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3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죽음 속의 등대
201303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죽음 속의 등대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3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죽음 속의 등대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5장 31절,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이것과 우리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걸 이 시간에 생각해봐야 돼요.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등대, 등을 켜는 조명기구죠. 조명기구를 만드는 것과 우리가 오늘날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이 말이죠.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에 관해서 우리 쪽에서 준비할 것이라고 아예 생각하지 마세요.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는 우리 쪽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 준비를 했습니다. 새삼스럽게 우리 쪽에서 “하나님, 우리가 뭘 만들면 됩니까, 뭘 준비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식으로 나올 이유는 전혀 없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놨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들어놓으면 뭐하나 우리가 믿어야지.” 믿을 필요도 없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가 믿어서 구원받는다면, 우리는 아침 열 시 믿음과 열한 시 믿음과 두 시 믿음이 왔다갔다해요. 좀 믿는 것 같았는데 새벽 네 시 쯤 되니까 믿음 다 없어져버리고. 열한 시 쯤에 믿음 있는 것 같은데 열두 시 넘어갈 때 부부싸움 한 번 하고 나니까 다 없어져버리고. 분명히 예배시간에 믿음 있는 것 같은데 문 열고 나오면서, “내가 믿기는 뭘 믿어? 나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 믿는 거야. 눈에 보이는 현실 외에 아무것도 안 믿어.”
오다가 태화강에서 전선에 까마귀가 새카맣게 앉아있어요. 여러분들은 울산에 사시니까 보셨지요. 까마귀가 전선에 앉아있는 것과 오늘날 우리가 천국 가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지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까마귀를 하나님이 만드시고 전선에 앉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지만 까마귀와 우리와는 구원에 관계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막 만들고 거기에 등대를 만들었어요. 이것은 구원과 관련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열심히 믿겠습니다, 잘 믿겠습니다가 아니라 구분하면 돼요. 저것은 우리 구원과 관련 되는 것이고, 이것은 관련 안 되는 것이다. 그것만 구분하면 됩니다. 참 쉽죠.
조금 있으면 대만에서 세계월드컵야구대회합니다. 그것 우리 구원과 관계없다. 그 정도 알면 돼요. 야구는 부산사람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이대호 나오니까. 우리나라 남자들이 좋아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야구 져도 괜찮다는 말이죠. 첫 번째 시합이 네덜란드인데 네덜란드한테 졌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된다, 안 된다? 구원이 취소 안 되는 겁니다.
아까 사모님이 이야기하는데 정익이가 포항 해병대 갔는데 몸무게가 72됐다고. 사모님 구원과 관계있습니까? 없지요. 72되도 괜찮고 75되도 괜찮아요.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없으니까. 그걸 구분하면 된다니까요. 제가 참 쉽다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막상 울산이든 대구든 살아가는 사람들 보면 구원과 상관없는 것에 눈물짓고, 한탄하고, 심지어 자살하고. 구원과 상관없는데 자살하고 싶어 하고. 구원과 관련 없는데 거기다 목을 내놓고 생명을 걸고. 그리고 금요철야하면서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그걸 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금요철야기도회를 만드는 것은 그것이 과연 구원과 관계있는가, 없는지를 성도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는가를 보시기 위해서 하신 거예요. 금요철야, 새벽기도하는 것이 네 구원과 관련돼있는가 아니면 네 야심과 야망에 관련되어 있는지 그게 보게 하시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등대를 만드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기 이전에 이미 구원에 필요한 모든 설치나 장비 그리고 시스템 이것은 일체 우리 쪽에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미리 다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밀고 당기는 것과도 상관없어요.
우리가 부정을 하든 부인하든 간에 이미 성소는 이미 옛날에 있었어요. 이미 성소가 있다는 말은 옛날에 태화강에 분명히 전선 없을 때도 대나무 위에 까마귀 있었지만 까마귀는 구원과 관계없는데 옛날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이 만들고자 지시했던, 모세한테 지시했던 성소는 우리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구분하는 거예요. 이 구분을 아주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계시인 것과 계시 아닌 것을 구분하자. 이렇게 고상하게 정립할 수 있습니다.
