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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2. 22) 2강자유게시판로마서

광주 강의(2013. 2. 22) 2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2. 22) 39-2

첫째 시간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는지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곳에 데려가서 거기에서 우리가 해골이란 사실을 분명히 확인시키고, 그 다음에 말씀이 와서 그 말씀의 능력으로 해골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듭니다.

군대는 적이 있을 때 자신이 군인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의 적은 누구지요? 자기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이 적이지요. 국가가 막으면 국가가 적이고, 직장에서 쫓겨나는 직장이 적이 되고, 내가 응원하는 팀을 상대 팀이 이기면 그 순간은 상태 팀이 적이 되고.

적은 그때그때 자기가 체험된 것에서 정해지지요. 그러나 이것은 자기 군대지 하나님의 군대는 아닙니다.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나는 구원 받았기에 이제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군대이기에 하나님의 적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적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대상입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잘 연락도 없었던 삼촌이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 말이, “조카, 날 좀 도와줘! 삼촌이 지금 적으로부터 쫓기고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나의 편이 되어 함께 적을 물리치자.” 이렇게 나온다면 조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삼촌의 적을 왜 내가 상대해서 싸워야 합니까?” 이렇게 나오겠지요.

나는 나의 적에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어이 우리를 하나님의 원수와 싸울 수밖에 없는 군대로 만들어 내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우리의 가치관이 붕괴되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내가 생각했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옳고 이것은 나쁜 일이야.”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허물어집니다. ‘좋다, 나쁘다. 옳다, 잘못이다.’ 이것이 완전히 의미 없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가치관을 뭉개는가 하면, 우리의 가치관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적과 싸우는 무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무기 교체를 하고 싶은 겁니다. 우리는 나의 의로움이 무기가 되는데 하나님의 군대 무기는 복음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 봅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이 말씀을 수능시험 치는 학생에게 하면 듣습니까? “선생님, 시험에 안 나오는 것은 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지요.

그 뒤 14절 이하에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화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런 말씀이 있는데, 이런 무기를 장착하는 이유는 우리 적이 아닌 하나님의 적과 싸우기 위함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우리는 체험된 것을 통해서만 세상을 살았지요. 따라서 우리가 가진 무기도 우리가 체험했고 사용 가능한 것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체험 바깥의 것으로 일하시기에 우리의 무기로는 하나님의 적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소설을 써 보겠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고, 그 이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또 따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담은 따먹었을까요? 또 따먹습니다. 왜? 이번에 따먹으면 ‘너의 아픈 것, 죽는 것을 낫게 한다.’고 유혹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생명나무 과실을 위장한 선악과를 주기 때문에 따먹을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따먹지 않을 수 없는 자임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줍니다.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탐심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탐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탐심을 가지고 되는데, 그 순간 우리는 말려든 거예요.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우리 속에는 ‘탐심을 갖지 말아야지’하는 생각과 ‘탐심을 가져볼까?’하는 생각이 투쟁하는 장이 되고 됩니다.

그런데 이미 승패는 끝이 났어요. 탐내는 것이 이깁니다. 율법이 우리의 남편이 되었을 경우에는 우리가 남편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탐냈어, 안 냈어?” “탐냈어요.” “거짓말 했어, 안 했어?” “거짓말 했어요.” 우리는 꼼짝도 못합니다. “그러면 벌 받아야지.” “예, 받아야지요.” 매일 우리를 저주하고 때립니다. 이렇게 시달리다가 결국은 죽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서.

평소에도 매 맞고 마지막 심판 때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 보면 남편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예전 남편은 닦달하는 사람이었는데 지금 남편은 사랑해 주는 사람입니다. 만약 처음부터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남편으로 왔으면 우리는 사랑을 사랑으로 알지 못했을 텐데, 처음 남편이 잔소리하고 닦달하는 사람이었는데 두 번째 남편이 사랑으로 대하니까 비로소 이것이 사랑인줄 아는 거예요.

첫 번째 남편과 살 때는 죽을 지경이었지요. 늘 매 맞고 저주받고 심판받고 했는데, 두 번째 남편은 그 상처를 치료해주고 잘못을 덮어주고 용납해주고 이렇게 하니까 비로소 자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자유를 아는 것은 이전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경험했기에 비로소 자유가 뭔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알게 하기 위해서 먼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게 했습니다. 그게 뭐냐? 이 죄 많은 육신과 더불어 평생을 지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 수만 있다면 옷 벗듯이 이 육신을 벗고 싶다.”고 했지요.

