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바다의 짐승)130221-14강a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70이레 논문(바다의 짐승)130221-14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바다의 짐승)130221-14강a -이 근호 목사
제 14강a
시작하겠습니다. 서론부분 해봅시다. 서론부분 210 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짐승이라는 것이 등장할 때는『진정한 짐승의 활동은 특정 신앙공동체와 연루되어 있는 성격으로서 따로 정립시켜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짐승을 따로 ‘요건 짐승이다. 요건 마귀다.’라고 따로 끄집어 낼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이 말이죠.
왜냐 하면 짐승은 묵시적 존재, 영적 존재기 때문에 역사화 할 때 ‘이건 역사고 이건 묵시다.’하고 그런 식으로 분리돼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역사 존재를 앞장세워서 뒤에서 밀어붙이기 때문에 ‘너는 짐승이 밀었지’ 라는 게 되는데 ‘비켜봐, 너 말고 뒤에 있는 사람 나와요.’ 이런 식으로 ‘이건 짐승, 이건 역사’ 분류 시킬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냈을 때 그때 무덤가에 있던 청년이었죠. 청년은 귀신 들린 자이지, 청년은 귀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청년은 자기 행동을 본인이 한다고 생각을 못하고 분명히 자기 말고 다른 얼마나 많은 귀신이 들었는지 횡설수설하고 무덤가에서 지내고 쇠고랑 찼는데 이걸 벗기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짐승은 있는데 역사 속에서 짐승이 있다 할 때는 짐승을 앞세운 역사적 존재가 있다. 귀신 들린 청년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요 이야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짐승이, 악마가 꼭 개인만 상대할 것 같으면 이건 우리가 알겠는데 이게 집단적으로 공동체 집단적으로 상대했을 경우에는 우리는 그걸 짐승이라고, 악마라고 보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저 사람 귀신들렸구나. 세상에, 허리가 꼬부라지다니.’ 이건 이해되는데.
어떤 국가 전체, 어떤 공동체 전체, 가족 전체가 귀신들렸을 때 설마 인간이 한결같이 똑같은 그런 짓을 하겠나, 이렇게 생각을 하더란 말이죠. 나찌 같은 경우에 자본주의 극치 아닙니까? 자본주의와 정치가 만나서 중산층의 승리거든요. 히틀러가 선거에서 압도적인 과반수를 넘어서 총통이 됩니다. 됐을 때 사람들은 그 히틀러에서 희망을 본 거예요.
후진국이었던 독일을 프랑스나 영국이나 네덜란드보다 선진국 될 수 있는 희망을 본 겁니다. 희망을 보고 전폭적으로 지지를 해줄 때 그 히틀러 그 사람이 한 짓이 결국 뭐였습니까? 지지를 해줬는데 자기를 지지한 그만큼 부담감이 있을 게 아닙니까? 부담감이 있는 걸 뭘 만드느냐 하면 공격의 타겟을 정해야 돼요. 공격 타겟을 정할 때 그때 지지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천주교였어요. 이런 사람들의 지지가 같이 한 덩어리 돼서 계속 지지를 유지하려면 그들의 지지가 이게 묵시적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역사적으로 합당합니다.’를 보여줄 수 있는 적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 죽였다는 유대인들입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적이었고, 또 지지한 사람들이 중산층 자본주의자들이었어요. 흔히 부르조아들 이예요. 중산층이라 하는 것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 말은 뭐냐 어떤 사람은 아니냐 하면 촌에 농사가 많아서 ‘나는 농사만 질래.’ 이런 사람은 아니다 이 말이죠. 무역이나 오파상이나 해서 빨리 자립하고 나도 대도시에 아파트 얻고 해서 옛날 귀족들처럼 살아보자 하는 이거하고, 느~긋하게 영주가 돼서 넓은 수만 평에 자기는 승마나 하고 사냥이나 하면서 농사를 임대해서 자기는 그것만 먹고 별장에서 노래나 부르고 즐기는 그런 류는 아니다 이 말이죠.
‘너희들만 귀족이냐, 우리고 할 수 있다.‘는 그런 사람들이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정신병자, 그리고 강한 자, 이들을 조지는 겁니다. 이걸 전부 종교적인 이유에 복합시켜 보면 이런 정신병자들이 귀신들린 자들이고 유대인들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핍박했던 자. 그걸 이용해서 정치적인, 그걸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통합을 할 때 너도 나도 거기에 같이 합심을 한 겁니다. 이게 바로 짐승이 사람을 다룰 때 한 사람에게 귀신 들리고 병들게 하는 그 정도가 아니고 집단적으로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대인은 예수님을 어떤 사람으로 몰아붙였습니까? 뭘 어긴 자라 했습니까? 율법을 어긴 자! 그리고 그들의 주장은 뭐냐 예수는 모세를 모독하고 모세가 준 율법을 훼방하기 때문에 그 당시 대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던 거예요. 왜냐 하면 모세는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하게 독대, 만난 사람이고 모세를 통하지 아니하면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모세를 비껴간다는 것은 이건 아무리 자기가 사랑을 베풀고 귀신 쫓아내도 이건 누가 뭐래고 구원적인 합법성을 얻을 수 없어요. 죽은 모세를 빙자해서 예수님을 공격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누구하고 이야기합니까? 엘리야 하고 또 누가 등장하죠? 모세가 등장하죠. 그걸 누가 봤습니까? 제자들이 보고 있잖아요.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등장했는데 제대로 모세도 모르는 인간들이 모세를 거론해서 예수님은 모세를 단순히 우리의 당국자를 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회당이나 이런 시나고개, 그 당시 국회의원이 있었어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비슷하게 있어요. 민주당이나 새누리 당 비슷하게 있는 것처럼. 율법을 중심으로 해야 이 나라가 희망이 있다. 율법 중심으로 해야 메시아가 ‘율법 지키느라 그동안 고생 많이 했어요? 내가 구원해 줄게.’ 이러고 오는 거예요.