등대는 불을 피우는 겁니다. 이쪽에 세 개, 저쪽에 세 개 있으니까 중심 줄기 있을 것이고, 번호 123456 중간에 7. 여기서 살구꽃을 세 개씩 달아요. 123, 123, 123, 아홉 개, 123, 123, 123, 열여덟 개, 중간에 1234 합해서 꽃이 스물두 개. 밑에 발 만들고. 꼭 박근혜 나무 같다만 복주머니 나무. 이게 어디에 들어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있어요. 그 장치가 등대라 하는데 장치는 항상 동쪽에서부터 해요.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동과 반대는 서고, 남쪽, 북쪽. 입구가 이렇게 있어요. 이게 25미터에요. 이게 50미터고.
우리가 화들짝 놀라고 충격을 받아야 할 것은 옛날 임금들 궁전에 있잖아요. 그것은 임금 좋으라고 만든 거고 청와대는 대통령 살라고 있는 겁니다. 대통령 떠나면 사저로 가지만 거기서 갇혀 살아야 돼요. 빠져나오질 못해요. 감옥살이하는 것과 비슷하단 말이죠. 그런 것은 인간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필요해서 만든 건축구조물입니다.
그런데 성소, 성막은 우리 인간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게 아니에요. 이게 충격적이고 신기하다 이 말입니다. 왜 신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가 “나, 죽어서 좋은 데 갈래. 죽어서 영원히 불멸하는 천국에 살고 싶어.” 이건 우리 소망이지만 우리가 이런 소망으로 우리 나름대로 뭘 만들어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소망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먼저 만드셨다는 이것이 고맙고 충격이고 기적이라 이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거예요. “너희들, 성전 있어? 없지. 우린 있어.” 이런 자부심은, “너희 나라 청와대 있어? 우린 있어.” 그런 자부심이 아니에요. “너희들 김일성 궁전 있어? 우린 있어.” 그런 자부심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인간이 필요로 해서 인간이 지도자를 모시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구원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게 아니고 모세가 대통령 만난 게 아닙니다. 모세가 남의 나라 대사를 만난 게 아니고 누굴 만났어요? 세상에, 세상에. 인간이 만날 수도 없는데 하나님이 허락해서 만난 거예요. 일종의 삼투압 작업이라 작업인데. 아무나 와서 다 받아주는 게 아니고. “너, 올라와.” 이렇게 된 거예요. 여호수아도 반쯤 따라가다 “여호수아에게 너, 여기 있어.” “모세 선생님, 저도?” “안 돼. 하나님께서 나만 올라오래.”
모세는 연결구, 연결구는 파이프 조인트할 때 연결구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연결구를 신약에 오면 고상한 말로 중보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 같은 중보자는 연결구기 때문에 연결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에요. 연결과 조인트만 해주면 될 뿐이에요. 그러면 연결하는 배관공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모세 안에 두 가지 속성을 다 담았어요. 하나는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더러움, 그걸 모세가 품어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거룩함, 고상함, 그것도 모세가 품어야 되고.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서 모세를 하나님 집에 사환이라고 해요. 그냥 허드렛일 하는 집사다, 일꾼이라고 해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이에요. 주인을 아들이라고 한 겁니다. 지상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아들만 보내서 나타나요. 이것도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서 우리를 건지는 아이디어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어요. 우리 같으면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겠는데 절대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연결구를 형성시켜서 그 연결구 안에 들어온 사람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제 말은 하나님, 하나님 한다고 하나님 아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신 이런 말씀, 이러한 장치, 이러한 계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 보내주세요.” 아무리 때를 써봤자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내가 만든 연결구에 들어왔느냐? 그 통로, 노선에 들어왔느냐고 물어요. 그냥 하나님, 일대일로 상대합시다. 대화로. 요새 소통이 유행하는데 우리끼리 소통합시다. 안 됩니다. 우리끼리 소통할 것 같으면 이런 성소나 등대나 이런 걸 귀찮게 뭐 때문에 만들라 했겠어요? 만들 이유가 없어요.
사람이 가는 것은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놨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싸대면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합니다.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것 그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만나죠. 북한과 한국 대표자 만날 때, 군사 회담할 때 아무 철책선에 가서 “어이, 이리 좀 나와 봐라.” 하고 만납니까? 특정 장소가 있잖아요. 판문점 아닙니까. 판문점에서 만나듯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나는 장소는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서 만나야 돼요.