그러나 지금 벗으면 안 돼요. 왜냐? 갈아입을 옷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하늘나라 가면 이 옷을 벗는 동시에 하늘에 속한 영원히 쇠하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힙니다. 여자들이 옷을 맞춰놓고 때가 되어 전화해서 “옷 찾으러 갑니다.” 라고 통보하고 옷 찾으러 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습니까? 사도 바울은 늘 그 기쁨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분명히 남편이 바뀌었는데 매일 옛 남편이(귀신이 되어) 찾아와서 책망하고 정죄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 몸에 익숙해 진 것을 체험을 하면서 “이렇게 했더니 좋은 결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했더니 나쁜 결과가 왔다.”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전부 허물어 지는 겁니다.

제가 종이 2장에 좋은 짓과 나쁜 짓을 기록해서 주님께 “제가 오늘 이런 좋은 일과 이런 나쁜 일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 주님은 “종이를 구기면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하면서 화내세요. 이게 뭐냐? 장차 입을 옷을 미리 앞당겨서 새로 갈아입는 것을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겁니다.

어떤 인간도 사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연이 조용히 침묵하는 지점이 있어요. 어디입니까? 공동묘지. 공동묘지에 가면 낮에도 밤에도 조용합니다. 각 무덤 마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습니다. 젊은 나이게 교통사고로 죽은 자도 있고, 늙어서 치매로 오래 고생하다 죽은 자도 있고 다양하지만 그들은 조용히 말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바짝 마른 해골입니다. 이렇게 조용해 질 걸, 뭐 그렇게 불평과 불만, 자랑과 자만, 울분과 좌절을 했는지. 김수환 추기경도 법정 스님도 다 무덤에서 조용히 있는데, 떠드는 것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연 다 소용 없습니다. 사연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죽으면 그 모든 사연은 커튼이 쳐지면 다 사라지고 그 안에는 주님의 세계가 나타납니다.

말씀의 세계가 나타나면서 어떤 인간도 말씀 앞에서 자기 윤리나 도덕을 커튼에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그래프로 그릴 자격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그런 관점에서 사람을 대해야지 절대로 사람들 겁내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지요.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요--” 교장 선생님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사모님이 교장이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비판을 하고 욕을 하겠습니까? 한국의 교육 정책이 의심스럽다는 둥 온갖 소리를 다 들을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군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반드시 무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기는 혈과 육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금요일 철야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주시는 무기로 혈과 육적으로 남에게 기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반드시 자기 기도를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자기 뜻은 전쟁하는 것이 아니고 소유해서 간직하기 위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근심, 걱정은 내 소유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꼭 재산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 계획, 내 자존심, 내 경험, 내 업적 이런 것들이 있으면 이것이 마귀의 시험거리가 됩니다. “네가 행동 그렇게 하면 자존심 무너져.”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까?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내 소유를 관리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유지, 보존하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마음판은 구리판 같아서 이놈도 긁고 지나가고 저놈도 긁고 간다”고. 온간 사연의 낙서를 남겨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판을 이놈도 할퀴고 저놈도 할퀴고 해서 걸레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걸레입니다. 정말 천이 조각이 나고 찢어지고 엉망진창입니다. 모두 다 가슴 아픈 상처들이 파여 있어요.

제가 듣기로, 이병철씨가 죽기 전, 의사도 다 포기한 상태인데 부자라서 온갖 좋은 것은 다 먹었는데 먹으면 설사를 하고, 먹으면 토해내고 이런 상황에서도 주변 간호하는 분들을 향해 “무조건 살려내라”고 했답니다. 물론 돌보는 사람은 많은 보수를 받았지만 그들이 무슨 재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간호하는 분들이 죽을 지경이지요.

그분은 평생 사업하면서 기껏 붙든 것이 뭐냐? 자기와 똑같은 바짝 마른 해골 붙들고 경쟁하며 살았어요. 거지 나사로 같은 사람은 붙들고 싸울 상대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싸움은 남들과 멱살 잡는 그런 싸움이 아니어야 합니다. 남들이 요구하는 것을 우리가 제시할 수 없지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자에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했지요. 이게 바로 성도의 무기입니다.

