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동체의 죽음)130214-13강b -이 근호 목사
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동체의 죽음)130214-13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교회-70이레 논문(공동체의 죽음)130214-13강b -이 근호 목사
제 13강b
신앙이라는 것이 가만히 보면 신앙 자체가 신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뭔가 어디 우리가 결국은 말려든 거예요. 하나님께서 전체적으로 하시는 일에 말려드는데 그 말려드는 모습이 우리는 신앙으로 해서 하나님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볼까 이렇게 했는데 그게 아니고 밥 먹고 애 낳고 내 새끼가 최고고 내 가정이 최고라 하는 그걸 주께서 이미 이걸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니가 빌어봤자 니 낌새 다 알고 니 노림수 다 아니까 알고 계시면서 조치는 아는 상태에서 조치를 하셨다는 거예요. 설마 하나님이 내 것 아시겠나, 이렇게 하시지 마시고 이미 우리가 무슨 짓을 할지를 알고 조치는 이렇게 했기 때문에,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구원받는 것은 니가 몸부림치는 걸 근거로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몸부림치든 안치든 상관없이 주께서 따로 마련한 근거에 의해서 너는 일방적으로 영생을 얻은 거예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근거가 예수님 이예요. “예수를 알면 네가 영생이 있으리라”는 요한복음 20장 끝에 나오죠. 하나님이 보낸 자를 알면 너희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것 같은데 하나님,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무슨 폼을 낸다든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주님 앞에서! ‘주님 제 기도 어때요? 제 헌금 어떻습니까? 제 전도 어떻습니까?’ 내 강의 어때요? 내 설교 어때요?‘ 이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같잖죠. 지가 근거도 되지 못하는 게 왜 거기에 신경을 쓰는지. 저 회개 하는 게 제대로 회개했습니까? 또 자기를 쳐다봐요. 이거 회개를 제대로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이미 신경 쓰고 있는데 니가 왜 자꾸 따로 신경 써서 스트레스 슬슬 받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 요약한다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교회나 종교생활이 아니고 삶의 전부를 이야기한다는 것, 정치, 경제, 외교, 과학, 학문 모든 것이 전부 다 신앙의 부속들로 벌어지는 사항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210페이지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페이지 바로 들어갑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을 남은 자로 인정해줘서 이스라엘을 연구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도 연구하게 된다는 그런 식은 곤란하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논문에서 하는 건 뭐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봤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대단하게 보느냐가 안 중요하고, 예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어떻게 봤느냐? 그것은 여기 210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공동체 죽음을 요구하셨다.
공동체 죽음! 아, 이거 미치죠. 내가 아까 첫 번째 시간에 1차 공동체 이야기했죠. 2차 공동체라 하는 것은 국가, 군대, 병원, 학교 이런 것을 말합니다. 그때는 강제성이 있어요. 물론 낚시 모임은 강제가 아니고 그걸 시민단체라 하는데 그건 동의입니다. 동의인데 예를 들어서 합작투자, 주식회사, 동의인데 막상 들어가 보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강제가 되죠. 벌칙이 있고, 회비 안내면 안 되게 돼 있고, 뭔가 동의 같은 느낌은 드는데 이상하게 기분 나쁘게 강제성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런 1차 공동체와 2차 공동체, 결국 이 모든 것은 세상을 장악해서 자기한테 이익이 오겠다는 것인데 주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공동체의 죽음이죠. 이게 마태복음 8장에 나오죠. 너희들이 천국 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너희들이 말했나? 아이쿠, 천국에서 너희들이 그 다음에 너희들이 못 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더 무서운 이야기, 쫓겨난다고 이야기해요. 천국에서 너희들은 다 쫓겨나고 기차 탈 때 자기 자리인지 알았다가 남이 오면 참 민망하잖아요. 자기 자리라고 떡 하니 앉아 있는데 보통 6호차인지 7호차인지 헷갈려요. 7OB인데 6OB에 앉았다가 그런 경우 많이 당하는데 밤늦게 갈 때 많이 있거든요. 술 먹고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데.
