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성소 130227
하나님의 성소 130227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하나님의 성소(겔 11:14-17)
이근호
13-02-27 21:09
하나님의 성소
2013년 2월 27일 본문 말씀: 에스겔 11:14-17
(겔 11:14,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1:15, 개역)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겔 11:16, 개역)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겔 11:17, 개역)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은 책상이나 노트 위에서나 드러날 일이 아닙니다. 실제 역사상으로 드러납니다. “내 생각이 하나님 생각과 다르다”고 옳고 고백을 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넘겨주시지 않습니다. 끝까지 우리 자신을 쓰시면서 얼마나 틀리고 다르다 는 것을 혹독하게 경험케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거주민들입니다. 또 하나는 바벨론 나라로 포로 잡혀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다른 의견을 나타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편에 서 있습니다. 예루살렘 거주민들과 포로잡혀 가는 사람들의 견해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 쪽은 옳다고 여기시면 안됩니다.
둘 다 하나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 거주민이나 포로 잡혀 가는 사람들은 둘 다 하나님은 자기편이고 자기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루살렘 거주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을 눈에 보이는 땅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 이 가나안 땅에 살도록 이스라엘에게 허락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진해서 내어보이신 약속을 철회하거나 변경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약속의 땅에 살라고 하시면서 지금에 와서 나가라고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일관성이 있어야지만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실체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증거로 간주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 오로지 눈에 보이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교회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태복음 6:33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그 나라와 그 의’를 증거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단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것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을 토대로 해서 그 나라와 의를 증거코자 한다면 이는 필히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자체는 그 나라와 의 보다는 교회 유지가 시급하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교회를 눈에 보이지 않는 나라를 대신하다고 여기면, “교회가 무너진 마당에 무슨 수로 그 나라와 의를 증거하지? 이는 있을 수 없어”라고 나올 게 뻔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나라와 의란 예수님 자체를 증거하고 소개하는 일을 통해서만 진행됩니다.
만약에 교회 자체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이 자본시장체제에서는 계속해서 외부에서 돈이 유입되어야 합니다. 돈을 지불하려는 자들에게 돈을 요구할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세상은 나름대로 “교회는 이러한 일들을 해주어서 우리를 만족시켜 주어야 돼”라고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노인 복지 문제가 아이들 사교육문제입니다. 즉 교회가 맞벌이 부부로 인하여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 노인이나 어린 아이에 대해서 신경써 준다면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기대감이 높아져 그들이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도 명분이 설 것입니다. 따라서 강단에서 목사의 설교도 여기에 맞추어 진행됩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 교회가 그 나라와 의를 증거하기 위해 어렵고 힘든 이웃들에게 성심껏 성의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데 쓰여지는 돈은 하나님께서 필히 넘치도록 갚아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합당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고 선전해 댈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정작 사도들을 통해서 진행된 그 나라와 의란 딴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와서 이렇게 버림받았습니다.’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살기 좋게 만들고자 하나님을 찾고 믿는 바로 그런 자들에게 의해서 버림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단에서 증거하고 외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교회, 나의 것, 과거에 하나님의 기적적으로 베풀어주신 이러한 눈에 보이는 실체라서 도저히 버릴 수 없다고 고집부리는 모든 것, 바로 이런 것들을 사수하는 것이 곧 주의 일이라고 믿는 그 인간들에게서 도리어 버림받은 바로 그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만이 그 나라와 그 일에 해당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을 사수하는 자들입니다.