이게 옛날 조선시대 사람이나 고려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인간적인 심정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착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그러니까 이 정도는 아니까 하나님이 내 심정, 나의 원통함을 알아주겠지.” 이렇게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그것 안 받아주십니다. 물론 인간으로선 그러고 싶어요. 최초로 그렇게 한 사람이 있어요. 바로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은 연결구가 없이 그냥 받으소서. 한 거예요. 요새 식으로 말하면, 조상 제사 지내듯이 하나님을 제사 지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뭘 받았는가?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게 아니에요. 뭘 받았느냐 하면,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데 오늘 삼일절, 국경일이니까 이야기해야지.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게 아니라 아벨 자체를 받은 겁니다. 어떤 아벨? 산 아벨? 아니에요. 죽은 아벨.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가인, 네 제사 안 받는다.” 그 다음에 “아벨, 이리 와. 네 제사 받을게. 수고했어.” 이게 아니고 “아벨, 너 이리 와.” “하나님, 제 제사 받아주시옵소서.” 네 제사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사를 드린 아벨 너의 인생이 앞으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제사의 모델로 하나님 쪽에서 다듬어나가고 만들어나가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것 받으세요.” “받았다.” “이야기 끝났지요. 복 주세요.” 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리 와.” “제사 받았잖아요.” “이리 와봐.” “왜 자꾸 부르시는데?” 너를 제물로 삼는 바로 진짜 제사의 원형에 가까이 가도록 내가 너를 붙들고 네 인생을 주관하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인이 제사 드리고 손 털고 가듯이 아벨도 제사 드리고 손 털고 가는 게 아니고 제사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벨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야 되는 인생이 되는데 아벨의 인생 자체가 장차오실 영원한 죄 용서가 가능한 재료로서 거기에 납작 포착이 됩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하나님, 저 예수 믿습니다. 이야기 끝났지요. 오늘밤 죽어도 천당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 볼 일 보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이리 와봐.” 우리를 불러요. 불러서 예수 믿는다는 우리를 가지고 산 제물로 하나님께서 이것이 참된 제사라고 보여주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여기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12장에 나옵니다. 일반교회에서 보통 오후나 저녁예배에 헌신예배 많이 하시잖아요. 헌신예배 때 단골로 나오는 성경구절이에요. 그래서 교회께나 다녔다는 사람은 이 구절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에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청년회 헌신예배 할 때 이 본문 등장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이야기 들어보니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지요. 헌신예배하고 매미채 들고 돈 거두잖아요. 그것으로 청년들 간식 사 먹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건강종합진단할 때 둥그런 통 안에 들어가잖아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환자복 입고 누워 있잖아요. 그게 바로 제단에 누워 있는 산 제물들이에요. 우리가 얼마나 뛰고 까불고 하는지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의 연결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제단에 눕혀서 점점 더 예수 안으로 끌어 잡아당깁니다. 산 제물 되게 하는 거예요. 산 제물 되게 할 때 주님께서 피자에 토핑하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눕혀놓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 안이라는 동굴 있잖아요. 그 동굴이 어떤 동굴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다 가신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제단에 누워 있다는 것은 제단이 스스로 움직여서 우리는 빨려 들어가는데 빨려 들어가면서 무엇을 통과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수모들을 당했는지를 성도도 공감하게 만드는 그런 특이한 현상들이 일어나요. 그게 성령이 주시는 기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걸 받아 챙기는 게 기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는 그것은 아무나 받는 같은 공감대를 일으키는 게 아니에요. 아벨처럼 하나님의 제물이라고 규정된 사람에게만 주시는 토핑이에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곱게 딸려가는 인간은 없어요. 주인 말 잘 듣는 개도 억지로 먹으라고 하면 발악을 하고 주인을 물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원한다고 해서 MRI 찍는다고 산 제물 되기 위해서 집어넣으면 우리는 강력하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반발하게 될 거예요. 엄마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삐져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공부하라는 그 소리 듣고 오늘 공부 접는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죠. 그 반발을 주님께서는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반발이 없으면 천국 못 가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 반발을 성경에서는 탕자에요. 집 나간 탕자. 가출한 탕자. 우리의 일상은 탕자 됨의 반복이에요. 매일같이 우리는 탕자에요. 하나님, 복 주세요. 복 받아서 뭘 하려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려고. 매일 우리는 눈만 뜨면 탕자의 일과로 시작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걸 보시고, “탕자라서 좋아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탕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사랑과 용서가 값을 보일 수 있는. 