천국은 내 자리라고 있는데 ‘비켜줘’ 이렇게 나오면 진짜 민망한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유다나라를 없는 상태에서 하는 게 아니고, 이 말이 제가 하면서도 어려워요. 유다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너, 너, 너 구원받아. 천국 가.’ 이렇게 뽑은 게 아니고 유다나라를 깔아놓는다니까요. 깔아놓으니까 거기서 오해를 하겠죠. 충분히 오해하게 만들어놓고 ‘나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수요일에도 했지만 부산강의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흥부전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하는 모든 행동이 놀부 같다고 했어요. 왜냐 하면 멀쩡한 제비 다리를 분질러 놓고 고쳐주잖아요. 요게 예수님 방법 이예요. 병 주고 약주는 거예요. 아예 처음부터 멀쩡한 게 아니고 병 줘놓고. 그러니까 항의하게 만들어요. ‘하나님, 이렇게 나옵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구약에 보면 욥이죠. 멀쩡한 욥의 자식 열 명이 다 죽게 만들고 재산 다 날라 가게 만들죠. 누가 원망 안 하겠습니까? 원망하게 만들어 놓고 ‘니 왜 원망해?’ ‘어쩌라구’
그러니까 욥이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나를 태어나게 말지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 태어나서 존재한다는 자체를 다시 해석하라 말이죠. 지금까지 나는 나를 위해서 있다는 그 해석이 잘못됐다는 해석이다 말이죠. 그게 안 바뀌면 신앙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는 것이 우리보기는 그냥 편안한 것이고 이게 당연한 것이지만 그걸로 인하여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그 책임을 어떻게 할 거냐 말이죠. 나는 나를 위해서 산다. 니도 그렇게 살지? 됐네. 이러면 문제가 끝난 게 아니고 그로 인하여 다른 신, 우상을 섬기고 악마를 하나님, 예수님인지 알고 섬긴다 이 말이죠. 그것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복음 가지고 외쳐대는 거예요. 사람은 죄를 지으면 그걸 크게 떠들고 싶어 해요. 우리가 생각하기는 사람들이 죄 지었으면 안 들키고 싶어 하죠? 너무 안 들키면 화가 나요. 사람들이 자꾸 범죄 하는 이유가 내 범죄 하는 걸 누가 알아줄 때 범죄 할 맛이 납니다. 범죄를 안 해보니 아나?ㅎ ‘나는 나쁜 짓 했단 말이야.’ 고함지를 때 이건 마치 어떤 심보냐 하면 ‘우리 임금님은 당나귀 귀.’라고 깊은 산에 혼자 외치고 싶은 거예요. ‘주님이여, 나 이런 죄 있습니다.’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한을 푸는 방법도 알고 있습니다. 외치면 풀린다는 것을 알아요. 주님은 너무나 무섭습니다. ‘그 입 다물라.’ 라 합니다. 니 죄 이야기를 이실직고 하란 말이 아니고, ‘니가 죄졌어? 계속 입 다물고 있어.’ 계속 다물고 있어야 내가 고백했기 때문에 용서 받는다는 소리를 안 하잖아요.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니 죄 고백 안 해도 십자가 피를 위해서 죄 짓게 만드는 건데 그걸 모르게 되면 내가 죄 짓고 난 뒤에 차후에 십자가 피가 와서 씻어주는 양으로 십자가 피가 있는 줄 사람들이 오해한다니까요. 이거 천기누설입니다. 이건 진짜 비밀 이예요. 사람의 심보가 그렇게 못됐어요. 너무 안 들키면 술김에 지가 나발 불게 돼 있다니까요. ‘친구야, 내가 십년 전에 잘 나갔다. 근데 그때 사기 내가 했어.’ 말하고 난 뒤에 십년 뒤에 걸려든 게 많아요. 참지를 못해요.
이건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인데 이미 용서라는 걸 했기 때문에 과거까지 들먹일 이유가 없어요. 과거에 내가 금반지 사줬잖아. 그건 하지 마세요. 과거에 그 소리해서 오늘 하나 해 달라 소린데 그거 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를 했기 때문에 지금 살아있는 겁니다. 자꾸 과거 잘못한 거 가지고 들먹여서 지가 회개 하는 착한 사람이라 행세하지 마세요. 그냥 ‘아이쿠, 그냥 공짜로 살았구나.’ 이렇게 속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히히 거리면서 이렇게 사세요. ‘아이쿠, 내 죄 모르는 모양이구나.’ 모를 리가 있어요? 다 알지, 이렇게 다 알지만 모른 척하고 다 넘어가는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간과하신다.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 주는 거예요. 주님의 피의 능력 때문에! 사람이 너무 깊이 회개하는 것도 사실은 자기 자랑 이예요. ‘니 이만큼 회개 못했지?’ 남하고 안 지려고 하는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발걸음을 세신다고 하는 거예요.
공동체 죽음을 이야기했어요. 공동체 죽음이란 말은 하나님의 원리가 이래요. 죽은데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함이라. 이게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우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반드시 구원은 없다가 성립돼야 되고, 죽었다가 성립돼야 돼요. 그러면 없는 것, 죽는 것, 없는 것을 죽은 것으로 없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으니까 말을 하잖아요. 이걸 하나님께서 살은 척하는 죽음이라고 보는 거예요. 살은 척하는 죽음! 오늘도 얼마나 살은 척했으면 머리를 짧게 잘랐겠어요? 살은 척하면서 사실은 주님 보시기에는 ‘주님, 오늘도 머리 커트 했습니다.’ ‘니 죽었어.’ 죽은 자가 커트를 하나 뭘 하나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한 해석은 언약을 통해서만 그게 보이게 돼 있어요. 그걸 요번 수련회 때 뭐라 했느냐 하면 시선이라 했죠. 아까 응시는 꿰뚫어보듯이 지켜보는 것이고, 시선이라 하는 것은 미셀 푸코의 그림 해석에서 나왔죠. 발라스케스의 시녀라는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했잖아요. 시선, 인간이 거울을 통해서 되받아 나오는 것, 그러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말은 남 앞에다 내가 만든 거울을 둔 거예요. 나는 나를 이렇게 보는데 남들도 내가 보는 것처럼 봐줄까?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을 볼 때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거울을 그 사람 앞에 두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생긴 게 뭐냐 하면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도 원할 수 있습니까? 라는 물음으로 다가가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흔히 뭐라 하느냐, 이웃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일방적 이예요. 이웃아, 이웃, 이웃 이리 오세요. 내가 지금 나는 이런 걸 원하고 있는데 당신도 동의할 수 있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 내가 풀었어야 하지만 … ‘니 레미제라블 영화 봤나?’ 이런 이야기, 뭔 뜻입니까? ‘아, 나는 그 영화 되게 재밌는데. 당신도 내가 재밌는 만큼 재밌다 이야기해줘.’ 그러면 ‘나는 그거 재미없던데.’ ‘나 이야기 안 해.’ 이웃 아니에요.
