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속의 등대 130301
죽음 속의 등대 130301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한윤범(IP:14.♡.134.60)
13-03-06 11:18
201303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죽음 속의 등대
(강의:이근호) 목사
출애굽기 25장 31절, “너는 정금으로 등대를 쳐서 만들되 그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한 덩이로 연하게 하고 가지 여섯을 등대 곁에서 나오게 하되 그 세 가지는 이편으로 나오고 그 세 가지는 저편으로 나오게 하며”
이것과 우리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걸 이 시간에 생각해봐야 돼요.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등대, 등을 켜는 조명기구죠. 조명기구를 만드는 것과 우리가 오늘날 구원받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이 말이죠.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구원에 관해서 우리 쪽에서 준비할 것이라고 아예 생각하지 마세요. 구원받는데 필요한 모든 준비는 우리 쪽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다 준비를 했습니다. 새삼스럽게 우리 쪽에서 “하나님, 우리가 뭘 만들면 됩니까, 뭘 준비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식으로 나올 이유는 전혀 없단 말이죠. 하나님께서 구원에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놨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들어놓으면 뭐하나 우리가 믿어야지.” 믿을 필요도 없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을 우리가 믿어서 구원받는다면, 우리는 아침 열 시 믿음과 열한 시 믿음과 두 시 믿음이 왔다갔다해요. 좀 믿는 것 같았는데 새벽 네 시 쯤 되니까 믿음 다 없어져버리고. 열한 시 쯤에 믿음 있는 것 같은데 열두 시 넘어갈 때 부부싸움 한 번 하고 나니까 다 없어져버리고. 분명히 예배시간에 믿음 있는 것 같은데 문 열고 나오면서, “내가 믿기는 뭘 믿어? 나는 눈에 보이는 현실만 믿는 거야. 눈에 보이는 현실 외에 아무것도 안 믿어.”
오다가 태화강에서 전선에 까마귀가 새카맣게 앉아있어요. 여러분들은 울산에 사시니까 보셨지요. 까마귀가 전선에 앉아있는 것과 오늘날 우리가 천국 가는 것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관계없지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까마귀를 하나님이 만드시고 전선에 앉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지만 까마귀와 우리와는 구원에 관계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성막 만들고 거기에 등대를 만들었어요. 이것은 구원과 관련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것은 뭐냐 하면, 열심히 믿겠습니다, 잘 믿겠습니다가 아니라 구분하면 돼요. 저것은 우리 구원과 관련 되는 것이고, 이것은 관련 안 되는 것이다. 그것만 구분하면 됩니다. 참 쉽죠.
조금 있으면 대만에서 세계월드컵야구대회합니다. 그것 우리 구원과 관계없다. 그 정도 알면 돼요. 야구는 부산사람들은 좋아할지 모르지만, 이대호 나오니까. 우리나라 남자들이 좋아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구원과는 상관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야구 져도 괜찮다는 말이죠. 첫 번째 시합이 네덜란드인데 네덜란드한테 졌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된다, 안 된다? 구원이 취소 안 되는 겁니다.
아까 사모님이 이야기하는데 정익이가 포항 해병대 갔는데 몸무게가 72됐다고. 사모님 구원과 관계있습니까? 없지요. 72되도 괜찮고 75되도 괜찮아요.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없으니까. 그걸 구분하면 된다니까요. 제가 참 쉽다고 이야기했죠. 그런데 막상 울산이든 대구든 살아가는 사람들 보면 구원과 상관없는 것에 눈물짓고, 한탄하고, 심지어 자살하고. 구원과 상관없는데 자살하고 싶어 하고. 구원과 관련 없는데 거기다 목을 내놓고 생명을 걸고. 그리고 금요철야하면서 구원과 관계없는 것에 그걸 달라고 기도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금요철야기도회를 만드는 것은 그것이 과연 구원과 관계있는가, 없는지를 성도로 하여금 파악할 수 있는가를 보시기 위해서 하신 거예요. 금요철야, 새벽기도하는 것이 네 구원과 관련돼있는가 아니면 네 야심과 야망에 관련되어 있는지 그게 보게 하시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등대를 만드신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기 이전에 이미 구원에 필요한 모든 설치나 장비 그리고 시스템 이것은 일체 우리 쪽에서 만들 필요가 없다는 것. 미리 다 만들어놨다는 거예요. 그리고 미리 만들어놓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밀고 당기는 것과도 상관없어요.
우리가 부정을 하든 부인하든 간에 이미 성소는 이미 옛날에 있었어요. 이미 성소가 있다는 말은 옛날에 태화강에 분명히 전선 없을 때도 대나무 위에 까마귀 있었지만 까마귀는 구원과 관계없는데 옛날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이 만들고자 지시했던, 모세한테 지시했던 성소는 우리 구원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구분하는 거예요. 이 구분을 아주 고상하게 이야기해서 계시인 것과 계시 아닌 것을 구분하자. 이렇게 고상하게 정립할 수 있습니다.
등대는 불을 피우는 겁니다. 이쪽에 세 개, 저쪽에 세 개 있으니까 중심 줄기 있을 것이고, 번호 123456 중간에 7. 여기서 살구꽃을 세 개씩 달아요. 123, 123, 123, 아홉 개, 123, 123, 123, 열여덟 개, 중간에 1234 합해서 꽃이 스물두 개. 밑에 발 만들고. 꼭 박근혜 나무 같다만 복주머니 나무. 이게 어디에 들어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있어요. 그 장치가 등대라 하는데 장치는 항상 동쪽에서부터 해요. 다 의미가 있는 거예요. 동과 반대는 서고, 남쪽, 북쪽. 입구가 이렇게 있어요. 이게 25미터에요. 이게 50미터고.
우리가 화들짝 놀라고 충격을 받아야 할 것은 옛날 임금들 궁전에 있잖아요. 그것은 임금 좋으라고 만든 거고 청와대는 대통령 살라고 있는 겁니다. 대통령 떠나면 사저로 가지만 거기서 갇혀 살아야 돼요. 빠져나오질 못해요. 감옥살이하는 것과 비슷하단 말이죠. 그런 것은 인간들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필요해서 만든 건축구조물입니다.