우리가 잘나고 우리가 훌륭하면 그건 뭘 모독하느냐 하면, 거저주시는 용서와 사랑을 모독하는 게 돼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 이야기하면서 탕자 때문에 삐진 사람이 있었지요. 탕자가 집에 안 돌아왔을 때는 집이 평화롭고 화목했어요. 그리고 맏이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죽으면 자기가 유산 다 챙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어쨌든 간에 좋은 관계였는데 집 나간 탕자가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왔을 때부터 이 집안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거예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체크. 또?” “저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체크, 또?” “그런데 아버지는 저한테 소도 안 잡아주고, 가락지도 끼어준 적 없고, 아버지가 저한테 잔치를 베풀어준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싫어?” “싫습니다.” “그러니까 네 본색을 드러낸 거야.” 그러니까 아무 한 것도 없는 탕자가 구원을 받고 맏이가 지옥 가도 핑계치 못하게 돼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옥 갈 사람도 생각해주세요. 지옥 갈 사람은 이래서 지옥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우리를 거저 용서를 하신 겁니다. 우리는 자기만 생각하고 주변에 지옥 갈 사람을 생각을 안 해도 너무 생각 안 해. 우리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옛날에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예수 믿고 바르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 된다는 이러한 생각이 꽉 들어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제부터는 싫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 잘났는데.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타짜]라는 영화에 나옵니다. 김혜수가. 이대 나와도 화투는 왜 치는데. 이대 안 나왔으면 참 좋았을 뻔 했는데. 탕자 입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웬 떡입니까?” 이렇게 되지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내 쪽에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가락지도 준비해, 잔치도 준비해, 소도 준비해, 좋은 옷까지 준비해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온 우주에 자랑하고 싶어서 아버지 쪽에서 환장한 거예요. “동네 사람들 보세요. 내 얘가 세상에 이런 얘가 있어요. 내 재산 가져가서 여자 만나서 다 날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얘가 어디 있겠어요?” 그 소리 듣는 탕자는 부끄러워서. 그뿐 아니고 뭐, “엉뚱한 짓을 해서 아버지 욕을 보이고 하여튼 얘는 나 아니면 인간도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걸 자랑스러워하는데 그걸 듣고 있는 아들은 부끄러워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아버지, 그건 빼도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반전이에요. 성경은 전부다 반전입니다. 제 정신으로는 구원 못 받아요. 제 정신 안 가져도 구원 못 받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한국교회가 생각 것과 전부다 거꾸로 생각하면 맞아요. 그게 누가복음 15장이거든요. 16장에 보면 가관입니다. 16장에 가면 한 술 더 떠요. 지혜로운 자를 등장시킵니다. 마지막 때에 죽어가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지혜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지혜 있는 자를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그 지혜 있는 자가 바로 불의한 청지기에요. ‘불의하다’는 뜻은 전혀 의롭지 않은 못 돼 처먹은 일꾼, 이것이 착하디착한 청지기를 이기고 하늘나라 합격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절대로 ‘불의한’을 떼지 않습니다. “어이, 청지기 물 한 컵 가져 와.” 이래야 될 걸 “어이,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 물 한 컵 줘.” 그러면 불의한 청지기가 , “예. 여기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 이것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마련한 하나님의 의가 있다, 없다? 전혀 없다.
제가 강의 처음부터 우리 쪽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는 거예요. 그게 아까 그렸던 등대입니다. 등대는 어디 있느냐? 그 이야기해야지. 아까 25미터, 50미터. 동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짐승을 태우는 제단이 보일 겁니다. 이것은 시중 음식점의 철판구이 생각하시면 돼요. 냄새가 지독하지요. 맨날 거기서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하니까 냄새가. 아침저녁마다 태우니까. 그리고 평소에 자기가 죄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우지요. 또 뭔가 서원할 것 있다고 태우지요. 늘 불태우고 있어요. 냄새가 진동하지요. 여기에 제사장이 종사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요.
여기에 천막을 쳐놔요. 이라크 전쟁 때 미군부대 막사라고 보면 돼요. 입구로 들어가면 두 구역으로 나눠져 있어요. 앞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향단, 향기 나는 식물을 태우면 향기가 나잖아요. 그 다음에 테이블이 있어서 호떡이 여섯 개씩 열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천막으로 돼있기 때문에 안이 어둡잖아요. 조명기구가 필요한 거예요. 양쪽으로 세 가지 총 일곱 가지로 된 조명기구. 그리고 안쪽 방에는 평소에는 안 가는 7월 10일 대속죄일만 들어가는데 여기는 하나님의 돌 판이 담겨있고 금박으로 입한 아카시 상자가 있고 거기에 조각으로 천사가 양쪽으로 강강수월래 할 때 동대문으로 지나가는 놀이하는 것처럼 양쪽에서 보호하듯이 하고 여기는 천사의 수를 놓고. 이렇게 된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겠어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죠. 하나님께서 일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이 장치를 통해서 탕자 같은 너희, 불의한 청지기 같은 너희들을 내가 무사히 넣어주겠다고 하나님 쪽에서 준비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안에 들어가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으로 발음할 필요 없어요. 그냥 믿습니다 하든지, 믿읍니다 하든지 관계없이, 안 믿습니다 하든지 관계없이 이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자체, 그냥 실제로 존재하는 거예요.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그냥 있는 거예요.
