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2. 22) 1강
광주 강의(2013. 2. 22) 1강
이름 : 서경수(IP:121.176.190.236)
광주 강의(2013. 2. 22) 39-1
에스겔 37장 6절에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여기에 “살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출발지점은 해골입니다. 그런데 ‘이 해골은 죽은 지 오래 되어서 바짝 마르고 뼈만 남았는데, 그 뼈를 하나님이 살리신다.’ 우리는 단순히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10절에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해골은 죽었다가 부활한다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관여하니까 해골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군대는 싸우는 집단입니다. 이들은 원래 전쟁해야 될 사람인데 지금 골짜기의 뼈로 있지요. 그렇다면 ‘이 뼈들이 힘줄이 생겨서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1번 노선이고, ‘뼈인데 하나님이 관여하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 이건 2번 노선입니다.
뼈에서 군대가 되었으니까 뼈의 의미를 알려면 뼈가 되어버린 그 결과로부터 다시 소급해서 방향을 반대로 돌려봅시다. 왜 하나님이 인자(에스겔)를 데리고 뼈들을 찾아갔는가? 이 뼈는 흔히 보는 죽은 사람의 뼈가 아니고, 이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몰살 또는 패배한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뼈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지요.
1번 노선(뼈인데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살아났다)이 아니고, 2번 노선(뼈인데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군대가 되었다)인데, 이것은 본래 뼈들이 하나님 편에서 싸워야 될 기능을 했어야 하는데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에스겔 11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에스겔에서 말하는 새 언약의 취지가 율법을 취소한다든지 폐기하는데 초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신이 우리 마음까지 침투해서 율법을 이루는 이것이 에스겔에서 말하는 새 언약의 취지입니다.
예레미야도 같은 이야기를 했어요. 히브리서 10장 16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또 에스겔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일치된 마음이 된다”고 했고.
그렇다면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압니까? 에스겔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됩니다. 나와 타인은 서로 몸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에 다른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나와 저 사람이 일치된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이런 경우는 양쪽 다 구원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군대는 개인이 아니고 단체잖아요. 그런데 여러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일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들이 군에 입대하면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총 소는 방법이 아니고 제식훈련을 처음에 배웁니다. “앞으로 갓, 뒤로 돌아 갓!” 이런 훈련을 해요. 이 때 100명 또는 300명이 일치된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군대가 전쟁을 하지 군인 한 사람이 전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군대는 지휘관 1명의 지시만 받으면 됩니다. 지휘관 외에 다른 사람은 숫자 1로 쳐주지를 않습니다. 지휘관 한 사람에 복속된 자일뿐이기에 자기를 대표할 숫자를 자기에게 붙이면 안 됩니다. 3, 4, 5를 붙이면 안 됩니다.
항상 1뿐이고, 1은 자기가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명령과 지시를 내리는 지휘관에게만 1이라는 숫자를 붙일 수 있습니다. 여러 명이지만 단수로 취급하는 것, 이것이 일치된 마음, 군대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수가 아닌 하나(1)로 취급하는가?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적이 다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쪽도 1(하나)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짐승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런데 13장을 보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도 매매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광주 150만 인구가 있는데 하나같이 매매할 때는 짐승의 표를 보여주고 물건을 구입한다고 할 때, “당신이 돈 주고 그냥 사면되지 왜 짐승의 표를 보여줍니까?”라고 한다면 뭐라고 답할까요? “쉿, 우리 대장이 다 들어요.”라고 하겠지요.
이걸 현실화해서 보여주는 것이 북한입니다. 간부들은 전부 딱지가 있지요. 김일성 배지(badge)를 달잖아요. 일종의 짐승의 표란 말이지요. 학교나 가정이나 어디에서도 김일성 사진과 그 옆에 김정일 사진이 있지요. 저는 진보당 당원들도 이런 배지를 달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만약 우리 집에 지금 전두환 사진과 그 부인되는 이순자 사진이 있다고 하면 광주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면 “당신 미쳤소?”라고 할 겁니다. “이 집 주인이 누굽니까?” 묻는데 “이 집 주인은 전두환 씨입니다.”라고 하면 미친 사람이죠.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신이 제 정신입니까?” 하는데, 실제로 역사에서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난 게 이상해요. 모든 고대 국가에서.