그래서 부부라 하는 것은 계속 좋은 이웃으로 매일같이 이웃으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래서 대화를 해서 자꾸 확인을 하는 거예요. ‘니가 나 좋아하는 것 좋아하나?’ 확인하는 거예요. ‘미쳤나? 그걸 좋아해?’ ‘미쳤나? 그것도 영화라고.’ 아내가 튀박을 주잖아요. 그러면 남편이 어떤지 압니까? 그 ‘미쳤나’ 하는 그걸 자기가 먼저 해요. 내가 아내한테 이렇게 나올 거라 말이죠. ‘미쳤나.’ 하는 그걸 듣고 싶어서 다음 날 되면 ‘니 백수건달 봤나?’ 또 물어요. 그 이야기 하려고, ‘그렇지, 당신 그럴 줄 알았어.’ 지가 예상한대로 했을 때 자기는 존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 미쳤어요. 미쳤어.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몰라요.
남편들이 술 먹고 와서는 자는 애들 깨워서 뽀뽀해주죠. ‘아빠 돈 벌어왔다. 사먹어라.’ 애는 지금 졸려서 자려고 하는데 억지로 깨워서 그 짓하고 있죠. 그게 뭐냐 하면 자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의 자식이 될 때 나는 너에게 용돈 줄 수 있는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 인간은 백날 해도 인간 안 됩니다. 뭘 믿어요? 지만 믿고 사는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걸 행동을 고치란 말이 아니고 살은 척하는 죽은 자라는 거예요. 그걸 고린도후서 5장에서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힘으로써 모든 자가 다 죽은 자다. 그 한마디에 다 들어있어요. 예수님이 죽음으로서, 이 말은 풀이하면 예수님이 대표해서 아버지 앞에 나서보니까 아버지가 ‘니 속에 니가 대신할 자들의 죄가 있기 때문에 저주받아 죽어.’ 이래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예수님 속에 죄가 있다는 말이고, 예수님 본인이 지은 죄는 아니지만, 대신 할 죄, 그 죄가 있는 것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서는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예요. 그러니까 창세기 3장에서 에덴동산 쫓겨나는 것도 생명나무 못 먹게 하는 것도 당연한 거죠.
다시 한 번 창세기 3장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뭐냐, 뭐를 못 따먹었을 때? 생명나무를 못 따먹으면 그건 무조건 죽은 거예요. 살아있어도 그건 죽은 거예요. 생명나무 못 따먹는 게 뭐예요?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뒤에 나오는 벌칙이 있어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하다? “죽으리라”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는 문장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선악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으면 죽는 이유를 생명나무가 와야 이걸 아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 굉장히 난해한 구절이 뭐냐 하면 언젠가 부산강의에서도 했습니다마는 원래 우리가 아는 ‘어둠’이라 하는 것은 빛이 뜨면 사라지게 돼 있습니다. 그렇죠? 제 말 맞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건 뭐예요? 빛이 왔는데 왜 어둠이 계속 그대로 있는 거예요? 이것을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둔 겁니다. 분명히 어두움인데 어두움이 어두움인줄을 모르는 거예요. 그때는 빛이 떠서 그 빛을 핍박을 해야 톡톡히 어두움 값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이 어둡다 하는 것은 누굴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각자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누구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그걸 중앙에 두고 니 꼬라지가 어떠냐를 보란 말 이예요. 모든 게 십자가 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이 아니에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주님만 하나님 앞에 합당한 분이고 우리는 전혀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내 잘못이 아니고 우리 조상이 아담이기 때문에 그 DNA와 모든 걸 받았기 때문에 이건 당연히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해서 인간은 예수님 빠져버리면 인간의 의미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다는 것을 결국 뭐예요? 예수님 믿는다는 것은 내가 구원 따내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 비로소 내가 누군지를 아는 거예요. 그래서 골로새서 2장 16절에 보면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여 주께서 만드셨다”돼 있습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하는 게 아니죠? 그냥 사는 거예요. 살면서도 우리가 왜 죽는지…. 제가 주일 낮에 예를 들었는데 처한테 물어봤어요. 예가 어떠냐? 그거 별로다 해서 나는 별로다 생각하고 있는데, 뭐냐 하면 내가 고등학교 때 공부가 안 됐는데 교실에 햇빛이 들어와서 공부가 안 됐다고 이야기를 했거든요. 햇빛 들어와서 행복한데 공부를 왜 합니까? 그렇잖아요. 햇빛이 따뜻한데, 3, 4월에 제일 따뜻해요. 공부해야 되는데 햇빛이 너무 좋아. 그 자체로서 만족한데 공부 왜 하는데? 나중에 복음을 알고 성령 받고 나서 보니까 행복해도 내 내부는 죽어가고 있다는 거죠. 그 죽는 이유가 죄 값으로 죽더라. 죄인인데 주께서 뭘 주시더라? 햇빛을 주시더라. 마태복음 5장 이야기 아닙니까? 따뜻한 햇빛을 주는데 나는 그걸로 나는 ‘주여 여기가 족합니다.’ 