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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종교에서 철학으로 130312강의[철학]

종교에서 철학으로 130312

이름 : (IP:119.18.69.144)

음

한윤범(IP:14.♡.134.60)

13-03-15 12:33

20130312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1-종교에서 철학으로
(강의:이근호 목사)

우리가 오늘부터 부산강의에서 할 것은 [80여명의 신학자들]입니다. 신학자들은 원래 교회가 생기고 난 뒤에 신학자고 후대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고대인들은 안 하거든요. 그래서 한편으론 그냥 철학자다 하면 됩니다.

철학자에 대해서 우리가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고 생각하는데 옛날에는 철학이라는 게 없었고 종교가 대세란 말이죠. 종교에서 철학이 나왔고 철학에서 중세 때 신학이 나왔고. 그리고 다음에 나온 게 현대판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과학이 나오면서 과학한테 최종 진리에 대한 규정을 양도해주고 철학과 종교는 빠지는 거예요.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별 가치 없는 식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과학시대니까. 확실하게 관찰 되는 것만 진리로 반영하기 때문에.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회에서 나왔잖아요. 이 사회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뭉쳐 있는 겁니다. 이걸 하나로 묶는데 어떻게 묶느냐 하면, “내가 대장할게.” 하는 식으로는 묶이지 않아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열한 있는 어떤 것, 신이죠. 신 앞에서 인간들은 신을 쳐다보면서 자동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식으로 사회를 이루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왜 이런 것, 종교나 철학, 과학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다시 이야기해서 원래 처음에는 종교에서 철학이 나오고 그 다음에 과학이 나오고. 철학에서 신학도 분파 되고 하잖아요. 결국 이 모든 것이 사회를 하나로 만드는 정신, 기본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그러한 사상, 이것이 이런 종류로 나와 있거든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이유는 인간 사회가 성경에 의하면 멸망 받게 돼있어요. 이 세상은 복음에 의하면 멸망합니다. 그런데 인간사회에는 심판이란 없어요. 인간사회에선 복수가 있을 뿐입니다. 나 안 건드리면 다른 사람 안 건드려요. 그런데 건드렸다고 하면 복수에 나서는 겁니다. 학교에서 자기 얘가 선생한테 맞았다고 하니까 삼십 대 청년 다섯이 선생을 패는 것. 선생한테 감정 있는 건 아니고 내 얘를 때렸으니까 당신도 한 번 당해보라는 거죠. 복수지요.

그러면 심판은 누가 하느냐? 심판은 아무도 할 사람이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심판을 하려거든 너부터 심판 받을 생각하라고 나오거든요. 죄 없는 자가 심판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누구에게 복수할 때는 나도 당했다. 나도 당했다는 걸 근거로 해서 남한테 너도 당해보라는 식이지 나는 완벽한 신이니까 너는 나한테 심판 받아야 돼. 이런 경우는 정신병자 외에는 별로 없단 말이죠. 그렇잖아요.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심판하지 않아요. 그런데 큰 교회 교인을 작은 교회가 빼앗아 가면 그때는 복수를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건 이단이야.” 하고 심판의 형식을 띠지요. 그런데 작은 교회, 개척교회는 맨날 큰 교회를 심판하잖아요.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으니까. 원래 가난한 사람, 없는 사람은 부자를 욕합니다. 나는 못 사는데 왜 너는 건방지게 잘 사느냐? 그런데 만약에 부자를 공격하던 그 사람이 나중에 부자가 되면 심판을 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죠. 콩고물이나 먹고 조용하라고 하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있잖아요. 대기업은 크게 되고 중소기업은 작지만 중소기업은 원가대로 받고 대기업은 원가 이상으로 마진이 70%, 80%, 어떤 때는 명품 같은 것은 200%도 받거든요. 200% 받든지 300% 받든지 어쨌든 간에 잘 먹고 살면 우리는 그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부러워하면서 질투를 하게 돼있고. 복수심을 품게 돼있고. 그래서 큰 기업에서 많이 양보를 하는 것 같지만 절대로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고. 문어발식으로 다 잡아먹고.

과학시대, 이런 시대에서 심판을 누가 할 것인가? 심판이란 것은 없는 거죠. 초창기 공동체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모든 사회에서 초반기에는 제물이 없으면 심판도 없는 거예요. 제물을 제단에 바침으로써 너나 할 것 없이 다 쳐다보는 거죠. “저 고귀한 것, 저 갓 태어난 어린아이 목숨 어디로 가지? 제단 위로 가는구나. 제단 위로 왜 가지? 아, 잡는구나.” 누굴 달래기 위해서? 신을 달래기 위해서.

신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복수를 하기 때문에 신을 달래놓으면 먹고 챙긴 게 있으니까 함부로 인간을 저주하지는 않을 거란 거죠. 평소에 인간들 사회라는 것은 주고받는 가운데서 결합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 오면 떡 나눠주잖아요. 잘 봐달라는 거예요. 개업해도 떡 돌리고. 친하게 지내고 주차문제로 시비 걸지 말라는 이런 뜻에서 먼저 내잖아요.

신도 인간사회에 편입이 돼요. 철학에 보면 나옵니다. 아낙시만드로스, 교재 3페이지에 나오는데, 이 사람은 나는 신에 대해서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세상이란 정해지지 않는 것이 기본이지 신이 만드는 건 아니다. 왜? 관찰되지 않고 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소리는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벌써 철학이 나올 때부터 기존의 신을 섬기는

방금 한 걸 복습해봅시다. 신은 뭐가 없이는 없다? 제물. 뇌물 없으면 신과의 소통이 안 되는 겁니다. 인간사회에서도 말로만 때우는 것이 아니고 떡이라도 내야 되는 거예요. 이걸 경제학에서는 남아도는 잉여를 타인에게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돌아올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전에 수비 또는 방어하는 거예요.

토지가 생기면 반드시 여기에 방어술이 필요해요. 모든 공동체 시장은 토지가 있기 때문에 토지를 방어하기 위해서 만든 걸 캐슬, 성, 성채, 도시입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농촌이 먼저라고 생각하잖아요. 도시가 먼저 발달했어요. 땅이 있는 한 방어해야 되기 때문에. 토지를 지키기 위해서 신도 우리 일반인과 같이 취급해서 제일 좋은 걸 좋아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어서 제일 좋은 것을 제물로 바칩니다. 제물이 있는 곳에만 신이 있어요. 그냥 빈 몸으로 신을 찾을 순 없습니다. 성경에도 나올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바치고 신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갖고 있는 기본 본성에 어긋나는 거예요. 그러면 뭔가 바치고 나오면 되지 않겠는가? 바치고 나오게 되면 그 다음부터 인간은 당당해져요. 누구 앞에? 신 앞에. 사과상자든 뭐든 너도 얻어먹은 게 있잖아. 딴소리 하지 마. 빠징고나 술집, 노래방 주인들이 경찰들에게 주고 장부에 적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단속 나와도 큰 소리 치는 거예요. 얻어먹은 게 있기 때문에.