오직 임금만을 위하여, 임금에 소속된 그런 백성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이순신 장군이 왜 등장했는데요?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거예요. 백성이라는 보편적인 집단은 대표자 왕을 위해 있는 거예요. 천주교 신부들은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교황의 종입니다. 교황만이 예수님의 종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들은 교황이 예수님의 종이라서 교황 안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거죠. 이게 얼마나 구약적입니까? 참으로 구약적이죠.
지금 에스겔은 구약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구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자체를 죽은 군대, 이미 빠짝 말라 해골이 된 군대, 전쟁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군대로 봅니다. 그런데 구약을 안 거치고 그냥 신약적 입장에서 본문을 보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 우리가 해골이라도 주의 신이 임하면 사는 거야.” 단순히 죽은 자신이 다시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여호와 군대로써의 기능, 역할은 다 무시하고 본인만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구약을 거쳐서 보게 되면, 구원 받은 사람 중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전쟁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대장되시는 분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만군’이라는 말은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인데 이들이 그냥 즐기고 놀도록 거느리고 있을까요? 이들이 하는 일은 전쟁하는 것입니다.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이 있고 그 적과 싸우는 것입니다. 이 적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짐승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짐승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 보이듯이 짐승이 보이질 않아요. 안 보이는 짐승을 ‘어떻게 해서 보는 수가 없을까?’ 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짐승을 보게 하는 방법은 이미 다 드러나 있어요. 옛날에 [사랑과 영혼]이란 영화가 있었는데, 이 영화에서 영화감독이 관객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고 애를 많이 섰어요. 관객들의 궁금증이 뭐냐 하면, 죽은 사람의 귀신이 있다면 실재로 우리가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알려 달라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동전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듬직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게 뭐냐? 국가입니다. 왕과 백성들, 국가를 위해 충성하는 모든 자들, 국가가 있으므로 우리가 산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 그 배후에 악마가 있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배후를 드러내고자 시도했던 그 짐승이 로마 밑에 있는 유다의 체계를 가지고 예수님을 조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마귀가 이스라엘로 변신해서 진짜 이스라엘 왕 되신 예수님을 죽인 거예요. 예수님이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왕을 누구 죽인단 말이죠? 현재 유대의 왕은 악마지요. “너희 아비는 마귀다.” 마귀가 유대 왕이 되어서 진짜 유대 왕으로 오신 분을 죽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해골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있는데, 과연 해골이 누군가? 어떤 형사가 범인을 찾는데 결국은 형사 본인이 범인일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형사가 범인을 잡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자신이 교통사고 나서 기억 상실증에 걸리기 이전에 본인이 그 죄를 지어놓고 그 후 자신은 교통사고로 그 기억을 잊었으니까 설마 자신이 범인인 줄은 몰랐지요.
우리가 예수 믿고 믿는 자들과 교재를 나눕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뭘 모르는가 하면, 예수 믿는다는 본인이 예수님을 죽인 범인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성신’께서 우리가 미처 모르는 우리의 과거를 들춰내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을 시킵니다.
본문에 해골이 나오는데 어떤 해골입니까? 빠짝 마른 해골이죠. 바짝 마른 해골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지요. 이야기는 간단한데 이게 왜 어려운가 하면, 성경 말씀을 지킬 때는 반드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내용이라야 실천에 옮깁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이 수학 연습문제를 내일까지 풀어오라고 숙제를 냈는데 아무도 그 문제를 풀 수 없다면 그것은 숙제로써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두 손, 두 발 다 없는 장애아에게 “너 오늘 배운 수학 연습문제 노트에 다 기록하고 풀어 와.” 라고 한다면 이게 말이 됩니까? “연습문제 푸는 것은 다 너를 위한 일이다.”라고 아무리 좋은 취지로 이야기해도 손이 없기에 연필로 쓸 수가 없어요. 이처럼 해골에 하나님 말씀이 주어져서 해골이 힘줄이 생기고 군대로 살아나서 구원 받는다고 성경이 말한다면, 우리는 이 노선에 뛰어들어서 우리가 실천에 옮겨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구원 받고 싶은 생각이 있는데, 문제는 해골 됨이 우리의 체험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말이지요.