불신자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 붙들고 아무리 닦달해도 소용없어요. 이 사람을 닦달하는 것은 혈과 육의 싸움밖에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빠져나오고 싶어도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과학자들이 하는 말이 “눈에 보이는 세계의 집합이 우주다.”라고 합니다. 이들이 불쌍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당나귀가 말하고, 물 위를 걷고 이런 일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경험을 벗어난 일입니다.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메시아를 찾아왔다고 하니까 과학자들이 별을 조사하고 있어요. 바보 같아요.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밖에서 일어납니다.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나서서 싸운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전쟁은 탱크와 비행기 그리고 화학무기를 통원해서 중동 지역 다른 나라와 싸움입니다. ‘이 나라는 내가 지킨다.’고 하면서. 이것은 혈과 육의 싸움일 뿐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땅을 지키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좌를 지키기 위한 전쟁에 동원될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지킬 것은 없어요. 다만 주님이 주신 복음을 지키며 살면 되고, 그동안 세상 것을 소유했고 그것을 계속 나의 것으로 지켰던 무기들은 아무 소용없음을 알아야 돼요. 그러면 하늘나라에 아무 도움이 안 되니까 이걸 버려야 합니까? 버릴 필요는 없어요. 버린다고 영적 무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고, 아무 소용없는 것을 쥐고 있으면서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으며 살아야 합니다.

음악을 하는 것이 구원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음악 하는 것을 그만 둘까요? 아니죠. 음악을 하면서 “나는 아무 의미 없는 짓을 하고 있구나.”하는 그것이 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음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어. 좀 더 아름다운 선율로 더 큰 영광 돌려.” 이런 식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학교 교사가 학생을 성실히 가르치면 구원 받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교사 그만두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해야 합니까?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해야 자기 죄를 알고, 죄를 아는 그것이 하나님의 군대로써 영적 싸움을 진행하고 있는 겁니다. 교사를 하면서 교사로써의 자긍심이 생깁니다. 그것이 나의 것이 되고, 매사 이 자긍심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육적 싸움을 겪게 합니다.

이런 싸움을 통해 주님은 우리 본래의 자리, 해골로 돌아갈 수 있는 계기로 삼고, 내가 무엇을 더 소중히 여기는지를 노출시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나는 교사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임을 드러내서 “그러니까 구원 받는데 네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새롭게 느끼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 지어서 죄인이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이 되면 우리는 모든 것에 감사치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하늘에 별이 떠 있는데 혹시 별이 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사람(누구) 좋으라고 떠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게 주님이 욥에게 질문한 거예요.

“욥아, 하늘에 별이 왜 떠 있는지 네가 아냐?” 욥은 하나님이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욥의 관심사는 자기 고통에 있습니다. “내가 심히 아픕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언제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래요?” 이것에 대해 주님도 관심을 가지셨으면 좋겠는데, 전혀 엉뚱한 질문을 거론하십니다.

욥은 지금 고통으로 죽을 지경인데, 하나님은 “별이 왜 만들어졌지?”라고 묻고 있어요. 사람이 몸이 아프면 모든 의미와 가치가 육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나의 고통 받는 육의 현장으로 나오라는 겁니다. 회담의 주재를 우리가 설정해 놓고 이 주재에 대해서만 하나님과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전혀 다른 주재를 거론하십니다. “별은 왜 만들었지? 코스모스는 왜 피었을까?” 이런 식이지요. 여기에 대해 욥은 뭐라고 합니까? 할 말이 없지요. 욥은 할 말이 없는데, 욥을 둘러싼 세 친구는 할 말이 많아요. “네가 지금 이런 고난 받는 것은 과거 너의 죄 때문이야. 빨리 회개하면 네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이 욥의 위신을 걸고 육과 육의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욥에게 육적 싸움이 아닌 영적 싸움으로 바꾸면서 욥이 가진 무기를 교체시킵니다. “나는 의인이다. 나는 고난 받을 이유가 없다.”는 무기를 쓸모없게 만들어요. [레이더스] 영화에 보면 자객이 나타나 주인공을 죽이려고 칼을 뽑아 솜씨를 자랑하려고 하는데 주인공이 총으로 쏴버렸어요. 자객은 칼 솜씨고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솜씨도 부려보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었어요.

