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역 130320
패역 130320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패역 (겔 12:8-13)
이근호
13-03-20 21:06
패역
2013년 3월 20일 본문 말씀: 에스겔 12:8-13
(겔 12:8, 개역) 『이튿날 아침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2:9, 개역)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패역한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겔 12:10, 개역)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예조라 하셨다 하고』
(겔 12:11, 개역)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징조라 내가 행한 대로 그들이 당하여 사로잡혀 옮겨갈지라』
(겔 12:12, 개역) 『무리가 성벽을 뚫고 행구를 그리로 가지고 나가고 그 중에 왕은 어두울 때에 어깨에 행구를 메고 나가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리라 하라』
(겔 12:13, 개역) 『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란 새로운 기준이 등장하지 아니하면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인자人子’라고 부르시면서 자꾸 새로운 일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유대 백성들을 패역한 백성으로 단정짓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호되게 다루십니다.
왕은 눈이 뽑히고, 백성들과 귀족들은 노예 신세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동안 인간들이 나름대로 방식으로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나선 모든 일이 다 패역한 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유대 민족들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주의 이름’과 동거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땅은 그냥 일반적인 땅이 아니라 ‘주의 이름’과 같이 살던 그 땅입니다. 이는 곧 그 땅에서 일어나고 진행되는 모든 것이 일방적으로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한 일들이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이 훈련되어 있습니다. 자기 곁에 누가 다가와서 바짝 긴장하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생활을 같이 한다는 것은 기존의 자아상이 몽땅 바뀔 요량을 하지 아니하면 성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서로가 힘들게 마련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천국가서 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천국이란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좋아할 나라이기에 이런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같이 좋아하지 아니하면 천국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민족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가는 이유는, 평소의 마음가짐이 ‘주의 이름’과 동거할 마음가짐이 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패역한 마음’입니다. 무엇이 패역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어떤 식으로 들어갔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원리는 곧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원리와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서 나왔습니다. 따라서 이 어린양의 피 정신이 내내 이동하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있는 경우에만 약속의 땅에 입성할 수가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 정신이란, 이스라엘 나라 백성의 모든 목숨들을 담보로 압수해서 보관하고 계시다고 보시면 됩니다.
약속의 땅이 인위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주의 이름’이 갖는 초인적인 위신과 위상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노력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면 애초부터 약속의 땅도 아니요 천국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아이디어와 노력을 차단하면서 성립되어야 하는 것이 약속의 땅이요 천국입니다.
그것은 곧 죽음입니다. 사람이 자기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는 항상 앞 일에 대해서 지금의 사정을 감안해서 항상 상상의 나래를 펴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 신화에 오딧세이라는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는 10 여년 동안 바다를 헤매는데 어느 계곡에서는 그동안 무수한 선원들을 감미로운 노래로서 유혹하여 암초에 배를 바딪치게 하는 사이렌이라는 여신이 살고 있습니다.
음악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 누구도 그 노래의 유혹에서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이점을 미리 알고 있었던 영웅 오딧세이는 선원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어서 본인이 아니라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바로 이러한 계산들은 지금의 자아상에서 상상한 것으로 장래에는 ‘유혹에서 이겨낸 자아상’을 미리 내다보는 식입니다.
과연 이런 게 신앙생활일까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사정 두지 말고 마구 자신을 패라고 당부하는 것이 과연 죄의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도닦는 것 밖에 안됩니다. 이런 구원관의 문제점은 지금부터 상정한 미래의 자아상이 곧 구원받는 자아상이라고 본인이 구상할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구원받는 자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어린양이 계셔서 그분의 죽음이 밖으로 표출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즉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죽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이상향이나 보다 우수한 인격 소유자가 된 자아상을 상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마저 예수님과 더불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28-29에 보면,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불신자나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이 이렇게 빈정댈 것입니다. “흥, 누가 죽으래. 강한 힘으로 인간들을 물리치면 되지 왜 나약하게 죽어놓고서는 이제와서 묻느냐”라고 나올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자기 아들을 죽여놓고서는 그 책임을 차후에 인간들에게 묻는 방식으로 나오십니다.
이것은 곧 ‘회개없이는 구원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회개의 기준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그 회개의 기준은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나 할 도리’가 회개의 기준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죽으심 자체가 유일한 회개의 기준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이미 노아홍수 때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홍수와 방주와 그리고 ‘정결한 짐승 7쌍, 부정결한 짐승 2쌍’은 이 땅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창조되고 조성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홍수가 끝나고 다기 뭍으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잡습니다. 이로 인하여 땅은 다시 옛날 그 시절의 땅이 다른 원리 위에서 돌아가는 땅입니다.
