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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독생자의 영광 130308강의데살로니가후서

독생자의 영광 130308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김창길(IP:210.♡.60.74)

13-03-25 19:31

서울 의존교회130308a (독생자의 영광)―이 근호 목사

살후 1: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데살로니가후서를 보고 있는데 성경의 마지막 장을 보게 되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루살렘성이 나오는데 그 예루살렘성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신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이 하나님의 신부이고 그게 얼마나 영광스럽던지 예루살렘 성을 이루는 것이 그냥 일반 벽돌이나 시멘트나 흙이 아니고 보석돌로 만들어진 돌 성이다. 보석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예루살렘 성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만큼 귀하고 귀하게 생각했다 말이죠.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광스럽게 만들어내기 위해서 작정하신 거예요. 보석 같은 존재로서 만들어 내시는데 이 보석 같은 존재로서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그 영광이 우리에게서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선을 행한다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보석 같은 존재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장차 예루살렘성에 그렇게 보석이 영광스럽게 빛나려면 그 영광이 외부에서 주어져야 돼요. 그러면 외부에서 주어질 때 그 외부에서 주어지는 영광을 1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게 되면 그 예수님의 영광을 받는 예수님의 사람들도 예수님만큼 이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한 말을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거죠.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어서 우리가 그 영광을 받아서 우리가 천사같이 영광스럽게 된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께 질문 합니다. 영광을 안 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는데 영광을 안주면 우리는 그동안 헛물 켠 것밖에 더 되겠어요? 준다면 왜 안 주십니까?
따지면 주십니까? 맡겨놨습니까?

제가 왜 이런 질문을 했느냐 하면 영광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영광을 달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달라고 할 수 없느냐 하면 평소에는 우리의 영광, 우리 자신의 영광에 도취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달라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평소의 주님의 영광이 그리워서 안달난적도 없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그 시간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시간을 다 때우고 허비했던 자들이 바로 우리자신들입니다.

우리가 자신들의 영광을 추구 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세상영광이라고 합니다. 세상 영광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사탄이 와서 은근히 제안을 했던 그 영광입니다. ‘줄까? 나한테 절하면 이것 다 줄게. 세상 영광 다줄게!’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영광 싫다고 했거든요. 예수님이 세상 영광을 싫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기대한 영광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주는 영광입니다.

1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주예수가 영광을 받는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고 다른 인간들은 다른 영광이라는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세상영광 외에 다른 영광을 상정한다든지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마치 등산하는 것 같아서 등산할 때 산이 있으면 산을 쳐다보고 하는 말이 ‘산 높다! 그만 내려가자!’ 이렇게 등산하는 사람 없지요. 산을 쳐다볼 때 노림수가 있는데 그것은 내가 산을 꼭대기에 올라가게 되면 밑바닥에 있던 그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위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 말은 뭔가 하면 사람은 자기가 기대한 영광이 주어지지 아니하면 꿈쩍도 안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영광이라 하는 것은 지상에서 자기에게 결핍을 느낄 때 나오는 영광입니다. 결핍이라 하는 것은 모자람, 아침에 눈을 떴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오늘도 모자라는 것을 채워야지! 모자란 것을 채운다는 것은 예를 들어 지금 이만큼이 있는데 점선만큼 모자란다는 뜻이거든요. 현재 모자란다는 말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실선은 내가 채웠는데 점선만큼은 더 채워야 한다는 이 대목이 모자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좋다? 나쁘다? 이것도 좋은데 좋은데다가 더 플러스해서 모자람을 채워버리면 더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기도를 시작합니다. 무엇을 기도 합니까? 있는 것 지켜 주시고 모자란 것 채워주세요. 이렇게 기도 하겠지요. 그러면 여기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 것입니까? 누구의 것입니까? 바로 나의 것이죠. 나라 하는 것, 육신, 내 육신을 위하여 현재 이것은 내 것이고 모자란다는 것은 육신을 위하여 이만큼 더 있어야 됩니다. 하고 아침마다 하게 된다 말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이 가지고 있다면 그 육신이 기대하는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영광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아는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잘 사는 재벌이라고 할 때 아이고 불쌍한 사람 왔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없다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내가 모자란 것을 더 많이 가지고 계신 분, 반갑습니다. 이렇게 되지요.

우리가 누구를 그리워하고 누구를 모델로 삼는다는 것은 이미 나한테는 없지만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었으면 하는 그런 기대감이 결국은 나의 육신으로부터 출발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은 결국은 남 좋으라고 하는 영광이 아니고 나 좋으라고 하는 내가 원하는 영광, 이것을 나의 영광, 자기 영광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시켜 봅니다. 교회에 적용시켜 보면 교인들은 세상 살기 힘들어요. 비참할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니까 언제가 예루살렘 성, 보석같이 영광스럽게 보상받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교회에 나오게 되지요. 그런 위로를 받기 위하여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받게 되는 영광은 하늘의 하나님이 주신 영광입니까? 자기 영광입니까? 자기 영광입니다.

교회와도 소용없어요. 교회 나오면서 한풀이 한 겁니다. 하나님, 남들은 다 가졌는데 왜 나한테는 없습니까? 아이고 더러워서 못살겠다! 빨리 들어가서 하늘나라에서 누구 기죽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목사님 설교를 듣는다 말입니다. 남한테 기죽었기 때문에 손상되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자존심, 자기 영광이 손상되는 거예요. 그렇게 가지고 있는 영광 가지고 모자란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영광을 더 주셔서 하늘나라를 주시던지 힘을 더 주셔서 현재 있는 이 영광을 완벽하게 채워주시라는 식으로 기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엉터리기도 이고 마귀의 기도란 말입니다.