성전도 별 볼일 없지, 뭘 지켜야 되느냐, 율법은 지켜야 되는데 그 율법은 누가 준 것이냐, 모세가 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진도 이렇게 나가다가 10년 지나도 못 나가지 싶은데 난 지금도 나가고 싶은데 도저히 나갈 수가 없어요. 요한복음 1장 17절에 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렇게 돼 있죠?
모세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어요. 유대인들한테는. 한국 사람은 김치 없이는 못산다 하는데 그 나라 사람은 모세 없이는 못사는 거예요. 그런데 모세가 준 것은 여기에 율법이라 했거든요. 이 모세가 준 율법의 취지가 뭐냐 하면 그 뒤에 나오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온 거라 해서 모세가 준 것은 ( ) ( )는 아니다? 은혜와 진리는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모세를 인정해요. 모세는 인정하지만 모세에게 빠진 게 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은혜와 진리는 모세는 그냥 내다보기만 했지 아니다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모세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은혜와 진리로서 구원을 받는데 그 은혜와 진리라는 것은 율법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다 이룬 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선물로 주고, 진리를 선물로 주게 되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거예요. 어디서부터? 율법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거예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응시거든요. 응시는 탁 째려보는 거예요. 율법을 줘놓고 째려보는 겁니다. 십계명에 ‘탐내지 말라’ 해놓고 뒤돌아가는 게 아니고 ‘탐내지 말라’ 해놓고 째려보는 거예요. 째려보게 되면 우리는 ‘이것도 혹시 탐내는 것이 아닌가?’ 라고 탐심을 위반하는 경우가 그 다음부터 안에서 작동을 시작해요. 발동을 거는 거예요. 지금 째려보고는 있지, 우리 속에는 차라리 ‘탐내지 말라’를 것을 몰랐을 경우에는 맘 놓고 살다가 ‘탐내지 말라’는 순간부터 ‘이게 혹시 저촉되는 것 아니야?‘ 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개시입니다. 구원의 터를 그렇게 만들어요.
제가 이걸 쓸 테니까 여러분이 차이점을 알아보세요. ➀나는 뭘 해도 합법적이다. ➁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합법적이다. 같은 말일까요? 다른 말일까요? 같은 늬앙스에요? 다른 늬앙스에요? 다르죠. ➀나는 뭘 해도 합법적이다. 이건 나는 예수 믿었으니까 나는 죄 없다. 뭐든지 해도 나는 옳다. 자기 정당성, 자기 의가 되잖아요. 그런데 ➁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합법적이다. 이건 나에 대한 모든 조치는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조치는 합법적이란 말은 나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뜻 이예요. 나는 뭘 해도 죄인이었으면 나를 죄인을 더욱 죄인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법적이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 거예요. 그래서 구원받는 거예요.
어제 수요일 날 그런 설교 했잖아요. 베드로가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면 됩니까? 했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에 뒤에 말을 첨부 시켰죠. 임금님이 돈 안 갚은 신하를 용서를 해주니까 그 신하가 신나서 자기 집에 가서 자기 종이 몇 푼 안 되는 진 빚 안 갚는다고 다그쳤거든요. 그 소리 듣고 임금님이 용서한 걸 취소시키고 가두고 분노한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첨부했느냐 하면 나는 주님의 용서를 받았으니까 구원받는다. 이것은 용서는 취소될 수밖에 없는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용서를 받아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용서란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거기다 집어넣은 겁니다. 용서를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하는 용서는 우리는 뭘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식으로 차별시켜서 나는 비록 죄인이지만 주님의 용서 때문에 나는 구원받는다. 이렇게 돼야 그 사람은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묻는 거예요. 내가! 내가, 내가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에 참여보다는 내가 따로 그보다는 내가 용서할 수 있고 용서 받는 사람 돼서 독자적으로 내가 구원받고자 하는 시도를 한 거예요. 이것은 용서뿐만 아니고 비단 믿음도 마찬가지고 예수 믿어서 구원 받겠다 하는 그것도 구원 못 받아요. 믿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모든 것이 죄가 드러나도록 초대받은 겁니다. 이것은 소망도 마찬가지고 내 소망, 내 꿈, 개꿈입니다. 사람이 모든 힘든 것은 희망을 갖기 때문에 그래요. 희망이라 하는 것은 달성되면 반칙이 되는 거예요. 희망은 절대로 달성되면 안 돼요. 희망이 달성되는 순간 그 사람은 자살합니다. 왜, 희망이 달성되면 희망이 없어지잖아요.
