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130215b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
안양20130215b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61.100.205.105)
안양20130215b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될 때, 비로소 멸망하는 나라와 같이 멸망 하지 않고 영원한 나라에 주께서 주의 보좌가 계신 거기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중요한 이유는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언약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 땅과 하늘이 유일하게 통하는 입구와 출구 그 역할을 이스라엘이 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 자체가 야곱의 이름에서 나왔고 야곱의 머리 위에 사다리가 있었고 그 야곱의 사다리는 그냥 사다리가 아니고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사다리지요. 요한복음1장에서 예수님께서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한다 했지요. 이제 육적인 사다리는 철거, 해체해 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몸체가 새로운 이스라엘로 하나님의 군대가 등장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고 했는데, 군인들이 평소의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평소에 훈련하는 거죠. 훈련은 그냥 훈련자체를 위해서 훈련하는 게 아니고 어떤 사태가 일어날 걸 예상해서 전제로 해서 훈련하느냐 하면 전쟁입니다. 새로운 나라에 가는 건 좋은데 사람들은 뭐를 싫어하는가 하면, 전쟁은 싫어해요. 전쟁의 가장 확실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 도박판입니다. 카지노 같은데. 다 먹던지 다 털리던지 해야 돼요. 그야말로 도박에 빠진다는 것은 게임하는 재미, 전쟁하는 재미, 전쟁이 게임이거든요. 요새 전쟁은 전자게임이 돼서 미국해병대는 헷갈린다 하잖아요. 앉아서 게임하는 거나 실제전쟁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인명살상을 아주 쉽게 생각하는데서 오는 자괴감 같은 게 있어요. 양심에 가책이 안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사람을 죽였다는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이 깨지기 시작하는데.
전쟁을 하기전 까지는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나 또는 나는 여기 있다, 내가 먹는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다, 나는 지금 노래 부른다. 본능이 나에서 나오잖아요. 전쟁이 벌어지면 적을 파괴하기 이전에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지 않으면 스스로 전쟁무기가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의 기계가 돼야 돼요. machine. 축구선수가운데 축구머신 있지요. 누구 있지요? 차두리. 하나의 기계, 터미네이터처럼 기계로 만든 것, 모든 부속이 쿵쿵쿵 하면서 굴러가는데 전부 다 하나의 기계로 움직이는 겁니다.
구약성경 나훔 찾아보겠습니다. 3장1절~3절, “화 있을진저 피의 성이여 그 안에는 거짓이 가득하고 포악이 가득하며 탈취가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윙윙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보세요. 여기 ‘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의 아름다운 나의 어릴 때 꿈이 있습니까? 기계와 기계의 충돌 아닙니까? 이걸 가지고 어려운 말로 ‘순수한 부정성’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순수한 부정성, 부정은 아니다, 라는 뜻이에요. “아니야, 아니야, 그것도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에 가장 순수한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전쟁입니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끝내는 거예요. 그래서 장정들이 군대 가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뭡니까? 머리를 깎지요. 머리를 깎는다는 말은 자기의 얼굴에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얼굴을 면상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자아가 드디어 없어집니다. 드디어 자아를 생각하면 안돼요. 머리를 홀라당 깎음으로서 하나의 직위로 바뀌는 겁니다. 총만 전쟁 기기가 아니라 총을 든 나 자신이 하나의 기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논산훈련소 제일 먼저 하는 게 총 쏘는 것부터 하는 것이 아니고 제식 훈련하는 거예요. 제식 훈련이라 하는 것은 앞으로 갓, 뒤로 갓, 좌로 돌아 갓, 우로 돌아 갓 해서 개인을 말살하고 오직 명령과 명령에 움직이는 기계, 선반기계, 공작기계, 기계로만 존재하는 거예요.
