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1-종교에서 철학으로
201303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1-종교에서 철학으로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3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1-종교에서 철학으로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의 사회기 때문에 신을 섬기고 신화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사회를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사회란 가족에서 나왔고 가족은 남자와 여자로 되는데 처음에 도시를 만들 때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여자들이 일도 많이 했어요. 도시로 발달되면서 남자들이 전문직을 갖게 되면서 그냥 들에 가서 호미질이나 하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인 손 움직임, 반복적인 정신의 움직임 말고 인생이 뭐며, 세계가 뭐며, 신은 누구며, 달은 어떻게 변화되느냐? 별은 어떻게 질서를 갖추느냐? 이런 것 저런 것 따진다는 자체가 인도에서 아트만이라 하거든요. 아트만은 자아입니다.
1700년경에 아리안 족이 와서 기원전 800년경에 리그베다란 경전이 있었고 그것도 삐져서 우파니샤드란 경전을 따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주안점이 뭐냐 하면, 제사해서 신을 달래서 신에게 뇌물주고 그것다 다 귀찮은기라.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가 최고다. 이게 아트만이에요. 내가 누구냐는 필히 ‘자아=신’이 되는 겁니다. 신은 내 안에 있다.
기원전 483년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내와 자식도 버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고민을 갖고 가출했어요. 이 사람이 바로 부처. 그런데 이 부처란 사람이 아트만에 대해서 내 안에 있는 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철저하게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화에 대한 독립을 선언하면서 신화고 신이고 다 치우고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다는 뿐만 아니고 내가 누군지 알기만 한다면 내 바깥에 일어나는 일들은 나보다는 덜 중요하니까 바깥에 있는 신에 의존하고 종교에 의존하는 것은 다 귀찮다 이 말이죠. 어떻게 한꺼번에 끊는 방법은 뭐냐? 내가 누구지? 내가 진리를 내 쪽에서 알아버리면 그 모든 것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게 진정한 해탈이지요. 내가 누구냐? 사람들이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고 내가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 그러기 위해서 자식도 버려야 되고 가정도 버려야 되고. 모든 공동체가 가정이 중심이니까. 가정을 버렸다는 것은 곧 사회를 버렸다는 것이고.
그래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세상을 포함해야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세상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 알면 그게 절대 진리라는 것이죠. 이걸 첫째 시간 마지막에 나한테 얻는 유용성이 있으면 그게 진리라는 거예요. 남 좋은 일은 진리가 아니에요. 나한테 좋아야 진리에요. 이걸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남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진리가 아니에요. 뭐가 진리입니까? 내가 구원받아야 진리에요. 그러니 교회 가는 모든 신학이고 복음이고 이야기하지만 그 출발점은 내가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이걸 20세기 들어와서 뒤집어보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칼 바르트. 칼 바르트는 출발점을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는 겁니다. 그런 칼 바르트에 영향을 준 사람이 헤겔입니다. 헤겔이란 사람은 인간은 절대 정신에 의해서 발생되었단 말이죠. 헤겔이 말한 절대 정신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 사실에 있습니다. 성육신이죠.
