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육신의 역사
2013021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육신의 역사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21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육신의 역사
(강의:이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했던 여호와의 군대란 말 아직까지 설명 안 했습니다. 설명 안 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여호와의 군대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했다는 이 말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백성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구약을 해석할 때 지극히 높은 성민도 어떻게 해석했느냐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설명한 것은 침멀리가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 책을 역사적으로 처리해버리는 식으로 돼있습니다.
첫째 시간에 한 걸 다시 한번 대립을 해봅시다. 이쪽 편에 선을 그어놓고 이쪽은 침멀리의 역사적으로 끊어지지 않는다. 이쪽에 이야기한 것은, 사도 바울이 구약을 어떻게 봤느냐 하는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을 해석할 때 제가 제시한 핵심 개념이 뭐냐 하면, 육신이란 개념을 썼지요.
육신 개념이란 성령이 왔기 때문에 역사적 개념으로 인간을 보는 게 아니에요. 역사 속에서 인간이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명령을 받는 주체, 명령을 받고 실천에 옮기는 주체로서 인간은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나 육신이라 하는 것은 명령을 받되 그 명령이 알아서 육신 되게 하셔서 명령이 정녕 죽으리라는 쪽으로 나간다고 아까 창세기 2장에 선악과 따먹으면 죽으리라는 것으로 설명했잖아요.
육신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적인 부분인데, 육신은 죽음을 함유하고 있다. 이게 로마서의 핵심 아닙니까. 인간은 죽는다가 아니라 육신은 죽음을 함유하고 있기에 육신이라고 표현되는 거예요. 육은 죽으리라. 이것은 “잘 해라. 잘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 아니고 반드시 육신이기 때문에 죽는다. “제가 나쁜 짓을 했군요.” 나쁜 짓을 해서 죽이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육신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육신은 죽는 게 운명이에요. 그러니까 안 죽으려고 하지 말고, “누구십니까? 나를 죽이시는 분이?” 그걸 알면 되는 거예요.
흥부, 놀부 이야기하면서 죽음을 함유한 육신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안에 구약역사가 다 포함돼있다고 이야기했지요. 박을 타면 구약의 새로운 육신적 의미로서 쏟아지는 거예요. 육신은 육신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은 육신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뒷받침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러나 침멀리는 역사로 봤기 때문에 신학적인 개념 없이 그냥 확성기처럼, 나팔꽃처럼 벌여놓고 구약 선포의 개방성이라고 한 거예요. 우리가 이런 점을 모른 척 하자가 아니라 이걸 필히 알아야 돼요. 침멀리가 아주 자세하고 성실하고 함축성 있게 마지막 305페이지, 306페이지에 설명했습니다. 읽어보면 상당히 복잡하지만 제가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p 무슨 역사, 보수 측에 있는 사람들은 또 D, E, P 나오면 짜증이 나요. P역사란 최종역사지만 최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게 P역사라는 거예요. P는 priest, 제사문헌이에요. 보수 측에 있는 사람들은 아예 가설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소리 나오면 때려치우라고 하거든요. 어쨌든 이 사람들이 이렇게 거론하는 이유를 알아야 되니까. 이게 제사거든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전은 없고 나라는 망해도 제사만 있으면 산다. 이상입니다.
마지막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기반을 갖추어서 메시아를 기다릴 것이냐? 제사와 율법만 있으면 우리는 메시아와 접촉할 수 있다는 가능성, 개방성을 그걸로 챙기겠다는 거예요. 그때 수많은 전설들 중에서 오늘날 제사가 진짜 하나님, 메시아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란 것만 골라 편집한 거예요. 그 편집한 게 P문서라는 겁니다. 그 P문서에 준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에 P문서의 조각들을 집어넣는 겁니다. 집어넣으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제사라는 접촉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는 이렇게 했다는 식으로 그 당시 멸망하고 난 뒤에 사람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텍스트, 교과서죠. 신앙 교과서를 재편집해서 줬다는 겁니다.
어디서? 이집트에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 이집트냐? 톨레미 정권에서 유대교가 보호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예루살렘보다 쫓겨난 이집트에서 신앙생활 했었기 때문에 거기서 70인경도 만들었고, 거기서 묵시문학도 피어나고. 예루살렘은 버렸지만 디아스포라, 흩어진 사람들이란 뜻이거든요. 디아스포라라는 유대공동체를 하나의 정신적으로 집결할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어요.
“그래. 우리는 어디 있더라도 상관없어. 어떤 공간에 있더라도 상관없어. 왜? 메시아는 이 제사문헌의 성취를 위해서 말씀대로 오실 분이기 때문에 기다리면 되는 거야.” 그리고 거기에 호응해서 내부에서도 시리아와 반란을 일으켜서 마카비란 왕국이 성립해있었고, 마카비 왕국의 성립으로 말미암아 로마도 유대인을 함부로 못하고, 저들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다 빼앗으면 안 되겠구나 해서 “종교는 네 마음대로 해라. 세금만 꼬박꼬박 내라. 치안과 세금 문제만 관여하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로마의 지배를 받는 분봉왕으로 헤롯이 세워진 겁니다. 예수님은 잡혀서 로마 총독 빌라도의 최후판결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묵시가 역사의 단면을 완전히 어떤가를 까발리죠. 역사의 지층이 퇴적층이 누적이 되죠. 단층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국가적인 정체성들은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여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통과하면서 지층들의 단면이 드러나야 돼요. 그래야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라는 말이 성립이 될 것 아닙니까. 또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도 다 겪게 되고.
