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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도행전 46강 마태복음 37강 130228강의전도서

사도행전 46강 마태복음 37강 130228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공은주(IP:211.♡.100.169)

13-03-04 17:10

대전130228a-행17장30절(사망이 원수)46강-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도행전17장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렇게 돼 있지요. 이것은 사도행전14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요 대목에서 몇 가지 난해한 게 있는데 그것은 뭐냐 하면, 해와 그리고 햇빛과 비를 내렸다고 해서 밑에서 사다리를 탈 때 밑에서 올라갈 때 인간 쪽에서 하나님 찾아 올라갈 때 하나님과 마주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거든요. 마주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햇빛 주셨다, 공기 주셨다, 하나님 만나러 가자, 이렇게 시도하게 되면 하나님을 과연 만나는가? 못 만나요. 왜 못 만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와 여러 가지 우리의 생명을 줄 때는 반드시 중앙에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내리셨거든요.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연결 장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햇빛 주셨다, 공기주셨다, 해서 올라가면 언약을 만나지 못하고 도로 떨어져버려요. 이게 바로 29절에 보면,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되어 있지요. 사람들이 햇빛과 공기를 주셨으니까 해를 섬기다, 해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해가 보여 준다는 겁니다.

그래서 해를 섬기면 곧 무엇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리 보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빠졌습니까? 언약이 빠졌지요. 아까 장로님이 이야기한 가운데에서 순복음교회이야기 했었잖아요. 그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 하지만 거기에는 뭐가 빠져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빠져 있는 거예요. 언약은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만든 건데 그럼 순복음교회에서는 하나님 만나는 그 장치를 누구 쪽에서 만들어요? 자기 쪽에서 만들어내는 거예요. 자기 쪽에서 만들어내면 언약을 이루지 못하고 비언약이 되지요.

비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무슨 단체입니까? 언약 단체지요. 언약 공동체라 하잖아요. 그러면 구약 때 비언약 공동체는 누구지요? 이스라엘 주변나라지요. 그래서 아주 절묘한 매치지요. 구약에서 이스라엘뿐만 아니고 주변나라를 같이 배치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무엇과 만나게 하는 겁니까? 비언약과 만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다시피 이방나라가 저주받는 이유는 한 가지 언약이 빠져있으니까 결국 비언약을 두 자로하면 뭐냐 하면, 필히 우상숭배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가인이 제사를 드렸잖아요. 가인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제사를 안 받았습니다. 가인의 제사를 안 받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게 언약이 안 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가인이 제물을 동생하고 큰 형하고 해서 제물 좀 베끼지, 이건 베낄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에게 뭘 받게 되면 언약을 만드는 거예요.

노아가 착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노아가 착해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의인이라서 구원 받는 것도 아니고 언약을 이룬다는 조건하에 구원 받은 거예요. 아무리 노아가 훌륭해도 방주 안 만들고 방주 만든 곳에 안타면 여지없이 물 심판에 날아가게 돼있어요. 베드로후서에 보면 나오지요. 노아 때 달랑 8명만 구원받았다. 베드로가 왜 그런 이야기하는가 하면, 구원 장치는 이미 마련돼 있다는 겁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꾸 걱정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되면 사람이 완벽하지를 못해요. 아침에 죄지었다가 오후에는 회개했다가 밤에는 또 죄 지었다가 도대체 오후3시의 행동으로 구원받을 겁니까? 오전7시 45분의 행동한 거, 생각한 거 가지고 이게 나입니다, 하고 내세울 건가요? 밤11시 2분에 드라마 끝날 때 그 때 내 마음가짐가지고 하나님 이 마음 어떠셨어요? 받을 거예요. 어떻게 할 거예요? 중구난방이라 하지요. 이것은 종잡을 수 없어요. 우리 마음도 종잡을 수 없어요. 그것 때문에 교회 다니면서도 불안한 거예요. 새벽기도 할 때 그 때 은혜 바짝 받았을 때 주께서 재림하시면 아이고, 믿음 좋다고 칭찬 받을 텐데. 빨리 안 오면 이거 식어지잖아요. 아침에 출근한다고 애들 양말 세탁기에 넣다보면 은혜 받은 것도 다 깨져버리고.

어느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남자도 참 대단한 남자에요. 집에 들어갈 때부터 아예 중국집에 가가지고 자장면을 한 그릇 사먹고 들어가요. 왜냐, 아내하고 말을 안 하기 위해서. 말을 안 섞기 위해서. 그러면 아내가 오면 “야, 인간아! 내가 밥을 해놨는데 왜 밥을 안 먹어.” 남편은 “말하기 싫어.” “인간아! 이게 사는 긴가?” 남편이 “돈만 벌어오면 된다면서.” “돈만 벌면 이게 부부야.“ 이런 식으로. 나중에 둘 다 상담 받는데. 여자가 할 일 없으니 잔소리만 하고, 남자는 잔소리 듣다, 듣다 지쳐 이젠 말도 듣기 싫어가지고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거예요. 둘 다 고집대단해요.

보세요. 사람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지가 착하고 싶어도 주변이 그렇게 화를 돋우면 화 안 날 위인이 없습니다. 다 착한 아내 되고 싶은데 남편이 자장면 먹고 들어와 버리면 엿 먹이는 거예요. 니 밥 안 먹는다는 뜻이거든요. 여기에 무슨 기도하고 성화하고 소용없어요. 주변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반듯하게 살기를 주변 상황이 그렇게 가만히 고요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계속 흔들어대는 거예요. 왜, 이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이것은 어차피 뭐냐 하면, 우리가 땅에서 열심히 뭐 하겠다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인데, 이게 뭐냐, 니가 하는 모든 것은 언약이다? 언약 아니다? 언약이 아니다.

언약은 니 행동을 보태서 만드는 게 아니고 언약은 100% 예수님께서 이미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룬 것을 흔들리는 우리를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라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늘 흔들려야 돼요. 아침 마음가짐, 저녁 7시 마음가짐, 기분 좋았다가 나빴다가 일 벌어지면 하나님이고 뭐고 다 집어 치우고 멱살 쥐고 싸우고 이렇게 흔들리게 하는 것은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흔들거리면서 그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저 어떻습니까?” 하고 들이 밀지 말라 말이지요.

사도행전 17장 오늘 본문내용 간단한 겁니다. 이스라엘하고 기존 민족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너희들 보기에는 이스라엘 그 나라 별거 없네. 너의 나라보다 내가 더 잘 살아, 이렇게 의시 댈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돈이나 권력으로 보는 게 아니고 언약으로 본다는 겁니다. 언약으로 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흔들리지 않는 절대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한 거예요.