이것과 태화강 전선에 앉았던 까마귀와 다르지요. 까마귀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런 게 있어야겠지요. 그럼 우리는 관심사가 태화강 까마귀에 관심 두지 말고 어디에 관심 둬야 돼요? 조류학자는 관심 둘 수 있어요. 자기 직업이니까. 하지만 조류학자가 그것 연구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조류학자든지 과학 선생이든지 관심이 없든지 뭘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연결구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한테 아벨처럼 하나님 손에 장악 되어서 MRI 촬영하듯이 예수 안에, 구원의 연결 속에 빨려 들어가는 중에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두 자로 성도라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이나 성도가 같은 입장이에요. 자기가 만들지도 않고 자기가 계획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준비한 것에 말려들어가고 빨려 들어간 그러한 팔자, 그러한 운명. 호떡을 굽든지 개인택시를 하든지 그건 전혀 문제 삼지 않아요. 호떡 구우니까 지옥 가거라. 개인택시 하니까 천당 가거라. 백수니까 지옥 가고 이런 게 전혀 없어요. 가정주부니까 하고, 가정주부 아니면 구원받아라. 이런 것 전혀 없어요.
당연히 어느 교회 다니느냐가 문제가 안 되고, 당연히 십일조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안 되고. 왜냐하면 사람은 십일조를 할 수가 없어요. 십일조의 근본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인간치고 십일조 한 인간이 없다니까요. 십일조 하란 말은 어떤 인간도 십일조 할 재주가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게 있는 겁니다.
지금 녹화 잘 되고 있어요? 우리교회 생중계 때문에 설교 시간 되면 보통 시험거리가 아니에요. 설교하다가 “카메라 내려갔습니다.” 그게 녹음 다 되고. 생중계 하다보니까 벌써 한 달 넘었는데 안 될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생중계돼야 구원받는다는 게 분명히 아닌데 “생중계 잘 되면 구원시켜줄게.” 그런 게 없다니까. 왜냐하면 성소에는 몰래 카메라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할 일에 그것 때문에 신경 쓰고 짜증나고. 그래서 제 아내가, “당신은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설교나 해라. 설교하다 생방송 안 되니까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 보인다. 당신은 당신 할 일 해야지 이런 것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안 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얘도 있지요, 남편 있지요, 자식도 있고 아내도 있지요. 돈도 벌어야 되지요. 신경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단 말이죠. 우리가 울고 웃고 하는 그 내용이 성소 때문에 울고 웃는 게 아니고 평소에 은근히 노렸던 것이 잘 될 때는 웃고, 잘 안 되면 울고 그래요.
그래서 이런 사례 있잖아요. 씨스타란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를 전에 적은 적이 있지요. 혼자서 티비 보고 혼자서 책을 보고 혼자서 놀고 혼자서 울고불고. 노래제목이 [나혼자]에요. 혼자서 울고불고~ 다리 꼬면서 춤추면서. 못 봤어요? 그게 오늘날 인간들은 누가 자기를 구원할 사람이 없어. 그냥 혼자 울고, 혼자 웃고. 젊은 사람들 다 그래요. 뭔가 의지하는 것도 없고 나 말고 다른 분이 내 인생을 책임진다는 그런 것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 그런 걸 이렇게 합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 이방나라에 소속된 사람은 이방인. 이방인이란 어감 자체가 기분 나쁜 거죠. 내 나라 사람이 아니란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저 구원받습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방나라와 너와의 차이점을 알면 돼.”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태화강 까마귀와 성소, 이것은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고 이것은 구원과 관련 없다는 것을 그 차이를 통해서 알잖아요.
마찬가지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자꾸 이방나라와 하나님께서 마주치게 만들고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 인간 살아가는 것과 나라는 인간 살아가는 것과 도무지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 것이 성경에 입각해서 어떤 차이 나는가를 그 갈라진 틈새가 성경에 의해서 갈라졌음이 보이면 그건 성도고, 갈라진 틈새에서 성경말씀이 안 나오고 그냥 생활상으로 알게 되면, 너는 대충 살고 나는 성실하게 산다. 자기 성실과 대충으로 차이 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한 말씀이 나오지 아니하면, 제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하기 곤란하지만 하여튼 성도라고 보기 곤란합니다.