역사라는 것이 그냥 역사다. 할 때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만 보여요. 하지만 묵시로 보면, 인간도 육신으로 날아가 버리면 결국 역사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종교란 이름의 국가단체 그런 것으로 악마의 활동성이 나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 했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뭘 보여요? 십자가 어디 있는데? 로마 베드로 성당 지하창고 있는가?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그것도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꼬시더냐? 그래서 사도 바울의 편지가 진짜 영으로 쓴 편지라서 억지로 풀다가는 멸망당하기 십상이죠.
지금 두 번째 시간에 설명해야 될 것은, 침멀리가 구약과 신약을 이으면서 뭘 제시하는지 봐야 됩니다. 305페이지에 나오는 유명한 말, 남은 자. P문서에 의하면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박과 논란과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고 거기에 대한 적당한 근거를 제시해서 자기주장이 옳다는 걸 제시해야 되겠죠.
남은 자가 될 때 누가 스스로 남은 자라고 자처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서 남은 자 되게 했는가? 어느 쪽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침멀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남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남은 자가 아니고 바로 성전도 없고 모든 국가가 깨졌을 때에 인간이 내세울 것은 극한으로 몰리면 바로 하나님의 율법 또는 제사 그것만 붙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남은 자라고 했다고 보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P문서고.
그러면 306페이지 중간쯤에, 여기서 그들이 남은 자라고 치더라도 그들의 과연 계명을 온전하게 지켰느냐고 할 때 침멀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계명을 지킨 게 아니고 즐겼다. 거기에 나오죠. [계명을 즐긴다](freude am Gesetz, Kraus) 크라우스라는 구약학자가 시작했던 계명을 즐긴다. 남은 자들은 계명을 즐겼기 때문에 그들은 그런 식으로 메시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고 보는 거예요. 끝까지 그들은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305페이지 중간에 보게 되면 남은 자 이야기하기 이전에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예언자들, 주로 에스겔을 언급하는데 에스겔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스스로 심판해버리고 거기에 에스겔 37장 말씀, 적신. 적신이란 말은 벌거벗은 몸이다. [이제 적신이요, 헐벗고 죽음에 처하여 메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뼈다귀처럼 죽음에 처하니까 비로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돌아오라는 음성의 의미를 알게 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뼈가 뭘 들어요?
그러니까 침멀리의 이야기는 이겁니다. 에스겔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해골에 갔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그 사람들의 역사적 실존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에스겔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이건 안 중요하고, 에스겔이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뼛속에서 이런 음성을 들었다고 할 때 에스겔의 말을 듣는 청중들의 심성, 심리적인 상태, 마음가짐 이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 우리는 뼈였구나. 우린 그걸 몰랐지. 늦으나마 회개하게 되면 우리는 남은 자가 되고 남은 자에게만 메시아가 찾아오게 된다. 그래 기다리자. 따라서 성경을 우리가 다시 해석해서 P문서적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다시 보자."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는 거예요.
왜 침멀리가 이런 주장을 할까요? 침멀리는 어디에 끼어들지 않습니까? 에스겔과 하나님 사이에 끼어들지 않고 있어요. 에스겔이 하나님을 만났다가 아니라 에스겔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에스겔이 말하더라 이 말입니다. “에스겔이 해골 골짜기에 갔다고 에스겔이 이야기하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런 말 하느냐 하면, 이게 가다머의 철학인데요. 구약의 해석, 역사의 해석이라 하는 것은 옛날 당시 그때 청중들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게 되면 옛날에 있었던 의미를 우리가 현재에 받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가 어떠냐는 것은 몰라도 되고, 에스겔이 받았던 그들의 심정,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는 현재 21세기 사람에서 에스겔에 계시된 것이 기원전 6세기 후반이거든요. 그때 심정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계시를 그때와 동일하게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한테 있는 의미가 아니고 뭐냐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하나의 교훈이고 이것은 뭡니까? 우리는 교훈만 좋으면 언제든지 받을 가능성이 있는 그렇게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 아니라는 그런 뜻밖에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얻어맞아도 많이 맞고 너무 많이 맞았으니까 이제는 더 이상 고집을 안 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이란 맞으면 고집이 더 세게 돼요. 많이 맞았다고 그리고 징계 받는다고 사람이 인간되는 건 아니거든요. 지금 힘이 없다 뿐이지 힘만 있으면 다시 헤헤거리면서 잘난 척하는 걸 힘이 없어서 잘난 척 못하지 옛날 그 행세 어디 갑니까? 그대로 내밀게 돼있어요.
그래서 역사적인 해석법은 이런 한계에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다고 목사들이 설교할 때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나오는 것과 똑같은 소리를 지금 침멀리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 설교를 들어보면 우리도 본받아 그렇게 하자고 나오면, 그건 100% 가짜입니다.