그걸 잉여산물. 생산을 하는데 남아도는 것을 신에게 갖다 바칩니다. 그 연결구 역할을 하는 자들이 왕입니다. 왕이 통치도 하고 제사도 드려요. 통치나 제사가 가만히 보면 같은 거예요. 왜냐하면 왕이 통치하려면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되잖아요. 모으는 방법은 다같이 신을 보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는 신도 얻어먹은 게 있기 때문에 우리한테 복수를 할 수 없습니다. 얻어먹지 않고 그냥 해버리는 걸 복수가 아니고 심판이죠. 복수를 하는 신은 있을지라도 심판을 하는 신은 없어요.

그리스 신화에 뮈토스의 반대말이 로고스라 하거든요. 둘 다 원 뜻은 ‘말씀, 말’이란 뜻입니다. 차이점이 뭐냐 하면, 뮈토스는 완료된 것, 일종의 묵시적이죠. 완료된, 확정된 말. 로고스는 변화무쌍한, 변화가 가능한, 변화의 여지가 있는 그러한 진리. 뮈토스는 신화적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거죠. 로고스 시대로 든다는 것은 점차로 종교를 떠나서 철학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런 과도기적인 시대에 있던 자들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2페이지 나오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등 이 사람들이 전부다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바뀐 사람들입니다. ‘믿자’에서 따지는 거예요.

그냥 믿자, 믿자. 뭘 믿느냐 하면, 신을 믿는 게 아니고 신에게 이미 거래가 됐다는 거예요. “신의 저주? 걱정하지 마. 우리가 신의 입을 막아놨어. 걱정하지 마. 이미 뇌물을 줬다니까.” 신이란 인간보다 위대하잖아요. 모든 자연변화, 태풍, 화산, 파도, 날씨, 가뭄, 전부다 주관하는 게 누구 영역입니까? 태양이 움직인다? 옛날 사람들은 세상을 굉장히 깨끗하게 봤어요. 태양을 움직인다는 것은 우리 영역이 아닌 거예요. 오늘날 과학자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저 태양을 어떻게 이용해먹을까. 이렇게 생각하지 태양은 우리보다 훨씬 세고 우리는 태양 없이는 못 산다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요. 요새 과학자들은 태양 없이 못 살아. 태양을 섬기세. 이런 과학자는 없어요.

오늘날 과학자들이 왜 태양과 달에 대해서 만만하게 보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오늘 보고 내일 봐도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 이것은 등신 같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있는 거예요. 그러니 구태여 그걸 존경하거나 경배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산에 바위를 보고 비는 자체가 미신인 것처럼 태양을 보고 비는 게 미신인 이유가, 태양 자체를 찾을 필요가 없거든요. 우리만 있으면 되지 태양은 있으나마나.

뮈토스에서 신화에서 종교로 바뀌면서 점차적으로 인간은 신에게 의존하는 인간보다도 서서히 자기 자신의 본질을 찾으려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제물을 바치지 않아도 누구한테 구애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것 주장하면 소크라테스 시대나, 플라톤 시대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서 유신론자 될까요, 무신론자 될까요? 더 이상 신에 의존하지 말고 우리 인간 위주로 살아보자는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무신론자 될까요, 유신론자 되겠습니까? 무신론자 되겠지요. 무신론자가 되는 이것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신을 인정했지요. 운명을 인정했단 말이죠. 우리가 모르는 것, 우리 넘어 움직이는 것, 태양이 움직이고, 달이 움직이는 건 자기가 움직이게 한 게 아니거든요.

관심사가 무신론자란 신을 인정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더 이상 우리가 신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없다에서 신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의지할 필요는 없다가 무신론이 되는 겁니다. 신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제물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이것은 인간을 위해서 쓰여야 되지 등신 같은 늘 있는 걸 위해서 고귀한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 무신론이에요. 오늘날 교인들과 똑같다고 보면 되는 겁니다. 교회는 나오되 신에게 그렇게 의존할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기원전 2000년 전에 지중해에 있는 크레테 섬에서 어린아이 제물로 바쳤는데 그것이 고고학으로 1975년인가 발굴할 때 나타났어요. 그때부터 모든 기괴한 것, 기묘한 나무, 돌, 현상에 제사를 드렸고 심지어 인도에서는 사람이 죽고 난 뒤에 머리카락이 자라나니까 머리카락 자체에도 독자적인 생명이 있다고 본 겁니다.

기원전 1700년경인가 현재 러시아 남쪽에 스텝지방에 있는 아리아 민족이 쳐들어와서 인도를 점령하고 말았어요. 그때부터 인도에서는 아리안 족 종교가 발생되는데 그 아리안 종교에서 신에게 경배하는, 유목자들이 믿던 신이 인도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신에게 찬양하는 것이 베다에요. 리그베다를 암송으로 함으로써 암송만 하면 안 되고 제물을 바치면 이게 바로 그 사회를 구성했습니다. 항상 염두에 둘 것은 종교가 없으면 사회는 다 깨져요. 지금도 이태리, 프랑스, 남미의 종교, 북한도 죽은 김일성 유령이 통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리그베다에서 모든 게 신이에요. 신성한 모든 것.

여기서 제사장들이 신을 빙자해서 공동체의 권력을 쥐는 거예요. 권력을 쥔다는 것은 노동 적게 하고 밥 먹고 산다는 뜻이에요. 항상 경제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게 이해가 돼요. 사람은 자기 몸 편한 쪽으로 움직이게 돼있어요. 몸 편한 게 뭡니까? 일은 적게 하고 남이 고생한 걸 얻어먹으면 그게 바로 사람 사는 최고의 행복이거든요. 주식, 왜 하는데? 사람들이 투자를 왜 하는데요? 일은 적게 하고 자기 쓸 이상의 많은 걸 얻기 위해서 여행도 하고 싶고, 골프도 치고 싶어서 하는 것 아닙니까. 그걸 옛날 왕족, 귀족들, 종교인들이 했다 이 말입니다.