진리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해버렸다. 진리가 부정함으로써 참 진리에 도달된다. 이게 변증법이라 하는 겁니다. 정반합. 진리가 자기 스스로 진리 아니라고 해버렸단 말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비참한데 이런 인간 속에 영원하고 비참하지 않은 분이 들어왔다는 말은 뭐냐? 비참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과는 반향성이 반대기 때문에 그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종전까지 알았던 모든 진리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인간에서 나왔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그럼 어디서부터냐? 신이 인간이 된 그 자리부터 출발해야 그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이른다. 그럼 그 진리와 종전 같은 진리는 대체가 된다. 대체가 되면 종전 것은 틀린 게 아닌가? 틀렸다고 버리면 안 돼요. 정반합이니까. 반이 있다는 것은 다시 정으로 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되니까 버릴 필요가 없다고 본 거예요. 제가 개혁주의신학회에서 논문 발표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역사라는 게 필요 없지 않느냐? 필요가 있다, 없다는 그것은 누구 중심이에요? 내가 어떻게 진리를 아는데 필요 있는 걸까? 필요 없으면 버리고, 필요 없어? 그럼 데리고 온다. 이 모든 결정을 자기가 하는 게 돼요.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부처가 발견한 게 뭐냐 하면, 이거였습니다. [모든 것은 행위가 먼저다.] 이 말은 내가 행위 한다가 아니고 행위가 먼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선택을 포기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부처가 하는 이야기가 내가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악의 질곡에 빠지게 된다. 이걸 분별, 경계라 해요. 이게 선일까, 악일까 하고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선과 악의 질곡에 빠진 게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려면 나의 선택 이전에 먼저 더 큰 선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선택에 의해서 나는 추가적으로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현재 선과 악이라는 분별 자체에서 해탈해버리면 참된 진리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들어보니까 선택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를 제대로 공부 안 하니까, 지금 세상에 있는 불교는 점쟁이거든요. 그저 조상 제사 드리면 복 받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서 민중들의 토속적인 것을 불교로 색칠한 것이고. 진짜 불교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있고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진짜 선택, 행위만 있다고 했지요. 진짜 행위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질곡만 있는 분별심이 있는 이런 세상에 이게 왜 와야 되는지 이유가 없어요. 거쳐서 가야 되는데 이 힘든 세상, 고해 같은 세상, 생로병사의 세상. 그러니까 싯다르타가 제일 먼저 본 게 생로병사였잖아요. 자기는 왕자지만 바깥에 사는 걸 보니까 너무 눈물 날 정도에요. 인생은 왜 이렇게 사느냐? 무엇 때문에 있느냐? 왜 이런 고통이 오느냐? 왜 고통으로 왔다가 병들어 죽느냐? 모든 것은 변화에서 온 것이다. 변화 자체를 중지하면 그게 해탈인 거예요.
석가모니가 노렸던 것은 이겁니다. 사람이 해탈을 벗어나는데 있어서 신에게 의존한다는 그것이 오히려 해탈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신에게 의존하면 언제까지? 계속해서 의존해야 되고.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신과 관계하고 신과 만남을 위해서 뭐가 있어야 돼요? 제물. 점쟁이한테 그냥 가면 안 돼요. 복채 들고 가야 돼요. 반드시 복채 들고 가야 되니까 결국 석가모니 입장에서 그 당시 종교 제사장이라는 것은 무지한 민중을 등쳐먹는 인간들이에요. 등쳐먹는 인간들이 인도에서 브라만이라는 제사장계급을 형성했다고. 이런 고통을 없애려면 주변에 있는 이런 환경부터 완전히 없애면 되잖아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누구를 찾아가지 말고, 점쟁이 찾아가지 말고, 제사장 찾지 말고 내가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기원전 5세기경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겨먹고 인간이 가족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고 짧은 팔십, 구십 인생 살면서 하는 생각이 전부다 고만고만해요. 특별한 거 없어요. 우리가 그 공부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시대를 이게 특별했다, 저게 특별했다고 하지만 막상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나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그쪽에서 전 구워먹을 때 우리는 피자 먹고 하는 모양새는 다르지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니고 더러워서 섬겨요. 가뭄을 주관하고 비도 내리고, 아픈 몸을 건강하게 한다니까 그냥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에 제사장들 욕하지만 오늘날 산부인과, 비뇨기과 찾아가는 그 역할을 옛날에는 제사장들이 했단 말이죠. 우리 보기에는 무지하다 하지만 효과를 보는데 어떻게 합니까? 수술할 때는 일자로 째지 말고 여러 갈래로 째서 대비마마의 종기를 끄집어내면 실제로 효과를 본다니까. [마의]에서 외과술로 해서.
