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1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육신의 역사
2013021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육신의 역사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021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육신의 역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구약신학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줄기차게 왔는데 마무리를 잘해야 되겠지요. 여기서 304페이지인데 [구약 선포의 개방성]이란 제목으로 마지막에 돼있습니다. 새 번역에는 뭐라고 돼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목부터 설명해야 되겠지요. 침멀리가 이런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지요.
침멀리는 구약신학자입니다. 구약신학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래서 ‘개방성’이란 말을 붙인 거예요. 개방성이란 뭔 뜻이냐 하면, 아무리 신약성경이 있더라도 구약이 출발이 돼야 된다. 그리고 구약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라고는 이야기고 싶지는 않다. 자기는 기독교에 속해있고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그냥 구약과 신약 합해서 성경이라면 이것은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구약 선포의 개방성이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개방성이란 말을 그림으로 하게 되면, 옛날의 축음기에 보면, 나팔에서 소리가 나오잖아요. 전체가 구약이라면 신약을 향하여 닫힌 게 아니고 활짝 열려있다. 이 말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굉장히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상식적이 아닙니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신약에 있는 모든 개념은 신약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에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미 시작이 구약부터 시작했으니까 신약의 모든 개념은 구약신학을 거치지 아니하면 신약의 신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는 그러한 자존심 같은 겁니다. 선언 같은 겁니다. 신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을 알고 싶다면 구약 신학에서 충분히 훈련과 교육을 받으시기 바란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어요. 구약도 모르면서 신약부터 시작해서 예수부터 출발한다고 해서 그게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궁금한 것은, “구약과 신약에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이냐?”라는 질문을 했을 때 여기서 침멀리가 내내 주장한 게 있어요. 역사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묵시가 있지 않느냐 할 때 그 묵시는 사실은 묵시가 아니고 역사에 속한 아이디어였다. 그걸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문학은 사람이 하는 거죠. 사람은 묵시에 속한 것이 아니고 역사에 속하고 역사에 속한 사람이 구약의 개방성,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개방성.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고 여전히 남아있고 여전히 뭔가 하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그 남아있는 대목을 묵시문학이라 하자. 왜 그러냐 하면, 신약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구약부터 예상된 일이기 때문에 구약이 끝난 이 지점에서 묵시문학이 있었고, 이 묵시문학을 하는 주인공들은 역사에 속해있고, 역사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속한 구약과 신약의 연결은 처음부터 끊어진 적이 없고 다만 끊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간격은 묵시문학이 메우게 되리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묵시문학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역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묵시문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묵시를 설명할 때는 다시 역사적으로 환원시켜서, 역사로 되돌려서 해석하시면 그건 오케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꼭 이렇게 구약신학을 하면서 해야 될 이유가 무엇이냐? 여기에 304페이지 위부분에 보면 나옵니다. 초반부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 나와요. 마지막이기 때문에 침멀리가 어떤 대목은 함축해서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것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그 대목을 새 번역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의식은 드보라의 노래(삿5:11,13)에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에 관한 초기의 언급에서부터 다니엘7:27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 관한 후기의 진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약의 진술을 포괄하였다.”
의견이 두 가지 나왔지요. 하나는 초기라는 말 나왔고, 후기라는 말 나왔지요. 방금 제가 설명한 대로지요. 후기는 뭐로 끝납니까?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다니엘의 묵시문학적이죠. 이 사람 말에 의하면. 초기는 여호와의 군대.
이 말이 오늘 공부하는데 벌써부터 상당히 신경을 바짝 쓰게 만들어요. 사람의 군대는 될 수 있어요. 청년들이 대한민국 군인은 될 수 있어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인데. 천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가 되는 거예요. 본적지가 하늘나라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징집하면 하늘나라 군대가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사는 동네가 부산이고, 대구고 있잖아요. 거기서 징집소집을 하나님이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게 이해가 될 일이냐 이 말입니다.
