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30131b-마13장17절(말씀위주 세상)36강- 이 근호 목사
대전130131b-마13장17절(말씀위주 세상)36강-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61.100.205.105)
대전130131b-마13장17절(말씀위주 세상)36강-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마태복음 13장하겠습니다. 18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리 되어 있지요.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해놓으시고 또 해설도 붙여놓았는데, 차라리 해설이 없었더라면 더 쉬운 거 같아요. 이런 해설을 안 붙여 놓으면 ‘아, 농부가 씨 뿌렸는데, 열매 맺는 건 따로 있구나!’ 이렇게 쉽게 알겠는데 이렇게 감정을 집어넣었잖아요. 지금 방금 읽었던 본문의 2가지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에게 자율이 없다는 겁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돼 있지요. 악한 자가 빼앗을 때에 “아이고, 가지고 가지 마세요. 가지고 가지 마세요.” 하고 반발하거나 반항할 수 있는 힘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모든 자율권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앞의 길 가의 떨어진 씨도 그렇다면, 마지막에 열매 맺는 것도 자율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4가지 종류가 다 인간의 자율권이 박살된 상태에서 일어난 현상이 되는 겁니다. 자율권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이 뭐냐 하면, 이 모든 열매라든지, 빼앗긴다든지, 가시떨기 라는 모든 용어가 어디와 연관되어 있는가, 말씀을 옹호하기 위해서 말씀이 말씀답게 그 가치를 높이는데 있어서, 너는 돌 짝의 밭에 해당되고, 너는 가시덤불에 해당되고, 너는 길가에 떨어져야 되고, 너는 옥토가 되는 거예요. 자신이 원하는 것의 30배, 60배, 100배 건지는 것이 옥토가 아니고,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나는데 그게 제대로 드러나게 되는 밭은 옥토가 되는 거예요.
첫 번째, 인간의 자율성은 없다. 두 번째, 자율성이 있다는 것은 말씀이 스스로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4가지의 서로 차이나는 환경을 이용해서 말씀은 말씀대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4가지 차이나는 그 환경을 다 모아보면, 거기서 뭐가 드러나겠습니까?
‘아! 말씀이라는 것은 요러한 역할과 기능을 발휘하는구나!’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한 사람을 두고 어떤 보이지 않는 'X'라는 물체가 있습니다. 이 물체가 어떤 모양새인지는 조명이 일부러 있게 해서 물체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명을 비출 때, 한 쪽을 비추니까 네모나게 그림자가 생겼습니다. 이쪽을 비추니까 세모나게 그림자가 생겼습니다. 이쪽을 비추니까 동그란 그림자가 생겼습니다. 이쪽에 비추니까 아예 그림자가 없습니다. 이럴 때 이 물체가 뭘까? 이건 4가지 그림자를 다 종합해 보면, 물체가 뭔지 다 드러나겠지요. 그런 원리다 말이지요.
서울에 용산역 앞에 가보면, 세계에서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 하나 있어요. 서울에서 유명한 건물이 되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건물은 직사각형으로 지었는데, 이 건물은 동에서 보느냐, 서에서 보느냐에 따라 건물의 형태가 윤곽이 다 달라요. 그래서 그 당시에 세계에서 유명한 건축이라 해서 화재가 됐었어요.
19절에 보면, 천국 말씀도 깨닫지 못할 때,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린 것을 빼앗는 쪽에서 볼 때,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 그런 거 안 믿어도 돼!“ 라는 식으로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그 말, ”그런 거 없어도 돼, 없어도 밥 먹고 잘살아.“ 라는 식으로 보일 때, 그거는 마귀 들린 사람,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간 사람이란 말이지요.
그것도 모르고 여름에 종을 탁탁 치면서 “말씀을 들을 때 마귀가 임하니까 졸잖아. ”이런 식으로 막 종쳐 가지고 “마귀가 내려와서 여러분의 씨앗을 빼앗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좋은 방법 있습니까? 정신 차리세요.” 이래요. 정신 차리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안 빼앗기도록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이 발휘가 돼야 되요. 이것은 씨 뿌리는 내용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정신 차려 이 친구야, 하고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갑니까? 예수님의 피로 가는 거예요? 정신 차려서 가는 거예요? 정신 차려서 가면 다 천국 가는 거예요? 아니, 거지 나사로가 정신 바짝 차린 모양이라,
그러면 방금 한 말을 더 알기 쉽게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MBC 월화드라마에 ‘마의’라는 드라마에 말 고치다가 사람 고쳤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의 솜씨가 말만 고쳤다고 주변에 있던 그 당시의 소유 권세 잡은 의사들이 무시한 거예요. 그러면 이 백의성이란 사람에게 온갖 난치병이 다 주어져요. 그런데 백의성이란 이 주인공이 그 병들을 다 고쳐내요. 보통 한의학은 탕으로 하던지, 침 꽂아서 고치는데 이 사람은 직접 외과 술을 해서 난치병을 고쳤다 말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이 백의성이란 사람의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건 뭐든 다 고치니까 능력이 한정 없이 나오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 30배, 60배, 100배가 되는 거예요. 중국의 유명한 의사 환토라 하는 신화적인 존재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 드라마 보면 저 사람 환생한 존재가 아닌가, 어떻게 환토가 환생했구나, 우리가 못 고치는 걸 어떻게 다 고치느냐, 그게 30배, 60배, 100배예요.