아내가 남편에게 잔소리 할 때 남편을 자꾸 아내 잔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아내가 시키는 것을 다해주는데 그건 아내를 더 화나게 만드는 거예요. 아내입장에서는 계속 남편을 잔소리 감으로 계속 남아있어야 되는데 남편이 잔소리 듣기 싫어서 아내가 두 번 다시 잔소리 못하도록 완벽을 기하니까 그 완벽이 더 미운 거예요. 아무나 그런 건 아니고, 약간 정신병자 끼가 있는 아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쪽에 계신 분들 말고.
옛날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거든요. 할 일이 없으니까 나를 보고 잔소리하고 날 나무라는 걸 취미로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거기에 대해서 완벽을 기했다고요. 신발 가지런히 하기, 이제 가지런히 하니까 할아버지가 화가 나는 거예요. ‘니는 왜 잔소리 할 여지를 빼앗아 가느냐.’ 잔소리 하는 사장들도 문제에요. 계속 찾는 거예요. 그걸 보고 직원이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잔소리 안 들을 것만 궁리하는 거예요. 회사 뭐 개판 돼 버리지요, 뭐.
이걸 라캉이란 사람은 뭐라 했느냐, 인간은 날 때부터 부모와 자식 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평생 가는 거예요. 좀 출세했다고 아버지 묘에 가서 소주하고 오징어 들고 가서 울면서 ‘나 성공했다.’고 하는 그게 평생 아버지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건 성령이 아니고서야 끊을 수가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거든요. 아버지가 모델이면서 아버지가 라이벌이 되는 거예요. 언젠가 아버지를 따라잡을 때 그 아들은 너무 슬픈 거예요. 비애를 느끼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 아버지가 불쌍해지면서 자기가 목표로 잡을 대상을 잃어버리면 사람은 자기 정신의 중심 잡을 사람이 사라져버리니까. 이게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귀신들렸다 하지만 이걸 집단적으로 할 때는 사람들은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안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이야기합니다. 이 논문에서 집단적인 귀신들림! 그걸 귀신들렸다 하지 않고 짐승의 나라로 표현하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죠. 여기서 제가 논문에서 짐승의 나라라 하는 것은 짐승이라고 따로 나오는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어떤 같은 성질의 같은 아담의 성질로 같이 움직여질 때 요게 악마 있는 겁니다. 그러면 짐승은 절대로 사람에게 들킵니까? 안 들킵니까? 절대로 안 들키죠. 그런데 안 들키는 짐승을 예수님이 오셔서 들키도록 유도를 하는데 이런 인간들도 미치지만 그 당시 바리새인, 사두새인도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만 그 배후에 있는 악마가 얼마나 미치겠습니까?
그래서 아기예수 태어날 때 사전에 찾아내서 아예 발을 못 붙이도록 해서 그렇게 치밀하게 헤롯을 조장해서 두 살 밑의 애들을 넉넉하게 죽인 겁니다. 세상에 천사로 해서 또 빼내는 것은 뭡니까? 우리가 이 마태복음 2장 이야기에서 우리가 유념할 것은 지금도 그 당시에 예수님을 다루듯이 지금도 하나님이 예수님처럼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항상 우리는 위기가 와요. 귀신은 택하지 않은 백성한테는 그냥 놔둬버립니다. 그런데 택한 백성은 꼭 그걸 청구를 해요. 자기 먹을 거 많으면서도 꼭 남의 밥상에 남의 것을 들고 가듯이 마귀는 맨날 예수님한테 와서 ‘저 베드로만 우리 편이 되게 해주시고 딴 거는 다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저 베드로 우리나라에 왔으면 좋겠다.’고 베드로를 청구하는 거예요. 맨날 결재 올려서 ‘베드로 주세요.’ 해서 맨날 청구하면 예수님께서 ‘저리 가’ 하면 악마가 ‘베드로만’ 하면 ‘저리 가’ 맨날 베드로만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베드로가 제자 중에 수제자거든요. 베드로 잡으면 다 잡는 거죠. 가룟 유다는 이미 잡아 놓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베드로야, 니는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묵시에서 노는 걸 니는 모르는 거예요. 역사적 인물은 지만 잘하면 구원되는 줄 알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아는 거예요. 지만 헌금하고 선교회비 내고 기도하고 예배 참석하고 봉사하고 착한 일하고 구제하고 바자회 열고 이렇게 지만 성실하면 구원되는 줄 아는 거예요.
사실은 구원은 누구와 누구의 협상과 회계고 타협이냐 하면 영적 묵시적 존재에서의 협상이거든요. 협상 하지도 않죠. 마귀하고는. 예수님하고 아버지 사이에 이미 결정 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거니까.