제사가 많으니까 너무 제물이 많이 들어가. 제사장들이 자기 먹는 것 이상으로 남아도니까 땅을 샀습니다. 농토를 임대차 계약으로 농사를 짓다보니까 농사가 일종의 도박처럼 비가 제 때 오게 되면 농사가 잘 되고 비가 안 오면 망하거든요. 그러니까 농부들이 농사 질 때 위험부담이 다른 게 아니고 가뭄 들 때는 옆에 있는 부자나 귀족들에게 비싼 이자로 지어요. 그러다 농사가 잘 되면 자기만 잘 됩니까? 옆집 농사도 다 잘 되거든요. 그러면 곡식 값이 다운이 돼요. 빌릴 때는 비싸게 빌렸는데 곡식을 팔려고 하니까 헐값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족들이 곡식으로 갚지 말고 돈으로 갚아라. 곡식으로 갚으면 똑같은 양으로 갚으면 되는데 돈으로 갚으려고 하니까 세 배나, 네 배나 곡식이 더 잘돼야 돼요. 네 딸이나, 아들이나, 네 몸이라도 내야지.

그래서 노예제도가 생깁니다. 이것은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 구약의 선지서에 보면 나오죠. 이스라엘 내부에 그런 게 있다는 것은 결국 이웃 우상 섬기는 이방나라를 모방했잖아요. 우상을 섬긴다는 말은 이스라엘 관점이지만 이방나라 관점에서는 신을 섬기는 것이 사회구심력을 유지하는데 불과한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걸 왜 따라 갑니까? 그걸 지금부터 설명할게요.

지상나라는 복수밖에 없는 겁니다. 함무라비 법전도 마찬가지로 복수에요. 네가 남한테 해준 대로 갚아줘라. 이게 복수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복수가 있는 게 아니고 심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복수와 심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심판은 반드시 심판할 법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복수는 법이 필요 없어요. 해코지 하면 너도 당하고 해코지 안 하면 좋은 이웃관계가 되는 겁니다.

아파트 이사 와서 떡 돌렸는데 3층에 사는 사람 직업이 드럼 치는 사람이라서 새벽 두시까지 드럼 치면 떡 몇 개 돌린 게 용납이 안 되지요. 거기다가 밴드 한다고 색소폰까지 불어대면 떡 돌렸다고 용납이 안 되잖아요. 사회라는 것은 나를 가만두면 괜찮아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나를 해코지 하고 내 주차 자리에 다른 사람이 주차하면 그 다음부터 복수에 나서게 돼있고 복수를 못하게 되면 졸지에 나는 이 세상에 무능한 자가 되고 복수가 시행이 되면 이 세상에서 강자가 되어서 살맛이 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하나님은 인간사회가 어떤가를 이미 아시고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를 아시고 일방적으로 모세를 불러다가 시내 산에서 법을 주죠. 그런데 이 법은 뇌물이 됩니까? 이미 법이 왔을 때는 뇌물 차원이 아니고 법을 지켜야 돼요. 법을 못 지켰는데 뇌물 주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제사법이란 뇌물용이 아니고 앞으로 똑바로 하란 말이야. “못 해도 그만 이것 얻어 처먹고 좀 봐주소.” 이것이 일반종교라면 하나님의 법은 아무리 어린 양을 매일같이 잡아도 “그래 봐줄게.” 이건 아니에요.

방금 이야기한 걸 어렵게 하면, 일반종교는 나쁜 짓 했으니까 대충 먹고 떨어지세요. 앞으로 죄 짓더라도 모른 척 해달라는 것이 뇌물용 제물이라면, 하나님의 법은 모든 죄를 어린 양에 담아서 이제부터 어린 양 앞에서 어린 양이 제시하는 계명에 순복하지 아니하면 가차 없는 저주가 주어지는 거예요. 나쁜 짓해서 저주받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 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 죄를 씻어주는 그런 하나님의 용서의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믿지 않는 그것으로 인하여 저주받는 게 복음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이 나쁜 짓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 십자가 안 믿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면 예수 믿는다고 우기는 사람 거기에 가득 들어있어요. 왜 가득하냐 하면, 그 사람들은 예수님 십자가 피를 나도 살고 예수도 사는 방편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 지었으니까 자기 위신이 깎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용서하는 방법을 자기가 소유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도 만족하고 내 위신도 사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둘 다 된다고 여기는 인간들 다 지옥 가고 있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제가 지난 오후에 그런 설교했지요. 하나님은 우리 성도를 영원한 채무자로 만든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이것은 갚으려야 갚을 수 없는 채무자로 만들어버려요. 갚을 수가 없어요. 너무 큰 채무를 지웠기 때문에. 그래서 천국에 가면 성도가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 앞에 던지지요. 이 면류관으로도 주께서 용서하신 것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갚지를 못한다면 천국에 남아있는 건 뭡니까? “언젠가는 갚을 거야. 언젠가는 갚아서 내가 괜찮은 인간으로 드러날 거야.”라는 사실은 천국에선 영원히 용납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일방적인 용서와 사랑만 용납되는 곳, 그게 천국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천국에서 산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절대로 용납 받지 못하는 세계에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평소에 내가 내 위주로 살아가는 이것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저주라는 것을 드러냄을 당해도 우리는 그걸 간수해야 될 그런 세계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 바뀌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갑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어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이 단정한 이유가, 결국 이 육신은 그냥 죽으면 안 돼요. 저주받을 몸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항상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고 하잖아요. 글쎄 그게 우리를 지옥 가게 만든다니까. 이것은 하나님께 뇌물 갖다 바치고 십일조 함으로써 복이 온다는 일반적인 우상 섬기는 방법을 똑같이 사용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일조 하게 한 것은 네가 백날 죽었다 깨어나도 십일조 지킨다, 못 지킨다? 못 지킨다는 걸 이야기한 거예요. 안식일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고신 측에서 왜 그렇게 안식일 잘 지키는지. 합동 측에서 십일조를 왜 그렇게 잘 하는지. 십일조 있다, 없다가 아니고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잖아요. 막 살라는 말은, 현재 지금부터 막 살라는 뜻이 아니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더라도 그게 막 살고 왔다는 뜻이에요. 막 살아서 죽은 거예요. 집으로 가니, 안 가니 노래 불러도 소용없어요. 그 사람은 막 살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 사람은 본인을 모르는 거예요. 자신의 모든 종교를 버려야 되는데 버릴 수가 없어요. 왜? 종교를 버리면 교회가 안 될까 싶어서.

사람은 종교생활하려고 교회 온단 말이죠. 종교마저 다 버린다면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면 특별히 신에게 따로 남겨서 해드릴 게 없잖아요. 뇌물이 없잖아요. 제물이 없다니까. 이것은 내가 쓰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감정과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따로 마련하는 거예요. 이것 드리고 싶은 거예요. 그것마저 막 사는 거라면 교회가 안 만들어진다니까. 교회가 안 만들어진다면 눈에 보이는 하늘나라가 없으니까 이것은 자신의 믿음에 부합되지 않는 거예요.

