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정의 130217
하나님의 정의 130217
이름 : 이근호(IP:119.18.69.144)
하나님의 정의 (합 1:12-13)
이근호
13-02-17 15:46
하나님의 정의
2013년 2월 17일 본문 말씀: 하박국 1:12-13
(합 1:12, 개역)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합 1:13, 개역)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라는 말은 하박국 선지자가 했을 경우와 신약 때, 예수님께서 직접 하실 때,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만은 의인이고 우리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니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로부터 모진 수모를 당했구나.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필히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 안믿는 자를 벌하시겠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아닌 일반인이 이 “악인이 의로운 자를 삼키는데도 왜 하나님은 잠잠케 하십니까”라고 말한다면 단박에 여러 사람들이 비난하기를 “네만 의인이야? 우리는 졸지에 죄인들이야?”라고 나올 겁니다.
이야기가 복잡해 것이 뻔합니다. 왜냐하면 서로들 각자가 의인이라서 주변 죄인들로부터 고생당한다고 우기고 나올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두 가지 위치에서 해석을 해야합니다. 하나는 예수님 위치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하박국의 위치에서입니다. 이 하박국의 위치가 오늘날 우리가 품고 있는 위치이기도 합니다.
먼저 예수님 위치에서, 이미 하박국이 요청한 이 기도가 결말을 보았습니다. 요한복음 3:35-36을 보게 되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준비된 하나님의 복수입니다. 의인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니 이 의인을 유일한 의인이라고 믿지 않겠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인됨을 사수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이런 자를 향하여 가차없이 저주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신나는 소식입니다. 문제는 본인이 과연 예수님 믿는이기는 하냐입니다.
이 사실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오늘 하박국 본문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 하박국의 위치에서 선지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벨론 나라 악인들이 유대 나라라는 의인들을 치는데도 불구하고 정의로운 하나님께서 보고만 계시는가 하고 탄식입니다. 이것은 그동안 ‘하나님만 믿고 기다리자’라는 신조를 제고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디에서 문제라고 예수님과는 다른 건가요? 그것은 인간들이 자기 영역과 외부 영역을 구분지어서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들은 모두 각자의 성채를 갖고 있습니다. 날마다 성 밖을 탐색하고 주시하고 살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 안에 있는 것들은 당연히 의인이 되고 성밖은 당연히 악인이 됩니다.
즉 인간은 자기 외부에 있는 것들은 일단 자신을 공격하고 빼앗을 적으로 간주하고 자기를 굳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외부에 여전히 자기와 마음 맞는 천사같은 자들이 남아 있다면 이로 인해 자기 성채의 영토는 미-완성채 채로 운영되어 항상 미완료에서 오는 불안정감에 휩싸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이야 어찌 되었던 ‘오늘은 일단 자신의 영토는 이것까지’라는 확정성을 마련해야 마음에 안정감이 생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외부를 살핍니다. 이렇게 되면 외부란 단지 나의 내부를 다지고 또 다지기 위해 연료와 재료를 공급하는 장소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외부의 악한 것들은 착한 나의 내부를 위해서 들여다놓고서는 내 식으로 교정을 하려고 합니다.
하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 나라는 뭐라해도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유대 나라를 삼키려고 오는 저 바벨론은 뭐래도 악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상주해 계신다는 이 유대 나라가 저 바벨론 제국 앞에서 풍전등화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응답하실지가 궁금합니다. 하지만 문제 제기가 상황을 해석하려하는 하바국의 입장에서 나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악인과 의인의 구분을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정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새로운 골칫거리로 등장합니다. 하박국의 기도 가운데서 나름대로 악인과 의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나옵니다.
하박국 1:15-16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가 낚시로 모두 취하며 그물로 잡으며 초망으로 모으고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즉 바벨론 제국은 주변 국가들은 마치 낚시하듯이 침범하면서 자신들이 믿던 신에게 전쟁 무기를 향하여 복을 주도록 계속 제사하고 분향을 해 온 것입니다.
하박국과 유대 나라 백성의 상식으로는, 우상에게 절하고 제사하면 아무런 효험이 없고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기도하고 제사해야지만 효과가 일어난다고 여기는데 현실 속에는 도리어 정반대 상황이 되어버린 겁니다. 바벨론이 가짜 신들에게 제사하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패배해야, 참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일하신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 아니냐 고 하박국은 따지고 나서는 겁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비-신앙적이고 미신적으로 자기 종교들을 섬기며 집안이 왕창 망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런 불신자들의 자기 종교 실적이 바른 복음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것까지 빼앗는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겁니다. “역시 내 종교는 기도 응답 효과가 있어”라고 즐거워하면서 말입니다.