곧 이 땅에서 정결한 피가 흐르는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원리에 준해서 땅은 영원함이 보장됩니다. 곧 피의 영원함을 간직하는 땅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천국에 들어가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자신의 모든 것이 인정받지 못함을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 여기는 자입니다. 유대나라는 이 은혜를 모독하고 그 대신 힘있는 나라인 애굽만 의지했습니다. 당연히 주의 이름과 동거하는 원리가 다르니 추방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죄의 박물관으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3-21 22:45
32강-에스겔12장 8-13(패역)1303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2장 8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2:8-13
“이튿날 아침에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패역한 족속이 네게 묻기를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아니하더냐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것은 예루살렘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예조라 하셨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너희 징조라 내가 행한대로 그들이 당하여 사로잡혀 옮겨 갈찌라 무리가 성벽을 뚫고 행구를 그리로 가지고 나가고 그 중에 왕은 어두울 때에 어깨에 행구를 메고 나가며 눈으로 땅을 보지 아니하려고 자기 얼굴을 가리우리라 하라 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에스겔이 먼저 포로 잡혀 가고 왕도 장님이 되어서 가는 것을 먼저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에스겔이 폼을 내 보여주는 거죠. 폼을 내니 주위 사람들이 에스겔이 하는 행동이 너무 이상하게 보이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느냐고 묻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시킨 일은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행동을 해서 주목을 끌게 함으로써 그들이 미처 모르는 장래 일에 대해서 에스겔이 몸짓으로 보여준 것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라고 호칭하는 에스겔이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 성도의 평소 하루 일상이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동일한 지시와 명령을 하달 받게 되는 겁니다.
행동을 어떻게 하라는 그것보다도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하는 거지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거든요. 이 세상은 지옥 같은 세상인데 천국의 삶과 지옥 같은 삶과 분명히 차이가 난다는 거지요. 그 차이남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 보니 탈출입니다. 포로 잡혀 가는 것, 빠져나오는 것, 이런 모습이지요. 그래서 오늘날 성도에게 하나님의 지시하는 것을 단적으로 언급한다면 이렇습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탈출할 때는 이런 모습으로 탈출해야 천국 가는 모습답다.”고 하는 그것이 오늘날 성도의 삶의 모습을 규정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뭘 하든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라고 여기는 모든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마치 이 땅에 남의 땅이고 이 땅을 떠나야 될 사람이라는 모습을 가지고 우리는 여기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포로 잡혀 가는데 14절에 보면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 부대들을 다 사방에서 흩고 또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친 후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혹독하게 다루시는 이유가 9절에 나옵니다.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 곧 그 패역한 족속이 네게 묻기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이유는 ‘패역한 족속’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족속이기에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족속에 합당한 대로 처벌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에스겔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준 것이 또 하나 등장했습니다. 에스겔 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패역한 사람들로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패역한 족속이라 해서 사람들이 자진해서 ‘나는 패역한 족속’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분명히 자기가 패역한 족속이 아니라고 우길 것인데 에스겔이 하는 행동을 보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들은 왜 패역합니까? 패역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지요. 왜 그들은 패역했는가? 거기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그들이 살던 땅은 주의 이름이 함께 살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이 함께 있던 땅이기에 그 땅은 주의 이름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살기 힘든 땅이에요.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 예수님에 대해서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 들어가도 용수철처럼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어요. 왜냐, 거기 이미 주인이 계시기 때문에.
그 나라는 주인 맘대로 되는 나라거든요. 우리가 지금 천국 간다, 천국 간다, 쉽게들 말하지만 그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내 뜻을 일체 반영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뜻대로만 되는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그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으면 합류할 것이고 예수님의 뜻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 기분 더럽고 기분 나쁘다 싶으면 그 나라 합류하지 못합니다. 의외로 굉장히 간단하지요.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 함께 하는 땅입니다.
그들이 패역한 족속이라 해서 쫓겨난 것은 그런 식으로는 나와 함께 살 수 없다는 분명하고 명백한 언급을 한 거예요. 주께서 그렇게 보여준 겁니다. 이런 식으로는 너는 나와 같이 못산다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남과 같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저 혼자 살았으면 하는 것을 오히려 더 바랍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나오면 방을 구해야 되는데 방 구하기 힘든 것이 누가 자기와 함께 살아주기를 좋아해야 함께 살거든요. 혼자 살면 좋기야 하지만 방세가 너무 많이 드니까. 그러니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방을 쓴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 평소에 살던 버릇이 뭐냐, 자기 맘대로 하는 버릇이기 때문에 누가 옆에 같은 방에 있다면 힘들어져요.