학생들이 수학 시험을 쳤는데 60점 나왔어요. 그런데 반 평균이 80점이라면 평균 따라 가려면 20점에 모자라잖아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어려운 말이 있는데 ‘그저, 중간쯤만 하라!’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간쯤만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남들이 가만히 있는데 중간쯤 하는 것은 쉬워요. 남들이 1등 하려고 애쓰는 그런 집단이 중간이에요. 그러니까 남들 노력한 만큼 안 하면 중간도 못갑니다. 전부 다 달리고 있는데 난 걸어갈래, 중간쯤만 할래! 걸어가면 중간만 하는 게 아닙니다. 100M 달리기 하면 남자 같으면 중간이 17초에서 18초에요. 그러면 100M 달리기할 때 중간쯤 하려면 17초를 하려면 가만히 걸어가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후후 거친 숨을 내쉬면서 달려야 중간쯤이라도 돼요. 중간쯤만 하지, 그렇게 달리니까 15초 나오잖아! 그것은 세계 신기록세우는 거고 100M 우승 선수들이나 하는 것이고 일반 사람들은 걸어가면 40초 걸립니다. 이것은 중간쯤이 아니에요.

중간쯤만 하겠다는 것은 다른 말로 번역하면 나는 내 영광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도용하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여! 왜? 내 부족한 것을 채워주소서! 하나님이, 네가 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네가 뭔데? 내가 뭔데 너의 영광을 채워주는데? 그런 것은 누구한테 부탁하면 되느냐 하면 그 부탁하는 사람을 잘못 골랐었어요. 하나님께 부탁하지 말고 그런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중개소 업소를 찾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마귀에요 귀신들이 그것을 다 해 줍니다. 그 귀신들의 졸개들이 몰사들이에요. 목사들이 교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눈치 챘거든요. 저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싶은 것을 나는 안 되니까 하나님이 나서서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가 가지고 싶은 저것을 하나님이 마저 채워주시옵소서 할 때 마귀가 채워줘요. 마귀가 혼자서 안 되면 일곱 귀신 데려와서 해 준다니까요. 일곱 귀신 안 되면 12귀신이 와서 채우든지 합니다.

제가 몇 달 전부터 데살로니가를 하면서 똑같이 되풀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라고 하는 것이 밥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성도라고 하는 것이 귀하다 이 말입니다. 성도라고 밥 안 먹고 삽니까? 돈 안 좋아 합니까? 다 좋아 하거든요. 그런데 성도가 이렇게 등장하느냐 말입니다. 성도 때문에 성도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누가 있느냐 하면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계시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증거니까 성도는 세상영광보다도 다른 영광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본인이 똑똑해서가 아니고 예수님이 성도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세상 영광 말고 다른 영광이라 이 말이에요.

어떤 분이 교회 와서 목사님한테 설교를 들으면서 느낀 것이 뭐냐 하면 아하 다른 인생들도 있구나! 현재 내 인생길 이것의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인생길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이 아니고 다른 인생길, 이 길로 가는 것이 그것이 전부 인줄 알았는데 그것 말고 다른 길이 있는 거예요. 성경 마태복음에 보면 나오죠. 넓은 길이라는 게 사람에게는 없어요. 사람들에게는 길만 있어요. 왜냐 하면 이 세상은 길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을 길로 본다면 여기 인간이 있고 저기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에게 가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본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게 맞다? 틀렸다? 이게 틀렸다는 겁니다. 길이 하나밖에 없으면 쭉 가다보면 하나님을 만나는데, 제가 지난주일 낮에 설교 했잖아요.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고 싶은데 죽어도 안 죽으니까 문제죠. 이것은 결정적 비극이에요. 나를 눕혀놓고 죽어라 밟아도 안 죽는데 어떻게 합니까?

만들어 놓은 분이 만들어 놓은 인간을 사라지도록 포기 하지 않습니다. 누가 만들었는데 누가 포기를 해요? 어림도 없는 소리 에요. ‘네가 만들었나? 네가 만들었으면 자살해라 사라지게 해 줄게.’ 하나님이 만들었거든요. 악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만들 어 놓고 만들어진 당사자가 아무리 자기를 죽이고 자살을 하고 약을 먹고 번개탄 피워놓고 수면제 이만큼 먹고 그런 장치를 놓고 그 장치 그대로 65층에서 뛰어내리기 해도 그래도 안 죽어요. 죽고 나면 살려내요. 무덤에서 살려내잖아요. 안 죽는 것이 인간의 결정적인 슬픔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슬픔을 아이고 중간에 사라졌으면 이 보석 같은 영광 못 볼뻔했다 라고 제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에요. 인간의 길은 바벨론 탑에서 알다시피 이 길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기 영광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영광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에 나서요. 이건희 손자가 다니는 학교가 무슨 학교입니까? 영훈 학교, 영훈학교에 애들을 왜 집어넣느냐 하면 이미 영훈학교 들어가는 게 벌써 영광이다. 유치원부터 사립가고 영훈학교 가고 소위 엘리트코스를 밟아보면 이 과정들이 영광 더하기 영광, 영광이 계속 중첩되지요. 그러면 이 길을 가게 되면 하늘나라를 갈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들의 생각이고 인간들은 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훈 중학교 못간 사람은 못 갔지만 언제가는 따라 붙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 거예요. 스탠드사관학교는 옥스퍼드 미국에 MIT 가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애들은 따라 붙이려고 하는 거예요. 왜? 영광된 코스는 이미 누구나 규정한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길 가서 재벌 되고 박사, 석사 되는 길은 고정된 길이에요. 바벨탑입니다.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길이 몇 개 있다고 했습니까? 두 개가 있고 그 두 개의 길은 합체되거나 교체되는 것이 아니고 따로 따로 그 길이 나와 있다는 거예요. 두 개가 되니까 그 둘을 구분 하는 방법이 하나는 좁은 길, 찾는 사람이 적은 좁은 길이고 한 쪽은 찾아도 너무 많이 찾는 길, 무슨 길이죠? 널찍한 길, 외롭지 않은 길, 많은 사람이 선택하라면 선택하는 그 길, 영훈 중학교, 엘리트고, 옥스퍼드대학 그 길입니다. 누구나 좋다고 하는 그 길, 이 길에 들어서면 고향 동네 어귀에 플래카드 붙이는 그 길,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했던 그 길입니다.

다른 길로 가는 천국 길을 원하는데 다른 길은 없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길이 세 번째 네 번째 길이 있으면 다른 길을 모색해 줄 텐데 길이 달랑 두 개에요. 그러니까 영생의 길은 뭐냐 하면 넓은 길을 포기하는 사람만이 통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 자기 영광을 원하기 때문에 자기 영광이 있는 사람은 넓은 길을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좁은 길은 넓은 길에 있는 사람에게 가리어지겠지요.