그럼 진짜는 뭐냐?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무시했으면 아예 우리를 제쳐놓고 하나님은 에스겔만 상대하느냐? 이렇게 나와야 돼요. 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에서 확답된 효과, 효력으로 새롭게 생겨난 집단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로마서 11장에서 이야기한 남은 자에요. 그래서 남은 자들은 자기 행함으로 남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는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은혜로 남는다 할 때 근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로 남는다는 뜻이에요.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의 효과로서 은혜가 생겼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어떤 일을 성취 안 했으면 나올 수 없는 은혜가 나왔기 때문에 너희들이 현재 남은 자로서 구원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의 특징은 뭐냐? 그래 우리 남은 자 되자고 다짐하는 게 남은 자가 아니고 왜 우리는 멸망되어야 마땅하냐 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늘 확인하는 것이 남은 자에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죄인이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왜 말씀에 의해서 우리 스스로 행함으로 건져지지 못하는 존재인가를 늘 깨닫는 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기부인이 될 수 있다는 게 은혜지요. 소유하는 게 은혜가 아니고 소유하는 것도 내 소유가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가져가도 나는 할 말이 없어. 그 정도야 나는.” 그걸 아는 게 은혜 아닙니까. 이게 축복이거든요.
지난주일 낮에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일한 것도 없이. 완전히 은혜의 삼종세트 아닙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아예 교회 벽에 전도하자 이런 것 다 지우고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 일한 것도 없이, 그런 것을 걸자 이 말이죠. 바로 내가 아무 일을 해도 저 문구에 해당되는 삶이라는 게 남은 자고, 그 남은 자 되게 됨은 그것이 새 언약, 십자가 효과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눈이 열린 겁니다.
침멀리가 P문서 이야기했잖아요. 세상을 자기 오기를 받쳐주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다시 했다는 것이 침멀리의 구약해석이에요. 구약을 인간이 손댔는데 손댄 사람이 누구냐? 마지막 때 남은 자라고 자처한 인간들이 구약을 손대서 원래 구약이 아니고 그들 입장에서 새롭게 조성된 순서가 현재 구약 순서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날 유대교인들 어떻게 해요? 자기 입장에서 구약 손대면 그걸 무슨 문서라 해요? 21세기 문서에요. 또 새로운 문서 되잖아요.
그래서 육신이라는 것이, “육신 되면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육신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육신은 죽음을 품고 있지요. 이 죽음이 우리 목숨 끊어지는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죽었던 그 죽음, 내 살과 내 피 마시지 아니하면, 그 십자가 언약 완성의 죽음이 포함될 때 우리는 육신의 입장에서 주님과 관련이 되는 겁니다. 이걸 인자라고 하거든요. 에스겔, 다니엘에서.
아까 이야기한 것 따져봅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상대했다. 사람들은 에스겔과 상대한 내용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주고받으면서 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신약에 와서 완성시켜버리면 그 사람들이 바로 남은 자요, 그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구약해석을 어떻게 하는가? 신약의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자되는 에스겔 사이에 주고받은 그 내용으로 흥부전에서 박을 탈 때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십자가가 와르르 쏟아져서 창세기부터 양탄자 깔듯 깔아버리니까 이게 바로 구약까지 소급해서 완전히 깔린 양탄자 이 내용을 따라서 구약을 해석하면 그게 구약해석이란 말이죠.
이것이 사도 바울뿐만 아니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구약 본문을 뽑을 때 어떤 구절을 뽑는데 맞춰보면 문자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마태복음에서 호세아 인용하면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그 말도 사실은 그 대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부합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당겨보니까 이게 전부다 구약 그때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인 거예요.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아들을 낳아 이름을 뭐로 하라? 임마누엘로 하라. 분명히 이사야 7장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걸 해석할 때는 바로 그 임마누엘이 누구였다? 예수님이라고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지막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박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완성된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해석 노선을 따라가려면 우리는 육신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여기고, 육신은 죽음을 품고 있지만 그것도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있지만 인간은 역사를 품고 있거든요. 역사가 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 곧 시간적인 연쇄 고리를 갖고 있다는 말 아닙니까. 바리새인도 그랬으니까. 내가 해석한다는 말은 과거에 이랬는데 현재는 이렇고, 미래는 이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사도들의 해석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튕겨나가죠. 못 들어가지요. 왜? 우리는 자신을 시간을 알고 있는 인간으로 보니까. 나의 역사를 갖고 들어가니까 안 되잖아요. 그러면 사도의 노선에 들어가려면 우리의 역사를 죽어야 되겠지요. 죽는 방법은 죽는다고 죽는 게 아니잖아요.