둘째로 포로잡혀 간 자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자신의 화려한 복귀를 미래를 꿈꾸는 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상실하고 박탈당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인생에 뻥 구멍이 뚫려 있게 됩니다. 이런 박탈감에 대해서 하나님의 일에 의지해서 미래에는 필히 그 잃어버린 것을 보상해 주리라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은 진정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16절에 ‘성소’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관심사는 개인적인 보상이 아니라 성소입니다. 그렇다면 성소는 어떻게 세워지고 만들어지는 겁니까? 베드로전서 2:4에 보면,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에 연이어 나오는 말씀, 즉 7-8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바로 그 돌, 그 돌이 유일한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기에, 성전으로 규합되는 모든 자들은 필히 예수님과 같은 취지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에게만 국한 합니다. 즉 모통이 돌이 나머지 성전을 이루는 모든 돌의 성격을 규정하고 결정지어 버립니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거룩한 제사장 나라’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 하신 예루살렘은, 나 때문에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영원토록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와 의를 증거케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평생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에 대한 생각뿐이기에 바로 이런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만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3-01 11:09
29강-에스겔11장 14-17(하나님의 성소)13022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1장 14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6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1:14-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 너의 형제 곧 너의 형제와 친속과 이스라엘 온 족속을 향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라 이 땅은 우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신 것이라 하였나니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적어내고 있지요. 하나님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때 과연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같은 원리로서 움직이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왜냐,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 유다 사람들 보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한다고 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겼다고 자부했으나 막상 선지자 이야기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야기고 맞지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해서 그 다음에 15절에 보면 “인자야 예루살렘 거민이”라고 되어 있지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이 에스겔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우리 편이지 네 편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자꾸 포로 잡혀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 포로 잡혀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를 버렸기에 포로 잡혀 가는 것이 현재 여기 남아 있는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스겔 너는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니고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땅 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우리가 누가 뭐래도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고 그들은 에스겔을 보고 호통을 쳤고 책망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거지요. 16절에 보면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이스라엘 사람들, 예루살렘 주민들이 하는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과 안 맞지요. 서로 생각이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이러한 생각이 에스겔 당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이 구원받겠다고, 천국 가겠다고 교회 오잖아요. 그러면 교회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됩니다.
교회라는 것, 예를 들어서 기독교방송을 진짜 오랜 만에, 십 몇 년 만에 기독교 방송을 틀어서 봤어요. 혼자 생각해 봤지요. 기독교 방송국이 왜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이 무엇 때문에 있느냐 하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가 혹시 잘못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알기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했어요.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했지요. 교회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교회가 있어서 그게 천당 가는 여행사고 거기 등록하고 세례 받으면 그들은 구원 받는다, 이것은 교회 일이지 그 나라 의가 아닙니다. 교회라는 것은 교회 자체를 위해서 있으려고 한다면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서는 어느 정도의 자금이 있어야 해요. 건물도 있어야 하고 한 달에 수십만 원씩 나가야 합니다. 가건물이든 건물이든 교회 유지를 하려면 돈이 모여야 돼요.
그 다음에 교회가 한 번만 모이면 안 되고 계속해서 돈이 들어와야 돼요. 그러려면 교회 오는 손님들, 우리 어머니 표현입니다, 교회 오는 손님들이 계속 돈을 주인장에게 지불을 해야 돼요. 교회에 돈을 주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게 그게 뭐냐, 지금 이 사회나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이 있어요.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노인복지문제, 두 번째, 애들 교육문제입니다. 노인복지야 딴 게 있겠습니까? 같이 놀아주는 것이지요. 예배당을 크게 지어서 노인들을 모으고 예배당 크게 지어서 유치원 애들 염가로 영어나 수학을 가르치고 맞벌이가정 애들 과외를 시켜주는 거예요.
신학교출신이나 담당직원들을 불러서 알바를 시키든 해서 계속 그것을 해 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교회는 복지시설이 되어서 노인들 노는데 되고 애들 키워주니 거기다 돈 낼 수 있는 명분이 되니 교회가 유지가 되는 거예요. 현재 교회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티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요. 노인복지, 애들 과외 시켜는 그 두 가지만 하면 교회가 되는 거거든요. 가끔 점 보러 오는 사람들이나 병 고치러 오는 사람들 안수해 주면 되고 그런 것도 좀 있어야 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목사가 강단에서 그 나라 의를 증거 하면 안돼요.