부처는 그것마저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가 왕자를 포기한 것은 왕, 군주를 포기한 거예요. 요새말로 소고기 사먹겠지란 말이죠. 궁전, 왕, 그것 되면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 다음이 궁금한 거예요. 생로병사, 그게 환상이라는 겁니다. 생로병사도 작은 변화에 지나지 않고, 큰 수레, 대승인데 큰 수레바퀴에 낀 이끼 같은 게 생로병사니까 생로병사 자체를 무시하면 그게 바로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게 아트만인데 우리는 고대 신학이라고 나온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여기에 불교 이야기가 다 나와요. 같은 시대에. 이걸 추계시대(?)라 하는데 이건 야스퍼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역사의 기원과 시간에 대하여](1949)라는 일반세계사에서 역사의 중심에 놓이는 ‘중추적 시기’(BC800~200)에 현재 인간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모든 기본적 피조물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이상하게 전 세계가 모든 사상이 어떻게 유사한지. 유사할 수밖에 없지. 무역이 발달하니까 여기서 아는 깨달음을 저쪽에 전파하니까 유사할 수밖에 없지요. 유사하다는 특징이 전부다 자아중심이다.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이 뭐냐? 그렇다면 그 행위가 이 질곡 같은 세상을 만들 이유가 없다니까. 공의 세계, 무의 세계라 하거든요. 공의 세계가 인간의 현상의 세계를 꼭 만들 이유가 없단 말이죠. 생로병사를 안 거치고 처음부터 온전한 세계를 이루면 될 문제인데 왜 생로병사를 경험하게 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해답이 없어요. 고통스럽다. 벗어나자. 그건 되는데. 왜 처음부터 고통스럽지 않게 만들 수 있지 않았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이 없는 거예요.
부처는 자기는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걸 부정하는 게 깨달은 거예요. 깨달음을 부정하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 깨달음은 그거였어요. 내가 여기 있다. 나는 해탈했다고 할 때 해탈 됐음을 자기는 잊어버리는 겁니다. 해탈 해놓고 나도 없다. 그걸 무아론이라 하지요. 해탈 대상 자체를 없앰으로 말미암아 해탈이고 뭐고 자체가 날아가 버리는 그런 경지,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 이게 바로 나중에 대승불교에 나오는 선의 세계. 조계종의 모토가 되는 선의 세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게 인간들이 마귀한테 사주 받아서 만든 거예요.
이미 그런 현상이 기원전 400년경에 놀랍게도 에피쿠로스학파 그 뒤에 스토아학파도 마찬가지고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고 인도에서 아트만, 교재 5페이지에서는 파르메니데스, 이미 존재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모든 철학, 여기에 다 연결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서론 첫 번째 해봅시다. 중간에 나옵니다. [인간의 원형은 죽음이다.] 석가모니는 죽음 자체도 없애려고 했는데 헤겔은 신이 인간이 됐다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했지요. 이걸 설명해보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2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그 뒤의 말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뒤에 말이 “성령을 받은 것은”이라 했지요. 그러면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 사람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지 않지요. 뒤에 뭡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지요. 그런데 2절은 모른다 치고 1절만 보세요. 눈앞에 보인다는 것은 같은 시간대에 같은 지역에 있을 때만 십자가가 본다는 말이 성립돼요. 피아노 여기 하지 마시고 이리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피아노 눈에 봤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장로님이 오셔서, “목사님, 십자가를 여기 하지 말고 옮기세요.” 하면, “십자가가 없는데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러니 갈라디아서 3장 1절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사도는 자기 눈에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여러분은 안 보여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성령을 받은 것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한테는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게 아니고 뭐가 보인단 말입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말은 두 개를 합치면 결국 이 세상 변화와 모든 것이 무슨 중심이란 말입니까? 십자가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모르십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시력이 얼마입니까? 이렇게 묻는 게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뭘 알았다?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대해서 이제는 감 잡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형틀이잖아요. 십자가가 무슨 용도입니까? 죽음이죠. 여기서 십자가는 특수한 죽음이에요. 누구의 죽음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죽음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을 인간의 아트만과 비교해봅시다.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신의 일부가 인간 속에 내부돼있고, 인간 속의 아트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에 껍데기란 육체가 있다고 본 거예요.