성령이 와서 십자가에 우리를 동참시켜버리면 우리가 전에는 바깥에서 이 노선에 못 들어갔는데 성령을 받아보니까 어느새 우리는 어느 노선에 와있습니까? 지금 십자가 피로 깔려있는 아예 창세전부터 있었던 모든 하나님의 긴긴 비밀적 시나리오, 비밀스런 복음의 시나리오, 창세전부터 감추어진 그 비밀의 노선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카펫 노선에 들어가기 전에는 내가 해석한다가 성립됐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나는 해석한다가 아니라 나는 날마다 해석되어지는 거죠. 해석은 주님이 해석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내가 이 야쿠르트를 마신다. “주님, 방금 야쿠르트 마신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렇게 물을 수 있거든요. 그런 물음을 주님한테 물을 자격이 우리한테는 없는 거예요. 그것은 내가 살아있다고 여길 때나 나올 물음이지 우리는 죽은 놈이 야쿠르트 마신 해석을 해버리면 그 해석의 의미가 돌아올 자리를 우리가 마련하면 안 돼요. 그것은 내가 살아있을 경우에만 해석해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데 죽은 놈한테는 돌아올 필요가 없다니까요. 죽은 사람은 편지도 전달 받을 수 없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야쿠르트를 마셨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그런 되도 않은 소리하지 말고, “내가 야쿠르트를 마시게 했다.” 왜요? 너는 사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도 모르느냐?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했잖아요. 주님께서는 야쿠르트를 눈앞에 두게 만들었고 이걸 먹게끔 만들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냥 마셨을 뿐이고. 이렇게 된 것이 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주께서 조성하고 마련한 배치된 구조 속에 내가 놓여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나를 위한 나의 행동이 의미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뭘 마시던 간에 모든 음료는 누가 딱지 붙이고 누가 차압해 가져가버려요? 주님이 의미 있어서 놓았기 때문에 여기 의미는 주님이 가져갑니다.
이게 구약에 나옵니다. 이름도 간단해요. 욥이죠. 하나님이 마귀와 내기할 때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욥이었잖아요. 그런데 욥은 그것도 모르고 그 중도를 차단해서 의미를 누가 가져옵니까? “하나님이여, 왜 내가 고난 받습니까?” 마지막 대목에서 주께서는, “그 입 다물라.” 우리는 말할 입장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욥의 이야기가 율법이 되는 겁니다.
로마서 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입을 막고, 돼있지만 사실은 틀어막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함이라. 왜? 우리는 처음부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의도 모르고 의를 행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감히 죄인 주제에 “하나님이여, 어떻게 내가 의인 됩니까?” 하는 질문조차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말이죠. 죄인이면 죄인으로 쭈그려 앉아있어야지.
이게 성령 받아야 비로소 그 의미가 나타나지 성령 안 받으면 이 말이 무슨 말이지 모르겠지요. 그래서 해석문제에 있어서 콩고 사람들이 아무리 이야기해도 분명히 사람 말 같은데 콩고 말 모르는 한국 사람들은 뭘 자꾸 씨부리고 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듯이 요한일서에 보면, 하나님에 속한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땅에 속한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데, 왜 못 알아듣느냐? 그래야 그들이 하나님에 속한 자가 아니고 세상에 속한 자라고 들통 나기 위해서는 필히 그래야 한다는 거예요.
이제 본격적으로 가봅시다. 처음에 침멀리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부터 시작했지요. 방금 길게 이야기한 것에 의하면,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분류작업을 해온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은 이미 하늘에 있던 그 분류작업을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고 율법을 줌으로써 하늘에 있던 분류성이(천사와 악마의 분류) 그대로 언약을 통해서 타고 내려와서 지상에 이 땅에서 악마에 속한 것과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밖에 속한 것과 언약에 속한 것이 분류된 것입니다. 분류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이 어려운 게 원래 하나님의 군대는 이미 있습니다. ‘마하나임’이라 해서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봤던 그 천사들이잖아요. 그런데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끄집어낸 것이 하나님의 군대를 끄집어내죠. 재미있는 것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이 밤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를 만들어낸 그때도 밤이죠. 밤에 했다는 말은 이것은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이 무에서 유로 창조하기 때문에 무의 상태를 표현하는 환경적인 방식이 밤이 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에베소서 5장에 나와요. “잠자는 자여, 일어나.”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 왜? 너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고 빛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 받야지 하는 대목이 나오죠. 선교단체 애들 좋아하는 대목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 그 대목이거든요. 잠자는 자여, 말하는 자체도 보세요. 얼마나 무식합니까.
요한복음 3장 같은 경우에는, 이 세상은 어둠에 속했고 빛이 오매 어둠이 깨닫지 못하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게 이 세상은 아무리 어둡더라도 빛이 오게 되면 어둠은 빛 앞에서 없어지게 돼 있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빛이 오니까 어둠은 더욱 더 어둠으로 티가 난다는 뜻으로 이야기해요.