그런데 성소, 성막은 우리 인간이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게 아니에요. 이게 충격적이고 신기하다 이 말입니다. 왜 신기하느냐 하면, 우리가 평소가 “나, 죽어서 좋은 데 갈래. 죽어서 영원히 불멸하는 천국에 살고 싶어.” 이건 우리 소망이지만 우리가 이런 소망으로 우리 나름대로 뭘 만들어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하는 소망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릴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먼저 만드셨다는 이것이 고맙고 충격이고 기적이라 이 말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한 거예요. “너희들, 성전 있어? 없지. 우린 있어.” 이런 자부심은, “너희 나라 청와대 있어? 우린 있어.” 그런 자부심이 아니에요. “너희들 김일성 궁전 있어? 우린 있어.” 그런 자부심이 아니에요. 그런 것들은 인간이 필요로 해서 인간이 지도자를 모시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구원과는 상관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 아이디어로 만들어낸 게 아니고 모세가 대통령 만난 게 아닙니다. 모세가 남의 나라 대사를 만난 게 아니고 누굴 만났어요? 세상에, 세상에. 인간이 만날 수도 없는데 하나님이 허락해서 만난 거예요. 일종의 삼투압 작업이라 작업인데. 아무나 와서 다 받아주는 게 아니고. “너, 올라와.” 이렇게 된 거예요. 여호수아도 반쯤 따라가다 “여호수아에게 너, 여기 있어.” “모세 선생님, 저도?” “안 돼. 하나님께서 나만 올라오래.”
모세는 연결구, 연결구는 파이프 조인트할 때 연결구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연결구를 신약에 오면 고상한 말로 중보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세 같은 중보자는 연결구기 때문에 연결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게 아니에요. 연결과 조인트만 해주면 될 뿐이에요. 그러면 연결하는 배관공은 하나님이 하신다 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모세 안에 두 가지 속성을 다 담았어요. 하나는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의 더러움, 그걸 모세가 품어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거룩함, 고상함, 그것도 모세가 품어야 되고. 그래서 히브리서 2장에서 모세를 하나님 집에 사환이라고 해요. 그냥 허드렛일 하는 집사다, 일꾼이라고 해요.
그러면 예수님은 뭐냐?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이에요. 주인을 아들이라고 한 겁니다. 지상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주인이 나타나지 않고 아들만 보내서 나타나요. 이것도 하나님의 아이디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보내서 우리를 건지는 아이디어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어요. 우리 같으면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겠는데 절대로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여금 연결구를 형성시켜서 그 연결구 안에 들어온 사람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제 말은 하나님, 하나님 한다고 하나님 아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마련하신 이런 말씀, 이러한 장치, 이러한 계획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 보내주세요.” 아무리 때를 써봤자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네가 내가 만든 연결구에 들어왔느냐? 그 통로, 노선에 들어왔느냐고 물어요. 그냥 하나님, 일대일로 상대합시다. 대화로. 요새 소통이 유행하는데 우리끼리 소통합시다. 안 됩니다. 우리끼리 소통할 것 같으면 이런 성소나 등대나 이런 걸 귀찮게 뭐 때문에 만들라 했겠어요? 만들 이유가 없어요.
사람이 가는 것은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아놨기 때문에 인간 쪽에서 싸대면서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부합니다. 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한 것 그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만나죠. 북한과 한국 대표자 만날 때, 군사 회담할 때 아무 철책선에 가서 “어이, 이리 좀 나와 봐라.” 하고 만납니까? 특정 장소가 있잖아요. 판문점 아닙니까. 판문점에서 만나듯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나는 장소는 하나님께서 지정한 장소에서 만나야 돼요.
이게 옛날 조선시대 사람이나 고려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기본적인 인간적인 심정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착하시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그러니까 이 정도는 아니까 하나님이 내 심정, 나의 원통함을 알아주겠지.” 이렇게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그것 안 받아주십니다. 물론 인간으로선 그러고 싶어요. 최초로 그렇게 한 사람이 있어요. 바로 가인이었습니다. 가인은 연결구가 없이 그냥 받으소서. 한 거예요. 요새 식으로 말하면, 조상 제사 지내듯이 하나님을 제사 지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뭘 받았는가? 성경에는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히브리서에 보면,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게 아니에요. 뭘 받았느냐 하면, 이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닌데 오늘 삼일절, 국경일이니까 이야기해야지.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게 아니라 아벨 자체를 받은 겁니다. 어떤 아벨? 산 아벨? 아니에요. 죽은 아벨.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가인, 네 제사 안 받는다.” 그 다음에 “아벨, 이리 와. 네 제사 받을게. 수고했어.” 이게 아니고 “아벨, 너 이리 와.” “하나님, 제 제사 받아주시옵소서.” 네 제사 받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사를 드린 아벨 너의 인생이 앞으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제사의 모델로 하나님 쪽에서 다듬어나가고 만들어나가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것 받으세요.” “받았다.” “이야기 끝났지요. 복 주세요.” 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리 와.” “제사 받았잖아요.” “이리 와봐.” “왜 자꾸 부르시는데?” 너를 제물로 삼는 바로 진짜 제사의 원형에 가까이 가도록 내가 너를 붙들고 네 인생을 주관하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가인이 제사 드리고 손 털고 가듯이 아벨도 제사 드리고 손 털고 가는 게 아니고 제사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아벨은 하나님에 의해서 쓰여야 되는 인생이 되는데 아벨의 인생 자체가 장차오실 영원한 죄 용서가 가능한 재료로서 거기에 납작 포착이 됩니다.