기계는 또한 다른 명령자에 의해서 기계가 되겠지요. 철저하게 기계가 되어야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전쟁에 동원시킬 수가 있습니다. 옛날 제가 아는 낙후된 코메디에 보면 이런 게 있잖아요. 그 훈련소 하는데 보니까 자기 아는 사람이 동네 형벌쯤 되는 이가 오니까 단체인데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 갓!”해야 되는데 “뒤로 돌아 가이소.“ ”앞으로 가이소.“ 코메디입니다. 실제로 그리하면 안 되지요. 자아가 말살돼야 되는데 아는 동네 형님은 자아가 말살 안 되잖아요. 만약에 아버지가 뒤늦게 군에 왔고 아들이 교관이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버님, 뒤로 돌아가시옵소서. 통촉하나이다.“ 이런 소리 안하겠지요. 여전히 ”뒤 돌아 갓!” 왜? 하나의 말살이에요. 이걸 냉동 동결한다고 했잖아요. 겨울수련회에서. 완전히 기계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는 말은 더 이상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은 기계의 명령자가 누구라는 말입니까? 오직 예수님이라는 말이에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자아가 말살해야 되는데, 말살하는 방법이 전쟁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이것부터 난해하기 시작하지요. 어떻게 전쟁을 하는데 자아가 말살하고 자기가 부인돼야 되는가? 여러분, 전쟁이 혼자서 하는 전쟁이 없지요. 전쟁에서는 반드시 적이 있잖아요. 최소한 대립되는 두 패가 있어야 전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가끔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유흥업소에 있는 여자들이 아침에 손님 없을 때, 다리 내놓고 치마 휙 걷어 올리고 화투 치는 거 나오잖아요. 한복입고. ‘오늘도 한 번 점괘나 보자.’할 때 누구하고 칩니까? 술집마담이 누구하고 쳐요? 혼자 쳐요. 혼자서. 전쟁은 대립이 될 때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된다 했지요. 야곱이 형 만나기 전에 ‘마하나임’이라는 천사의 집단을 만났는데 마하나임 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군대라는 천사중의 한 분이 얍복강가에서 야곱을 하나님의 원수로 간주해서 씨름을 하게 되는 거죠. 자기가 복 받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군대한테 충돌해야 될 잘못된 개념이에요.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야곱은 죽고, 야곱이 죽은 그 현장에서 누가 산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간에게는 상처가 있어야 돼요. 상처라 하는 것은 상처당한 그 자리에서만 치료된다고 주일날 얘기했잖아요. 주님으로 인하여 십자가로 인하여 상처 받고 십자가로 인하여 용서받고 구원 받는 영생을 얻는 유일한 지점은 십자가밖에 없어요. 십자가로 상처를 줬다 하는데 상처를 줘야지요. 상처가 있어야 구원이 비로소 눈에 보입니다. 환난가운데 소망 있듯이.
여기서 어렵다하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나열해 볼게요. 이 세상은 갈 데가 없고 무너진다. 예수님의 주의 보좌는 영원하다. 그럼 무너진다면 그냥 무너지라고 기다리는 인간 아무도 없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게 되거든요. 그냥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 인간이 살아있다고 여겼는데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리기 위해서 주변의 자연환경을 기대게 됩니다. 자연환경 가운데 날씨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땅, 하늘 다 포함되는 겁니다. 땅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땅은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자연의 말을 들어요. 돼지, 소 키우는 사람이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돼지 값, 소 값 내려갈 때 힘들지만 이건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 사료줄 때 제때 주지 않으면 사료 값도 안 나오고 손해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게 뭐냐, 돈 벌기 위해서 결국 돼지가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거는 내 마음이고. 돼지는 자연의 말을 들어요. 말이 뭐냐,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돼요. 계속. 돼지는 내가 키우지만 사실은 나나 돼지나 전부 다 누구의 법칙 따른다? 대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거예요. 자연의 법칙에.
딸만 있어 아들을 원하는 사람들이 답답한 게 그거잖아요. 내가 아들 원한다고 아들 낳는 게 아니고 낳으면 딸, 딸, 딸, 전부 딸 낳으니까 언제쯤 아들을 보겠느냐 이렇게 된다 말이거든요. 그러니 인간이든 돼지든 누구든 간에 전부 다 이미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대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살아있는데 더 살기 위해서 자연과 타협을 하다보니까 나온 게 뭐냐 하면, 어제 내가 국가라고 얘기했지요. 국가는 바로 정치가 되는 겁니다. 정치라는 것은 질서 잡는 거예요.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부자 되지 말고 가난한 사람에게 도와주고 이게 정치거든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하는가 하면,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군대가 있는 반면에 인간이 살기 위해서 자연과 더불어 정치가 있다 이 말이지요.
이런 국가도 있고 저런 국가도 있다. 그러면 그 나라 그 땅은 안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 언약이 있는 군대를 누구하고 전쟁을 붙이는가 하면, 일반 국가와 전쟁을 벌이시는 거예요. 그러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지요. 제게 이야기해 보세요.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내가 하루만 살고 그만 죽을 거 아니잖아요. 살아있는 것이 추진력이 있어 가지고 살다보니까 계속 살고 싶네요. 자전거는 달리고 있으면 계속 달리고 싶은 거예요. 장애가 있을 때만 멈추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속 달리고 싶은 거예요. 나는 계속 달리고 싶어요. 계속 살고 싶어요.