몇 십 년 전에 제가 이런 강의할 때, 들은 예가 뭐냐 하면, 바로 선녀와 나무꾼 예를 들었습니다. 위에서 두레박이 내려와서 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언약을 타고 올라가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강의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언약 속에 올라타면 그냥 두레박에 올라타면 되는데 하나님의 언약 속에 올라갈 때는 어떻게 올라가느냐 하면, 죽음 자로 만들어서 올려 태운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죽은 자로 안 만들면 두레박 안에서 술주정을 해 싸는 거예요. 두레박 타고서 지 자랑하면 안 되거든요. 죽여서 하는데.

인간이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제일 인간들이 힘든 것은 뭐냐 하면, 죽음이 다가온다는 겁니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은 비언약적 사람이고요. 이미 죽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건 성도가 되는 겁니다. 비언약적 사람에게 죽음이라 하는 것은 목숨이 끊어지는 걸 죽음이라 해요. 그런데 성도가 성령을 통해서 맛본 죽음은 숨 안 끊어져도 이미 죽음과 함께 있습니다. 죽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죽음은 다가오는데 그 다가오는 죽음을 자기가 자살해도 경험할 수 없다는 게 굉장히 아쉬운 점이에요.

베드로가 예수님 갈 때에 제가 목숨을 버리고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주님께서는 아서라 말아라 니가 죽는 죽음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그 죽음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어도 죽지를 못 해요. 이것은 제 말이 아니고 요한복음 5장이지요. 그들이 죽고 난 뒤에는 신자나 불신자나 다 부활하지요. 사람이 죽으면 차라리 좋겠는데, 인간은 죽어도 안 죽으니까 이게 문제에요. 안 죽어도. 죽으면 무덤에서 다시 호명해서 호출해서 다시 살려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칼로 난도질해도 안 죽어요. 골치 아파요.

태어난 것도 우리 맘대로 안 태어났잖아요. 죽는 것도 우리 맘대로 죽을 수가 없습니다. 자살해도 안 죽어요. 거지도 안 죽었고 그 앞집 부자도 분명히 죽었는데 나중에 보니 안 죽어 있어요. 이게 골칫거리입니다. 어디 버릴 수도 없고 칼을 꽂아도 안 죽으니까. 한 번 존재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존재의 없애는 권한은 그 존재 받은 사람한테는 권한이 없습니다. 만들어진 사람한테는 만들어진 자기를 취소시킬 권한이 없어요. 그러면 이러한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데 진짜 죽음이 다가올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게 오늘 강의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니까 이것만 잘 들으시면 어려운거 그냥 넘어갑니다.

죽음이란, 시간이 정지된 상태거든요. 이 말은 죽음이란 ‘시간이란 의미 없음’ 예를 들면, 거지 나사로의 맞은편 부자가 지옥에 갔을 때 지옥에서 카렌다나 시계 같은 거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습니까? 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살아있다는 것은 항상 살아있는 것을 내일도 살려야 되고 그 다음 또 살려야 되기 때문에 항상 뭐냐 하면, 여기서 시간을 느끼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시간을 느끼면서 늘 지금 뭐해야 되고, 이거하면 뭐해야 되고 느끼는데 어떤 일에 몰입을 할 때 뭐 가는 줄 모른다? 시간 가는 줄 모르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연애할 때 커피숍에 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어, 벌써 이 만큼 됐나? 하여튼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시간이 너무 안가요. 안가도 너무 안가. 수업시간에 애들이 눈 반짝 반짝하고 잘 들으면 너무 잘 가요. 그런데 수업 가르치기 싫을 때 이거는 선생님이 수시로 시간 봐요. 소사 뭐하노? 종 좀 쳐라, 종 좀. 미치겠지요. 그렇지요? 온갖 거 다 얘기해도 시간 안가.

몰입이란 결국 뭐냐 하면, 이미 몰입할 때 자기는 이미 죽었습니다. 자아는 죽은 상태가 됩니다. 이게 인간 인생가운데에는 수시로 일어나요. 나의 것이 전혀 생각이 안 날 때. 여기서 나의 것이라 하는 것은 내 자식, 내 가족, 내 통장, 내 건물도 포함되지만 내 명예, 내 체면 이런 것이 전혀 생각 안 날 때는 이것은 전혀 시간이 가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상대방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나는 다가가도 너무 작아. 그대 앞에 서는 나는 왜 이렇게 작아지는가? 내는 있으나 마나, 그대만 있으면 나는 없어도 괜찮아. 이럴 때는 내 쪽에서는 시간을 잊어버려요. 요게 모든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면 시간의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죽음에 함께 있다는 말은 성도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출세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 출세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성공하게 해주세요. 이 자체가 성도한테는 기도할 내용이 안 됩니다. 왜, 우리는 이미 시간이 정지돼 있고 하는 것은 뭐만 하면 된다? 주의 일만 몰입하면 그만이거든요. 그 대표라 하는 사람이 여기 나오는 사도바울 아닙니까? 사도바울이다 이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주의 일을 시킬 때는 정신없습니다. 그냥 거기에 몰입을 해버려요. 그 순간 이미 사도바울은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이미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형편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는 살아있으면 그리스도한테는 시간이라는 것이 천년 지났다. 이천년 지났다가 예수님한테는 아무 의미 없는 계산이에요. 주님한테 10만년 지난 것이 의미 있어요? 없어요? 의미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해서 예수를 믿게 되면 성령이 임한 순간, 충만한 순간, 내 시간대가 날아가 버리고 더 나아가서는 나라는 존재자체가 존재 가치가 의미 없는 가치라는 것. 그동안 나는 의미도 없는데 의미를 강제로 나한테 준다는 것은 이것은 내 죽음상태에 있으면서 옛 성품, 옛날 내가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살아있었던 그 행세가 그 전에 유발되니까 그거는 주님 안에서 자기 생각한다는 것은 지만 신음소리 낼 수밖에 없어요. 자기만 힘들지요.

그런데 어렵다는 말이 뭐냐 하면, 17장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지 않니 했지요. 허물지 아니했다는 것은 그 죽음의 의미가 들이닥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다 명하여 회개하라 했다 말이지요.