이걸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하나님, 저 예수 믿습니다. 이야기 끝났지요. 오늘밤 죽어도 천당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 볼 일 보겠습니다.” 이게 아니고, “이리 와봐.” 우리를 불러요. 불러서 예수 믿는다는 우리를 가지고 산 제물로 하나님께서 이것이 참된 제사라고 보여주는 도구로 우리를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여기에 나오느냐 하면, 로마서 12장에 나옵니다. 일반교회에서 보통 오후나 저녁예배에 헌신예배 많이 하시잖아요. 헌신예배 때 단골로 나오는 성경구절이에요. 그래서 교회께나 다녔다는 사람은 이 구절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이에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청년회 헌신예배 할 때 이 본문 등장 안 하는 교회가 없어요. 로마서 12장 1절 말씀입니다. 이야기 들어보니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지요. 헌신예배하고 매미채 들고 돈 거두잖아요. 그것으로 청년들 간식 사 먹고.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건강종합진단할 때 둥그런 통 안에 들어가잖아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환자복 입고 누워 있잖아요. 그게 바로 제단에 누워 있는 산 제물들이에요. 우리가 얼마나 뛰고 까불고 하는지 관계없이 우리는 주님의 연결구로 사용되기 위해서 제단에 눕혀서 점점 더 예수 안으로 끌어 잡아당깁니다. 산 제물 되게 하는 거예요. 산 제물 되게 할 때 주님께서 피자에 토핑하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눕혀놓고 예수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예수 안이라는 동굴 있잖아요. 그 동굴이 어떤 동굴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셨다 가신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제단에 누워 있다는 것은 제단이 스스로 움직여서 우리는 빨려 들어가는데 빨려 들어가면서 무엇을 통과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어떤 수모들을 당했는지를 성도도 공감하게 만드는 그런 특이한 현상들이 일어나요. 그게 성령이 주시는 기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걸 받아 챙기는 게 기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는 그것은 아무나 받는 같은 공감대를 일으키는 게 아니에요. 아벨처럼 하나님의 제물이라고 규정된 사람에게만 주시는 토핑이에요.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곱게 딸려가는 인간은 없어요. 주인 말 잘 듣는 개도 억지로 먹으라고 하면 발악을 하고 주인을 물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원한다고 해서 MRI 찍는다고 산 제물 되기 위해서 집어넣으면 우리는 강력하게 혼신의 힘을 다하여 반발하게 될 거예요. 엄마가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하면 삐져서 공부하려고 했는데 공부하라는 그 소리 듣고 오늘 공부 접는다고 강력하게 반발하죠. 그 반발을 주님께서는 그리워하고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반발이 없으면 천국 못 가요. 기독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 반발을 성경에서는 탕자에요. 집 나간 탕자. 가출한 탕자. 우리의 일상은 탕자 됨의 반복이에요. 매일같이 우리는 탕자에요. 하나님, 복 주세요. 복 받아서 뭘 하려고? 내가 하고 싶은 것 하려고. 매일 우리는 눈만 뜨면 탕자의 일과로 시작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걸 보시고, “탕자라서 좋아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탕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사랑과 용서가 값을 보일 수 있는. 우리가 잘나고 우리가 훌륭하면 그건 뭘 모독하느냐 하면, 거저주시는 용서와 사랑을 모독하는 게 돼요.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 이야기하면서 탕자 때문에 삐진 사람이 있었지요. 탕자가 집에 안 돌아왔을 때는 집이 평화롭고 화목했어요. 그리고 맏이는 아버지와 좋은 관계인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죽으면 자기가 유산 다 챙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죠. 어쨌든 간에 좋은 관계였는데 집 나간 탕자가 소리 소문 없이 들어왔을 때부터 이 집안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거예요. “아버지, 저는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체크. 또?” “저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습니다.” “체크, 또?” “그런데 아버지는 저한테 소도 안 잡아주고, 가락지도 끼어준 적 없고, 아버지가 저한테 잔치를 베풀어준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싫어?” “싫습니다.” “그러니까 네 본색을 드러낸 거야.” 그러니까 아무 한 것도 없는 탕자가 구원을 받고 맏이가 지옥 가도 핑계치 못하게 돼요.
우리가 구원받은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지옥 갈 사람도 생각해주세요. 지옥 갈 사람은 이래서 지옥 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우리를 거저 용서를 하신 겁니다. 우리는 자기만 생각하고 주변에 지옥 갈 사람을 생각을 안 해도 너무 생각 안 해. 우리가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을 옛날에 상상이나 해봤습니까? 예수 믿고 바르게 살고 거룩하게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 된다는 이러한 생각이 꽉 들어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돼버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제부터는 싫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나, 잘났는데. “나, 이대 나온 여자야.” [타짜]라는 영화에 나옵니다. 김혜수가. 이대 나와도 화투는 왜 치는데. 이대 안 나왔으면 참 좋았을 뻔 했는데. 탕자 입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웬 떡입니까?” 이렇게 되지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면 내 쪽에서 날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가락지도 준비해, 잔치도 준비해, 소도 준비해, 좋은 옷까지 준비해서 잔치를 베푼다는 것은 온 우주에 자랑하고 싶어서 아버지 쪽에서 환장한 거예요. “동네 사람들 보세요. 내 얘가 세상에 이런 얘가 있어요. 내 재산 가져가서 여자 만나서 다 날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얘가 어디 있겠어요?” 그 소리 듣는 탕자는 부끄러워서. 그뿐 아니고 뭐, “엉뚱한 짓을 해서 아버지 욕을 보이고 하여튼 얘는 나 아니면 인간도 아니에요.” 아버지는 그걸 자랑스러워하는데 그걸 듣고 있는 아들은 부끄러워서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아버지, 그건 빼도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반전이에요. 성경은 전부다 반전입니다. 제 정신으로는 구원 못 받아요. 제 정신 안 가져도 구원 못 받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한국교회가 생각 것과 전부다 거꾸로 생각하면 맞아요. 그게 누가복음 15장이거든요. 16장에 보면 가관입니다. 16장에 가면 한 술 더 떠요. 지혜로운 자를 등장시킵니다. 마지막 때에 죽어가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지혜가 있어야 구원받는다고 지혜 있는 자를 소개해준다고 했는데 그 지혜 있는 자가 바로 불의한 청지기에요. ‘불의하다’는 뜻은 전혀 의롭지 않은 못 돼 처먹은 일꾼, 이것이 착하디착한 청지기를 이기고 하늘나라 합격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절대로 ‘불의한’을 떼지 않습니다. “어이, 청지기 물 한 컵 가져 와.” 이래야 될 걸 “어이,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 물 한 컵 줘.” 그러면 불의한 청지기가 , “예. 여기 있사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불의한 청지기, 이것은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마련한 하나님의 의가 있다, 없다? 전혀 없다.
제가 강의 처음부터 우리 쪽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준비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는 거예요. 그게 아까 그렸던 등대입니다. 등대는 어디 있느냐? 그 이야기해야지. 아까 25미터, 50미터. 동쪽의 문으로 들어가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짐승을 태우는 제단이 보일 겁니다. 이것은 시중 음식점의 철판구이 생각하시면 돼요. 냄새가 지독하지요. 맨날 거기서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하니까 냄새가. 아침저녁마다 태우니까. 그리고 평소에 자기가 죄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태우지요. 또 뭔가 서원할 것 있다고 태우지요. 늘 불태우고 있어요. 냄새가 진동하지요. 여기에 제사장이 종사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못 들어가요.
여기에 천막을 쳐놔요. 이라크 전쟁 때 미군부대 막사라고 보면 돼요. 입구로 들어가면 두 구역으로 나눠져 있어요. 앞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향단, 향기 나는 식물을 태우면 향기가 나잖아요. 그 다음에 테이블이 있어서 호떡이 여섯 개씩 열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천막으로 돼있기 때문에 안이 어둡잖아요. 조명기구가 필요한 거예요. 양쪽으로 세 가지 총 일곱 가지로 된 조명기구. 그리고 안쪽 방에는 평소에는 안 가는 7월 10일 대속죄일만 들어가는데 여기는 하나님의 돌 판이 담겨있고 금박으로 입한 아카시 상자가 있고 거기에 조각으로 천사가 양쪽으로 강강수월래 할 때 동대문으로 지나가는 놀이하는 것처럼 양쪽에서 보호하듯이 하고 여기는 천사의 수를 놓고. 이렇게 된 거예요.