그래서 여기에 보면 제가 설명한 것은 210페이지 밑에 세 번째 줄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예요. 뭐냐 하면 『특이한 존재의 특이한 활동과의 마주치는 현장에서 비로소 그 정체를 내민다.』짧은 문장이지만 되게 어려워요. 짐승은 밖으로 끄집어내는 성질이 아니라 특이한 존재의 특이한 활동과의 마주치는 현장에서 비로소 그 정체를 드러낸다 했거든요. 그 특이성은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라 하잖아요. 하지만 이게 뭐가 빠졌어요. 예수님이 맞기는 맞는데 뭐를 첨가해야 돼요. 악마가 겁내는 예수님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마귀 들려서 살아가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공동체가 다 같이 예수 믿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마귀가 겁낼까요? 예수를 겁낼까요? 안 낼까요? 겁 안 냅니다. 왜, 성공했으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너희들은 지금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 그 다른 예수는 누가 만들어 낸 거예요? 그 고린도 교회에서 당회장 목사부터 온 교인이 조작해 낸 예수인 거예요. 그런데 조작해 낸 예수가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까마득히 몰랐는데 특이한 존재, 특이한 인물이 등장할 때 비로소 그 예수가 가짜라는 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 특이성은 사도바울의 개인이 아니고 사도바울 안에 누가 계십니까? 성령이 계신 거예요. 예수님 영이 계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대리전쟁 이예요. 이쪽에는 예수님, 저쪽에는 뱀, 뱀을 앞장세우는 한 무리와 이쪽의 소수의 무리와 전쟁이 붙는 거예요. 이게 창세가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두 개의 싸움, 그래서 이 논문에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주체라 하는 것은 그냥 주체가 아니고 싸우는 주체! 주체라 하는 것은 싸움하는 현장에서 비로소 나오는 게 주체예요. 우리라는 주체는 뭐냐, 나는 나다. 나는 나다. 이건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 부처가 이야기한 거예요. 모든 불교는 이겁니다. 나는 나다. 나는 나니까 그게 진리기 때문에 ‘나는 나인 것을 벗어나서 나는 저 사람 되고 싶어, 이러지 마라, 다시 너 자신에게 돌아오라. 네가 저 사람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이거는 환상이고 허구다.’ 이건 불교입니다.
산은 산이요. 산은 물이 아니다 이 말이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예요. 불교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산은 산이요. 이건 성철이 처음 이야기 한 게 아니고 불교 전에 경전에도 나와요. 물은 물이다. 여기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 산은 물이고 물은 산이다. 여기서 세 번째 바뀌는 것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로 바뀌어요. 산은 산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면서 다시 산으로 돌아올 때 그 가운데서 산은 정말 산이고 물은 물일뿐이듯이 나는 누구다? 나는 나다. 부처도 없고 내가 곧 부처고 신이라는 것은 원래도 없고 그런 거예요. 부처가 한 말 중에 옳은 말은 하나밖에 없어요. 신은 없다는 그 말.
그런데 부처가 한 말도 옳은 말도 아니에요. 신이 없다는 말은 누가 신이기 때문에 신이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말 이예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필요치 않다는 말이고 내가 신이 없다는 것은 아까 유튜브 동영상 했지만 구원의 세계라 하는 것은 그 전에 죽음의 세계를 전제로 할 때만 부활의 세계예요. 이 세상 말고 저 세상 있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은 죽은 세상이고 저 세상은 부활의 세계에요. 주님 가신 곳은 부활의 세계지 이 세상 말고 저 세상 간 게 아닙니다. 저 세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토속 모든 종교에 다 나와요. 주께서는 부활의 세계기 때문에 반드시 이쪽에서는 뭡니까? 자기 죽음이거든요. 그런데 부처는 본인이 신이기 때문에 죽어도 자기가 계속 살아있다는 거예요. 이게 다 깨져서. 이게 윤회설 아닙니까? 가루가 될지언정 나는 남아있다는 거예요.
신이 없다 하는 말은 지가 신이라는 말이고 내가 신이 없다는 말은 죽음의 세계에서는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잖아요. 죄의 세계에서 신이나 예수는 전부 다 원래 없는 건데, 내가 신이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만들어 낸 것이 예수요. 삼위일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신은 없는 신이예요. 왜, 있는 것은 나밖에 없는데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믿고 싶은 예수를 만들었으니까 나라는 거예요. 그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경우에도 안 죽어야 돼.‘ 가 전제로 돼 있는데.