회개라는 말은 어디를 쳐다보다가 그만 쳐다보다, 라는 뜻이거든요. 회개하는 것은 그 전에 누구를 쳐다봤습니까? 자기지요. 왜 자기를 쳐다보는가 하면,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자기를 살아있는 내가 쳐다보는 거예요. 그럼 회개라는 것은 뭘 안 쳐다본다? 나를 안 쳐다보고 예수님이 나를 덮쳐버렸다. 주님의 상태가 나를 덮쳐버릴 때면 나는 그 안에서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내거 볼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상태가 뭐냐 하면, 회개 상태에요. 회개는 울고불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잠깐이고 진짜로 회개상태에 놓이게 되면 울고불고할 건더기가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그걸 예수님의 무채색이고 냄새도 없고. 시간도 정지돼 있고 그게 뭐냐, 그냥 예수 믿어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왔을 때, 두 제자가 바삐 예루살렘을 볼 일 다보고 고향집으로 내려가는데 예수님께서 만나줘서 눈떠줬다 말이에요. 그럴 때 그 두 제자가 가서 뭐라 했습니까? 다시 고향으로 그냥 갔습니까? 나는 메시아 만났다. 부활하신 예수님 만났다, 했지요. 요한복음 4장에서 물 길러 왔던 그 아줌마는 물 기르고 물 떠서 집에 갔다 준다는 시간적인 계산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의 개입이 있었다 말이지요. 예수님의 세계가 자기 세계, 자기 인생이란 세계에 예수님이 침투해 버린 거예요. 침투해 버리니까 처음에는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자기 이야기했지요. 예수님이 끄집어냈지요. 니가 남자가 5명인데 이번 사귀는 것은 6번째다. 분명히 이야기하면서 자기 것을 다 끄집어내요. 자기가 감추고 싶었던 여성으로서 감추고 싶었던 그 은밀한 것을 주님 앞에 다 폭로당한 거예요. 다 거덜 내니까 드디어 내거라고 쥘 거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누룽지를 닥닥 다 긁은 거예요. 가마솥의 누룽지를 다 긁어서 자기 거 다 드러난 거예요.

다 드러나고 난 뒤에는 그 때부터는 무채색 되는 거예요. 자기 자신도 무채색이고, 냄새도 없고, 있어도 없는 거고 그저 현재 있다는 것은 뭐냐, 주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그것뿐인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물 길러 온 여자가 뭐라 합니까? 물동이 버려두고 “메시아 만났다!”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상태냐, 회개의 순간이에요.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회개의 순간이 되려면 뭐가 찾아와야 된다? 장차 모든 인간이 죽고 난 뒤에 있는 죽음의 상태가 미리 앞당겨서 덮칠 때는 그 사람은 더 이상 살아있다는 것의 자체가 의미 없다 이 말이지요.

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있지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걸 할 때, 수능교과서나 참고서에 보면 놀라운 해석을 해놨잖아요. 그 때의 그 모든 해석이 지금에 와서 복음적으로 언약 적으로 보니까 전부다 바탕이 뭐냐, 나는 살아있고 나는 계속 살아있어야 돼요. 나는 지금까지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 거고, 죽고 난 뒤에도 살아있어야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그 시를 읽고는 회개가 안 돼요. 반성은 되잖아요.

여기서 반성과 회개의 차이가 드러나지요. 반성이라 하는 것은 “그래, 이렇게 살면 안 돼! 더 잘 살아야 돼!” 이것은 반성이고, 회개라 하는 것은 살려고 자시고 할 게 날아가 버린 거예요. “그래, 나는 아껴야 돼.” “나는 귀한 존재야.” 이것 자체가 날아가 버렸다니까요. 뭐가 있으니까 자꾸 미련을 갖는 거고 있으니까 이걸 개선하려고 하는 거고, 있으니까 남한테 멋있는 존재로서 다시 개과천선하려고 애쓰니까 그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한테 의미를 주려고 하는 거예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는 시도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전부다 희망을 줄려고 한다 말이지요.

어제 수요설교 들었습니까? 제가 분명히 포로 잡혀간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 둘 다 틀렸다고 이야기했지요. 포로 잡혀간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지금은 모든 걸 박탈 상실을 당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내 박탈한 빈 구멍을 채워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포로 잡혀갔다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개입하니까 옳은 생각이었어요? 틀린 생각이었습니까? 그게 틀린 생각이었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몸이 다시 고향 땅으로 예루살렘 땅으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런 이야기한 적 없어요. 이 몸이 고향 땅 가는 것이 아니고 이 몸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성소로 바꾸어서, 하나님의 관심은 성소에 있는데 인간들은 포로 잡혀가면서 “하나님이여,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체면 언제 회복해 주시겠습니까?” “이 몸 고생스럽지만 고생의 낙이 있다고 언젠가는 이것도 보람 있겠지요.” 이것은 뭘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자기 자신. 그러니까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반성은 하는데 뭐는 안 된다?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반성하면 반성할수록 자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 더 단단해지지요. 점점 더 돌덩이가 돼 갑니다. 이게 담석증이에요. 정신적인 담석증 상태에요. 거의 모든 교회 100%가까울 정도의 모든 교회는 바로 교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교회에요. 언젠가는 여러분들이 억울하게 당한 거, 주께서 갚아주십니다. 열심히 기도하시면 여러분들의 원상회복이 가능합니다. 주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여러분의 눈물과 콧물과 정성과 헌금과 헌신과 선교하고자 하는 충성, 그러한 열심 주께서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간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성소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를 어떻게 하는가, 성소에 들어가면 죽여 버리는 거예요. “진작 죽어야 될 인간이 죽지도 않고 어디서 입을 나불나불 거려. 뭐가 해방이고, 뭐가 보상이야, 진작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모두 다 죽는 건데.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 못 따먹으면 무조건 죽은 인간이에요. 살았다고 해봐야 ”니, 생명나무 먹었어?“ 못 따먹으면 죽은 거예요. 생명나무 없으면 죽은 거예요. 결국은 죽어있으면서도 죽어가고 있고.