바벨론의 종교 행각이 원인이 되어 그들이 끌어들이는 소유물과 재물이 날마다 충족해지고 여유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의 소유로 전환된 것들 중에는 자칭 의인이라고 여기는 유대 나라의 물건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 하박과 유대 나라입장에서 해석이 난감해져 버린 겁니다.
하박국은 약이 올라있습니다. 적들의 번창으로 인하여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다시 봐야 합니다. 행여 우리 자신의 영토가 바벨론이 쳐들어 오기 전에 이미 바벨론화 되어 있지 않나를 살펴봐야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의 종교 행각이 원인이 되어 우리도 의인이라고 행세하고 싶어하는 증거 확보에 나서지 않았는가를 말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영생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이 영생과 저주를 가름하는 기준이니 우리는 예수만 믿으면 모든 축복을 다 받고 누리는 것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늘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2-19 17:05
3강-합1장12-13(하나님의 정의)1302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 하박국 1장 12절에서 1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1302페이지입니다.
하박국 1:12-13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방금 보았던 이 말씀을 하박국이 이야기했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해가 쉽게 됩니다. 아! 예수님만 의인이고 그리고 예수님을 미워하고 안 믿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우리는 별 애로사항 없이 쉽게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이 했다고 하지 않고 하박국이 했다고 한다면 문제는 대단히 복잡해집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지를 제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했다고 친다면 예수님의 요한복음 3장 3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동일하죠. 사람은 나이 앞에 누구나 공평합니다. 죽음 앞에 누구나 공평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언젠가 ‘인간은 흑판이다.’ 자기 색깔 없이 다 시커먼 흑판이라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옳다는 증거가 바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가 있다.” 아들이 등장해서 새롭게 판정을 내리게 되면 비로소 자기의 진짜 색깔을 예수님 때문에 발각되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이 오지 않고 예수님을 밀쳐 버리면 전부 다 자기 색깔, 자기 소리, 자기 주장, 자기 자존심만으로 ‘네가 옳다, 내가 옳다.’ 이렇게 내세우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 잠시만 와 보세요. 잠깐만 와 보세요.’ 하고 예수님 부르는 순간 우리는 나로부터 출발했던 그 기준들은 다 묵살 당합니다. 다 소용없는 거예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그러니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일한 모든 취지가 이 말씀에 다 담겨있는데 저주 받을 거라고 장담했던 간통한 여인, 창녀, 세리, 삭개오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지옥 간다고 단정했는데 막상 ‘예수님 잠깐 이리 와 보세요.’ 하고 예수님을 불러서 판정을 내려 보니까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강도, 그런 사람들이 “오늘밤에 낙원에 있으리라“ 이렇게 됐다 이 말이죠.
요한복음 8장에서 바리새인들이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누가 봐도 이 사람은 돌로 쳐 죽인다. 생각하고 ‘예수님 잠깐 이리와 보세요.‘ 하고 ’이 여자 같이 칩시다.‘ 할 때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거든요.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가 이 여자에게 돌로 쳐라” 그들은 새로운 기준 앞에서 그들은 가버렸죠.
다시 한 번 우리는 요한복음 3장 36절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란 그 말 앞에는 인간의 모든 행동의 됨됨이라든지 인격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는 그거는 인간들끼리 지 맘대로 심판할 자격도 없는 것들이 같은 피고 주제에 피고끼리 자기들이 재판장이 된 그런 꼴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이상스럽게 말려들었어요. 말려들어도 너~무 말려들었어요. 이런 우리 인간 바꿔야 돼요. 누구한테 ‘바꿔줘’ 할 수 없지만 우리는 너무나 거기에 익숙해지고 오히려 예수님의 기준은 낯설어하고 이 세상 기준은 우리가 흡족하게 동의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외부가 일단 나한테 오게 되면 이게 외부에 머물지 않고 어느새 내가 익숙해진 나의 내부로 바꾸어서 왜곡해서 엉터리로 조작해서 내 마음에 드는 예수로 전부 다 바꿔치기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이야기해도 일단 내 내부에 들어오게 되면 전부 다 뭐로 바뀌느냐 하면 나 잘났다는 쪽으로 전부 다 합리화 시키는 그런 재료로 사용해버리고 말았어요. 정작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의 외부로의 심판 주인데, 이제는 자기가 자기를 판정내리는 재판관으로 이렇게 설정돼 있는 겁니다. 이거 기계 고장 났어요. 컴퓨터를 바꾸든지 해야지. 완전히 기계가 망가졌어요.