이게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나왔겠어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죠. 하나님께서 일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이 장치를 통해서 탕자 같은 너희, 불의한 청지기 같은 너희들을 내가 무사히 넣어주겠다고 하나님 쪽에서 준비한 겁니다. 그러니까 이 안에 들어가면서 믿씁니다, 믿씁니다 쌍시옷으로 발음할 필요 없어요. 그냥 믿습니다 하든지, 믿읍니다 하든지 관계없이, 안 믿습니다 하든지 관계없이 이것은 이스라엘 내부에 이미 만들어져 있다는 자체, 그냥 실제로 존재하는 거예요. 믿고, 안 믿고 관계없이 그냥 있는 거예요.
이것과 태화강 전선에 앉았던 까마귀와 다르지요. 까마귀 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런 게 있어야겠지요. 그럼 우리는 관심사가 태화강 까마귀에 관심 두지 말고 어디에 관심 둬야 돼요? 조류학자는 관심 둘 수 있어요. 자기 직업이니까. 하지만 조류학자가 그것 연구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조류학자든지 과학 선생이든지 관심이 없든지 뭘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연결구 여기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그 사람이 하나님한테 아벨처럼 하나님 손에 장악 되어서 MRI 촬영하듯이 예수 안에, 구원의 연결 속에 빨려 들어가는 중에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걸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두 자로 성도라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구약 이스라엘이나 성도가 같은 입장이에요. 자기가 만들지도 않고 자기가 계획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준비한 것에 말려들어가고 빨려 들어간 그러한 팔자, 그러한 운명. 호떡을 굽든지 개인택시를 하든지 그건 전혀 문제 삼지 않아요. 호떡 구우니까 지옥 가거라. 개인택시 하니까 천당 가거라. 백수니까 지옥 가고 이런 게 전혀 없어요. 가정주부니까 하고, 가정주부 아니면 구원받아라. 이런 것 전혀 없어요.
당연히 어느 교회 다니느냐가 문제가 안 되고, 당연히 십일조 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안 되고. 왜냐하면 사람은 십일조를 할 수가 없어요. 십일조의 근본 문제는 뭐냐 하면, 어떤 인간치고 십일조 한 인간이 없다니까요. 십일조 하란 말은 어떤 인간도 십일조 할 재주가 없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십일조라는 게 있는 겁니다.
지금 녹화 잘 되고 있어요? 우리교회 생중계 때문에 설교 시간 되면 보통 시험거리가 아니에요. 설교하다가 “카메라 내려갔습니다.” 그게 녹음 다 되고. 생중계 하다보니까 벌써 한 달 넘었는데 안 될 경우가 더 많아요. 그럴 때마다 생중계돼야 구원받는다는 게 분명히 아닌데 “생중계 잘 되면 구원시켜줄게.” 그런 게 없다니까. 왜냐하면 성소에는 몰래 카메라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기 할 일에 그것 때문에 신경 쓰고 짜증나고. 그래서 제 아내가, “당신은 그런데 신경 쓰지 말고 설교나 해라. 설교하다 생방송 안 되니까 얼굴이 일그러지고 다 보인다. 당신은 당신 할 일 해야지 이런 것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안 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얘도 있지요, 남편 있지요, 자식도 있고 아내도 있지요. 돈도 벌어야 되지요. 신경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단 말이죠. 우리가 울고 웃고 하는 그 내용이 성소 때문에 울고 웃는 게 아니고 평소에 은근히 노렸던 것이 잘 될 때는 웃고, 잘 안 되면 울고 그래요.
그래서 이런 사례 있잖아요. 씨스타란 가수가 부른 노래가사를 전에 적은 적이 있지요. 혼자서 티비 보고 혼자서 책을 보고 혼자서 놀고 혼자서 울고불고. 노래제목이 [나혼자]에요. 혼자서 울고불고~ 다리 꼬면서 춤추면서. 못 봤어요? 그게 오늘날 인간들은 누가 자기를 구원할 사람이 없어. 그냥 혼자 울고, 혼자 웃고. 젊은 사람들 다 그래요. 뭔가 의지하는 것도 없고 나 말고 다른 분이 내 인생을 책임진다는 그런 것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 그런 걸 이렇게 합니다. 그게 바로 이방나라. 이방나라에 소속된 사람은 이방인. 이방인이란 어감 자체가 기분 나쁜 거죠. 내 나라 사람이 아니란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 저 구원받습니까?” 물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방나라와 너와의 차이점을 알면 돼.” 제가 아까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태화강 까마귀와 성소, 이것은 하나님이 마련한 것이고 이것은 구원과 관련 없다는 것을 그 차이를 통해서 알잖아요.
마찬가지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자꾸 이방나라와 하나님께서 마주치게 만들고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 인간 살아가는 것과 나라는 인간 살아가는 것과 도무지 어떤 점에서 차이 나는 것이 성경에 입각해서 어떤 차이 나는가를 그 갈라진 틈새가 성경에 의해서 갈라졌음이 보이면 그건 성도고, 갈라진 틈새에서 성경말씀이 안 나오고 그냥 생활상으로 알게 되면, 너는 대충 살고 나는 성실하게 산다. 자기 성실과 대충으로 차이 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준비한 말씀이 나오지 아니하면, 제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하기 곤란하지만 하여튼 성도라고 보기 곤란합니다.
사는 건 똑같은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준비한 게 올라온다는 거예요. 뛸 수도 있고 밑에서 올라올 수도 있고. 나 자신도 모르는데 하나님 말씀의 근거가 우리를 통해서 올라오는 거예요. 우리는 피자의 밀가루고, 토핑은 누가 하느냐? 말씀으로 토핑해주기 때문에.
성경말씀에 탐내지 말라고 할 때 “주님이여, 제가 또 탐을 냈습니다.” 하는 것은 성도고, 성도 아닌 사람은, “나와 무슨 상관인데?” 이렇게 돼요. “말씀으로 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 나는 말씀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따로 마련한 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나온다면, 성도라고 보기에 곤란합니다. “내가 이런 짓거리하고 이렇게 살아가니까 주께서 따로 준비해야 마땅하지.”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성도지요. 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안 믿기 때문에.
그렇다면 여기서 더 중요한 것 들어가 봅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등대입니까? 등대 하지 말고 보일러를 갖다놓던지, 재떨이를 갖다놓던지. 아까 제가 조명기구라 했잖아요. 조명기구라 했으면 아무 조명기구를 갖다놓으면 되는데 조명기구를 만들라. “이편 가지에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저편 거지에도 살구꽃 형상의 잔 셋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여 등대에서 나온 여섯 가지를 같게 할지며 등대 줄기에는 살구꽃 형상의 잔 넷과 꽃받침과 꽃이 있게 하고” 34절에 나오잖아요.
