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강-에스겔12장 1-7(이주하는 행구)130313-이 근호목사
31강-에스겔12장 1-7(이주하는 행구)130313-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121.147.226.155)
31강-에스겔12장 1-7(이주하는 행구)130313-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2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4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2:1-7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인자야 너는 행구를 준비하고 낮에 그들의 목전에서 이사하라 네가 네 처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그들이 보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혹 생각이 있으리라 너는 낮에 그 목전에서 네 행구를 밖으로 내기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너는 그 목전에서 성벽을 뚫고 그리로 좇아 옮기되 캄캄할 때에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찌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니라 하시기로 내가 그 명대로 행하여 낮에 나의 행구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내어 놓고 저물 때에 내 손으로 성벽을 뚫고 캄캄할 때에 행구를 내어다가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생활을 위해서 모든 것을 움직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는 자기의 생활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느냐, 그것은 지금 선지자의 모습에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선지자가 특이한 행동을 할 때에 그냥 좀 별난 행동을 한다고만 보지 마시고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 상식인데 그렇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이 눈에 뜨인다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뭔가 부지런히 세상을 어떤 중심지점으로 이끌고 있다는 낌새를 채야 됩니다.
12장 2절에 보면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인간이 눈이 있고 귀가 있어도 뭔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는 것은 그 귀와 눈이 전부 다 엉뚱한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떻게 살것인가, 어떻게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것인가, 거기에 집중되어 있으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백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 앞에 뭘 하나 붙이세요. 우리를 부정적으로 보시는 하나니, 이것이 정답입니다. 우리를 좋지 않게 보시는 하나님.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게 봤다면 평소에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교류가 될 것이고 이것은 우리의 생존과 우리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삶들이 나올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에스겔을 통해서 어떤 행동을 보일 때에 아무도 그 에스겔의 행동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은 에스겔이 혼자 바보가 된 거예요. 에스겔이 바보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 와도 바보가 된다는 뜻입니다. 에스겔을 보고 ‘저 인간 참 이상해. 밉상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설쳐대도 전부 다 우리에게는 ‘이상해. 미쳤나? 밉상이야.’라는 평을 우리 속에서 발산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입니다.
이런 것을 제가 간단하게 이야기하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와야 비로소 우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거지요. 고만고만한 인간들 모아놓고 누가 더 정상이고 누가 더 비정상인가, 그것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누가 힘이 세냐, 누가 힘이 약한가, 그런 것은 아무 쓸데없어요. 에스겔이 힘자랑하러 왔다면 우리는 힘자랑해야 됩니다. 에스겔이 핵폭탄을 들고 왔다면 우리는 핵개발 해야 돼요. 에스겔이 아주 돈 많은 부자의 모습으로 왔다면 우리가 부자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흔히 사람들이 추구하는 힘세고 권력 있고 돈 많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아니면서 하는 말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눈 달려도 소용없고 귀 달려도 소용없고 하나님이 너희들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그것조차 모르는 바보.” 사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내가 정상인가 아닌가, 라는 생각조차 감 잡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정립을 해 볼 필요가 있어요. 어떤 정립인가 하면, 제가 분명이 말씀 드렸는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가 숨어 있다고.