우리가 계발하고 준비했던 모든 무기는 혈과 육의 싸움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우리의 무기가 무용지물이라는 사실과, 이런 헛된 짓을 하는 우리를 당신의 능력으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주님이 타잔이 되셔서 아내 제인을 품에 안고 줄을 타고 탈출을 하는데, 밑에서 흑인들이 활을 쏘고, 창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고 하지만 위에서 총을 쏴서 다 죽입니다.

우리에게는 총이 없습니다. 우리는 밑에서 활과 창을 쓰는 방법만 배웠어요. 이런 무기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기도, 전도, 헌금, 봉사 이런 무기는 아무 능력도 발휘 못합니다. 그렇다고 이걸 만약 버리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우리 육신이 있는 한 그것은 버려지지 않습니다.

육신은 육의 본성이 드러나야 내가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나로 하여금 해골로 돌아갈 수 있는 근거이기에 그것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구원하시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죠. 에스겔 37장에서, 해골에 말씀이 임하니까 힘줄이 생기고 근육이 생겨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지금까지 계속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 몸이 아파요. 낫게 해 주세요.”라고 하면, 주님은 “사막에 비가 왜 오는지 아니?” 이렇게 나오십니다. 우리의 관심사와 전혀 무관한 것을 거론하시면서 우리가 전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십니다.

집안이 잘 안 될 때는 엉뚱한 방법의 다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아파트 윗층에 사는 사람이 소란을 일으키고 밤늦게까지 웃고 떠들고 해서 복도에서 만나서 좀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고, 그래서 짜증이 나서 죽을 지경인데, 취직 걱정 하던 아들이 취직이 되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는데 몸에 이상이 생겨 집에서 요양을 좀 해야 된다는 의사의 판정을 받고 걱정하며 집에 돌아왔는데, 시끄럽던 위층이 조용해요. 알고 보니 예전 사람이 이사를 가고 노인 부부가 새로 이사를 온 거예요.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걱정과 근심으로 몰아세워놓고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기쁨을 주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귀와 대적할 때는 내가 잘하는 것 들고 나오면 안 됩니다. 마귀가 웃습니다. 인간은 유혹거리 앞에 다 넘어갑니다. 만약 우리가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면 ‘유혹’이란 말을 쓸 필요 없지요.

마귀는 우리를 이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내심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이 마귀에게 그렇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웃나라 우상에 유혹 받아 멸망했잖아요. 그들이 이방나라 우방의 유혹에 빠진 이유가 있어요. 이스라엘 주변나라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부강하게 만들었어요.

우리는 선악과를 따먹은 자이기에 선악과 따먹은 띠를 내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창세기 2장(선악과 따먹은 일) 이후에도 계속 그 일을 발생시키십니다.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았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실 때, 가인이 참을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참을까, 말까 고민할 때 하나님은 “사막에 비 내리는 이유를 아니?”라고 하시므로 우리가 구원과 상관없는 헛된 일에 신경 썼다는 것이 밝혀지는 거예요.

이 순간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가 부질없는 것에 마음 빼앗기며 살아왔구나. 이게 육신이구나. 할 수만 있다면 이 육신을 벗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잠시나마 들 때, 내가 하나님의 군대로 다뤄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군대의 특징은, 우리가 아는 그 이상으로 계속 새로운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해석한 것이 우리를 지키는 무기였는데 그것마저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것이 가벼워집니다.

37장 11절을 봅시다.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출애굽기 12장 41절을 보면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가 이렇게 말라 비틀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주변 나라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혹을 이기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부질없는 객기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으로부터 유혹을 받습니다. 도 닦는 사람에게 유혹이 무엇일까요? 자기보다 더 완벽하게 도 닦는 사람이 유혹이 되겠지요. 자기는 30일 금식했는데, 옆에 있는 분이 40일 금식할 때 가인의 심정이 되고 죽이고 싶어요. 이수영이라는 가수(광화문 연가를 리메이크해서 히트를 했지요)가 이런 고백을 했어요. “나는 박정현만 보면 주눅이 든다.” 노래를 너무 잘하니까.