사는 방법은 자연환경, 땅이 있어야 되고 비가 적절이 와야 되고 햇빛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내가 약한데 내 옆에 도둑놈이 오면 안 되고 고추농사 500만원, 800만원 몽땅 날리면 안 되잖아요. 지금도 경상북도에서는 지금도 많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그 도둑놈을 잡아주고 CCTV로 잡아주고 하는 국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질서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정치라 했지요. 정치. 토지보상금 문제, 국가유공자인데 장학금 몇 대까지 줍니까? 이거 전부 다 누가해요? 국가 공무원들이 해야 될 일 아닙니까? 의료보험인데 이빨 고치는 거는 왜 안 되고 치석제거는 왜 안 됩니까? 이런 문제, 이건 하자하는 이런 결정도 정치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정치가 좋아서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누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살기 위해서 여유롭게 안정되기 살기 위해서 정치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이 말이죠. 바로 이 나라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국가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가 이 보통국가를 옹호해 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만 생겨난 하나님의 군대와 이들의 군대와 전쟁을 벌려 나가면서 그동안 눈에 띄지 않는 생명나무에 있는 천국이 이 틈 사이에 보이게 하셨다, 라는 말이지요. 이제 감 잡으셨습니까?
주의 보좌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보좌가 새록, 새록 냄새를 피우면서 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떻게 오해했는가 하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군대야. 이것은 딱 이스라엘 여기다가 이름을 새겼어요. 이스라엘.
그리고 다른 나라는 언약이 없기 때문에 ‘아, 그거는 이방나라’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군대는 이기고 결국은 저들의 나라는 멸망한다, 모든 구약성경에 다 적혀있으니까 그러니까 메시아는 누구 편에 선다? 우리 이스라엘 편에 선다. 그러니까 이방나라야, 너희들 죽기 싫거든 할례 받고 안식일 지켜라, 우리 유대에 편입은 시켜주되 정식은 아니고 계약직으로 해줄게. 이런 식으로 했던 요런 아이디어, 예수님은 이런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사람보고 “너희 애비는 악마다.” 이게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요. 그들은 구약을 달달 외우다시피 삽니다. 실컷 외우고 해석 다했는데 주님께서 평가하기를 심판주가 평가하기를 “너희 애비는 악마다.” 그러면 이 해석 말고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 나오지요.
간음한 여인 현장에서 돌로 쳐라, 라고 해서 돌로 치는데 결국은 결과적으로 아무도 그 여자를 향하여 돌 던질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 이 무슨 조화입니까? 우리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성경말씀 지키면 율법 지키면 언약백성 되어 우리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다 탈락해서 지옥 간다고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라면 그게 옳지 않다면 그럼 뭐가 옳은데요? 그럼 우리가 이쪽편도 아니고 어느 편을 서야 되는 돼요? 이런 구조를 어떻게 그려야 되는 돼요?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그려야 되는데? 우리가 구약성경을 건성으로 읽었다 이 말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군대라고 여겼던 이스라엘의 내부가 적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이 내부전체가 언약으로 하나가 돼 있어야 돼요. 이 점을 놓치면 안 되는 거예요. 적들이 물러가고 패배하는 것은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냥 효과에 불과한 거예요. 이 쪽 내부가 온전하게 언약에 의해서 지배를 받느냐가 관건이지 이스라엘나라는 그냥 이스라엘나라 되면 적들은 그냥 애초부터 없는 존재가 돼서 허물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리고성 함락작전 아닙니까? 우리 사람들보고 여리고성 돌라 하면 여리고성 돌면서 얼마나 고함지르겠어요. 돌을 던지면서 “너희들 말이야, 알아서 해!” 했겠지만 제사장은 어디에 몰두하라, 지금 몇 바퀴 돌았느냐 거기에 몰두하는 거예요. 나팔소리에 몰두하고 앞에 우리 중간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에 몰두해라, 왜냐 하면 이 전쟁은 우리가 치를 전쟁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보는 우리를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아까 그것을 말살이라 했지요. 나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장치를 하려면 바로 제사라는 것이 나 대신 앞장세워져야 된다는 겁니다. 제사는 바로 “너는 죽어야 돼!” 이게 제사 아닙니까? 양을 안수할 때 양을 그냥 보내는 게 아니고 양에다가 손을 얹고 양을 안수한다 이 말이지요. 그럼 양은 메에~하면 우리도 손을 얹었기 때문에 우리도 따라간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양이 제단위에 올라가면 우리도 같이 사실은 이미 실질적으로 제단 올라 가지고 밑에서 불을 확 질러서 양이 악~하고 꼬면 우리도 같이 꼬는 게 된다 말이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예수님의 죽으심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되게 한다 말이지요.