하늘나라 군사들이 모자라서 “이 보충을 어디서 하지? 대구에 사는 사람 뽑을까? 서울에 사는 사람 뽑을까? 야. 너, 군에 들어와.” 이래야 군인이잖아요. 하나님이 무엇이 답답해서 뭐가 아쉬워서 사람을 하나님의 군대로 뽑는 이유가 뭐며, 두 번째로 뽑아서 뭘 할 건데?
침멀리가 이야기한 여호와의 군대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생각하면서 저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침멀리 주장, 여호와의 군대라는 자의식이 시초였다. 후기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이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백성이다.
이 맞은 편에는 제가 생각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도 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보았느냐? 이걸 여기다 대치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침멀리는 이걸 생각하겠어요? 아까 강의에 의하면 이걸 생각 안 하지요. 왜냐하면 모든 신약은 신약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벌써 신학이 수상하지요. 출발점을 신약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역사의 개방성이니까.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의 나팔꽃처럼 시작은 구약부터고 벌어지기는 신약인 거예요. 그걸 빅뱅처럼 다시 모으면 출발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어야 한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는 말이거든요.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는 말은, 결과가 원인되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원인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시간 순서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고. 그게 상식적이고 옳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약이 먼저 있고 신약이 가기 때문에 시작점을 신약으로 해서는 반칙이고 그건 터무니없는 거라는 생각을 침멀리가 갖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선포의 개방성이라 하는 거예요. 그냥 구약에서 질문하면 신약적으로 답변하면 된다는 겁니다. 질문을 신약이 구약에게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립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봤느냐 하는 겁니다. 침멀리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라 했지요. 보세요. 이게 벌써 인간 중심이잖아요. “우린 뭡니까?” 여기에 대한 구약의 답변은, “너는 거룩한 하나님의 군대야.” “그렇지요. 그럼 이야기 되네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하늘나라의 거룩한 성민이야.” 그게 마무리네. 시작은 여호와의 군대로 시작해서 마무리는 여호와의 백성으로 끝난다. 이게 침멀리의 이야기란 말이죠.
그런데 질문 자체가 뭡니까? “우리는 누굽니까?” 의식하면서 거기에 답변서로서 구약이 하나님의 계시가 여기에 부응하듯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 5장 39절에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한다 했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묻느냐? “나는 누굽니까?”가 아니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러면 여기 이스라엘은 나는 누구냐고 물을 자격이 그 자체로 없어요.
너희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때고 맞는다고 수긍하면 안 된다니까요. 수긍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기다렸다는 거거든요. 말은 안 했지만 “저는 누굽니까?” “하나님의 군대야.”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은근히 기다렸으니까 이것도 반칙이라.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이렇게 해야 돼요. 사도 바울이 주를 만났을 때 “예수님이 누구신데 우리를 하나님의 군대로 삼았습니까?” 이렇게 돼야 된다니까. 그렇게 되면 모든 활동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우리가 어떻게 되느냐가 초점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 그냥 들러리로 채택된 거죠. 선택의 의미인데. “너, 이리 와.” 하고 호명됐고, 호출된 겁니다. 이번 수련회 때 이야기했잖아요. 호명되고 호출된 것.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라고 해버리면, 이렇게 사람들이 답변할 수 있어요. “나는 이스라엘에 관심이 없다면 이야기는 끝난 거죠. 나는 이스라엘 자체에 관심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 걱정하기도 바쁜데 남의 나라 걱정까지 못 합니다. 나는 단군의 자손으로 만족합니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그 이상의 생각은 갖고 싶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저희끼리 놀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 너희들끼리 하나님의 군대라고 많이 해.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이러면 이야기가 이스라엘 나라 역사로 전환돼버립니다.