보통 교인들 이 대목 읽을 때 지루해서 그냥 넘어가든지 훌쩍 뛰든지 뭐 재미있는 것 없는가 싶어서 넘어가지요. 이건 교인들만 그런 게 아니고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고, 지루해라. 목사들은 이걸 읽을 때 걱정돼요. 교인들이 “목사님, 이게 예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물으면, 관계를 지어줘야 되는데 무슨 수로 관계를 짓습니까? 내가 만들었습니까? 내가 설계한 거예요? 건축학개론도 아니고. 어떡하지? 보통 건축할 때는 설계사가 의미 있어서 다 한 건데 이 설계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이 설계도안과 모세한테 40일 동안 알려주신 분은 따로 계시단 말이죠.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오게 되면 이 내막이 밝혀집니다.
어떤 분들은 일부러 그러는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지 “목사님, 왜 하필이면 가지가 여섯 개입니까? 이게 마귀 숫자라서 육입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거기에 대한 정답은 이겁니다. 망하라고 여섯 개 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등대만 만들었습니까? 등대 말고 다른 것 만든 게 있어요. 그게 우리 신체지요. 그런데 우리 이빨은 32개입니까? 등대도 여섯 개 만든 게 의미 있다면 우리 이빨이 왜 33개 아닌데요? 더 나아가서 왜 뒤에는 눈이 없는데요? 왜 귀는 두 개인데 코는 하나밖에 없습니까? 목사 멱살 쥐고 흔드세요. 목사님 성령 받았으니까 그 이유를 알아내세요. 왜 뒤에는 입이 있지 않습니까? 왜 눈은 뒤에 없습니까? 하면, 목사 입장에서는 뒤에 눈 달리면 신경 쓸게 너무 많아서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앞에만 달렸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이 모든 것을 깔끔하게 이 시간에 정답을 말씀하겠습니다. 전부다 죽으라고 있는 거예요. 성소는 깨지라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소는 성소 안에 죽음을, 아까 제단에서 제물을 불태운다 했지요. 인간들 보기에는 양이 죽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성소가 깨지면서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앞당겨서 성소를 만들어놓은 거예요. 성소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위치와 그 기능은 인간이 자살해도 못 느끼는 그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성소에 담아놓은 거예요. 인간이 왜 이렇게 만들어졌습니까? 이게 전도서에 나오는데 전도서 마지막에 보면, 이빨이라든지, 귀가 잘 안 들리는 것, 눈이 안 보이는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것만 하고 10분 쉽시다. 갑자기 어려운 것 했는데. 사람에게 눈이 있잖아요. 사람이 본다 이 말이죠. 사람이 볼 때 인간들이 바깥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못하겠는가? 눈을 만드신 분이 보지 못하겠는가? 그러면 우리의 귀와 눈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 또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서 만들어놨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이 눈과 귀로 우상을 보는 거예요. 마귀가 하는 짓을 보는 거예요.
따라서 이 눈과 귀의 기능이 뭐냐 하면, 우리 인간 자체를 죽음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죄를 지어야 되고 그 죄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기능을 총동원해서 보는 것, 듣는 것, 모든 것이 죄를 생산하는 공장 기능하기 위해서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겁니다. 보는 것에 의해서, 듣는 것에 의해서,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탐심과 미움과 질투와 사기를 치고 전부다 우리의 욕망을 보여주는데 온 사지가 작동을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이것을 죽여도 우리는 할 말이 있어요, 없어요?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죽을 때 죽더라도 왜 죽어야 되느냐를 이유를 담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런 기능을 만들어놓은 겁니다. 이것은 성소의 모든 기능도 같은 이치입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3-03-06 11:19
20130301b 울산강의-출애굽기 25장 : 죽음 속의 등대
(강의:이근호) 목사
제가 첫째 시간 끝날 때에 엄청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성소라는 것은 일반 사람 보기에는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 성소 안에서 죽음을 계속 발생시킨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 보기에 그렇게 보여요. 그런데 정말 성소가 있는 이유는, 성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성소와 인간마저 죽음에 주저앉고 무너질 때 진짜 죽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어서 볼펜이 있단 말이죠. 볼펜이란 쓰면 글씨가 나온다. 이건 인간이라 생겨먹으면 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게 인간이 알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런데 “내가 글씨를 보여주마.” 하고 글씨 쓰는 볼펜을 두 동강내고, “이게 글씨야.” 하면 미친 인간이죠.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왜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줬으면 성소로 구원을 시켜야 되는데 성소로 구원하는 게 실패로 끝납니다. 성전과 성소에서 제사 드렸던 이스라엘, 망했습니다. 구약 끝부분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못 섬겨서 망했다고 선지자들에 의해 나와요. 너희들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성전이 부셔졌고 너희들이 쫓겨났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이야기 안 해요.
성소라 하는 것은 망해야 될 너희들을 진짜로 망하도록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이 무너질 때 비로소 무너진 그 현장에서 구원에 새롭게 나온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제사 드리고 하나님 섬기면 구원받겠지.”라는 인간이 언젠가는 무너질 때 비로소 그들은 참된 구원을 접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복음을 전하니까 많은 사람이 반발하고 기존교회가 많이 반발해요. “왜 이 목사는 자꾸 우리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하는가? 심지어 헌금하는 것, 예배하는 것, 전도하는 것, 성경 공부하는 것, 심지어 설교하는 것도 왜 죄라고 규정하는가? 우리가 십자가 믿는 것이 옳은 일인데 왜 죄라고 규정하느냐?”라고 할 때 제가 이야기가 있어요.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께서 나무 두 개 툭 던져주고 십자가, 이것 붙들라고 온 게 아니거든요. “목수하는 천사, 십자가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자, 이 십자가 믿어라.” 그러면 새끼 십자가 목걸이 한 여자들 다 구원받겠네요?
