. 파도가 친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는데, 어린 자식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아직 어린 나이기에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이 숨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 생명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지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며, 어떻게 일 하시는 겁니까?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 가장 실감나는 식으로 인간을 사용했습니다. 단풍 들게 한 것도 하나님, 파도를 치게 하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써 가장 실감나는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 하면, 살고 싶은데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인간은 하나님이 보고 싶다. 만약 하나님을 보여주면 국소적이 되어 그 지점에서만 만나기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지요.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하나님인데,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가장 하나님다운 것이 뭔가 하면, 나는 계속 살고 싶은데 죽이실 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연결고리는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모든 복음은 죽음을 바탕에 놓고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우리도 죄 값으로 말미암아 죽습니다. 이렇게 보니까 어느 인간도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죽으니까.
어제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균에 감염되었다는 것은 이미 병균이 그 지점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감염되니까 있었다는 것이 확실시 되지요. 사람이 죽을 때, 그 때만 죽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기에 죽는 순간 그것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은행에 가면 제일 먼저 번호표를 뽑지요. 번호표는 뽑았지만 은행원과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대기상태입니다. 이 때 은행원은 이 사람이 은행에 왔는지 안 왔는지 몰라요. 그런데 언제 압니까? 순서가 되어 번호표를 제시하고 만날 때, ‘이분이 벌써 은행에 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 번호표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죽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장자의 죽음을 사용합니다. 노아 시절에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떤 식으로 보여줍니까? 모든 사람을 물로 죽게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리고 그 죽었다는 흔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제사라는 방식(피 흘림이죠)으로 장착해 놓고 하늘에는 무지개를 둠으로 말미암아 “이미 너희는 죽었지만 내가 살리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시기 위해 셈, 함, 야벳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하나님이 살려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축복을 받아야 하고, 함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었기에 저주가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계속 후손이 태어나야 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언약의 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언약 안에는 두 개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저주 받기위해 살아가는 사람, 또 하나는 축복 받기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결국 언약의 내용대로 양과 염소가 구분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예수님 십자가 은혜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좋다고 왔다가 도중에 가버렸어요. 이것을 설명해 줘야 37장 14절 말씀이 이해됩니다.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이렇게 되어 있지요.
‘너희로 살게 하고’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숨을 쉰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신이 임해야 됩니다. 내 심장이 뛰어 사는 것과 또 다른 종류의 삶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이 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메시아가 오면 두 윤곽이 드러납니다.
‘산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선악과 따먹을 때 뱀이 인간에게 제안한 것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신처럼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이 가인과 아벨인데, 아벨은 괄호 칩시다. 있어도 없다고 칩시다. 왜냐하면, 아벨은 가인이 누구인가를 위해서 차후에 등장하기 때문에 아벨은 없는 존재입니다. 가인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벨이 희생타로 있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의 주인공은 가인입니다. 여기서 가인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모든 일에 관여를 해요. 가인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가 제사 드리기 전까지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는 몰라요. 그런데 가인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거절했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이 아벨을 등장시켜 그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 때 가인의 입장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등장시켰다.’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순종을 안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그 믿음을 주님이 외면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바로 그 순간, 주님이 거부하실 때 비로소 신의 신다움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에게 잘 보이려고 신에게 순종하고 신께 감사하는데 이때는 우리가 신인줄 몰랐어요. 그런데 신이 나의 모든 것을 거부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신의 입장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을 시도했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나는 순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면 우리는 비로소 나의 순종을 안 받는 그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요. “당신이 뭔데 내 사랑을 사랑으로 안 받는가”라는 것이지요. 그 때 비로소 누가 신입니까? 신에게 제사를 드렸지만 사실은 누가 신입니까? 내가 신이고, 진짜 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내 사랑이나 받고 고마워 해.” 라는 식으로 우리는 사랑을 합니다.
“주여, 주님을 믿습니다.” 이 말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내가 예수 당신을 믿을 테니까 당신도 나를 신으로 인정해 줘!” 그런 의미가 담겨 있어요. “주여, 우리 가정이 평안하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기도 응답이 안 될 때, 내 기도의 가치를 유효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 기도를 거부하는 자는 없애버려야 내 기도가 유효하게 됩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 기도가 그렇게 만만하니?”하고.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이유는 가인이 선악과를 먹어놓고 하나님을 찾고 있단 말이지요. 자기 주재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이 때 하나님의 거부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를 알겠지요? 주님이 베드로의 순교마저 거부하신 이유를 알겠지요? 베드로가 화 날만 하지요. 자기가 그 정도로 제안했는데 주님이 그 제안을 거절했을 때, ‘장사를 같이 하겠다는 것인지 따로 놀겠다는 것인지?’ 굉장히 불쾌하지요. 그러니 예수님 잡히실 때 베드로는 “모른다”고 하잖아요. “나는 저 사람 모른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런 소리 했겠습니까?
이 때 닭이 울었어요. 이게 참 희한하지요. 닭이 울었을 때 누가 봐도 그냥 닭이 운거예요. 그런데 베드로에게는 닭이 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울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닭이 울리라”는 그 예언을 예수님이 했으니까 닭은 예수님께 소속된 것이고, 그 닭이 때가 되어 운거예요.