교회도 없어, 믿는 사람도 없어. 그러면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해야 되는데 교회라는 제물, 십일조란 제물, 아름답게 찬양하는 그걸 제물로 바쳐서 신과 교통해야 되는데 그런 제물 다 걷어버리면 그것이 하나님께 채무를 갚을 수 없다면 무슨 수로 하늘나라에 갑니까? 도저히 믿지를 못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믿음이 없는 사람이에요. 믿음이 없으니까 꼼지락꼼지락 뭐라도 고상한 것, 약간의 뭔가 멋진 것, 안 그러면 간증 또는 기적, 뭐라도 있어야 되는 거예요.

제가 주일 오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선교하는 사람치고 선교하는 게 죄라고 이야기한 사람 한 사람도 못 봤다고. 물론 내가 아는 어떤 분은 달리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선교를 죄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 꼼지락거리는 이상한 예상 못한 일을 그걸 기억해서 그것으로 신과 소통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십자가 대용품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되지요?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지 않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주의 기적으로 내 죄를 가리는 대용물로 나섬으로 말미암아 그 대용물 뒤에서 뭐가 감춰집니까? 나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감출 수 있단 말이죠.

이 [80여명의 신학자들]을 하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꼼지락이에요. 결국은 그래도 나는 의미 있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해서 뭔가 붙이는 게 있어요. 그게 신학이고 철학이고 과학입니다. 그게 종교고.

옛날 고대 사람들 욕하지 마세요. 미신쟁이라고 하지 마세요. 중국에서는 거북이 등껍질 보고서 미리 전쟁을 할지, 말지 점쳤잖아요. 다른 인도에서는 돼지의 간으로 하고. 간이 금이 가는 움직임이 인간의 손을 능가한 초월적인 존재의 존재성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보는 거예요. 손바닥에 침을 뱉어서 칠 때 날아갈 때 궤적, 침의 운동량은 우리 선을 떠나버렸으니까 신에 속한 겁니다.

흔히 연예인이나 스포츠맨들 볼 때 하는 말이 신은 공평하다. 인물 잘났으면 노래를 못하든지, 노래 잘하면 인물이 못났든지 하면서 신은 공평하다고 하거든요. 이러한 객소리들이 전부다 고대 시대의 상황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라호 쏘면서 제사 지내는 것 봤어요? 돼지머리 놓고 제사 지내는 것, 왜 그렇게 합니까? 분명히 우리 말고 다른 영역이 있다는 것. 이 말은 우리를 굉장히 겸손하게 하는 것 같지만 법이 없기 때문에 심판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하지만 부족한 것을 제사 드리면 뭔가 우리 것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자기 방어죠. 하지만 법은 뭘 의미합니까? 법은 우리 방어를 옹호해주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인 심판이에요.

제가 주일 낮에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했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롯은 살았고 그 외에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바뀌어져야 해요. 왜냐하면 롯은 이미 심판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더 이상 산 자가 아니에요. 자기 안에 뭘 품고 살아가는 겁니까? 이미 죽음을, 심판을 품고 사는 사람이에요. 심판을 품고 산다니까 노래가 생각나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다워] 꿈을 품고 사는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심판을 품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짜 유일하게 죽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죠. 흙으로 갔기 때문에 논할 가치도 없고. 죽음을 딛고 살아났기 때문에 진짜 죽은 자에요. 그 당시에 롯은 유일하게 죽은 자 됩니다. 다른 사람은 죽음을 모르며 살아간 사람들이고. 성도는 십자가를 품고 살기 때문에 진짜 죽음을 아는 사람, 살아도 내가 산 게 아니라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 진짜 죽은 사람은 바로 산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처럼 신이라 하는 것은 과학시대라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달라지지 않았다. 신은 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공동체가 우선이었다는 겁니다. 창세기 31장 19절에 보면, 라반이 집에 뭘 모시느냐 하면, 드라빔입니다. 드라빔을 라헬이 훔치지요. 그걸 왜 훔칩니까? 그게 순금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상속권이에요. 그게 있으면 나중에 그 집안에 대해서 누구나 죽으니까 아무리 부자라도 결국 죽잖아요. 죽으면 남는 게 재산이잖아요. 재산 분배할 때 이 집안사람이라는 표시가 그거거든요. 뭔 뜻입니까? 재산을 가질 사람은 그 집안의 신을 공통적으로 섬겼던, 그러니까 그 신을 섬기는 공통 구성원이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교인이 되는 거예요.

그 신의 교리가 뭐죠? 신은 뇌물 갖다 바치면 받아 챙긴 게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가 안 온다는 게 교리에요. 사사기 16장에 미가 나오지요. 미가 엄마가 자기 아들이 도둑질 한 걸 모르고 함부로 저주했다가 나중에 수습한다고, “신이여, 내 아들을 위해 섬기오니 내 아들에게 퍼부은 저주는 방지해주세요.”라는 거예요.

옛날 고대에 있어서 인간 속에 신이 들어있거든요. 신이라 하는 것은 인간 속에서도 나오는데 그게 뭐냐? 말이에요. 말을 함부로 했을 때는 반드시 말이 씨가 되어서 반드시 거기에 대한 재앙이 오게 돼있어요. 그래서 제사장들은 이 점을 이용해서 이 말을 언어로 바꿔요. 언어를 진흙으로 만든 석판에다 쓰지요. 그러면 종교 제사장들이 뇌물 가지고 제사 지내는 것 말고 다른 일이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백성들은 자기 종교교리를 가르쳐서 정신을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해야 되겠지요.

그 일을 할 때 교과서가 뭘까요? 바로 리그베다 이야기했지요. 제사에 너무 치중하기 때문에 싫다 해서 윤리로 돌아서자는 것이 우파니샤드라는 것이에요. 리그베다 하는 사람 중에서 삐진 사람, 다른 파가 생겨서 제사가 왜 그렇게 많아. 돈 너무 들어가니까 말로 가르치는 데 열중하자. 그렇게 생긴 게 우파니샤드고 거기서 나온 게 힌두교에요.