빠짝 마른 해골이 될 경우에 과연 그 다음 절차가 우리 머리에 남아있겠느냔 말이지요. “우리가 해골이지만 누워 있으면 되고, 에스겔과 하나님이 와서 대화하고, 그 후에 성신이 임해서 우리가 살아나게 된다.” 이것을 알았다면 이건 해골이 아닙니다.
우리가 체험하고 싶어도 못하고, 체험 바깥에 나와 있는 것부터 출발시킬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노선에 합류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이 노선에 뛰어들지 못한다면 이 말씀이 결국 우리에게는 소용없는 거예요.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어요. 엄마가 아이를 불러 하는 말이 “철아,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어느 날 교회에 갔는데 보자기에 싸여 있는 너를 보고 내가 집에 데려고 와서 지금까지 너를 키웠지만, 너를 낳은 엄마가 누구인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며칠 전에 전화가 와서 너를 낳은 엄마라고 해서 만나서 병원에 가서 DNA조사를 해 보니까 네 엄마가 틀림없더라.”
이 사실을 아이한테 말할 때, 아이는 뭐라고 할까요? “지금 와서 어쩌라고?” 아무리 친엄마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그동안 길러준 엄마에게 모든 사랑이 가있는 상태입니다. 이 아이가 자기를 낳은 엄마를 사랑하려면 다시 출생 전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건 니고데모 이야기와 같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다시 엄마 모태에서 새로 출생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공자의 윤리나 불경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납득이 되는 것은 “나도 그렇게 했으니까 너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체험 바깥의 이야기를 하기에 도대체 지키라는 말인지, 지키지 말란 말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이것은, ‘너의 운명은 이미 네 손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기 1마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칼로 세로로 자를지, 가로로 자를지는 이미 조기의 의견에서 떠났습니다. 가로로 치면 가로로 침을 당하고, 세로로 치면 세로로 침을 당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과정이 어떤가 하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바짝 마른 해골로 돌려버립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오면서 “예수님이 아마 내게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실 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왔을까요? 그런 생각을 했으면 아예 예수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선한 자인데 과연 주님도 나를 선하다고 인정해 주실까’ 하는 것을 확인 받기 위해서 온 거예요. 첫 말투부터 보세요.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했잖아요. 예수님 답변이 “네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선한 분은 하나님뿐이다.”라고 하셨죠.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오고,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왔는데, 그 찾아 온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제자들과 예수님이 불러 세웠잖아요.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누구 높은가 싸울 때 옆에 있는 어린아이, 그리고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들은 스스로 주를 찾아온 것이 아니고 외부 상황이 결국 예수님을 만나게 한 거예요.
이게 바로 주께서 실행하시는 유일한 구원 방식입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면 안 됩니다. 주께서 찾아오셔야 됩니다. 왜냐? 우리는 해골이니까. 자신이 찾아가겠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경험한 것으로 찾아가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이야기는 우리 경험 바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경험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산채로 잘 믿으려고 하지 말고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면 그것이 이쪽 노선입니다. 창세기 1장, 2장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왜? 이미 우리는 창세기 1장, 2장의 인간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서 출발한 인간입니다. 이미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우리 조상이 따먹을 때 이미 우리에게 죄가 들어와 버렸어요.
죄가 들어오기 이전의 경우를 우리가 체험하거나 상상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상상은 기존의 것이 무엇이든 있어야 그것을 바탕으로 상상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꿈에서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은 내 경험의 파편들입니다.
아무리 꿈을 꿔도 창세기 1장, 2장은 생각 못합니다. 그런데 ‘창조과학회’에서는 창세기 3장 이후의 인간이 1장, 2장을 넘보니까, 자신이 증거하는 모든 것조차 죄 지은 인간들의 의견이기에 거기에 죄가 작용하고, 죄는 악마의 힘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힘으로 1장, 2장을 해석하는 겁니다.
성경의 모든 해석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것도 이미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저는 주님 앞에서 죄인입니다.”라는 식의 해석이 나와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로 접근하다가 성령이 임하면 “제가 죄인이군요.” 또는 “나를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예수님이 십자가로 이루셨군요.”라는 고백이 나오지요.
히브리서 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 )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라고 되어 있는데, 괄호 속에 뭘 넣으면 되겠습니까? ‘죽음’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제사장을 볼 때 뭘 전제로 깔고 제사장 일을 하라고 했습니까? “제사장하면서 너는 죽어야 해.” 제사장 노릇 하면서 죽으라고 제사장 되게 하신 거예요.