저도 신학교 때 기숙사에 방이 없어서 학교 근처 아파트의 방을 하나 얻어서 누구하고 같이 있었거든요. 조 재수 전도사님과 김 달원 전도사님과 저 이렇게 셋이 같이 있었는데 일 년 쯤 되었을 때 주인아주머니가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왜 나가라고 하는가, 했더니 남자냄세 난다고 나가라고 하는 거예요. 이처럼 산다는 것이 그만큼 힘이 듭니다. 평소에 적응하는 것이 혼자 사는 버릇이 있거든요. 혼자 살든지 아니면 자기가 대장 노릇하든지. 그런데 천국이라 하는 것은 주와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먼저 보여줬어요.
그런데 주와 함께 사는 나라에서 사람들의 본성이 뭐냐, 혼자 살고 싶거든요. 혼자 살고 싶어하는 마음씨를 가지고 주님이 혼자 다 하는 상황 속에서 같이 사니 자연적으로 주님에 대한 생각은 멀어질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본성이 천상천하유아독전, 이것이 자기 본성이기에 주님이고 하나님이고 간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혼자 사는 것이 최고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과 함께 그동안 살았던 그 마음, 혼자 살고픈 마음가지고도 그만큼 산 것은 뭐냐, 주와 함께 살았다는 것은 주님의 희생덕분에 나오는 그 은혜 덕분으로 산 겁니다. 주님과 함께 약속의 땅에 삶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은혜 없이는 못산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게 되고 하나님 쪽에서는 진짜 땅, 영원한 땅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희생의 바탕위의 땅만이 영원한 땅이 되지 나의 희생이 없는 땅은 영원하지 않다, 라는 면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의 희생이 없으면 산다는 말을 붙이지 말라는 점을 자기 백성을 통해서 보여주는 그 점이 좋고 또 자기 백성은 그 희생덕분에, 은혜로 하나님과 함께 있어도 죽지 않는 면을 또 보여줍니다. 바로 그 희생적인 은혜, 그 희생적인 은혜를 쉽게 말하면 옛날에는 어린양으로 나타났지요. 제사를 지낼 때 정결한 짐승을 잡아 죽일 때 그 피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흘린 피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희생을 의미하고 그 제사에 의해서 은혜가 그들을 살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패역한 백성이라 했다는 말이지요. 패역한 백성이라 해서 이제 추방을 한다는 것은 네가 그런 식으로 나와 함께 살지 못한다는 뜻에서 패역하다고 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패역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이 패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 처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그들이 애쓴다고 탈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더니 그들은 탈출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자기식대로의 탈출, 어떤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힘 있는 나라 애굽에 의지한다든지.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선지자가 그렇게도 이야기했거든요. 선지자가 애굽에 의지하지 말고 차라리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라고 그렇게 언급하는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은 애굽이 작은 나라가 아니고 엄청나게 큰 나라고 바벨론보다 전쟁을 더 잘하는 나라라서 의지하거든요. 의지할 만해서 의지하기 때문에 그것은 혼자 살 때나 하는 짓이지 주님의 이름이 함께 있을 때, 주님이 은혜로 함께 있을 때 그런 행동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이 있으면 주님이 지켜주는 것이지 자기가 지키는 방식에 주님이 동의하지는 않거든요.
분명히 선지자가 ‘너는 하나님의 뜻이지 선지지의 말대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가라.’고 그렇게 했건만 바벨론 보다 더 세게 느껴지는 애굽을 의지했다는 말은 평소 마음가짐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했다, 그 말입니다.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됩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됩니다. 애굽의 칼이나 병거나 말, 이런 것으로는 구원 안 된다고 선지자가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 할 때 그들이 주문 외우듯이 그저 그 이름만 외우면 되는가, 주의 이름으로 할 때는 뭔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있어요. 내가 의지할 만한 것들이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요즘 사람들을 봅시다. 요즘 사람들이 천국 간다고 교회 다닌다고 하지요. 그러면 천국 간다 할 때는 이 세상에서 탈출이 가능해야 되는데 이 세상에서 탈출도 안 하면서 천국을 간다는 것은 구약에 의하면 있을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 탈출을 해야 약속의 땅에 가는 것이지 그냥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은 없거든요. 왜냐하면 약속의 탈출했던 그 방식이 계속 유효하고 살아 있어야 그것이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방식이기에 그런 겁니다. 쉽게 합시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는 방식이 천국에 넣어주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어린양의 피로써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들어갈 때도 어린양의 피를 앞장세워서 그 제사를 드림으로써 천국에 입성합니다. 여리고성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거든요. 이것이 처음부터, 노아때부터도 그랬어요 노아 때부터 하나님께서 땅이라나는 것이 뭐냐를 이야기해줍니다. 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 있어요. 홍수를 준비했고 그 다음에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또 준비한 것이 있어요.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 정결치 못한 짐승은 쌍으로 준비하고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으로 했습니다.