이걸 가지고 신약학자들은 구약학자 침멀리 책 인용해서 이것은 묵시문학적으로 어떻고, 영지주의 영향을 받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대항하기 위해서 어떻고 되도 않은 소리하고 그걸 김용옥이 베껴서 자기 책 좀 봤다고 하거든요. 그게 전부다 뭐냐 하면, 인간은 말씀을 해석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군대는 원래 지상에는 없는 겁니다. 언약이 머리 위에 떨어지니까 우르르 쏟아지면서 언약 따라 따라온 자들이 천사들이에요. 천사들이 야곱의 머리 위에 오르락내리락했잖아요. 그러면 천사들의 기본 기능과 해야 될 역할은 이미 야곱 머리 위에 덮어씌워진 천사들이 있고 이 천사들이 하는 일이 인간적으로 바꿔져서 나타난 게 야곱의 역할이죠. 야곱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마하나임이 하나님의 군대지요. 사다리에 내려왔던 천사의 집단을 만났거든요. 만나고 난 뒤에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뀐다 이 말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야곱이 본래 자기 개인적인 사적인 어떤 견해가 있더라도 박살나고 오직 자기에게 들이닥친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가 해야 될 역할을, 인간적인 양상, 모양을 띠고 다시 말해서 어렵게 말해서 역사 속으로 육신을 갖고 들어왔을 때 인간의 모양새로 했을 때 이 역사는 두 개의 하나님의 군대에 속한 역사와 그렇지 않은 악마의 역사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갈라지는 첫 지점에 하나님의 군대, 마하나임이 있었던 거예요.
성경에서 진짜 난제, 어려운 문제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내가 언젠가 로마서 설교하면서 할 건데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죠. 왜 노아는 믿음의 조상이 안 되는데? 역사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이게 풀리지 않아요. 왜? 역사라 하는 것은 과거로 이어지면 계속 이어져야 되고 미래로 이어지면 계속 이어져야 되죠.
노아가 선배 아닙니까? 히브리서 11장에 아벨 나오고, 노아 나오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조상이란 말이 아브라함 선에서 끊어질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해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자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면 듣는 노아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일진파 시조가, 구원받은 시조가 아벨부터 나와야 되지 않습니까? 역사적인 문제로 하게 되면 그런 난제들이 성경에 굉장히 많습니다.
역사적인 잣대로 성경에 들이대지 말란 말이죠. 인간이 역사의 주체니까 시간성을 갖고 있는 우리가 성경도 시간적으로 해석하면 맞겠지 한 거예요. 대구에 있는 언약교회 박길현 목사가 나의 시간과 연관성을 반박했어요. 인간에게 시간이 있는데 시간으로 구원의 시간을 논하는 게 뭐가 나쁘냐? 그런데 이근호 목사는 인간의 시간관을 무시한다고 반박의 글을 올려놓은 걸 봤거든요. 반박 글을 올려놓으려면 본 글도 같이 실어야지.
인간은 시간에 둘러싸였다는 게 유명한 칸트철학 아닙니까. 인간은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의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사도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던 거예요.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은 그냥 존재성,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존재는 뭡니까? 완전히 무시당하고 오직 기능만 남아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 안에 주의 이름이 동행해서 가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문제가 안 풀려진 게 뭡니까? 동행하면 하고, 보호하면 보호하는 것이지 명령은 왜 했느냐 하는 이야기를 침멀리는 해결 안 했지요. 침멀리는 기껏 해석한 게 뭡니까? 그들을 심판 아래서 명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그래 우리는 잘못했어. 명령을 안 지켰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명령을 지킬 마음 준비가 된다면 반드시 메시아가 우리를 구원할 거야.”라는 식으로 해결했단 말이죠. 그런데 침멀리 같은 주장을 한 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었잖아요. 이 사람들이 메시아를 죽였지요.
침멀리가 메시아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침멀리가 예수를 죽일 거란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예수님 죽이라고 보내는 게 아니고 복음 전하는 사람을 침멀리 앞에 둘 거예요. 학생으로서. 학자가 안 나올 겁니다. 내 형제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했구나. 예수 믿는 사람 핍박하는 것이 예수 핍박하는 거예요.
침멀리 주장은 이겁니다. 하도 얻어맞았으니까 이제는 정신 차렸겠지. 아닙니다. 주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동행하게 되면 주의 이름이 갖고 있는 본성이 바로 공의와 사랑, 두 개의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님에게 지시한 거예요. 십계명 지키라고 누가 누구에게 지시한 거예요. 십계명을 주님이 주시고 그걸 주님에게 명령한 거예요.
주님이 주신 주의 계명이 얼마나 무서운 계명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명령 안 지켰다고 죽어야 될 자들이 모집되어야 되는 겁니다. 혈통적으로. 그들이 혈통적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은 멸망했잖아요. 멸망해야지요. 왜? 말씀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신명기 28장에 네가 말씀 안 지키면 나와도 저주받고, 들어가도 저주받고, 너는 꼬리가 될지언정 머리는 되지 못하고, 약속의 땅도 이방민족들이 차지할 것이라고 했잖아요. 약속한 대로 된다면, 이스라엘은 고통스러워 울고 있겠지만 이스라엘과 동행했던 주님은 박수를 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내가 뭐랬어? 반드시 말씀대로 된다고 했잖아.”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 너희들이 심판 받음으로 주의 이름이 시원하게 됐다고. 자기 백성이 고통 받음으로 주님이 기분 좋은 거예요. “봤지? 내가 뭐랬어? 말씀이 말씀대로 된다고 했잖아.”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 말해도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요. 말씀대로 됩니다. 우리가 말씀을 안 지켰는데 앞으로 말씀 잘 지킬 게요.”라고 해석한다는 것은 말씀에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죽어도 좋은 나라 가고 내 존재가 번듯하게 될까 여전히 여기에 관심 있으면 같은 말을 해도 알아먹지 못하는 겁니다. 주님보다 자신의 행복과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은 말귀를 못 알아들어.