이 말은, 오늘날 목사는 죽기 위해서 목사를 한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변호사는 죽기 위해서 변호사 해야 되고, 교사는 죽기 위해서 교사를 해야 되고---. 그런데 제사장 수가 많다고 되어 있지요? 수가 많다고 많게 보는 그 체험, 그것이 문제입니다. 제 취지를 알겠습니까? 많다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죽을 건데 많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죽을 인간이 많아봐야 결국 다 죽으면 많다는 의미도 같이 죽지요. “많이 있었는데 없네!” 결국 없음으로 끝나잖아요. 그러니까 제사장은 자신이 드리는 제사가 뭐냐 하면, “나는 없는 존재야.”라는 것을 제사장 노릇을 하면서 보여줘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의 일을 하면서 “애들아, 나는 없는 존재야.”라고 하면서, 그런 취지로 교사의 일을 해야 됩니다.
광주 시민이 150만이라는데,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결국 죽어 없어질 존재니까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산 사람만 찾지 죽은 사람은 수에 쳐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장 22절 이하에 보면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신고로”
그러니까 제사장은 세우면 죽고, 또 세우면 죽고, 계속 죽는데 왜 죽어야 되는가 하면, 예수님만이 영원한 제사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 제사장은 계속 세워지고 죽고, 세워지고 죽고 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체험할 수 없잖아요. 체험은 행함이 동반되지만 체험하지 못한 것을 행동할 때는 그것을 행함이라 하지 않고 믿음이라 합니다. 부자 청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대답을 예상 못했습니다. 만약 부자청년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그것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죠. 왜냐? 자신에 체험하거나 예상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상한 것을 믿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함의 일종입니다. “하나님, 제가 믿는 행위 잘 보여드릴게요.” 이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기생 라합이 평소에 정탐군이 오면 숨겨주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니고, 아브라함이 “아들 태어나면 번제로 하나님께 드려야지” 이런 생각은 꿈에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 2장은 못 합니다. 기껏 하는 것은 3장의 죄 짓는 행세만 할 뿐이에요. 주님은 우리를 죄 짓게 해놓고 그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토대가 어떠한가를 성경을 통해서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우리는 체험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껏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해서 행하기에 우리의 모든 시도는 다 죄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에 예수님께 찾아 왔을 때, 예수님이 “그렇게 착하게 살았어. 어릴 때부터 말씀 다 지켰다고.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있었구나.” 이런 칭찬 들을 줄 알고 찾아왔지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이런 말씀이 나올 줄 예상했다면 아예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험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우리가 염려하거나 걱정하는 것은 우리 분수를 넘어서는 일입니다. 어제 가락교회에서 동영상을 녹화했는데 22강 강의 제목이 “하늘도 무심하시지”였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 십자가 희생 때문에 사는데, 그 희생을 잊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아이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왜 하나님은 내 기도 안 들어주시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까?” 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순간 내가 그런 기도를 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쏟아지는 모든 은혜는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왔을 때, 제자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 원인 규명에 나서지요. 항상 출발점을 자기들이 체험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본인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묻는 것이, 창세기 1, 2장이 아니고 3장 이후 자신들이 아는 내용으로 질문을 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되었다.”고 하실 때 그 이야기를 들은 소경의 기분은 어떠했겠어요? 기분 나빴겠지요. 왜? 누구는 무뿌리 먹고, 누구는 인삼뿌리 먹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이 왜 이렇게 지저분하냔 말이지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배설물이다”라고. 모든 구원 받은 사람은 폐기물입니다. 폐기물로 구원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오물(똥, 오줌 등)을 배출하는가 하면 더 이상 내 몸에 부합되지 않아서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후 무엇을 버리려고 합니까? 나쁜 것, 저주 받을 일, 재주 없는 것 등을 버리려 합니다.