중요하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는 전쟁은 결코 나의 전쟁이 아니무니이다가 돼야 돼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기드온이 전쟁하기 위해서 사람 모집하니까 2만 2천명이 왔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최종적으로 300명만 남았지요.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 봅시다. “73명 중에 72명 집에 가” 달랑 1명꼴로 채택된 거예요. 기드온은 환장할 지경이에요. 기드온이 만약에 개척교회 목사 한다면 22,000명이라는 교인이 크게 확장할까, 말까하고 있는데 밤에 꿈에 나타나가지고 3명만 남기고 다 보내라, 할 때 22,000명의 큰 교회 목회자는 그 자존심은 어떻게 돼요? 그리고 나머지 “300명에게 전부 다 지시해“ “주여, 어떻게 지시할까요?”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도 일한 것도 없이 삼종세트 외쳐야 돼요. “하나님, 그렇게 하면 진짜 일 안합니다.” 그렇잖아도 일을 하라고 해도 안하는데,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하면 아무도 일 안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해!”
“여러분,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구원받습니다.” 했다 합시다. 제가 전에 예를 들었지요. 300명모인 교회에 복음전하니까 7가정 남았다가 다 갔지요. 나머지 300명도 다 갈 가능성이 있어요. 비록 목사는 목회에 많은 상처가 있어야 상실이 있어야 비로소 천국이 보입니다. 그동안 교회가 목회가 뭘 막았습니까? 자기 천국 가는, 자기의 고향을 막아 놓은 거예요. 망해가는 그 타향이 앞을 가린 거예요.
아까 홍콩이야기 했잖아요. 홍콩 이야기하니까 갑자기 홍콩의 전경이 생각나는 거예요. 영화에 ‘도둑들’보면 마카오 홍콩 나오지요. 그 홍콩의 화려함, 그것 때문에 혹시 천국을 가리고 있지 않은가 퍼뜩 생각이 났습니다. 몰라도 머리가 길어가지고 엄마도 홍콩 가서 살래, 좋겠다! 홍콩이 세계에서 집세가 제일 비싼 곳이에요. 그 좁은 땅에 보세요. 300만 살라하면 얼마나 비싸겠어요?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기드온이 결국 300명가지고 총을 쥔 것도 아니고 칼을 쥔 것도 아니고 이건 대장간의 쇠 굽는 것도 아니고 왠 횃불, 어디 발렌타인데이 축제하는 겁니까? 할로인데이, 호박 들고 사탕주세요. 귀신놀이 하는 것도 아니고 칼이 있어야 사람을 죽이지요. 이건 도저히 상식이 안돼요. 하나님의 군대는 시편에 나오듯이 나는 칼 의지하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는 기병대가 최고였어요. 징기스칸이 왜 큰 제국을 이루었는데요? 마상, 말을 타면서 활을 쏘아대는 거예요. 정지된 대포하고 빨리 움직이는 대포하고 누가 이깁니까? 대포로 누비면서 다 부셔버리는데. 그게 헝가리까리 밀려왔어요. 훈족이. 그래서 헝가리 나오면 훈에서 나왔다고 헝가리에요. 폴란드 헝가리까지 밀려온 거예요.
그 횃불하고 항아리 들고 있었잖아요. 그게 무슨 전쟁이 됩니까? 이쪽에서는 인간의 승리라 하는 것은 힘의 집결, 하나의 움직이는 기계, 아까 나왔지요. 굉굉, 휙휙, 활 쏘는 소리 쉭쉭,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군대는 제식 훈련할 때 “앞으로 가!”할 때 일사불란하게 같이 움직여야 되지, 앞으로 가하는데 하나는 가고, 뒤에는 영구 없다! 해서 바보 같은 인간이 따라오면 일이 안돼요. 적들이 “거기 아무도 없지” 하는데 바보가 “저, 여기 있는데요.” 하면 완전히 몰살당합니다. 군에서는 옳고 그름이라 하는 게 판정을 자기가 판단하지 말라, 해요. 군에서 자살하고 군에서 힘들어하는 사람 있지요. 그게 뭐냐, 자기를 몽땅 잃어버리는 게 싫어서 그래요. 자고나면 자기 것이라는 것을 쥐고 싶어서 그런데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계속 압박으로 그것마저 손 놓으라고. 양복도 못 입고 전부다 군복입고, 군화신고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시편에 보면 나는 말이나 병거를 의지하지 않고 애굽의 말도 의지하지 않고 난 누구만 의지한다? 총사령관 이름이 누굽니까? 주의 이름이지요. 아들이지요. 천사로부터 존경받는 하나님이 친히 낳았다는 그 아들, 그 아들이 주의 이름으로 이미 구약부터 군대를 조직한 거예요. 군대를 조직했을 때, 하나님이 여호와가 대상이 되는데 누가 이기리요. 그런데 적들은 문제가 되질 않아요.