“베드로야. 너는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이쯤 했으면 베드로가 정신 차려야 될 것 아닙니까. 옆에 있는 요한보고, “쟤는요?” 주님이, “쟤 요한은 내가 올 때까지 있든 말든 너는 신경 끊어라. 쟤가 있든 없든 그 문제가 아니야.” 너는 사도 요한을 통해서 너를 재정립하지 말란 말이거든요. 요한복음 21장이 그걸로 끝나버려요.
베드로가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사도행전에 베드로의 설교를 보세요. 완전히 구약해석을 침멀리 보기에 터무니없이 했어요. 아마 침멀리가 신약을 전공 안 하고 구약 전공한 이유가 구약을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이 해석하기 때문에 자기가 제대로 해석하려고 구약 전공 할 수도 있겠어요. 구약 전공자 대부분 그런 거예요. 구약이 와 닿고, 납득이 잘 되고, 이해가 잘 되서 이건 박사학위 될까 싶어서 할 수 있겠지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인데 눈에 보이는 자기 몸이 모여서 군대가 아니고 그 몸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주의 이름이 동행하는 겁니다. 모세가 돌판 깨고 난 뒤에 모세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저 백성들 그냥 놔두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 속에 내가 들어갈게.” 그렇다면 언약의 행함의 주체가 누굽니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의 안녕과 행복이 아니에요.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나의 평안도 아니고 구원, 천당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이름을 이름답게 드러내는 들러리로 모집된 것이고 채택된 것이고, 여기에 호명 받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의 이름과 그 다음과 주의 이름으로 호명 받은 인간들의 부실함, 어설픔이 대비가 되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고난 받는 언약이 나오는 거예요. 여기에 고난 받는 언약은 누구냐 하면, 바로 주의 이름의 지시에 의해서 주의 신을 받은 사람들, 사사들이나 선지자들은 이 틈 사이에서 인간의 이러한 고집에서 주의 이름으로 같이 살아가면서도 건널 수 없는 갭이 있고 어떤 틈이 있는 거예요. 그 틈 사이에서 깨어있는 사람이 뭐냐? 바로 순교 당하고 고난 받고 핍박 받는 선지자가 있어요.
이게 바로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은 너희들 속에 십자가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사람이 보이잖아요. “나, 사도 바울 봐라. 고난 받잖아.” 사도 바울이 무슨 죄 지었습니까? 나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십자가 복음 때문에 고난 받고 있잖아요.
인간이 생각한 역사라는 것은 이것은 하이데거도 이런 이야기했고, 여러 철학자들이 현대에서 이야기했어요. 훗설의 현상학 이야기인데 뭐냐 하면,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존재자라고 해요. 하이데거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을 존재자라고 한 거예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존재자는 미래의 개방입니다. 어떻게 미래를 개방하느냐? 쫓겨서 개방한다. 무엇에 쫓기는가? 죽음을 미리 알아서 선취지요. 선취란 말을 불트만이라는 신학자가 하이데거에서 이 말을 따온 거예요. 선취, 미리 취한다.
미리 죽음을 알고 죽음의 공포를 어떤 식으로 극복하느냐 시도하는 가운데서 미래를 개방하고, 미래를 열어젖히는 모든 시도에서 나온 것이 현 세상이에요. 이것은 물리적이고 과학적인 별이 있고, 하늘에 구름이 떠있는 이런 세상, 고요한 세상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세상을 세상으로 보는 의미는 바로 존재자에서 나온 존재자가 원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이런 겁니다.
토끼가 있다고 합시다. “토끼야. 부산에 비 오네.” 토끼는 존재자가 아니기 때문에 깡충깡충 뛰어 가버려요. 그런데 비가 온다는 것이 나에게 의미 있다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나오는 현상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죽음을 알기에 어떡하든 살아보려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가운데서 세상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의미와 해석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 세상은 우리에게 비를 내린다. 세상은 비가 온다가 아니라 나에게 세상을 준다. 그러니까 반드시 세상을 볼 때는 괄호 쳤지만 내가 있는 전제로 해서 세상을 이야기한다는 거예요. “비가 오네.” 거짓말이에요. “나 좋으라고 비가 오네.” 혹은 “나 기분 나쁘라고 비가 오네. 나 서글프라고 비가 오나?” 이런 식으로 반드시 나를 집어넣는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라고 할 때 그냥 예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 천당 보내려고 예수 있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세상이 먼저 있고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있는 내가 소중하기에 귀하기에 세상도 덩달아 귀한 겁니다. 만약에 세상이 나의 귀함을 인정하지 않을 때는 나는 세상과 더불어 자살하지요. 그게 한강 자살, 번개탄 자살, 수면제 자살 아닙니까.