그래서 제가 오늘 영광 강의를 하면서 첫 번째 중요한 포인트인데 하늘의 영광과 인간들의 영광 사이에는 막이 있다. 그 막은 가려지는 막이 있다.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지요. 시내산에 올라 갈 때 그 모습이었습니까? 다른 모습이었습니까? 모세가 40일 동안 있었는데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갔다 내려온 그 모습은 영광의 모습이었어요. 그 영광의 모습은 지상의 영광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왜냐 하면 사람들이 지상의 영광을 만약에 안다면 사람들이 수건 가지고 얼굴 덮을 일이 없어요. 완전히 생판 처음 보는 영광입니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무슨 화장품, 비비크림을 뭘 발랐는지 빛이 나요. 그 빛을 말하는데 태양에 비유할 정도로 빛이 나는 거예요. 사람인지 발광체인지 분간도 안 된다 말이죠. 보통 얼굴이 좋은 사람보고 훤하다 하지 않습니까? 훤한 것이 그 정도가 아니에요.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할 정도니까요 마침 비슷한 예가 저기 돌아가고 있는 둥그런 선풍기 히터, 저 모습입니다. 그것을 면상에 데 보세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지요.

눈뜨고 못 본다는 말은 비참하다는 뜻이 아니고 눈이 감당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감당이 안되는 영광을 모세가 지상에서 연습하고 왔습니까? 중요한 거예요. 모세가 그 영광을 받은 것은 사전에 그런 영광이 있을 줄 알고 준비한 것이 아니고 환경이 모세를 그렇게 만들어 낸 겁니다.

모세가 들어갔던 그 장소가 모세를 그렇게 영광스럽게 만든 거예요. 따라서 모세가 영광 받았던 시내산 꼭대기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장소가 바뀌잖아요. 장소가 바뀌면 누가 힘들어져요? 모세가 힘들어합니까? 아니면 백성들이 힘들어합니까? 백성들이 힘들어한다는 겁니다. 감당을 못하는 거예요.

진짜 영광이란, 지상에서는 언어가 통하고 말이 통하잖아요. 지상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언어인데 모세가 얼굴에 감고 온 그 영광은 인간이 눈으로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지요. 사도 바울이 삼층전에 올라 갔잖아요. 삼층천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부정적인 표현을 했지요.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표현했죠. ‘나는 말 못해. 무슨 말을 어떻게 덧붙여 덧붙이는 그것이 오히려 영광을 훼손시켜’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영광 앞에서 지상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할 말을 잃었다는 말은 이 영광 앞에 인간은 왜소해도 너무 왜소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사야 6장 알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평소에 왔다 갔다 했든 친밀했던 성전이란 공간에 갔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 성전이라는 공간이 하늘 차원으로 돌변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지상에 살던 존재가 뭐를 맞딱드렸어요? 하나님의 영광을 맞딱드리는 순간 자기는 감당이 됩니까? 감당이 안 됩니까? 감당이 안 돼서 하는 말이 ‘주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누가 망해요? 하나님이 망했다는 말입니까? 누가 망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망했다는 거예요. 결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망할 자입니다.’입니다.

말로 표현 못 한다 거나 나는 망할 자라는 이런 고백을 할 때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내 인생이란 생존, 내가 어떻게 밥 먹고 살지? 가정을 어떻게 화목하고 이혼을 했는데 어떻게 이혼을 할 수가 있지? 북한의 핵폭탄 위험한데 어떻게 감당하지? 이런 것들 있잖아요? 그게 영광앞에 어떻게 됩니까? 교회는 부르짖어야 되고 이번 달 헌금은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하는 걱정이 막상 주님의 영광을 보고 난 뒤에는 그 모든 것이 내 뱉었던 모든 결핍들, 내 영광, 내 자존심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 모든 결핍들이하도 한마디로 그것이 모아져서 나는 뭐로 드러난다? ‘나는 망할 놈이다.’망할 놈이죠.

서울 안 가보면 사람이 거짓말로 서울 대학 간다고 막상 서울 가본사람, 모세나 이사야 같은 경우 에는 이 세상에 겁나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수님 빼놓고 하나님 빼놓고 겁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사십대에 하는 감을 세배나 받고 바다의 위협과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육지의 위협을 당하고 당해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니라. 항상 기뻐하라 나는 어디서든지 기뻐한다. 너희도 같이 기뻐 하리라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봤거든요. 다멕섹에 내려가다가 누구를 봤잖아요. 누구를 봤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나을 핍박하느냐’예수님 만났잖아요. 부활의 주님을 만났잖아요. 부활의 능력이 함께 있지 않습니까? 부활의 능력이 함께 있을 때 자기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 앞에서 나는 망해야 됩니다. 나는 진짜 망해야 됩니다. 그것도 아주 신나서 나는 내 자신을 이제 알았습니다. 내가 망해야 된다는 왜 사실을 모르고 그동안 내 영광을 시도 했는지 바보 같은 인간, 나는 영광이고 뭐고 필요 없고 나는 당장 망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지금 까지 막살아 왔고 아울러 막살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아주 신나게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막 살아서는 안 된다고 외치던 목사가 3일전에 죽었잖아요. 김성수 목사라고……. 시커멓게 진리 안에 안식하소서. 대통령이 죽은 것도 아니고 제가 어느 선교사한테 이야기를 했지만 선교하는 것이 주의 증거하는 일이 아니고 내가 죄 값으로 죽는다는 것이 유일한 주의 증거입니다.

나, 나, 죗값에 죽는 거예요. 왜? 막살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내가 그동안 고민 고민했던 그 고민이 고민한다는 자체가 죄에요. 그 고민은 뭐 때문에 고민을 하느냐 하면 아직도 내 영광에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에 생긴 고민이거든요. 남한테 기 안 죽으려고 남한테 잘난 존재로 비쳐지기 위해서 내가 무슨 노력을 할까 거기에 고심하다보니까 생긴 고민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께서 해결한다고 했는데 예수님의 뜻을 그렇게 알면서도 너희들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혼자 다 지고 가니 우리 자신이 걱정할 대상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뭔데 우리가 걱정해야 됩니까? 내가 맹세하려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까? 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이렇습니까?