제가 초등학교 때 달성공원 근처에서 살았거든요. 오늘 아침 꿈속에서 그게 계속 나오는 거예요. 달성공원 앞의 전경이. 그 앞에 있는 야바꾼들. 가끔 보이던 상의군인들, 그리고 어릴 때의 어른들의 느낌은 늙었다는 것. 어릴 때의 느낌은 왜 어른들은 저처럼 다 늙었느냐 말이지요. 그리고 달성공원 앞에 가면 원화여고 있었는데, 그것도 생각나고 그 달성공원 앞에 죽~ 노인들 모여가지고 할 일없이 지레꾼도 보이고 그런데 거기에 보니까 가끔 전도하러 오는 사람도 보이는데 제가 또 그 꿈을 꾸면서 해석을 내린 게 뭐냐 하면, 모두 다 신자가 아니었다는 것. 그렇게 바쁘고 분주하고 모이고 놀고 어린아이 모습이 보이는데 신자는 본 적이 없어요. 교회는 많이 봤는데, 대구에서 큰 서문교회까지 봤으니까. 교회는 봤는데 지금에서의 신자는 신자를 만나 본적이 없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힘들다, 어렵다,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교인들은 많은데 그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예수님이 나에게 이런 이득을 줬습니다. 이런 효과를 줬습니다. 이야기하는 사람 많은데 교회 나와서 이런 이득 얻은 거 많은데, 예수님의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본적이 없어요. 왜? 관심이 전부다 어디에 있기 때문에? 전부다 자기 자신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회개가 안 되지요. 자기 자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 자신에다 끌어당겨서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뭘 잊어버린다? 자기를 잊어버리지요. 이게 몰입이라 했지요. 자기 자신이 무채색, 색깔도 없어요. 냄새도 없어요. 내가 있었나, 할 정도로 시간가는 줄 몰라요. 자기 시간대가 날아가 버렸으니까. 자기 계획이 없어져버렸으니까.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만약에 성령 받았다. 그러면 직장생활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그냥 지시하는 업무에요.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세시는 분이 오늘도 하루 일과를 주께서 조정해서 지시와 명령을 하달할 뿐이에요. 그런데 주님의 지시가 없어버리면 하루 일과를 누가 꾸며야 돼요? 내가 꾸며 놓고 내가 시간대를 유지해야 되고 이 시간대에 그것이 달성됐는지 계속해서 점검해야 되고 그러니까 일은 되기는 되는데 과정이 너무 너무 힘들지요. 그리고 일을 혹시 누가 방해할까봐. 심지어 하나님이 내 계획을 방해할까봐. 하나님한테는 원망도 못하고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주께서는 내 뜻대로 안 되게 하지요. 얼마나 하나님한테 화가 나겠습니까? 주께서는 솔직하게 화난다고 이야기하라 해도 차마 우리는 너무 점잖아서 화난다는 소리는 못하고 내숭떨고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 어떻게 하느냐 하면, 회개하기 위해서 죽음을 주시는 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그 다음 천하를 뭐할 사람? 심판할 사람이지요. 오늘 아침 펜션에서 4명의 남자가 자살해서 죽었어요. 그들이 자살할 때, 이 심판은 누가 누구에게 내린 심판입니까? 자기가 생각해서 내가 죽는 것이 내가 장렬한 죽음이라고 여겨서 자기가 생각해서 내린 심판이잖아요. 아까 얘기했죠. 백날 자살해봤자 주님의 심판을 맛보겠어요? 맛보지 못하겠습니까? 맛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사람이 자아에게 분열이 있는데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구원과 심판은 따로 있고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구원과 심판은 따로 있기 때문에 이걸 인간의 힘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맛 볼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인간들의 딜레마가 들어있어요. 어떤 딜레마냐 하면, 요번에 내가 이런 잘못을 했기 때문에 내가 요 정도로의 뺨을 때리면 안 되겠느냐, 분명히 *표를 눌러야 될 것을 #을 눌렀어요. 그렇다면 내가 나한테 뺨을 2대 때리면 고것 잘못에 대한 벌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2대 때리고 보니까 ‘아니야, 아니야, 더 때려야 돼!’

그러니 인간은 뭐냐 하면, 어떤 성과를 이루게 되면 성과한 그 자리에서 새로운 빈 공백이 생기는 겁니다. 나한테 어떤 체벌을 하기전 까지는 그런 공간이 안 나타났는데 내가 나한테 “하나님, 내가 이제 이 정도하면 죄가에 대한 체벌이 됐습니다.” 하고 안심하는 그 순간 ‘아직, 멀었어.’ ‘아직도 아니야.’ 내가 30명 중에서 1등을 했는데 1등 따고 난 뒤에 들려오는 소리는 뭐냐, ‘아직도 전혀 1등해야 돼!’ 내가 판사가 되고 난 뒤에 들려오는 것이 ‘아직도 아니야, 너는 부장판사가 되어서 나중에 법무부장관이 되어야 돼!’ 모든 인간은 애든 어른이든 남녀노소 불구하고 할머니라도, 오늘 뉴스에 80먹은 할머니가 수능을 쳤다는 거예요. 수능 쳐서 대학가서 뭐합니까? 동아리 활동하겠다는 거예요. 지금 대학생들 동아리 활동 안합니다. 지금 취직 준비하고 있어요. 옛날 낭만일 때만 동아리활동하지, 지금은 들어가자마자 취직준비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지금 낭만을 꺼내는 거예요. 동아리 활동하면 뭐 하겠노? 좋다고 소기기 사먹겠지! 사람은 뭔가 마무리하게 되면 아니야, 아니야, 아직도 아니야. 뭔데? 그건 몰라. 뭔가 일을 저질러봐야 돼. 딱 저질러보면 그래, 그게 다는 아니야. 미칩니다. 이 정신분석학에서 제일 인간이 산 3개를 넘었는데, 내가 원하는 산은 벌써 4개째 물러나 있어요. 달을 잡았는데, 내가 간만큼 달은 물러나요. 달은 또 멀어져있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건 인생방향 잘못돼 있는 거예요. 분명히 인생 잘못된 거예요. 나중에 쫓아가다 보면 지옥에 다 빠지는 거예요. 심지어 부자는 지옥 가서라도 물 없다고 평소에 한 행세대로 거지 나사로보고 한 동네 사는지 잘 아는 모양입니다. 물 한 그릇해서 나한테 보내달라고 요청하다보니까 지옥 가서도 아직도 아니야. 그걸 뭐냐 하면, ‘갈증’입니다. 갈증. 영혼의 갈증이잖아요. 정신적인 갈증.

지옥은 아무리 벌 받아도 아직 남아있어요. 계속 남아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중도에 존재해요. 항상 길 위에서 존재해요. 마지막 피니쉬 라인을 찍었으면 좀 편히 쉬었으면 좋은데, 피니쉬가 끝이 보이질 않네. 끝 지점이 어딘지도 모르고 차라리 등산하면 좋겠는데, 등산가도 이번에는 더 놓은 산, 같은 높은 산도 고난도로, 같은 산을 가도 여름 말고 겨울, 같은 산을 가도 무산소로, 알프스 산을 등산하는데 전부 다 전에는 야~호를 불렀다 말이지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알프스의 그 유명한 북쪽페이스 향하여 올라가는 거예요. 굉장히 바람이 부는데 이걸 또 통과해서 이것도 기록 채운답니다. 기록세우면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먹겠지! 이거 왜 하는데?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죽고 싶어도 못 죽는 거예요. 겨우 죽을 때는 뭐만 나와요? 결국은 살아생전에 못 다한 지 자식한테 물려주는 거예요. 교회에 세속 하듯이.