세 가지, 삼종세트에요. 제물 준비했고 홍수 준비하고 방주 준비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땅에 원래 감겨 있는 땅 유지 법칙이 뭔가를 노아홍수를 통해서 알려 주십니다. 정결한 짐승과 부정결한 짐승이 왜 있느냐 하면 그들이 나중에 홍수 걷힌 뒤에 땅에서 나와서 정결한 짐승을 잡습니다. 그러면 피가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정결함과 부정결함을 통해서 정결한 짐승의 피가 더럽기 짝이 없다고 규정한 부정결한 짐승까지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도 구원케 하는 효력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홍수가 끝나고 난 뒤부터 이 땅은 피가 살리는 땅으로 변합니다. 정결한 제물의 피가 땅을 살려주는 원칙이 흐르고 있어요. 이미 중심이 피 중심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옛날 그 땅이 아니에요. 옛날 그 땅은 피가 없는 땅이지만 홍수 끝나고 난 뒤에 피가 중심 센터로 자리 잡은 땅에 살게 됩니다. 그 피가 바로 언약이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 할 때 제일 큰 실수가 뭐냐 하면 지금 지칭하는 나는 구원 못 받아요. 나중에 구원받게 되면 현재 내가 지칭하고 있는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담겨 있는 나가 구원받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의 교회들은 뭐냐, 예수 피 믿었으면 이제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자, 이런 식으로 나오거든요. 히브리서 10장 2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방금 읽은 이 본문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래? 예수님이 자기 능력으로 안 밟히도록 해야지 자기가 연약해서 사람들에게 우르르 밟혀놓고 십자가에 달려서 힘든 모습으로 사형을 당해놓고는 이제 와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고 해서 ‘자기 아들을 밟고 자기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면 영원히 저주받는다.’는 이야기를 왜 하는가?”라고 한단 말이죠.
애초부터 강한 아들, 인간에게 안 밀리는 아들, 인간에게 안 잡히는 아들, 인간과 싸워서 안 지는 아들을 보내서 안 죽게 하면 될 일인데 힘없고 맥없이 인간들에게 죽게 해놓고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물으면 돼, 라고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할 거잖아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느냐하면 이미 하나님께 이렇게 당한다는 것을 만들어놓고 차후에 그 책임을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아, 우리가 똑바로 했으면 예수 안 죽였을 것인데.’ 그런 게 성립이 안 되게 하는 겁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구원의 근거로 아들을 약하게 만들어서 죽게 해놓고 그 다음에 ‘이 아들이 죽음을 당했으니 바로 너희들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라는 것을 차후에 따지는 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겁니다.
십자가를 잊으라고요? 그것은 악마의 소리입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잊고 이젠 십자가 생각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요, 교회를 즐기고 싶어요. 교회에서 노닥거리고 교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는 재미로 이 고달픈 인생을 달래기 위해서 교회라는 것을 하나의 친목단체로 만들어서 그런 거예요. 쉽게 말해서 회개 안 해도 갈 수 있는 천국을 교회가 소개하려고 하는 겁니다. 회개가 되려면 회개가 될 만한 기준을 제시해야 되거든요. 회개의 기준은 뭐냐 하면, 주님이 우리를 천국에 보내주는 그 기준밖에 없어요.
“너 내 돈 떼먹었지?” “형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안 할게요.” 이래가지고는 천국 못가요. 천국의 주인은 돈 빌린 사람 그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 아니고 우리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거든요.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천국은 누구 맘 대로라고? 예수님 맘대로 하는 나라에요. 우리는 그 나라에 합류하거든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서 이미 죽여 놔 버렸어요. 죽여 놓고 그 죽음의 책임을 우리한테 물으시는 겁니다. 네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회개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중심, 내 옳음과 내 잘남과 내 정당성과 내 즐거움과 내 행복, 이런 것들에 정신 팔리다 보니 정작 회개대신 자기 정당함을 주장하게 돼요.