우리는 십자가 믿자나 하는데 십자가는 믿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는 우리가 깨어지라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우리를 깨어지라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바리새인적이고 예수님 죽으신 것이 깡패한테 맞아죽은 게 아니에요. 성폭행범한테 맞아죽은 게 아니에요. 가장 하늘나라에 가깝다고 소문난 사람들한테 맞아죽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가까이 갈 때 그냥 하루아침에 가까이 가는 게 아닙니다. 성경말씀 열심히 지켜서 가까이 간 거예요. 제가 첫째 시간이 뭐라고 했던가요? 착하고 어질고 한 게 누굴 모독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한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만들어낼 때 이 세상에 조폭 만들어서 날 죽여라 한 게 아니고 나는 세상 죄를 위해서 죽는다 할 때 그 죄가 뭐냐 하면,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해보겠다는 그게 바로 죄에요. 성폭행, 강간, 그건 저 밑에 있는 죄고, 그리고 너희 아비를 악마라 할 때 나쁜 놈에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가장 선비라는 점잖은 어르신네, 쉽게 말하면 안철수, 가장 지도자급이고 훌륭한 사람, 그저 눈만 뜨면 나라 생각, 독도 생각하는 김장훈처럼, 그런 사람한테 맞아죽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요. 그분은 정말 훌륭한 할머니에요. 연세도 팔십 넘었는데 자식을 너무 잘 키우고 듣기에는 지금도 가계부를 쓴다고 하면서 너무나 자기한테 철저하고 완벽하고 그리고 참 어질고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남한테 빈틈이 안 보일 정도로 점잖고 온유하고 남에게 상처 안 주려고 애를 쓰면서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인데 그분이 화가 나는 경우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어요. 태화강에 까마귀 앉았다고 절대로 화 안 내요. 성소 이야기하고 십자가 이야기할 때 그 어르신은 화를 내는 거예요. 그 이야기 듣고 한 번 만나봐야 되는데 그 이야기 들으니까 구미가 당겨서 언젠가는 자녀분들한테 부탁해서 시간 마련해보라고. 그런데 자녀들이 하는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요새는 복음 이야기 안 한답니다. 여러 번 했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진짜 악마를 고이고이 숨기고 있어요. 악마는 십자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쪽입니다. 십자가 필요 없다는 걸 말만 주장하는 정도가 아니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쪽이 악마에요. 그 정도 돼야 악마의 고수라고 할 수 있어요. 시시한 놈팽이는 악마라도 하수급이고. 진짜 악마는 자기가 죄라는 것을 끄집어낼 수 없을 정도가 돼야 돼요. 도 닦는 사람들, 교회들마다 많잖아요. 제일 앞자리에. 교회도 제일 은혜로운 자리에 앉아서 목사 설교하면 추임새 넣어주는 사람. 아멘, 할렐루야. 어떤 때는 시끄러워서 설교도 못해.
도 닦으러 왔어. 뭔 뜻이냐 하면, 내가 교회 와서 어느 정도까지 인간 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측정해보고 싶은 거예요. 내 자질과 내 인격과 내 수준을 내가 눈으로 목격하고 싶은 겁니다. 관찰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사람들 중 최고 고수 그게 누구다? 바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맞아죽은 겁니다. 나무 작대기 두 개 만들어놓고 그게 십자가라고 던져 준 게 아니에요.
십자가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는 사람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아주 놀라운 아이러니에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지켜라, 이걸 해라. 명령하고 지켰던 것, 아멘하고 될 줄로 믿는다고 받아들였던 모든 것들, 그렇게 말씀 지키고 하면서 내가 서서히 악마의 진짜 모습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말씀 줬다는 생각을 세상에 어느 인간이 그런 생각을 먹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새순교회 집사님이 나에게 교회 오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까 교회 가서 악마 되라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누가 하겠습니까? 하나님 믿고 내 인생 역전시켜 새로운 인생 살아보자. 이런 각오와 결심 먹기 위해서 교회 오거든요. 교회는 인간 만드는 곳이다. 교회는 인간 만드는 곳이 아니에요. 내가 인간이라는 걸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언제 인간이었어? 본래 자리로 돌아왔어. 나는 흙이었지. 나는 애초부터 인간이란 말을 붙일 수 없어.” 자기 진면목을 발견하는 곳이 교회에요. 인간도 아닌 게 인간답게라는 말이 성립이 안 되죠. 성경에서 개, 돼지보다 못하다고 했어요. 그걸 개한테 이야기해보세요. 듣는 개 기분 나빠요. 더러운 인간과 고상한 개와 비교합니까? 개는 적어도 예수님을 십자가 못 박아 죽이지는 않았잖아요. 우리는 눈만 뜨는 예수님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우리 생각 이겁니다. 유치원은 아니지만 따라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안 해!” 인간은 자기가 결정하지 않고 외부에서 한 어떤 소리라도 제일 먼저 튀어나오는 게 무조건 이유 없이 안 해요. 그러면 하잖아. 그게 한 게 아니라니까요. 엄마가, “티비 보지 말고 들어가서 공부해. 고3이잖아.” 하면 얘가 해요. 이것은 엄마가 시켜서 공부한 게 아니고 내가 엄마를 많이 봐줘서 공부해주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방금 긴 문장을 두 자로 줄이면, “안 해.” 다섯 자로 줄이면, “무조건 안 해.” 왜? 그건 내 말이 아니거든요. 인간은 내가 시작하지 않은 일은 무조건 안 해입니다. 예수의 말이든, 하나님의 말이든.
그러다 엄마가 뭐라고 하면, 에에에~ 이럽니다. 듣기 싫다고. 목사가 여기 앉아서 설교하잖아요. 교인들이 속으로 설교 너무 길다고 어어어~ 이런다니까요. 백날 해보세요. 나는 무조건 안 하기로 했어요. 이게 악마입니다. 주의 말씀이든, 남이 이야기하든 무조건 내가 생각한 일이라야 OK지 나 말고 어떤 누구라고 아무리 친한 친구사이라도 절대로 그 말에 우리는 일단 NO에요.
그런데 언제 안 해가 ‘할게요’로 바뀌는 경우가 있어요. 아주 특이한 경우죠. 이런 경우는 나를 잊어버릴 때 우리는 할게요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마귀가 인간을 다룰 때 어떻게 다룬다? 마귀 말은 할게요가 나오려면 마귀가 먼저 나를 잊게 만들겠죠. 지금부터 마귀가 잊게 만드는 리스트를 작성해보면, 술, 마약, 도박, 게임, 스포츠,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축구 할 때는 전 세계 16억 인구가 티비 볼게요입니다. 호날두가 두 골 넣었지요. 메시는 한 골도 못 넣었고.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취임식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박근혜 취임식을 못 봤습니다. 허은수 선교사님 기독교방송 본다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하는 것이나, 안 하는 것이나 주도권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나의 내부에 있는 마귀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외부에 있는 마귀가 시킬 경우에는 아주 즐겁게 우리는 ‘해요’라고 하는 거예요. 피곤한 직장 생활하는 여직원들 잔업하라고 하면 돈 더 주냐고 해서 합니다. 그러면 과장이, “여직원끼리 노래방이나 가자.” 그것은 해요해요. 그것은 마치 시켜서 한 것 같지만 사실은 늘 업무하면서 “노래방이나 갔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이 올 때 과장이, “노래방 가세요.” 그런데 취소 이러면 그때는 갑자기 과장을 죽이려고 해요. 간만에 나 하고 싶은 것을 알아 맞혔는데.