했다고요. 사실은 햇빛 주셨는데 사실은 햇빛을 안 줘도 죄로 응달이 돼야 마땅한데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햇빛을 줬으니까 이것도 원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자기의 속성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때는 모르죠. 은혜 받아놓고 그 사랑 받아놓고 ‘오늘 내가 왜 이리 기분이 좋지? 내가 잘나서 기분이 좋지.’ 이렇게 생각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신앙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날마다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범사에 감사하면서 ‘안 이래도 되는데’ 이러는 거예요. 제가 콩고의 난민이 와서 따뜻한 물이 안 나와서 고치는 걸 보고 보증금 다 빼앗기고 하는 그걸 보면서 콩고 난민인데 치과 의사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한국에서 따뜻한 물 나오니까 그게 얼마나 감사한지, 보증금은 나도 사기를 당했지만 많이는 아니지만 평소에 우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느끼는 그거, 그런데 이걸 성령께서 마음을 낮추게 되면 그동안 놓친 감사가 너무 많아, 그냥 갖다 버린 감사가 너무 많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것은 뭐냐 하면 이런 게 있어요. 이번 주일 낮에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브라함은 언약 폐기물! 아브라함은 언약의 폐기물 이예요. 언약의 폐기물이 아닌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 언약의 부산물인데 버려도 괜찮은 폐기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믿음의 대낄이 아니라, 잘한다가 아니라 본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마음껏 활용당해도 할 말이 없는 폐기물입니다, 라는 거예요.
에스겔 37장에서는 해골인데 누구 솜씨 보여주려고? 주의 말씀 솜씨가 그것도 그냥 해골이 아니라 바짝 마른 해골도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 보여주는 소재거리로 우리가 동원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의 마음을 가져라. 이 마음을 품어라. 이 말은 폐기물 이예요. 예수님은 하나님한테 폐기물 이예요. 폐기물로 우리가 동원됐다는 거예요.
폐기물이란 말은 버려둔 거예요. 로마서 8장 이야깁니다. 내가 아들을 ‘에이 씨’ 버리는 거예요. 누굴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버림을 당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폐기물이란 말들 다른 사람들이 그걸 사용하는 걸 못 봤어요.
지금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공동체는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사실,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죽음을 요구하는 거예요. 아까 하나님의 창조라 하는 것은 반드시 언약대로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데서 살리니까 지금 예수님은 일을 하실 때 출발점을 뭐로 바꾼다?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으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거기에 동원된 대표자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뭐냐, 이런 뜻 이예요. ‘바로 이런 자들이 믿음 있는 자가 아니니라.‘를 보여주는 모델들이 제자들 이예요. 후대 사람들에게 ’그렇게, 그래, 사람들 보세요. 제자들 보세요. 이렇게 이런 믿음이 안 되는 거예요.‘ 라고 보여주는 게 제자들 이예요. 왜냐 하면 제자들은 합숙훈련을 했잖아요. 1박 2일 정도가 아닙니다. 1박 2일은 KBS 2에서 하는지 모르지만 아예 합숙훈련을 해요. 2년 내지 3년간, 그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합숙하면서 예수님이 내뱉는 말을 바로 코앞에서 받아들이죠. 받아들일 때 그 반응보세요. 예수님이 쏟아내는 그 말씀을 반응을 보이는데 요 반응 하나, 하나가 다 죄예요. ’이렇게 믿어서는 아니되느니라.‘ “나는 고난 받고 죽어야 된다.” 베드로가 나서서 하는 말이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탄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지 않고 네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그러면 사람의 일 = 뭐가 됩니까? 사탄의 일. 사람의 일 = 사탄의 일
기껏 인간에게 나온 게 그거밖에 안 나오지, 그게 바로 배후에 악마가 있는 거예요. ‘베드로야, 악마가 너를 지옥 데리고 가려고 청구서를 얼마나 보냈는지, 봐주세요. 저 베드로만 데리고 가게해 주세요.’ 했는데 주께서 기도하심으로서 너는 저쪽에 가지 않고 이쪽에서 계속해서 보호받는 그게 베드로만의 이야기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 이야기입니다. 제발 자기 기도자랑하지 마세요. 이렇게 기도자랑하지 말라 하니까 아예 기도를 안 해.
기도라 하는 것은 반드시 하게 돼 있습니다. 왜냐, 사람이 답답하면 외치게 돼 있어요. 어디 욥이 기도하고 싶어 했겠어요? 쪼니까 기도 안 할 수가 없죠. 하지만 그 기도는 응답 안 된다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밥을 먹는 게 아니에요. 밥을 먹도록 만들게 해놓고 거기 주께서 그렇게 해놓고 그걸 나보고 밥을 먹게 하시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냐, 수동적 자율성이라 합니다. 어렵죠? 분명히 수동적인데 하는 것은 내 자유를 마음껏 발휘해서 하는 것처럼 느끼는 거예요. 이게 수동적 자율성!