물론 그 뒤에 9페이지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 레우키포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은 원자로, 물질로 돼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물질로 돼버리면 정신은 정신이 물질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물질이 정신을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플라톤은 정신이 물질을 만든다고 이야기했고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은 따로 있고 물질은 따로 만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은 일종의 해탈 과정,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냐 하는 것.
여러분 공부 잘했는지 복습하겠습니다. 탈레스 이전에는 사람은 어디에 의존한다? 신에 의존한다. 신에게 빈손으로 가면 안 되고 뇌물 바친다. 뇌물은 누가 받습니까? 그 시대의 소위 고위 권력자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그걸 자기 생계수단으로 삼는 성직자에게 갔지요. 그게 꼴 보기 싫은 거예요. 언제까지 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일 겁니까. 차라리 내가 깨달으면 되잖아요.
복음 공부하는 목사들이야 신학교 나와서 그것으로 하지만 일반 성도들이 복음 알아버리면 “내가 목사야.”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이만희도 그렇고, 박대선도 그렇고. 자기도 공부할 만큼 했기 때문에 자기도 종교 하나 해도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다른 쪽에서 “너는 신학교 어디 나왔어?” 이러면, “예수님도 신학교 나왔나?” 이렇게 핑계대고. 사람들 사는 게 고만고만합니다. 이미 우리 선배들 널려있습니다. 무슨 짓했는지 공부하는 거예요.
아트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신이고 신이 곧 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세상 모든 것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알 때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숨어있는 원수, 그게 사탄, 악마도 보이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 싸움이라는 이것은 어떤 주제가 내가 깨달아서 어떻게 행복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떤 영적 싸움판에 우리가 말려든 게 돼요. 그래서 창세가 2장, 3장 다시 보세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인간이 남의 싸움에 휘말려 든 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이런 기독교의 성격은, 특히 구약학자들이 이야기하는데, 묵시문학은 조르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해요.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 하여튼 그런 사람들 생각하는 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우상숭배자고 철학가에요. 자기 딴에 원어분석하고 백날 해봐도 철학자에요. 절대로 십자가 앞에서 성령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신학도, 목회도 죄라는 고백을 도대체 할 능력이 없어요. 왜? 십자가가 눈앞에 안 보이는데.
십자가 앞에서는 죽음이고 그 죽음은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인간은 졸지에 죽은 것이고. 죽은 이유는 하나님이 정해놓은, 아까 복수는 인간들이 하지만 심판은 하나님만 하시죠. 하나님이 무엇에 근거해서 심판합니까? 법에 의해서 하잖아요. 인간에게 법을 준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심판 아래 두게 하기 위해서예요. 로마서 3장 19절, 그 뒤에 계속 나오잖아요. 이건 사도 바울이 그동안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성령을 받았을 때 심판의 증거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요. 그러면 율법이 주어진 기능의 완료성은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을 보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갈라디어서 3장 2절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러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더란 말을 성령으로 한 것을 마치 인간 밖의 영으로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디서 옵니까? 십자가로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헤겔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헤겔 신학의 문제가, 헤겔은 하나님이 인간이 됐다고 했잖아요. 성육신이 중심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의 중심은 성육신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이에요. 그런 점에서 헤겔은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신이 인간이 된 것은 참된 신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거쳐야 된다.”라고 헤겔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요소는 싯다르타에는 없는 거죠. 싯다르타는 아트만에서 나온 거죠. 우파니샤드. 내가 누구냐? 어디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제발 내 앞에서 신, 신, 하나님 이야기 그만 하자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깨달아 버리면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할 필요 없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왜 자꾸 신에게 기대는 스스로 신의 종이 되는 그런 짓을 해서 뇌물 바치고 맨날 절기 지키고 제사 드리는데 돈 내고 제사장들 먹이고 입히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말이죠. 이제는 교회도 안 가도 되잖아요. 왜? 내가 깨달으면.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참 말씀이 재미있어요. 저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지요. 싫어하는데 하나님이 있어요, 없어요? 