인간이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이 감당이 안 되서 괴로운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잊는 방법 중 제일 많이 쓰는 게 술이에요. 남자나 여자나. 술로 잊으려고 해요. 그 순간만큼은 제발 나를 놓고 싶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은 취하는 맛에 먹어요. 술 레시피 볼 일 있습니까. 술은 취하라고 있는 거예요. 술은 맛을 보는 게 아니고 술맛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는 거예요. 처음에는 내가 술을 먹지만 술을 누가 마시지? 술 마시는 사람을 모를 정도로까지 가야 제대로 술한테 잡힌 거예요. 마귀가 노린 겁니다. 이게 원래 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강간범. 왜 내 앞에 여자가 지나가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지 잘못은 모르고. 그 말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그 누구도 저지할 권리는 없다는 거예요. 왜? 내가 하고 싶으니까.
그러면 평소에는 왜 그렇게 못 사는가? 국가의 법, 가정의 전통, 관습은 그러한 말도 안 되는 인간들을 배정을 해줘요. 강제로 훈육을 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인간이 아니고 개입니다. 개는 때려야 말을 들어요. 그리고 남편은 잔소리를 해야 말을 듣습니다. 어떤 일이든 잔소리를 안 하면 인간은 막 가게 돼있어요. 어떤 인간이든 잔소리 하게 되면 욕을 얻어먹게 돼있습니다.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고 감히 나한테 잔소리한다는 자체가 우리 내부에서 뭐가 올라옵니까? 속으로 안 해, 안 해. 안 해. 나중에 보면 시킨 고대로 해요. 안 한다고 왜 해? 내가 하고 싶었던 거거든. 내가 해서 하는 건 하지만 똑같은 일이라도 누가 지시해서 하는 것은 절대로 안 해인 거예요.
그렇다면 성소 만들라, 성막 만들라, 그리고 제사 드려라. 이스라엘 백성이 했지요. 남들 보기에는 하나님이 시킨 대로 했다고 하지요. 사실은 내가 평소에 하나님 도움 없이 얼마나 내가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으며 나는 구원만 바라는 염치없는 놈이 아니고 구원에 합당한 의로움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평소에 과시하고 싶었던 충동이 있었잖아요. 거기에 하나님의 율법과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을 핑계대고 실은 자기의 의를 이루는 거예요.
로마서 10장 2절에서 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참 이상하죠. 우리가 자기 의를 세우면 하나님께서 대충 “네가 의로웠어요? 내가 의로 간주해줄게.” 의가 나오면 누가 만들었든지 따지지 말고 그냥 하나님 의로 받아주면 될 텐데 자기 의를 만드는 순간 하나님 의를 모독한 게 된다니까요. 하나님께서 말씀을 할 때 예를 들어서 예수 믿어라 하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안 해 나오잖아요. 안 해 하면서도 예수 믿어요. 그러면 그 예수 믿는 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평소에 내가 이 정도로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걸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자기 의로서 예수 믿는 거예요.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 나중에 천국 갈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만두겠어요? 가만 안 두죠. 자기가 예수 믿는다는 그 인간으로 하여금 아주 고생고생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기 입으로 “예수 믿어도 소용없다.”라는 그 기쁜 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겁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믿는 게 아무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믿음이라는 것은 다 헛것이라고 이야기했어요. 헛것이기 때문에 헛것인 줄 알고 믿어야 돼요. 그런데 사람들이 믿는 믿음은 유용성, 이게 분명히 헛것이 아니고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 믿음은 주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 지가 만들어낸 믿음이에요. 노림수가 있어요. “내가 예수 잘 믿으니까 취직 잘 될 거야. 앞길 풀릴 거야.” 분명히 음흉한 노림수가 있어요. 이것 마귀가 사주한 겁니다.
제가 어제 대전강의에서 그런 예를 들었는데 다시 한 번 해볼게요. 사도행전 3장에서 앉은뱅이가 있었잖아요. 자기가 사전에 나을 걸 알았습니까? 그것은 자기 예상 밖이었어요. 나는 거지니까 돈이나 달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도 입에서 그냥 일어나 걸으라면 될 것인데 약을 올리네. “나한테는 너한테 줄 돈이 없거든.” 그 멘트를 날려요.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하는 멘트에요.
우리 기도제목 다 가져오세요. 그리고 꼭 빠진 걸 주세요. 절대로 기도한 걸 다 비껴갑니다. 아주 예수님의 재주가 대단한 재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안 들어줘요. 왜? “이건 내가 예상했던 거야.” 그 말 못 하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예상한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호응했다는 그런 사이라는 걸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 순전히 쓸모없는 인간을 건지기 위해서. 네가 무슨 기도를 해도 말짱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 말미암아 와르르 우리 자신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능력이 바로 아벨을 MRI 통에 눕히는 그 작업이에요. 그냥 누워있으면 돼요.
저는 이걸 이렇게 합니다. 수면내시경이에요. 제가 여러 번 해봤어요. 하고 난 뒤에 실험해봤어요. 마취해도 정신 차릴 거야 하는데 벌써 작업 다 끝났어요. 비틀거리면서 내려오는 거예요. 그때 나의 허전함. 내 인생인데 왜 단절된 부위가 있느냐? 누가 내 인생의 연속성을 잇지 못하게 끊어놨느냐? 분하고 원통한 거예요. 나는 나의 대해서 다 알아야 하는데 잃어버린 세월이 있었던 거예요. 순간이지만 잃어버린 것 때문에 내가 온전하게 나를 어떤 인간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어요. 잃어버릴 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처럼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마에 올려놓고 끊어버려요. 오늘 염려는 오늘까지만 하고 내일 염려는 내일하라고 굳나잇 잘 자라하고 끊어버리고 아침 되면 새 생명 주시고 다시 호흡 주시고 다시 끊어져요. 매일같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몫으로의 내 인생을 구현하는 겁니다.
울산바위가 어디 있습니까? 울산바위가 울산에 있습니까? 없지요. 속초에 있지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나라는 인간은 내가 미리 생각한 그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울산바위고 나는 나답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울산에 있는 바위가 강원도 속초에 있을 때 우리는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저 울산바위는 잘못 된 거야. 울산 근처로 잡아당겨 와야지. 거기 왜 가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집을 꺾으시는 거예요. 날마다 이것은 내 자리니까 내 자리에 부합된 내가 있어야 된다는 그 고집을 매일같이 꺾으십니다. 내가 예상도 못한, 생각도 못한 그 세계로 자꾸 가게 하시는 거예요. 천국은 우리가 그렸던 천국도 허물어져야 돼요. 내가 예상도 못한 그 나라로 가는데 그 나라가 천국입니다. 내가 예상도 못한 나라. 베드로가 생각한 천국은 맨션 세 채 있는 나라였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이게 하늘나라였는데 홀연히 주님께서 그걸 없애버렸어요.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야.” 그런 천국은 자기 자리가 늘어진, 확장된 주택단지지 그건 천국과 관계없어요. 천국은 항상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이걸 오늘 강의에서 잊지 마세요.