그러니까 종교인들이 밥 먹고 살려면 불이 나도 뭘 놓치면 안 돼요? 말을 글씨로 바꾸어서 종이에다 새긴 경전만큼은 수백 대에 걸쳐서 나오면 나올수록 계속해서 세습적으로 후손들은 밥 먹고 살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은 신성하니까. 이것은 결국 말보다 언어가 신성하고 언어를 새긴 그 종이, 그 경전이 신성한 겁니다. 경전만 있다면 계속해서 우려먹을 수가 있고, 그들의 잉여농산물을 일방적으로 착취할 수 있고 뺐을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느헤미야, 에스라 이후에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계시가 끊어진 이후에 예수님 오실 때까지 서기관들이 하는 일이 뭐예요? 글자를 오류 없이 정확하게 특히 ‘하나님’ 글자를 쓸 때는 다시 목욕하고 글자 쓰는, 완전히 미쳤어. 현재 이슬람이 이슬람 되게 한 것은 코란 때문에. 꾸란이라 하지요. 꾸란이란 경전 때문에 경전에 있는 언어는 신성한 언어가 된다는 겁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 종교가 있다는 걸 우리가 알아야 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됐다고 우겼다고 해서 신자라고 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어떤 특정 교리를 동의했다고 해서 신자라고 할 수 없어요. 성경말씀은 제사장이 다뤄질 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히브리서 4장의 말씀처럼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그 말씀 앞에서 어느 누구도 잘했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도 있지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니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2장 13절)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도록 십자가 복음만 증거 되도록 일하시는 겁니다.

이미 그전에 복음이라는 것이 환경이 솟아오르기 위해서 인간이 쳐해 있는 모든 공동체의 상황이 어떤 종교가 있으며 어떤 철학이 있는가? 우리가 이걸 놓칠 수가 없지요. 그야말로 자연적으로 알아가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자꾸 예수 복음 이용하면서 뭔가 아직도 따로 챙겨서 챙긴 것으로 “하나님, 사랑해줘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뇌물 바치고 제물 바치는 식으로 나오는 그것을 그것마저 죄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자백이 돼야 되겠죠.

그렇게 해서 신화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신화의 세계에서 점차 산업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하다보니까 여기에 이태리 있고 그리스, 터키, 지중해 있잖아요. 앗시리아가 망하기 이전부터 신비종교가 들어옵니다. 터키 이쪽에 밀레노, 밀레투스라는 넓은 지역에서 이오니아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쪽 지역이 무역이 번성하면서 외부에서 오는 이방종교가 쏟아지면서 신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분위기 일어납니다.

그게 교과서에 나오는 탈레스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이집트 상인이었는데 모든 삼라만상에 대해서는 물이라고 이야기했어요. 이 사람은 이것만 유명한 게 아니고 지구가 둥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봅시다. 옛날 사람들은 망원경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참 신기하죠. 월식이 일어날 때 동그란 달이 지구에 먹힐 때 그걸 보고 지구가 둥글다고 본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처음부터 보고 믿자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신 이야기 하지 말고. 그 전에는 신화의 세계인데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일리아드, 오디세이 유명한 것 있지요. 고대 그리스의 일종의 소설인데요. 항상 신화는 시로 쓰고요. 소설은 문장으로 이야기해요. 호메로스부터 신화가 시작된 게 아니고 이전부터 있었고 신화에서 점차 철학으로 바뀌는 과정에 일리아드, 오디세이라는 게 나왔어요. 나오고 난 뒤에 그 책도 물론 보면서 점차 동양에서 나오는 앗수르 문화와 결합이 되면서 다시 한 번 의심하고 관찰하고 점검해서 신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자꾸 뇌물, 제물 처바르지 말고.

그전의 그리스 신화는 뭐냐 하면, 혼돈과 땅, 그 둘 사이에 의해서 세상은 다 만들어진 거예요. 우라노스란 하늘도 사실도 땅에서 만들었다고 본 겁니다. 가이아란 여신이 만들었겠지요. 그리스 신화의 특징은 안정이 아니고 완전히 싸움판이에요. 왜 이것이 신화이면서 신화적이 아니냐 하면, 신이라는 것이 그전까지는 고요했는데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신을 표현하니까 점차 관심사가 자연에서부터 인간 쪽으로 넘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탈레스가 하는 말이, 이제는 인간이 관찰하자. 세상이 어떻게 되는가? 물로써 돼있다. 이제는 우리 주변의 일을 신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우리가 관찰한 원리로 수습해나가자. 그러면 결국은 만물의 진리를 인간이 결정하는 거예요.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된다. 프로타고라스란 사람이 말했고 이 사람은 이백년 전 사람이고 제일 먼저 탈레스부터 그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화의 세계가 아니고 로고스의 세계니까.

결국은 뮈토스, 신화라 하는 것은 완성됐다 했지요. 그런데 로고스 시대는 변화하지요. 변화를 우리가 읽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기지요. 변화를 우리가 읽어버리면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변하면 안 되잖아요. 이게 모순되는 거예요. 변하는 인간이 변화를 읽는다는 것은 백날 측정해도 정답이 나올 수 없지요. 왜? 같이 움직이니까. 이게 갈릴레오가 말한 상대성원리라는 거예요.

상대성원리는 아인쉬타인이 말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벌써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상대적 밖에 안 되면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고 진리라는 개념이 달라져요. 진리란 절대적 개념이 아니고 우리가 얼마나 유용하느냐, 얼마나 편리하냐, 그걸 진리라 하는 거예요. 어린애가, “아빠, 어려운 수학을 왜 해야 돼?”라고 할 때 아빠가, “그건 진리니까.” 그런 소리하면 안 되고 뭐라고 해야 돼요? “크면 다 쓸데 있어.” 이게 진리라니까요.

그러니까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는 신화의 세계에서만 이야기하는 거고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들어오게 되면 뭐가 진리에요? 유용성이겠지요. 그러니까 이미 그 시대가 어디서 왔다? 동양에서부터 그 분위기가 들어왔잖아요. 동양 분위기 쪽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나중에 기독교가 들어와요. 기독교란 게 뭡니까? 절대 진리를 추구해서 사람들이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있던 신보다 나한테 유용할 수 있다. 구원받는데. 천국을 쉽게 갈 수 있다든지 지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다든지 하는 이 유용성으로 드디어 기독교가 로마에 확대됩니다.

10분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3-03-15 12:34

20130312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1-종교에서 철학으로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의 사회기 때문에 신을 섬기고 신화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사회를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사회란 가족에서 나왔고 가족은 남자와 여자로 되는데 처음에 도시를 만들 때는 농경시대기 때문에 여자들이 일도 많이 했어요. 도시로 발달되면서 남자들이 전문직을 갖게 되면서 그냥 들에 가서 호미질이나 하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적인 손 움직임, 반복적인 정신의 움직임 말고 인생이 뭐며, 세계가 뭐며, 신은 누구며, 달은 어떻게 변화되느냐? 별은 어떻게 질서를 갖추느냐? 이런 것 저런 것 따진다는 자체가 인도에서 아트만이라 하거든요. 아트만은 자아입니다.