방금한 것을 다시 한 번 설교하게 되면 예수님 당시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안 믿는 자는 저주가 있다.” 이것은 변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 당시에 하박국 이야기를 했다면 오늘 본문 같은 경우 13절에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이야기했다고 하면 ‘그래 예수님만이 의인이고 우리는 죄인인데 예수님이 제자한테 당해도 너무 당했구나. 그래 그놈들은 지옥 가도 싸지.’ 이렇게 되는데, 이것을 예수님 오시기 600년 전에 하박국 선지자가 이 이야기를 했거든요. 하박국 선지자가 할 때는 복잡해지는 겁니다. ‘너만 의인이냐? 그럼 우리는 의인 아니란 말이냐?’ 이런 문제들이 있어요.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도 오해해도 아주 많이 오해한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건 어렵더라고 이제부터 좀 여러분들이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바깥, 그걸 어렵게 외부라고 하는데, 인간이 바깥을 바라보게 될 때 그냥 바깥이라 하지 않고 나의 바깥으로 보는 거예요. 요거까지는 내 영역인데 저거는 내 바깥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 마음속에 창문이 있어요. 창문을 빼꼼이 열고 저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가 살피는 겁니다. 그 순간 우리는 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어떠한 장치도 우리한테는 없다는 것이 들통 나는 거죠.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옛날 사람들은 성에 갇혀 살았잖아요. 스스로 성을 짓고 성 안에 갇혀 살고 항상 파수꾼은 살피면서 이 성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이렇게 살피는 거예요.
그 바깥에서 있는 것은 무조건 내 안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무조건 이게 적이 되고 그들은 악인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뭐가 되느냐 하면 의인이 돼요. 그런 입장에서 이 본문을 보시게 되면 “하나님이여 어떻게 악인들이 자기보다 의로운 의인을 치는데 왜 하나님은 잠잠하시나이까?”라고 묻는 그 취지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을 우리말로 바꾼다면 ‘하나님이여 저 착한 줄은 하나님께서 아시죠? 그런데 어떻게 이 착한 나의 영역이 바깥의 악한 인간들로 인하여 그렇게 시달리도록 왜 하나님은 그냥 방관만 하십니까? 좀 손 좀 대주시고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과연 이 주장이 옳은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이 주장의 문제점의 근본적인 것은 나와 하나님이 같이 있다고 할 때는 그 말이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고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내 성 바깥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 성을 허물기 위해서 왔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의인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악인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악마로 볼 것이냐, 아니면 천사로 볼 것이냐, 하는 그 문제가 발생돼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그 귀한 말씀을 아무리 나한테 적용시키고 적용시켜도 적용시키면 시킬수록 점점 더 바깥에 계신 하나님을 방치하는 게 되는 겁니다. 적으로 간주하는 바가 돼요. 그러면 여러분, 속으로 물어봅시다. 우리 바깥에 계신 하나님께서 등장할 때 우리의 천사의 모습으로 왔겠습니까? 우리의 원수로 왔겠습니까? 이건 여러분 답변 들으나마나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로 보이는 거예요.