천국은 항상 우리 힘으로 못 들어가는 곳이고 연결구, 그 중보자가 친히 이끌어줘야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이끌어주는 사람인지, 안 이끌어주는 사람인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면, 바로 내가 지켰다고 여긴 말씀이 오히려 어겼다고 발각될 때 그렇게 느껴질 때 그 사람이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새순교회 교인들, 우리교회 교인들은 아무도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제가 경하 드립니다. 분명히 어느 말씀도 못 지켜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잖아요. 돈을 얼마만큼 사랑해야 돼요? 이만 원? 만 원? 오백 원 사랑하면 됩니까? 돈이 한 푼도 없으면 사랑 안 된다고요? 없으면 결핍은 더욱더 우리의 갈망을 낳습니다. 없는 것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그것을 추구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없어도 돈을 사랑하게 돼있어요. 성경의 어떤 말씀도 우리는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그런데 미움이라 하는 것은 내가 나답기 위해서는 반드시 파생되는 외부로 발산되는 그런 분위기에요. 미움 때문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굴 미워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사랑으로 구체화되질 않아요. “너, 누굴 좋아해?”라는 말 하지 마세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빠가 미워? 엄마가 미워?” 이렇게 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진정 그 얘가 누굴 사랑하는지 들통 나는 거예요. 물론 큰 집에 가서 “너는 할아버지가 미워? 할머니가 미워?” 했다가는 두 번 다시 얘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겠지요.
사람은 미워하는 것을 계속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방법으로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사랑해야 될 내가 누군지 정립이 안 돼요. 꼭 자기 적들이 등장해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편이 되는 거예요. 새순교회가 단결되려면 새순교회가 다같이 씹어주는 사람이 등장해야 됩니다. 그럴 때 저절로 단결돼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못 써요.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것은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지 않은 사람을 내쳤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 사람이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중에서 최초의 선지자가 아브라함도 있지만 이스라엘 나라에서 최초의 선지자는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굴 제일 미워했겠어요? 모세를 제일 미워한 거예요. 애굽에서 불러냈으면 책임지라 이 말이죠. 뭘 책임지란 말입니까? 애굽에서 먹던 양식과 생활 여건을 책임지란 거거든요.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 짓 안 하겠다고 화가 나서 지팡이로 반석을 지시하라고 했는데 성질나서 내리쳤지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어요. 그러니 모세 안에도 애굽적인 요소가 포함돼있어요. 연결구니까. 처음에 했지요. 인간의 죄악 된 요소와 하나님의 거룩이 모세 안에 함께 있으니까 모세의 인생이란 시달리는 인생이고 괴로운 인생이에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오늘날 성도의 모습과 모세의 모습은 같은 모습이죠. 같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살던 자리가 안 끊어졌어요. 애굽에서 살던 식으로 보장하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뭡니까? 애굽과 끊어지는 거예요. 그럴 때 모세가 답답한 거예요. 애굽과 끊어졌다는 말을 그냥 해버리면 사람들은 수용 안 해요. 뭐냐 하면, 비타500이 있잖아요. 둥굴레 차 잡수시지 마세요. 그러면 다른 걸 내놔야지. 다른 걸 내놓고 그게 먹고 싶으면 내가 알아서 그때 안 먹을게. 그런데 하나님이 이걸 안 내놔요. 하늘나라 안 내놓고, “이것 먹지 마. 이 세상을 떠나라.” 뭘 보여주고 떠나라고 해야지 안 보여주고 떠나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시는가? 지금 이걸 보여주면 여기에 사람들이 붙는 게 아니고 현재 둥굴레 차에다 타버려요.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이 교회가 천국을 가로막는 거예요. 교회 와서 천국 간다고 하면서도 하늘나라를 사는 것이 아니고 교회 키우기 위해서 교회 사람 되어서 살아가는 거예요. 교회라는 자본주의 사업체에 자기 옛날 애굽 생활을 타버린다니까요.
교회를 준 것은 교회를 부정하라고 준 거예요. 그런데 교인수 많아지고 헌금 많아지면 하나님 우리와 함께 있고, 교인수 떨어지고 헌금 내려가면 하나님이 우릴 버린 줄로 알고. 이 기준이 어디서 나온 거예요? 둥굴레 차에서 나온 거예요. 이걸 못 버린 거예요. 이걸 기준 삼아서 보다 좋은 걸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계속해서 자기 것이 있는 이상은 아무리 좋은 소리해도 여기다가 섞어서 완전히 아무것도 않게 된 거예요.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이스라엘을 믿었기 때문에 그래요. 안 믿어야 되는데 우리나라가 이스라엘 된 것은 우리를 망하기 위해서 했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이스라엘 어떤 인간도 자기가 망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 하나님의 약속이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진짜 본론 들어갑니다. 오늘 강의 내용이 등대지요. 하나님께서 성소에 등대를 만들어준 것은, 이게 조명기구인데 조명기구는 빛이 나오죠. 하나님께서 빛으로 우리를 비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이것마저 어두움이 이걸 이긴다고 생각했겠어요? 사람이 만든 것 같으면 부셔지는 것도 인간이 한 것이니까 하는데 이걸 만들라고 누가 이야기했고, 이걸 만든 사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신 받아서 만들었잖아요. 이것이 빛이 아니란 것을 아무도 생각 못하는 거예요.
새순교회가 교인이 차고 넘쳐서 예배당이 지어야 되는데 돈도 없고 돈 낼 사람도 없고 돈 내라 하면 무조건 안 해부터 나오니까. 갑자기 교회도 안 나오는데 할머니가, “서 목사님, 나는 예수는 안 믿지만 20억 있는데 교회 지으세요.” 문제는 그때부터 위기지요. 그 돈으로 예배당 지었다고 합시다. 서 목사님이, “여러분 이 예배당 짓는데 기적적으로 하나님께서 믿지도 않는 할머니를 통해서 했습니다. 이 예배당은 마귀의 시험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렇게 설교한들 교인들이 누가 곧이듣겠느냐는 말이죠. 내 주머니에서 한 푼도 안 나갔다고 기분 좋다고 하지.
뭔가 기적이 왔다는 그것이 나를 망하게 하는 기적이라고 누가 하겠어요. 간증집회, 암 나았다, 기도했더니만 우리 얘 서울대학 갔다. 그것이 바로 진짜 천국을 가리는 마귀의 시험인 줄 누가 감히 생각하겠습니까? 이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