다시 이야기하지만 데살로니가에 성도가 나타난다는 것이 이것이 희한한 일이에요. 인간이라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존재에요. 사는 것이 우선이고 돈이 우선이고 돈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없고 이것은 형제간이고 뭐고 돈 문제 때문에 서로 원수 되고 자기 부모 돈 없다고 무시한다고 조카가 친척들 죽이고……. 전부 다 우리 집안, 나를 무시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네가 뭔데? 왜 무시를 안 해야 되는데?

이번 수련회 책 있죠. ‘교회냐 복음이냐’그 책 제일 끝부분에 결론이 뭡니까? 제발 성령 받았으면 제발 좀 즐거이 무시 좀 당합시다. 모든 범죄는 무시 안 당하려고 하는 데 있어요. 그런데 심판주가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이에요? 친구가 심판주입니까? 집에 아빠 엄마 심판주에요? 누가 심판주입니까? 예수님이 심판주 잖아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충분히 무시당했어요. 우리는 마지막 우리를 재판하시는 그분한테 무시를 당했으면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은 눈치를 채야죠.

죽기를 무서워서 종노릇하지 마시고 정말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는 것은 적이 아니고 우리 자신입니다. 무시 안 당하는 자아상을 따로 설정해 놓은 그 자아, 그 주체, 그것이 끝까지 이를 악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훼방합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에서 법에 속한 자, 율법에 속한 자, 그들이 기어이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법으로 그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바리새인들이 데려오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참 고맙지 간음한 여인이 언제 예수님을 만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법을 아는 사람들이 자기 잘난 체 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둘러 쌓여서 우리 이 여자를 무시합시다. 주님 앞에 데려다 놓고 예수 당신도 이 여자 무시하고 우리도 무시할 테니 돌로 칩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 무시 안 당할 사람만 이 여자에게 돌로 쳐라. 하고 땅에 글을 쓰니까 사람들이 전부 다 무서워서 도망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여인도 무시당해야 돼요. 돌로 치려는 인간도 무시당해야 돼요. 다만 글씨를 써서 우리에게 제시 하는 예수님만 영광 받으셔야 될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여자 에게 제공한 겁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불평을 하고 그 보상을 얻으려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그 여자가 용서받은 것이 뭔가 자기 용서를 받기 위해서 수작을 부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바로 아무 것도 없다는 그것이 가장 주님의 용서만 100% 띄워서 보여줄 수 있는 여자가 자기 영광을 더 이상 내 세울 수가 없지요. 나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걸린 여자입니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 안 되거든요. 그냥 아무 소리 안 하시면 됩니다. 다소고니 용서받은 것이 너무 고마워서 너 뭐 잘한 것 있나? 없습니다. 속으로 고마워서 웃습니다.

주님의 용서를 그 귀한 용서를 누가 무시합니까? 바로 우리의 내 영광을 추구하는 악마가 심어놓은 육신의 영광, 이 세상 영광이 영광이라고 아는 욕망이 낳은 내 육신덩어리가 내 안에서 싸움을 벌여서 주님의 용서해 주시는 그 영광을 묵살시키는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충만함으로 우리가 충만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잊어버렸던 주님의 용서를 다시 한 번 되살리는 작업이 매일같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그러한 귀이한 존재, 바로 데살로니가에 있는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특이하고 이상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원하는 것을 찾아주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가 세상 영광을 우리가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상 영광을 꿈꾸면서 그것이 죄인 줄 알고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주님의 영광스러움을 더 사모하는 기이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역사 속에 주님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은 집안에 현판처럼 걸어놔요. 목공소 가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새겨서 붙여놔요. 골프도 영광이 아니고 벤츠를 타고 영광이 아니고 우리는 그런 것이 영광이 아니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한번 타봤으면 좋겠죠.

이제부터 어려워집니다. 어려워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 마귀 이야기했잖아요. 모세의 하늘의 영광과 지상에 인간들이 감당 못할 역사에 모세는 거기다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수건을 넣었습니다. 수건을 하니까 이제 사람들이 모세하고 대화가 성립되지요. 그러면 그 수건을 모세가 장난친다고 덮고 있다가 까꿍 하면 기절할거다 말입니다. 그러면 아, 그만 그만 할 거다 이 말입니다. 모세가 그런 장난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고 점차 처음에는 수건이 필요했지만 나중에는 수건도 날아가 버렸죠.

그게 막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감당되지 않는 사람에게 모세가 취한 것은 수건이었지만 그 수건과 동일한 기능으로 한 그것이 신약시대에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겁니다. 수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서 나오는 모세와 사람들이 소통, 대화가 되었어요. 뜻은 모르지만 하여튼 주고받고 대화는 되었어요.

예수님의 영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섞일 수 있었어요. 모세가 땅에 백성들과 섞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섞일 수가 있는 거예요. 이제 어째서 그래야 되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해야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 보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런 사람이 없거든요. 사울이란 사람이 다멕석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했지만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이나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이 아침에 눈뜨고 합숙 1박2일 훈련했으니까 일어나서 어 망하게 되었구나! 이러지 않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언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다. 한 적이 있었어요. 그게 언제냐 하면 바로 뿌연 물안개 피어오르고 있는 새벽인지 바다에서 걷는데 세상에서 바다는 뭐냐 하면 배를 타고 보트를 타고 간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인간의 영광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영광 수준은 물에는 배를 타고 간다. 그냥 물을 걸으면 땅이 아니기 때문에 빠진다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저쪽 편에서 이쪽으로 물위를 걸어오는 거예요. 그때 제자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령이다!’ 유령이니까 이것은 결국은 ‘기괴함’입니다. 분명히 우리와 같은 동네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발견하고는 기뻐했지요. 심지어 베드로가 달려들어서 물인지 땅인지 분간도 못하고 달려들어서 만났지요.

자, 예수님이 유령이다. 라고 한 경우도 있었고 또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 산에 올라갑니다. 그때 올라갈 때 예수님의 모습과 올라가서 예수님의 모습이 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올라갈 때와 올라간 후가 달랐습니까? 같았습니까? 같았지요. 맨 그 베드로가 맨 베드로였다 이 말입니다.