그 다음에 봅시다. 자, 그렇다면 210 페이지, 짐승이란 말이 나오죠? 짐승이 키가 몇 센티죠? 마귀가 몸무게가 어떻게 됩니까? 마귀 체지방이 몇 % 됩니까? 이 질문이 성립이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하면 역사적 존재가 묵시적 존재한테 질문 던지면 안 돼요. 반칙 이예요. 천사가 몸무게가 얼마입니까? 천사 몸무게를 손으로 들 수 있는가? 천사도 플라이급이 있고 헤비급이 있습니까?
역사 세계는 묵시 세계로 못 들어갑니다. 왜냐 하면 이미 생명나무 못 따먹고 쫓겨났잖아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묵시적 세계로 가버렸거든요. 생명나무 심었다는 에덴동산을 아무리 고고학이 발굴해 봐요. 그건 역사적인 현장일 뿐이지 묵시적 현장은 아니라는 말 이예요.
그렇다면 묵시와 역사가 만나지 못하느냐, 그게 만나는 경우는 묵시 쪽에서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집어넣을 때 만납니다. 그중에 하나 예가 뭐냐 하면, 원래 당나귀는 말을 못하게 돼 있어요. 두뇌 구조상도 말을 못하지만 Chomsky의 언어학 이론에 의하면 언어라 하는 것은 지가 지어낸다고 언어가 아니고 그 시대에 통시적으로 이미 묵계적으로 약속한 게 있어요. ‘나는 간다 가방’ 이런 식으로 안 하기로 한 거예요. ‘나는 가방을 들고 간다.’ 이렇게 해야 되는데, ‘나는 들고 가방을 간다.’ 이런 식으로 자기 맘대로 나는 자율성으로 해서 지 맘대로 하면 안 되게 돼 있어요.
언어라 하는 것은 서로 소통을 위함이기 때문에 서로 약속이 돼 있어요. 주어 + 동사 +술어, 약속이 돼 있다고요. 그런데 당나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약속 체제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당나귀가 약속 체제에 들어가려면 그전부터 당나귀가 사람의 언어체제 속에 이미 들어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발람 선지자의 당나귀가 뭐라 했습니까? 말했죠. 말했으면 우리 같으면 당나귀를 그냥 놔두지 않고 죽이는 게 아니고 이걸 쇼를 하는 거예요. ‘자, 줄 서시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애들은 가고.’ 해서 약을 판다든지 노인들 돈 받고 관광 오게 해서 당나귀 오게 해서 말을 하게 한다든지, 이렇게 해야 되는데, 뒤에 당나귀가 다시 말을 했습니까? 안 했죠.
또 예가 나옵니다. 뱀이 말을 합니까? 안 합니까? 뱀의 구강구조가 말을 못하게 돼 있어요. ‘쉬잇, 쉬잇’ 하게 돼 있지,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이 뭐라 합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 역사는 우리가 해석할 권리가 없습니다. 묵시가 역사를 임의대로 해석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묵시는 역사의 주도권을 갖고 있어요. 반드시 우위를 갖고 있어요. 대표적인 묵시가 뭐냐, 성령이 바람같이 부는 거예요. ‘나 예수 안 믿으련다.’ 해도 소용없어요. 어느 날 바람이 휙 불어서 모자가 휙 날라 가면 끝나는 거예요. ‘방금 뭐가 지나갔지?’ 성령이 임해버리면 모든 율법을 안 지켜도 지킨 걸로 돼 있습니다.
지난주일 낮 설교에 언 듯 지나가면서 이야기해서 어려운데 주께서는 할례 자를 뭐로 만든다? 무 할례 자로 만든다는 이유는 무 할례는 뭐가 된다? 할례 자로 간주하겠다 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할례 할 때 인간의 행동이 들어갔을 게 아닙니까? 자기가 손댔으면 절대로 무 할례 자가 될 수가 없어요. 자기가 개입했기 때문에.
결국 할례 자를 무 할례 자로 만든다는 말은 인간이 율법 행한 것의 개입이 주께서는 인정 못한다는 말이죠. 똑같이 무 할례, 할례 행한 적도 없는 자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할례 행했으면 할례 행한 게 되는 거예요. 이 중간에 들어가는 것은 뭐냐, 용서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주님의 묵시적인 용서가 뭐보다 세다? 율법 지키느냐. 마느냐. 지키느냐, 마느냐보다 세다는 이야깁니다. 그 증거가 뭐냐,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 이예요. 사도바울은 율법의 최고입니다. 율법에서 최고의 고수예요. 율법의 달인 이예요. 그 율법의 달인이 복음의 달인 돼 버렸어요. 그 가운데 뭐가 있었느냐, 자기 상실이 있었어요. 상실을 어려운 말로 왜상, 왜곡된 상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안 보이는데 삐딱하게 보면 뭐가 보여요. 대사들이란 작품이 있거든요. 거기 해골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정면에서 보면 안 보이는데 삐딱하게 보면 보여요. 요새 나온 작품 중에서 이렇게 보게 되면 눈동자가 따라가면서 보는 그런 그림도 있어요. 정면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나 자신을 비틀어 놓으면 보이는 게 있어요.