예수님 십자가는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지심은 모든 사람이 다 죽은 자로 만들어 버려요.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산-죽음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산-죽음=괴물. 살아있으나 괴물 이예요. 이걸 잘 이해하려면 에어리언에 나오는 괴물 있잖아요. 분명히 살아있는데 괴물이죠. 외계인처럼. 주님 나라 보기에는 우리는 완전히 일그러진, 완전히 골통이 일그러진 정상이 아닌 좀비는 창백하지만 우리는 창백한 것이 아니고 울퉁불퉁, 멍게 같은 그런 존재예요. 그러면서 욕심은 왜 그리 많은지. 그걸 프랜시스 베이컨이 사람이 그림을 그렸어요.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라는 책에 보면 나오는데 교황을 그려놓을 때 완전히 괴물로 그려놨어요. 이렇게 보면 돼요. 인간을 볼 때 피부 껍데기 다 벗기고 보는 인간. 흉측하죠. 피부가 덮여 있으니까 화장발이 있어서 화운데이션 바르고 비비크림 발라서 반짝반짝 윤기가 나지만 만약에 그 피부 삼겹살을 벗겨 버리면 어떻겠어요? 이건 어떤 일그러진 기관들의 엉켜진 모습이 나오죠. 그 모습이 바로 분명히 죽었는데, 마치 시계 껍데기 벗겨보면 그래도 시계가 찰칵, 찰칵 돌아가잖아요. 분명히 죽었는데 돌아가는 거예요. 뭐하겠습니까? 죄를 생산하는 거예요. ‘이래서 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는 그 표를 다 내는 거예요.
부활의 세계 앞에서 죽음의 세계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죄를 생산하는, 죄를 지는 현장으로서 주께서는 계속 살게 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까 죄 짓는 것을 누가 응시한다? 쳐다보고 누가 응시한다는 거예요? 법이 응시하고 우리는 법이 응시하는 순간 ‘탐내지 말라’가 더 발동을 가하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인간이 껍데기도 없는 괴물인 것을 보시고 “내 피와 내 살을 먹어라.‘고 한 거예요. 네 생명은 내 생명으로 교체돼야 네가 영생을 얻는다.
원래 창세기 3장 24절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이 차단돼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생명나무 얻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은 생명을 어떻게 갖느냐, 주께서 그 쓰레기를, 그 폐기물을 이용해서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껍데기 위의 생명으로 새롭게 표현한 거예요. 이걸 미술로 하면 오브제, 오브제라 하는 것은 그림 그리는 도화지가 아니고 새로운 물질을 통해서 표현하는 기법 이예요. 자갈이라든지, 나무에 그림을 그린다든지.
우리 죄인에다 주님의 생명을 그려 넣는 거예요. 그렇게 그리니까 예수님의 생명은 어떤 생명이냐 하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일그러진 형체의 예수님, 왜냐 하면 자기가 구원할 인간 자체가 일그러진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거기다 생명이 임해버리면 같이 더욱 더, 더욱 더 일그러진 모습으로 십자가 고난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괜찮다고 보는 사람의 메시아는 어떤가, 항상 인물 좋고 광채 나고 번쩍번쩍하고 머리에 기름 발라서 멋지고 신사답고 돈 많고 이런 메시아를 원하는 겁니다. 그 지 분수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내가 얼마나 일그러지고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도 근사하지만 예수님은 나보다 더 근사하게 구름타고 멋지게 올걸. 아마 지팡이 들고 이렇게 오실걸.’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귀는 거기 맞춰서 멋있는 예수를 보여주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저는 이걸 걸레라 하겠어요. 걸레 뜻은 온갖 게 다 긁고 지나가요. 저나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는데 온갖 게 다 긁고 지나가요. 온갖 게 다 와서 심정 상하게 만들고 시비 걸게 만들고 차도 새로 샀으면 긁어놓는 것처럼, 내 마음에다 온갖 상처내고 가고 바리스타 됐으면 누가 와서 시비 걸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렇게 하지만 우리 마음 판에는 온갖 타인들의 낙서가 수북합니다. 나이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상처가 더 있어요. 하나의 구리판으로 보시면 됩니다. ‘나 여기에 왔노라’ 설악산 바위에 새기듯이. 아파트 들어갔더니 층간 소음이 난다 해서 불 질러서 많은 상처가 되고, 젊었을 때 누구한테 사기 당해서 전세금 250만원 홀라당 날린 적도 있고, 우리 가슴에는 남들이 쏟아놓은 러시아에 바깥에서 떨어진 유성우처럼 떨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했잖아요. 그처럼 외부에서 오는 죄악 된 유성우가 마구 긁는 거예요. 그래서 젊은 애들은 술로 노래방으로 이걸 가리는 거예요. 너무 아프니까. 아파도 너~무 아파, 사는 게. 담배로 마약으로 나이트클럽으로. 아프니까. 이젠 결혼하게 되면 자식 봐서, 마누라 봐서 참고 참다보면 너무 무디어져서 어지간히 아파도 그만 ‘내가 입 다물면 되지.’ 하면서 참고. 그걸 참지 못하는 사람은 결혼하고 난 뒤에 우울증 걸리고 산후 우울증 걸려서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나오고.
이게 다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묵시적 존재인 짐승이 우리에게 계속 ‘희망을 가져라. 꿈을 가져라. 꿈이 있어야 니가 살아.’ 이러고, 앞의 예수님은 우리를 응시하면서 ‘니 꼬라지 내가 다 안다.’ 너에 대한 나의 조치는 유일하게 합법적이죠.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조치가 합법적이기 보다 뭐가 더 기분좋아하느냐 하면 내가 뭘 해도 다 정당한 걸로, 복 받을만한 짓이 되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죠. 빨리 바꾸세요. ➀번에서 ➁번으로 빨리 바꿔야 됩니다. 우리는 뭘 해도 그런 조치를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죠.