그 일을 누가 잘했느냐 하면 고맙게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이 잘한 겁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잘 따르지 않았느냐, 라고 이렇게 지금 반발하고 싶어서 할 거예요. 여러분,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놓은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이 믿음이 아니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12제자들을 뽑아놨어요. 예수님과 가장 근접해서 살아가면서 하는 짓들 보면 예수님 말을 왜 그렇게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는지 그 바로 옆의 제자들을 통해서 우리는 낱낱이 다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니까 자기들은 우쭐댔던 모양이죠. 하늘에서 귀신이 떨어지고 병이 나으니까 저희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제자들끼리 시합 붙어서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겠느냐,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저쪽 세상 사람하고는 일단 우리는 괜찮은데 우리끼리 한번 붙어보자. 세상에서 분리된 자체는 훌륭한 것이고, 훌륭한 우리끼리 누가 더 훌륭한가, 해보자.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어른들이 무시하는 어린아이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깨닫지 못하면 너희들은 하늘나라 갈 수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하늘나라만 쳐다보잖아요. “그들처럼 받들지 아니하면 너희는 영원히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너희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정작 높고자 한다면 내가 마시는 쓴 잔을 마셔라.”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이 무서운 말 이예요. “너희들이 아무리 거부해도 기어이 너희들은 내가 주는 쓴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게 돼 있는 운명이다.” 이렇게 하는 겁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우리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요. 자기 세계가 있는 이상은 항상 내 안에 있는 요 세계와 내 바깥의 세계와 확연하게 우리 스스로 분리를 시킵니다. 분리를 시켜서 저쪽에서 들어올 때 ‘똑똑똑’ ‘누구십니까?’ 하면 ‘나는 당신을 도와줄 사람입니다.’ 하면 문 열어주고 ‘똑똑똑’ ‘누구십니까?’ ‘나는 당신의 죄를 들춰내는 사람입니다.’ 하면 ‘저리 가시오.’ 하는 거예요. 우리가 스스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이상은 그 외부의 천사가 오든 예수님이 오든 누가 오든 우리의 적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6절에 보면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요 대목을 제가 쉽게 말씀드리면 고기 잡는 그물에다 제사하고 기도하는 거예요. 트럭을 한 대 샀으면 트럭 운전대 위에 올라가서 안수 기도를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목사 만나면 우리교인들은 그런 분이 없지만 목사 만나면 주로 마음에 충동을 느끼는 것이 ‘목사님 안수 기도 해주세요.’ 하는 거예요. 어떤 집에 가면 집 잘 되라고 기도해주시고 가게 하면 가게 잘 되라고 기도해주시고, 그게 16절에 나와 있어요.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제사 드리니까 여기에 그것이 원인이 돼서 어떤 결과가 나느냐, 소득이 풍부하고 음식물이 풍성케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연하여 늘 열국을 살육함이 옳으니이까” 이렇게 돼 있어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유다나라를 치는 바벨론이 여기 그물이 고기 잡는 그물이 아니고 각 나라 사람들을 잡아 챙기는 그런 인간을 살육하는 그 그물을 말합니다. 전쟁을 하는 것이 어부들이 고기 잡는 취미처럼 전쟁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이 말이죠. 누릴 때 그들이 하는 전쟁 무기에다 뭘 하느냐 하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하고 분향해서 그 제사를 잘 드리면 이번 전쟁에서는 막대한 소득을 얻고, 제사를 허술하게 드렸다 하면 전쟁에서 부실한 실적을 올린다. 라는 식으로 지금까지 실제로 그런 식으로 주변나라를 잡아먹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분명히 그들이 엉터리 같은 생활, 뭔가 제사 드리고 자기의 복을 빌게 되면 하나님께서 복 주실 것이라는 것은 분명히 엉터리 신앙인데, 여기 하박국이 헷갈리는 것은 그게 분명히 엉터리 방법이고 엉터리 방식인데 아니 결과적으로 그 방법으로 일이 잘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 하리요? 우리가 거기서 무슨 토를 답니까? 결과 가지고 이야기를 하자 말이죠. 얼마나 믿음 있느냐, 진리냐, 정의냐, 그런 추상적인 관념은 다 빼버리고 결과로 이야기하자. 예수 믿고 집구석 잘 됐느냐, 그 결과로 이야기하자. 어느 교회 다니면 집구석 잘 되고, 아이들 공부 잘 하느냐, 결과로 이야기하자 이 말 이예요. 여기에 대해서 하박국이 헷갈리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해볼게요. 아까 어떻게 악인이 의인을 치는데도 왜 참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이야기하면 우리가 납득이 된다 이 말이죠. ‘그래, 예수님만 의인이고 우리는 악인이니까 예수 믿으면 영생이고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 납득이 되는데 이게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하박국이 이야기를 했을 때 하박국이란 인간 그 자체적인 신앙적인 한계, 세상 보는 안목, 이게 부실하니까 이제 제한적이고 한계적이니까 하박국이 지금 헷갈리는 거예요. 분명히 갈대아는 마르둑 신을 섬기거든요. 바알 신을 섬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들의 종교방법은 뭐냐 하면 진짜 하나님께서 알려준 방식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고 부정하는 게 아니고 그저 인간적인 종교적인 이벤트를 벌리면 벌릴수록 점점 더 실질적으로 그냥 말이 아니라 될 것이다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는 승리하고, 승리하고, 또 이기고 또 이기고 그 이김 속에 누가 잠겼느냐 하면 이 여호와 믿는 유대나라, 소위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까지 완전히 거기 그들의 종교적인 수법에 완전히 피해자로서 말려들어갔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만 고수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진 거예요. 뭐 신앙생활을 해도 재미가 있어야 하죠. 기도해도 효과를 봐야지.