목사가 목회하는 것, 선교사가 선교하는 것, 전부 다 이게 뭐냐 하면, 등산가가 등산하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자기 존재의 목마름을 그 때 그 때 때우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말이지요. 그래서 반성은 하되, 회개가 안 되는 거예요. 교황 라칭거가 교황 되기 이전에 내가 신학교 때 그 사람의 책을 읽었어요. 왜냐 하면 천주교의 최고 신학자거든요. 나는 조직신학자로 알고 있어요. 최고의 신학자였습니다. 교황 되고 난 뒤에는 신학이고 뭐고 하나도 없지만. 지금은 은퇴해서 여름에 별장에 간다 해요. 가서 뭐합니까? 가서 뭐하겠어요? 잊는 게 안 돼요. 잊으려면 뭐가 들어와야 하는가 하면, 나보다 더 사랑하고 싶은 분이 사랑이 와야 돼요.

사랑이 오게 되면 그 때부터 뭐하느냐 하면, 지시가 있을 뿐이에요. 제가 광주강의에서 오 목사님과 이야기하다가 오 목사님이 사모님과 애들과 의논해서 했다는 거예요. 제가 옆에 있다가 “그것은 의논할 문제가 아니고 아내한테는 의논한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아내한테 그냥 지시받으면 돼요.” “그 단어가 왜 생각 안 났을까? 지시받으면 될 거 가지고 왜 의논한다고 했을까?” 그 한 끝 차이거든요. 가정은 그냥 지시받으면 되지, 지 의견이 왜 필요한데?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거든요. 오 목사님이 단어를 적었어요. 왜 그 단어가 생각 안 났을까? 사랑하는 자는 지시만 받으면 돼요. “오늘 일찍 일어나. 회사가야지!” 전부 다 지시에요. 내가 나에게 지시하면 안 된다니까요. 그럼 내가 힘들어져요. 그리고 주님도 뭐고 하나님도 다 귀찮고 잊어버려요.

매일아침 숨 쉬잖아요. 17장 25절,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만민에게 뭘 준다고요? 생명과 호흡 주신 것은 오늘 아침 우리들에게 지시입니다. 아침에 지시해요. “아침에 눈 뜨고 숨 쉬나?” “숨 쉽니다.”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신앙인이냐, 아니냐는 간단한 거예요. 하나님과 같이 살면 신앙이고 하나님을 내가 찾을 때마다 나타나는 하나님은 나의 우상이 되고, 내가 신이 되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목적이고 신이 그림자가 아니라 신이 하나님이 목적이고 우리는 떨어질 라야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고, 어떻게 몸통과 그림자를 자를 수 있습니까? 자를 수 없지요. 내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 계신 곳에 우리는 붙어있는 거예요. 회사가 내 회사가 아니고 주님의 회사인데 들어붙어 있고 이 가정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내가 거기에 그냥 들어붙어 있는 겁니다. 언제까지? 호흡을 주실 때까지만. 그게 80이 됐던, 90이 됐던, 치매에 있던 모르겠고 하여튼 주의 뜻대로 우리가 지금 아직도 호흡 쉬고 있는 거예요.

왜 호흡과 생명을 주시는가? 회개하라고. 어떻게? 31절 봅시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우리도 인간인데, 우리보고 우리는 죽은 인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화가 나잖아요. 그러면 다 죽은 인간이지, 안 죽은 인간 누가 있습니까? 할 때 나타난 것이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니가 생각하는 죽음 말고 하나님이 언약 적으로 죽이는 언약 맨, 언약 사람이 등장시키는 게 누구냐 하면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 있잖아요. 그 죽음만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줄 때, 통과하는 유일한 새 언약입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예수님의 죽음에 합세한 자만이 마치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간 것과 같은 언약 속에 들어가는 과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우리 생각하는 것이 계획한 것이 다 의미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계획한대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계획 잡기 이전부터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시는 거예요.

기도할 때 주께서 뭐라 했습니까?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이미 기도기 이전부터 주고 있는데, 그걸 새삼스럽게 달라고 한다면 이미 죽어있는 그 취지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이미 기도 안 해도 받은 것이 아직도 사랑으로 이해하느냐, 그게 주께서의 취지인데, 자꾸 우리는 준 것은 빼버리고 자꾸 달라, 달라 하는 거예요. 완전히 TV쇼핑에 빠진 중독된 아줌마같이 사 놓고는 안 쓰고, 창고에 집어넣고, 또 전화 걸어서 또 사서 안 쓰고. 신상중독. 자꾸 새로운 상품이 오게 되면 자꾸 사는 것. “니는 백날 뭐해도 잘 되도 십자가 앞에서는 이미 죽은 존재야.”

다시 처음부터 할게요. 인간은 올라가봐야 신에게 다가가 봐야 언약에 이르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지니까 이게 우상이라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실 때는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언약을 통과해서 주시거든요. 언약을 신약에서는 뭐냐, ‘예수 안’이라고 해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주시는 것은 생명주시는 것이 아니고 호흡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먹고 입을 거, 주시는 것이 아니고 진짜 중요한 것은 뭡니까? 예수님을 주시는 겁니다.

첫 째 시간 마치면서 고린도전서15장26절 봅시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 이니라” 아! 보세요. 왜 돈보다 왜 금보다 예수님이 더 중요한가 하면, 결국 모든 성도에게 마지막 정복돼야 될 마지막 최후의 원수, 원수가 누구라 했지요? 사망! 그 사망은 우리가 율법 지킨다고 이겨낼 수 없는 겁니다. 죽어서 영생 얻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노력한 것을 근거로 해서 주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주시는 마지막 우리에게 주시는 최후의 선물이 뭐냐 하면, “내가 그 원수를 너에게 들이닥칠 죽음을 내가 이겼으니까 니가 알고 있는 죽음은 백번 천 번 죽어도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말라. 그런 것은 니가 죽는 죽음은, 베드로가 죽는 죽음은, 그것은 휴식 또는 잠자는 것이다.”

주 안에서 잠자는 자는 뭐냐 하면, 안식, 쉰다, 휴식. 저는 많은 목사나 선교사들이 안식년, 안식일 하는데, 아예 안식했으면 좋겠어요. 안식년하고 또 일어나서 하게 되면 안식년 하는 게 무효 되잖아요. 7년 하고 1년 쉬고 하지 말고 아예 보냈으면 좋겠어요. 이차에 그만.