이층에서 아들이 명절에 와서 떠든다. 시끄럽다.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기분 나빠서 죽여 버렸다. 지금 도망갔는데 오 일째 안 잡히고 있거든요. 왜 죽입니까? 내가 만든 세상에서는 떠들지 않는 세상일 때 내가 만든 세상이에요. 그런데 나는 이층에 있는 형제를 안 죽였어요. 왜? 나는 대구에 살기 때문에 서울 면목동에 안 살거든요.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우리 위층에 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때려죽이지는 않겠지만 찾아올라가기는 하겠지요. 좀 조용히 합시다. 내가 살인자 될 가능성이 있어요. 나를 위한 세상에 나의 허락도 없이 떠들었으니까. 그런데 이층 형제가 와서 “조용히 할게요.”라고 말을 하지 말고 수표로 1억을 내놓는다면, “떠드세요. 다음 명절에 또 봅시다.”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왜 죽였느냐? 그 사람이 수표 1억을 안 가져와서 그런 거예요. 이 말을 하이데거는 사람은 현재에 머무는 게 아니고 미래에 개방돼있다고 보는 거예요. 당신이 내가 원하는 미래상에 부응한다는 나는 당신을 항상 용서할 준비가 돼있다. 하지만 이 말은 뭐냐? 나의 미래상을 가로막는다든지 훼방한다면 지금 당신을 내가 안 죽여도 벼락 맞아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 이 세상의 모든 목사와 교인들이 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날 설교했지만 율법이란,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이미 너는 살인자라는 것을 통보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 듣고 이것도 살인이라고 고백할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아직까지는 내가 살인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경건치 않은 자, 그리고 일을 아니할지라도 하는 말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걸 못 알아들으니까 다윗과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진짜 믿음인데 다윗과 아브라함이 갖고 있던 그런 은혜가 없이 자기가 아는 상식으로 믿는 것은 가짜라 이 말입니다.
참 가만히 따져보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지요. 우리가 따로 세상관을 만들어내니까 문제인 거예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의 군대란 하늘나라에서 천사와 악마의 나라를 분류시킨 그 분류가 언약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와 덮친 거예요. 덮치니까 이스라엘만큼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요. 똑똑해서가 아니고 착해서가 아니고 그 안에 주의 이름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고 나머지 이방나라는 주의 이름이 있는 나라로부터 저주받아야 돼요. 왜? 이스라엘은 훌륭하고 저쪽은 악해서가 아닙니다. 신명기 9장에 보면 뭡니까?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은 너희들이 의로워서가 아니고 경건해서가 아니고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하지만 너희들과 함께 일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언약과 맹세 때문이라고 나오잖아요.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어요.
어쨌든 간에 하나님의 군대로 삼은 것은 이쪽은 주의 이름이 없고, 이쪽은 주의 이름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와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이 믿으라가 아니라 그 말씀을 누가 지켜요?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누가 지켜요? 주님이 지켰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믿어지는 사람은 그 말씀에 입각한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돼버린 거예요. 이 말 참 어렵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것을 누가 실천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차후적으로 인정할 때 그게 바로 믿음이란 말입니다. 믿게 하셔서 믿게 된단 말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뭐냐? 오직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서 나온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 침멀리가 이야기한 두 번째 것, 뭡니까? 결국은 시작은 하나님의 군대로부터 시작했다. 군대하는 일은 싸움이죠. 결국 분류작업이에요. 처음에 전쟁할 때는 주의 이름이 없는 이방나라와 전쟁했잖아요. 나중에 점점 가면서 주의 이름이 누구와 싸웁니까? 아까 했지요. 주의 이름과 백성 사이에 틈이 생겨서 틈에서 선지자와 사사들이 나왔지요. 백성들이 처음에는 사사들을 좋아했어요. 처음에는 선지자를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백성들이 국가를 만들고 난 뒤에는 누가 미워해요? 그게 다윗언약부터인데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요 할 때는 좋았지요. 나중에 보니까 사람들이 누구 편을 들어요? 천천에 불과한 사울 편을 들었잖아요. 전체를 누굴 공격합니까? 다윗을 공격하니까 다윗은 본의 아니게 선지자가 됩니다. 이 선지자는 직통전화로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여기서 천상회의가 등장하잖아요. 직통으로 엘리야와 엘리사와 마찬가지로 장차오실 예수님과 직통전화를 해요. 미가야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선지자를 괴롭히는 주변에 자칭 주의 이름이 있다고 우기는 사람들.
그럼 전쟁은 이방나라는 차치하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분리가 일어나는 거예요. 첫 번째 분리가 북쪽 이스라엘, 두 번째 분리가 유다나라가 선지자와 갈라지죠. 주의 이름은 묵시로 날아가 버려요. 역사로 왔다가 묵시세계로 다시 돌아가 버리죠. 그 다음부터는 모든 역사에 대해서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이미 확정된 상태입니다. 모든 역사는 역사에서 주물럭주물럭 만들어서 하나님이 계실 자리는 없다. 따라서 모든 역사는 불로써 싸질러버려요.
그러면 역사는 동결되고 역사 자체는 의미가 없이 되죠. 그리고 역사 속에서 인간이 희구하고 갈구했던 인간만의 세계, 국가란 것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내면서 인이 없는 사람은 매매도 못하게 만든다고 하는.