제가 지난번에 연이틀 서울에 있어야 돼서 하룻밤 묵게 됐는데 최oo 성도님 집에 갔는데 거기 하은이란 6살 먹은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이 목사님한테 인사하라 해서 같이 오면서 차에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내가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는데도 왜 하나님은 내 기도 하나도 내 기도 안 들어줍니까?’ 라고 질문을 해요. 그래서 양쪽에 있던 부모님이 저 목사한테 당황하게 할까 싶어서 자기가 대신해서 복음적으로 이야기를 해줬어요. ‘얘야 우리의 기도는 전부 망하는 기도고 마귀가 좋아한다.’라는 식으로 하니까 내가 오히려 뒤 수습을 할 판입니다. 어린아이한테 세상 멸망 이야기하면 트라우마 생기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줬어요. ‘얘, 하은아, 네가 지금 기도했다고 하지만 너보다 착하게 기도해서 먼저 예약한 애가 한둘이 아니다. 그 애들이 복 다 가져가서 너한테 남겨줄 게 없어서 은행에 대기표 뽑듯이 먼저 앞서서 다 뽑아가 버리니 복이 남겨줄 게 없다.’ 이런 식으로 제가 답변을 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 하면 부모가 먼저 불을 가져왔기 때문에 나는 일단 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어린아이는 자기 내부 빼놓고 외부는 다 적 이예요. 외부는 잡아서 내부에 오게 되면 성공 이예요. 그것 때문에 기도하고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거예요. 하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유대나라는 하나님이 기본적으로 지켜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하박국 신앙 이예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그런 문제를 하나님께 발생을 시켰습니다. 왜 분명히 우리는 의인이고 바벨론 사람은 적인데 어떻게 적이 그냥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방식을 사용했더니만 그 방식이 나쁘다고 철석 같이 믿고 있는 우리가 오히려 그들에게 당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믿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왜곡되게 정리될 게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신앙생활 자체가 이게 무너질 판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 신앙을 이렇게 하나님 쪽에서 흔들어 댈 수가 있습니까? 라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흔들려야 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내부적인 혁명을 원합니다.
모든 인간의 역사는 혁명과 혁명으로 연결돼 있어요. 혁명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 게 혁명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내부 개선과 내부 환경을 자꾸만 선한 쪽으로 의로운 쪽으로 바꾸려고 시도하기 때문에 과거에 실패한 것을 감안해서 빨리 만회하고 싶어서 급작스러운 조치를 간구하게 되고, 거기에 하나님과 협조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협상을 이렇게 시도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심사가 뭐냐 하면 내가 치사스러운 과거, 부끄러운 과거를 하나님 이름으로 어떻게 만회할 수 있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여기에 자기 생각에 몰두해서 뭘 하느냐, 우리는 외부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우리의 성 밖에서 우리보고 전쟁을 벌이시려고 쳐들어오시는 하나님입니다. 로마서 5장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라 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찾고 기도함으로서 어떤 기대를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금 너를 침범하고 삼키러 오는 갈대아 사람들이 평소에 했던 그 짓이라는 거예요. 너희들은 갈대아 사람을 여호와 안 믿기 때문에 나쁜 사람, 우리는 여호와 믿기 때문에 좋은 사람, 라는 식으로 안과 밖을 구분했지만, 막상 그들의 큰 파도에 한번 휩쓸려봐라. 그러면 평소에 내가 바르게 하나님 믿고 살았다 하는 이것이 얼마나 나 위주로 살아왔는가가 들통 날것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미리 결론부터 먼저 사실 제가 내렸어요. 그게 뭐냐 하면 벌써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 나오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저주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싶은 거냐 하면 예수를 믿는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예수를 잘 믿는 나를 대적하는 자는 저주가 있다는 식이 바로 우리가 안 깨어지고 있는 우리의 단단한 우리 자아성이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질투와 질투의 연속, 그리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속이 아파서 속이 쓰려가면서 우리는 눈 뜨고 못 보는데 그러면서도 그걸 통해서 우리가 만회하려고 혁명적인 것, 제가 혁명이란 말을 사용했지만 사실은 교회서 쓰는 말은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서 진짜 깜짝 놀랄만한 혁명적인 일이 벌어져서 나의 찬란한 역사가 주의 혁명으로 말미암아 멋들어진 역사로서 계속 진척을 보이게 하옵소서. 하는 그런 생각. 그것이 바로 하박국이 생각했던 그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적할 때 지적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을 가지고 우리가 그한테 된 통으로 당하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아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서 믿음이 아니라 했죠? 심지어 베드로보고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했고 예수님 면전에서 주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하여튼 주님과 제자들 사이가 만만치 않아요. 도대체 뭘 노리고 싸운 싸움인지, 인간들이 자아 깨기는 이건 자아 깬다는 자체가 인간에게는 도저히 성사될 수가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기어이 바꿔서라고 천국의 사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희들 눈에 보기에 나빠 보이고 그리고 이상한 종교라고 보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서 그게 더 효과 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믿는 우리가 그들 보고 약이 올라서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스러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우리는 약 올라 미치는데 그게 축복이래요.
