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26강, 27강) 교회의 할 일, 이방인 130321
유튜브(26강, 27강) 교회의 할 일, 이방인 13032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26강
27강
유일자(IP:116.♡.234.248)
13-03-24 16:18
26강-YouTube강의(교회의 할 일)130321-이 근호 목사
26강으로 “교회의 할 일”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라는 것이 외부적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걸 가지고 교회라고 하거든요. 사람들이 모이게 되면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모이는 그 숫자를 세게 되고 그러한 위임 자체가 흩어 질까봐 걱정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혼자 있는것 보다도 여럿이 모이게 되면 힘이 나는 것입니다. 여럿이 모여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더 잘 믿어지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팍팍 도와 준다는 느낌도 받게 되는데 문제는 교회가 형성되면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믿는게 아니고 교회를 믿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의 대상, 다시 말해서 “저는 교회를 믿었으니까 구원해 주세요” 하는 식으로 마음이 갈 수 있습니다. 결국은 교회라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훼방하고 방해한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교회라는 것이 서로 모였으니까, 간판 걸었으니까 교회라고 우길 것이 아니고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 봐야 돼요.
성경에 보면 요한 계시록에 7교회가 망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계시록 보면서 7교회가 망했다는 생각을 잘 안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원하다. 한번 교회는 영원한 교회다.” 자꾸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데 실제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영원한게 아니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라는 것은 없어야 되는가! 교회 원래 핵심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뭉쳐져 있으니까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를 믿는 것처럼 그들도 그들의 뭉쳐진 이스라엘 나라를 믿는 그런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 만약 관여하지 않고 개입하지 않으면 그들도 불신자하고 똑같겠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개입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소속되어 있는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길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가를 깨우쳐 주는 식으로 개입을 했죠.
오늘날 교회에 설교시간이 있고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반드시 이점을 언급해야 돼요.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체를 믿다가 망한 것처럼,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셨습니까? 그러면 교회를 믿지 마세요. 교회에서 손을 놓으셔야 합니다. 인간의 모임에 대해서 손을 놓으셔야 합니다.” 라는 얘기를 반드시 해줘야 됩니다.
사실은 그런 식으로 해주는게 아니고 오히려 교회에서 손을 놓을까봐 우리를 더 닦달하고 있죠? 구약 이스라엘에서 교회 이스라엘 됨이라고 결정 하는 것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서 광야 간다고 이스라엘이 아니고 거기에 주님이 함께 동행 했다는 점이 이스라엘이냐, 아니냐를 결정지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 이스라엘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면 눈에 안 보이는 분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벌려 놓은 일, 그 자체에 대해서 믿어야 되는 거예요.
한번 정리하면 이스라엘의 믿음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믿어질 때 비로소 그러한 상황이 이스라엘로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모세하고 하나님하고 산 위에서 이야기 하면서 모세가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 저 혼자 내려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14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이렇게 돼있어요.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대화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직접 친히 우리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그 이야기였어요. 이 말은 하나님이 친히 가면 이스라엘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우리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이스라엘이 되질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이미 거론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이 빠져 버리고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그 이스라엘은 일종의 사업이 되고 맙니다. 인간들이 인간의 단체를 운영하고 경영하는 바가 되는 거죠. 그러면 한 교인 한 교인이 아쉽고 그게 필요하고 또 그들이 교회 오면서 갇고 오는 돈 이라는 것, 헌금이라는 것이 더 아쉽고 중요한 거예요.
아! 오늘 교회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근데 돈 가지고 오셨습니까? 뭐 빈손으로 왔다구요! 그럼 교회 왜 와요. 이게 목사들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노숙자가 그냥 들어오면 짜증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점심 먹으려면 돈 나가고 그 사람 행패 부리면 교회라는 사업체가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소위 돈 많은 부자들이 질 낮다고 안 오게 되고, 돈이 교회에 안 떨어지게 되면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무슨 자금으로 운영이 되겠습니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어떡하든지 인간을 닦달 내게 되고, 인간의 마음을 돈 낼 수 있도록 겁을 주든지, 협박을 하든지, 천국을 팔아먹든지, 예수를 팔아먹든지, 축복을 난무하든지 돈만 떨어지면 그 사업은 성공한 거예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업이 다 그렇잖아요.
그럴 때 그 교회는 아직도 버티고 있다고 내세울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구약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예요. 예수님도 말씀 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나와 있다면 그게 교회예요. 두 세 사람이라도 주님이 함께 있다면 그게 바로 교회다 이 말이죠.