우리는 죽어도 그냥 쉬러 가는 거고 이 방에 있다가 저 방으로 가는 거고 주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우리 죄가, 우리의 사망이 온 것은 죄 때문에 온 거거든요. 우리 죄 문제를 해소시켜 놓으니까 이는 죽는 것이 쉬는 것이 되고 그 자체가 또 부활의 세계에 참여되는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정작 주신 것은 마지막에 뭐냐 하면, 죽어도 산다는 부활입니다. 그 부활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건데, 죄 문제를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피로서, 우리의 노력이 아니고, 예수의 피로 씻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말을 사실은 시간적으로 따지면 이렇게 되지만, 시간을 무시해 버리면 용서하는 자체가 이미 부활의 능력으로 덮친 것이고 성령으로 덮친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나는 무슨 잘못하고 무슨 짓을 해도 막 살아도, 너는 용서 받았기 때문에 이 자체가 축복 속에 놓여 있고, 하나님의 사랑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거예요. 내가 분명히 나쁜 짓하고 욕하고 이랬는데 양심의 가책이 되고 분명히 이것은 누가 봐도, 내가 봐도 잘못된 건데, 이런 것을 일체 더 이상 묻는다? 안 묻는다? 일체 이런 거 때문에 묻지도 않고 이런 거 때문에 회개하지 마세요.

회개라 하는 것은 지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고 체벌하는 이걸 회개해야 돼요. 아직도 지한테 너무 신경 쓰는 것,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매일같이 회개하게 하시는 그 능력, 회개하시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데 왜 니가 자꾸 니한테 의심하느냐고 나무래 주시는 이 사랑, 이 사랑 있기를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211.♡.100.169)

13-03-13 16:26

대전130228b-마13장28절(언어의 질서)37강-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3장24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비유가 또 나오지요. 앞에 나오는 비유는 씨 뿌리는 비유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지난번에 설명을 해드렸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라 하는 것은 4종류의 밭이라고 돼 있는데 사실은 4종류의 밭이 사람이 4종류가 있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 보기에 예수님이 갖고 있던 예수님이 다이아몬드라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다이아몬드인데 4가지 서로 다른 측면을 두고 이야기 한다 이리 이야기했지요.

만약에 4면이 앞, 뒤 있다면 예수님이 하는 조명등이라면 이쪽에서 보면 빨간색으로 보이고 저 쪽에서 보면 파란색도 보이고 어떻게 일하면 노란색도 되고, 주황색도 되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주신 씨 곧 말씀, 말씀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마귀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말씀을 빼먹는 현상이 보이게 됩니다. 또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복음을 들을 때 잠시 기뻤으나 환난당할 때 넘어지는 그런 작용들이 일어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가는 그것도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 반드시 해내는 일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또 씨를 뿌리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 환난당할 때는 주의 일을 벌일지라도 반드시 주를 버려야만 돼요. 그게 주님을 버리고 환난일어 났다고 나는 주님 싫어, 라는 현상이 일어나 줄 때, 그것도 예수님이 씨를 뿌리는 취지 중에 포함이 됐다 이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다가 갑자기 돈의 세상사는 유혹과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버리니까 나중에는 예수님 잊어버리고 예수님 누구지? 이런 식으로 복음이고 뭐고 다 버렸을 때, 그 현상도 필히 일어나 줘야 되는 거예요. 그것도 예수님께서 말씀을 뿌릴 때,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반드시 그런 것도 일어나도록 예정된 겁니다. 예정된 결과가 일어나줘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니까 무럭, 무럭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도 이런 열매도 맺어줘야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될 때, 열매를 맺든,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든, 환난 때문에 배반을 하든, 이 모든 것이 다 누구 안에 들어있는 이야기다?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위적인 인간의 자기 결단 같은 것은 여기서 싹 다 빠지지요. 다 빠지는 거예요. 나쁜 밭에서 회개해서 좋은 밭 되려하는 시도는 전부 다 엉터리해석입니다. 성립이 안 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때, 좋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필히 이런 예수님을 배반하고 마귀한테 쫓아가는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 줄 때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구나!’ 어떤 사람이 복음 듣고 좋아하다가 환난 당했다고 넘어질 때, 그것조차도 주께서 ‘아, 말씀하신대로 이미 예언하신대로 그 갈 길을 그런 현상이 일어나야만 하는군요.‘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30배, 60배, 100배 열매 맺을 때 이것은 우리의 열매가 아니고 누구의 열매다? “바로 씨 자체의 열매입니다.” 고백할 수 있는 자만이 정말로 옥토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60배 기대한 것이 아니고 60배건, 100배건 간에 내가 나한테 적용할 문제가 아니고 주께서 나를 그냥 마구잡이로 옥토 되게 하셔서 열매 맺게 하시는 모든 그 능력은 어디에 합류돼 있습니까? 씨 속에 포함된 능력이라는 말이에요. 그러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자유권에 속하는 겁니다. 그것이 지난 시간에는 씨 뿌리는 비유였습니다. 이런 씨 뿌리는 비유를 세상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왜냐 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로부터 이해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어려운 건 아닌데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교양으로 상식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걸 딸기라고 합니다. 호박씨, 깨강정 제 얘기 한 번 들어보세요. 이게 왜 딸기 입니까? 딸기, 깨강정 이걸 가지고 뭐냐 하면, ‘사물의 질서’라고 해요. 이걸 가지의 ‘언어의 질서’라고 합니다. 이걸 1:1로 지칭할 때, 대응선, 대응이 된다, 하는 겁니다. 깨강정은 결코 딸기가 아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문제되는 거예요. 딸기, 깨강정, 물병 이것은 언어의 질서가 돼 가지고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영어로는 스트로우베리, 딸기 이것은 우리나라의 언어질서에 의해서 딸기지, 미국가면 딸기가 무슨 소리인지 모른다 말이지요. 영어로 해야 되니까. 어쨌든 인간에게서 나온 거죠.

그러면 깨강정, 딸기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연에서 나오지요. 아무리 생물학이 발달하고 DNA가 발달해도 그 딸기 하나를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있는 딸기를 개선하고 개량하고 번성하면 되는데, 애초에 딸기가 없는데 단지 딸기 하나 만들어볼까? 언어가 먼저 ‘딸기’라고 만들어 놓고 딸기에 합당한 딸기 제품을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러면 묻습니다. 사물의 질서가 갑이에요? 언어의 질서가 갑이에요? 사물의 질서가 갑이지요. 인간은 뒤따라가는 을이지요. 왜냐 하면, 인간 몸 자체가 사물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 여기서 어렵습니다.

인간들은 인간의 질서가 인간보고 인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딸기나, 물병이나, 깨강정이나 이런 거 사실은 사물의 질서인데,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우리가 안 만들었지요. 이건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잖아요. 사물의 질서는 하나님이 만들었는데 뒤늦게 인간이 뒤늦게 같은 사물의 일종이 인간이 나와서 여기다가 이름을 붙인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데리고 하나님이 만든 것에 이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하는 그것은 이제는 다 너희에게 소속됐다는 말이 아니고 이름 지으라고 하달한 너마져 이름 짓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묻겠다는 거예요.