다섯 번째로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 다시 보시면 항상 이야기가 우리는 빠져요.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예수 믿지 않는 자는 저주 있잖아요. 그러면 진짜 성도라면 이야기 깔끔하게 마감됩니다. 나 안 믿고, 나 역사 안 믿고 혁명적인 나의 멋진 나의 역사 생각 안 하고, 뭐만 믿으면 되는 겁니까? 예수 믿으면 되는 거예요. 참 쉽죠? 정말 얼마나 쉽습니까? 예수 믿으면 창녀라도 강도라도 도둑놈이라도 어디 간다? 영생의 나라에 가는 겁니다.
우리는 제가 이 말 하면 익히 아는 말이고 늘 상 들어왔던 말이고 수천 번 들어왔던 말인데 이게 나의 외부에 내 세계 때문에 들어오면 전부 다 왜곡되었어요. 정작 그 말씀 그대로의 찌릿한 그 내용대로 이게 안 들어와서 그래요. 냉장고에 한 달간 묵혀놔서 맛이 하나도 없어요. 나라는 냉장고에 음식을 너무 오래 놔뒀어요. 그때그때 먹어야 되는데, 안 먹고 놔둬서 고추도 다 얼고 과일이고 고기고 다 상했어요. 주의 말씀이 생생하게 다가와야 되는데 이상하게 나라는 냉장고에 들어오면 이 냉장고가 전기가 끊어졌는지, 정전됐는지 썩어문드러져서, 예수? 쓸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까 예수가 예수 믿는 우리한테 아무 쓸모없는 예수로 전환되는 거, 이 기괴한 현상! 그래 놓고 짜증은 왜 그렇게 내는지, ‘주여, 왜 주님은 안 도와주십니까?’ ‘뭐?’ ‘왜 안 도와주십니까?’ ‘뭘 도와주는데?’
예수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안 믿는 사람은 저주 있다. ‘저 사람은요?’ ‘저 사람은 저주 받는 거야.’ 이 맹희는요? 이 맹희고 이 건희고 전부 다 소송하라고 해. 그들은 다 저주받을 사람들 이예요. 왜 그것을 부러워합니까? 우리가 하박국입니다. 아직도 이런 탄식뿐입니다. ‘하나님이여 어떻게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인 나는 못 됩니까?’ 맨날 이런 식의 호소, 주께서는 미리 성경에 담아놨습니다. 그들의 방식은 그들이 사람을 낚아챌 때 필요한 그물에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거기다 제사하면 그 제사 잘 드린 효과로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해지고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다. 라고 우리한테 살살 약을 올리는데 그 배후에는 우리 자비로운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셨습니다.
진짜로 예수 믿으면 영생 얻는 걸 믿는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진짜로 예수 안 믿으면 진짜로 저주 받는지, 주께서 이 말씀 집어넣으려고 미리 하박국을 600년 전에 세운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는 걱정으로 세월 다 보내고 심신이 나약해지고 약해져서 주 앞에 짜증만 더하는 저의 모습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변치 않는 것은 우리 예수님의 약속뿐이오니 이제는 내 약속 내 계획보다도 주의 약속이 우세할 수 있는 그러한 우리 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