회개는 안하고 서로 열심내고 노력하고, 이런 것들을 가지고 회개한 것으로 때우고자 하는 겁니다. 내가 신학에 대해서 잘 몰랐고 복음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 앞으로 알아가자, 이것을 가지고 회개대신, ‘이제부터 내가 복음 알아갈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반듯하게 살게요. 이젠 막 살지 않을게요.’ 이런 것을 가지고 회개를 대체하는 겁니다. 그게 마귀 짓이지요. 왜 회개를 안 하고 그냥 재미있게 즐기고 위로받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하느냐하면 오늘날 교인들이 교회를 와도 놀러온 겁니다. 회개하려고 온 것이 아니잖아요.
손님들이 가게에 물건 사러 왔는데 회개하라고 할 수가 없단 말이지요. 교회에 위로받고 사랑받고 쉬면서 사랑받으려고 온 사람에게 목사가 회개하라고 해버리면 그 사람들이 교회 오겠습니까? 헌금 하겠어요? 그래서 교회가 되겠습니까? 우리 애 어느 유치원 가면 됩니까, 이런 정보를 얻으려고 오는 거예요. 생활에 도움 되는 유익한 정보, 두루치기 하는 방법, 뭐 삶는 방법 같은 거요. 이렇게 자기들끼리 계모임하는 거고 동창회하는 것이고 놀러온 거예요. 그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설교 포인트는 뭐냐, 우리들이 더욱 더 사랑해서 이상적인 모습의 단체, 사랑이 넘치고 정이 넘치는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입니다, 그 이야기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에요.
회개? 없습니다. ‘아, 열심을 다 안했구나.’ 그것은 회개가 아니에요. 그것은 반성하는 것이고 회개라는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반듯하게 살아도 그것은 내 구원과 아무짝도 소용없고 다 내 자랑에 불과합니다.” 내가 앞으로 반듯하게 살아야지, 라고 하는 그 죄를 회개하는 것을 말해요. 앞으로 착실하게 살겠습니다, 라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회개에요. 이미 주님은 잘하는지 한 번 볼까, 가 아니라 이미 자기 아들을 죽여 놓아 버렸어요. 사람들이 성경을 볼 때 회개할 마음 없이 성경을 보기에 성경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떻게 성경을 보느냐, 지금보다 우수한 자아가 되기 위해서 성경을 보거든요. 지금까지 몰라서 어리버리 했는데 이제부터 알면 똑바로 된 삶을 살 것이라는 식으로 본다는 말이지요. 그것이 무슨 회개입니까, 도 닦는 것이지요. 그것은 도 닦는 것이지 회개가 아닙니다. 기원전 800여 년 전에 호머라는 그리스인이 쓴 오디세이라는 신화에 이런 것이 있어요. 오디세이가 10년 동안 바다를 떠도는데 어떤 해변 가에 사이렌이라는 여신이 있다는 거예요. 그 여신이 너무 매혹적으로 노래를 부르니까 어부들이 그 소리에 끌리다 보면 어느새 암초에 부딪혀서 배가 침몰해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이렌이라는 여신은 자기 소리에 매료되어서 자기 코앞에서 빠져죽는 그것을 보는 재미로 사는 여신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안 갈 수는 없고. 따라서 오디세이가 한 영웅적인 발상이 이겁니다. 선원들 보고 자신을 꽁꽁 묶으라고 한 거예요. 자신을 돛대에 묶어놓고 아무리 자기가 풀어달라고 애원해도 절대로 풀어주지 말라고 해놓고 사이렌 노래하는 곳을 지나가게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한 번 봅시다. 우리가 천국 가는데 죄지으면 안 된다. 그런데 죄는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오디세이 방식을 쓰는 수밖에 없지요. “목사님, 제가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저를 때려주세요.” 이런 식으로요. “내가 유혹에 빠져서 나쁜 짓을 할 때는 나를 가만두지 마시고 나를 때려주든지 어떻게 해서든지 나로 하여금 죄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 유혹의 계곡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라는 방식을 채택할 거라는 겁니다. 이미 그런 발상을 하면서 “제가 담배 끊었는데 또 피우거든 담배 다 뺏어버리고 따귀 올려 부쳐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할 그 수간에 그 사람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느냐 하면, 지금의 나의 죄짓는 모습과 수년 후에 무사히 죄 짓는 것에서 통과를 해서 죄를 이긴 나의 모습인 자아상을 여기서부터 상상해서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오디세이가 자기부하선원에게 당부한 것은 뭘 염두에 두었느냐 하면, 내가 무사히 통과를 해서 “그래, 난 드디어 사이렌 여신의 유혹도 이겼어.”라는 그 이상적인 내 모습까지 통과하기 전부터 자기맘속에 장착되어 있고 이미 잠겨 있다는 그 말입니다. 