동영상 첫 번째 제목이 뭐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거든요. 그래서 제목이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지 말고 그 맞은편에 예수님의 희생이 있더라. 주님의 희생을 모르니까 맨날 자기 생각만 해서 하늘도 무심하지. 하늘도 무심하지,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희생이 통과해서 나온 주님의 피의 덕분 이예요. 피가 떨어진 거예요. 피의 유성우가 떨어진 거예요. 죄 지면 긁고 지나가면 피가 오고 또 긁고 지나가면 피가 오고, 주님의 희생의 작품으로 살아가는데 우리는 뭐가 그렇게 불평불만인지 하늘도 무심하지, 자기가 비련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드라마 보세요. 전부 다 그거 아닙니까? ‘하늘도 무심하지, 그래 내가 너를 복수 하겠다.’ 복수하는 막장이 왜 그렇게 히트 치느냐 우리한테는 항상 그런 상처가 우리가 죽이고 싶고 손 볼 사람이 각자 한 두 명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 한 다스는 될 거예요.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은 수백 명 될 거예요.
특히 여기 특이한 존재는 예수님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바리새인하고 싸움할 때 펜싱 했습니까? 씨름했습니까? 태권도, 권투했습니까? 뭐하고 싸웠습니까? 제가 여기 싸우는 주체라 했는데. 주체하는 것은 싸움을 통해서 거기서 밝혀지는 거예요. 종교적인 문제죠. 로마가 다스리고 있으니까. 여러분, 헤롯 왕국은 사실 로마의 속국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다뤘다는 것도 판정을 누가 내린다는 말입니까? 헤롯을 중간 매개체로 해놓고 판정은 빌라도가 판정을 내리죠. 빌라도는 로마에 속한 사람이라니까요. 그래서 다니엘에서 마지막 네 번째 짐승은 로마예요. 그게 한 이레 아닙니까? 인자가 결국은 마지막 짐승한테 그렇게 당하도록 돼 있어요. 그렇게 해서 그때부터 로마 나라는 역사적 나라로서의 지역이 확산돼서 묵시적 존재의 바벨론 나라로 전환이 되는 겁니다. 바벨론 되고 거기 맞은편에는 모든 세상이 바벨론 같으면 바벨론 아닌 나라가 없지 않느냐, 영원한 성도의 나라가 있어요. 다니엘 8장, 여원한 성도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필리핀하고 한국하고 누가 잘사느냐 이 문제가 아니고 로마라는 이미 바벨론 나라의 배후는 누구며 거기에 비해서 이쪽 성도의 나라의 배후는 누구냐,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저쪽 나라를 하나로 가두기 위해서 인을 치죠. 이마, 손에 짐승의 인을 박아버리고, 이쪽에는 예수님의 인, 하나님의 인을 박아버려요. 어떤 사람이 저한테 질문을 하잖아요. 짐승의 인이 뭡니까? 라고 묻는데 그 답변은 이렇게 하면 간단합니다. 짐승의 인이 뭡니까? 라고 하지 말고 성도가 받은 그리스도인이 뭡니까? 그것만 알면 되죠. 성도가 예수님한테 받은 인이 뭐냐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에 보면 성령 이예요. 성령으로 뭐하시니? 인치시니. 성령으로 인 쳤잖아요.
그러면 저쪽의 인은 뭡니까? 성령 빼놓고 나머지 취하는 모든 역사적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조치들, 왜냐, 항상 역사적 존재에서 악령이라 하는 것은 악령이 한다가 아니고 역사적인 산물과 이러한 방법을 앞장세운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죠. 그걸 잊지 마세요. 짐승이 일 한다 할 때는 짐승이 시커먼 뿔 달려서 짐승이다 이렇게 오는 게 아니고 그건 짐승이 만들어 낸 가짜 짐승이고. 저는 어릴 때 화장실이 바깥에 있어서 ‘귀신 나온다.’ 하잖아요. 그게 바로 마귀가 만든 귀신들 이예요. 진짜 귀신은 숨어 있고 진짜 마귀는 숨어있다 말이죠. 인간들이 겁낼 만한 귀신을 해놓고 내가 빨리 귀신을 피하는 방법은 뭡니까? 빨리 마당을 가로질러서 어디에 합세하면 귀신은 안 따라오죠? 안방에 들어가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가면 귀신은 안 따라오죠. 예수님 입장에서 보세요. 꼭 할아버지, 할머니가 귀신 이예요. 그 동네가 귀신이라. 가짜 귀신 만들어 놓고 진짜 귀신은 숨겨 버리고. 목사님 귀신 쫓아내세요. 귀신 쫓아낸다고 안수하는 그 목사가 진짜 귀신 이예요. 진짜 마귀 들린 자거든요.
그래서 계속해서 ‘당신은 나한테 돈 내고 안수 받지 않으면 계속 병듭니다.‘라고 함으로서 기어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못 보게 만들어요. 어떤 경우라도 기어이 예수님만 떼놓으면 성공이라. 마귀는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요.