그런데 과연 신약에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있으면 돼. 구약 필요 없어.”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주님이 누구십니까? 이렇게 나왔지요. 그렇게 나오면 남의 인생이라고 여겼던, 자기와 상관없는 역사라고 여겼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이미 우리 선배들의 역사였다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종합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때부터는 구약성경 읽기 또는 구약을 보는 것이 남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족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방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마치 혈육적인 족보인 것처럼 읽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나한테 찾아온 예수님이, 똑같은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을 찾아왔잖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그냥 찾아오시지 않고 구약 때 했던 이스라엘을 몽땅 끌고 나를 접점으로 해서 들어와 버린 거예요.
여러분 흥부전 아시지요. 흥부전의 마지막에 박을 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슬근슬근 톱질하세. 해서 박 깨면 도깨비도 나오고, 똥물도 나오고, 보화도 나오잖아요. 그럴 때 놀부가 제비 다리를 분질러서 다시 고쳐줘서, 놀부가 한 일이 주님께서 하신 일과 똑같아요. 일부러 분질러놓고 병 주고 약 준 거예요. 완전히 하나님은 놀부에요. 흥부의 착함을 거부하고 일부러 분지른다니까요.
분질러서 붙여놓고 박을 켜니까 도깨비가 나와서 놀부를 매우 치거든요. 칠 때 치는 이유가 ①박 허락 없이 개방했다고, ②박 속에 있으면서 놀부의 과거 흔적까지 역사까지 이미 책임을 물어서 쳤다. 몇 번입니까? 이 번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와서 박을 켜보니까 구약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가 내가 저질러온 일과 합세가 된 거예요.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죄 지배 아래 있잖아요. 우리는 아담을 본 적도 없어요. 선악과 구경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박을 켜보니까 선악과 따먹은 그 짓이 지금도 내가 일상처럼 하는 짓이 그 짓이에요. 구약 때 하나님 원망하고 불평했던 그 짓을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눈 감기 전도 그렇지만 눈만 뜨면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구약역사가 남의 역사가 안 되는 겁니다. 개방은 무슨 개방이에요? 뭘 개방해요? 새삼스럽게 개방이란 게 없어요. 우리가 구약에 참여하지. 거꾸로.
침멀리는 역사 진행방향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하잖아요. 그런데 성령은 그걸 용납 안 합니다. 신약에서 도리어 구약 쪽으로 우리를 밀어버려요. 네가 가인이야. 네가 바로 바리새인이고. 우린 십자가 구경도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 구경 못했어요. 못했으면서도 하는 말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이야기한단 말이요. 그러면 다른 사람, “네가 십자가 언제 봤어?” 하면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구약의 사건에 반복적으로 참여시켰다는 말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구약을 봤을 때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이렇게 봐야 구약이 풀린다는 이야기에요. 사도 바울이 구약을 십자가 중심으로 봤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중심으로 본다. 우리는 침멀리 잊어버린다. 이러면 안 돼요. 십자가란 자체가 피해 받은 자니까 반드시 십자가 바깥에서 해석하는 구약해석을 철저하게 우리가 알고 있어야 무엇이 가해자인 것을 알아먹게 된다 이 말이에요.
이번에 에스라, 느헤미야 하면서 하나님께서 물렁물렁한 역사를 딱딱하게 냉동 동결시킨다고 했지요. 냉동 동결시키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은 바로 짐승의 나라를 유동하는 변화하는 짐승의 활동과 사건을 하나의 젤리처럼, 우뭇가사리처럼, 또는 묵처럼 동결시켜버리면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짐승의 정체는 국가에요. 그 국가가 무슨 성향을 갖고 있는가? 종교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종교국가, 국가종교 두 개 다 해당되는 겁니다.
종교국가란 로마가톨릭 이야기고, 국가종교란 동방 모든 교회와 이슬람교, 그리고 부탄. 부탄은 90%가 불교도인 불교왕국이 있어요. 세계에서 행복감이 일등인 나라. 그 왕은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사람이에요. 불교적인 정신으로 어떻게 행복을 줄 수 있느냐? 그 부탄 옆에 있는 나라가 네팔. 헌법에 의해서 종교를 규정한 나라, 이슬람 나라,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 모든 말레이인들은 이슬람교인이라고 규정해놨어요. 실제로는 다른 종교도 허락하지만.