숨어 있기만 하는가, 숨어 있기만 한 그 말씀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니 분명한 현실로 이룰 것이라는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숨어계시는 그 말씀이 현실로 이룰 때에 결국 이 세상에는 질이 다른 두 종류의 현실이 섞이는 셈이 되는 겁니다. 에스겔이 몰고 온 현실관 따로 있고 평소에 인간들이 다들 공감하는 현실관 따로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의 의미를 우리가 안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쪽 현실에서 어디로 옮겨가야 되느냐하면, 에스겔이 제시하는 그 말씀이 현실이 되는 그 현실로 옮겨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현실로 옮겨갈 때 경유하는 것이 있어요. 거쳐야 될 것이 있어요. 에스겔 1장부터 상당히 이상한 이야기인데 뭐라고 하는지. 에스겔 1장이 세상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에요. 1장에서 에스겔이 뭐라고 하느냐, ‘내가 하나님의 보좌를 봤는데 거기 네 종류의 천사가 나타났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10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보좌가 나타나요. 정리해 봅시다. 이 세상에 두 종류의 현실이 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아는 현실이라 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그냥 공감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우리는 말씀의 책망을 받아야 되는데 숨겨진 하나님의 말씀, 우리를 부정적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취지가 말씀을 가지고 에스겔을 통해서 현실화될 때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가하면 하늘의 보좌에서 나온 겁니다.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에스겔이 감고 있는 현실은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는 내용으로서의 현실인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의 현실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어디로 끌려가느냐, 에스겔 1장과 10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보좌와 같은 노선에 속하는 현실을 보는 겁니다.
에스겔이 봤던 하늘의 보좌, 우리가 앞으로 그걸 봐야 되지요. 그걸 안 본다 하면 그것은 구원이 안 되니까. 제가 이야기를 이렇게 끄집어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나라를 부정적으로 본다. 눈이 있어도 소용없고 귀가 있어도 소용없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적으로 본다고 소리치는 에스겔은 있거든요. 그러면 에스겔 중심의 현실관이 있을 것이고 에스겔을 안 믿고 에스겔에 대해서 밉상인 그 인간들의 현실이 따로 있다는 말이지요. 그 둘이 섞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보좌가 하는 일이 뭐냐, 그 섞여 있는 현실을 분리시키는 겁니다.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 살면서 이 현실이 저 현실이고 저 현실이 이 현실이고 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인데 거기에 무슨 두 종류의 현실이 섞여 있느냐, 라고 우리는 의아해하지만 하나님의 보좌에서는 그것을 분리시킵니다. 두 번째는 뭐냐, 자기 백성을 이쪽 보편적인 현실관에서 에스겔만 알고 있는 현실관으로 옮겨내는 작업이 필요한 겁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굉장히 어렵기에 다시 간단하게 정리하고 그 다음 이야기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 부정적으로 본다고 하면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줬다. 따라서 인자되는 에스겔은 새로운 현실을 가지고 그 당시 사람들과 같이 섞여 있었다. 섞여 있었다는 말은, 우리 보기에는 그 현실이나 이 현실이나 똑같은 현실이지만 사실은 이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다른 현실이 있는데 그 현실은 하나님의 보좌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냥 분리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분리된 현실관에서 자기백성을, 그 망하는 현실관에서 자기백성을 구원과 연결되고 보좌와 연결되는 현실관으로 옮겨가는 작업도 실시한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분리시키고 옮겨가는 작업을 어떻게 하느냐? 그런 작업을 제가 지금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작업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발견할 수 있느냐, 어떤 식으로 우리가 그것을 보게 되느냐, 바로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에스겔과 주변 환경이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성벽이 있고 그 성벽을 뚫고 행구를 차려서 도망치는 입장. 에스겔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뭔가 이벤트를 벌려요. 낮에도 밤에도. 뭐냐, 도망치는 사람, 그리고 도망치는 모습인데 그게 뭐냐 하면 포로 되는 자와 같이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너는 낮에 그 목전에서 네 행구를 밖으로 내기를 이사하는 행구 같이 하고 저물 때에 너는 그 목전에서 밖으로 나가기를 포로 되어 가는 자 같이 하라.” 낮에는 도망치는데 밤에는 포로 잡혀 가는 모습인 겁니다. 굉장히 어렵지요. 밤과 낮에 다른 행동을 에스겔이 보여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6절에서 “캄캄할 때에 그 목전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며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찌어다 이는 내가 너를 세워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게 함이니라 하시기로.”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낮에 이사 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캄캄한 밤에 하는 모습은 아예 처참하게 포로 잡혀 가는 모습, 어깨에 힘 다 빠진 모습을 에스겔이 이벤트로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에스겔의 모습을 무슨 뜻인지 이해를 했겠습니까? 눈이 있어도 소용없고 귀가 있어도 소용이 없는데. ‘에스겔이 미쳤나?’ 했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행동을 할 필요 없지만 이 말씀을 전할 때에 ‘이게 우리 실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나.’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우리 생존을 위한 우리의 현실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집 보러 다니고 계약하고, 이런 온갖 것, 이사 안 나간다고 버티는 것들, 이 가마솥처럼 들끓는 이 모든 것이 모여서 뭐가 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사람 사는 현실이라고 누구나 그렇게 합니다.