주께서 복음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자신을 비틀어 놔버리는 거예요. 잘나도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죄인에게만 뭐가 보입니까? 십자가가 보이죠. 그 말은 십자가의 영이 왔을 때 우리는 죄인이고 참 고개도 못 들고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그때 십자가와 같이 병행해서 보이는 거예요. 죄인하면 십자가가 보이는 게 아니고 죄인 되게 하는 그 작업과 병행해서 십자가가 보이는 겁니다. 이 세상에 지은 죄가 누가 있나, 인간의 모든 지혜는 자기와 관련해서 짓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진리잖아요. 그게 자기는 지혜의 극치예요. 그런데 나는 진리가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누가 진솔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거 누가 왔어. 바람이 불었어. 성령이 온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 앞에서의 내 모습이 그게 진짜 진솔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 때 그렇게 보게 하시면 뭐가 보이겠습니까? 십자가가 보이는 거예요. 그 피가 헛된 피가 아니고 내 많은 죄를 씻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라는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 문설주에 바른 그 피가 이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이스라엘 모든 역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성경역사가 다 보이는 거예요.
어제 쓴 신앙의 샘물에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범죄다.’ 그 글에 나와 있죠. 내가 절대적 주체가 아닌데 절대적 주체도 아닌 게 어떻게 나를 위하여 나를 절대화 시키면서 기도를 할 수 있느냐 말이죠. 그러니 얼마나 건방진 생각입니까? 지가 신이라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지만 내가 분명히 신이 아닌데, 그럼 내 식대로 기도했을 때 응답이 돼 버리면 신이 아닌 것이 신이 계신 세계에 또 하나의 신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잖아요. 그게 마귀 짓 아니에요? 하나님이 계신데 내가 절대적 주체가 돼 버리면 절대자가 몇 명 돼 버려요? 두 명 되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그동안 교회 다니면서 이단 짓 했는지 몰라요. 목사님 욕하지 마세요. 우리가 얼마나 그런 소리 듣고 싶어 했던 바가 또 우리들이잖아요. 십자가 이야기 말고 요런 식으로 하면 누가 복 받더라? 그런 식으로 하면 복 받더라. 그거 들으려고 교회 왔다 말이죠. 애들 공부 성적 올리고 남편 애먹이면 어떻게 하는지. 점치러 가듯이 계속 교회 간 거예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설마 이 백성을 무시하지는 않겠지 하고. 지금도 많이 없어졌다 하는데 계속 생산되니까 문제죠.
이제 공동체의 죽음을 알겠죠.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그게 주님의 작업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등장한 것은 팔 걷어붙이는 거예요. 슬슬 내가 한번 일해 봐? 슬슬 이제 내가 나서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 내뱉는 모든 말씀들은 그들을 이해 못하게 만드는 거예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내뱉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역할은 뭐냐 하면 신자 아닌 자의 정해진 모습을 저희한테 보여주는 줍니다. 그러면 제자들도 신자 아니고 유대인 바리새인도 신자 아니다. 그럼 천국은 누가 가노? 성령이 오게 되면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니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는 천국 가서 면류관도 즐거이 반납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은 이 철칙 앞에서 울어버리죠. 제가 우리 어머니 이야기한 것이 이 이야깁니다. 어머니가 명절 돼서 딱 하룻밤 우리 집에서 지냈거든요. 세수하고 하시는데 집에서 하는 행세를 그대로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 아내가 한 철칙 하거든요. 봐주는 게 없어요. 딱 앉혀놓고 세숫대야 해놓고 이렇게 세수하고 바가지로 이렇게 떠서 이렇게 하시고, 계속해서 잔소리를 해대니까 거기서 울어버린 거예요. ‘니가 며느리가 어른한테 이래도 되느냐.’ ‘어른이고 뭐고 아닙니다. 할 건 해야 됩니다.’ 원칙과 철칙. ‘나 집에 간다.’ ‘가이소.’ 이렇게 된 겁니다. ‘아이고, 당신이 일찍 죽어서 나 혼자 서러움 받고…’
그럴 때 그 대화, 이 모든 상황이 왜 일어났을까? 모든 상황은 복음을 위해서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설교에 놓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주로 말미암아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주께로 도로 돌려드려야죠. 그래서 어머니가 집에 가셔서 전화하는데 얼마나 음성이 밝은지, 혼났다는 거예요. ‘아이쿠, 내 집에 와서 나 혼자 사니 이렇게 편한 걸 하지고.’
그 다음에 짐승이라 하는 것은 바로 몸무게도 없고 키도 없습니다. 묵시적 존재, 묵시적 존재기 때문에 주께서 표현하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서 묵시를 표현할 수밖에 없죠. 그걸 점선으로 표현했어요. 아 참, 다니엘 9장 어렵다. 정말 어려워요. 이걸 여러분들이 다 이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묵시라는 존재는 점선인데 그냥 외부에서는 역사적 눈에 보이는 것들만 접근할 뿐입니다. 이게 물리적으로나 천문학에서는 블랙홀이 특징 이예요. 블랙홀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블랙홀 근처 있는 별들은 이렇게 빙빙 돌고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요. 급하게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 뭔가 삼킴을 당하는, 뭔가 검은 우물한테. 블랙홀은 찍을 수는 없지만 주변의 별들이 시시각각으로 소용돌이치는 속에 말려들어가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저기 블랙홀이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주에는 75%가 암흑 물질로 돼 있어요. 25%가 지금 눈에 보이는데 합해서 우주 무게예요. 그래서 암흑 물질이 어디서 새는가 그걸 구별을 못하니까 중력이 어디서 새는가 구별을 못하는 거예요. 다른 힘들은 규명을 했는데 중력은 어디서 새는지 규명을 못했다고요. 중력을 못하니까 우리 몸이 안 날잖아요.