왜냐하면 복지 문제나 애들 교육문제는 그 나라 의 문제가 아니고 이 땅의 문제거든요. 교회라는 것이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계속해서 돈이 유입돼야 유지되는데 유지되려면 그 나라와 의를 접어야 돼요. 접고 대중들이 원하는 것, 민중들이 원하는 것, 그런 것들을 교회가 해 줘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원하지요? 예, 교회가 해 드리지요. 교회가 이렇게 사회와 국가에 옳은 일을 하니까 여러분을 대신해서 이 명분 있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이 주의 일이 되고 여러분이 한 것이 되고 다 하늘나라 상급 받을 일이 되는 것이니까 여러분은 헌금을 많이 내세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원하고 기뻐하는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들과 생각이 다릅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쫓겨나라는 말이지요. 내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고 더 버티고 싶고 살고 싶은 이 세상에서 나가라는 말입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이 세상에서 버림 받았기 때문에. “나와 같이 이 세상에서 버림받을 사람이 누구지? 같이 가지.” 이것만이 그 나라 의입니다. “애가 공부 못해요? 공부 못하면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나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납시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지금 고독사 할 지경입니까? 그러면 나 예수와 함께 외롭게 이 세상을 보냅시다.” 그게 교회가 강단에서 설교할 내용이고 목사의 외침이에요. 그나라와 의를 구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소개할 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돌아가셨습니다, 그걸 소개하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게 되면 여러분에게 어떤 효과가 있고 어떤 이득을 얻습니다, 를 이야기하면 안돼요. 예수님은 이땅을 어떻게 거쳤고 어떻게 살아가셨는지 그 이야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뭐냐, 교회가 유일하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교회를 말아먹는 거예요. 그것만이 오늘 본문에서 유대나라가 말아먹는 것과 똑같은 취지가 되는 겁니다.
본문에 세 종류의 부류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거주민의 의견이 나오고요 또 하나는 포로 잡혀 가는 사람의 생각이 또 나오고요, 세 번째가 중요한데 세 번째는 에스겔에게 주입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세 가지 뜻이 서로 다 달라요. 우선 첫 번째 예루살렘 거민의 뜻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우리에게 줬다는 거예요. 주실 때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 의해서 준 것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철회하는 법은 없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본심이라고 본 겁니다. 하나님이 “얘들아! 여기서 살아라.” “고맙습니다.” 이렇게 살라고 한 자기 백성을 “살지 말고 나가!” 이렇게 이중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신뢰가 떨어지니 그 하나님을 누가 믿겠어요? 하나님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얘들아, 이 예루살렘에서 살아라.” “예” “꼭 떠나지 말고 살아라.” “예!” 이것이 옛날부터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이름을 뭐라고 할까요?” “우리교회” ‘그렇지, 우리 교회는 이름 바꾸면 안 돼.’ “장소는요?” “지묘동” ‘그래, 여기서 이사 가면 안 돼.’ 이처럼 전통과 역사와 기적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줬기에 그 기적을 스스로 부정하는 쪽으로 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무엇을 줬기에 이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대신 하나님이 주셨다고 여겨지는 이것만 쥐고 있으면 곧 그것이 하나님 믿는 일이고 눈에 보이는 그것을 더욱더 발전시키고 부흥시키고 크게 키우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을 지금 아주 활발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사람, 예루살렘 거민입니다. 그래서 이 예루살렘 거민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아주 친숙하게 다가오지요. “하나님이 일이 뭐예요?” 라고 물으면 “교회 일 열심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나라와 의가 뭐지요?” “교회 일에 협조하는 것이 그 나라와 의입니다.” 굉장히 친숙하게 다가오지요. 그러니까 이 예루살렘 거민은 현재 있는 것을 절대로 놓치면 안 된다는 주의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번에는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이에요.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은 뭔가 상실한 거예요.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던 곳에 살아야지 친구도 있고 터전도 있고 단골도 있는데 다른 동네에서 새로 살라는 것은 차라리 죽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아요. 하지만 나라가 망해서 강제로 포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에는 아무도 가진 것이 없고 희망이라는 것을 가져요.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희망. ‘언젠가 꼭 돌아오리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본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포로 잡혀 가는 이들의 특징이 뭐냐, 현재 예루살렘 거민들은 현재 눈에 보이는 그것을 꽉 쥐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포로 잡혀가는 사람의 특징은 상실감을 갖고 있어요. 뭔가 뻥 뚫려서 구멍이 나 버렸어요. 그것을 메울 방법을 모릅니다. 그냥 사는 것이 허전하지요. 그리고 스스로 ‘나는 인생 실패했다.’는 자괴감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자괴감을 품으면서도 버티고 있는 것은 언젠가는 이 구멍을 메우고 채워서 더 풍성하게 해주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포로 잡혀서 상실되고 박탈당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일가친척도 다 죽어버리고 홀홀단신 남아서 노예로 살아가는 그 비참함을 그 희망하나로 버티는 거예요. 여러분이 잘 아는 우리나라 전래동화에 흥부전이 있잖아요. 흥부가 주연이고 조연이 놀부인데 흥부가 하는 것이 너무나 마뜩치가 않아서 어떤 작가는 그 흥부전을 놀부전으로 바꾼 사람도 있어요. 흥부가 못살지만 그 흥부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놀부에요. 형은 잘 살거든요. 자기는 못살지만 어디가도 놀부를 자랑합니다. “자기는 못살지만 우리 형은 잘 산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그 가진 것이 없는 텅텅 비어 있는 빈자리는 뭔가 희망으로라도 어설프게나마 그 자리를 메워줘야 그나마 희망가지고 버티고 살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놀부입장에서는 그 흥부가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차라리 저 놈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눈치코치도 없이 흥부는 애가 열 두 명인가 그래요. 가난한 게 애만 많이 나아놓고.