광야에 들어갈 때, 내피림이 있었지요. 내피림의 특징은 뭡니까? 보통사람의 키보다 큰 사람들이에요. 창세기5장에 보면 내피림이 급성장합니다. 어떤 사람은 홍수로 내피림이 다 멸절했는데 왜 살아있지?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건 기존의 DNA를 자꾸 생각해서 그런데 성경은 DNA를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지역으로 생각해요. 내피림이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이 내피림이고 주께서 키를 키워주면 더 크게 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를 할 때, 그들은 장대 같고, 이쪽은 메뚜기 같지요. 하나님께서 이왕 들여보내 주시는 거 좀 쉽게 안 가게 하시고 그렇게 들어간다면 가지, 왜 쉽게 안 해줍니까? 다 들어갈 사람은 이다? 아니다? 다 아니다. 우리는 혈통적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맞습니다. 아니거든요. 혈통적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거든요. 내부적으로 혈통적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믿는 사람과 우리 혈통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아니라는 것이 내부에서 싸움이 벌어져야 돼요. 전쟁이라 하는 것은 바깥에서 전쟁하지만 실제로는 언약의 바른 취지 안에서 전쟁이 일어나야 돼요. "칼 들고 칩시다.” “기드온은 횃불과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기드온님, 횃불과 항아리가 왜 전쟁에서 이기는지 논리적으로 설득해 보세요.” 기드온이 하는 말이 “나도 설명 못해. 왜? 내가 사령관이 아니거든. 나는 사령관의 졸다구다!”
사도 편지에 제일 첫 마디에 뭐로 돼 있던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뭐다? 종이죠. 종이 왜 그리 신경 씁니까? 이상해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잖아요. 그러니 누가 중요해요? 예수님께서 로마서대로 일한다가 중요하지 사도바울은 이런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이 안 중요해요. 하나의 종이라 하는 것은 종을 보지 말라고 종으로 세운 거예요. “여러분, 누가 보여요?” “사도 바울님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날 보지 말라고 이런 뜻이란 말이지요.
고린도전서1장에 보면, 나는 내가 십자가 안 졌다. 내 이름으로 세례 준적도 없어. 그런데 왜 자꾸 나를, 나는 사도바울에게서 세례 받았다. 해서 정당을 형성하느냐, 파를 만드느냐 말이지요. 감리교는 뭐고, 침례교는 뭐고, 합동측은 뭐고, 통합측은 또 뭡니까?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밖에 없어요.
주의 이름이 적들을 칠 때, 내부의 주에 이름이 결국은 내부적인 전쟁을 늘 상 한바탕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경우에는 승리가 돼요. “그럼 목사님, 그들이 하나로 일치단결해서 군대가 된 적이 언제 있습니까?” 언제 있었느냐 하면 두 자로 ‘금식’있지요. 사울 때, 사무엘 때, 막강한 블레셋이 왔을 때 그들은 지레 짐작 나자빠지지요. 하나님은 해도 해도 너무 하신다. 우리 숫자가 얼마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갑자기 들이닥칠 때, 남편 월급 얼마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갑자기 빚이 25억 있다. 어쩌라고? 감당이 안 되잖아요. 그 때 그쯤 되면 못했던 기도를 몰아서 다 하지요. 당일치기해서 시험 치는 격이지요. 그 때는 사람의 기도는 한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안 할 수 없게 만들어요. 그동안 억눌린 거, 하나님 앞에 서러운 거.
오늘 채 두식 가정 만났는데, 6살 먹은 딸애가 얘기해요. “목사님, 하나님은 왜 내 기도 안 들어 주시는데요?” 이리 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내가 그렇게 기도하고 간절히 예쁘게 기도했는데 왜 내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답변했어요. ”먼저 기도한 착한 애들이 더 있었기 때문에 그래, 니가 착해? 그러면 니가 미리 예약해야 돼. 니보다 더 착한 애가 니 기도하기 전에 착한애가 먼저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 애의 기도를 먼저 들어주신 거야.“ 제가 그렇게 하니까 차타고 가던 아빠, 엄마 말이 ”얘야, 이 세상은 망하게 돼있고 ....“ 복음을 말해버려요. 6살 아이에게 충격을 줘버려요. 그래서 수습에 나섰지요. 수습에 나선 것이 ”하나님은 이미 줬는데 니가 자꾸 준 것을 버리고 안 줬다고 생각하고 자꾸 기도하니까 이미 너에게 준 것을 찾아보라고 하신단다.“ 허겁지겁 수습에 나섰어요. 자칫하면 6살 먹은 애가 허무주의에 빠질까 해서.
하나님의 군대는 이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잘 믿습니다. 백날 말해도 하나님은 안 믿어요.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너무 잘 알아요. 믿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센나라 의도적으로 강성한 폭풍이 오게 해서 전에는 건성건성 기도했다가 이거는 진실 되게 기도하게 되면 그 진실 된 기도가 뭐냐 하면, 주 앞에 반항입니다.