그렇다면 진짜 옥토라는 사람은 자기 몸을 바치니까 자기 몸을 가지고 자기는 자율성이 없지요. 그럼 이 비유를 주신 말씀을 주신, 예수님의 자율성만 있을 게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나한테 60배, 30배 한다는 말은 나를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30배 60배 건진다는 말이 아니고, 하늘의 말씀의 능력이 다른 게 아니지요. 죄인도 구원받는다는 거 아닙니까? 그 능력이 그 사랑이 그 자비가 30배 60배 마구 쏟아질 때, 그게 옥토가 된다는 거예요.
아까 커피 끓여주셨잖아요. 커피기계 있지요. 커피 맛있게 먹었잖아요. “커피 만드는 기계야, 니 참 기특하다!” 이러면 커피기계가 “난, 자율성 없어요.” “니 한테서 분명히 맛있는 커피가 나온 것은 사실이잖아.” 할 때, 커피재료주고 전기에너지 꼽으니까 그리고 그런 구조를 만드신 분이 따로 계셔가지고 맛있는 커피가 나온 거지요. 재료주고 모든 손질도 그 분이 하신 거고. 나는 그냥 껍데기에 불과한 거죠. 이게 옥토에 뿌려진 씨의 열매입니다. 그게 바로 옥토가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중간에 옥토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갑자기 뭘 발휘합니까? 자율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뭘 발휘해요? 자율성을 발휘하는 겁니다. 말씀 좋아! 말씀 좋아! 하다가 갑자기 어떤 환난이 임할 때는 “아이고, 내가 말씀 따라 가다가는 내가 이거 손해보고 저거 손해보고 친구 떨어지고 안 되지 안 돼!” 갑자기 자율성이 발휘되지요.
그런데 30배, 60배 이건 뭐냐 하면, 말씀 자체에 대해서 전혀 말씀을 가로막거나 훼방하거나 할 수 있는 자율성이 나한테는 없고 말씀이 말씀대로 그냥 완전하게 드러나는 거죠. 앞에 있는 처음에 그 길가 밭도 자율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자율성이 없는 그 씨앗을 누가 가지고 갔습니까? 마귀가 와서 가지고 가버리니까 말씀을 증거 하는 사람이 아니고 말씀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를 보여주는 ‘나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간입니다.’ 하는 걸 보여주는 그게 바로 길가에 떨어진 사람이에요. 길가에 떨어지나 바위 돌밭에 떨어지나 열매 없음은 똑같은 거예요.