사는 건 똑같은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준비한 게 올라온다는 거예요. 뛸 수도 있고 밑에서 올라올 수도 있고. 나 자신도 모르는데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우리를 통해서 올라오는 거예요. 우리는 피자의 밀가루고, 토핑은 누가 하느냐? 말씀으로 토핑해주기 때문에.
성경말씀에 탐내지 말라고 할 때 “주님이여, 제가 또 탐을 냈습니다.” 하는 것은 성도고, 성도 아닌 사람은, “나와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돼요. “말씀으로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 나는 말씀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따로 마련한 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나온다면, 성도라고 보기에 곤란합니다. “내가 이런 짓거리하고 이렇게 살아가니까 주께서 따로 준비해야 마땅하지.”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성도지요. 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안 믿기 때문에.
그렇다면 여기서 더 중요한 것 들어가 봅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등대입니까? 등대 하지 말고 보일러를 갖다놓던지, 재떨이를 갖다놓던지. 아까 제가 조명기구라 했잖아요. 조명기구라 했으면 아무 조명기구를 갖다놓으면 되는데 조명기구를 만들라.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거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4절에 나오잖아요.
보통 교인들 이 대목 읽을 때 지루해서 그냥 넘어가든지 훌쩍 뛰든지 뭐 재미있는 것 없는가 싶어서 넘어가지요. 이건 교인들만 그런 게 아니고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고, 지루해라. 목사들은 이걸 읽을 때 걱정돼요. 교인들이 “목사님, 이게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물으면, 관계를 지어줘야 되는데 무슨 수로 관계를 짓습니까? 내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설계한 거예요? 건축학개론도 아니고. 어떡하지? 보통 건축할 때는 설계사가 의미 있어서 다 한 건데 이 설계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 설계도안과 모세한테 40일 동안 알려주신 분은 따로 계시단 말이죠.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내막이 밝혀집니다.
어떤 분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지 “목사님, 왜 하필이면 가지가 여섯 개입니까? 이게 마귀 숫자라서 육입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거기에 대한 정답은 이겁니다. 망하라고 여섯 개 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등대만 만들었습니까? 등대 말고 다른 것 만든 게 있어요. 그게 우리 신체지요. 그런데 우리 이빨은 32개입니까? 등대도 여섯 개 만든 게 의미 있다면 우리 이빨이 왜 33개 아닌데요? 더 나아가서 왜 뒤에는 눈이 없는데요? 왜 귀는 두 개인데 코는 하나밖에 없습니까? 목사 멱살 쥐고 흔드세요. 목사님 성령 받았으니까 그 이유를 알아내세요. 왜 뒤에는 입이 있지 않습니까? 왜 눈은 뒤에 없습니까? 하면, 목사 입장에서는 뒤에 눈 달리면 신경 쓸게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앞에만 달렸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이 시간에 정답을 말씀하겠습니다. 전부다 죽으라고 있는 거예요. 성소는 깨지라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소는 성소 안에 죽음을, 아까 제단에서 제물을 불태운다 했지요. 인간들 보기에는 양이 죽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성소가 깨지면서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앞당겨서 성소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위치와 그 기능은 인간이 자살해도 못 느끼는 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성소에 담아놓은 거예요. 인간이 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까? 이게 전도서에 나오는데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이빨이라든지,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눈이 안 보이는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것만 하고 10분 쉽시다. 갑자기 어려운 것 했는데. 사람에게 눈이 있잖아요. 사람이 본다 이 말이죠. 사람이 볼 때 인간들이 바깥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못하겠는가? 눈을 만드신 분이 보지 못하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귀와 눈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만들어놨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이 눈과 귀로 우상을 보는 거예요. 마귀가 하는 짓을 보는 거예요.
따라서 이 눈과 귀의 기능이 뭐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를 죽음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죄를 지어야 되고 그 죄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기능을 총동원해서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것이 죄를 생산하는 공장 기능하기 위해서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보는 것에 의해서, 듣는 것에 의해서,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탐심과 미움과 질투와 사기를 치고 전부다 우리의 욕망을 보여주는데 온 사지가 작동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이것을 죽여도 우리는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죽을 때 죽더라도 왜 죽어야 되느냐를 이유를 담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기능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이것은 성소의 모든 기능도 같은 이치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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