교무실에 있는 선생님이 학급에 학생 수가 현재 몇 명인지 알아보라고 반장보고 이야기했어요. 반장이 몇 명인지 반장보고 했어요. 출석안한 학생을 불러오라는 말도 아니고 32명인데 30명이 왔다고 해서 애 둘을 보태서 두 명 더 채우라는 말이 아니고 있는 애 숫자만 세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선생님, 지금 학급에 30명입니다.”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그 30명이 되는 모든 학생들이 다 반장소유입니까? 반장소유 아닙니까? 아니지요. 언어의 질서를 가지고 인간에게만 언어의 질서를 주신 것은 니 인간만큼은 일반사물들은 있음 그 자체, 하나님께서 참새를 기르신 그 자체, 들풀을 만드신 그 자체로 됐지만, 인간에게는 언어를 통해서 하실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그 나라 의를 이뤄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그 나라 의를 위해서 아담이 만들어졌는데 그 나라 의를 이룰 때, 그러면 지금 한국의 개혁주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는 것이 뭐냐 하면, 청지기 정신, 잘 맡아 관리 잘해서 환경보호하고 이게 우리 인간이 해야 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서 사는 책임과 하나님이 주신 자연물들 잘 관리해서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잘 기도해주고 하는 생태문제 그런 거 하잖아요. 이산화탄소가 너무 많아가지고 온난화 때문에 생태가 깨졌다 하지 않습니까? 그건 과거를 몰라서 하는 소리에요. 지구의 공전에 의하면 10만년 주기로 빙하기는 오게 돼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백날 환경보호 안 해도 공전하면 축이 달라져서, 축이 달라지는 이유는 지구는 1초에 10만Km씩 태양의 공전을 돌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와 태양 사이는 뭐가 있느냐 하면, 중력 장애에 연결되기 때문에 고무판에 무거운 물건을 두 개 둔거예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입니다.

태양에 있는 변화가 지구의 변화를 주게 돼 있어요. 에이스 침대가 아니거든요. 한 쪽에서 누르면 저쪽에서는 물렁하게 돼 있어요. 물침대처럼.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조차도 어디에 속한다? 사물의 질서 속에 포함돼 있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이 특별히 보는 것은 뭐냐 하면, 언어의 질서를 주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2장에 보면, 인간에게 특별히 뭐 주지요? 선악과를 집어넣고 뭐라 합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언어적인 명령을 주잖아요. 언어적인 명령.

언어적인 명령을 줄 때, 모든 딸기는 있으면 돼요. 참새나 독수리나 그냥 있으면 돼요. 전봇대에 있으면 되는데, 인간은 있는 것 더하기, 선악과를 안 따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 말길을 알아먹고 안 따먹어야 되는데 만약에 안 따먹었을 때에 그 나라 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바로 아까 생태학을 하고 환경보호하고, 이것이 그 나라의 의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뭐냐 하면, ‘마지막 아담과의 관계’입니다.

마지막 아담이 누구냐 하면, 로마서 5장에 보면 누구지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임무를 누가 맡았다? 첫 번째 아담이 받은 거예요. 그럼 명령을 위반했잖아요. 그럼 명령을 위반했으면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의 관계가 인간이 그 관계를 깨드렸다고 해서 관계가 끊어질까요? 안 끊어져요. 이미 인간 쪽에서 위반할 줄 알고 명령을 내린 겁니다. 율법을 더한 것은 위반하기 위해서예요. 왜? 예수 그리스도를 위반하는 측면에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위반한 쪽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려면 우리는 저주받아야 되고 심판이 마땅히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위반 안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증거 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우리사이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위반했어요? 위반 안 했어요? 위반 했지요. 거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악마가 개입했지요. 악마가 개입해서 위반케 했잖아요. 그걸 누가 허락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셨잖아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했거든요. 예수님을 증거 하는, 미리 앞당겨서 온, 예수님의 흔적으로서, 인간이 만들어진 거예요.

그리고 그 사이에는 무슨 질서? 언어의 질서. 언어의 질서는 명령이라 했지요. 선악과 따 막지 말라, 했다 말이지요. 위반한 거예요. 위반한 입장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은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십자가, 죽으심. 그래서 제가 낮에 설교할 때, 하나님은 줄곧 죽어있었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제가 주일날 아침에 설교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하나님이 존재하는 증거는 뭐냐 하면, 자기가 이스라엘 있음으로 하나님은 살아있다 했지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그렇게 생각했던 자들 중에 최고가 누구냐 하면, 사도바울이었지요. 자기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으니까. 우리 조상이 이스라엘이라면 그걸로 이미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왜냐? 이스라엘은 누가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혈족 민족이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만들었기 때문에 살아있다고 했는데, 자기가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그것은 바로 우상이었습니다. 왜냐,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땅에서 볼 때 죽어있는 하나님이에요.

우리는 우리가 안 죽고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꾸 살아있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실상은 우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진짜 하나님의 관계는 죽어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만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히 사도바울과 모든 이스라엘은 지가 생각한 신을 만들어 놓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우겼던 거예요. 이름을 여호와라 붙여놓고. 어느 질서? 언어의 질서.

그러니까 구약전체가 말씀이잖아요. 구약에서 좋은 말 다 뽑았어요. 여호와, 주의 이름, 오늘날 기독교신학과 똑같아요. 다 뽑아서 돈 벌이로 자기 몸에다 다 입혀놓고 주의 용어, 이런 말을 하기 때문에 기도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지금 살아계시고 우리도 살아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잘해 봅시다. 라고 나온 거예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누가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한테 당했지요? 그렇게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그렇게 거추장스럽게 했던 그들에게 진짜 하나님이 죽어버렸으니까 누가 죽였어요? 살아있다고 여긴 것들이 예수님을 죽여 버렸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누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스스로 알아서 죽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있는 인간들 앞에는 진짜 하나님은 죽어있는 것이고 죽어있는 인간들 앞에는 하나님은 비로소 살아있는 거예요.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되고, 둘 중에 하나는 살아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게 복음과 기독교는 차이가 나는 겁니다.

기독교의 모든 역사, 어제 퇴임했던 그 교황부터 해서 모든 역사는 예수님이 누구냐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교회가 무엇이냐를 이야기해요. 그 사람들 교회정치꾼들입니다. 교회는 이 시장바닥에서 교회가 되려면 항상 돈이 유입돼야 돼요. 돈 없이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돈 없이는 아무것도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돈이 있어야 교회가 되고 교회가 있어야 그 나라 의를 증거 해도 증거 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 자신들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까 태양과 지구처럼 중력으로 엮어져 있어서 하나의 고무판처럼, 같은 침대처럼 울렁울렁 쓰고 있잖아요.