다른 사람은 그냥 닭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닭은 주님이 섭섭해서 닭이 울었다고 여길 때, 베드로 자신의 본색(주님을 싫어하고 거부했던 것)이 드러난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곳에 계십니다.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없다고 여기면서 삽니다. 그런데 모든 곳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접속할 때는 죽음을 연결고리로 해서 나타납니다. 그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 아니고 내가 주님 만나면 멱살을 잡고 죽이고 싶은 그런 충동이 발생되는 그 죽음. 주님이 죽었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주님을 죽였습니다.”라고 그 죽음과 나의 행위가 엮여지는 그 지점, 이곳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작용하는 지점입니다.
요즘 교회는 놀이마당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는 하늘나라는 앞에 전제가 붙어요.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왔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가 뭘 빼버렸습니까? “회개하라.”를 빼고 천국 가라고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회개하라.”를 집어넣으려면 회개의 기준은 우리가 천국 가는 기준과 동일한 기준이어야 하겠지요?
예를 들겠습니다. 지금 월드컵 축구 지역 예선전이 한창인데, 어떤 사람이 표를 구입하고 입장하면서 표 받는 사람에게 “오늘 이승엽 선수 출전합니까?”라고 한다면, “여기는 축구장인데요.”라고 하겠지요. 만약 천국이 축구장인데 우리는 야구장을 생각하면 그 축구장에 못 들어가겠지요. 주님은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앞에 “회개하라.”하시고, 회개의 기준으로 축구를 제시했는데 우리는 기껏 제시하는 것이 나는 야구를 좋아하니까 천국에 넣어 달라는 식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그러면 회개의 기준은 피로 정해져 있지요. 그러면 교회에서 ‘회개하라.’고 할 때 뭘 보고 회개해야 돼요? 십자가 피를 보고 회개해야 되는데 교회에서 십자가 피를 빼버리면 그 교회는 회개가 안 되니까 지옥 갑니다. “여러분, 헌금하세요. 교회 충성하고 목사 섬기세요.” 이게 무슨 회개의 기준이 됩니까? 세례 받고, 헌금하고, 충성하면 교회는 되는데 그것으로 천국은 못 가요.
어떤 교회가 빚을 내고 예배당을 지었는데, 교인들이 헌금을 많이 안 해서 목사가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화가 나서 설교 시간에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은 예배당 우리가 헌금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이 교회는 회개의 기준이 뭡니까? 헌금 안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피가 아니고. 목사는 천국 갈 사람을 교회로 유인합니다. 방법은 다른 회개 기준을 제시하는 겁니다.
주님이 제시하신 천국 가는 기준은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죽어가고 있고, 우리의 죽음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 이것이 바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서 교회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전하고, 회개 전하고, 피의 복음 전하면 과연 계속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산다는 것은 내가 보약 먹고 힘을 얻어서 내 발로 교회 들락거리는 이것이 산 것입니까?
본문 14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다는 것은 지금 이야기입니까, 나중 이야기입니까? 이 본문의 입장에서는 나중 이야기죠. 그러면 지금 당장 하시지 왜 나중인가? 그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합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15, 16절입니다.
14절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그 목표를 두고 사전 작업에 나서는데, 터 닦기를 하면서 나눠졌던 남북이 하나로 결합됩니다. 왜 이런 작업이 필요할까요? 남과 북이 끊어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24절에 나옵니다.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라고 했어요.
이 땅에 왕은 없어요. 다만 자리만 비어있는 체 남겨둬요. 이게 다른 말로 하면 블랙홀입니다. 그런데 블랙홀이 있는 주변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래시계를 보면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리지요. 또 하수구 주변을 보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물들이 하수구 쪽으로 모여 물이 빠지지요.
안에는 그냥 구멍만 있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변에 있는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힘이 나와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고 공간자체가 굽어 있으면 그곳에 걸려들면 모든 것이 그곳으로 빨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입니다. 물질로 인하여 공간이 굽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블랙홀이 설명이 돼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왕은 실체가 없어요. 빈자리만 있는데, 이상하게 그 주변에 있는 이방나라와 이스라엘 전부 이곳에 말려들어서 파토가 납니다. 참 신기합니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 많지만 이런 것이 참 기적입니다. 보이지도 않는데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이 블랙홀을 다윗 언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왕이 뭔가 하면, 진짜 사장은 따로 있고 바지 사장이지요. 배후에 다윗 언약이 갖고 논 거예요. 그런데 한 때는 다윗 자신이 실재 왕으로 행사한 적이 있었지요. 암몬과 전쟁할 때 다윗은 왕궁에 거질다가 아랫집 여인이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불러 동침하게 되지요.
자신은 왕이기에 이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선지자가 찾아와서 꾸짖습니다. 선지자가 찾아왔다는 말은 하나님과 다윗이 대면한 것과 같습니다. “정신 차려. 네가 이스라엘 왕이야?” 라고 추궁하는 그런 개기가 마련된 것입니다. “나라를 망치는 당사자가 바로 당신이야!” 라고 했을 때, 이 나단 선지자의 음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면 바지 사장이 누구와 이야기한 것입니까? 진짜 사장과 이야기를 한 거지요. 다윗이 처음으로 블랙홀을 만났어요. 그렇게 되니 자신에게는 의가 없고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병에 걸린 때에만 병균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병균이 있었다는 것을 병에 걸려 파악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병균이 있었다는 사실을 병에 걸려 알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윗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 때 “내가 밧세바와 간음했기에 오늘부터 죄인이야!” 이게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모친의 죄 중에 잉태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우리들 보기에 위대한 점이 뭔가 하면, 세상을 통째로 안다는 점이 위대해요.