진실 된 기도란, 못 다한 주님에 대한 욕설입니다. 울고불고.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나보고 더 이상 어쩌란 말입니까? 기도하라하면 기도해, 헌금하라하면 헌금해. 복음하라 하면 복음 해. 어떻게 이런 일이.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습니까? 로마서 4장 잊어버렸지요. 일을 안 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 그 때는 안다 했는데 막상 현실문제로 들이닥치니까 “에이, 내가 다시는 성경 보나 안보나 보자. 로마서4장 에이~씨, 내가 성경 보면 성을 간다.” 이런 식으로 악에 받쳐서 나오지요. “나온다. 나온다. 드디어 방앗간에서 떡이 나오는구나!” “그래, 죄 덩어리가 나오는구나!” “그래, 나는 죄를 생산하는 성령이다.” 용서가 뭔지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동안 죄도 안 짖고 용서받으려하는 그 염치를 없애버리고 충분하게 죄 지어서 본색 그 7귀신이 외마디 외치는 그 비명소리 그게 속에서 경쟁하듯이 튀어나옵니다. 가만있어봐 내가 이야기할게. 하나님 이렇습니다. 아니야, 내가 할게. 왜 자식은 이렇고 남편은 이렇고, 저렇고 온갖 거 다 튀어나옵니다. 그게 우리가 그동안 세상에서 망해야 될 미련이 롯의 처와 같은 미련이 우리의 긴 머리카락이 여전히 씹던 껌으로 감기고 있었던 거예요. 강렬하게.
주께서는 항상 주님의 준 문제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는 문제를 내요. 그래서 우리의 신앙심가지고 이겨내 보려고 하는 그걸 당황하게 만듭니다. 당황하게 만들면서 우리한테 상실을 오게 해요. “나, 이제 믿음생활 안 해요.” “언제는 믿었나?” 안 믿었거든요. 여기서 우리에게 구멍을 만들지요. 인간은 껍데기는 번질 하지만 들쳐보면 누구나 허한 구석이 많아요. 그걸 감추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 그런데 이 쪽 세계에서는 뭐로 감춥니까? 정치로 감추지요. 윤리와 도적으로. “나는 법은 지켰습니다.” “나는 파란불에는 건너가고 빨간불에는 절대로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는데 양쪽이 빨간불이라, 그런데 남편이 용감하게 걷는데 권사님은 건너지를 않아요. 뭔가 법을 지키는 것이 나 같다는 생각인데 법을 지키면 뭐합니까? 40억, 60억 부도나는데. 부도 앞에서 법 지키는 것이 무슨 효력이 있습니까? 목사 넥타이 사드리고 목사 잘 섬기고, 막상 집안에 차사고 나니까 이게 효과 있던가요? ‘차라리 괜히 사줬어.’ 이런 거.
이 이방나라의 요소와 전쟁을 붙이는 이유는 이 적이 사실은 여기 하나님의 군대 안에 이미 여기도 잠식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뭔가 전쟁을 한다는 것은 적이라고 보면서 같은 동질성을 느끼는 ‘제게 바로 적인데도 불구하고 예수 안 믿는 거 빼놓고는 똑 같네.‘ 노는 사고방식이 똑같은 거예요.
사람이 결과를 미리 알게 되면 굉장히 아무리 착한 것도 후회해요. 괜히 착했어. 안 착해도 되는데. 애가 시험을 치는데 내일 발표인데 갑자기 부모의 행동이 경건해집니다. 나쁜 마음 먹지 않고, 나쁜 생각 안하고, 갑자기 기도 시간이 길어지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고, 욱 욕하다가 아니야, 내일 시험이야, 그런데 막상 해보니까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애가 합격했어요. 그럴 거 같으면 어제 욕 할 건데. 욕하나, 안 하나 결과와는 상관도 없는데 이미 애는 시험 봐서 문제가 이미 대학당국 사무실에 들어갔을 거고, 내가 욕한다고 시험문제가 78점에서 98점으로 바꾸는 것도 아닌데 괜히 욕 안했어, 마음껏 나쁜 짓해도 괜찮은 거 가지고 괜히 졸았네. 이리 나온다고요.
그런데 앞으로 또 그런 일 생기면 갑자기 또 경건해지지요. 이런 인간적인 요소, 이런 변덕쟁이, 저는 옛날 가요 가운데 이 노래가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게 있어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돈 없는 건달이 요리 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이리 되잖아요.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할 때 빈대떡이 얼마나 비쌉니까? 그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거예요. 옛날 정서에서 빈대떡이 헐었다는 이야기잖아요.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구약성경 나름대로의 그 시대의 정서가 있어요. 정서가.