올라가 보니까 거기에 모세 있었고 엘리야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 동네가 무슨 동네입니까? 그런 동네가 다 있습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베드로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영광 차원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아니 주님이 초막이 그리워서 이 땅에 오셨겠습니까? 모세 엘리야가 하늘나라 전세 사기 당해서 표 하나 얻으려고 변화산 꼬시는 게 아니거든요. 초막 셋을 지어서 한 사람당 한 채씩 드리겠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모세를 버리면 안돼요. 모세를 버리면 하늘 차원이 막이 없이 그냥 펜선 하나에 소통하게 돼요. 그러니까 팬션 지어진거 모세 엘리야 전부 다 사라져 버리고 갑자기 그 자리에 구름이 등장합니다.

구름이 등장하면서 하늘의 하나님의 아버지의 목소라가 들리지요.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끝까지 하나님께서 영광을 가지고 이 세상의 왕과 접촉하시는 끝까지 유지하는 원치 않는 그것은 아무리 인간이 애써도 지상에서 하늘로 영광의 진입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만약에 진짜 하나님이 허락했으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길을 터놓았을 겁니다. 오지 말라 해 놓고 아는 사람만 가라 길 비켜서 허락했을 겁니다. 일체 아무도 모릅니다. 죽어도 못가요. 베드로가 죽으면 가겠냐고 했는데 죽어도 못가요. 죽어도 갈 수 없는 곳, 결국 죽어도 갈 수 없고 살아도 갈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없는 곳’입니다.

갈 수도 없고 쳐다봐도 필요도 없는 아예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거예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없어 라고 할 때 그런 소리할 때 그 인간은 지금 있지요. 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현재 자기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하늘나라는 영원히 없는 곳이에요. 그러면 그 없는 곳이 있는 곳으로 등장하려면 어느 쪽에서 바뀌어져야 돼요?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는 내가 없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내가 살았다고 저곳이 있다면 내가 산체로 갈 수 있으면 가야되니까 내가 살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내가 죽었다고 여겨야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이삭이라 하는 사람이죠.

이삭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사는데 그게 누가 하는 거예요? 이삭 본인이 하는 거예요? 누가 한 거예요?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살려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서 있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살게 하기 이전에 인간은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어려워요. 있는 이삭을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 있게 했다가 아니라 이삭을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리시고 난 뒤에 기준에 의해서 그 전에 것을 새롭게 규정을 하시는데 없는 것으로 하시는 거예요. 없는 자를 있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하는 거예요. 없는 인간이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으로 태어나는 거예요.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들아 그냥 일상을 즐겨라! 그냥 네 하는 일을 그대로 해라! 하고 땅은 내가 뒤집는다. 모든 인생은 인간에 의해서 태어난 인간들입니다. 아버지, 엄마에게서 태어난 거예요. 아버지 엄마에게 태어나서 의사 판사 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라 어떤 사람이 대법관인데 세상에 자기 부인도와서 편의점 직원 아르바이트하고 있어요. 대단한 사람이죠. 뉴스 나왔잖아요. 서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법관을 하든 관계없이 뭘 해도 그것은 전혀 천국사람은 아니다. 왜? 뒤집어야 됩니다.

여러분, 콩나물 기를 때 콩나물 뿌리는 아래로 내려가고 머리는 위로 올라가지요? 콩이 올라오잖아요. 그것을 한번 뒤집어보세요 그러면 뿌리가 올라오죠. 하나님께서 뒤집는 거예요. 강호동이 뒤집기 하듯이 뒤집는 거예요. 뒤집어 보니까 전부 다 있어도 잠시 있다 사라지는 안개 같은 없는 존재였고 사람은 살았다 하나 일은 죽은 자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태어난 하나님이 따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다 있다고 하면서 없는 자이고 주님이 없는 데서 새로 생긴 진짜, 두 번째 아담, 진짜 아담으로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14절에 보면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뒤집기한 영광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봤던 모세가 봤던 그 아름다운 광채, 그 영광이 영광 아닙니까?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을 봤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일으키는 그 사건, 이제는 독생자의 모든 영광은 어디에 집약해서 어디에 담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되심에 담겨있는 그 영광만이 영광이고 그 외에는 영광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김창길(IP:210.♡.60.74)

13-03-25 19:31

서울 의존교회130308b (독생자의 영광)―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제가 뒤집기 이야기를 했지요. 뒤집기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하늘을 쳐다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 봤는데 엘리야 같은 경우 에는 제자들이 어디로 갔습니까? 태양 가까이 가지요. 불 마차 타고 하늘로 올라가잖아요. 사람들의 느낌은 뭡니까? 아 하나님은 엘리야가 살아있는 어느 곳에 있다? 저쪽에 있다.

아까 제가 이야기했듯이 하늘나라는 인간에게는 인간이 있다고 인간 내가 있으니까 내 눈으로 보고 싶어 할 때 그때 이미 하늘나라는 인간에게는 사실은 없는 나라죠. 없는 나라입니다. 인간이 죽을 때나 나오시는 분, 주님,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 진거거든요. 그 뒤에는 뭐가 있으리라? 심판이 있으리라. 그러니까 불교 신자던 교회 나오든 안 다니든 관계없이 결국은 얼마나 하나님께서 공평하신지 전부 다 심판을 해 버리는 겁니다.

평소에 학교에 출석을 하던지 출석을 안 하던지 선생님은 아무 소리 안 하다가 강의 하다가 결국은 시험을 쳐버려요. 선생님, 아파서 한 학기 중에서 반은 못 나왔습니다. 그래도 안 듣습니다. 어차피 마지막 심판은 있어요. 있는데 바빠서 심판을 못 챙겼다는 것이 구실도 변명도 될 수 없는 겁니다.

왜 그 사람들이 바빴습니까? 왜 복음을 안 들었습니까? 자기 나름대로 따로 하는 것이 있었어요. 자기가 하는 일이 따로 있다는 말은 ‘나 안 죽었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항상 자기 인생 가운데서 죽음을 한 곁에 놓고 한 거예요. 왜? 자기가 살아있으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살다 보면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지금 내가 죽는 힘으로 나를 끌고 간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 거예요.