아까 식사했던 식당 주인은 세상을 통째로 압니까? 모르지요. “낙지볶음 얼마입니까?” “00원입니다.” 이런 것만 알지요. 세상을 누가 만드셨는지 모르지요. 다윗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번 전쟁에서 훌륭한 장군을 앞세워 승리만 하면 된다’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이 나타났어요.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것만 알만 된다.”고 여겼던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은 바지 사장으로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만약 여기 있는 귤을 먹으려고 한다면 ‘이 귤을 어떻게 까서 먹을까?’ 이것만 생각하면 되지요. 그런데 이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되면 귤을 까면서 웁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귤을 안 까는 것이 아니라 까면서 웁니다.
성신이 임했다는 것은 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학생에게 성신이 임하면 학교 그만두고 기도원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양말을 씻을 때 “양말 똑바로 신어야지” 이것만 생각하다가 갑자기 성령이 임하면 “주여, 이 죄인에게 양말이 웬 말입니까?” 이렇게 된다니까. 그게 블랙홀이에요.
성령을 받으면 전부를 한꺼번에 알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이건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몰랐던 거예요. 그들은 물이 갈라지니까 좋다고 들어간 것뿐이에요.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몰랐어요. 나중에 그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지요. 자기 것만 챙긴 거예요.
“하나님, 제가 순종할 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생각했는데 물이 없고 양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하나님 죽여 버릴 거야.” 이렇게 나왔지요. 하나님이 물과 양식을 안 주심으로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 마음, 이것을 하나님이 블랙홀로 사용하심을 느끼는 겁니다. “우리는 진작 죽어도 마땅한데 귤은 왜 주십니까?” 눈물로 먹는 귤. 이게 성령 받을 때 감사함으로 먹는 거지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왜 갈라졌는가 하면, 다윗 언약 때문에 갈라졌습니다. 이걸 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해를 했어요. ‘우리에게 주시려고 약속 한 땅’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사실은 ‘약속이 발현되는 땅’이었어요.
약속이 뭐냐?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다윗 언약은 아까 24절을 봤지요. “내 종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다윗의 자리에 앉아서 왕으로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비어있던 자리가 비로소 채워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이 땅은 죽음을 가지고 갑니다.
산다는 것이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그냥 죽은 목숨으로 사는 것, 죽을 목숨으로 버티면서 사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사는 것. 그러면 이 사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되고, 죽을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왕으로 죽어야 되고. 이 두 개의 죽음을 보여주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이 약속의 땅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개의 죽음이 영원히 고정되는 증거로 천국에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죽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죽으심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겁니다. 십자가를 품에 안았다는 조건 하에 우리는 영생을 얻는 겁니다.
“선악과 때문에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것을 안다는 조건 하에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가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의 체면이 살아요. 선악과 따먹은 후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지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 하면, ‘선악과 따먹게 해놓고 생명나무는 못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지요.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이런 분이 아니라, 선악과 따먹었다고 생명나무 못 따먹게 하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농락당한 거지요. 선악과에 농락당하고 생명나무에 농락당하고. 선악과 따먹어서 죽게 했고, 죽은 자는 생명나무 따먹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고.
따라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라는 조건 하에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게 되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그것을 캡슐에 담아서 생명이 제조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아는 그것을 재료로 해서 비로소 주님은 천국을 만들었기 때문에 천국 가면 모든 자들이 면류관 반납한다고 바빠요.
그래서 이 땅에서 그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티를 내면 됩니다. 살아가면서 그 티를 내게 됩니다. 주님이 “탐내지 말라.”는 것은 ‘지금부터 탐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벌써부터 탐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하, 내가 탐내고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자꾸 들어야 돼요. 말씀의 내용을 들으면 우리가 이미 해왔던 것입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해라.” 이미 우리는 떡을 추구하며 왔다는 것을 밝혀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죄를 지은 박물관이라서 전시된 것을 둘러보는 겁니다. 이게 뭐냐? 주께서 마련해 주신 생명의 장입니다.
베드로가 천국 갔을 때, 주님이 “너는 어떻게 여기에 왔냐?”하고 물으신다면 베드로는 뭐라고 답했겠습니까? “제가 원치 않은 길로 왔습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네가 원치 않는데 왜 왔냐?”고 물으면, “주께서 아십니다.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하셨잖아요.” 이게 바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주님이 우리 뜻대로 안 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착한 사람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미 악한 자였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가 원치 않는 상황들을 만들어 내셔서 그쪽으로 끌고 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 길을 하나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쓰레기를 모아서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생명을 만들어 냅니다.