뉴스를 탁 틀었다, 거기서 들리는 온갖 이야기들, 북한의 핵이 어떻고, 정부조직이 어떻고, 실업률이 어떻고, 드라마에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복수하고 울고불고 하는 그 모든 것을 다 한 번 끌어 모아 보세요. 다 끌어 모아 봐도 에스겔 안 나옵니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한테는 위기에요. 천국 못 가게 하기 위해서 마귀가 단단히 밀림을 만들어 놓은 곳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예 에스겔의 이 행동자체를 못 보도록.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이 세상. 하나님은 어떻게 여기서 자기백성을 분리시키는 분리작업을 하느냐?
제가 간단하게 에스겔을 보냈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계시가 예루살렘 성벽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에스겔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성벽과 에스겔 사이에 에스겔의 엑션,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세트에요. 예루살렘 성벽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에스겔, 그리고 성벽과 에스겔 사이에 뭔가 벌이는 이벤트, 행동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 봤다고 해서 돈 버는 것도 아니고 생활에 보탬 되는 것도 아니거든요. 이것 알았다고 해서 세상살이 도움되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금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에스겔을 감고 있는 현실은 유일하게 하늘의 보좌와 연결된 영생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TV보고 사람들 만나서 대화하고 하루 종일 애쓰고 스트레스 받으면서 하는 이 모든 것은 백날 해 봐야 영생과 관련이 없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인데 백날 해봐야 그것 영생 아니거든요. 갈라디아서 6장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24시간 생각하고 고민하고 대화하고 TV보는 그 모든 것이 뭐예요, 육체를 위해서 심는 것, 아예 그 수풀, 정글 속에서 살고 있어요.
학생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자율학습까지 하고 밤늦게 집에 올 때까지 하는 것이 뭐냐, 육체를 위해서 심는 일들을 해요. 마귀가 작심을 했어요.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뭡니까? 에스겔이 낮에는 이사 가고 밤에는 포로 잡혀가는 그 이중행동, 그리고 성벽을 뚫는 행동들이 조합되어서 어떻게 낯선 현실 속에 하늘의 보좌와 연결된 말씀이 구체화되는 작업인가? 방금 한 말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어떻게 말씀이 현실로 나타납니까, 그 말과 같은 말이에요. 하늘의 영생 주는 말씀이 어떻게 우리가 느껴지는 현실의 모습으로 어떻게 전환되는가, 그 이야기입니다.
쉽게 하기 위해서 먼저 모세이야기를 해 봅시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모세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왔지요. 모세가 하는 모든 곳에 기적이 그렇게 많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40년 광야 생활을 퍼센트로 따져보면 기적은 별로 없었어요. 그냥 평소의 일상생활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만나가 내렸지만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고 맨 날 내리면 그것은 기적이 아니고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버리고 반석에서 물 나오는 것도 합해서 두 번 뿐이었어요. 특히 우리가 명심해야 될 것은 죄 졌다고 늘 벌 받는 것이 아니에요.