죽음이 자기 밑바탕에 있는 것을 모르고 죽음이 나를 이끄는 힘으로 사는데 자기는 ‘기다리세요. 나중에 힘 빠지면 갈게요.’ 죽음을 저쪽으로 밀어 넣는 거예요. 죽음을 밀어놓으면서 해 보겠다는 것은 무슨 일었습니까? 베네수엘라 국가 국민들 살리는 일이었잖아요.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다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뒤집기인데요.

영광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왜? 엘리야도 그렇게 갔기 때문에 영광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영광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 손에 들어갔어요. 독생자의 삶에 하늘에 있을 때는 막, 수건이라는 막을 통해서 접근이 불가했는데 이제는 사람 손에 들어가니까 예수님을 만지고 주무르고 뽀뽀하고 껴안아도 백날해도 영광은 발견되지 않는 거예요. 왜? 자기들은 살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산 내가 살아있는 예수를 믿음으로 지금 살아있는 것 이상의 결핍을 추가해서 보상해서 지금도 살았지만 영광스럽게 산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주님을 생각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경유하지 않은 가짜 예수 이미지를 가지고 지금 예수님을 만지고 떠밀고 난리난거예요.

예수님이 전도를 하니까 사람들이 만지고 떠밀고 난리 났잖아요. 소문 듣고 예수님이 인기가 많다는 말이죠. 심지어 병 고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밀렸으면 번호표도 안 뽑고 지붕으로 올라가 남의 집 지붕을 다 뜯어내게 만들고 이 정도로 인기 있었다 말이죠.

그런데 백날 소문 듣고 병 낫고 눈뜨고 문둥병이 낫고 하면 뭐합니까? 전혀 독생자의 영광에 접근도 안 되는데요. 사실 제자들은 한 몫 더 떴습니다. 예수님, 예수님, 야!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우리 귀신 쫓아냈으니까 우리 믿는 자 맞지요? 이렇게 나오더라 말입니다. 귀신 쫓아낸 인간들이 결국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잖아요.

결국은 뭡니까? 귀신을 쫓아냈는데 주님이 쫓아냈다고 생각을 못하고 살아있는 내가 예수의 힘을 빌려서 그것을 보충해서 채워서 그래서 내가 귀신을 쫓아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성령은 그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모세의 수건처럼 역할 한 그리스도의 영은 그것을 뒤집어버립니다.

나는 주의 일을 방해만 했을 뿐이다. 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영광, 독생자의 영광을 보여 주는 도구로 사용되는 멘트에요. ‘나는 십자가 진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두 사람 외에는 세례를 준적이 없습니다. 세례가 결코 구원의 능력이 될 수 없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우리는 구원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지 ‘구원의 능력을 내가 한번 발휘한번 해 봐?’ 발휘한번 해 볼까? 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발휘되는 사람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에요. 구원은 오직 예수님 혼자 해 내시는 작업입니다. 아무도 구원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할 것은 왜 뒤집기를 하느냐? 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면 되는데 바리새인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메시야? 구름타고 올걸? 왜? 다니엘에 나오니까 구름타고 오니까 얼마나 오는 것이 찬란하겠습니까? 그런데 메시야가 구름타고 와서 구름만보고 하늘만 쳐다보는데 ‘이게 무슨 구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길이요 진리요 하고 있으니까 보고도 못 믿는 거예요. 보고도 못 믿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있게 한 거예요. 왜? 우리 인간들이 헛된 영광만 쳐다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영광이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뭡니까? 죽은 데서 들려야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3장에서 인자는 죽은 데서 들려서 영광 받는다 했습니다. 너희들에게 죽은 자가 영광 받지 너희 손에 죽지도 않은 자가 영광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참된 영광은 너희들을 기어이 죄인 되게 들통 내면서 받는 영광이 영광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참된 영광이라는 것은 나는 영광 받을 자격이 없고 나는 내 몸만 생각하는 나쁜 놈이라는 고백과 더불어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아요. 그러니 어느 인간이 내 영광은 나쁜 영광이라고 자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자백을 못합니까? 그것을 그렇게 내 영광을 나쁜 영광이라고 지적 할 만한 그 기준을 우리는 제공받은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도 닦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그들은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그게 영광이라 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간 겁니다.

이제부터 어려운데 뭐가 어려우냐 하면 왜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셔야 되는가를 이제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니고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인간이라 하지 않고 그것을 ‘인자’라고 합니다. 인간에서 인자로 바뀌는 것에 무슨 개념이 들어가느냐 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자기들이 인간이라 하니까 주님은 인간이라는 것이 없어요. 인간이 없으면서 진짜 인간 만들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이름의 흙에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인자를 거쳐서 예수님의 몸이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겁니다.

어렵지요.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네가 정령 죽으리라 했잖아요. 죽는다는 것은 흙이 된다는 거거든요. 흙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발설해 놓고 취소할까요? 취소하지 않을까요? 취소 안합니다. 어린 애들도 나중에 80년 두고 보세요. 늙어 죽어요. 그렇게 되지요. 이미 우리 속에 흙, 죽어야 될 요소가 자라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흙에서 놔둬 버리면 그냥 흙이 될 뿐이에요. 아무리 인간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마치 바닷가에 모래로 만든 인어공주 같아서 파도가 치면 다시 뭐로 돌아와요? 인어공주는 언제 있었냐 싶을 정도로 깨끗하게 다시 같은 모래로 돌아가지요. 뭐 있었어? 뭐 있었던 것 같은데……. 6개월만 지나 보세요. 어떤 인간도 6개월만 지나면 다 잊어버려요. 김대중 대통령이 죽은 지가 좀 됐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만큼 사람들은 잊혀지는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울지요. 나중에 보면 새 남자 사귀고 있어요.