이런 것들을 배출하려 하다가 버린 것이 뭔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뭔가? 그 사회의 폐기물이고 쓰레기며 오물입니다. 그런데 그 배설물 된 분이 우리 속에 들어왔을 때 해골에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절차가 진행됩니다. 만약 토박이만 사는 어떤 동네에 필리핀 여자가 시집을 와서 산다고 합시다. 동네 사람들이 반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동네에 장애자센터, 요양병원, 장례식장 이런 것이 세워지면 주민들이 반깁니까? 아닙니다. 구청에 찾아가서 대모할 겁니다. 이게 뭔가? 건강한 자에게 병든 자는 쓰레기고, 백인들에게 흑인은 쓰레기고, 토착민에게 이주민은 폐기물입니다. 안산의 어떤 동네에 가면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 있답니다.
안산 토박이는 그 동네에 잘 안 갑니다. 왜냐? 쓰레기들이 있으니까요. 어떤 코미디언이 자기 아들에게 “아빠 잘렸어!” 이런 말을 하면서 웃음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쓰레기, 즉 죄, 더러운 것, 나쁜 것은 멀리 합니다. 내가 여기 있기에 나에게서 버려질 것들이 생산됩니다. 그 버리는 것들 중에 예수님도 들어 있어요.
그 절차를 말씀을 통해 소급해서 우리에게 생생하게 알려줍니다. 그래야 십자가로만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도 옛날 제자들처럼 세 번씩 부인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그 사회에서 이미 예수님을 쓰레기 취급 했기에 그 쓰레기와 같이 동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지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물 위를 걸은 사람이 있었으면 예수님이 쓰레기가 안 됩니다. “재주 좋으시네요. 다른 사람보다 빨리 걷네요. 얼마 전에 걸은 분보다 더 빨리 걸으시네.” 이렇게 되는데, 아무도 안 한 짓을 예수님이 하셨어요.
그럴 때 예수님이 존경스럽습니까, 부담되고 거북합니까? 거북스러워요. 왜냐?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세계관, 가치관 이런 것들이 있어서 여기에 부합될 때만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요. 오래전 광주 강의 시작할 때가 불현듯 떠오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실로암 교회’에서 처음 모였지요.
분명히 복음을 전했는데 단체로(복음 전하는 자와 그 복음 듣고 기뻐하는 소수의 사람이) 추방되었잖아요. 그 교회는 나름대로 기준이 있어요. “이런 사람은 받고, 이런 사람은 거부합니다.” 라는 것이 마련되어 있는데 본인들도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었지요.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니까 자신들과 안 맞다는 거예요. 목사와 사모를 중심으로 해서 대다수 사람들이 안 맞다는 거예요.
“예수님, 당신도 내 허락 받고 와야 돼요.” 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 경험 이전의 말씀을 하시기에 경험한 것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예수님 말씀을 수용할 수 없어요. 예수님은 창세기 1, 2장을 가지고 오시는데, 우리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창세기 3장 이후 죄가 지배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 거예요.
죄의 지배하에 있는 인간이 예수님을 반길 수가 없어요. 에스겔은 바로 이 사실을 성신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네가 바로 해골이야.”라고. 이 말 듣고 해골이 깨어나서 스스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 다음 연이어 나오는 절차 역시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들만 골라서 일하십니다. 힘줄 생기게 하고, 근육 생기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기에 이 모든 은혜는 예수님 때문이고,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해골은 그냥 해골입니다. 기도 잘 하는 권사님도 바짝 마른 해골입니다. 이게 에스겔에 나오는 해골 이야기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리 경험 이전의 말씀으로 들이대는 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들이 원초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중간(죄 지은 후)부터 시작하기에 이로 인하여 예수님이 쫓겨난 거예요. 그리고 쫓겨난 주님을 우리가 찾아가는 식이 아니고 쫓겨난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어느 지점에서 쫓겨났는지, 왜 쫓아냈는지 알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언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기안했고, 그 모든 절차를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모든 것이 끝이라고 여기고 제 갈 길로 갑니다. “내 인생 여기서 끝이구나! 공연히 예수님 따라다니다가 신세 망쳤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끝나는구나. 아무 것도 아니었네.” 그러니까 인간은 예수고 뭐고 아무 것도 안 믿습니다. 믿은 것도 나중에는 안 믿고.
그런데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자기 택한 백성을 약속대로 버리지 아니하시고 두 제자에게 찾아오셔서 눈을 열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제자들은 자신이 살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요.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예수님만 자랑하게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3. 3. 5. 16:58 녹취 마침)
첨부파일 : 39-1.hwp (64.0K), Dow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