제가 요 근래에 이런 질문을 계속 받았어요. 하나님의 인이 뭡니까? 바코드 심어서 어떻게 한다는데 도대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인이 뭡니까? 지난 주일에 제가 이런 식으로 설명했어요. 봉인한다는 거예요. 봉인한다는 말은 단지에 보호한다는 뜻이에요. 간장이나 고추장을 봉인해놓고 때가 되매 뜯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 편지 뜯을 때 자기가 못 뜯어서 울고 있을 때 누가 뜯어요? 자, 때가 됐다고 봉인을 뜯지요. 봉인을 뜯는다는 것은 봉인을 뜯는 그분이 봉인을 해놓은 거예요.
고린도후서 2장에 보면, 성령으로 인쳤다. 앞에 ‘봉’자를 집어넣으면 쉬워요. 성령으로 봉인을 해서 이 작품은 네가 만든 작품이 아니고, 막걸리 담글 때처럼 내가 효모 넣고 숙성하라고 했던 이걸 뜯는 거예요. 뜯어버리면 이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생명책에 명단이 있기 때문에 내가 알아서 너희를 보호했다고 하는 식으로 뜯는 겁니다.
그러면 봅시다. 구약의 하나님의 군대, 진짜 이스라엘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아버지와 이야기가 끝났어요. 아까 에스겔을 인자라고 했지요.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의 대화란 인자와의 대화거든요. 이 대화가 성취가 되면 그 효과와 효력이 외부에 퍼지면서 은혜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미 에스겔이 하나님과 할 때 이미 하나님의 성신이 성전을 떠나버렸어요. 성전을 떠나버리면 하나의 건물이기 때문에 불타버려야 돼요. 성전을 불태움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다윗언약의 성전은 따로 존재하는 겁니다. 그 성전은 누가 만드는가? 예수님이 친히 만들어요. 하나님이 거주할 성전을 친히 만든단 말이죠. 신약에 와서. 그래서 요한복음 2장에서 성전 46년 동안 지은 것 다 허물로 내가 사흘 만에 지겠다고 했잖아요.
그렇게 될 때 이미 인자됨에 의해서 완성된 것을 하나님께서 새로 만들게 되면, 마지막에 중요한 대목입니다. 다시 해봅시다. 육신이란 흥부놀부전에 나오는 박을 켜는 것이다. 박이 둘로 쪼개지면 우리가 생각 못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이 육신도 구원받는다고 했지요. 그 이야기를 그대로 해봅시다. 예수님께서 인자입니다. 인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기 때문에 여기서 이미 결정된 거예요. 그렇다면 지상에 있는 긴긴 이스라엘 역사와 지금 역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 구약을 끝내면서 구약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걸 정답을 알고자 지금까지 공부해왔는데, 이게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께서 역사가 있는데 그냥 역사를 구원하면 되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단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죽는다 했거든요. 이것은 뭐냐 하면, 언약적 입장에서 예수님이 죽은 것은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뱀을 드러내기 위해서 돌아가신 거예요.
그렇다면 이 역사는 무슨 역사냐 하면, 예수님을 죽이는데 꼭 필요한 뱀의 역사이어야 하는 겁니다. 줄기차게 끈질기게 혈통적으로 성령이 아니고 육으로 계속해서 역사를 질질 끌고 와야 돼요. 할례를 행하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안식일도 그렇고 십일조 그렇게 계속해 와야 되는 겁니다. 왜? 그것이 몽땅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드는 마귀를 포획하기 위해서 설치한 덫의 역할을 충실히 해줘야 되는 겁니다. 교회 역사도 마찬가지고, 우리 가문의 역사, 우리 가정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이렇게 죄만 지었는데 이렇게 나쁜 역사만 있는데 구원될 것이냐, 말 거냐? 그 문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으로 완전히 조져놔야 그 작업 중에 하나가 영으로 난 자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육신에는 뭐가 포함돼있다? 죽음이 포함돼있어요. 그런데 이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포함되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속에는 부활이 담겨 있잖아요. 그 부활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뭐라고 보느냐 하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죽을 몸도 살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인생을 살게 하시고 그 인생 죽게 하시면서 우리 인생을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 받아서 살게 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 몸이라 하는 것은 자체로 의미가 없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보여주는 증거 용도로서 우리 인생은 착실하게 부산에서, 대구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경유해야 주께로 돌아갈 수 있는 주님과 고무줄인지 뭔지 연결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의미 있는 거예요. 나의 것으로서 의미 있는 게 아니고 주의 것으로서 의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살아야 돼요. 왜? 마음대로 산다는 이것이 결코 주 안에서는 마음대로 사는 게 아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대로 살면서 혹독하게 어느 것 하나 죄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을 충실하게 알아야 돼요. 날마다 주시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벌거벗은 채로 다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충실하게 사는 그것도 내 마음대로 산 게 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 안에 구약역사가 지금도 반복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살아있는 산 역사인 것을, 구약역사고 신약역사인 것을 알았습니다. 생각하면 모든 것이 죄고 죽어 마땅한데 죄를 죄라고 일깨워주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언약의 효과인 줄 압니다. 이제 자랑할 것은 오직 십자가와 오직 주님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30212b 부산강의.hwp (63.0K), Down: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