인간은 항상 유혹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본성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유혹을 그리워하고 소망으로 삼고 그걸 위해 기도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유혹을 뿌리치고 할 입장이 못 됩니다. 그 유혹을 이기겠다고 들고 나온 무기들이 경건, 거룩, 기도 등인데 마귀가 웃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린 식으로 하다 망했어요. 왜? 하나님의 신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기껏 육적인 몸부림이 전부였습니다. 제사장들이 제사장 짓을 해야 되는 이유는 그것으로 인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사장 숫자가 많다’는 말은 전부 가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모형’이라고 했잖아요. 진짜 제사장이 아닌데 왜 보냈는가? 진짜는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짜를 먼저 보낸 거예요.

마귀는 가짜들에게 “네가 진짜다.”라고 속여요. “아담아, 너는 진짜 아담이야.” 이건 마귀의 거짓말입니다. 진리 모형으로 아담을 만들어 놓았는데 마귀는 그 모형 아담을 속여 선악과 따먹게 했어요. 진짜 아담은 따로 있어요. 장차 오실 두 번째 아담(예수님)이 진짜 아담입니다.

하나님은 그 장면을 보시면서 “이제 말려들었군.” 하고 박수를 치십니다. 이제 그들은 마귀와 더불어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는 속였지만 아담의 실상은 흙입니다. 바짝 마른 해골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해골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해골이라는 이것이 우리 체험 바깥에 있는 일이기에 성령이 임해야 해골임을 믿게 됩니다.

믿게 되면 그 체험은, 나는 순간순간 ‘그래, 내가 살아있는 것은 아니야.’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13절을 봅시다.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4절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가 여호와답다는 것은 스스로 뭔가 내놓은 게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이죠. 약속해 놓고 약속된 것만 건집니다. 아브라함이 중요합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중요합니까? 정석훈 목사님이 강의하면서 중요한 것을 언급했어요. 성경은 예수님 말씀인데 신학자들은 전부 사도바울의 편지라고 하면서 접근을 한단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편지를 섰더라도 그걸 왜 주님의 말씀으로 볼 줄 모르느냐 하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다루었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시달렸어요. 잠시도 가만 두지를 않았어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는 것은 몸통에서 그림자 떼어내는 일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안 떠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 자신(예수님)을 보는데, 아브라함은 “아저씨, 왜 자꾸 쳐다보는데요? 저리 가세요.”라고 합니다. 옛날에 그런 코미디가 있었어요. 아저씨가 버스정류장에서부터 계속 따라오는 거예요. 아가씨는 겁이 나서 발걸음을 점점 빨리 움직이는데, 계속 따라와요. 그러니까 획 돌아보면서 “아저씨, 왜 자꾸 따라오는데요?” 벨을 누리는데 보니까 바로 옆집에 사는 분이에요. 이게 공익 광고로 나왔는데, 이웃과 서로 인사하며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인사도 안하고 살아요. 계속 따라와요. 여하간 내 뜻대로는 하나도 안 되고, 내가 고민하는 것은 전혀 해결 안 되고 자꾸 나의 가치가 무너져요. 나는 최선을 다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무시해요. 철저하게 무시하고 철저하게 다른 인간으로 전환 시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그 새로운 피조물은 우리가 전혀 예상 못한, 창세기 1, 2장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그런 존재로 만드는 것이지요. 예상도 못할 인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주께서 만드시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꾸 우리 방식을 고집하니까 주님은 그것을 비켜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의 일대기입니다.

아들 주시고는 그 아들 빼앗고. 이게 뭡니까? 아들 달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주신다고 해놓고 그 아들 번제로 드리라고 하고. 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가진 무기는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빼앗으시고 그 대신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구경도 못한 하늘나라에 우리를 넣어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보이는 무기를 주는데 그게 뭔가? 내가 바짝 마른 해골로 느껴질 때, 이렇게 되면 내 것이라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지요. 그렇게 해놓고 우리를 마귀 잡는 몽둥이로 사용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나는 주님 앞에 늘 죄인임을 고백케 하는 이 작업을 주님은 지금도 계속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해골이 사람 된다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지금 우리에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늘 깨닫게 하시고, 우리도 예상 못한 일을 주님께서 약속대로 이끄시고 오직 예수님만 보시고 십자가만 크게 나타나도록 이끄시는 감사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기 위한 것임을 의심치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3. 14. 10:0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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