내가 싫어하는데 계시기는 계시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면 없어야 되는데 내가 싫어하는 그분이 막상 있다면, 나는 그분 앞에 나는 당신을 저주하고 싫어합니다가 계속 유발되는 존재로서 살잖아요. 그래서 싫어하면서도 안 싫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없다고 여기는 다른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 짓을 했다는 거예요. 할례 행하고 법을 지킴으로써 사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서도 잘 믿는 척하는 시도를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탐내지 말라고 말씀으로 먼저 있음으로써 비로소 우리 속에 죄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사실은 죄가 아니었지요. 이상하게 죽기는 죽는데 지은 죄는 없고 경찰서 가본 적도 없고 항상 양심껏 살았는데 이상하게 늙어 죽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법이 없이 이해하려고 하거든요. 원래 생로병사로 죽는 게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그냥 사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법이 와버리니까 법이 나보다 먼저 있어서 그 법으로 하여금 심판 받는 대상으로 인간이 만들어졌어야 했기에 인간으로 태어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선악과가 우리보다 먼저 의미를 입고 그 선악과 짝으로 정녕 죽으리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될 인간으로 에덴동산에 같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은 말합니다. 아담이 지은 죄는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길에 가는 사람에게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다고 이야기하면, 나는 아담 만나본 적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담과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법이 와야 아담의 죄가 우리 죄고 선악과 따먹은 죄가 우리 죄라는 것은 법이 와야 돼요. 그 법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통일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발각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그냥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그 하나님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복음, 헤겔처럼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존재론적인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이 인간이 된 게 아니고 신이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리고 죽으심을 우리 코앞에 들이대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나님 계시니까 믿어라. 이건 아니에요. 그리고 너는 하나님이 만들었거든. 그러니까 잘 섬겨야 돼.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 죽음보다 예수님의 죽음이 밑거름이 되는 거예요.
이걸 칼 바르트가 감을 잡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존재보다 예수님 중심이었다. 그런데 칼 바르트가 참 잘 나갔으면 좋겠는데 십자가 중심이 아니고 언약 중심이에요. 나중에 칼 바르트 나옵니다만. 언약은 새 언약이거든요. 언약은 십자가로 인하여 만들어진 거잖아요. 십자가에서 피가 나오고 살이 나왔다. 칼 바르트 생각은 그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피와 살이 나왔지요. 피와 살을 모아서 새 언약 구성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본 겁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왜 그게 하나님 뜻이냐 하면, 새 언약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맞아요? 맞습니까?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장에 나오지요. 유대인도 헬라인도 하나님도 화목케 한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화목제물 주셨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예수 믿는 자도 의롭게 하나님이 그 자체를 통해서 의를 이룬다. 그게 화목이다. 칼 바르트는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뭉쳤습니다. 냄새납니다. 뭔가 굉장히 수상해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을 받게 되면 십자가가 눈에 보이는데 갑자기 칼 바르트는 새 언약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십자가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한 재료에 불과하고 새 언약은 신와 인간이 하나 되기 위해서 만든 환경이 돼버립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돼버리면, 이제는 건축이 완공 되면 외부 지지물은 없애도 괜찮잖아요. 세상에, 십자가가 떨어져나가 버린다고. 왜? 이제 인간과 하나님은 좋은 관계, 화목하게 됐으니까.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인간의 근본적인 종교심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결국 이거였어? 결국은 하나님이 착한 일 해서 이득은 화목하지 못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 결국 우리가 원했던 것은 이거였었어.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신학을 하면서 처음부터 평소에 노렸던 그 점이 성경을 통해서 두루두루 돌아다니면서 회수한 것은 역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그걸로 회수한 셈이 되는 거죠. 그걸 프로이드나 라캉, 지젝 같은 사람은 바로 그런 점을 인간의 욕망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사도 바울이 말한 건 아니죠. 예수님이 배후에서 시킨 거니까. 지금 사도 바울에 의하면 싸움이라 했지요. 지금 칼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것은 새 언약으로 화목했지요. 그러면 싸움이 화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요. 싸움이 끝난 상태가 화목한 상태잖아요. 그리고 화목하면 뭐가 없어져요? 하나님의 원수를 더 이상 거론할 이유가 없단 말이죠. 싸우지 않는데 무슨.