그래서 이 시대에 흥부가 안 맞는 인간이고 놀부야 말고 정말 자수성가한 사람이라고 주인공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으로 소설을 쓴 사람이 있어요. 지금 포로 잡혀 가 있는 이 유다입장에서는 흥부고 놀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놀부가 되어서 언젠가는 하나님이 이 상처를 보듬어주고 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보란 듯이 다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버티는 것, 미래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포로 잡혀 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거예요.
둘 다 틀렸습니다. 둘 다 잘못되었어요. 그 잘못되었다는 것이 16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간 그들에게 …….” 그 다음에 중요한 말이 나와요. “성소가 되리라.” 포로 잡혀 가는 사람들은 성소라는 개념이 없어요. 성소라는 개념이 없고 그냥 이 몸 하나 다시 그 땅에 들어가면 되리라,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요. 쫓겨났으면 다시 그 몸 가지고 천국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포로 잡혀간 사람들도 이걸 모르는 거예요.
이 점을 모르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 오는 사람들이 뭔가 한이 맺혀서, 인생 실패해서 오거든요. 분통이 터져서 온다 그 말이지요. 그들은 이 세상에서 박탈당한 그 모든 자기의 귀한 것, 모든 것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보상해 내라는 식으로 교회 와서 철야하고 기도하는데 그들이 근본적으로 모르는 것이 뭐냐 하면,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에 안 넣어준다는 겁니다. 그들은 오직 희망만 있어요. ‘하나님이 나의 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도 도와줄 데가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그것이 바로 천국에 부합되지 않는, 하나님의 성소에는 부합되지 않는, 그저 자기 잃어버린 야망에만 탐욕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아 있는 인간이나 떠난 인간이나 그 나라 의하고 아무 상관없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우기는 인간이나 성전을 잃었으나 언젠가는 성전 있는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여기고 지금은 실패했지만 꾹 참고 버티면 다시 성전 있는 본토로 돌아간다는 성공의 반전, 최후의 승자를 기대하고 있는 이 포로 잡혀가는 인간들이나 생각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과 만족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생각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 생각이 뭔지를 모릅니다.