유일자(IP:116.♡.234.248)
13-03-24 16:19
두 세 사람이 있을 때는 기분 안 좋았다가 삼천명, 오천명 함께 있다고 기분 좋게 되버리면 그것은 이미 기분 좋은 그 믿음의 내용이 주님과 함께 있음이 아니예요. 사람들이 함께 있음을 기쁨의 이유로 삼는 겁니다. 야~ 두 세 사람이 있다니... 차라리 죽는게 낫지. 이러다가 갑자기 삼천명 몰려오면 그래! 이 기분이야. 자! 이 기분으로 목회 하는 거야. 이렇게 돼버리면 이미 그 사람이 믿는 믿음의 대상은 주와 함께 있는게 아닙니다. 사기꾼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다 사기꾼 같은, 다같이 사기치는 그런 집회를 내심 원하고 있는건 아닌지요.
외롭게 믿으니까, 너무 성급하니까 수천명 함께 믿을때 왠지 그 집회에 끌리고 있다는 것은 실지로 우리가 믿음 있다고 하지만,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안 믿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합니다.
민수기23장 21절에 보면“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 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그들의 패역을 용서해 준다는 겁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교회는 뭡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는 분만 있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족하지 않습니까? 수천명 모인 그것이 우리 죄를 용서 합니까? 교회 목사만 해도 10명이 넘고 장로가 100명이 넘는 그 교회가 우릴 용서해 주십니까?
결국 용서해 줄 수도 없는 인간들의 집회를, 집단을 우리가 즐거워 한다는 것은 우리의 평소 마음가짐이 죄 용서라는, 죄 사함 이라는 주님의 사랑보다도 어떤 권력을 내가 큰 권력에 속해있는 또 하나의 작은 권력자로서의 행세하고 싶은 이러한 욕망의 충족 아니겠습니까. 어찌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열두제자가 시작할 때 교회는 없었습니다. 베드로보고 교회를 세우리라고 했지만 그 자체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뭐냐? 모두가 한분만 바라보는 거예요. 서로가 바라보는게 교회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바라보는게 교회입니다. 그 열두제자가 열두명 모여서 예수님과 함께 다닐 때 교회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성령을 보내 주니까 그 성령에 의해서 오직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칠 때 그것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유일자(IP:116.♡.234.248)
13-03-24 16:21
27강-YouTube강의(이방인)130321-이 근호 목사
27강 제목은 “이방인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이 나오는데 유대인 말고 일반 사람들은 상당히 이상히 여깁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을 만들 때 공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 하는데 어떻게 이방인이라는 말 따로, 그리고 이스라엘 따로, 따로 따로 구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공평하면 이 공평이 모든 인간에게도 공평해야 되는데, 왜 공평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마치 내놓은 자식처럼 같은 인간인데 왜 그렇게 간주하느냐 이렇게 생각이 드실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만들어 놓은 것 자체가 전부다 공평하게 처리 하실 것 같지만 인간을 만들어 놓은 분이 하나님이잖아요.
만드신 분이 만들어 놨을때는 똑같이 취급하겠다고 우리 만들어진 입장에서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냥 만든 것이 아니고 누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 말을 달리 얘기하면 예수님이 하신일이 중요하다고 해서 우리를 만들어 놨습니다.
이걸 달리 얘기하면 피조물의 운명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따로 따로 운명이 나누어져야 되는 겁니다. 공평한, 동일한 운명 같으면 예수님이 하신일의 취지가 살아나질 않아요.
이걸 어렵게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일하신다. 더 어렵게 얘기하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다. 달리 얘기하면 우리 위주가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 던져준 언약을 실현시키는 와중에서 우리를 집어 넣는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언약으로 유명한 것이 창세기12장에 나오는 “나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린다.” 해서 축복과 저주를 아예 취소시키고 할 수 있는 권한은 아예 우리한테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이 언약대로 이뤄질려면 반드시 저주 받는 쪽이 필히 나타나야 되고 축복받는 쪽이 필히 나타나야 됩니다. 그 저주 받는 쪽에 역할을 구약에서는 이방인이라는 사람들이 담당을 한 겁니다. 그리고 축복받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인이 보여주기 위해서 담당한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축복과 저주가 인간의 행함에 의해서 결정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언약대로 움직이는 활동에 의해서 축복받을 자는 축복받고 저주 받은 자는 저주 받도록 확정돼 있습니다.