인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뭘 취소하지 않는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령 죽으리라를 절대로 취소하지 않습니다. 흙은 그냥 흙이에요. 에스겔 30장에 보면 흙이 흙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해골이에요. 흙에서 인자가 됩니다. 인자는 인간이 흙이 될 수밖에 없는 과정에 참여합니다. 그 인자가 ‘비참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자도 나중에 뭐가 되지요? 흙이 되지요. 흙에 합류해요. 그런데 인간이란 흙과 인자라는 흙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인간은 죽어가면서도 자기가 살았다고 우기는 것이 인간이고 인자인 예수님은 죽는 이유를 듬뿍 담고 그 죽으신 이유에 의해서 돌아가시는 거예요. 이것은 온전한 진짜 저주, 진짜 심판을 받으시는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고난 받은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을 뭐라 합니까? 인자는 시편 8편에 보면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데 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대와 언약이 왜 주어집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시편8편에 보면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그렇게 생각해 주시나이까? 무엇이 관대, 아무런 가치도 없는데 왜 찾아오십니까? 찾아오신 이유는 왜 인간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를 비로소 알려주는 그러한 자리에 참여한 자리가 인자의 자리가 되는 거예요.

언드시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 어떤 나쁜 사람이 열차를 탈취해서 핵폭탄을 설치해서 미국의 워싱턴을 폭파시키려고 음모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휴가를 간다고 스티븐시걸이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나쁜 놈이 있는지 몰랐죠. 휴가를 받아서 자기 조카하고 탔는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영화이야기가 아니고 기어이 열차의 인질들을 다 구출해 내고 테러범들은 다 죽여 버리고 워싱턴은 평안하게 다시 평화를 이루었다는 그런 내용이거든요.

예수님이 인간의 열차에 올라타신 겁니다. 예수님이 스티븐시걸인데 영화를 보면 스티븐시걸이라는 사람은 총도 잘 쏘고 사제폭탄도 잘 만들고 총알도 잘 피하고 싸움도 잘하는데 예수님은 무슨 방법으로 하느냐 하면 그 비참에 더욱더 비참으로 되어 버립니다. 왜 우리는 흙이 되어야 하면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버림받아야 되며 왜 심판받아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이미 저주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 속에 누가 들어갔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거기에 합류하는 식으로 인자라는 새로운 장, 구원의 장소를 열어 주신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를 왜 여기서 하느냐? 영광이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결국 원했던 것은 하늘에 해처럼 빛나는 그 영광은 아니어도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고 놀라 자빠지는 그 영광 아니었고 진짜 하나님이 최종 원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인자의 영광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를 지어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죄 짓도록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아주 탐낼만한 아름다운 과실을 심어 놓았던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농락당한 겁니다.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최종목표를 위해서 인간들은 시다발이로 부속품으로 하나님이 배치하고 장치해 놓은 그 장치에 인간들은 자기의 본성대로 그냥 움직였을 뿐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 때문에 따 먹었습니다. 처음부터 먹음직 보암직 하지 않으면 따 먹지 않지요.

천박한 아가씨는 모르겠지만 어떤 아가씨가 가는데 뒤태가 너무 좋다 머리 이만큼 내려와서 뒤태가 체형이 균형이 잡혔다, 나 저 여자와 결혼할 거야, 난 소원이 없어 하고 걸음을 빨리 해서 앞으로 가 돌아본 순간, 괴물이다. 안양에서 이 이야기를 하니까 그것은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어느 남자가 그 여자와 결혼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뒤태, 앞태, 옆태 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뭡니까? 탐스럽기 짝이 없어요. 어쩌면 나를 제발 부추겨서 좀 타먹도록 부추겨 주기를 기다릴지도 모르죠. 누구인가 따 먹고 싶은데 미치고 환장한다 말이죠. 결과적으로 따 먹었잖아요. 그런데 따먹어봐서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 뭐냐? 죽음이었다 이 말이죠. 무슨 죽음? 인간의 죽음, 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런 사람의 죽음이란 하나의 에덴동산의 실험실이었죠. 그 실험실에서 결과가 장차 독생자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했던 존재였다는 겁니다. 독생자가 죽어야 영광을 받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당겨서 인간은 오실 아담의 표상입니다.

하나님의 빈틈없는 계획입니다. 이 모든 아이디어가 주께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간다. 사람이 토기장이며 그릇이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왜 저렇게 만들었습니까?
어디서 입을 놀려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그냥 만들어진 대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옥 갈 사람들이 감사합니까? 감사안합니까? 지옥 갈 사람은 지옥갈 수밖에 없는 행세를 그대로 합니다. 부자도 아닌 것이 부자 행세하면서 거지 나사로보고 여기 손가락에 물을 찍어서 주세요. 어디서 셀프인데 셀프인지 모르고 그러본데……. 어디서 주문배달하고 있어? 테이크아웃이에요? 누구보고 심부름을 시켜요? 어이 나사로 여기 물좀 찍어줘! 자기가 뭐에요? 어디서 세상에서 하던 행세를 해요? 지옥간 인간들은 지옥 가서도 그 행세를 유지해요.

제가 어떤 글에 썼잖아요. 지옥이 보고 싶습니까? 지금이 지옥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잘남을 위해서 하는 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가 시켜 먹는 것, 돈 주는 것, 이게 자본주의가 지옥 아닙니까? 그리고 부자 못 돼서 환장했고 다른 말로 하면 지옥 가는 사람이 좋아서 우리가 환장한 거예요. 데살로니가 성도 같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아이고 안됐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부자가 못 돼서 환장했어요.

천국 가는 순위, 그것은 보지도 않습니다. 부자의 순위, 그런 것은 봅니다. 우리나라 대표선수 이건희 몇 등? 99등 야~ 참, 나는 언제나 그 순위에 끼어드나? 길이 한 개가 아닙니다. 한 개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찾는 사람이 적은 길이에요. 순위? 찾는 사람이 하도 적어서 순위를 매길 필요도 없어요. 그 길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흙에서 인자, 인자에서 예수님, 여기에 인간의 비참함 속에 뛰어들은 겁니다. 비참함속에 뛰어들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비참함을 어떤 식으로 했느냐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결과가 어떻습니까? 비참하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되는 것은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노력을 안해서가 아닙니다. 뭐를 어겼기 때문에? 율법을 어겨서 그렇죠. 그러니까 다른 나라에서는 율법을 어겨도 잘만 살면 돼요.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은 이 말씀대로 지키지 아니하면 꼬리가 되고 머리가 되지 못하고 들어가도 저주, 나가도 저주 받고 혹독한 심판의 체험을 하게 되지요.