다시 한 번 정리할게요. 어떤 현상이 이건 귀신 들린 거고, 어떤 현상이 귀신 안 들린 게 아니고 모든 현상은 귀신이 자기를 숨기기 위한 거룩을 빙자하든 흉측한 걸 빙자하든 그건 전부 다 역사라 하는 것은 묵시를 숨기기 위한 악마의 수작에 불과한 겁니다.
성령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십자가를 나타내서 우리 죄를 책망하는 거예요. ‘주여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저는 불법이고 그런 불법을 조치한 주님만이 합법입니다. 모든 자랑을 예수님만 자랑해요. 모든 공로를 이미 이루었던 예수님 희생만 자랑할 때 그게 성령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주시라 할 수 없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는 거예요. 모든 것은 예수님을 경유해서 말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집사님, 오늘 흰머리 좀 있는 것 같은데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귀 들린 이야기고, ‘주께서 조치를 그렇게 하셨네요.’ 이렇게 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말할 때마다 붙입니까? 또 마귀도 붙여서 하도록, 유전학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전제가 항상 ‘주께서 그렇게 하셨네요.’ 다 같이 찬양하고 다 같이 감사합시다. 결혼식에 가서 역시 주님을 집어넣어서 ‘주께서 둘이 고난 받도록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결혼을 감사하는지 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210페이지 제일 밑에 『짐승의 의미는 특정 정치적 공동체나 종교적의 내부 활동을 관분석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서 파생되는 활동으로 인하여 비로소 판정 기준이 세워진다.』이제 아시겠죠. 예수님이 등장하지 않으면 짐승은 계속 자기 정체를 안 드러내요. 그런데 예수님 입에서 경유해서 뭐가 나왔으면 짐승도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그걸 부정하는 식으로 뭔가 일을 꾸밀 게 아닙니까? 그 일이 그동안 숨겨져 있던 악마의 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랑은 복음전파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최고의 사랑 이예요.
촌에 명절 돼서 백화양조 정종 들고 가는 게 사랑이 아니고, 그냥 복음 들고 가는 거예요. 복음 들고 가서 ‘우리는 뭘 해도 죕니다.’ 이야기할 때 그동안 그렇게 예쁘게 보던 엄마의 낯빛이 변하면서 속에 귀신 들린 표를 내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자비롭고 하늘이 내린 천심이라고 소문난 엄마가 복음만 전해버리면 천심이 아니고 마귀심이 돼서 ‘그 소리 하지 마. 그런 소리 하려면 명절에 내려오지도 마.’ 갑자기 그걸 발작을 일으킨다 하죠. 윤 집사님은 발작을 유도하는 느낌이 들어요. 자연스럽게 해야지 유도하면 안 돼요. 정말 복음 전하면 그것도 사랑으로 전했는데 저쪽은 발작을 일으킵니다.
또 한 가지 예는 개혁주의 성화론 자들, ‘너희들은 막 살면 되겠어? 이웃을 사랑해야지.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도 그게 잘못인가? 서로 사랑하고 온유 하라 했느니 해야지.’ 한다고요. 그래서 그 개혁주의 성화론 자한테 ‘십자가는 이렇습니다.’ 하면 그쪽에서 화내고, 방금 ‘사랑해야지’ 해놓고 화내버리죠. 그러니까 자기 정체가 얼마나 말씀을 빙자해서 어떻게든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이렇게 호작질 하려고 이 상처만 남아 있는 상처뿐인 이 구리판 같은 우리 마음은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이게 안 돼요. 찬송가에 그게 있죠. ‘십자가의 피만 바라보며‘ 하는 노래가 있거든요. 예수님의 피만이 용서가 되지, 다른 대일밴드에다 후시딘 연고 발라서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교회 올 때 위로받으려고 오는데 절대로 그걸 위로하면 그 사람을 망치는 거예요. 외로워서 오는 사람도 많고 말 벗 찾아서 오는 사람도 많고 자기 자랑 들어달라고 오는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들 우리교회 다 나갔습니다. 앞으로서 나갈 사람 있겠지만. ‘뭐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느니“ 사랑은 ’당신 죄인이야.‘ 하는 것보다 세상에 더 큰 사랑은 없어요.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 소리 하니까 눈물 난다. 정말. 그렇게 사랑해줬건만 사랑이 없다 하니, 뭐 어떤 사랑? 어떤 사랑, 뽀뽀해줄까. 그럼. 뭐 어떤 사랑.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 시킬 때 그게 바로 사랑의 극치라고 보는 겁니다. ‘니 대신 내가 죽었다고 피 흘리는 거’ 이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어요. 그런데 그 사랑 앞에서 사랑 받을 자만 사랑을 알고, 아까 동영상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공로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인정하는 사람은 세리와 창기 이런 사람밖에 없었잖아요. 나머지 모든 사람은 예수가 필요 없어. 왜 다 잘났으니까. 밑지지 않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고 했잖아요. 예수님 말을 잘 들어보세요. 난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에요. 베드로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몇 번 용서해야 됩니까?‘ 아니 용서를 많이 왜 하는데? ’그래야 의인되거든‘ 그러니까 그게 안 되는 거예요.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우리는 용서를 못 합니다. 왜냐 하면 마음속에 딱 용서했다는 걸 기억해서 ‘이렇게 용서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오면 앞으로 내가 3배, 4배, 7배나 갚아 주리라.’ 라멕이 튀어나와요.