죄 지었다고 벌 받는 것도 기적에 속하는 겁니다. 죄 졌다고 늘 벌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착한 일 했다고 늘 상 받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드문드문 일어나는 그 기적을 붙들고 살기에는 우리 일상이 너무 평범합니다. 너무 우리가 의지할 것이 없어요. 기적이 너무 드문드문 일어나니까. 그렇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드문드문 일어났던 그 기적 말고 대부분을 차지했던 시간은 무슨 시간이었던가? 율법의 시간, 말씀의 시간이었습니다. 탐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승복하라는 그것이 그들의 사회관계, 만남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뭘 느끼는가, 기적을 쥐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기적보다 더 빈번하고 흔하고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 맨 날 하늘 바라보면서 ‘주여, 새벽기도 나왔는데 기적은 언제 떨어집니까?’ 하고 맨 날 기적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라고 매일같이 음미하는 대부분의 시간들을 우리는 보내야 된다는 말이지요. 성경에 기적이 있다고 해서 맨 날 홍해 갈라지고 요단강 갈라지는 그 재미로 산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재미 하나도 없는 말씀으로 살았어요. 말씀 지킨다고 곧장 복이 오고 만나가 곱빼기로 내리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말씀 어겼다고 당장 불이 떨어지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불 뱀이 왔지만 그것은 누적된 것이죠. 그것도 기적이거든요. 기적은 드문드문 일어나는 것이지 매일 같이 일어나면 그것은 기적도 아니지요. 사실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기적이 있습니다. 매일 같이 해가 뜨는 것, 밤에는 달과 별이 뜨는 것, 그것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드문드문 일어나는 기적과 일상에서 산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율법이거든요.
내가 오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오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왜, 나는 내가 세상에서 생각하는 그 현실만 현실인줄 알고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그것 때문에 잠도 못 이루고 그것에 온통 매진해서 실수하면 안 되고 실패하면 나는 쪼다가 되고 망하고 웃음거리가 된다는 그것만 자꾸 신경 썼다는 말이지요. 그러다보니 뭘 놓쳤는가, 진짜 기적을 쏙 집어넣는 그 기적과 관련된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보좌에 관련된 기적은 이 현실에만 신경 쓰다 보니 다 놓친 거예요.
여자들이 옷 살 때 남자들이 제일 곤욕이 뭐냐 하면, 백화점 온 곳을 두 시간동안 따라다니는 거예요. 남자들은 5분 만에 나올 것을 여자들은 두 시간 걸린다고요. 그런데 더 학을 떼는 것은 사온 옷을 집에서 다시 입어보고 벗어보고 재는데 5시간 걸린다는 점입니다. 이게 잘 샀는지, 비싸게 주고 산 것인지. 그냥 입으라고 해도 다시 입고 거울에서 몇 번이고 비춰보는 거예요. 바로 그 시간 속, 그 현실 때문에 진짜 숨어 있는 현실은 다 까먹어버렸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를 범죄케 해요. 범죄케 해서 도망치게 만듭니다. 원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은혜로 된 현실이에요. 은혜로 된 현실에서 은혜가 없는 저주만 있는 곳으로 그들은 잡혀갑니다. 이게 다른 나라에서는 처음부터 은혜가 없었기에 성벽을 뚫고 빠져나온다는 것은 특수하게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수한 민족으로서의 기능이에요. 에스겔이 보이는 행동들은 시범입니다. 장차 너희가 이렇게 망하고 포로 잡혀가도록 할 것임을 에스겔을 통해서 먼저 하게 하십니다.