죄에다 피를 발라서 하나님의 의를 만들어 우리도 의롭고, 그렇게 건지시는 예수님도 의롭고, 건져주시도록 계획하신 하나님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인데, 이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지요.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 위해서는 사전 정리가 필요한데,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두 나라로 나눠졌는가? 왜 너희들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는 다윗 언약이었지요. 그러면 이것을 합체한다면 누구 공로가 되겠습니까? 다윗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블랙홀에서 실체를 감추고 있던 그분이 오셔서 비로소 갈라진 두 나라가 다시 원상복귀 되면서 하나의 이스라엘이 될 때 그 접합제가 바로 ‘여호와의 신’이 임해서 됩니다.
38장을 봅시다. 1절 이하에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37장에서 다윗 왕 이야기를 이 정도 했으면 끝나도 되겠다고 여겼는데, 38장을 보니까 난데없이 곡이라는 나라가 등장합니다. 곡이 어디 있는가 하면, 이란 북쪽이 큰 호수가 2개 있습니다. 하나는 카스피호, 또 하나는 흑해입니다. 이 사이에 곡(혹은 마곡)이 있습니다.
로스, 메섹, 두발 이 세 민족이 합해서 곡이라는 나라를 형성한 거예요. 그런데 이 곡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생겼습니다. 이 이야기가 38장에 나옵니다. 37장에서 다윗 왕이 와서 두 나라를 하나로 만들면 끝나는데 왜 38장에 와서 곡이라는 이상한 나라가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가?
다윗 언약에 나타나실 그 왕은 용사입니다. 전쟁하는 용사로써의 다윗입니다. 우리는 전쟁하지 말고 전쟁의 결과물만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전쟁을 함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가 발생됩니다. 용사가 전쟁을 하면서 어떤 원수와 싸우는지 우리는 알 필요 없고, 결과물인 전리품만 편안히 얻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고 전쟁하면서 나타나는 원수가 중요한데, 그 원수가 누구인가 하면 구원 받는다고 만반의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는 그 인간들이 진짜 마곡같은 그런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래서 38장이 있는 거예요.
5-6절에 보면, 바사, 구스, 붓, 고멜, 도갈마가 나옵니다. 바사는 극동(동쪽의 끝)에 있고, 구스는 극남에 있고, 붓은 극서, 고멜과 도갈마는 극북(북쪽의 끝)에 있어요. 방금 이런 민족들이 힘을 합쳐 이스라엘을 동서남북으로 포위해서 잡아먹는 그런 배치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일으킨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 “이스라엘 너희들 구원 받았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에서 적들이 일어나는데, 이 적들 보통 적이 아니에요. 극동, 극서, 극남, 극북입니다. 이것은 지구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즉 언약 중심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에 두고 각 극 지방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나라들을 거론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격하는가? 이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2013. 4. 11. 09:01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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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수(IP:121.♡.190.236)
13-04-19 20:48
광주 강의(2013. 3. 22) 40-2
사도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이나 협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가 우리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말의 양보도 없습니다. 누구 편을 들지 않았어요.
사도바울의 서신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인데,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도리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누구도 이 사실을 곧이듣고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복음의 전제로 포함되어 있어요. 그럴 때 ‘성령의 선물’이란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는 말이 있어요. 그 말씀 뒤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앞에 ‘성령이 임하면 예언, 환상, 꿈을 꾸리라’고 한 거예요.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이야기를 지금 성령에 입각해서 베드로가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사도들은 예수님 팔아서 교회 세우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그 모든 소관은 지금도 살아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몫이에요. 우리 몫이 아니고.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앉은뱅이 약 올리는 대목이 나오지요. 앉은뱅이가 성전 입구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데,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행3:6)”라고 했지요. 이 말을 왜 합니까? 돈을 구걸하는 자에게 돈을 주든지 아니면 조용히 지나가면 되는데 왜 ‘은과 금은 없다’는 말을 했냐는 말이지요.
오늘날 교회에서는 “은과 금은 없거니와”를 말하지 못해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때 그 모임이 세력화 됩니다. 그런데 사도는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의 이름은 사물화 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일하고 계신 분을 소개한 거예요. “그분이 너로 하여금 앉은뱅이 되게 했고, 우리들의 만남을 주선했고, 너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고, 너는 곧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것 복습해 봅시다. 앉은뱅이가 일어날 때 믿음이 생겼습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사람입니까? 처음부터 구원 받을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의 말을 듣고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개기였을 뿐입니다. 그는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는 앉은뱅이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블랙홀에 갔을 때는 “내가 저 여자 괜히 건드렸어.” 이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를 통째로 다 알게 된 거예요. 이 점을 에스겔과 더불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시간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극북은 흑해, 카스피해 이쪽이고, 극동은 이란, 극남은 에티오피아, 극서는 리비아 쪽입니다. 이것을 극으로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완전히 포위 상태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곡을 일으켜서 전쟁을 하게 하시는데 이것이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전쟁은 최후의 전쟁입니다. 전쟁도 그냥 전쟁이 아니고 극 전쟁, 마지막 전쟁인 것이지요. 아까 집사님이 저에게 ‘마지막 선물’이라고 했는데, 마지막 선물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결혼해 달라고 준 선물은 마지막 선물이고 생애 최고의 선물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주는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에요. 너를 구원하는 분이 어느 정도로 센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조용하게 구원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화려하게 구원하십니다.