그 나라 그 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도 몰라요. 성소라 하는 것은 반드시 사람 위주로 성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장차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것과 관련된 성소입니다. 내 개 같은 팔자가 어떻게 개과천선하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목적이 아니고 딱 하나,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 점이에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그것 소개하는 그것만이 그 나라와 의를 하는 거예요. 교회 강단에서 목사가 설교할 것은 노인들 끌어 모아서 “노인정 차려놓았으니 많이들 놀러오세요.” 하고 “애들 놀이방 만들었으니 애들 많이 보내주세요.” 이래서 교회 자체를 유지하고 부흥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강단에서 해야 할 것은 뭐냐,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우리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버림받은 자만이 그 나라 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성소에 담긴 의미입니다. 자기한테 관심 있고 자기한테 신경 쓰고 교회오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가 자기에게 관심 있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진짜 살아계신 주님을 배신하게 되고 싫어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성소에 대해서 베드로전서 2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라고 되어 있어요. 예수님을 베드로가 소개할 때 예수님은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좋은 분으로 소개하고 자꾸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데 실제로 오신 예수님은 너나 할 것 없이, 예루살렘에 그냥 있는 사람이나 포로 잡혀 가는 사람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에게 버림받은 분이에요. 그 버림받은 이유를 알아야 돼요.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돌 이야기가 나오고 시온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소입니다. 이게 성전이에요. 그 다음에 나오는 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이미 모퉁이의 머릿돌이 전체 성전의 성격을 결정해 버렸어요. 모퉁이의 머릿돌과 맞지 않는 돌은 하나님의 성전의 벽돌로 끼어들 수 없습니다. 요즘이야 예배당 지으면서 벽돌에 자기 이름 써서 집어넣지요. ‘예수님은 모퉁이 돌’이라고 그냥 석재 상에 돈 줘서 박아 넣을 뿐이지요. 그 다음에 목사도 벽돌 몇 장에 이름 쓰고 그 다음에 장로도 그렇게 하고 돈 몇 푼 받지도 못하는 신학생까지 벽돌 몇 장 기부하게 만들어서 다 그렇게 하지요. 그래놓고 하나님의 성소라 합니다.
정작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 중요한 것은 성소에 하나님의 계셔야 되거든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하면,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그 이야기만 흘러나와야 돼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결코 그 나라 의가 아니었다, 내가 밥 먹고 살자는 짓이지 그 나라 의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해도 그 기도덕분에 밥 먹고 살자는 짓이지 주님의 버림받음을 깨닫게 해달라는 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기도할 테니 기도 값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기도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내놓으라고 그래서 나도 숨 좀 쉽시다, 자기 박탈된 것이나 상실된 것이나 아쉬운 것이나 남에게 뒤처진 것이나 인생낙오나 탈락에 대한 보상을 예수이름으로 받으려는 그 심보, 지금은 못하나 나중에는 화려하리라는 기대감, 이것은 성소가 아닙니다. 주님이 거기 계시지 않아요.
베드로전서 2장 7절, 8절에는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그 돌은 아무나 반기는 돌이 아니고 거치는 반석이라고 합니다. 그 뒤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해준 진짜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나라, 이 모든 것은 반드시 그 전에 우리 자신 때문에 예수님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강제로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의 집합이 교회입니다.
내가 다가서고자 한 것이 아니고 나는 주님을 때렸고 주님을 발로 찼고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었는데 우리한테 버림받은 예수님이 그러한 우리를 기어이 자신의 버림받음을 계속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우리 속에는 예수님이 나 때문에 버림받았다는 것만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결합이 될 때 그것이 바로 유일한 성전이고 교회요 성소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가지고 주의 일, 그 나라 일을 하게 되지요. 우리는 그 주님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올라야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다 하고난 뒤에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뭐냐, “주님이 살아계십니다. 왜, 내가 죄인으로 죽기에.” 바로 그것, 내가 죄인으로 죽는다는 이것이 주님이 이미 우리를 구원했다는 유일한 증거가 되는 겁니다.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 졌다고 증거 하는 겁니다. 십자가를 증거 할 때 나도 십자가 졌다, 가 아니라 나는 십자가를 훼방하고 방해하고 십자가 취지도 모르면서 주님을 원망했다고 고백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십자가는 그런 식으로 증거 되는 거예요.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 방송을 보면서 내내 느낀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만약 기독교방송국의 PD라면 “기독교 방송국 이것도 주의 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의 일은 기독교방송국이 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친히 하십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거예요. 오늘날도 계속해서 주께서는 포로 된 자를 데리고 오시는데 그게 내 원통하고 손해난 인생을 보상하기 위해서 불러낸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버림받은 돌만이 진정한 교회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오직 예수님만 일 다 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나라 의의 일을 하는데 우리를 집어넣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포로잡혀 간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했지만 그것마저 자기 이익이고 자기 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 지금도 분주하게 일하시는 주님의 참된 일은 오직 주님 홀로 모든 것이 ‘아니오’가 없고 ‘예’ 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같이 감사하고 즐거워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