예수님이 죽어있다면 예수님의 진짜 성령 받은 종은 이 땅에서 어떻게 해요? 산 자라고 보는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죽었어요. 라는 고백으로서 주님과 같이 활동하게 되는 겁니다. 날마다 죽음에 넘기게 되면 비로소 죽음에 넘기 울 때, 그 속에서 죽음이란 것이 마련돼야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는 겁니다.

사도행전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보잖아요. 봤을 때, 앉은뱅이는 자기가 자기를 보기 때문에 오해한 게, 지금 나는 엄연히 살아있는데, 문제가 앉은뱅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내가 지금 살아있는데 앉은뱅이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내가 앉은뱅이지만 살아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돈을 주세요, 라고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아주 섭섭한 이야기를 했어요. 뭐냐 하면, 돈 없습니다. 이렇게 했어요. 금과 은은 내게 없다 했어요. 그리고 당신의 아픈 자리는 당신 자리가 아니고 이미 당신은 죽은 자인데, 죽은 자리를 활용하시는 주님의 자리입니다. 주님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께서 당신에게 무슨 일을 일으킨 겁니다. 그래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겁니다. 이건 앉은뱅이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자기 일어날 것을 예상해서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봤다면,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돈을 줬을 거예요. 왜냐 하면 기어이 그 사람을 죽은 자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나는 평소에 이런 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라는 것을 기어이 비켜가야 돼요. 그걸 안 비켜가게 되면 자기 살아있음을 토대로 한 신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 신은 100%가짜입니다.

주께서 하는 일은 항상 우리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겁니다. 그 삭개오 보세요. 삭개오도 무시했잖아요. 구원받은 사람치고 무시 안당한 사람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다는 말하기 전에 구원하면 오죽 좋아요. 배신3번이나 한다고 해 놓고 그 다음에 찾아오잖아요. 진작 찾아오지. 베드로 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닭 운다는 주의 말씀이 더 중요한 거예요. 닭 운다는 주님의 언어의 질서가 개떡 같은 인간의 언어질서와 합쳐져 버리면 인간의 개떡 같은 언어의 질서는 그냥 개떡이라는 걸 드러내시면서 그 아무것도 아닌 그런 인간을 통해서 주께서 말씀의 질서를 실현시키는 방법, 그게 바로 비유입니다.

사람의 언어는 분명히 언어를 질서라 했습니다. 이거는 딸기고, 코끼리고, 코스모스 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기가 이것을 주님의 것이 아니고 자기가 건방지게 이걸 점령하려고 했어요. 내가 멍멍이, 송아지라고 이름 붙였다고 자기가 지시한 것처럼 전부 다 자기 것으로 여긴 겁니다. 처음에 아담이 이름을 다 짓지만, 이미 만들어진 것에 이름을 지었잖아요. 그런데 아담이 하나 이름 못 지은 게 있어요. 왜?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 여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요. 그러면 아담이 모든 사물의 주도권을 잡을 때, 장차 오실 예수님의 기능을 보여주기 위해서 대표자로 했지만, 왜냐 하면, 예수님이 모든 사물을 쥐고 있으니까. 그걸 앞당겨 보여주기 위해서 아담에게 그런 지시를 한 거예요. 그때 여자가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여자가 없었지요. 그럼 여자는 이름 다 짓고 난 뒤에 왜 태어난 거예요? 그럼 여자는 어느 쪽에 속합니까? 여자는 남자 쪽에 속한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 여자지요. 그래서 남자는 여자들을 볼 때 신기하게 보는 거예요. 이상하다? 왜 저렇게 생겼을까? 같은 사람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사람이잖아요. 제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 잘 들어보세요. 그럼 내가 사람이라면 사람이라 하는 모든 원형의 모습이 이미 나한테 다 포함돼 있지요. 왜, 나는 사람이니까. 내가 만약에 어떤 사람의 요소가 없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나는 사람이라고 누가 이야기할 때는 어떤 사람이 등장하든 전부 다 공통된 요소가 나한테 이미 있으니까 나는 언어의 질서이고 나는 사람이라는 자신만만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여자가 태어났다. 저거는 분명히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끄집어낼 수 있는 사람의 보편적인 그것과는 이탈되어 있어요. 내게 있는 게 없고 내게 없는 게 있잖아요. 잠언서에 나옵니다. 여자는 누구한테서 왔다? 여호와로부터 온 거예요. 여자는 여호와로부터 온 거예요. 이 여자는 그냥 여자가 아니고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의 지목할 수 있는 여자일 경우에 이걸 ‘아내’라고 합니다. 아내일 경우에. 왜냐 하면, 이 여자와 아내의 차이점은 아내는 그냥 온 것이 아니고 같이 살려고 온 거거든요.

우리가 아는 진짜 남자라면 어떤 여자가 살러 왔을 때는 “어이! 저리 가! 저리 가! 따라 오지 마! 따라 오지 마!” 이래야 돼요. 왜?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나만 있으면 돼요. 나만 있으면 되는데 안가는 기라, 계속. “저기요.” “저리 가!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다. 저리 가!” 여호와께서 보냈거든요.“ ”저리 가! 여호와께서 너 같은 존재를 보낸 적 없어.“ 왜? 나는 아담이니까. 결국 여자가 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데 남자를 남자로 하여금 예수님과 연관시키는데 중도 개입으로서 여자가 들어가야 한다 말이지요. 여자가 들어가서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고 남자는 남자라고 큰 소리 치다가 결국은 남자가 아니고 나는 아담이다. 아담이란 뜻이 뭡니까? 나는 그냥 흙에 불과하고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그런 요인으로서 여자가 와서 그리스도 속에 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정상적인 관계가 틀어져야 되고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비로소 진짜 인간, 예수님을 증거 하는 진짜 인간들은 그 때는 남자나, 여자나 하는 것이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신부로서만 해야 될 장차 남아있는 주님의 시나리오를 위해서 처음부터 그렇게 나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남자 여자 하는 것은 이것은 우리가 지상에 있을 때만 유효하고 나중에 부활의 나라가 뭡니까? 남자 여자 없어요. 중성이 돼요. 천사와 같이 되어서 시집도 아니 가고 장가도 아니 가는 거예요. 왜 이런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하면, 이게 언어의 질서라는 이것에 이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안하고 하나님께서 말로서 우리보고 예수 믿어라, “주 예수를 믿어라.” 7자지요. 이 문장이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10장에 보면,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다음에 뭡니까? 구원을 얻으리라. “아휴, 문장 쉽네.” 왜, 언어의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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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5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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