화려하게 구원하시려면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로 화려하게 절망해야 합니까? 지금 블랙홀에서 나온 힘이 주변을 모두 끌어당겨서 파쇄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온 군왕들이 다 일어나서 기름부음 자를 대적하는 최후의 전쟁이 아마겟돈에서 벌어집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집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가? 경계라는 것은 나와 질이 다른 것이 마주칠 때 경계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한계라는 것이 있어요. 이것은 설명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영국인이 있는데 무엇이 영국인인가? 경계로 설명하면 쉽습니다.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사람, 즉 아닌 쪽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영국인이다.’ 이렇게 하면 쉽습니다.
그런데 ‘참된 영국인이 무엇인가?’ 이렇게 물으면 골치 아픕니다. 경계선은 만들어졌는데 경계 안에 있는 진짜 영국인이 누구냐고 할 때 이게 바로 내부적으로 한계를 극한을 보여주는 겁니다. 일단 교통 신호를 잘 지켜야 되지요. 그리고 세금 정확히 내야 되고, 국경일에 영국 국기 게양해야 되고.
참된 영국인의 조건이 몇 가지나 되겠습니까? 이건 한계가 없지요. 한계가 없는 게 경계 안에 들어 있어요. 골치 아프지요? 분명히 경계선을 그었으면 무한이 아닌 유한인데, 유한 속에 무한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한계 쪽에서 볼 때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국인은 없습니다.
영국인을 성도로 바꿔 생각해 봅시다. 무엇이 성도인가? 절에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가 성도인지 알지요. 쉽습니다. 그런데 참 성도가 무엇인가? 참 성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마을에 있다가 나간 사람이 뭐라고 욕하는가 하면,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자기들만 참 성도라고 한다.”고 해요.
우리가 언제 그런 소리 했어요? 이렇게 공격을 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경계선의 성도를 가지고 성도로 간주하고 싶고 한계선에 있는 성도를 성도로 간주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형식적이고 외형적으로 교회 가니까 같은 형제라고 하자는 말이지요. 십자가마을에 있다 나간 사람들의 말을 제가 대신해 준다면 “성경은 형제들이 서로 우애하며 아름답다고 했는데 왜 십자가마을은 같은 예수 믿는 사람을 자기와 함께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하는가? 그런 태도는 성경과 다른 생각이기에 십자가마을 사람들은 성도 아니고 그곳에서 나간 사람들이 진짜 성도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지금 그분들은 경계선에서의 성도와 한계선에서의 성도를 구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성경을 보면 한계선에서의 성도는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만 참 아담이다.’라고 했지요. 예수님만 참 아담이고 인간이에요. 이 말씀에 그들은 동의를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면 나는 뭐지?” 이렇게 나와요.
그동안 예수 믿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했던 내가 성도 아니면 뭐냔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성도 되는 조건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에 누가 참 성도다운가를 따질 때, 첫째, 찬양해야 된다. 그러면 찬양 끝나고 무슨 노래 부르지요? 계속 찬양만 해야 됩니다. 이건 천사나 하는 일이지 사람이 가능합니까?
다음에 십일조를 해야 된다. 돈이 있어야 하지요. 아들 피아노 레슨비로 다 썼기에 십일조 할 돈이 없어요. 대출금 이자 낸다고 십일조 낼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참 성도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자체가 뭔가 하면, ‘내가 곧 참 성도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돌려서 하는 말입니다.
어제 가락교회 강의해서 했던 이야기인데, 컵이 있다면 “컵이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그는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 컵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이렇게 물어야 돼요. 성경에서는 “주여, 제가 무엇을 하오리까?” 이렇게 묻지요. “내가 성도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한 존재입니까?”라고 물어요.
“너는 값을 주고 샀으니 주의 것이다.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성경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해도 ‘누구를 위해서’가 빠지면 그 행동은 악한 행동이 됩니다. 그런데 ‘주를 위해서’가 되면 악함과 선함의 경계가 희석되어 사라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때릴 때 주를 위해 때리면 이것이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자기 아내를 눕혀놓고 발로 밟는 것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주를 위해서 밟을 때가 있어요. 아내가 온 몸이 아프다고 할 때 침대에 눕혀놓고 밟을 때 이것이 주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아내를 발로 마사지 해주는 그 때 주께 영광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내를 마사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마사지 해줄 그 때 확인된 거예요.
평소에 아프기를 바랐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할 방법을 못 찾다가 새벽 세시에 집에 들어와 피곤해 할 때 밟아 주면서 ‘처음부터 너를 사랑했노라.’라고 마사지 해주는 것. 유한 속에 무한이 들어온 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네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라고 했습니다.
무한과 유한은 우리 안에서는 날마다 우리를 죽입니다. 왜냐? 우리가 죽지 아니하면 모든 공로를 우리가 가져갑니다. “내가 했습니다. 내가 믿었습니다. 내가 사랑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주님은 당신의 피가 중요하기 때문에(우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피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늘 우리를 죽이고, 또 피는 부활의 피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죽이고 살리고, 죽이고 살리는 작업을 하는데 그것을 마곡이란 곳에 포위된 채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장치입니다.