그게 성경에 표현되어 있으니까 성경해석하면서 바로 그런 것을 감안해야 돼요. 이걸 너희들이 하라, 하는 말은 이것은 못했다는 징벌로서 하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을 안 믿었기 때문에 기껏 이런 짓들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정서를 모르고 마치 그 짓 안하면 복 받 는 줄 알고,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니가 왜 안식일날 금식하면서 왜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으면서 금식해봤자 그게 안식일 지킨 것이 아니라는 것 나와 있지요.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고아원을 돌보면 그게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약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어떻게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지요. 십계명을 준 것은 그 당시는 십계명을 지켜야 이게 축복이고, 못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그 당시 정서였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그걸 이해못해가지고 ”하나님, 이제 성령 받아서 지킬게요.“ 하고 나온다면 그것은 전혀 엉뚱한 소리예요.
십계명은 우리는 바로 못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십계명이 있는 거예요. 지키지 못할 법을 보고 니가 백날 지켜봐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한 것은 우리가 행하지 못한다는 걸 명령한 거예요. 하나의 행하지 못한 것을 행하라, 이게 명령입니다. 율법의 명령. 율법의 명령이란 니가 하지 못한 것을 행하라는 뜻이에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너가 하지 못할 그것을 어떻게 하라? 행하라. 그럼 나오는 것은 뭡니까? 결국 나는 못했습니다가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 이 정도는 하기 싫다.” 이리 나오니까 율법의 취지와 다른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라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죄인인 걸 알아요. 그런데 누가 모르느냐, 본인이 몰라요. “아, 저 어린 양이 매일같이 연기 피우며 죽지?” “뭐, 쓸데없는 짓 하고 있어. 돈이나 주지.” “아, 돈이나 주지, 어린 양은 왜 죽이는데?” 우리는 모른다고요. 그게.
나중에 진짜 성령 받고 보면, 아! 돈으로는 못가요. 하나님의 나라. 못가도 좀 주지. 이 집이 500억이라는데 270억이라도 좀 주지. 어제 제가 만났던 분이 헬스장을 한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온답니다. 오는데 한 결 같이 뭐냐 하면, 돈을 더 벌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다 잘살고 여유 있는 사람인데. 맨날 돈, 돈 때문에. 그렇게 고민이 많답니다. 주의 보좌는 영영하지만, 이 세상은 옷과 같이 낡아가지고 문드러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자체적으로 갈 데도 없으면서 그냥 자전거 타고 뱅뱅 도는 것처럼 돈, 돈하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유일하게 벗어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이 ‘하나님의 군대’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라 해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다!”하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고 주님이 언약으로 군대 되게 할 때만 군대인데, 주님의 군대 되게 할 때는 반드시 혼자서 도 닦아서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감당 못할 엄청난 적을 앞에 붙여서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이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사실, 우리가 원하는 효과를 낼 수 없는 그런 것들을 마치 믿는 것처럼 여겼다는 사실 “우리는 믿음조차도 없습니다.“ 라고 무너질 때 비로소 우리 앞에 용서가 보이는 겁니다. 십자가가 보입니다.
십자가를 믿었다는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십자가가 보일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의 이름이 보는 견해와 우리가 주와 함께 있다고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견해가 이렇게 달라요. 어제 했잖아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짜 사랑받은 사람은 ‘아이고, 나 같은 것을 왜 사랑했어요?’ 이리 나와야 된다니까요. ‘정말 짜증나, 나 같은 것을 왜 사랑해서 나를 왜 천국가게 하는데요? 진짜 골치 아프게.’ 모든 일을 범사에 만족하려 하는데, 자꾸 적들을 보내 가지고 내가 감당 못할 적들을 보내는 겁니다. 아까 유치원 애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왜,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라고 하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뜻대로 안되고 주의 뜻대로 잘돼가고 있는데 이게 내 뜻하고 안 맞는다고 짜증을 내고 있다 이 말이지요. 이게 무슨 앙탈입니까? 그 나라가 내 나라입니까? 주님의 나라, 주님이 마음대로 하는데 우리가 거기서 앙탈을 부리느냐 말이지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천국 같으면 천국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됩니다. 예복 주는 것도 안 입고 그냥 가다가는 진노를 받습니다.