이처럼 그 모든 것이 어디의 줄기냐? 로마로서 국가관이 성립되고 번진 거예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선언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당합니다. 그렇다면 로마가 결국 짐승의 앞잡이고 그 짐승 중에 하나가 헤롯, 짐승의 속국, 로마에 종속 받는 형태로 로마가 해야 될 일을 여호와 이름을 빙자해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죽여 버리는 여호와와 여호와의 만남이에요.
이번에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박상민과 박상민의 만남. 진짜 박상민이 가짜 박상민을 만났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없었겠습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이미테이션이 아닙니다. 진짜 자기를 박상민이라 하니까. 그러면 자기는 박상민이 아닌 게 돼요. 내가, 내가 아닌가?
복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기독교라는 취미생활에 밀리지 않을 때 비로소 복음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보통 사람은 기독교가 취미 아닙니까. 사람이 취미란 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고, 복음은 복음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닌 게 복음이잖아요. 취미 생활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고,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이 자기보다 더 소중한 문제고. 둘이 만났다. 그러면 누가 복음에 대해서 진지하겠습니까? 취미겠어요? 생명이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복음이기에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복음은 생명이라고 말하는 취미로 사는 사람이 있다니까. “십자가 때문에 삽니다.”라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이단이거든요. 그런 사람 만나서 대화해보면 대번 들통 나요.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지 결국은 복음이고 예수고 자기가 귀하기 때문에 자기 받쳐주기 위해서 그런 취미 생활하는지 대번 그 차이가 드러나는 겁니다.
로마나라에 지배받는 유대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 아니고 유대나라라는 국가정체성이 제일 우선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나라는 내 나라에 속하지 않다며 죽고 마는데. 로마나라 밑에 있는 헤롯나라 만들기 위해서 구약은 그야말로 구약 선포의 개방성이 아니라 구약역사의 개방성이 돼야 돼요. 제목을 바꿔야 돼요.
이 사람이 선포란 말을 한 것은 구약을 복음이라 여기고 선포란 말을 했는데 이 사람의 주장에 의하면, 구약선포의 개방성이 아니고 구약역사의 개방성이라 해야 돼요. 구약역사는 짐승나라 만들기. 만들어서 뭐 할 건데? 예수님을 가해하는 가해자로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렇게 한 겁니다. 아담에게 찾아왔던 그 악마가 국가란 이름으로 드디어 예수님 만나서 자기의 본색이 드러날 때까지 구약은 긴긴 시간을 흐르고 그렇게 흘러온 거예요.
그것을 사도 바울은 한 마디로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은 육에 있음. 이걸 사도 바울은 함축해서 어디에 담았느냐 하면, 육신이라 표현했어요. 고린도후서 3장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성경 읽을 때 문자로 읽지 나는 영으로 읽는다.” 영으로 읽는 것이 뭔 뜻이냐 하면,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읽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성령을 안 받으면 구약은 해석이 안 되지요. 감춰놓은 비밀이지요. 이 말도 어려워요. 감춰놓은 비밀이란 말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드러나기 때문에 비밀이란 뜻이에요. 말 자체가 어렵지요. 계속 드러내기 때문에 비밀로 유지될 수밖에 이유가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못 알아듣게 돼있는 겁니다.
쉬운 예로 콩고 말을 우리가 알아듣습니까? 콩고 사람이 계속해서 콩고 말을 하는데 우리한테는 비밀이 되고 감춰진 게 돼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세상에 속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어리석은 말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돼있어요. 마태복음 13장이나 사도 바울에 보면 나오잖아요.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감추었다는 말이 아니고 드러냈는데 드러낼 때 그냥 드러내는 게 아니고 못 알아듣도록 해서 드러낸다는 거예요. 왜? 성령에게만 고유한 해석의 권한을 주기 위해서.