지난 화요일날 정 석훈 목사님을 만나가지고 정 석훈 목사님이 지금 박사과정을 밟고 있어요. 그 학교가 있어요. 학교 수업을 받고 있는데, 교수들이 기겁하는 거예요. “또 너냐, 질문해서 수업분위기 다 흐린다. 또 너냐?“ 하는 식으로. 그 어떤 교수가 씨 뿌리는 비유를 하더란 말이지요. 그 사람이 씨 뿌리는 비유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돌밭에 떨어진 사람은 마귀가 쫒아오고, 환난이 오게 되면, 환난을 이겨야 되고, 재리를 이겨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정 석훈 목사님이 “열매 없기는 마찬가지 아닙니까?” 열매 없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예를 들어서 환난을 이겼더니만 열매가 맺혔다 하면, 그 사람 말이 맞을 수 있는데 옥토는 그냥 옥토지, 환난 거쳐서 옥토 되지 않고 가시덤불 거쳐서 옥토 되지는 않아요. 왜냐, 밭은 그냥 씨 뿌린 대로 거둘 뿐이기 때문에 자기가 중간에 조작할 수 있는 어떤 여지가 전혀 박탈된 상태입니다. 이걸 보면, 얼마나 교인들이 목사들한테 또 속아 넘어가는 것을 또 알 수 있겠지요. 말씀위주로 봐야 되는데 자기 구원 욕구 위주로 봤기 때문에 그런 속임수를 들어도 싸지요. 그런 속임을 당해도 마땅합니다. “내가 나에게 어떤 스스로 관리하고 내가 어떤 자유를 관리하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하니까 그게 처음부터 그게 안 맞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 11절을 보면,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됐지요. 그러면 천국은 누구만 간다는 말입니까? 천국의 비밀이 허락된 사람에게만 간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서 허락 없이는 아무도 천국 비밀을 감추어져있다, 이 말이거든요. ‘감추어졌다.’ 라는 말은 니 식대로 오지 말라는 뜻이에요. “천국 가겠습니다.” “오지 마!” “가겠습니다.” “오지 말라니까.” “허락이 없어도 가겠습니다.” 허락이 없으면 안 돼요. 아버지께서 내게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게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천국에 가있잖아요. 그 사람들은 다 허락돼서 간 사람들이에요. 아들 받쳐서 간 게 아니고, 십일조 바쳐서 간 게 아니고, 아니 십일조하고 구원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하도 기가 차서. 이 세상에 십일조 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십일조는 예수님만 했고 아무도 십일조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목사는 교회에서 시키잖아요. 하면 된다고. 아닙니다. 십일조는 할 수가 없어요. 의와 인과 신을 보태서 할 수 없다 말이지요. 왜? 내면에서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고, 아까워라, 십일조 없는 교회 가야겠다. 아까워서 못하겠다.’ ‘그리고 나는 십일조 안 해도 돼!’ 이것도 십일조 한 게 아니에요. 왜냐 하면, 돈 안내도 된다는 것이 좋아서 미소 짖는 것이지 ‘나는 말씀만 있으면 돼’ 라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다, 말이지요.
허락이 있어야 됩니다. 누구 말대로 사회자 말대로, 부탁해요! 제발 믿으세요. 허락이 떨어져서 믿게 된 거예요. 오라해서 성령이 오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가야될 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알아서 오신 거예요. 노크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그냥 쳐들어 온 거예요. 압수당한 겁니다. 차압당한 겁니다. 쳐들어오신 거예요. 꼭 여리고성 무너지는 것 같아. 내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어요. 언약궤 중심으로 들어온 그 나팔소리에 주의 복음의 해방의 소리에 우리의 철옹성 같은 나의 여리고성 이중벽이 그 소리 듣고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이제는 벽이 없습니다. 주님은 허락도 없이 마구 들락날락 이에요. 그걸 가지고 사도바울은 나는 죽었다, 하는 거예요. 이제 여리고성은 내 성이 아니고 나는 이미 죽은 거고 내 여리고성에 살아계신 것은 우리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다, 하는 것은 그 주인이 바뀐 거예요. 점령군이 바뀐 거예요.
사람은 그게 안 되면 성령 안 받으면 뭐든지 좋은 것은 다 집어서 자기 스펙해서 나는 한평생 이렇게 신앙생활 잘했고 모종 심듯이 다 모아놔요. 집에서 화초 가꿀 일 있습니까? 채소심고, 시금치 심고 부부싸움해서 가스 터져서 불나 보세요. 채소 가꾼 거 한꺼번에 다 날아가요. 하나님께서 미리 불내버려요. 미리. 장차 불 심판 날 때 불나지 말고, 미리 주님이 들어 닥칠 때, 홀라당 다 타버려라,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는 무서운 고발의 말씀입니다. 참 무서워요. 뭐가 무서 우냐, 주님은 날 사용하되 내 소원과 내 뜻과 무관하게 난입해서 쳐들어와서 그냥 허락 없이 내 사정 두지 않고 그냥 사용해 버립니다.
요한복음21장 21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지금 베드로가 질문을 안 해도 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앞에 있는 말이 뭐냐 하면, 베드로 니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할 때, 이것은 1초도 안 걸려 튀어나온 것이 ”그러면 재는 어떻게 됩니까?“ 사람은 평소에 이렇게 삽니다. 말씀위주가 아니고 저 놈한테는 지기 싫은 거예요. 저 놈보다 출세하고 싶고, 타인이 없으면 자기가 규정이 안 되는 거예요. 주님으로서는 그 타인을 세우지 말고 그 자리에 나를 세워라, 십자가에서 죽는 나만 보고 나를 보면서 주님가신 길은 이 길인데 나는 그 길을 갔다, 이걸 기뻐해야 될 건데 베드로가 그렇게 이야기해놓고는 ”제는 어떻게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