그런데 디모데전서에 보면, 하나님의 군사는 자기 생활에 억매이지 않는다고 돼있고 사도 바울 본인이 마지막에 면류관을 무엇 때문에 얻은 겁니까? 오직 다른 데 쳐다보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면 얻은 면류관이기 때문에 그 면류관은 전쟁하는 사람, 그야말로 하나님의 전쟁통에 참전한 용사에게 주어지는 달음박질을 통한 면류관이잖아요.
에스겔 37장에 보면 바짝 마른 해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골을 다 살려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트만이었습니까? 자아였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집합이었습니까? 뭐였습니까? 거기 명칭이 나오죠. 하나님의 군대지요. 처음부터 하나님이 살려낸다는 것은 예수님이 벌인 전쟁에 하나님의 군대로써 참전시키기 위한 용도로 만든 거예요. 그게 이스라엘이 다른 말로 하나님의 군대란 말이죠.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은 만판으로 놀자고 구원한 게 아니에요. 깨달았으니까 놀자. 이런 식이 아니고 뭔가 써먹기 위한 거예요. 영적 전쟁, 하나님의 군대로 싸우기 위해 한 거란 말이죠.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그 다음에 어느 싸움에 들어갑니까? 빌립보서 3장 20절, 하나님의 원수와 싸우기 위해서는 십자가 안에서 살아야 될 사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 주변에 흐르는 기류가 뭐냐? 그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야곱처럼 싸움꾼으로 몰아넣는 식으로 지금도 주님께서는 십자가 들이대면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고 그 일을 하도록 힘과 능력을 허용하시는 겁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생존과 능력과 지혜는 우리를 편히 살라는 용도가 아니고 손에 무기 쥐어주는 거예요.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폼 잡으라고 있는 게 아니고. 개콘에 브라우니가 왜 나옵니까? 뭐 하기 위해서 개 인형이 나오죠? “물어! 물어!” 우리에게 일시키기 위해서 구원하신 거예요. 십자가의 원수와 싸우기 위해서.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중심입니다. 새 언약 중심이 아니고.
에베소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돼있습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택했지요. 그 뒤에 무슨 용도가 나오느냐 하면,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창세전에 이미 그의 피가 발생된 걸 계획 잡은 거잖아요. 그 피가 없어지면 안 되잖아요. 화목 됐으니까 십자가 철거하자. 철거대상이 안 돼요. 계속해서 그 피를 반대하는 십자가의 원수가 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를 그냥 계속해서 피 안에 있도록 창세전에 택한 거예요. 창세전에 택했다는 것은 존재적으로 어디에 장소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피의 효과가 발휘되는 그 공간 상황 속에 우리가 놓이게 된다는 그것을 창세전에 예정한다는 말이에요. 예수 안이라는 존재적인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계속 발휘되는 상황 속에 놓여있는 그것. 존재나 실존이 아닙니다. 주께서 일하는 일하심 속에 놓여있는 겁니다.
그것이 심지어 천국 가도 멈추질 않아요. 천국 가도 우리가 구원받을 때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명을 얻게 돼있습니다. 어린 양의 보좌는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어요. 거기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우리에게 생명나무와 생명수에서 헤엄치게 만든단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성령이 와서 우리가 성령을 믿는다는 말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이고 현재 원동기가 십자가 엔진이 펌프질하며 가동되고 있다는 걸 아는 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용서받는 것은 누구 덕분입니까? 존재 덕분이 아니고 십자가가 계속해서 가동되고 있다는 그 펌프질 안에서 용서받고 있는 겁니다.