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을? 그 은혜를. 하나님의 하늘 보좌에 연결된 그 현실을 보지 못하고 기존에 인간들이 사는 보통 현실 속에 그냥 푹 잠겨서 정신없이 살아갔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했느냐하면……, 쉽게 이야기합니다. 이 현실 속에서 특수한 임무를 띠고 망해야 됩니다. 망할 때 우리는 그 망함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믿고 나는 완전히 쪼다 되고 폭삭 망했다, 이것이 특정 인간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근거로 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유다나라 왕창 망했습니다. 왜 망했는가? 그게 어려워요. 은혜로 유지되는 나라에서 빠져나오면 분명히 저주가 없는 세계, 은혜가 없는 세계에 갑니다. 그러데 그 빠져나온 그것을 에스겔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은혜의 장소에서 은혜 없는 장소로 가는 그것을 하나의 캡슐로 담아서 새로운 은혜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망하는데 그게 생명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유일한 새 은혜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분명히 망했다, 이제 세상에서 살 여망도 없어, 라는 고백들을 외치면서 가는 그 길이 “어서 오너라. 영생이 여기 있다.” 하고 영생을 주기 위해서 새로 깔아놓은 노선이고 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직전에 한 기도, 유명한 기도 나오지요.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막 14:36) 성경에서 제일 은혜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 구절입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그대로 은혜가 돼요. “하나님, 저는 망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말게 하시고 망하든 흥하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보여준 이벤트의 핵심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어겨서 포로 잡혀 가는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뜻을 위반해서 포로 잡혀 가는 그것을 통째로 새롭게 구성해서 그것이 새롭게 영생 주는 아버지의 뜻이라는 겁니다.
영생 얻어야지, 하는 것은 영생을 받지 못하고 ‘영생? 시시해. 취미 없어. 나는 세상이 좋아.’ 라고 하다가 왕창 말씀에 얻어맞아서 망해버린 그것이 생생하게 주의 말씀이 너와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바로 육을 위해서 심는 것이 아니고 영을 위해서 심는 사태가 벌어지는 상황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참,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 자체가 실망스러워요. 믿음 좋아도 돈 안주시고 사랑 베풀어도 그만한 보너스 안 주시고 교회 충성한다 해도 살림살이 나아진 것도 없고 오히려 농땡이 부리고 십일조 안하고 주일 예배 다 빠져야 형편이 좀 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럴 때, 주님 자체에 대해서 실망하고 좌절했을 때 우리 태생 자체가 은혜를 몹시 미워하는 태생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까발리고 폭로시켜주는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은혜는 싫고 내 힘으로 성공하고 싶은 사고방식.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게 바로 저주였느니라.” 화산재를 뒤집어쓰는 것처럼 이스라엘과 그 왕들은 마치 부끄러운 듯이 포로 잡혀서, 시드기야 같은 경우는 눈알 다 뽑혀서 비참한 모습으로 갈 때 남들은 ‘하나님한테 벌 받았다.’ 하지만 시드기야 본인의 입장에서 봅시다.
시드기야에게 마이크 대고 “지금 심정 어떻습니까?”하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강 동희라는 감독이 일 년에 연봉 4억 받습니다. 4억 받는 사람이 4천만 원 받고 승부 조작했다고 했을 때에 남들은 손가락질 하겠지만 그 감독에게 마이크 대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나는 폭삭 망했습니다.”라고 할 것이 아닙니까? 대표시절이 화려했던 한국의 농구 대표중의 대표선수,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고 지금은, 폭삭 망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를 제대로 고백하는 순간으로 만드는 그것이 바로 너희들이 모르는, 하나님이 준비한 은혜라는 겁니다.
평소에 살기 바빠서 내뱉지 못하는 진짜 우리의 진정성과 연결되어 있는 그 고백을 세상에 덕지덕지 실망이 있을 뿐일 때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할 때 그 자리에 오기까지 주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이끄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숨어 있던 현실이고 그 현실은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듯이 지금부터 우리는 그 현실에 섞여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실망이고 생각해 볼 때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 뜻대로 안된 것 밖에 없는데 기대하다가 스트레스 받고 짜증만 나는, 더 이상 여기서 살기 싫은, 그래서 죽고 싶은 세상, 그게 현실인데 하나님께서 다른 현실을 준비해주시고 바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야 비로소 주님의 은혜와 용서와 죄 씻음이 보이는 새로운 현실 속에 집어넣어주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두 개의 현실가운데서 어느 것이 귀한 것인지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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