비행기라 하는 것은 압력과 떨어짐에서 압력의 차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도의 빈 공간 때문에 뜨는 거고 중력 자체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뭔가 우리가 있다, 있다. 이 있음의 전체가 세상이 아니에요. 없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의미나 목적도 존재하는 이유도 몰라요. 주께서는 묵시란 어두움을 여기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내가 한 이야기는, 나는 하늘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너희들은 땅에 속하기 때문에 너희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 요한복음 3장 이야깁니다. 그리고 난 뒤에 하늘에서 온 이는 그냥 온 게 아니고 성령을 한량없이 주기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하늘에서 살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들을 공경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에게는 뭐가 있으리라? 저주가 있다. 는 말이 요한복음 3장 끝에 보면 나옵니다.
참, 예수님의 말씀 보세요. 요새 당회장 아니죠. 완전히 교회 말아먹자는 이야깁니다. 이거는 교회고 뭐고 없어요. 무조건 누굴 믿어라? 나를 믿어라. 그러면 교회 없이도 뭐 받는다? 영생 받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교회 만듭니까? 망하라고 만든 거예요. 그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서 무너지는 그 과정이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입니다. 지금 그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왜 터키 국민들의 95%가 이슬람교인데 현재 그 일곱 교회가 어디나라에 있습니까? 지금 터키에 있어요. 소아시아 아닙니까? 그리스 마주보는 터키 해변 가에 있어요. 지금은 전부 다 이슬람교 예배당 됐을걸요.
그러면 그 교회 필요 없잖아? 아니죠. 항상 있다가도 없어지는 그 과정이 블랙홀로 구원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있다가도 없고, 분명히 내가 살았다고 여겼는데 따뜻한 햇빛 보면서 살았지, 하면서 가만히 보니 ‘왜 이렇게 까칠까칠하지? 머리에 염색을 안 해서 흰머리가 있구나.’ 이 징조가 뭔가 무너져 내려가는, 분명히 나는 복음도 알고 잘 아는데 그냥 무너져 내려가는 거예요.
사람이 서러운 게 전에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자기가 늙어가는 게 서러운 게 아니고 자기 자식이 늙는 게 서러워요. 그렇죠? 자기 늙는 건 용서가 되는데 자기 자식이 늙는 건 용서가 안 되고, 심지어 시집 안 간 자식은 더욱 용서가 안 돼요. 그거 보라고 자식 태어나게 한 거예요. 그들이 늙어가는 게 누구 죄 때문이다? 부모 죄 때문이다. 내가 죄가 안에 있을 때는 묵시적 존재인데 이게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역사적 존재예요. 역사적 존재에서 다시 묵시로 깨닫게 하는 겁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주여.’ ‘아이고, 이놈의 자식아, 내가 죽어야 돼, 하면서 부모가 한 차례 더 때리잖아요. 자식 보고 때리면서 ’내가 죽어야 돼. 이래도 엄마의 심정을 몰라?‘ 하죠.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난데 개체가 다른데 어떻게 알아.‘ ’아유, 저놈의 자식, 키워 놓으면 소용없다니까.‘ 소용없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왜냐 하면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소용없거든요. 블랙홀을 잡아야 되는데 우리는 자꾸 자식만 잡는다니까. 참, 오랜만에 좋은 소리 합니다. 블랙홀, 묵시를 잡아야 되는데 우리는 만날 처자식만 잡는다니까요. 역사적 존재만 잡아요. 자꾸 교회 지 헌금 투자한 십일조 투자해서 지분 얻은 자기 교회, 그거만 자꾸 붙들고 있는 거예요. 목사로부터 교인들이.
지금 우리보고 개과천선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는 여기 합당하게 지금 미지 X 주위를 뱅뱅 돌고 있습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미지 X, 묵시를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예수 안, 또는 다른 구절에 보면 성령 안, 이게 얼마나 난해합니까? 요한 일서에 보면 더 어려운 이야기해 놨어요. 주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있는 근거는 성령이 너와 함께 있음이라. 이건 아무리 들여 봐도 말도 안 돼요. 주님이 눈에 안 보이죠. 그 다음에 뭐도 안 보입니까? 성령도 눈에 안 보이죠. 예수, 성령 다 눈에 안 보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안이라는 것은 바깥 있고 안 있다는 공간 경계 개념 아닙니까? 공간을 안과 밖을 나누는 개념이거든요. 우리가 뭔가 했을 때 컵 안과 바깥, 이것은 우리가 이해가 되잖아요. 왜냐 컵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잖아요. 데카르트 X, Y 좌표 같으면 안과 바깥이 분명하다고요.