우리는 그 장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극동, 극서, 극남, 극북을 찾아야 됩니다. 나를 포위해 오는, 주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서 어떤 경우라도 내 힘으로, 내 믿음으로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믿음이라고 했을 때 늘 생각해야 될 것은 ‘겨자씨 믿음’이죠.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의 나무를 옮겨 바다에 빠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콩만한 믿음이 있으면 지구가 통째로 날아가겠네요?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경유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디를 거쳐서 가는 거예요. 믿음이란 내 믿음으로 바로 주님에 들이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직접 누구에가 다가서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거쳐서 “나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귤을 주셨습니다.”라고 할 때 주님의 공로가 돌아가지요. 이게 바로 경유(경과)입니다.
믿음이란 이 경과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출발할 때는 나로 출발했지만 주님을 경유하면서 내가 하겠다고 선택한 그 선택마저도 주의 선택이 전제로 한 선택이죠. “내가 포도를 먹을까, 귤을 먹을까? 귤을 먹어야지.”하는 것도 주님을 경유에 보니까 주께서 귤을 선택하겠금 만든 거예요.
우리가 타인에게 다가갔을 때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착한 일, 나쁜 일이 사라집니다. 백화점에 멋있는 원피스가 걸려있습니다. 50만원인줄 알았더니 앞에 3이 하나 더 붙어 있어 350만원입니다. 값이 비싸지만 내가 갖고 싶은 마음이 든 이상은 내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 옷을 사면 10년 동안 후회할 것 같아요.
그래서 가서 옷을 샀을 때, 이것이 착한 일입니까, 악한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옷을 살 때 주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샀다면 이것은 믿음에 관한 행위입니다. 주께서 눈에 띄게 하셨고, 결국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사게 된 것도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면. 하늘나라에서 내 행위를 찍는 다면 셔트를 누를 때마다 ‘주께서, 주께서’가 계속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생활입니다. 그러니까 믿음 생활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입니까?
계속 해봅시다. 옷을 사고 나오는데 우연히 어떤 중학생이 라이터로 장난을 치다가 옷을 태웠습니다. 누가 태운 것입니까? 주께서 태운 거지요. 이것도 주를 경유하게 되면 ‘앞서서 옷 사게 하신 것은 태우려고 주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주께서 이 몸으로 실컷 믿음생활 하게 해놓고 죽을 때 죄 값으로 죽이시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신앙생활 시키신 것입니다.
마음껏 죄짓게 해놓고 죄 지었다고 죄 값으로 우리를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실컷 마음대로 살게 해놓고 그 일을 했다고 멸망시키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선지자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식, 망해야 구원 받는 이 길을 하나님이 제시한 겁니다.
“아버지, 돈 주세요.” 해서 돈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납니다. 돈 있으면 아버지는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는 돈 공급해 주는 분이거든요. 프로이드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은 근원적인 죄가 있는데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신 아버지를 죽여 버린 죄’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었으면 그에 대해 보답을 해야 될 텐데 아버지의 사랑은 내가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능가하는 사랑을 주었기에 그것에 대해 우리는 화를 내고 있는 거예요.
사랑을 줘도 적당히 주면 보답을 할 수 있는데 내가 갚을 수 없는 사랑을 주면 받는 사람은 기분 나빠요. 사모님은 그런 느낌 없었어요? 과도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죄를 안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과도한 사랑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우리가 내 중심으로 살아가는가를 폭로시킵니다.
그래서 인간은 과도한 그 기본적인 죄,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면서 베풀어주신 모든 것, 베풀어주었다는 말을 물질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아무리 아버지를 생각해도 평소에 부모가 나를 생각하는 그 분량만큼 생각할 수 있는 역량이 예초부터 우리에게는 없어요. 없는데 부모가 나를 사랑할 때마다 내가 할 수 없는 여분의 것을 달라는 것처럼 오해하는 내가 미워요.
내가 장학금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엄마가 기뻐하고 칭찬을 해도 엄마가 그동안 날 위해 베푼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부모님의 사랑에는 못 미치기에 공허감이 있어요. 이 공허함을 어떻게 하는가? 아예 나쁜 짓을 해요. 그러면 엄마가 화를 내겠지요. 그 때 나쁜 짓에 대한 죄책감을 내가 갖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인 죄책감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일부러 말썽을 일으켜서 부모님께 맞을 때, 맞음으로써 다소나마 엄마에게 다 못한 효도를 엄마에게 맞는 순간에 약간은 상쇄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래서 윤리는 죄를 감추는 더 큰 죄가 됩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포위하는 마곡이 나오지요. 에스겔 당시에는 지형적으로 실제 이들이 공격합니다.
이 본문 말씀이 그대로 신약으로 옮겨가요. 그러면 신약은 이것이 지리적이 아니고 약속의 땅 자체가 이 땅에서 공터가 없어요. 분명히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약속을 다 이루었다고 했으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최소한 양과 소가 쏟아져야 해요.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축복 받을 때 양과 소가 늘어났지요. 그러기에 부동산이 넉넉히 있어야 되고, 자손은 하늘의 별은 너무 심하더라도 200명 정도는 태어나야 돼요.