누가 저주 받는가! 그건 이방인들이 저주받는 역할을 해야 되는 겁니다. 바로 구약에서 저주 받는 사람은 언약에서 배제 됐기 때문에 저주받는 거예요. 그러한 이방인의 입장이 신약에 와서도 계속 되는데요. 문제는 하나님의 축복받기로 작정된 그 이스라엘 사람한테 축복과 저주를 결정질 하나님이 도리어 매 맞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여져 버립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때 “자기는 어떻게 하든지 축복받는 백성이기 때문에 예수당신도 우리 의견에 동조해야 된다.” 라고 억지를 부렸기 때문에 예수님은 살해당한 거예요. 예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축복받는 사람 받는거 맞습니다. 저주 받는거 따로 있는거 맞습니다. 어떤 인간도 그 기준에 대해서는 몰랐던 겁니다. 하나의 비밀로 감추어진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축복받고 저주받는 다는 것은 이미 저거들이 알아챘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제가 아까 처음에 얘기 했듯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은 축복받을 사람이고 언약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저들은 장담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언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들은 만나 본 적이 없어요. 일방적으로 자기들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받는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그런데 그 해석이 틀렸습니다.
마태복음6장 31~32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참 재미있는 말씀이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 하는 것은 이방인들, 저주받은 자들, 지옥 갈 사람들이나 이런 생각으로 평소에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그 당시에 복 받은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 들이 될 때에 그들은 이 말씀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분명히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간주했는데, 자기는 어떤 경우라도 이방인은 아니라고 오직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혈통적으로 보장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그런 것은 저주받을 지옥 갈 이방인들이 하는 짖이다.라고 했을 때 누가 이방인이 아니라고 할 자신 만만하게 얘기할 사람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어느 인간치고 아침에 눈뜨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세상에 나가 보세요. 인간들의 자랑거리가 뭡니까? 각 집안에 명예가 뭡니까? 남들보다 더욱더 많이 마시고, 먹고, 입고 한 그것이 기준이잖아요. 이방인아닌 사람이 누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 안 갈 사람, 저주 안 받을 사람 누가 있습니까.
자~ 이런 얘기를 그 당시 유대인보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겁니다. 왜! 우리는 유대인들인데 언약을 아는, 하나님을 아는 축복받은 백성인데 당신이 그렇게 얘기해버리면 우리는 졸지에 지옥 갈 이방인처럼 취급 받잖아.라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이방인이라고 주장하든, 아니라고 주장하든 결국은 주의 말씀에 입각해보면 이방인이 아닌 자가 한명도 없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진짜 언약 사람이 될까요? 에베소서2장에 보면 십자가가 나옵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지상에서 지평으로 둘로 나눔을 십자가지신 예수님이 하늘에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속한 자와 지상에 남아서 망해야 될 사람과 수직적으로 구분하는 기준으로 십자가가 주어지는 겁니다.
에베소서2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예수의 피안에 있는 자들과 예수의 피 밖에 있는 자들을 새롭게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언약의 결정판이 이제는 마지막으로 등장 했다는 이야깁니다.
예수님의 피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모든 언약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모든 언약을 다 이룸 그 안에 있다는 겁니다. 피안에 있다는 것은 그냥 찍어 바른다는 뜻이 아니고 예수의 피안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해서 작정하신 참 이스라엘 되는데 하등의 조금도 하자가 없고 완벽한 조건이 다 갖춰져 졌다는 이야깁니다.
이 안에서는 더 이상 지상에서 구분하는 너는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다. 나는 혈통적으로 이방인이다. 남의 백성이다 라는 구분이 지어지고 수직적인 구분만 새롭게 개시를 하고 시작을 하는 그러한 시점에 우리가 드디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4장 3절에 보면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쫒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렇게 해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십자가 피안에 있는 사람은 이제는 이방인의 때에 저촉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얘기 합니다.
너희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하는짖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 이러한 것에 구애 받을 필요 없다. 이런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런 저런 짖들 한 것에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에 대해서 우리가 지켰냐 안지켰냐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 피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음란 하냐 안하느냐를 따져서 음란안하기 때문에 지옥 간다 천국 간다를 우리가 새삼스럽게 새로운 기준으로 행함을 결정내릴 그럴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방에게 저촉시킬 그런 때는 이미 지나간 거예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 십자가 용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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