계속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를 십자가 필요 없다는 이런 인간들 앞에, 신학이나 철학, 종교인들 앞에 내세울 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멘트를 세상에 나가서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멘트를 성령에 의해서 하지 못하는 그들은 뭘 노리고 있었단 말입니까? 신을 언급하고 예수를 언급하고 백날 언급해도 역시 나, 나에게 귀환되는 십자가의 원수와 차별화 되는 것은 오직 눈앞에 십자가만 보이는 것뿐이에요.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은 내가 보이는 게 아니고 그냥 십자가가 보이는 거예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 예수님 만날 때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용서하겠다.” 하고 그 다음 나온 말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잖아요. 그럴 때 그 여인이 눈앞에 보이는 게 뭘까요? 이제 용서받았으니까 다음에 간통 한 번 해야지. 지금 자기 생각나겠어요? 예수님의 용서해주심이 생각나겠지요. 그것이 십자가 이후에는 바로 십자가가 우리의 어떤 죄도 용서해주신다는 그 모습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니까 진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나는 예수님 피로 구원받았어.”라는 자기 구원욕구에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신앙의 역사, 신앙의 경륜 같은 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신앙의 경륜을 가져버리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돼버려요. 아침 열 시부터 일한 사람이 계속해서 자꾸 구원받고 난 뒤에는 “까불지 마. 너는 오후 다섯 시에 왔어. 나는 아침부터 온 사람이야. 어디서 내 앞에서 고참을 못 알아보고.” 맨날 이런 소리 할 수 있단 말이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반대로 바꾸는 것은, “나는 오후 다섯 시에 왔어.”라는 소리를 하지 말란 말이죠.
아침 일찍 와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그들이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마지막에 한 시간 일하고 구원받았다고 자기 자랑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천국은 이와 같으니. 앞뒤 모두, 앞에 온 사람, 나중 온 사람 둘 다 네 이야기하지 말고 예수님 죽었다는 죽으신 이야기를 하라. 이게 일찍 죽으심을 당하신 어린 양의 보좌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 그 상황,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맨 그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사람은 천국에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시동생과 결혼한 여자 이야기하지요. 남편이 일곱 명 있는데 어떻게 되겠느냐? 그런 사고방식의 특징이 뭐예요? 아트만, 자아지요. 내가 결혼했는데 그 여자가 보기에 네 남편이 누구냐 할 때 일곱 형제가, “여보, 보고 싶었어.” 할 때 이런 광경을 생각한다는 것은 뭐가 문제냐 하면, 근본적으로 뭘 생각해서 그렇습니까? 나는 여인이고 결혼한 적이 있다고 생각한 거죠.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부활의 나라에서는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고. 이게 뭔 뜻입니까? 부활의 세계는 내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세계라는 사실은 너희들은 왜 그걸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자기 생각하는 사람으로 자기에게 언약 주신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하나님이 이제 십자가 지려고 너희 앞에 등장했다 이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앞으로 철학공부를 하면서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제가 강조하는 이유는 철학과 신학이 너무나 교묘해서 이 사람 말이 맞을 수 있겠네. 자꾸 이런 생각으로 미끄러져 내려가요. 그렇게 되면 갈라디아서 3장 2절의 말씀대로 성령 받은 것도 무슨 뜻인지 모르고, 1절의 말씀,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도 모르고 점점 여기에 빠져서 이것은 자기가 해탈할 수 있는, “이것 알면 나도 해탈할 수 있다. 모든 진리를 알았으니까.”라는 오류에 빠질 수가 있기 때문에 첫째 시간에 당부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정답부터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 앞에서 누가 죄인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 죄가 어떤 것이 죄인지를 우리가 공부하면서 알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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