그런데 주님은 다 이루었다고 했는데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다 이루었으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져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고 고생만 시킵니다.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지상에서의 박탈입니다. “애들아 그만 놀아라. 저녁 먹어야지.”라고 할 때 엄마가 검사하는 것은 양 손에 들고 있는 모래를 떨어내는 겁니다. 아이가 놀면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박탈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삼층 천에 올라갔기 때문에 1층에서 봤던 백화점이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만약 바울에서 아인슈타인이 “저는 상대성 원리를 발견했습니다.”라고 한다면, “기껏 2층 이야기야. 나는 3층에 있어!”라고 할 겁니다. 박탈이에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마곡이 사방에서 포위해서 조여 옵니다. 이것이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입니다. 아마겟돈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어날 수도 있겠지요. 왜냐하면 여러 민족들이 전쟁하는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지만 실제로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은 신약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그러면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에스겔 37장 14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왔다고 하지요. 신이 와야 돼요. 신이 안 오면 결합이 안 되니까. 신이 온다고 하고, 그 다음 이야기가 뭔가 하면, 둘로 갈라진 나라가 한 나라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 38장 이야기는 한 나라로 이뤄지는 과정에서 마곡이라는 절대적인 나라가 주변나라와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지요. ‘다 이루었다’고 한 후 제자들이 활동하지요. 그러면 제자들이 이스라엘인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약속이 뭡니까?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자손이 번성한다고 했지요.
그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면 손에 뭔가 쥐어진 것이 있어야 하는데, 제자들은 다 흩어지고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갑니다. 마곡이 포위하고 이런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도 한국교회와 신천지 교단에서는 마곡은 어디고, 666은 누구를 이야기하고 자꾸 역사적 바탕에서 말씀을 풀려고 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갔으면 ‘다 이루었다’가 덩달아 하늘로 올라가지요. 이걸 사도 바울은 삼층 천이라고 합니다. 여하간 하늘로 올라갔으면 그 하늘은 지금 어디에 있지요? 안드로메다인가요? 그 하늘이 어디입니까? 제가 아까 질문하면서 “컵이 무엇이냐?” 이렇게 묻지 말라고 했지요. “누구를 위해서 컵이 있고, 나는 누구를 위해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늘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면, 이 세상 경계 바깥으로 갔어요. 그러면 이 세상은 어디입니까? 1 지구를 말한다. 2 태양계를 말한다. 3 태양계에 속한 은하계를 말한다. 4 우주 전체를 말한다. 몇 번입니까? 주님은 세상 밖으로 가셨다고 하니까 세상은 무엇이냔 말이지요. 정답이 없어요.
그럼 뭐냐? 이 세상을 떠나신 분이 세상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세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보냈던 세상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그 상황이 ‘어두움’이고, 그 어두움을 주님은 ‘세상’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세상 안에 인간들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악마도 포함되고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이 이 세상이다.’라고 하면 안 되고,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해서 세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돼요. ‘이 어두움은 누구를 위해서 어두움이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어두움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위한 어두움이고, 그것이 세상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해서 산다고 해도 우리가 주님을 위한 존재가 되었다면 세상에 속해도 우리는 하늘나라에 사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한계입니다. 우리는 귤을 까도 제대로 못 까요. 어설퍼요. 나중에 치매 걸리면 “예수가 누구냐?” 이런 소리 할 거예요. 하지만 유한한 우리 속에 무한이 들어있어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어야 되고, 죽는 순간은 예초부터 우리가 죽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고, 이미 우리는 죽었고 그 다음에 무엇을 경유해야 됩니다. 십자가 안에 있으면 죽어도 예수님이 함께 있기 때문에 사는 거예요. 예수님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포장지로 삼으신 거예요.
세상 안에서 우리는 주님이 함께 있는 상태로 우리가 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이 몸은 어디에 속합니까? 분명히 세상에 속하지요. 항상 죄를 지으니까. 그런데 감사한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세상을 좋아하는 우리가 주와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고후4:11).”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물 길러 왔지요. 그 때 예수님이 여인의 사생활을 거론했어요. 왜 그렇게 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구원을 반복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잖아요. 그런데 멸망당했지요. 멸망당하니까 나라가 없지요. 나라가 없으니까 이스라엘이 누구를 기다립니까?
사사기에 보면 나라가 어려울 때 누구를 부르짖죠? 여호와를 부르짖지요. 그 사마리아 여인의 사생활을 공격해서 남자 다섯이 있었는데 지금 사귀는 사람은 여섯 번째 남자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어느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 대답은 이곳도 저곳도 아니지요. 그럼 어디입니까? 성령으로 예배할 때가 오지요.
그러면 성령이 지금 어디에 들어 있어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는데, 외형적으로 볼 때 지금 주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네 안에 들어갈게. 그래서 너로 하여금 예배드리는 처소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 장소만 제공할 뿐, 우리 안에서 예배드리게 하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이게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는가? 주께서 일을 벌였기 때문에 선과 악(선악과)은 우리와 관계없어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나중에 어떤 아저씨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착하게 되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죄에서 이미 벗어났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만 여자는 답변할 수 있어요.