자, 그 다음에 넘어가 봅시다. 13절,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 말씀이 어렵지요. 말씀이 어렵다는 말은 이 말씀을 왜 여기다 넣어야 되느냐 그 이유를 아는 게 어렵다 이 말입니다. 주님의 우편에 있다는데 주님의 우편에 있겠지.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 왜 우편에 계셔야 합니까? 왜 좌편은 안 됩니까? 하고 따지는 것이 중요한 거예요. 주님이 날 사랑하겠지, 이러면 안 되고 ‘왜 저 같은 인간을 사랑하십니까?’ 이리 나와야 그게 성령으로 반응보이는 선지자지, “주님이 우리 사랑한데.” 이게 뭐예요? 마치 오늘 아침에 가니까 “우리 엄마가 가스에 중독되어 죽었어.” 옆집 아줌마 죽은 것처럼 생각한다면 엄마와 진짜 아들사이 아니잖아요. “엄마! 왜 이리.....” 몸부림치면서 반응이 저절로 나타나야 ‘아, 진짜 자기 엄마 죽었구나!‘ 하지, ’어, 어, 엄만데. 눈 안 뜨네. 아우, 빨리 치워야겠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게 유명한 소설 까뮤의 ‘이방인’이라는 소설입니다. 자기 엄마가 죽었는데, 재판장이 “니 엄마가 죽었는데 왜 안 우는데? 남자 주인공이 ‘뫼르소’입니다. 그 주인공이 하는 말이 ”엄마가 죽었는데 내가 왜 울어야 되지?“ ”내가 엄마가 아니잖아.“ 욕 많이 얻어먹었지요. 그리고 주인공이 해변 가에 있다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였어요. 당연히 살인죄로 체포됐지요. ”아무것도 관계없는 아랍인을 왜 죽였어?“ ”내가 죽인 게 아니에요.“ ”누가 죽였는데?“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죽였어요.“ 노벨문학상 받았어요. 햇빛이 따가 와서 죽였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재판장이 ”도대체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주인공이 ”실제로 그래요.“ 햇빛이 따가 와서 그냥 쏘고 싶어서 쏜 겁니다. 따가 우니까 아무나 권총 들고 쏘고 싶어서 쏜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교도소에 갇히지요. 사형언도 받아요. 왜냐 하면, 사형 안 시키면 또 나와서 눈부시다고 또 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사형을 시켰는데. 사형을 시킬 때, 조그만 창가에서 빛이 들어옵니다. 그 때 주인공 뫼르소는 진리를 압니다. ‘그래, 나는 하나의 별이었구나!” 끝까지 이상한 소리하고 끝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는가 하면, 부조리라고 합니다. 부조리란 합리적이지 않지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안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은 부조리하다. 내가 아랍인을 안 죽이게 되면 마치 그게 합리적인 것처럼, 저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죽일 이유가 없다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잖아요. 그게 부조리라는 거예요.
내가 안 죽일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안 죽이겠다는 것이 이게 무슨 도리이냐 말이지요. 엄마가 죽었다고 울 때, 엄마가 죽었는데 울어야 될 합당한 이유를 내놓고 울면 내가 인정하겠는데, 엄마가 죽었다고 내놓을 이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이 뭔 뜻인가 하면, 왜 엄마는 70세의 할머니잖아요. 왜 자기 엄마 죽은 것은 우는데, 울려면 옆집 70세 먹은 할머니 죽어도 울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 논리를 연결시키지 못하면 그 것조차 부조리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이라고 여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다 뭐다? 다 부조리다. 그러면 다 부조리인데 결국은 뭐냐, 진실을 그 부조리가 진실을 감췄다. 그러면 진실은 뭐냐, 우리는 그냥 하늘에 무심하게 떠있는 그냥 별이에요. 별보고 왜 쐈냐고 재판하면 안 되지, 태양이 그냥 있는 것처럼 권총도 그냥 있고, 내 피부도 그냥 있고, 당기는 손가락도 그냥 있는 거예요. 아라비아 사람도 오라한 것도 아니고 지가 그냥 해변 가를 걷는 거고 총알이 나와서 빗나갈 수도 있는데 맞춘 것도 모든 것이 따로 따로 하나의 별들이다 이 말이지요. 별들.
부조리가 곧 진리가 되는 겁니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그 자체는 진리가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가 뭐다? 진리다. 이게 실존주의 철학이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나라? 결국은 이게 이방나라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어디에도 있다? 하나님의 군대라고 자처한 이스라엘도 바로 그러한 집단인 거예요. 이 되도 않는 이 집단을 주께서는 하나로 정신을 모아서 천국에 보내주는데 모으는 집결 렌즈가 뭐냐, 어린양의 죽음,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들로서 십자가를 이룰 때 비로소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자기가 진리처럼 생각되지만 참 주님 보기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고, 자기 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망해 가는데 같이 안 망해가고 나만 살겠다는 시도, 그게 육적인 생각이고 주님 죽을 때 이미 우리 생명도 얻게 됐다는 그 기쁨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20130215b히1장10절(아들과 천사)-이 근호 목사.hwp (68.5K), Down: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