1700년경에 아리안 족이 와서 기원전 800년경에 리그베다란 경전이 있었고 그것도 삐져서 우파니샤드란 경전을 따로 만들었는데 거기에 주안점이 뭐냐 하면, 제사해서 신을 달래서 신에게 뇌물주고 그것다 다 귀찮은기라.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냐가 최고다. 이게 아트만이에요. 내가 누구냐는 필히 ‘자아=신’이 되는 겁니다. 신은 내 안에 있다.

기원전 483년 싯다르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아내와 자식도 버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고민을 갖고 가출했어요. 이 사람이 바로 부처. 그런데 이 부처란 사람이 아트만에 대해서 내 안에 있는 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의미에 있어서 철저하게 철학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신화에 대한 독립을 선언하면서 신화고 신이고 다 치우고 중요한 것은, 내가 중요한 거예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산다는 뿐만 아니고 내가 누군지 알기만 한다면 내 바깥에 일어나는 일들은 나보다는 덜 중요하니까 바깥에 있는 신에 의존하고 종교에 의존하는 것은 다 귀찮다 이 말이죠. 어떻게 한꺼번에 끊는 방법은 뭐냐? 내가 누구지? 내가 진리를 내 쪽에서 알아버리면 그 모든 것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게 진정한 해탈이지요. 내가 누구냐? 사람들이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가 아니고 내가 죽어서 어떻게 되는가? 그러기 위해서 자식도 버려야 되고 가정도 버려야 되고. 모든 공동체가 가정이 중심이니까. 가정을 버렸다는 것은 곧 사회를 버렸다는 것이고.

그래서 절대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세상을 포함해야 되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세상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고, 나만 알면 그게 절대 진리라는 것이죠. 이걸 첫째 시간 마지막에 나한테 얻는 유용성이 있으면 그게 진리라는 거예요. 남 좋은 일은 진리가 아니에요. 나한테 좋아야 진리에요. 이걸 오늘날 교회에 적용시키면 남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진리가 아니에요. 뭐가 진리입니까? 내가 구원받아야 진리에요. 그러니 교회 가는 모든 신학이고 복음이고 이야기하지만 그 출발점은 내가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이걸 20세기 들어와서 뒤집어보려고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칼 바르트. 칼 바르트는 출발점을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가 아니라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냐는 겁니다. 그런 칼 바르트에 영향을 준 사람이 헤겔입니다. 헤겔이란 사람은 인간은 절대 정신에 의해서 발생되었단 말이죠. 헤겔이 말한 절대 정신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 사실에 있습니다. 성육신이죠.

진리가 스스로 자기를 부정해버렸다. 진리가 부정함으로써 참 진리에 도달된다. 이게 변증법이라 하는 겁니다. 정반합. 진리가 자기 스스로 진리 아니라고 해버렸단 말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고 비참한데 이런 인간 속에 영원하고 비참하지 않은 분이 들어왔다는 말은 뭐냐? 비참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과는 반향성이 반대기 때문에 그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종전까지 알았던 모든 진리라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인간에서 나왔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다.

그럼 어디서부터냐? 신이 인간이 된 그 자리부터 출발해야 그것이 바로 참된 진리에 이른다. 그럼 그 진리와 종전 같은 진리는 대체가 된다. 대체가 되면 종전 것은 틀린 게 아닌가? 틀렸다고 버리면 안 돼요. 정반합이니까. 반이 있다는 것은 다시 정으로 나갈 수 있는 바탕이 되니까 버릴 필요가 없다고 본 거예요. 제가 개혁주의신학회에서 논문 발표하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면 역사라는 게 필요 없지 않느냐? 필요가 있다, 없다는 그것은 누구 중심이에요? 내가 어떻게 진리를 아는데 필요 있는 걸까? 필요 없으면 버리고, 필요 없어? 그럼 데리고 온다. 이 모든 결정을 자기가 하는 게 돼요.

그래서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부처가 발견한 게 뭐냐 하면, 이거였습니다. [모든 것은 행위가 먼저다.] 이 말은 내가 행위 한다가 아니고 행위가 먼저 있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선택을 포기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면 부처가 하는 이야기가 내가 선택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악의 질곡에 빠지게 된다. 이걸 분별, 경계라 해요. 이게 선일까, 악일까 하고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 선과 악의 질곡에 빠진 게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거기서 벗어나려면 나의 선택 이전에 먼저 더 큰 선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 선택에 의해서 나는 추가적으로 발생된 것이기 때문에 나는 현재 선과 악이라는 분별 자체에서 해탈해버리면 참된 진리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들어보니까 선택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를 제대로 공부 안 하니까, 지금 세상에 있는 불교는 점쟁이거든요. 그저 조상 제사 드리면 복 받습니다. 돈을 얻기 위해서 민중들의 토속적인 것을 불교로 색칠한 것이고. 진짜 불교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있고 문제가 되는 거예요. 해탈의 경지에 이르면 진짜 선택, 행위만 있다고 했지요. 진짜 행위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질곡만 있는 분별심이 있는 이런 세상에 이게 왜 와야 되는지 이유가 없어요. 거쳐서 가야 되는데 이 힘든 세상, 고해 같은 세상, 생로병사의 세상. 그러니까 싯다르타가 제일 먼저 본 게 생로병사였잖아요. 자기는 왕자지만 바깥에 사는 걸 보니까 너무 눈물 날 정도에요. 인생은 왜 이렇게 사느냐? 무엇 때문에 있느냐? 왜 이런 고통이 오느냐? 왜 고통으로 왔다가 병들어 죽느냐? 모든 것은 변화에서 온 것이다. 변화 자체를 중지하면 그게 해탈인 거예요.

석가모니가 노렸던 것은 이겁니다. 사람이 해탈을 벗어나는데 있어서 신에게 의존한다는 그것이 오히려 해탈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발견한 거예요. 신에게 의존하면 언제까지? 계속해서 의존해야 되고.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신과 관계하고 신과 만남을 위해서 뭐가 있어야 돼요? 제물. 점쟁이한테 그냥 가면 안 돼요. 복채 들고 가야 돼요. 반드시 복채 들고 가야 되니까 결국 석가모니 입장에서 그 당시 종교 제사장이라는 것은 무지한 민중을 등쳐먹는 인간들이에요. 등쳐먹는 인간들이 인도에서 브라만이라는 제사장계급을 형성했다고. 이런 고통을 없애려면 주변에 있는 이런 환경부터 완전히 없애면 되잖아요.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누구를 찾아가지 말고, 점쟁이 찾아가지 말고, 제사장 찾지 말고 내가 깨달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기원전 5세기경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생겨먹고 인간이 가족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고 짧은 팔십, 구십 인생 살면서 하는 생각이 전부다 고만고만해요. 특별한 거 없어요. 우리가 그 공부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 시대를 이게 특별했다, 저게 특별했다고 하지만 막상 우리가 그 시대에 태어나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 그쪽에서 전 구워먹을 때 우리는 피자 먹고 하는 모양새는 다르지만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니고 더러워서 섬겨요. 가뭄을 주관하고 비도 내리고, 아픈 몸을 건강하게 한다니까 그냥 믿는 거예요.