“당신은 나에게 선하냐 악하냐를 묻는데, 그렇게 물으면 안 되고, 당신은 어떻게 선과 악이라는 그 틀에서 벗어났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 여인을 할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용서해 주셔서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답변하는 그 용도가 그 여인의 용도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간음을 했어야 됩니다. 간음하다 발각되는 순간 자기는 뭘 느낍니까? 주께서 창세전에 나를 쓰시고자 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여인이 그 생각을 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착합니다.’ 이렇게 나올 공산이 크단 말이지요.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가는 버릇이 있기에 그렇게 됩니다. 그 때마다 성령이 오셔서 ‘선과 악에 대해 손 떼라.’고 하시지요.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천국은 선해서 가는 나라도 아니고 악해서 못가는 나라가 아니라 선과 악과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가는 나라다.” 왜냐하면 천국은 그만한 능력이 있어요. 우리를 끌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지요. 그 능력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뭔가 하면, ‘내가 고백할 것은 예수님이 날 구원했다는 것 외에 다른 말을 할 것이 없다.’ 이것입니다.
“당신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으면,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좋은 지역에 별장 지어놓고 법무부 차관 초청해서 다른 대접하지 말고 “여자도 없고 돈도 없지만 오직 예수님을 당신에게 소개합니다.” 이렇게 했으면 건설업자에게 누구도 욕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돈을 더 뽑아내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짓을 했지요.
구원도 안 되는 것에 신경을 쓴다는 자체가 뭔가 근본적인 죄가 있는데 그걸 감추려고 부자 됨으로 말미암아 복 받았다는 티를 내서 근원적인 것, 하나님께 받은 것이 있는데 보답이 안 되는 그런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노림수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라.’ 하지 말라가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하세요. 그런데 그것이 다 주님에 의미를 두면서 하세요. 이미 구원 받은 자로써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유한 속에 무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자꾸 경계를 만들어요. 자기가 예수 믿고 술을 끊었으니까 술 안 끊은 사람은 지옥 간다고 해요. “고린도전서를 봐. 술 취한 자는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잖아.” 이렇게 나오지요. 자신이 술 끊기 전에는 그 본문 언급 안 합니다. 자기가 끊었기 때문에 자신만만해서 그 본문을 언급하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시간에 외치는 것은 “나는 구원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외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이 와야 됩니다. 성령이 안 온 상태에서 예수 믿으면 나를 위해서 예수 믿는 거예요. 이것은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건 가인이에요.
19절을 봅시다. “너는 곧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에브라임의 손에 있는바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지파들의 막대기를 취하여 유다의 막대기에 붙여서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여기에서 ‘되게 한다’는 말은, 떨어지게 될 때 누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떨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로보암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대들고 “우리는 너희들과 같이 할 수 없다. 우리 열 지파는 따로 독립하자.”는 선택은 뭡니까? 그것은 여로보암의 선택 이전에 주의 말씀을 응하게 하기 위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미 솔로몬이 일을 벌였어요.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혼인해서 전략적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할 그 때 이미 나라가 둘로 나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 안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뒤에 여로보암이 등장해서 나라를 둘로 쪼갠 거예요. 그렇다면 이걸 총괄적으로 보면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우상을 섬긴 것도 사실은 주를 위해서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문제는 솔로몬이 그것을 알면 구원 받고, 주를 경유해서 자기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 없으면 지옥 갑니다. 솔로몬이 지옥 갔는지 천국 갔는지 그것은 우리가 판단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을 판단하려면 우리가 주 밖으로 나와 있어야 되는데 주 안에 있는 이상은 주님 몫이 되고, 주 밖에 나가 있으면 주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또 판단할 수 없고.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판단할 수 없어요. 어떤 목사가 천국 갔다, 지옥 갔다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런 것은 복음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지요.
22절을 봅시다.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임금이란 자리는 모든 개인의 창조적인 노동을 뿌리째 뽑는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동을 해도 그 모두는 임금에게로 갑니다. 바지사장이면서 자신이 설치니까 그야말로 이방 나라가 되지요. 유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뭡니까? 임금 자신은 분명히 바지사장입니다. 여호와가 왕이에요. 여호와가 왕이라면 백성과 의논하기 전에 하나님과 의논해야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과는 의논이 안 돼요. 왜? 선지자는 잡아 죽이기 바빠서.
나단이 와서 손가락질 하면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다윗은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이렇게 했지만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나단 선지자 손가락 잘랐을 거예요. 요즘도 성령 받은 성도가 목사를 행해 손가락질 하면서 잘못을 지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에 대해 “회개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목사는 없어요. “내가 개척해서 세운 교회를 어디 감히 장로가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야!” 하면서 장로 쫓아냅니다.
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이 똑같은 원리로 오늘날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100억을 착취하던 10억을 착취하던 간에 천국은 어떻게 가는가? 회개할 때 갑니다. “내가 상대를 호통 쳤던 그것마저 죄의 박물관에 보관해야 될 나의 죄악 된 모습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 예수의 피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우리가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되었다는데 그 흔적이 죄로 나온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하는 일마다 주 앞에 화내고 원망하고 반항하며 주님 미워하는 짓밖에 없었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본심인 것을 깨달으면서 이 죄마저 용서하신 주님의 피만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이 피를 전하는데 양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4. 19. 09:33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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