성령 안, 성령이 어디 있는데요. 성령이 범위가 몇 제곱미터입니까? 역사적인 질문으로서는 묵시가 포획이 안 돼요. 그러니 성경을 누가 쉽다 했습니까? 윤 집사님이 쉽다 했던가? 진짜 언어는 언어의 한계를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언어로 잘 표현하면 영광 돌린다, 이 말이 아니고 인간은 백날 무슨 소리해도 언어는 언어일 뿐이고, 진짜 영광은 성령 받은 사람은 진짜 사랑을 안다는 거예요. 이 사랑을 어찌 감당해야 됩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 슈퍼스타 오페라에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I Don't Know How to Love Him~♬ 그 노래, 나는 어떻게 당신을 사랑할지를 모르겠다.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
짐승이라는 묵시적 존재가 나타날 때 그 묵시적 존재는 뭘 보여준다? 직접은 안 보이니까 못하고 주변의 묵시적 존재와 같이 돌아가는 그 작당들, 그들을 통해서 진짜 묵시적 존재이면서도 모양새는 역사적 존재로 나타나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저쪽에서는 자꾸 예수님을 역사적 존재로만 이해하는 거예요. 본인들이 역사적 존재니까. ‘이상하다. 저 아버지가 분명히 목수인데’ 그래서 예수님이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 받는 법이 없다. 나도 그렇게 우리 고향에서 내가 메시아 취급 못 받았다. 차라리 다른 고향에서 메시아 취급 받는데 안 된다.‘ 하신 거예요.
그 예수님의 묵시적 존재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철학적 용어로 흔적이라 합니다. 흔적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더 감추는 방법입니다. 흔적! 흔적이니까 없다 할 수도 없고 옛날 뭔가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실체가 나타난 것도 아니고 그 두 가지를 흔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걸 그림자, 또는 모형이라고 표현하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아니 예수님을 왜 안 봐요? 만질 때는 손으로 만졌는데. 만날 예수님 쳐다보고 살았는데, 합숙하고 훈련하면서. 그래도 예수님을 못 보고 있는 거예요.
노래 가사에 이런 게 있잖아요. 사랑이 너무 깊으면 보고 있어도 보고 싶다는 말이 있잖아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거예요. 진짜 그럴 경우 있죠? 오랜만에 휴가 나온 자식 얼굴 보면 ‘그냥 아무소리 하지 마. 그냥 있어. 그냥 보고 싶어.’ ‘엄마, 왜 이래, 시선 따갑게.’
‘아니야, 그냥 좋아. 아이쿠, 내 자식이 살아왔구나.’ 1차 공동체! 유기적 공동체! ‘아이쿠, 내 자식 살아왔구나. 하나님께서 지켜줬구나. 여호수아 1장처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친히 보호해 줬구나. 세상에 전방에 안 빠지고 후방에 빠져서 자주 오는구나.’ 감사헌금 내고.
그 모든 행위들이 바로 블랙홀에 말려들어가는 뭔가 알 수 없는 묵시적 존재에서 이끌려 당겨지는 거예요. 그 당기는 힘보다 더 센 힘이 있어야 우리는 천국 갑니다. 그래서 역사적 존재인 예수님을 안 믿고 무시하는 것은 용서를 받되 장차 올 성령을 훼방하고 안 믿는 것은 이생뿐만 아니고 오는 세계에도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제 이해 되십니까? 역사적 존재, 묵시적 존재.
인자를 무시하고 욕하는 것은 용서를 받되, 왜? 아직 십자가를 안 졌기 때문에. 나중에 묵시적 존재가 돼서 안 믿는 것은 그건 군말 없이 용서가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마태복음 해석은 바로 묵시가 역사에 오니까 역사는 그걸 역사로 오해해서 왜곡되게 해석하는 데서부터 인간은 상실돼야 돼요. 뭔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 잃어버려야 돼요. ‘나는 돈이 있다. 배웠다.’ 이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의미 없는 거다. 하여튼 나에게 나오는 것은 전부 다 나를 망치게 하는 거다. 하는 그런 귀한 것들, 내가 귀하다는 그 자체를 잃어버려야 돼요. 그걸 잃어버린다는 말을 했지만 성경에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다. 하는 말씀이 있죠.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 순간 우리는 잃어버릴 것도 없어요. ‘내가 여기 있나?’ 하는 그 생각도 안 하게 하죠. 주님. 그저 주님 때문에 생긴 그림자입니다. 묵시가 내비친 것이 우리니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이 주도권을 쥐고 우리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자이크 퍼즐 쪼가리들, 애들 그림 끼워 맞추기 하잖아요. 그런 그림들로 잠시 나타났다가 안개처럼 한 90세, 95세, 98세 살다가 나중에 요양병원에서 죽게 되는. 우리는 언젠가는 늙어가야 되고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참, 내 늙는 것은 됐는데 내 죄를 나만 감당하면 되는데 나 때문에 자식이 같이 늙어간다는 게 그렇게 아파요. 그것도 너~무 아파요. 그것도 시집도 안 가고 늙어 가면 너무 아프죠.
그게 우리는 이미 상실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211페이지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참 우리가 말을 하나 안 하나 주께서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는 말을 하나 안 하나 우리 죄를 이미 용서해 가져가셨는데 우리는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걸 순간, 순간 기억을 못합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셔서 주님 앞에서 늘 감사하고 늘 행복하고 우리 자신에게서 스트레스 받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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