그리고 그 당시에 제사장들 욕하지만 오늘날 산부인과, 비뇨기과 찾아가는 그 역할을 옛날에는 제사장들이 했단 말이죠. 우리 보기에는 무지하다 하지만 효과를 보는데 어떻게 합니까? 수술할 때는 일자로 째지 말고 여러 갈래로 째서 대비마마의 종기를 끄집어내면 실제로 효과를 본다니까. [마의]에서 외과술로 해서.

부처는 그것마저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가 왕자를 포기한 것은 왕, 군주를 포기한 거예요. 요새말로 소고기 사먹겠지란 말이죠. 궁전, 왕, 그것 되면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그 다음이 궁금한 거예요. 생로병사, 그게 환상이라는 겁니다. 생로병사도 작은 변화에 지나지 않고, 큰 수레, 대승인데 큰 수레바퀴에 낀 이끼 같은 게 생로병사니까 생로병사 자체를 무시하면 그게 바로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이란 말이죠.

그런데 이게 아트만인데 우리는 고대 신학이라고 나온 탈레스나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여기에 불교 이야기가 다 나와요. 같은 시대에. 이걸 추계시대(?)라 하는데 이건 야스퍼스가 이야기한 거예요. *([역사의 기원과 시간에 대하여](1949)라는 일반세계사에서 역사의 중심에 놓이는 ‘중추적 시기’(BC800~200)에 현재 인간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모든 기본적 피조물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이상하게 전 세계가 모든 사상이 어떻게 유사한지. 유사할 수밖에 없지. 무역이 발달하니까 여기서 아는 깨달음을 저쪽에 전파하니까 유사할 수밖에 없지요. 유사하다는 특징이 전부다 자아중심이다.

그런데 불교의 문제점이 뭐냐? 그렇다면 그 행위가 이 질곡 같은 세상을 만들 이유가 없다니까. 공의 세계, 무의 세계라 하거든요. 공의 세계가 인간의 현상의 세계를 꼭 만들 이유가 없단 말이죠. 생로병사를 안 거치고 처음부터 온전한 세계를 이루면 될 문제인데 왜 생로병사를 경험하게 되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해답이 없어요. 고통스럽다. 벗어나자. 그건 되는데. 왜 처음부터 고통스럽지 않게 만들 수 있지 않았는가? 거기에 대한 답변이 없는 거예요.

부처는 자기는 깨달았다고 하는데 이걸 부정하는 게 깨달은 거예요. 깨달음을 부정하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 깨달음은 그거였어요. 내가 여기 있다. 나는 해탈했다고 할 때 해탈 됐음을 자기는 잊어버리는 겁니다. 해탈 해놓고 나도 없다. 그걸 무아론이라 하지요. 해탈 대상 자체를 없앰으로 말미암아 해탈이고 뭐고 자체가 날아가 버리는 그런 경지,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 이게 바로 나중에 대승불교에 나오는 선의 세계. 조계종의 모토가 되는 선의 세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게 인간들이 마귀한테 사주 받아서 만든 거예요.

이미 그런 현상이 기원전 400년경에 놀랍게도 에피쿠로스학파 그 뒤에 스토아학파도 마찬가지고요.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고 인도에서 아트만, 교재 5페이지에서는 파르메니데스, 이미 존재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모든 철학, 여기에 다 연결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서론 첫 번째 해봅시다. 중간에 나옵니다. [인간의 원형은 죽음이다.] 석가모니는 죽음 자체도 없애려고 했는데 헤겔은 신이 인간이 됐다 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인다고 했지요. 이걸 설명해보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2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그 뒤의 말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뒤에 말이 “성령을 받은 것은”이라 했지요. 그러면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는 사람은 모든 이에게 해당되지 않지요. 뒤에 뭡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보이지요. 그런데 2절은 모른다 치고 1절만 보세요. 눈앞에 보인다는 것은 같은 시간대에 같은 지역에 있을 때만 십자가가 본다는 말이 성립돼요. 피아노 여기 하지 마시고 이리로 옮기시기 바랍니다. 피아노 눈에 봤으니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장로님이 오셔서, “목사님, 십자가를 여기 하지 말고 옮기세요.” 하면, “십자가가 없는데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러니 갈라디아서 3장 1절 말씀이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사도는 자기 눈에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여러분은 안 보여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성령을 받은 것은,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한테는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게 아니고 뭐가 보인단 말입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말은 두 개를 합치면 결국 이 세상 변화와 모든 것이 무슨 중심이란 말입니까? 십자가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모르십니까? 이렇게 묻는 거예요. 시력이 얼마입니까? 이렇게 묻는 게 아니고.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뭘 알았다? 세상을 움직이는 중심에 대해서 이제는 감 잡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은 형틀이잖아요. 십자가가 무슨 용도입니까? 죽음이죠. 여기서 십자가는 특수한 죽음이에요. 누구의 죽음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의 죽음은 오직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보인다. 그러니까 이것을 인간의 아트만과 비교해봅시다. 인간의 자아라 하는 것은 신의 일부가 인간 속에 내부돼있고, 인간 속의 아트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에 껍데기란 육체가 있다고 본 거예요.

물론 그 뒤에 9페이지에 나오는 데모크리토스, 레우키포스 이 사람들은 모든 것은 원자로, 물질로 돼있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물질로 돼버리면 정신은 정신이 물질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물질이 정신을 만든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플라톤은 정신이 물질을 만든다고 이야기했고요.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신은 따로 있고 물질은 따로 만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결국은 일종의 해탈 과정,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구냐 하는 것.

여러분 공부 잘했는지 복습하겠습니다. 탈레스 이전에는 사람은 어디에 의존한다? 신에 의존한다. 신에게 빈손으로 가면 안 되고 뇌물 바친다. 뇌물은 누가 받습니까? 그 시대의 소위 고위 권력자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그걸 자기 생계수단으로 삼는 성직자에게 갔지요. 그게 꼴 보기 싫은 거예요. 언제까지 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일 겁니까. 차라리 내가 깨달으면 되잖아요.