“내가 성령 받아 해석했습니다.”가 아니라 “성령께서 일깨워줄 때만 이해됩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내가 성령 받아서 이만큼 수복하게 가지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석해봐? 이래서 해석 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깨우칠 때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성령이 없으면 성령 받은 나는 어떻게 됩니까? 무지몽매한 자가 되지요.
아,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게 이걸 설명 안 했구나. 육신이라는 게 몸뚱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몸뚱이, 근육질+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 받은 내 몸이 성령 받았기 때문에 해석할 수 있다고 되잖아요. 사도 바울의 육신 개념이 껍데기 개념에다 성령 받는 개념이 아니고 이 육신은 하나님이 다룰 때 육신이 되는 거예요. 계속 다뤄져야 돼요. “이제는 성령이 있으니까 주께서 안 다뤄도 됩니다.” 이러면 애초부터 육신이란 개념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이런 것 때문에 철학적인 개념들이 필요한데, 나한테는 이런 점이 모자란다. 그러면 모자란 부분을 채우면 될 것 아니냐?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육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하면 우리는 나를 나라고 할 자격이 없어요. 그냥 육신이에요. 육신이란 말은 구약에 의하면, 언약에 의해서 다뤄지는 재료란 뜻입니다. “내가 너를 영혼으로 다루면 네가 찬양하게 될 것이고, 육신으로 생각해서 다루면 너는 흙이 될 것이다.” 이게 시편에 나오거든요.
그러면 하나님, 나는 육입니까, 영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 돼요. 다뤄진다는 말을 이해 못할 때는 그걸 묻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다룬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내가 다룰 그 순간에만 비로소 너의 본체가 드러나는데 너를 죄 있는 것으로 다룰 때는 하나의 한 줌의 먼지나 흙으로 다뤄진다는 거예요. 아무리 노래 부르고 차 운전해도 흙이 운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이 와서 찬양할 때는 이것은 영으로 다뤄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육으로 다루든, 영으로 다루든 방향을 바꿔서 그러니까 “나는 여기 있잖아요.”라고 주님께서는 그 답변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고 우길 때도 내가 내 입장에서 볼 때 여기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주님께서는, “너, 거기 있나? 뭘 해줄게.”라는 입장이 아니고 그냥 주님의 이름이 계시매 덩달아 있는 거예요. 주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뭔가 주님의 기능을 하라고 있는 겁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고 지옥 간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지옥 간 사람은 그걸 모르죠.
선악과 따먹지 말라 할 때 주님은 우리한테 관심 없고 따먹지 마라에 관심 있어요. 말씀이 우리보다 우선하는 겁니다. 따먹지 마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따먹었나? 이번만 봐줄게.” 이런 것 없어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 근원을 다 발생시켜줘야 말씀이 말씀으로 위신이 살아요. 하나님은 그게 전부라니까요. 말씀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 아담을 필히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담에게 약속을 한 것은 아담을 살리기 위해서 약속 준 것이 아니고 약속을 남긴 그 약속의 위신을 위해서 아담은 지옥 가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보다 말씀이 먼저에요. 우리는 풀 같아요. 풀에 핀 꽃 같아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데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이사야 40장 이야기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선이나 악을 저지르기 전에 그 뒤에 중요한 말을 놓치면 안 돼요.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야곱은 뭐 하기도 전에 사랑 받아야 되고, 에서는 태어나기도 전에 저주받아야 되는데 이것은 에서와 야곱을 살리고 죽이는 게 목적이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말씀 위주로 가버려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말씀 없이 아무것도 된 게 없다고 했잖아요. 우리 위해서 말씀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사기 치는 거고요. 뭐든 주님 앞에서는 ‘아니요’가 없어요. 우리는 자식 죽고, 교사 생활하고, 개판 돼버렸어요.