죄를 이겨서 천국에 가는 이 모습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 지점에 있다는 말은 그 계획이 다 허상이고 그 계획을 무산시키는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술 끊고 담배 끊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이 볼 때 얼마나 멋있겠는가, 그 멋있는 것을 미리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가 자기의 이상적인 자아상을 믿는 것이 돼요.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의 그 자아상을 위해서 이용해 먹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회개거리에요.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이 그 잘못을 모르게 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담배 끊었으니 죄에서 벗어났다고 착각이나 하고 술 끊었으니 죄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많은 교인들이 복음적인 설교를 들었다고 우기면서 여전히 죄 속에 있으면서 죄가 뭔지를 모르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자기가 구상한 죄를 벗어났으니까 이젠 십자가를 아니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전에부터 생각했던 자기 모습을 되찾아놓고 그걸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거예요.
그게 죄인데, 그게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에 생각했던 자기 자아상에 불과한 것인데요. 우리가 오디세이라면 오디세이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길 수 없는 유혹이 온다면, 야한 옷을 입고 다가올 때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성경이 이야기합니다. 그냥 죽어라, 그 말입니다. 묻지 말고 마음껏 하고 암초에 부딪혀서 죽어라, 왜, 그것이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던 우리의 운명이니까. 죽으라는 목소리와 함께 죽어버릴 때 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 지고 예수 따르는 모습이에요.
주님은 우리 보고, 네가 알아서 죄를 고치지 말고 죽으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의 눈알을 빼고 백성들이 포로 잡혀 가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상정하고 예상한 탈출, 하나님과 함께 있음, 그것은 전부 다 죄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함께 있음은 네가 구상한 하나님과 함께 있음도 아니고 천국도 아니고 진짜 천국은 예수님께서 날 무턱대로 살려줬다는 그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내 인생이 어떻게 꼬이고 어떻게 망가지는가와 관계없이, 내가 세리고 내가 강도고 내가 창기이고 이것은 나에게 당연한 것이고.
돌에 맞아 죽는다고요? 돌에 맞아도 할 수 없고. 그게 내가 당해야 될 원래 아담의 죄였다 하는 것을 수긍하는 겁니다. 이삭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모리아 산에서 죽을 때 당연히 죽어야 될 운명이지 몸부림치면 안돼요. 제발 몸부림치지 맙시다. 도 닦으면서 몸부림치지 맙시다. 구더기 밟으면 꿈틀하는 식 밖에는 안돼요. 우리가 구더기라고 하면 구더기가 화를 냅니다. “너는 구더기보다 못한 인간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한 것은 에스겔을 보라는 겁니다. 이것은 팔자고 운명입니다. 에스겔이 했던 그 행동은 하나님의 구원의 조치중의 일환이에요. 그게 힘들다고 해서 빠질 요령이나 부리고, 그런 식으로 예수 믿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영웅 되고자 하는 악마적인 시도에 불과한 겁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회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의 영이 오게 되면 우리는 회개하게 됩니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향이 구원의 내 모습인양 여겼던 그 자체, 그런 것 생각 안 해도 되는데 왜 쓸데없이 구원받고 나서 멋있어 보이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을 왜 자꾸 꿈을 꾸었는지, ‘주여, 그것마저 뭉개주옵소서. 그리고 내가 강도고 세리고 창기라는 그 모습만 해도 우리는 오히려 감지덕지하게 해주옵소서.’ 이런 모습으로 우리는 살아가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가 자기를 모방하고 모방한 그것을 또 모방하고 신앙생활이라고 한답시고 자꾸만 이상적인 모습을 걸어놓고 도 닦는 모습을 보이고 남에게 꿇리지 않기 위해서 예수 믿는 작태, 이런 모습들이 십자가를 모독하고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저희가 깨닫게 해주시고 살아가면서 주어지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희생, 십자가의 피에서 나와서 공짜로 얻어먹는 신세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