복음 공부하는 목사들이야 신학교 나와서 그것으로 하지만 일반 성도들이 복음 알아버리면 “내가 목사야.” 이렇게 될 수 있다고. 이만희도 그렇고, 박대선도 그렇고. 자기도 공부할 만큼 했기 때문에 자기도 종교 하나 해도 된다 이 말이거든요. 그럼 다른 쪽에서 “너는 신학교 어디 나왔어?” 이러면, “예수님도 신학교 나왔나?” 이렇게 핑계대고. 사람들 사는 게 고만고만합니다. 이미 우리 선배들 널려있습니다. 무슨 짓했는지 공부하는 거예요.

아트만이라 하는 것은 내가 신이고 신이 곧 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비로소 알게 된 것은 세상 모든 것은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알 때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숨어있는 원수, 그게 사탄, 악마도 보이게 되지요. 이렇게 되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 싸움이라는 이것은 어떤 주제가 내가 깨달아서 어떻게 행복하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떤 영적 싸움판에 우리가 말려든 게 돼요. 그래서 창세가 2장, 3장 다시 보세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인간이 남의 싸움에 휘말려 든 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이런 기독교의 성격은, 특히 구약학자들이 이야기하는데, 묵시문학은 조르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해요. 선과 악의 치열한 싸움. 하여튼 그런 사람들 생각하는 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우상숭배자고 철학가에요. 자기 딴에 원어분석하고 백날 해봐도 철학자에요. 절대로 십자가 앞에서 성령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내가 하는 신학도, 목회도 죄라는 고백을 도대체 할 능력이 없어요. 왜? 십자가가 눈앞에 안 보이는데.

십자가 앞에서는 죽음이고 그 죽음은 특수한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 앞에서 예수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인간은 졸지에 죽은 것이고. 죽은 이유는 하나님이 정해놓은, 아까 복수는 인간들이 하지만 심판은 하나님만 하시죠. 하나님이 무엇에 근거해서 심판합니까? 법에 의해서 하잖아요. 인간에게 법을 준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심판 아래 두게 하기 위해서예요. 로마서 3장 19절, 그 뒤에 계속 나오잖아요. 이건 사도 바울이 그동안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겁니다. 이건 뭐냐 하면, 성령을 받았을 때 심판의 증거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요. 그러면 율법이 주어진 기능의 완료성은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을 보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갈라디어서 3장 2절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그러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더란 말을 성령으로 한 것을 마치 인간 밖의 영으로 생각한다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어디서 옵니까? 십자가로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헤겔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헤겔 신학의 문제가, 헤겔은 하나님이 인간이 됐다고 했잖아요. 성육신이 중심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의 중심은 성육신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이에요. 그런 점에서 헤겔은 실수하고 있는 겁니다. “신이 인간이 된 것은 참된 신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을 거쳐야 된다.”라고 헤겔이 이야기했잖아요.

그런데 그 요소는 싯다르타에는 없는 거죠. 싯다르타는 아트만에서 나온 거죠. 우파니샤드. 내가 누구냐? 어디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 제발 내 앞에서 신, 신, 하나님 이야기 그만 하자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깨달아 버리면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할 필요 없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데 왜 자꾸 신에게 기대는 스스로 신의 종이 되는 그런 짓을 해서 뇌물 바치고 맨날 절기 지키고 제사 드리는데 돈 내고 제사장들 먹이고 입히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말이죠. 이제는 교회도 안 가도 되잖아요. 왜? 내가 깨달으면.

성경에서는 그런 식으로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참 말씀이 재미있어요. 저희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지요. 싫어하는데 하나님이 있어요, 없어요? 내가 싫어하는데 계시기는 계시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내가 싫어하면 없어야 되는데 내가 싫어하는 그분이 막상 있다면, 나는 그분 앞에 나는 당신을 저주하고 싫어합니다가 계속 유발되는 존재로서 살잖아요. 그래서 싫어하면서도 안 싫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없다고 여기는 다른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 짓을 했다는 거예요. 할례 행하고 법을 지킴으로써 사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면서도 잘 믿는 척하는 시도를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로마서 7장에서 탐내지 말라고 말씀으로 먼저 있음으로써 비로소 우리 속에 죄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속에 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죄는 사실은 죄가 아니었지요. 이상하게 죽기는 죽는데 지은 죄는 없고 경찰서 가본 적도 없고 항상 양심껏 살았는데 이상하게 늙어 죽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법이 없이 이해하려고 하거든요. 원래 생로병사로 죽는 게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이야기한 그냥 사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법이 와버리니까 법이 나보다 먼저 있어서 그 법으로 하여금 심판 받는 대상으로 인간이 만들어졌어야 했기에 인간으로 태어나야 된다 이 말입니다. 선악과가 우리보다 먼저 의미를 입고 그 선악과 짝으로 정녕 죽으리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어야 될 인간으로 에덴동산에 같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세상 사람은 말합니다. 아담이 지은 죄는 내가 지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길에 가는 사람에게 아담이 선악과 따먹었다고 이야기하면, 나는 아담 만나본 적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담과 우리를 결속시키는 것은 법이 와야 아담의 죄가 우리 죄고 선악과 따먹은 죄가 우리 죄라는 것은 법이 와야 돼요. 그 법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통일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발각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야기할 때 하나님은 그냥 추상적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만드신 그 하나님이 아니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그 복음, 헤겔처럼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존재론적인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이 인간이 된 게 아니고 신이 십자가에 죽었어요. 그리고 죽으심을 우리 코앞에 들이대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나님 계시니까 믿어라. 이건 아니에요. 그리고 너는 하나님이 만들었거든. 그러니까 잘 섬겨야 돼. 그게 아니고 하나님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우리 죽음보다 예수님의 죽음이 밑거름이 되는 거예요.

이걸 칼 바르트가 감을 잡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뭐라 했습니까? 존재보다 예수님 중심이었다. 그런데 칼 바르트가 참 잘 나갔으면 좋겠는데 십자가 중심이 아니고 언약 중심이에요. 나중에 칼 바르트 나옵니다만. 언약은 새 언약이거든요. 언약은 십자가로 인하여 만들어진 거잖아요. 십자가에서 피가 나오고 살이 나왔다. 칼 바르트 생각은 그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피와 살이 나왔지요. 피와 살을 모아서 새 언약 구성하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본 겁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왜 그게 하나님 뜻이냐 하면, 새 언약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맞아요? 맞습니까?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에베소서 2장에 나오지요. 유대인도 헬라인도 하나님도 화목케 한다. 로마서 5장에 보면, 화목제물 주셨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예수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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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