그 예를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니까 우리란 봉지가 찢어졌다는 말 했잖아요. 찢어진 봉지를 억지로 스카치테이프로 붙이지 말고 찢어진 채로 놔두란 말이죠. 그래야 엄청난 분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아니요’란 게 없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모든 것이 ‘예스’입니다. 오케이에요. 주님이 영화감독이라면 모든 신에 대해서 오케이, 다음 장면. 무조건 오케이에요. 우리는 낭패당해서 지금 엎어지고 자빠지고 난리 났는데 주께서는 오케이에요.
그런데 침멀리는 뭘 주장합니까? 역사. 누구 역사? 인간이 주인공이 된 역사. 그래서 그 뒤에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내용이 나와요. 어떻게 믿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는가? 이게 305페이지 나옵니다. 침멀리가 구약의 박사입니다. 그리고 이만한 책을 지었으면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끝까지 해결이 안 돼요. 믿으라고 하든지, 아니면 명령 따르면 구원하겠다고 하든지. 믿어야 된다고 해놓고 왜 명령이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이유가 납득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로마서에서 보는 그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바리새인이 주장하는 이야기를 최고의 구약학자가 하고 있어요. 그래서 기껏 내놓은 것이 개방성. 몰라. 그 해결을 어디서 한다? 신약 가서 해결 보겠지요. 하여튼 나는 구약학자니까 이렇다고밖에 안 해요.
305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줄에, [그러나 이 명령은 동시에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며 복종을 기대하고 만일 불복종할 때 생존에 위협을 가져오는 강압적인 계명이기도 하였다. 대 예언은 결국 심판의 심연의 길로 안내하였다.] 새 번역은 어떻게 됩니까? [이 명령은 일면 야훼의 자비로운 인도하심과 적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보호한 것과 혈연 장소에서 특별히 나타난 축복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게 딜레마라니까. 보호하면 보호해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거리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보호해준다며 명령하면, 명령 안 지키면 보호 안 해 준다는 말인지, 네가 순종 안 해도 보호한다는 말이지, 우리는 항상 과정보다 결과가 보고 싶잖아요. 결과에 대해서 계속 미진한 채로 이 사람은 자기의 거대한 책을 마무리진다고요.
어디서 문제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육신은 뭐가 육신이냐?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하니까 그게 육신인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으면 구원받습니까?”라는 말을 하니까 주님 보시기에 “아니고, 인간아. 그러니까 육신에서 못 벗어나지.”
그런데 성령이 왔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아니고 입장도 아니고 그럴 권리도 없구나.” 왜? 나는 태초부터 오직 주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져야 될 인물인데 그동안 철이 없어서 성령을 안 받아서 육신적인 생각만 해서 맨날 “주님은 저한테 무슨 의미입니까?” 이런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자체가 후회스럽지요. 후회만 하면 뭐 합니까? 지금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는데. 지금도 우리는 매일같이 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왜 일이 잘 안 됩니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앞으로 어쩌란 말입니까?” 계속 입을 나불나불 거리면서 그 소리하잖아요.
그럴 때 흔히 하는 게 명령을 지키라,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나오니까 이게 바로 짐승의 나라, 예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자, 구약이 결국 헤롯왕국이 되었고, 헤롯왕국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는 이 땅의 모든 세상 국가의 최종적인 바벨론이에요. 국가는 로마 이상 되는 국가는 없는 거예요. 지금 세상에 216개국의 모든 나라는 전부다 로마에 붙어있는 작은 타일 같은 거예요. 타일 통해서 외벽이 형성되잖아요. 로마라는 짐승에 외부에 드러나는 햇빛에 반짝이는 각종 작은 조각의 타일들입니다.
그리고 그 로마가 하는 일 중 중요한 일은 바로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써 비로소 그동안 감추었던 비밀이 드러난 겁니다.
10분 모자란 건 다음 시간에 채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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