오늘 강의에 중요한 부분에 들어 갑니다. 이 비참함을 통해서 무엇을 끄집어 내냐 하면 ‘죄의 왕노릇’죄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죄를 짓지 말라가 아니라 죄가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막 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너희들이 막 살고 있다는 뜻이에요. 막 안 살았는데 이제는 막 살자! 그 말이 아니고 탐내지 말라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줄곧 너희들은 탐 내 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법이라는 것은 위반할 때 법이 가치가 있는 거예요. 위반할 때 아하, 우리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거예요. 하늘의 영광이 오게 되면 ‘아, 하나님은 너무 무섭고 우리는 너무 초라해’ 이것은 모세 시대 때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아이고 감당이 안 돼’수건으로 가리고 했는데 이사야만해도 어떻게 됩니까? 아이고 눈부시다 우리는 초라하구나! 이게 아니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 다음에 우리는 뭐하는 백성? 죄 중에 있는 백성이다. 벌써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섭고 혹독한 것은 우리가 감당 안 되는 이유는 이미 우리 속에 죄가 있고 그 죄는 뭐로 확인됩니까? 주께서 주신 율법에 의해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에요. 실험실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앞당겨서 보여 주는 실험실이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신약의 그림자이고 신약의 상징이고 실천은 신약시대입니다. 히브리서에 나온 이야기를 해 볼게요.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린다고 할 때 우리가 히브리서를 모른다고 할 때 ‘아 제사장이 하는 것 중에 속죄제를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하는구나!’ 누가 봐도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히브리서에서 뭐라 하느냐 하면 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는 이유는 또 한 가지 제사장이 죽어야 될 이유는 그들도 연약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제사를 지내면서 나는 죽어 마땅한 죄인이고 장차 오실 메시야의 피가 아니면 우리는 구원을 못받습니다를 그 시대에 고백하라고 내세운 겁니다. 목사는 목회하면서 죄를 알아야 하고 장로는 장로일 하면서 죄를 알아야 되는 거예요. 의사는 의사하면서 죄를 알아야 하고 과학 하는 사람은 과학하면 이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하고 학생은 공부하면서 공부하는 것도 죄구나! 알아야 돼요.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서 ‘공부, 이것 하면 뭐하노? 성적 좋다고 기분 좋다고 소고기 사 먹겠지’이런 식으로 벌써 인생을 초월한 그런 식으로 하는 애들도 있지만 그러면서도 공부 잘하는 것을 희망으로 삼잖아요. 왜냐 하면 벌써 무엇을 빼 버립니까? 그래도 하나님, 저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라는 말은 이미 죄라는 것, 하나님의 율법적 기능을 완전히 까먹고 무시해 버리죠.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왜? 거울 보니까 까불고 있으니까 나는 있으니까 나는 안 죽었고 살아있으니까 그런데 인자되시는 주님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행해 달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율법의 완성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성령 받으면 무슨 기도를 해야 돼요? 결국 기도는 뭡니까? 아버지여! 제가 이렇게 기도 했는데 제발 내 뜻대로, 내 기도 한 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또 트릭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아버지, 제발 부탁이오니 굶어 죽게 하옵소서! 교인들 다 도망하게 만드시고, 아침 10시에 심장마비 걸리게 하옵시고 재미없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뒤에 다 이야기했는데 절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은 또 무슨 수를 씁니까?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는 취지는 자기 자신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중요한 것은 법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인간이 선과 악을 알고 난 뒤부터 인간은 선한 것을 법대로 사는 것을 선하다하고 법을 위배하는 것은 악이라고 봤거든요. 그런데 법은 인간의 선악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을 초월한 그것에 법이 있어요. 그래서 인간은 법을 지켰다고 하는데 보면 아직 까지 지킨 게 아니에요. 그것을 못 지켰기때문에 그것을 지킨 것으로 치자는 내용의 법을 또 만들어 내요.

안식일에 담을 넘으면 안 된다. 이 말이 왜 나오느냐 하면 분명히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아직 자꾸 못 지키니까 그것을 공정하게 지키기 위해서 세부조항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아침에 기도 하니까 무시로 기도 하라 무시로 기도 한다? 이것은 나훈아가 하는 기도가 무시로 시도 인가? 무시로 기도를 어떻게 하지? 쉬지 말고 기도 하라는데 그러면 화장실은 어떻게 가지? 그래, 갔다 오고 하자! 화장실은 빼주자 하는 새로운 법이 나왔어요. 그것은 법을 안 지키겠다는 말입니까? 지키겠다는 말입니까? 지키겠다는 뜻 때문에 그렇게 한 거예요. 그 지키겠다는 것은 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지켜보겠다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못 지킨다고 주신 법인데 우리는 그것을 지키겠다는 거예요.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나는 법 앞에 살아있다 이 말이죠. 나 안 죽었다 이 말이죠. 안 죽었다는 것은 힘들게 하면 주님 앞에 섭섭하게 여겨지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말을 우리는 하지를 않습니다.

지금 독생자의 영광 때문에 희생의 영광 때문에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잖아요. 오늘 안양 강의 때문에 식사하고 어떤 집사님 댁에 걸어서 가는데 봄빛이 왜 그렇게 따스합니까? 그 봄볕은 교도소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파고들어요. 성폭력범에게 뭐 잘했다고 따뜻한 봄볕을 주십니까? 우리 기분 같으면 영하25도 그쪽만 찬바람을 불어요. 따뜻한 봄볕은 너무 큰 축복이라 남을 피해주는 그 인간들에게 봄볕은 너무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선인과 악인의 구분 없이 햇빛은 따사로워요. 아, 이 놀라운 발견 아닙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 했다고 따스한 햇볕을 주십니까? 밖에 안 돌아 다녀서 모르죠. 낮에 얼마나 따뜻했는지 몰라요. 거기다가 건조하면 또 가끔 비를 주셔서 습기 조절해 주시죠. 왜 나무는 안 죽고 왜 토기는 살아있는 거예요? 왜 나는 살아야 됩니까? 질문을 어떻게 하면 삽니까? 질문하지 마세요.

저와 여러분들 앞으로 질문을 어떻게 하면 내가 밥 먹고 삽니까? 하지 말고 내가 뭔데 왜 살아나야 됩니까? 내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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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