211페이지 넘어갑시다. 도저히 이러면 안 되고 띕시다. 『구약 성경 다니엘에서의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란, 국가 자체가 형성된 채 육지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태고 적‘의 힘들이 밀려오는 것을 의미한다.』이렇게 돼 있어요. 왜냐 하면 바다라는 그것이 H₂O가 모인 그런 집합인 바다를 의미하는 게 아니거든요. 왜냐 하면 초반에 이렇게 기초 닦는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어렵더라도 여러분 참아 주세요. 방금 이야기했듯이 역사 말고 모든 묵시에 관한 것은, 역사는 원인과 결과로 돼 있어요.
묵시에서는 반드시 누가 등장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등장하셔야 묵시가 그때 얼굴을 빼꼼이 내놔요. 예수님이 등장 안하면 묵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냥 역사에서 역사로 처리해요. 과거에 이렇게 했으니까 과거의 관행대로 하는 게 옳습니다. 이게 모든 우리나라 행정, 우리나라 국가, 전 세계 모든 인간의 역사가 다 그런 거예요. 회사에도 다 매뉴얼이 다 있어요. 선배들이 한 그걸 보고 다 하는 거예요. 자기가 창작하면 위험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여기 바다란 말을 할 때 이것은 그냥 바다라 하지 말고 왜냐 하면 그냥 바다라고 해봐야 땅이라는 범주 안에서의 바다와 땅이 되잖아요. 이게 무슨 의미 있어요? 바다에서는 어디서나 괴물이 올라옵니까? 바다에서 오징어 올라오고 고래 올라오면 그게 짐승 이예요? 땅 개념이 이미 뭐가 됐다? 묵시화 됐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가면 예수님이 없는 땅이 아니고 예수님이 있는 땅이 돼 버리면 이 땅은 묵시적 의미를 품게 돼요. 묵시적 개념을 품었을 때 바다의 개념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그러면 묵시적 개념을 받았을 때 바다의 의미는 뭐냐, 예수님께서 새삼스럽게 불러내기 위해서 어떤 예수님의 하신 조치에 의해서 비로소 그걸 반대하기 위해서 그동안 지배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은 뭐냐 하면 바로 이 땅에 예수님과 함께 계신 교회가 이 땅이 되는 거예요. 교회가 땅이 되면서 교회, 그걸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이스라엘. 구약에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그건 역사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은 역사와 함께 무너질 것이고, 신약의 교회,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함께 7별을 잡고 계신 분이 이스라엘 되거든요. 그럼 이스라엘 되면 이스라엘 있는 곳이 땅 이예요. 이 땅이 이스라엘이 등장하니까 짐승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구약 때부터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이방나라가 공격하게 했죠. 구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어떤 점유된 현재 팔레스타인 땅, 블레셋, 가나안 땅이죠. 점유한 실체가 있는 그런 국가이라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적들은 뭐냐 실제로 그 주변에 땅을 점유한 암몬, 모압, 블레셋, 앗수르 바벨론, 로마 그런 나라들이죠. 그때는 뭐냐, 그냥 육지에서 육지로 싸움을 벌이는 거예요. 그리고 언약궤가 앞장서니까 저쪽은 물러가고 그런데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감당 못할 입장 같으면 언약궤 혼자 나가서 블레셋을 다 쳐부수고 다시 언약궤는 마치 부메랑처럼 다시 어디로 오는가, 다윗의 손에 들어오잖아요. 오벧에돔에 돌아왔다고 다윗이 기뻐서 춤을 추니까 미갈이 체통도 없이 춘다 하니까 미갈은 임신도 못하고, 이게 뭐냐 하면 전부 다 언약이라는 것이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배후에는 뭐가 있다? 묵시적인 어떤 주의 이름이 여기에 게재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의 땅이라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한 땅이니까 이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이 되는 거예요. 여기 약속의 땅에 대해서 짐승은 어딜 이 세상을 주님이 차지하도록 둘 줄 아나? 하고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바다와 땅이라는 것은 물결 넘치고 갈매기 날고 있는 그게 바다가 아니고 교회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서는 복음 전파하는 그 현장에 대해서 그걸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이 바다에서 온 짐승이 장악하고 있는 세력들입니다. 힘이죠. 그래서 그들은 뭘 하느냐, 매매를 못하게 하고 666 숫자, 이쪽에서는 144.000, 이쪽에서 144.000 카드 내놓으니까 저쪽에서는 666카드 내놓고, 이게 뭐냐 하면 구약에 나오는 모든 숫자들 가지고 묵시적으로 재편성한, 역사적 숫자나 역사적 지명을 사용하면서 사실은 하나의 배후의 실제적으로 묵시적인 힘들과 힘들의 충돌, 그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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